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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의 시선 원문보기 글쓴이: 카페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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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풍성한 은혜가 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
최고의 소원, 하나님께 영광/ 요17:1-5 생의 최고의 소원 제가 아는 우리 교회 여 집사님 한 분이 계시는데, 당뇨와 뇌졸중으로 거동이 어려운 시어머니를 모시고 고생을 참 많이 합니다. 게다가 그는 자폐증에 걸린 아들을 하나 두고 있습니다. 그 삶을 짜증스럽게 생각하면 웃을 날이 하루도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처럼 자폐아를 가진 어머니들을 중심으로 모이는 사랑부 다락방의 순장을 하고 있습니다.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니까 틈틈이 시간을 내서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눈코 뜰 새 없는 하루하루를 쫓기듯이 살고 있는 집사님입니다. 어떤 때는 너무 짜증스럽고, 너무 힘들어서 살맛도 안 납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하나님...!” 하고는 눈물, 콧물 흘려가면서 원망을 하기도 하고, 하소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성령께서 그의 마음속에 이런 음성을 들려 주셨다고 합니다. “네 십자가는 네 믿음을 강하게 만들고, 네 인격을 성숙시키는, 내가 준 나의 프로그램이야.” 그리고 이어서 성령은 마음속에 이런 질문을 주셨습니다. “네가 천국에 갈 때까지 이 땅에서 해야 할 최고의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그 때 성령은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셔서 그가 이렇게 대답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 영생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지요. 맞아요. 이것이 주님의 기쁨입니다. 가장 가치 있는 일은 저와 제 삶이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의 복음 전하는 일에 쓰임 받아야지요.” 그러자 그의 내면에 환한 전깃불이 켜지면서 어지럽게 널려 있던 많은 잡된 생각들이 정리되고, 기쁨과 고통의 크기와 무게들이 정직한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아갔다는 그의 간증 문을 제가 읽은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난가을에 전도폭발 훈련을 받았는데, 그 훈련을 마친 후 자기와 같이 자폐아를 가지고 씨름하는 안 믿는 부모들을 상대로 전도를 해서 지금은 그 다락방이 배가에 배가를 거듭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간증 문 끝 부분에 이런 말을 썼습니다. “이제 새해 전반기 사역을 시작하면서 다시 성령 충만해진 베드로가 되어 현장으로 달려가려고 합니다. 한 영혼을 묶고 있던 결박이 끊기고, 어두움의 세력이 물러가는 자유의 감격을 상상하며 내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기쁨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얼마나 멋있습니까? 이런 주부를 보고 누가 평범한 여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야 말로 사도요, 제자요, 복음의 선지자요, 하나님의 자녀요, 어떤 면에서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바쳐 뛰는 살아있는 순교자입니다. 제가 이런 극찬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목회를 하는 보람이 어디 있습니까? 바로 이런 분들이 교회 안에서 열심히 뛰고 있다는데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우리 교회 안에는 이런 집사님 같은 분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 욕심 같아서는 여기 앉아 계시는 모든 분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 생의 최고 목표로 고백하면서 주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 자기의 전부를 드려 쓰임 받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하나님께서 굉장히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도 그러한 삶을 사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자기 생애 최고의 목표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두고 사셨고, 그 일을 위해서 돌아가신 분이십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통해서 다시 한번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혼자 죽음의 길을 떠나시면서 염려와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기 위해서 요한복음 13장에서부터 16장까지 이르는 매우 긴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자기의 사랑을 표현하셨고, 또 천국의 영광을 이야기하면서 위로하시는가 하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내가 한 것보다 더 큰 일을 너희가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격려하며 소망을 주셨고, 또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러면 내 이름으로 하나님이 반드시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기도의 영광을 알려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아무도 끊을 수가 없다는 것을 다짐하신 후에 “너희가 비록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할 수 있다. 그러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고 위로하시면서 말씀을 끝마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면서 기도하시기 시작했습니다. 17장 전체가 예수님의 기도를 담고 있는데, 처음에는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하셨고(1-5절), 그 다음으로는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으며(6-19절), 마지막으로는 장차 지상에 나타날 교회와 성도를 위해(20-26절)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는 이거는 이거고 저거는 저거다 는 식으로 따로 떼어놓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인 동시에 제자들과 교회를 위한 기도라고 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특별히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드린 기도라고 해서 이 기도에는 몇 가지 별명과 찬사가 따라 다닙니다. ‘요한복음의 지성소’라는 별명이 있는가 하면, '대제사장의 기도'라는 별명도 있습니다. 벵겔 같은 위대한 신약 주석학자는 “모든 성경 가운데서 가장 쉬운 말로 된 기도이지만 가장 심오한 의미를 가진 기도다.” 라고 주석을 하기도 했습니다. 먼저 1절을 보십시오.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주님의 긴 기도의 첫 마디입니다. “때가 이르렀사오니” 하는 말은 이제 십자가의 죽음을 맞을 시간이 임박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드리는 소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소원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말씀하시는 것은 아무래도 예수님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무엇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드린 기도 전부가 다 중요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제일 먼저 구하는 기도는 다른 어떤 기도보다도 예수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어떤 소원일 수가 있습니다. 