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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5. 묵상글 들 ( 연중 11주 월요일-악인의 악에 말려들지 않는 비법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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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5.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11주 월요일-악인의 악에 말려들지 않는 비법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오늘 주님의 말씀들은 문제적인 말씀들입니다.
악인과 맞서지 말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악인과 맞서지 말고 그에게 복종하라는 뜻이거나
복종까지는 아니고 타협하라는 뜻이라면 아무리 주님의 말씀일지라도
옳은 말씀이라고 할 수 없고 그래서 우리가 따를 수 없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이 말씀은 복종이나 타협의 뜻이 아니라 뒤에 이어지는
말씀들에 비추어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여기서 악인이란 하느님의 뜻에 거역하는 죄인이나
사회 정의를 거스르고 사회악을 저지르는 사람이 아니고
나를 힘들게 하고, 내게 상처와 고통을 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 대해 주님은 맞서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뜻은 맞대응하거나 말려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제가 연예인들이 악플로 인해 불행해지거나 자살까지 하는 것을 볼 때마다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왜 그들의 악플을 보느냐,
보더라도 대응치 않으면 되는데 왜 대응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악플을 볼 때부터 이미 그 악인들의 악에 말려드는 것이고,
한번 대응하기 시작하면 헤어날 수 없을 정도로 점점 더 얽히게 되지요.
이는 마치 쓰레기 더미나 똥 더미에 발을 디디는 것과 같은 것이고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쓰레기 더미나 똥 더미에 발을 디딜 사람은 없지요.
그런데도 악플에 말려드는 것은 왜이겠습니까? 원해서겠습니까?
원치 않는데도 말려드는 거지요.
남이 상처를 줘서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에게 제가 하는 말이
‘준다고 다 받느냐? 좋으면 받고 싫으면 받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인데
그런데도 받는 것은 받고 싶지 않은데도 받는 거지요.
전염병에 걸리지 않고 싶지만 몸이 약하고 면역력이 약해 받듯이
상처나 모욕 같은 것들도 받고 싶지 않지만 약하기 때문에 받는 거지요.
그런데 여기서 약하다면 무엇이 약한 것일까요?
심리적, 정신적, 영적으로 약한 것이며 그래서
심리적으로 약하면 우울증에,
정신적으로 약하면 정신병에,
영적으로 약하면 영혼의 병이 드는 것이고,
종합적으로 한 마디로 얘기하면 사랑이 강하지 못하거나 불완전하여
육체적, 심리적, 정신적, 영적 고통에 약한 것이지요.
그런데 사랑은 또 왜 불완전하고 약합니까?
그것은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사랑하려고 하지 않고,
마치 온실 속의 화초처럼 좋은 것만 좋아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자란 사람은 웬만한 악플에 까딱없습니다.
연예인 같이 인기를 끌고 좋은 얘기만 듣던 사람이 계속 좋은 소리만
들으려 하기에 악플을 보게 되는 것이며 악플에 말려들고 흔들리는 겁니다.
그러니 한 뺨 맞고 다른 뺨까지 맞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
오리뿐 아니라 십리까지 가 줄 사랑이 있는 사람은 악인이 하는 짓에
말려들지도, 대응하지도, 까딱하지도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경지에 도달하면 맞설 악인조차 없게 되겠지요?
내일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을 보게 될 텐데
원수까지 사랑하면 내게는 악인이 아예 없게 되는 거지요.
바라고 요구하는 딱 그만큼이 아니라
바라고 요구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려는 우리가 되라시는 오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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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5.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1열왕기 21,1ㄴ-16
마태오 5,38-42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더 큰 사랑으로
아무리 철학에 문외한인 사람도 이런 말 정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악법도 법이다.”
“너 자신을 알라.”
이런 명언을 남긴 주인공은 기원전 470년에 태어난 대철학자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역사에 길이 남을 대 철학자가 되기까지에는 몇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었습니다.
지식 탐구를 향한 끝없는 갈망, 철학이라는 특정한 분야에 대한 평생에 걸친 한 우물 파기,
선택과 집중, 인간과 세상을 향한 깊은 애정,
탁월한 지적 능력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외에도 한 가지 특별한 요소가 있었으니, 바로 그의 부인 ‘크산티페’였습니다.
그녀는 오늘날 까지도 ‘악처의 대명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습니다.
크산티페의 특징은 입이 거칠고 성격이 포악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현자 중의 현자인 소크라테스가 도대체 왜 그런 여자를 아내로 삼았는지가
무척이나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던질 때 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승마의 전문가가 되려는 사람은 고분고분한 길들여진 말을 타서는 안 됩니다.
그럴 경우 승마 기술의 발전이 없습니다.
그보다는 성질이 고약하고 난폭한 말, 길들여지지 않은 말을 타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친 말을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어떤 말도 잘 탈 수 있기 때문이지요.
내가 이 여자의 괴팍함을 잘 견뎌내다 보면
천하의 어떤 사람도 무섭지 않게 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를 향해 1분에 한 번씩 끊임없이 잔소리를 퍼붓는 부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사람들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도대체 어떻게 살 수가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처음 들으면 시끄러운 물레방아 도는 소리도 자꾸 듣다보면 전혀 괴롭지 않게 됩니다.”
