|
출처: 원불교 중앙교구 교화못자리 원문보기 글쓴이: 이성도
녹타원 조 효경 교무 교화이야기
5. 흑석동 개척교당 교무로
흑석동에서 방배동으로 옮겨 이름을 관악교당으로 또 다시 방배교당으로 명칭 변경한 방배교당 33주년에 써낸 글 속에 이때의 생활을 살펴 볼 수 있어 여기에 옮긴다.
“흑석 선교소에서 관악교당으로, 방배교당으로…
지금 생각하면 아무리 내게 젊음이 있었다지만, 이름이 두 번이나 바뀌는 과정 속에서 집을 두 번이나 신축하고, 혼자의 몸으로 청소년 교화와 일반교화를 어떻게 그렇게 다 할 수 있었던가 싶기도 하지만, 어찌 혼자였겠는가. 법신불 사은님의 가호하심과 곁에서 음으로 양으로 도와준 소중한 인연들의 합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알기에 참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원기 56년 출가식 후 첫 부임지로 승타원 송 영봉 종사님을 모시고 남한강 서울회관 신축문제로 어려운 경계를 겪는 초타원 백 상원 교무님과 함께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던 원남 교당이 나의 첫 교화장이긴 하지만, 흑석 선교소(방배교당의 전신)는 나의 교화의 첫 무대라고 볼 수 있다. 흑석 선교소에서 나의 첫 주임교무 출발은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우연히 열리게 되었다. 그동안 부교무로 타력에 의지하며 살던 어느 날 상산 박 장식 종사님과 승타원 송 영봉 종사님, 그리고 초타원 백 상원 교무님이 미국 개척 교화장으로 떠나셔야 될 상황이 되었다. 인사기가 이미 지난 후인지라 김 법연교무와 나의 거취가 애매하게 되었고, 원남 교당 조 진숙 교도의 남편 사갑기념으로 쾌척해 준 145만원으로 서둘러 흑석동에 전셋집을 얻어 원불교 흑석 선교소 간판을 내 걸고 나와 김 법연 교무가 함께 부임을 하게 된 것이다.
원기 60년 6월 내 나이 30살 되던 해였다. 원남 교당에서 함께 와준 김 현덕, 고 홍서옥, 이 윤정 유태연님 등 10여명의 교도와 함께 6월 17일 첫 법회를 본 후 교화를 시작하였다. 조금씩 늘어나는 교도들로 재미가 붙어 가는데 전세로 들어 있던 집이 팔리게 되어 마땅하게 법회 볼 장소가 없어 급하게 반포 아파트에 근접해 있는 이수교 근처에 대지 50평을 구입하고 법당과 생활관을 신축하기 위해 원남 교도를 중심으로 인연을 찾아 김 현덕 교도님과 얼마나 열심히 권선을 다녔던지 김 현덕님의 발톱이 빠질 정도였다. 모든 정성을 다해 거룩한 신축 불사를 이룩하고 62년 7월 17일에 봉불식을 하며 교당 이름을 관악 교당으로 바꾸게 되었다. 지금은 서초구이지만 당시에는 관악구에 있는 교당이었기에 그랬던 것 같다. 김 법연교무와 친 자매처럼 교화를 하다 교단의 인사 방침에 따라 김 법연교무는 강화교당으로 부임하고 혼자 청소년 교화와 일반교화를 해 나가게 되었다.
주변에 학교가 있고, 인구가 모이는 지역적인 특성과 함께 사은님의 도움으로 나날이 교화가 발전이 되니 교화공간이 협소해 넓은 공간의 교당 신축이 절실하게 요구 되었다. 마침 부동산 소개업을 하던 정 도권 교도님의 소개로 지금의 방배 교당 부지를 매입을 하고 설계를 하고 건축회사에 견적을 받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논의 끝에 평소 건축업을 하였던 박 홍렬 교도와 김 건희 교도의 감역으로 직영을 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교당 신축 과정 중에서도 모든 교도들이 일심 단결하여 희사계를 짜는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이 경천 교도님이 1번을 하겠다고 자청을 하니 모두가 감동을 받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개인과 교화단과 단체들이 서로 합력하여 24개 희사계를 모두 들어 주어 신축금 조달에 큰 무리가 없었다. 이때 유 태연 교도님은 아이들 돌 반지 20여개를 모두 희사 하는 등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다함께 불사에 동참하는 은혜 속에서 거룩하고 아름답게 불사를 하여 봉불을 하게 되었다.
