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 연기(十二緣起, paṭicca-samuppāda)
마하시 사야도(Mahāsi Sayādaw) 법문
우 에 마웅(U Aye Maung) 영어 번역
First printed and published in the Union of Myanmar, March, 1982
김한상(수마나) 우리말 번역
한국 위빠사나 선원. (도서출판) 행복한 숲
12. 불선업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ā-abhisaṅkhāra)의 반대는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ā-abhisaṅkhāra)37입니다. 이러한 부도덕한 행위로 악처38 에 태어나기도 하고, 사람으로 태어나도 용모가 추하거나 병약한 몸을 갖게 됩니다.
이들 불선한 마음(akusala-citta)39은 모두 열두 가지인데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lobha-mūla-citta) 여덟 가지,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dosa-mūla-citta) 두 가지, 어리석음에 뿌리박은 마음(moha-mūla-citta) 두 가지, 이렇게 모두 열두 가지입니다.
탐욕에 뿌리박은 불선한 마음(법)은 사견과 결부된 네 가지와, 사견과 결부되지 않은 네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견과 결부된 네 가지 마음(법)가운데 두 가지는‘기쁨이 함께하고 자극받지 않은 마음(asaṅkhārika-citta)’과 ‘기쁨이 함께하고 자극받은 마음(sasaṅkhārika-citta)’입니다.
‘평온(upekkhā)이 함께하는 불선한 마음’도 위와 같이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쁨이 있고 사견이 없이 탐욕에 뿌리를 둔 마음’이 두 가지이고, ‘기쁨과 사견이 없이 탐욕에 뿌리를 둔 마음’이 두 가지입니다.
모든 업은 이 여덟 가지의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법) 중 하나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dosa-mūla-citta)은 ‘자극이 있는 업’과 ‘자극이 없는 업’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은 화냄, 낙담, 두려움, 혐오의 근원입니다.
두 가지 어리석음에 뿌리박은 마음은 의심(vicikicchā)과 들뜸(uddhacca)40입니다. 의심이란 불, 법, 승, 지계, 삼매, 내생 등에 대해 의심하는 것입니다. 들뜸은 심난하고 얼빠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수행을 해서 제어하지 않으면 마음은 좀처럼 고요해지지 않고 보통 이리저리 방황합니다.
그러나 들뜸이 악처로 떨어지게 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들뜸 이외의 다른 열한 가지 불선업은 어떤 경우에는 악처로 이끌고,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경우에도 병약함과 같은 나쁜 업의 과보를 받게 합니다. 이 열두 가지의 불선한 의도(cetanā)를 일러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ā-abhisaṅkhāra)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지길 바라기 때문에 현생과 내생에서 물질적 복리를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을 특징짓는 것은 대체로 탐욕과 성냄입니다. 선한 마음은 좋은 친구를 사귀고 법을 들으며 합리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일어납니다.
이기적인 스승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타락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한 재가신자가 선한 비구를 헐뜯었는데 죽어서 자신이 생전에 보시한 승원의 변소에 사는 아귀가 되었습니다.
그 아귀는 하늘 눈[天眼]으로 자기를 알아본 목갈라나 존자41에게 자기가 지은 악업을 말씀드렸습니다. 내생의 행복을 위해 물질적으로 승가42에 보시했지만 스승에 의해 잘못된 지도를 받은 사내의 운명은 얼마나 끔찍합니까! 이 이야기는 우리가 찾아야할 스승은 학식뿐 아니라 선한 기질도 함께 지녀야 함을 보여줍니다.
선한 사람의 특징은 남을 해롭게 하려는 행동, 말,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나 선한 비구와 사귀는 사람은 좋은 법을 들을 기회가 생기고, 만약 현명하게 생각하면 그의 마음은 선한 업으로 이어집니다. 반면에 못된 스승이나 친구, 그릇된 가르침과 부적절한 사유는 도덕적 붕괴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처음엔 결점 없는 성품을 지녔지만 타락된 사상으로 무너집니다.
이들은 도둑질, 강도, 횡령 등으로 유죄판결을 받아, 오랜 동안 쌓아온 명성이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이 모든 고통은 행복에 대한 전도된 인식에서 비롯합니다. 기대와는 반대로 곤란에 봉착해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습니다.
어떤 악행은 즉각적인 과보가 생기지는 않지만, 때가 되면 과보가 무르익어 고통에 빠지게 합니다. 만약 현생에서 악을 행한 자에게 업의 과보가 생기지 않는다면, 아귀가 된 승원 보시자의 경우처럼 내생에는 반드시 과보를 받습니다.