한번은 크산티페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소크라테스에게 퍼부었습니다.
그래도 소크라테스가 천연덕스럽게 앉아있자,
찬물을 한 바가지 떠와서 남편에게 확 들이부었습니다.
갑자기 물까지 한 바가지 얻어맞은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비참하기를 넘어 처절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편안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답니다.
“천둥 번개가 친 후에는 큰 비가 오는 법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중요한 삶의 지혜를 전수해주시는데,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에서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는 것입니다.
악에 악으로 보복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욕설에 욕으로, 주먹에 주먹으로, 복수심에 복수심으로 대응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응할 때 우리가 너무나 잘 체험하며 살듯이 결과는 심각한 상처입니다.
결국 패가망신입니다. 모두가 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따른다는 것, 예수님을 추종한다는 것, 사실 말이 쉽지 너무나 어려운 길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결국 바보천치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길처럼 현명한 길은 다시 또 없습니다.
정말 어렵지만 바보가 되라는 예수님의 권고를 죽기 살기로 따르게 될 때, 그 결과는 잔잔한 평화입니다.
지속적인 마음의 평정입니다.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것입니다.
악이 다가올 때 악으로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내 큰 인내와 내 큰 관대함, 내 큰 사랑으로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분명히 악인을 만납니다.
꼭 악인이 아니어도 나를 분노하게 만드는 악한 현실을 만납니다.
그럴 때 마다 내 선에서 악이 더 이상 증식되지 않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 더 큰 희망, 더 큰 인내와 측은지심으로 악을 억제시키는 그런 노력을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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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5.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1열왕기 21,1ㄴ-16
마태오 5,38-42
살아가면서 자주 발끈한다면?
우리 ‘영성의 수준’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요?
저는 제가 발끈할 때를 돌아봅니다.
타인으로부터 받는, 혹은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반응하고 발끈한다면 딱 저의 수준이 거기까지입니다.
발끈한다는 말은 공격받는 것에 대해 나의 ‘자아’가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큰 개나 큰 물고기와 같은 동물들은 작은 물고기나 고양이가 괴롭혀도 별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수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싸우겠다고 으르렁거리면 비슷한 수준이란 뜻입니다.
만약 우리가 자전거를 배우고 있다면 뒤에서 아버지가 자전거를 잡아주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거센 바람에 두려워하고 길이 울퉁불퉁해서 소리를 지른다면
뒤에서 잡아주시는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자신을 버리고 주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은 세상 것에 두려워 반응하거나 발끈하지 않습니다.
유튜브로만 보았지만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 중의 한 분이 박보영 목사입니다.
그분은 의사를 하다가 모든 재산을 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길거리 아이들을 키우며 목회를 시작했던 분입니다.
그분을 제가 존경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 사건 때문입니다.
한 번은 자신이 키우는 여자아이가 길거리 생활을 다시 하기 위해 가출했습니다.
몇 주 뒤에 아이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통사정하고 다시 다니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목사님을 부르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이가 임신한 상태인데 그 아버지가 목사님이라고 아이가 말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집으로 데려올 때 등 뒤에서 선생님들의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아이에게도 뭐라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이는 죄책감을 견딜 수 없어 목사님의 아이가 아니라 가출했을 때 만난 오빠의 아이라고 실토하였습니다.
어떻게 자신을 흉악한 범죄자 취급을 하며 욕을 하는데 반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자신을 그렇게 만든 은혜를 원수로 갚는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자기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아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영성은 자아를 얼마나 죽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저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발끈하면 나의 영성은 거기까지입니다.
비오 신부님은 사제 서품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몸에 오상을 받으셨습니다.
신자들은 성인 신부님으로 좋아했지만 몇몇 고위 성직자들은 그것을 마귀의 장난으로 여겼고 그렇게 보고하여 교회는 신부님이 신자들과 함께 하는 미사를 금지했습니다.
신부님은 아무 반응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순종하여 혼자 몇 년 동안 미사를 드렸습니다.
이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지만 신부님은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를 받을 때 그분의 자아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분 영성의 수준입니다.
내가 어떤 일에 자주 발끈한다면 나의 수준이 거기까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자주 꾸던 꿈이 슈퍼맨이 되어 하늘을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높이 날아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계속 건물과 산에 부딪혀서 떨어졌습니다.
우리 영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로 오르는 방법은 그리스도처럼 못 박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실 때 참지 못하시고 발끈하셨다면 이 지구상에 어떤 생명체도
생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눈 한 번 깜빡이는 것으로 모든 인간을 재로 만들어버리실 수도 있으십니다.
만약 그러하시다면 그분은 하느님이 아니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되시기 위해 그분은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인간들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 못들에 의지하여 하늘로 높이 들리우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처럼 지상의 어떠한 것에도 반응하는 수준이 되지 말라고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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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5.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서 우리는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불의와 마주합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예수님 말씀이 점점 어렵게 다가옵니다. 불의와 억압이 판치는 세상에서 가진 것 없고 힘 없는 이들은 제 한 몸 지켜내기도 버거운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짓밟히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고, 행여 당하게 되면 되갚아주고 싶어합니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럴 수밖에 없어 보이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영 다른 세상 말씀같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아주 잔인무도한 폭력이 등장합니다. 재산과 권력으로 거칠 것 없는 아합 임금 내외가 포도밭 임자인 나봇에게 저지르는 만행입니다.