이때 동 이름을 따서 교당 이름이 다시 한 번 방배교당으로 바뀌게 되었다. 방배에서 잊을 수 없는 인연을 참 많이 만났다. 내가 혼자 몸으로 청소년 교화와 일반교화까지 다 할 수 있었던 것은 재가 교도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 건희 교도님은 회계 등 교당 살림 일체를 돌보아 주었고, 박 홍렬 교도님은 교당 신축 때부터 시작하여 교당의 크고 작은 일들을 세세히 살펴 준 고마운 인연이다. 발톱이 다 닳도록 순교와 권선에 몸을 아끼지 않았고 굳이 교무가 말을 하지 않아도 척척 알아서 일을 보살펴 주었던 김 현덕님을 비롯해, 유 태연, 남 현익, 박 정혜화 님도 잊을 수 없는 인연들이다. 이때는 또 세대별 교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세대별로 친목 모임을 만들어 원목회는 청년 후원, 정진회는 학생회 후원, 연화회는 어린이 후원을 하게 하였다. 자연스럽게 이들이 법연으로 이어지고 교당의 주인으로 성장해가는 결실을 보게 되었다. 내 교화 경험에 비추어 보아 교당의 장단기 교화계획이 실현되어 교당이 발전되고, 청소년 교화에 결실을 보기까지는 10년은 필요하다고 본다.
방배교당 시절에는 365일 기도생활을 하였다. 눈에 무명씨가 박힌 김 주영님은, 남편이 택시 운전을 하였다. 항상 남편의 안전을 위해 기도에 정성을 들이고 교당에 자주 왔었는데, 어느 날은 “교무님 교무님 내 눈이 빠져버린 것 같아요”라고 한다. 눈에 무명씨 같은 흑점이 생겨 수술을 하라는 진단을 받았으나 수술비가 많이 들어 엄두를 못 내고 새벽마다 기도를 올렸는데 그날 아침은 가제 손수건이 흠뻑 젖도록 한없이 눈물이 나더니 그 흑점이 빠졌다는 것이다. 이 소문이 나서 교당에서 기도하면 병도 낫는다 하여 사당동에 사는 교도들이 한동안 교당에 와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법신불 사은님의 은혜와 위력을 입은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145만원 전세로 시작한 흑석 선교소 시절, 좌종장사 등을 통해 교당 재정의 기초를 마련하는 등 그 고초가 적지 않았지만, 묘하게도 장사를 하면 호응이 좋고, 성공을 하였고, 교당 부지를 마련하면 그 곳의 가치가 높아지는 등 운이 좋다고 말 할 수 있겠지만 어찌 운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은혜를 받으며 내 마음에는 어떤 사업이나 교화계획을 세우더라도 내 당대에 끝을 보겠다는 생각은 없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은 교단의 일이고 회상의 일인데, 내가 열매를 거두지 못하면 내 후임이 와서 열매를 거둔들 무슨 상관이랴.