재가신자를 잘못 지도했던 스승은 죽은 후 운명이 더 비참했습니다. 자기 제자의 아랫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그 제자의 똥을 먹으며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악업의 과보는 참으로 무시무시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저지른 행위의 과보가 거꾸로 자기를 덮쳐서 무시무시한 고통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밀림의 어떤 부족은 풍작과 안전 등을 기원하며 신에게 동물을 제물로 바칩니다. 이러한 원시적인 믿음은 도시에 사는 일부 사람들에게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유력한 낫(Nat)43을 부처님처럼 숭배합니다.
또 종교적인 공양의식에서 동물을 잡아서 손님을 접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평범한 불교신자들도 이러한 관습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품고 있습니다. 보시하는 사람의 목적이 무엇이든 살생은 나쁜 업보를 받으며, 살생을 한 사람이 믿는 바와는 반대로 선한 행위가 아닙니다.
선한 행위는 도덕적인 청정을 특징으로 합니다. 희생자와 처지를 바꿔놓고 볼 때 생명체를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행위는 어떠한 의미로도 도덕적으로 청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피해자는 어쩔 수 없이 죽음과 학대를 당해야 합니다.
피해자가 만일 보복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반드시 보복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복수를 기원하며, 살생을 저지른 자가 내생에 죽임을 당하거나 악행으로 인해 지옥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경장(經藏)에는 살생의 과보에 대한 일화가 많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이나 천신으로 태어나기를 바라며 보시, 지계, 수행에 힘씁니다. 물론 자기가 지은 선한 행위로 인해 바라던 바가 이루어져 내생에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늙고 병들고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범천계에 가기를 갈망하여 선정을 닦습니다. 이들은 범천이 되어 여러 겁에 걸쳐 행복하게 살 것입니다. 그러나 수명이 다하면 인간이나 천신으로 다시 태어나고, 만일 악업을 지었다면 악처에서 태어날 것입니다. 결국 범천이 누리는 영광된 삶이란 것도 단지 전도된 인식일 뿐입니다.
행복이라는 환상은 범부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여기도록 하는 전도(顚倒,vipallāsa)44와 무명(avijjā)은 성스러운 도의 첫째와 둘째 단계(예류와 일래)에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으며, 불환도에 들어서도 수행자는 색계의 존재(色界有 rūpa-bhava)와 무색계의 존재(無色界有 arūpa-bhava)를 삶의 지복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 단계(예류, 일래, 불환)에 들어선 성자들은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범부의 경우에는 무상을 항상한 것으로, 정신-물질의 괴로움을 행복으로, 무아를 자아로, 괴로운 것을 즐거운 것으로 여기는 네 가지 전도45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이러한 전도와 결부된 것이 네 가지 무명입니다. 이러한 전도와 무명으로 인하여 몸, 말, 생각으로 짓는 모든 행위는 선하고 불선한 업을 일으킵니다. 선업은 믿음, 알아차림 등과 함께 의도적인 노력이 있을 때 생겨납니다. 마음을 그냥 내버려두면 악업을 짓기 쉽습니다.
■ 역주(譯註) :
37.「청정도론」(Vis.ⅩⅦ.60)에 따르면“'공덕이 되는 행위(puññā-abhisaṅkhāra)'는 보시, 지계 등으로 생긴 여덟 가지 욕계의 유익한 의도(cetanā)와 수행으로 생긴 다섯 가지 색계의 유익한 의도 등 13가지 의도이다.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ā-abhisaṅkhāra)'는 살생 등으로 생긴 12가지 불선한 의도이고, '흔들림 없는 행위(aneñja-abhisaṅkhāra)'는 수행으로 생긴 네 가지 무색계의 선한 의도이다. 이처럼 세 가지 상카라는 29가지 의도이다.”
38. 악처(惡處)로 옮긴 아파야(apāya)는 ‘분리, 손실, 타락’등의 뜻이며, 다음 생에 태어나는 불행한 상태를 뜻하는 전문술어로 정착되었다. 고통과 비참함이 즐거움보다 훨씬 더 많은 세계로 불선업을 저지른 이들이 태어나는 곳의 통칭이다. 여기에는 ① 지옥(niraya) ② 아귀(peta) ③ 축생(tiracchānayoni) ④ 아수라(asura)의 네 가지가 있다. 중국에서는 사악도(四惡道), 사악취(四惡趣)등으로 옮겼고 영어로는 four nether worlds, four lower worlds라 한다.