아합은 자기 궁 곁에 정원을 꾸미고 싶어 나봇의 상속 재산인 포도밭을 탐합니다. 정상적인 이스라엘 자손이라면 조상 대대로 이어온 상속 재산을 함부로 처분하지 않지요. 아무리 임금이어도 하느님을 경외하고 율법을 존중한다면 이런 요구를 하지 않을 겁니다.
나봇 이야기는 사회 정의와 권선징악의 주제를 숙고하도록 돕는 좋은 텍스트가 됩니다만, 오늘 말씀께서는 저를 다른 길로 이끄십니다.
"그대의 포도밭을 나에게 넘겨주게. 그 포도밭이 나의 궁전 곁에 있으니 그것을 내 정원으로 삼았으면 하네"(1열왕 21,2).
아합 임금의 터무니없는 요구 안에 감추어진 상징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하느님과, 신부인 하느님 백성의 사랑을 노래한 아가에는 "포도밭"과 "정원"의 표상이 풍부히 등장합니다.
"아침 일찍 포도밭에 나가 포도나무 꽃이 피었는지 ... 우리 보아요. 거기에서 나의 사랑을 당신에게 바치겠어요"(아가 7,13).
포도밭은 하느님과 인간이 사랑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되고 성령의 기운이 되는 포도주를 빚는 열매가 맺히는 곳이지요. 그런데 이 포도밭에 이르는 길은 결코 녹록하지 않습니다. 아가의 여인 역시 환희와 상실의 굴곡진 여정을 거쳐 포도밭에 도달하지요. 우리가 걷는 신앙 여정, 인생 여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의 포도밭은 오직 나에게만 속한다오"(아가 8,12).
포도밭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여인,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그녀에게 하느님 외에 다른 주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온전히 소유하고 온전히 속한 관계, 바로 하느님과 당신 백성과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건 악입니다. 도움이나 호의를 가장하고 들어와 비등한 대가를 제시한다 해도 악입니다. 그래서 아합은 하느님에게서 이스라엘을, 그리스도에게서 인류를 분리시키는 악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결국 나봇은 이제벨의 계략과 음모로 스러집니다. 거짓인 줄 알면서도 이에 동조해 무고한 이를 해친 자들은 그것이 충성이라 여길 겁니다. 물론 포도밭도 당장은 아합의 손아귀에 들어가겠지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다시 이 말씀을 마주합니다. 예수님의 요구는 점점 더 구체적이 되어 갑니다. 오른뺨 친 이에게 왼뺨도 대주라고, 속옷 달라는 이에게 겉옷도 주라고, 천 걸음 가자고 강요하면 두 말 않고 그 곱절로 가주라고, 달라면 주라고, 꿔달라면 꿔주라고...
이제 마음 깊숙한 곳에서 질문이 하나가 올라옵니다. "도대체 왜 그래야 하죠?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뭐죠?"
사실 예수님은 그처럼 어려운 요구를 우리에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바로 오늘 말씀 안에서 나봇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포도밭인 우리, 사랑하는 신부인 우리를 지키시려다 무참히 희생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장 비참한 죽음으로 모든 것을 잃은 듯 보였지만, 결국은 부활로써 모든 영혼을 구원하고 차지하십니다! 아합과 이제벨이 피로 약탈한 포도밭을 누리지도 못하고 엘리야 예언자의 전언대로 비참히 생을 마감한 것처럼(1열왕 21,17-26; 22,29-40; 2열왕 9,30-37 참조), 결국 악은 주님 앞에서 패배합니다.
당장에는 무도한 악행과 무죄한 이들의 희생이 전면에 보이지만, 예수님의 희생제사는 그 너머에 무언가 있다고 속삭입니다. 악에 대한 승리와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묵묵히 수난과 죽음의 여정을 걸으신 예수님은 그래서 당신이 아시고 친히 가신 길을 우리에게 권고하시지요. 그분은 그러셔도 됩니다. 충분히 자격이 있으시지요.
사랑하는 벗님! 아까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도대체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뭐죠?"
이 답 역시 오늘의 말씀 안에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영성체송).
그렇습니다! 억울한 죽음으로 목숨을 잃은 나봇은 하늘 나라에서 비옥한 포도밭을 영원히 차지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맞서지 않고, 내어주고, 가 주고, 양보하고, 물러서 준 양선한 이들도 그러할 것입니다. 지상에서건 천상에서건 양선한 이들이 한 평생 살 주님의 집은, 주님과 나누는 뜨거운 사랑이 포도주로 빚어지는 아름답고 평화스런 포도밭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그 사랑에 취해 행복하지요.
이제 예수님의 요구가 강요 아닌 초대로 느껴집니다. 주님과 나의 사랑의 포도밭을 지키는 일 말고는 과감히 내려놓고 내어 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요. 조금 잃고 조금 손해 보더라도 마음과 영으로 더 큰 부요를 차지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무엇보다 사랑을, 하느님을 차지하십시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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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5.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5,39)
오늘 복음(마태5,38-42)을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신자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곧 똑같은 방법으로 주고 받아야 한다는 유다교의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이 훨씬 더 실천하기 쉬운법으로 다가옵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른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어라.'