나는 평소 오고 싶은 교당, 만나고 싶은 교무가 되어야 된다는 생각으로 교화에 임해 왔다. 소외된 사람은 없어야 된다는 생각으로 이왕이면 어렵고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더 마음을 많이 써왔다. 교도를 내 사람을 만들기보다는 교무가 바뀌어도 그대로 신심이 변하지 않는 참 주인이 되도록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뿌리 없는 인심을 얻기 보다는 차라리 교무가 외로운 것이 낫다는 생각이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살아온 시절이었던 듯하다. 보람도 많지만 때론 조금 후회가 되기도 한다. 좀 더 주위의 인연들을 챙기고 살았어야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 때문이다. 고맙게도 내가 그다지 챙기지 못했음에도 내 주위에는 소중한 인연들이 많이 있다. 사심 없이 공사에 임해 온 것에 대한 법신불사은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내 젊음의 많은 세월이 녹아있는 방배교당의 나이만큼 나도 나이가 들었다. 건강이 조금 좋지 않음을 느끼지만, 내 건강과 바꾸고 발전하고 있는 교당이 나의 보람이다. 방배교당이 신앙과 수행의 훈련도량, 법신불 사은님의 위력을 확인하는 은혜의 터전으로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방배교당 33주년을 기념하여 써냈던 글이다. 이 시절은 무엇보다 교도와 교무가 혼연일체가 되었고, 교리 강습회를 성타원 이성신 교무님을 모시고 하는 데 법당이 좁아 신발장 있는 현관까지 가득 찰 정도였다. 교화 발전을 위해 더 큰 교당을 신축해야 된다는 의견에 따라 신축을 추진 중에 있는 데 임기가 6년이 다 되다보니 이동을 해야 한다며 총무부에서 이동서를 내라 했다. 교도님들이 그 소식을 듣고 유임하기를 요청하여 유임을 하고 신축 부지를 마련했다. 교도들이 직접 직영으로 짓자 하여 박홍렬, 김건희 교도가 건축 감역을 하며 일일이 건축자재를 구입하여 교당을 건축하게 되어 튼튼하고 견실하게 집을 지었고 건축비 조달에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교무가 8년을 살다보니 어린이 출신이 학생이 되고, 학생들이 청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남자 친목모임으로 원목회, 50대 이상의 여자교도 모임으로 정진회, 젊은 여자 교도모임으로 원화회를 결성하여 청소년들을 후원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교화가 자연스럽게 탄력을 받아 청소년교화도 자력을 얻은 듯 했으며 건축하는 과정에서 이웃주민들의 반대로 파출소에 불려 가기도 하고, 감독이 이웃주민에게 얼굴에 손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신축은 순리적으로 잘되었다.
원기 67년도 11월 봉불식을 하게 되었다. 그때 봉불식에는 언제나 법무실장님이 참석을 하셨다. 그런데 법무실장도 못 오신다 하고, 교구장도 못 오신다 하는데 어린 마음에 교도들에게 말 할 수도 없고, 섭섭한 마음에 얼마나 속앓이를 하였던지 봉불식 하는 날 봉안문을 읽지 못하고 울음보가 터져 버렸던 일은 정말 잊지 못할 사건이었다. 교단의 흐름상 말로는 다 표현 할 수는 없지만 그때 당시 내 어린 마음에 엄청난 피해 의식이랄까 소외감이 깊었었다. 교당 신축이 쉽지 않는 그때 그토록 어린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준 것은 꼭 나만의 상처는 아니었을 것이다. 교도들은 전혀 눈치를 못 챘겠지만 나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아픔이고 상처였다. 봉불식이 끝나니 모두들 나를 보고 작은 거인이라며 칭송과 찬사가 이어졌다. 당시의 설교 한편이 남아 있어 여기에 옮겨 본다.
<깨달은 삶은 어떤가? 늘 깨여있는 신앙인이 됩시다.>
깨여있다는 것은 닫혀있지 않고 열려있으며 꽉 막히지 않고 소통하며 이해하고 용서하고 늘 함께 하는 것입니다. 엊그제는 영산대생이 왔다. 다시 영산을 간다고 해서 20번 시내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준다며 북부시장으로 갔더니 20번이 안 다니는 거예요 정류장에 아주머니께 20번이 어디서 서지요 하니 가르쳐 줄려하다가 봉고차에 원불교라고 써진 것을 보더니 갑자기 돌변하여 원불교인에게는 안 가르쳐 줄꺼야 개종하면 가르쳐 주겠다며 갑자기 쌀쌀해지는 모습을 보고 사람이 어찌 저렇게 될 수 있을까 꽉막혀있는 모습에 너무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철없는 사람 참 불쌍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왕 세상 살면서 지혜롭게 깨어 살면 얼마나 좋을까? 엊그제 한울안지에 경기도 양주교당 장순철 교도는 늘 옷에 원불교 배지를 달고 다니며 자기를 보며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질문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다고 합니다.