(1) 지옥(地獄): 주석서(AAṬ)에서는‘아무런 즐거움이 없는 곳‘으로 설명한다. 31가지 중생계[三界]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세계로서 전생의 악업의 대가로 극심한 고통만이 있는 곳이다. 주석서들에 따르면 지옥에는 여덟 가지 대지옥, 즉 팔열지옥(八熱地獄)이 있는데 ➀ 등활(等活 Sañjīva) ➁ 흑승(黑繩 Kālasutta) ➂ 중합(Saṅghāta) ➃ 규환(叫喚 Roruva) ➄ 대규환(大叫喚 Mahā Roruva) ➅ 초열(焦熱 Tāpana) ➆ 대초열(大焦熱 Mahā Tāpana) ➇ 무간(無間 Avīci)지옥이 그것이다. 뒤의 지옥으로 갈수록 고통은 더 심해지며 이들 가운데 무간지옥이 제일 아래 있고 가장 무시무시한 곳이다.
(2) 아귀(餓鬼): 원래 조령신(祖靈神)을 뜻했다. 그런데 제사에서 후손들이 올리는 음식을 기다리는 자들이라는 뜻에서 불교에서‘굶주린 귀신’으로 정착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귀는 사는 영역이 따로 없이 숲이나 습지나 묘지 등 인간이 사는 세계에 같이 산다고 한다. 인간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간혹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고 천안(天眼)으로 보이기도 한다. 띠로꿋다 경(Tirokudda Sutta)에 나오듯이 이들 가운데 ④ 파라닷뚜파지위노만이 살아있는 친척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행한 공덕을 나누어 줄때 그 공덕을 누릴수 있고 더 나은 선처로 갈수 있다고 한다.『소부(小部)』의 「아귀사(餓鬼事)」는 악업으로 인해 이러한 아귀로 태어난 중생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3) 축생(畜生): 축생계는 서로 죽고 죽이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기 때문에 사랑, 연민이나 기타 영적인 가치가 들어설 자리가 없고 동물들은 대개 고통과 두려움에 휩싸여 죽기 때문에 다시 악처에서 다시 태어날 확률이 크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동물도 선한 마음을 일으켜서 내생에 인간계나 천신계에 태어날 수도 있다.
(4) 아수라(阿修羅): 원어 아수라(asura)는 문자적으로 유희하거나 빛을 발하지 못하는 존재를 의미하고 경에서는 제석(Sakka)을 왕으로 하는 삼심삼천의 천신(deva)들과 싸우는 존재로 나타난다. 하지만 악처에 속하는 아수라는 그러한 아수라와는 구별해야 한다. 이들은 괴물처럼 생기고 집채만한 배에 입이 너무 작아 제대로 먹거나 마실 수 없는 일종의 아귀이다. 이 가운데 깔라깐지까(Kālakañjika)가 가장 비참하고 고통이 심한 아수라이다.
39. 아비담마에서는 불선한 마음(akusala-citta)을 먼저 불선한 마음의 가장 강력한 뿌리(mūla)인 탐욕(lobha), 성냄(dosa), 어리석음(moha)을 통해서 분류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본문 뒤의 도표참조
40. 들뜸으로 번역되는 웃닷짜(uddhacca)는 ‘위로 가버린 상태, 올려진 상태’를 뜻하며 들뜨고 흥분되고 불안한 마음상태를 나타낸다. 중국에서는 도거(掉擧)로 한역되었고 영역은 restlessness이다. 이 들뜸은 경전에서 후회(kukkucca)와 합성되어 다섯 가지 장애(nīvaraṇa)가운데 네 번째 장애로 나타난다. 또한 이 들뜸은 10가지 족쇄(saṁyojana)중의 아홉 번째 족쇄로 아라한이 되어야만 비로소 완전히 극복이 된다. 그래서 모든 불선에 항상 존재하는 원초적인 동요라고 할 수 있겠다.