'천 걸음을 가자는 자에게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치열한 경쟁시대 안에서 살아가고 있고,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이기주의라는 세상 가치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 앞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신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나라에서 천주교 신자들의 숫자가 600만 명을 넘었다고 하는데,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신자 수는 과연 얼마나 될까?
주님이신 예수님의 명령이니 거역할 수 없고.
참으로 우리 마음을 답답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예수님의 이 계명들을 어떻게 실천 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믿음의 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
하느님께서 육(사람)이 되신 육화(肉化)에 대한 믿음!
예수님께서 우리를(나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에 대한 믿음!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매일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의 양식으로 내어 주신다는 믿음!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아주 작은 씨앗인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만 있으면 그러한 것들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17,20 참조)
그러니 우리도 이렇게 말해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가능한 것은 없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불가능한 것은 없다.'
오늘도 내 마음 안에 뿌려진 믿음의 씨앗을 바라보고, 이 믿음의 힘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화이팅!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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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5. 이영근 신부님. (연중 11주 월)
오늘 <복음>은 지난 토요일 <복음>에 이어, 다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구약의 복수동태법의 율법에 대하여, 새로운 의로움을 제시하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이는 ‘악인에게 무관심 하라’, ‘악인을 피하라’, ‘악인에게 대처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곧 악에 대한 무저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단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도피요, 자기기만이요, 비겁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맞서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든,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응수이든, 일일이 맞대응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니 ‘맞서지 말라’기보다 ‘맞대응하지 말라’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똑같은 방식으로 맞대응하지 말라’, ‘폭력으로 맞대응하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악인에게 맞대응으로 맞서지 말라고 하는 걸까?
사실 악과 맞대응 하다보면, 자신도 악에 물들어버리기 일수 입니다. 그런다고 피한다고 해서 치유되거나 보복심이 사라지거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억울하고 원망이 깊어지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악을 진정한 방법으로 맞서는 일, 곧 하느님의 방식으로 맞서 대응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악을 진정으로 맞서는 그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악을 도피하거나 벗어나는 길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입니다.
사실, 악을 악으로 맞서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불을 불로 끌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불은 불이 아니라 물로 꺼야하듯, 악을 이기는 현명한 방법은 오히려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을 돌려 대는’(마태 5,39) 것은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복수심을 몰아내는 길이 됩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진정 이기게 됩니다. 사랑이 악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진정한 자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는 악이나 악인에게 맞서기보다, 악 가운데서도 주님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악을 오히려 선의 통로로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 단지 비폭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에 사랑을 담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랑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말씀하십니다.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가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40-42)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주님!
맞서지 않게 하소서!
대적하거나 앙갚음하지 않게 하소서.
한쪽 뺨을 치면, 다른 쪽 뺌을 돌려 대게 하소서.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이기는 길인 까닭입니다.
당신께서 처벌할 권한이 아니라, 사랑할 권한을 주신 까닭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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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5. 연중 11주간 월요일. 반영억 미카엘 신부님.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의견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좋아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박할 생각을 하며 심지어는 골탕을 먹일 때도 있습니다. 남에게는 ‘넉넉한 마음으로 품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냉정’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네가 그런 식으로 하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협박하기도 합니다. '끼리끼리'도 있고 소위 '줄서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가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고 하십니다. 천 걸음을 걷기도 힘들거늘 이천 걸음을 걸어야 하고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고 하시니 그저 당하고 있으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정말 이렇게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싫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하라고 하시니 이유나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당하고 있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악의 고리를 끊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와 주님께서 가르치는 정의는 다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친히 갖은 조롱과 모욕을 안고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으니 오늘도 여전히 그 방법이 유효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철저히 허약함을 선택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으나 우리의 주님께서 삶의 모범으로 가르침을 주셨으니 우리도 그분처럼 살아내야 합니다. 지금도 곳곳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만납니다. 십자고상이 나에게 주는 의미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자신이 입은 상처는 상처로 되갚을 때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인내로운 사랑으로 흡수될 때 그 악은 힘을 잃게 됩니다. 우리는 악이 스스로 설 자리를 잃을 때까지 더 큰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기억하실 겁니다. 모 기업회장이 폭행을 당한 아들의 분노를 폭력으로 되갚으려 했다가 더 큰 원한을 키웠고, 그로 말미암아 물적인 손해뿐 아니라 동안에 쌓아놓은 명예는 물론 물질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자식의 고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이야 위로 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폭력으로는 결코 악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는 교훈을 얻게 해 주었습니다. 그 아들이 또 마약에 손을 대어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자식사랑도 도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사랑은 상처만 낳게 됩니다. 세상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고 외치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에 대한 자비와 연민으로 사랑 안에서 나온 정의를 말씀하십니다.
혹시라도 누군가와 맞서려거든 사랑으로 맞서십시오.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 사랑으로 대결하십시오. 사랑은 악을 이겨내는 능력입니다. 불의를 크게 앙갚음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겁이 나서, 마음이 약해서 피한다면, 심지어는 상대방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 되기 싫어서 맞서지 않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차원 높아져야 합니다. 적극적인 사랑의 행동을 통해서 악을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그 마음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악에 굴복 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12,21).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넓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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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5.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38-42: 나는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
오늘 복음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 윤리적 특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법은 기원전 1700년경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동태 복수법’(lex taleonis)이다. 이것이 역시 구약성서의 윤리 일부분이 되었다.