형 집행 일을 맞아 형장으로 끌려가서 이제 죽음을 목전에 둔 사형수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십시오.” 그 짧은 몇 분 동안 몇 마디의 말로 담아야 되는 마지막 소원이라고 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평소에 자기 자신이 마음에 늘 품고 있었던 어떤 소원이나 목숨이 끊어져도 포기할 수 없는 어떤 소원을 내놓지 않겠습니까? 예수님 역시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리면서 가장 먼저 들고 나오는 내용은 곧 예수님이 늘 마음속에 품고 있는 가장 큰 소원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조금 쉬운 말로 바꾸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하는 소원입니다. 여기서 ‘영화롭게 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독사조'(doxazo)인데, 성경에 참 많이 나오는 말이지만 그 의미를 파악하기란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그저 간단하게 의미를 말한다면 이렇게 표현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가를 드러내고, 그 분에게 합당한 경배와 찬양을 돌리는 모든 행동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를테면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낼 수 있을까요? 그의 사랑을 높이 드러내고,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 바로 이것이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선하신 뜻을 가지고 계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밝히 드러내면서 그분이 찬양을 받으시도록 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베드로가 배와 고기와 가정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아갔던 영웅적인 행동으로부터 시작해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의 손에 내어놓았던 소박한 어린 소년의 행동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누구 신가를 온 세상에 선포하고 그분께 찬양과 경배가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바로 ‘독사조’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소원하셨습니다. 살아있을 때도 그랬고, 이제 죽음을 목전에 둔 때에도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 이것만이 예수님의 가장 큰 소원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 본문 4절에 보면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가 잘 나와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다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그 일을 다 성취하셨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해야 했던 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습니까? 2절에 그 대답이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하라고 시킨 일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6-17)는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세상에 영생을 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명령받은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영생이 무엇입니까? ‘영생’이라는 말은 ‘구원’이라는 말과 똑같은 의미입니다. ‘영생’(永生)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생명’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안 죽는 생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사는 생명, 즉 안 죽는 생명은 지옥에도 있습니다. 지옥 가는 사람도 영생합니다. 그러나 지옥의 영생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그야말로 살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비참한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영생은 오래 살고, 영원히 산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생명이 가지고 있는 질입니다. 어떤 질을 가진 생명인가, 얼마나 살만한 가치가 있는 영생인가,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최상의 질을 가진 생명입니까? 하나님 자신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누리고 있는 생명이야말로 최상의 질을 가진 생명입니다. 거기에 참된 영원이 있습니다. 거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거기에 만족이 있습니다. 거기에 영원한 찬양이 있습니다. 거기에 영원한 사랑이 있습니다. 살만한 가치가 있는 생명을 영원토록 누리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영생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님은 이 영생을 이 세상에 주시는 일을 책임지고 오셔서 3년 동안 그 일을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 쏟아서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그런데 영생을 주기 위해서는 영생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야 할 것이 아닙니까? 3절에 그 방법이 잘 나와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오늘 이 가운데서 아직 자신이 영생을 얻었다고 말하기 어려운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말씀을 들으며 영생을 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 예수 믿어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처음 나와서 어색하게 앉아 계시는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는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영생을 얻는 방법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하나님만이 참 신입니다. 그 나머지는 인간이 만들어낸 거짓 신입니다.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요, 참 신입니다. 그러므로 유일하시고 참되신 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영생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막연히 안다고 할지라도 진짜 그분을 아는 길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참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은 자기를 아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참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믿는다’는 말과 똑 같은 의미입니다. 성경에 보면 안다는 것은 곧 믿는다는 뜻입니다. 머리로 약간 인지하는 그런 정도의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보고 “나는 그 여자를 잘 알아.”라고 말할 때, ‘안다’는 말 뒤에 무슨 뜻이 숨어 있습니까? “나는 그 여자 믿어.”하는 말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나는 그 여자 잘 몰라.”라고 말하면 '난 그 여자 못 믿겠다.“ 하는 말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안다’는 말과 ‘믿는다’는 말은 같은 것입니다. 