배지를 달고 다니면 다른 사람이 그 배지가 뭐예요 보는 사람이 궁금해 묻게 한다. 그러면 원불교 배지구요 원불교의 믿음대상인 둥그러운 일원상입니다. 자연스럽게 원불교를 알리다 보니 연원을 달아 몇 분이 원불교에 나가 주인 되었다 합니다. 또 하루는 친구가 일요일 어디 같이 가자하면 “나는 일요일이면 원불교 법회 보러간다” 하면 “법회에 가서 무엇 하느냐?” 물음에 대답하다 보면 자연 법문을 전하게 되고 “나와 같이 가보자” 하여 안내한다고 합니다. 나는 원불교 다니며 많이 변했다 우리 부부도 전에는 자존심이 서로 강하여 한때 심각했는데 지금은 부인이 교당서 봉공회일하면 밥도 짓기도 한다. 전에 같으면 어림없는 일로 전에는 주로 명령적이고 하늘같은 남편이라고 권위의식이 대단했는데 그 자존심 어디로 보냈는지 자기가 봐도 신기하다.
이종교가 날 많이 변화시켜주었고 대개 아내에게 명령조였고 서로 자존심이 강해 많이 부딪쳤는데 지금은 얼마나 부드러워졌다.
탈렌트 김혜자가 아프리카 다녀와서 책을 썼지요.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집 화단에 호미질을 못 하겠다. 혹시라도 생명이 다칠까봐서. 부처님의 대자대비는 저태양보다 다습고 밝은 힘이 있다 했다. 대각을 하고보면 모두가 은혜 아님이 없다.
어느 교도가정 초등학생 1학년짜리가 아침 일찍 일어나더니 망치로 돌을 깨고 있더랍니다. 엄마가 너 뭐하냐 하니까 “엄마가 늘 도를 깨야 한다 해서 돌을 깨고 있어요.”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돌이 아니고 대종사님께서 깨치신 도 즉 진리를 깨야 한단 말이란다고 했다합니다. 공자께서도 ‘조문도면 석사라도 가이니라’(아침에 도를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지금부터 95년 전 1916년 병진년 4월 28일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20여년 구도일념 끝에 도를 깨달으시고 하신 말씀이 서품1장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道)와 인과 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이 말씀 속에 우주의 진리를 둥그런 일원상으로 형상화 하셨다. 그리고 원기 23년에 일원상서원문을 내놓으셨습니다. 깨달은 내용과 연결 지어서 생각해 보십시다. 그리고 원기 26년에 게송을 발표하셨다. 그렇다면 이 게송이라고 하는 것은 일생의 경륜을 다 정리 하신 후 마지막으로 하시기 때문에 그 뒤 아무 말도 하실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이미 그것으로써 진리의 법의 도장을 찍었다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그런데 정전 일원상장을 보면 제일 먼저 일원상의 진리를 밝히시고 그 다음에 일원상의 신앙, 일원상의 수행을 밝히셨습니다. 그럼 여기까지 해서 완전히 차례로 다 드러내시고 확실히 진리와의 약속으로서 그 지점까지 도달을 시키는 그런 서원을 시키기 위해서 일원상 서원문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대종사님께서는 원기 26년에 게송을 발표하시고 1년 후인 원기 27년에 일원상법어를 발표하셨습니다. 그래서 경전 편수 때 게송과 일원상 법어의 순서를 바꿔 일원상편을 완성시켰다고 합니다. 게송까지 내놓으시고. 아차 내가 여기까지만 내놓았다가 장차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생길 것 같다는 느낌이 드셨든가 봅니다, 그래서 저는 일원상 법어를 보면서 “깨달음의 삶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성불의 삶이 무엇인가?” 그리고 부처의 삶이란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확실하게 손에 쥐어주시지 않는다면 앞으로 아리송한 도인들이 또는 그 스승을 추종하다가 허망한 꼴을 당하는 사람들이 생길 것 같다는 것을 아시지 않았나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러한 염려가 그야말로 일원상의 진리 신앙, 수행, 서원문에서 모든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정리해서 밝혀 주시고 다시 부처님의 삶의 내용을 6가지로 확실히 밝혀주신 내용이 바로 일원상 법어입니다. 