탈출 21,22-25에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다 임신한 여자와 부딪쳤을 경우, 그 여자가 유산만 하고 다른 해가 없으면, 가해자는 그 여자의 남편이 요구하는 대로 벌금형을 받아야 한다. 그는 재판을 통해서 벌금을 치른다. 그러나 다른 해가 뒤따르게 되면,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 하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라고 하고 있다.
이 율법은 인간이 자신의 지체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한, 상대방에게도 악한 행실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율법은 사악한 자들을 선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이 율법 때문에 선한 이들을 악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 법은 재판관을 위한 것이지 개인이 복수하기 위한 법이 아니었다. 또 문자 그대로 실행되지도 않았다. 본 피해 이상을 벌을 주지 말라는 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39절) 이 말씀은 단순히 인내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어떤 교회와 신앙을 비방하여 말하는 사람에게 ‘자기가 지닌 믿음에 대하여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된’(1베드 3,15 참조) 자세를 말한다. 그래서 올바른 교리를 알게 도와주면 그들은 비난을 그치고 신앙을 갖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런 손찌검에 당신 뺨을, 채찍에 당신 어깨를 내주실 것이다.
“네 속옷과 겉옷을 내주어라.”(40절) 우리를 비방하는 사람들이나 박해하는 이들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하여 소송을 걸어 우리 것을 빼앗으려 한다면 우리의 겉옷을 그들의 손에 던져 주고 더 좋은 옷인 의로움을 입고 달아나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육신의 옷을 찾으려 하는 동안에 영적인 가장 고귀한 옷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41절)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모욕하는 이들에게도 어려움에 부닥쳐 있으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모욕하는 이들에겐 용감한 정신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또한 비신자나 아직 진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만물을 세우신 분, 곧 하느님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하면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라는 뜻이다. 즉 그를 신앙의 길로 인도하라는 말씀이다.
모든 것을 ‘이웃 사랑’으로 변화시키라고 하신다. 이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겠다. 시간을 요구할 수도 있고, 우리의 마음 자세도 그렇게 하려는 원의가 있어야 한다. 시간을 기다리고 기회를 보아 서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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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5.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폭력을 포기하여라.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38-42).”
이 말씀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켜라.” 라는
가르침입니다(로마 12,21).
예수님 말씀에서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는 “악에 맞서지 마라.”가 아니라,
“악인에게 악으로(폭력으로) 맞서지 마라.”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선을 실현시켜야 합니다.
선은 선으로만 실현될 수 있습니다.
(악을 통해서 선이 실현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구약성경에 복수를 허용하는 율법만 있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성경 잠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주어라.
그것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이다.
주님께서 너에게 그 일을 보상해 주시리라(잠언 25,21-22).”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이라는 말은,
선으로써 악인을 깨우쳐 주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그 일을 보상해 주신다는 말은,
우리가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는 것을 주님께서 바라신다는 뜻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원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라는 율법은, 탈출기와 레위기에는
죄와 벌은 상응해야 한다는 율법으로 기록되어 있고(탈출 21,24; 레위 24,20),
신명기에는 거짓 증인을 처벌하는 율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신명 19,21).
(사적인 복수를 허용하는 율법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유대인들은 이 율법의 본래 뜻을 잊어버리고,
또는 외면하고, 사적으로 복수를 할 때의 근거 규정으로 악용했습니다.
복음서의 본문을 보면 예수님 말씀에 “폭력을 포기하여라.” 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이 제목은 번역자가 붙인 것이지만 어떻든 이 제목 때문에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이야기를 보면
대단히 폭력적인 예수님의 모습이 나온다. 그것은 당신의 말씀과 모순되는
행동이 아닌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복음서의 표현만 보면(요한 2,14-16),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에서 ‘채찍’은 사람들을 치기 위한 채찍이 아니라,
짐승들을 내보내기 위한 채찍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폭력을 사용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신 것은 과격하게 보이긴 합니다.
(짐승들이 몰려 나가는 과정에서 혼란과 소동이 벌어지고,
그래서 탁자들이 엎어지고 돈이 쏟아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향해서 폭력을 사용하신 일은 아닙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성전 정화 때의 예수님의 행동을
“아버지의 집에 대한 열정”으로 설명했습니다(요한 2,17). 악인에게 악한 폭력으로 맞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재판을 받으실 때 경비병이 뺨을 치자 다른 뺨을 돌려 대시지
않고 그 경비병을 꾸짖으셨다. 그것은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라는 당신의 말씀과 모순되는 행동이 아닌가?” 라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곁에 서 있던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며, ‘대사제께 그따위로 대답하느냐?’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요한 18,22-23)”
표현만 보면 예수님께서 경비병을 꾸짖으신 것으로 보이지만,
예수님은 재판을 받고 있는 죄수일 뿐입니다.
그래서 경비병을 꾸짖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닙니다.