참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압니까? 그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그분을 믿습니까? 믿으면 믿을수록 그 분을 더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슨 재주로 하나님을 알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오직 한 가지 길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고, 또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생, 곧 자신의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기셨습니다. “네가 나누어 주라.” 요한일서 5장 11,12절을 보십시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자, 곧 아들을 알고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영생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3년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각 촌과 각 성으로 두루 다니시면서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병든 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세상에 알려 주셔야 모든 사람이 참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아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은 열심히 다니면서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치료하셨던 것입니다. 심지어 주님은 이렇게 선언하시기도 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가운데 영적으로 죽어있는 형제 자매가 있습니까? 들으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예수의 이름을 들으십시오. 듣는 순간 살아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의 음성을 들은 사람은 니고데모와 같은 지체 높은 사람들을 위시하여 수가성의 창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을 구원하고, 세상에 영생을 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이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했기 때문에 주님은 세상을 향해 “나를 보라. 나를 보면 하나님이 이런 분인 것을 알 것이다.”하면서 열심히 알리는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영광이다 그런데 주님이 이제 마지막으로 하실 일이 한 가지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대속의 죽음입니다. 대속의 죽음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 믿고 신앙 생활 한다면 적어도 '대속'(代贖)이라는 말의 의미는 알아야 합니다. 죄 값을 대신 지불하는 것이 ‘대속’의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는 죽음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생명으로 우리 죄 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희생하고 내가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생명은 함부로 다룰 생명이 아닙니다. 되는대로 살다가 죽어버리면 끝나는 그런 생명이 아닙니다. 돈이 몇 푼 없다고 해서 그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는 그런 생명이 아닙니다. 실직했다고 해서 갑자기 살 가치나 의미를 잃어버리는 그런 생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자기 생명을 대신 지불하고 사신, 너무나 고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보다 더 고귀한 생명이 바로 우리의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한 생을 절대 함부로 보면 안 됩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화목제물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원수 된 것을 다 처리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신 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십자가는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보여주는 아가페의 극치입니다. 우리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저주스러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심판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십자가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계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을 죽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완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진정 그 마음속에 있는 소원대로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는 한 십자가의 죽음을 절대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놓고 영광이라고 해석하셨습니다. “십자가가 너무나 고통스럽고 무서운 것이긴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나에게 있어 오히려 영광이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아들이 먼저 영화롭게 되어야 됩니다. 아들이 영화롭게 된다는 것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여, 십자가의 죽음을 바로 죽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의 뜻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3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의 죽음을 놓고 자기의 영광이라고 해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은 비록 이와 같이 두렵고 고통스러운 죽음이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었기에 그 십자가를 자기의 영광으로 보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니까 주님의 마음 밑바닥에서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또 요한복음 17장 13절을 보십시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하게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십자가를 앞두고 주님의 마음속에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1절에도 보면 ‘내 기쁨’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참 이상하고 신비스럽지 않습니까? 어떻게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놓고 공포에 떠시는 예수님 마음에 기쁨이 있다는 말입니까?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자기의 십자가를 자기 영광으로 보는데서 나오는 기쁨이었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어도 우리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실 수 있다면 이것은 나에게 영광이야.’ 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보니까 그 마음에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생의 구심점으로!