만약에 일원상 법어를 내놓으시지 않으셨더라면 100년 뒤 우리교단이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이런 염려가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마치 옛날 의사들이 하얀 가운만 입고 청진기 하나만 들고 가슴에 다 손을 대고 툭툭 치고 모든 병을 알아내는 시절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러한 일이 불과 수십 년 전 일입니다. 우리의 병 진단에 있어서 환자들이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의 가운과 청진기였습니다. 결국 도포만 입고 죽비 들고 몇 가지 불구를 들고 다니면 도인인체 하는 그러한 것을 미리 예방하신 것이 일원상 법어라고 생각되기에 오늘은 일원상 법어를 하나하나 집어보는 시간을 가져 보겠습니다.
일원상 법어는 대종사님께서 깨달으신 진리의 내용 여섯 가지를 손에 딱 쥐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견성한 이의 삶의 내용은 무엇이냐 그것은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안 이 비 설 신 의 여섯 가지를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쓰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개인의 신앙생활에 수행생활에 있어서 공개적인 건강진단을 받는다면 적어도 교단이 하고 있는 일이 사회적으로 공론의 대상이 되려면 무엇을 가지고 공론화 시키고 건당진단을 받을 것이냐 할 때 저는 바로 대각의 내용 여섯 가지로써 공개적인 진단과 공론의 대상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견성하면 바로 성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대종사님께서는 이것을 철저히 경계하셨습니다. 견성했다고 바로 성불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견성은 진리의 내용을 아는 것이요, 성불의 삶은 마음에 그치지 아니하고 바로 육근의 원만한 사용 바로 이런 것이 성불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대종사님께서 밝혀주신 깨달음 즉 대각이 있게 되면 무엇을 알게 되는가를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원상의 진리를 각하면 첫째는 시방삼계가 오가의 소유인 줄을 알며 이것입니다. 깨달음의 내용 대각의 내용이 무엇이냐고 할 때 시방삼계가 오가의 소유인 줄을 아는 것 입니다. 이것을 참으로 깨쳤을 때 대각한 사람이요. 견성한 사람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어도 경전을 줄줄 꿰고 있어도 깨우침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방삼계가 오가의 소유로 알라하신 것은 우리에게는 너무 큰 세계인 것 같습니다. 즉 우주가 바로 한 집안이라는 뜻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차별 간격을 벗어나 큰 집에 이를 수가 있다는 그 말씀이죠. 정산종사님 생존해 계실 때 어느 날 황주남교무가 종법실 앞을 한참 바라보다가 “여기 단풍나무가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정산 종사님께서 “저기 있어” 라고 하셨어요. 황주남 교무가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으니까 “어디에 있습니까 ?” 하고 다시 물었어요. 그러자 정산종사님께서 “저기 내장사에 있지” 라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다시 황주남 교무 “그것은 내장사에 있지 여기 조실 앞에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라고 하셨어요. 이때 정산종사님이 “사람이 저렇게 속이 좁아서” 라고 하셨다합니다. 그러니까 총부 구내다 밖이다 하는 간격을 벗어나고 보면 시방세계가 바로 나의 집이란 뜻이지요! 시방세계가 오가의 소유인줄 알며 하셨는데 이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한가지 씩 생각해 봅시다.
첫댓글 방배교당 건축에 잊지못할 사건 잘 읽어보았습니다. 이제 편히 쉬시면서 즐겁고 행복한 삶 이룩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