<성경 번역자는 예수님의 말투를 전부 ‘해라체’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요한복음 18장을 보면, 한낱 죄수일 뿐인 예수님은 빌라도 총독에게 해라체로
말을 놓고, 식민지를 다스리는 로마제국 총독인 빌라도는 식민지의 죄수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투를 존댓말로 바꾼다면,
경비병에게 하신 말씀의 느낌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그를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부당한 재판에 대해서 항의하는 힘없는 피고의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뺨을 돌려 대시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당시의 실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다른 뺨을 돌려 대시기 전에
경비병이 먼저 양쪽 뺨을 모두 칠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저항 자체를 하실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라는 말씀은,
뺨을 치는 사람보다 우위에 있거나
최소한 대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상대방의 폭력에 같은 폭력으로 맞받아 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거나,
더 센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힘이 없어서 당하기만 하는 사람, 억울한 일을 당해도 힘이 없어서
참을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속옷과 겉옷에 관한 말씀, 천 걸음과 이천 걸음에 관한 말씀,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라는 말씀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켜라.”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냥 참아라.”가 아닙니다.
이 가르침의 핵심은 “악을 굴복시켜라.(악을 제거하여라.)”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경우에는 정말로 힘이 없어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을 수밖에
없을 때가 많은데, 바로 그럴 때에 공동체가 나서야 합니다.
정의와 선의 실현은 신앙인 공동체의 의무입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마태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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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5. 새벽을 열며.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빠다킹신부님.
책을 9권이나 출판했고, 매달 묵상 잡지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또 인터넷에 20년째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런 저를 보고서 글 쓰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겠다고 말씀하시지만, 점점 더 글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집니다. 이렇게 부족한 글을 사람들에게 보여줘도 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한없이 부끄러워집니다. 그런데 처음 글을 써서 인터넷에 올릴 때만 해도 그렇게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꾸준히 글을 쓰고 있는 나에 대해 ‘열심히 살고 있다’라는 특별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20년 전의 글이 훨씬 나은 글이었을까요? 자신감 넘치게 쓴 글이지만, 지금 읽어보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습니다. 이런 글을 어떻게 인터넷에 올릴 생각을 했냐며 부끄럽기만 합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하지요. 우리 역시 많이 알면 알수록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겸손이 부족하다면 그만큼 앎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분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알면 알수록 주님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알면 그만큼 겸손해지는 우리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우리에게 제시하십니다.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고, 천 걸음을 가지고 강요하면 이천 걸음을 가 주라는 말씀은 세상이 보여 주는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겸손의 길임을 보여 주십니다. 복수하는 삶도 아니고, 자신의 것만을 챙기는 삶도 아니고, 오히려 어리숙하고 미련해 보이는 삶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겸손의 모습으로 사랑을 철저하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주님을 알게 됩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으며, 주님을 통해 참 행복의 길이라 할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겸손의 삶도 사랑의 삶을 외면하면서 철저히 세상의 논리를 통해서만 살아가려고 할 때, 우리는 주님을 진정으로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냥 급급하게 지금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알기 위해 더욱더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지혜보다는 주님의 지혜를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미련하고 어리숙해 보이지만, 참 행복의 길로 갈 수 있는 길을 기쁜 마음으로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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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말고 한 가지 목표에 매진하라. 그것이 성공의 비결이다(안나 파블로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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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지난 3월 말, 어머니께서 편찮으셔서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고령이신데 고관절 골절이 된 것입니다. 몸 상태도 좋지 않았습니다. 폐렴에 빈혈, 여기에 폐에 물이 차서 상당히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소식을 듣고 강화에서 1시간 넘게 걸리는 병원까지 부랴부랴 운전해서 갔습니다. 그런데 면회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면회가 제안되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위험한 순간은 넘겼다고 해서, 얼굴도 뵙지 못하고 다시 성지로 돌아왔습니다.
사실 할 일이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병원에 갔는데 허탕 쳤다는 생각에 억울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운전하는 동안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쳤던 것, 운전하며 어머니의 쾌유를 기원하는 화살기도를 계속 바친 것, 어머니와의 좋았던 추억을 생각했던 것 역시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점입니다. 아쉽기는 하지만 억울해할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결과에 이르지 못하면 시간 낭비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소한 일상도 나의 삶이며, 그 소소한 일상과 과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이 소중한 것입니다.
죄로 기울어지는 시간 외에는 어떤 시간도 나쁘지 않습니다. 나쁘지 않은 시간을 나쁘다고 단정 짓는 순간, 내게 나쁜 시간은 참으로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 나의 삶을 구성하는 이 시간에 좀 더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집중한다면 얼마나 많은 유익한 시간이 내게 다가오는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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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5.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의 묵상
어느 동네에 사이가 좋지 않은 이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중 한 사람이 마술 램프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가 램프를 문지르자 그 안에서 요정이 나타났습니다. 요정은 그를 주인이라 부르며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주인님께서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세 가지 소원만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 그 소원이 이루어지면 주인님께서 가장 미워하는 사람은 그것의 두 배를 누리게 됩니다.”
램프의 주인은 요정에게 궁전만 한 집 한 채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정말 으리으리한 집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웃집에서 갑자기 집이 두 채가 생겼다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램프 주인은 요정에게 두 번째 소원을 빌었습니다.
“나는 저놈과 더 이상 마주치고 싶지 않아. 외국으로 이민을 갈 수 있게 나에게 100억만 보내다오.”
요정은 이 소원도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웃집에는 200억이 생겼습니다.