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을 최고의 소원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예수님처럼 최선을 다해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7장 18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이 말씀을 바꾸면,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예수님도 옥한흠이를 세상에 보내었고, 여러분 각자를 세상에 보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명령받은 것을 우리 역시 동일하게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여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영생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세상에 보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직업을 가지고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내 가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입니다. 나의 자녀들이 자라서 장차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 땅에 펴게 합니다. 내가 열심히 돈 벌어서 쌓아 놓은 것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쓰이게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모든 것이 이 세상을 구원하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에 쓰임 받게 함으로써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우리 생의 구심점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주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려면 어떻게 먹어야 합니까? 어떻게 마셔야 합니까? '주님, 굶주리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조금 덜 먹고 그들을 도울 수가 있다면,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수만 있다면, 주여 내 것을 나누어 먹기를 원합니다.'하는 심정을 가지고 먹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입니다. 마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만 먹고, 즐기고, 배를 두들기면서 사는 것은 절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인가?’ 만일 ‘나는 적당하게 먹으면 돼. 하나님이 주신 귀한 물질인데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고, 아직도 영생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에게 주의 복음이 증거 되기 위해서 내가 좀더 내게 있는 것을 나눌 수가 없을까?’하면서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이면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가정의 행복을 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자녀를 잘 키우려고 애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버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회사에서 승진하고, 또 인정받으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건강에 좋다면 사족을 못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일 이러한 모습 가운데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소원이 담겨 있지 않다면 다 헛된 것입니다. 헛되고 헛된 것에 매달려서 아우성 치다가 헛되게 죽는 것 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수입이 얼마 정도 됩니까? 그 수입을 가지고 과연 여러분이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어느 정도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금합니까? 어느 정도로 선한 일을 나누고 있습니까? 잘 반성해 보시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살면 우리 각자가 가진 십자가를 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옥 목사에게도 십자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구심점이 없으면 이 십자가는 불평 덩어리요, 하루빨리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애물단지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해도 안 없어지고, 아무리 소원해도 내 어깨 위에 그대로 있는 십자가라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통에는 뜻이 있습니다. 어느 집사님처럼 “십자가는 내가 너를 다듬어서 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만들기 위해서 내가 준비한 프로그램이다.”하는 것만 깨달으면, ‘아, 하나님, 내가 자식 때문에 이렇게 고통 하는 것, 이것이 없었다면 아마도 내가 신앙 생활 바로 안 하겠지요.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다는 마음은 안 중에도 없이 한참 신나게 젊음을 구가하고 있겠지요. 그런데 이 자식이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기 때문에 내가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다듬어져서 주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엉뚱한 사람이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요!'하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럴 때 나에게 있는 십자가가 나의 영광이 되는 것이요, 내 마음에 기쁨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몸에 병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그 병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금식을 하며 매달려도 하나님은 그 병을 고쳐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의 마음속에 이런 응답이 왔습니다. “네 병은 내 능력이 네 안에 머물게 하는 영광이니라.” 이 응답을 받고 나서 그는 너무 좋아 가지고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노라. 이 몸에 병이 있으므로 내가 하나님을 더 영화롭게 할 수 있게 되었다면 이 병이야 말로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냐? 하나님 감사합니다”(고후12:9)하고 찬송했습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를 영광으로 보는 눈이 열리기만 하면 병 때문에 불평하던 사람이 오히려 그 병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그 십자가를 다시 해석하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십자가가 무엇이며, 그 십자가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 때문에 그래도 주일날 꼬박꼬박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 드리는 겸손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닌가요? 그 십자가가 있기에 내가 그래도 진지하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질문하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그 십자가는 나에게 영광입니다. 할렐루야! 할 핑크라고 하는 사람이 이런 시를 썼습니다. “예수여/ 십자가 위에서 나무와 못으로 인간의 온전한 구원을 이루신 나사렛 목수여./ 당신의 이 작업장에서 대패와 끌로 깎고 다듬으사/ 거칠고 비틀린 생목 같은 저희를 당신의 솜씨로 빚으사/ 진정으로 더 아름답고 더 쓸모 있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소서.” 우리는 예수님의 대패와 끌로 깎고 다듬는 십자가가 없으면 거칠고 비틀린 생목 같아서 내 맘대로 삽니다. 