배 아픈 주인은 마지막 소원을 빌었습니다. 그것은 불행히도 자기 한쪽 눈을 잃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원수 같은 이웃이 양쪽 눈을 잃게 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다소 유치한 예화일 수 있지만, 어쩌면 우리의 삶에서 이렇게 유치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미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상대방의 불행을 꿈꾸다가 자신마저 불행해져 버리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고 가르치신 것은 아무리 불의를 저지르는 악인일지라도 그의 불행을 바라지 말고 그를 끝까지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대하라는 의미입니다.
- 한재호 루카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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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5.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세계적인 생태학자가 티베트에서 스님들과 회의를 했을 때입니다. 생태학자의 찻잔에 파리가 한 마리 빠졌습니다. 생태학자는 그런 경험이 전에도 있었기에 ‘별일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스님이 생태학자의 얼굴을 보니 생태학자는 다시금 ‘별일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손가락을 넣어서 찻잔에 빠진 파리를 꺼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파리도 별일 없습니다.’ 순간 생태학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은 생태학자로 자연과 환경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나’를 중심으로 생각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스님은 생태학자는 아니지만 찻잔 속에 빠진 파리를 먼저 생각할 정도로 자연과 환경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코로나19가 인간의 몸에 들어왔습니다. 대공황 때보다 더 큰 경제위기가 왔다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보다 더 힘들다고 합니다. 여행도 할 수 없고, 식당에도 갈 수 없고, 학교에도 갈 수 없고, 축구도, 야구도 구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치료약을 개발하고, 백신을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 몸에 들어온 바이러스를 내 보내야하기 때문입니다. 유럽도, 미국도 이제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면서 활동을 재개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별일 아닌 것’이 아니지만 경제위기가 더 큰 문제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는 지구가 인류에게 보낸 백신인지도 모릅니다. 인류가 더불어 살아가는 자연과 생물에게 ‘큰 문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탐욕과 개발은 생태계에게는 커다란 위기가 되고 있습니다.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동안 인류가 걸어온 삶의 태도를 돌아보는 것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봇에게 포도원은 삶의 전부였습니다. 조상이 물려준 유산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포도원은 매매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땅은 소유와 매매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조상들이 물려준 유산이었고, 후손들이 살아가야할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그래서 땅은 어머니와 같았고, 삶의 전부였습니다. 아합 왕에게 나봇의 포도원은 그저 가지고 싶은 또 다른 포도원이었습니다. 그에게는 포도원이 차고 넘쳤습니다. 그럼에도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에게 포도원은 조상이 물려준 유산도 아니었습니다. 포도원은 열매를 맺도록 일하는 삶의 터전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또 하나 가지고 싶은 소유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별일 아닌 것처럼 나봇의 포도원을 부당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빼앗았습니다. 아합 왕만 그랬을까요? 지난 세기 인류는 제국주의라는 부당한 힘으로 식민지를 만들었고, 약한 이들의 포도원을 강제로 수탈하였습니다.
한국의 대통령이 WHO의 회의에 참석해서 코로나19에 대한 백신은 인류가 함께 개발하고, 백신은 모든 나라에 동등하게 공급되는 공공재로 만들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백신이 공급되도록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코로나19와 같은 바이러스는 단절과 봉쇄만으로는 막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가 안전해질 때 비로소 나도 안전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화와 연대, 협력과 나눔만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나라는 백신을 독자적으로 개발하겠다고 합니다. 자국민에게 우선적으로 공급하고, 백신을 소유하겠다고 합니다. 수요와 공급의 논리에 따라서 가격을 정하겠다고 합니다. 당연히 가난하고, 병든 이들은 백신의 도움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경제논리에 몰입하는 이들에게 찻잔 속의 파리는 별 일 아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이신 삼위일체 하느님께 문제가 있어서 사람이 되신 것은 아닙니다. 그분들은 친교와 나눔 그리고 사랑으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천상의 질서와 관계는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에 문제가 있었을까요?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에, 하느님께서 특별한 관심과 사랑으로 창조하신 인간에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스님이 파리를 사랑해서 찻잔 속의 파리를 꺼낸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직접 세상이라는 찻잔 속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생각으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느님의 의로움이 무엇인지 이야기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누가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십시오.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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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5.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자비가 지혜다 -폭력과 보복의 악순환 끊기-
-“신부님, 지금쯤 수도원 미사중이겠네요. 피정도 고프고 그곳의 기도소리와 새소리 풀향이 그립습니다.”
“반갑습니다! 사랑하는 안나 자매님! 청초한 사랑, 메꽃들 축복인사 받으시고 늘 새롭고 행복하세요!”
“너무 예뻐요. 청초라는 표현과 정말 닮았네요. 감사합니다.”-
힘들지만 힘껏 기도하며 노력하며 살아가는 자매와 주고 받은 카톡 메시지입니다. 아침 산책때 마다 만나는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거의 눈길을 끌지 못하는 야생화 메꽃들이지만 참 요즘 장관입니다. 정말 하늘에 떠오른 별들같습니다. 며칠전 나눈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이란 시를 다시 나눕니다.
-“하늘의 별같다
땅이 하늘이 되었다
땅에 떠오른
무수한 별무리 청초한 메꽃들
하루 폈다지는 ‘하루살이’꽃
하루가 평생이다
환상적이다
공동체의 아름다움이다
주변이 환하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다”-
하나하나가 하늘의 별같은 사람들입니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고귀한 품위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멀리 갈 것 없이 가까이 만나는 고귀한 이웃 형제자매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만이 답이요 길입니다.
어제는 오랜만에 오전 오후 참 많은 분들의 면담성사를 준 날입니다. 보속 처방전 말씀은 주로 6월 예수성심성월에 맞는 다음 예수님 말씀을 드렸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요한15,12)
사죄경과 강복을 드린 다음, 집무실에 걸려있는 ‘십자가의 예수님’ 아래 서도록 한후 사진도 찍어 드리고 함께 찍기도 했습니다. 또 미사신청차 방문한 어느 모녀母女분의 모습이 너무 정다워 함께 사진을 찍어 드리기도 했습니다. 웃으며 찍을 때의 표정은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해 보이던지요. 사진을 보면 저절로 행복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요즘은 ‘사랑의 사진사寫眞師’가 된 느낌입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사진처럼 웃으며 행복하게 사세요.”
웃으며 사랑할 때 아름답고 행복합니다. 하나하나가 꽃같이 아름다운 얼굴들입니다. 오늘 말씀도 우리의 사랑을 환기시킵니다. 무지에서 기인한 탐욕이, 악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제1독서 열왕기 상권에서 봅니다. 무죄한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는 아합 임금과 이를 사주하는 그의 아내 악녀惡女 이제벨의 천인공노天人共怒할 행위가 공분公憤을 자아 냅니다.
사람이 무지와 탐욕에 눈멀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봅니다. 바로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며 우리 자신을 보게 합니다. 참으로 쥐도 새도 모르는 완전범죄이지만 하느님의 눈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요즘 어디나 CCTV가 있지만 하느님은 모두를 살펴 보는 진짜 CCTV입니다.
문득 노자도덕경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疎而不失)’, ‘하늘이 친 그물은 눈이 성기지만 그래도 굉장히 넓어서 악인(惡人)에게 벌(罰)을 주는 일을 빠뜨리지 않는 다’는 고사성어입니다. 하느님 앞에 완전 범죄는 불가능하며 하느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후에 전개되는 내용에서 보겠지만 이 두 악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철저한 응징이 뒤따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물음이 있습니다. 가해자들이야 심판도 받고 벌을 받는다 하지만 나봇같은 무죄한 이들의 죽음은 어떻게 보상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무죄한 이들의 죽음이요 지금도 계속되는 현실아닙니까? 죽은 목숨 살려낼 수는 없으니 얼마나 안타깝고 답답한 일인지요.
어제 면담성사를 줄 때 자매의 말도 생각납니다. 참으로 믿음 깊고 담대하고 침착한 분이었습니다. 한 밤중에 분노를 삭히지 못한 남편이 방에 들어와 목에 칼을 대고 “살고 싶으냐 죽고 싶으냐?” 묻길래 “살고 싶다” 말하니 칼을 내 던지고 짐 싸들고 집을 나갔다는 일화입니다. 누구나 살고 싶은 것은 자연스런 본능입니다. 그러니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말로나 행위로 살인하는 것보다 큰 죄는 없습니다.
나봇같은 무죄한 이들을 하느님께서 결국 살리시겠지만 역시 여전히 우리에게는 영원한 화두요 안타까움입니다. 정말 무지와 탐욕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와 더불어 사랑의 노력이 절실함을 깨닫습니다. 구체적으로 가까이에서부터 이웃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자비가 지혜임을 깨닫게 합니다. 보복의 악순환보다 큰 재앙은 없습니다.
악을 무력화시키고 보복의 악순환을 끊는 길은 적극적 자비의 실천뿐입니다. 악에 대한 무저항이 아니라 일일이 악에 맞대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또한 유혹입니다. 발본색원 악의 뿌리를 뽑는다 하지만 이 또한 유혹이요 악과 싸우다 괴물이 되는 경우가 십중 팔구입니다. 요즘 북한의 행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참으로 지혜롭고 침착한 대책이 절실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도 있지만 답은 거룩한 자비행뿐입니다. 악은 선의 결핍이란 말도 있고 사랑에 굶주린 악이란 말도 있습니다. 참 악의 신비입니다. 이런 악에 정면대응하지 말고 적극적 자비의 실천으로 저항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 자비하신 하느님의 지혜가 고스란히 반영됨을 봅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이런 이들이 성인聖人입니다. 제가 피정자들에게 늘 강조하는 것이 성인이 되라는 것인데 바로 이것이 세상에 온 보람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악을 무력화시키고 보복의 악순환을 끊는 길은 이런 자비행뿐임을 깨닫습니다. 얼핏보면 바보 천치天癡같으나 참으로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대우大愚가 대자大慈의 대지大智라는 역설의 진리를 깨닫습니다. 나봇이 이런 말씀의 정신대로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아합의 요구에 따라 처분했다면 살 수 있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고지식한 원칙주의자 나봇에게는 부질없는 가정이겠습니다.
좌우간 우리 믿는 이들의 공적公敵인 무지와 탐욕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또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깨달아 적극적 자비의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결코 보복의, 폭력의 악순환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은 자비롭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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