내 영광을 위해서 살지 사치스럽게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다 십자가가 있기에 이만큼 다듬어 진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오히려 감사하면 그 속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의 중심이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겠다는 소원에 초점이 맞추어 있지 아니하면 모든 십자가는 원망과 고통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질문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입니까? 최고의 소원입니까? 죽을 때도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면서 죽을 사람입니까? 저는 조형미술이 무엇인지 잘은 모릅니다만 조형미술을 하는 어떤 분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다고 합니다. 거기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작품활동을 하면서 인정을 받아서 세계 100대 조형건축가로 선정이 될 정도로 아주 탁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인생을 즐기고 있던 젊은 나이에 그는 그만 식도암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식도에 암이 생겼으니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음식을 먹을 수가 없으니 자연 몸은 계속 말라갔습니다. 나중에는 최악의 상태까지 갔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습니다. 코로 호스를 끼워 가지고 겨우 죽 같은 것을 간신히 넘기는 정도였습니다. 의사들도 이제는 살 소망이 없다고 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가정에서는 장례식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죽음의 손아귀가 계속 자기 목을 바짝 바짝 조여 매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한 생을 살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았다고 한 것이 무엇인가? 내가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는 자기 인생을 아무리 이리저리 뜯어보아도 양심상 자기가 하나님의 영광 위해서 한 생을 살았노라고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 예술 분야를 위해서, 또 자기 명예를 위해서 뛴 한 생이었지, 자신이 해 왔던 신앙 생활이라는 것도 그저 교회 다니는 정도였지, 정말로 자신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인생을 달려왔다고는 말하기는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병상에 누워서 ‘이제 어떻게 하나? 하나님 앞에 가 섰을 때 어떻게 대답할까?’ 하고 고민하며 답답해하고 있던 어느 날 가족 중 한 사람이 연변 과학기술대학의 김진경 총장이 미국에 와서 한 설교 테이프를 하나 구해 가지고 와서는 한번 들어보지 않겠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번 들어보자 싶어 병상에 누워 그 테이프를 듣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제가 그 내용은 잘 압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삶이 무엇인지 압니까? 복음을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음으로 양으로, 직접 간접으로 전하는 삶을 구심점에 두고 인생을 설계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생은 정말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살고 싶으면, 연변 과학기술대학으로 오십시오. 거기에 오면 중국의 젊은이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장래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은 썩는 밀 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의 도전과 초청의 설교였습니다. 그는 이 설교를 들으며 가슴을 후벼내는 아픔을 느꼈습니다. ‘하나님, 내가 진작 이것을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지금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기도하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차갑고 메말라 있던 손이 갑자기 따뜻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참 이상하다!' 설교를 다 듣고 그날 저녁을 넘겼는데, 갑자기 음식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앉혀 달라고 하고는 호스도 빼고 죽을 먹었다고 합니다. 며칠 후에는 의사들도 보고 깜짝 놀랄 정도로 몸이 많이 회복이 되었습니다. 케이스 스터디를 해야 될 만큼 너무나 기가 막히는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달 이상의 시간이 지나면서 드디어 걸어다닐 수 있을 정도로 몸이 회복되었습니다. 완전히 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아직 원기가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거동이 가능해지자 그분은 가방을 싸 짊어지고 자기 부인하고 연변에 나타났습니다. '나도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 몸을 던져 보자. 나의 전공 분야를 살려서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데 내 남은 인생을 살아보자. 하나님이 그것을 위해 나를 살려 두셨으니까 그렇게 살아보자.'하고는 거기에 달려 와서 드디어 연변 과학기술대학 건축과 교수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권길중 박사가 바로 그분입니다. 지금까지 3년째 일하고 있는데, 그분은 거기서 보람된 삶이 무엇인가를 비로소 알게 되었으며 비록 삶의 십자가가 무겁지만 마음속에 늘 새로운 기쁨이 솟는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전공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직업이 무엇입니까? 남자입니까? 여자입니까? 가난합니까? 부합니까?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의 소원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 되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의 모든 생은 그 소원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시는 여러분의 가슴에도 이러한 기도가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합니다.' 저녁에 주무시다가 갑자기 눈을 뜨면 자기도 모르게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 기도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 소원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세상을 살다가 목숨이 떠나는 마지막 순간이 된다 할지라도 저와 여러분의 가슴에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기쁨이 되기를 원합니다.'하는 기도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 소원을 가지고 자녀를 키우십시오. 이 소원을 가지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십시오. 이 소원을 가지고 여러분의 물질을 쓰십시오. 여러분의 시간을 쓰십시오. 여러분의 젊음을 쓰십시오. 인생은 짧습니다. 되는대로 살다가 끝날 인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명보다 더 고귀한 가치를 가진 나의 생명을 함부로 쓰고 함부로 낭비하다가 하나님 앞에서 얼굴도 들지 못하는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이것만을 소원으로 삼고 남은 여생을 살면 우리 내면에 기쁨이 솟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모르는 기쁨이 솟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기쁨을 가지고 이 세상을 밝히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