41. 목갈라나(Moggalāna) 존자는 마하목갈라나(Mahā-Moggalāna)라고도 하는데 라자가하(Rājagaha)의 꼴리따 마을(Kolitagāma)의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나 마을 이름을 따라 꼴리따(Kolita)라 불리었다. 또 어머니의 이름이 목갈리(Moggalī) 또는 목갈리니(Moggalinī)였기 때문에 목갈라나(Moggalāna)로도 불리게 되었다. 목갈라나가 태어난 날에 사리뿟따도 우빠띳사(Upatisa)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어릴적부터 사리뿟따와 절친한 사이였는데 하루는 자신들을 따르는 바라문 젊은이들과 함께 라자가하의 산마루 축제[山頂祭]를 보러갔다가 갑자기 삶의 덧없음을 느끼고는 함께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다.
처음에는 사리뿟따와 함께 불가지론(不可知論)을 펴는 산자야(Sañjaya)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사리뿟따로부터 앗사지(Assaji) 존자의 연기법의 게송을 전해 듣고 예류과를 얻었다. 그리고는 사리뿟따와 함께 승가에 들어와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사리뿟따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를 비구들이 본받아야 하는 이상적인 제자라고 선언하셨다.(S.ii.235; A.i.88). 부처님은 「제분별경(諸分別經 Saccavibhanga Sutta)」(M.iii.248)에서 두 상수제자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설명하셨다.“사리뿟따는 아이를 낳는 어머니와 같고 목갈라나는 갓난아이를 돌보는 유모와 같다. 사리뿟따는 제자들을 가르쳐 예류과에 들게 하고 목갈라나는 더 높은 단계로 이끌어 올려준다.”목갈라나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와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이자 도반으로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 친분은 부처님의 말년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세존께서는 두 상수제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로 하여금 승가의 일을 분담하여 보살피도록 하시고, 여래가 안 계실 때에는 그들이 승가의 일을 책임지도록 하셨다. 또한 부처님은 긴요한 상황이 생기면 특별한 임무를 두 상수제자에게 부여하시는 일이 자주 있었다. 예컨대 데와닷따(Devadatta)가 웨살리(Vesāli)출신의 갓 출가한 비구들을 꼬드껴서 상두산(象頭山)으로 데리고 가자, 부처님께서는 두 상수제자를 보내어 데와닷따가 잠시 잠들어 있는 틈을 타 500명의 비구들을 설득하여 모두 되돌아오게 하셨다. (Vin.2:199-200)
목갈라나 존자는 신통력에서 누구보다도 으뜸이었다.(A.i.23). 존자는 살아 있는 형상을 무한대로 만들 수 있었고, 원하는 어떠한 형태로도 변신할 수 있었다. 또한 수미산(須彌山)을 강낭콩처럼 으깨 버릴 수 있었으며(DhA.iii.212), 지구를 손가락으로 돗자리처럼 둘둘 감을 수도 있었고, 지구를 옹기장이의 물레바퀴처럼 돌릴 수도 있었으며, 지구를 펼쳐진 우산처럼 수미산위에 올려 놓을 수도 있었다고 한다. 어느 때 부처님이 위층에 계시는 데도 불구하고 아래층에서 잡담을 하면서 노닥거리는 비구들을 따끔히 혼내주라는 세존의 명을 받아서 하늘 높이 치솟아 올라서는 엄지발가락 끝으로 강당을 흔들어 그들을 혼비백산하게 하기도 하였다.(S.v.269ff; SNA.i.336f) 한때 목갈라나 존자는 제석(Sakka)이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많은 이익을 얻고 있는지를 확인하러 삼십삼천으로 갔다. 하지만 제석은 자신의 영화에만 도취되어 너무 자만하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무상함을 일깨워 주고자 손가락으로 제석의 웨자얀따(Vejayanta) 궁전를 크게 흔들었다.(M.i.251ff). 목갈라나 존자는 또한 부처님이 바까(Baka) 범천의 오만함을 꺽는데 도움이 되어드리고자 직접 바까 범천의 처소로 가기도 하였다. 하지만 주석서들(ThagA.ii.188ff)에 따르면 목갈라나의 신통력의 극치는 독룡(毒龍) 난도빠난다(Nandopananda)를 조복시킨 일이었다. 목갈라나 존자는 별도의 선정에 들지 않고서도 아귀나 다른 중생계의 존재들을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었다고 한다.(DhA.ii.64; iii.60, 410f., 479; S.ii.254ff). 목갈라나 존자는 지혜에 있어서도 사리뿟따 존자 다음가는 위치에 있었다.
「사라방가 본생경(Sarabhaṅga Jātaka)」(J.522)에 따르면 존자는 신통력으로 종종 웃사다(Ussada) 지옥과 천상계를 자유자재로 드나들면서 외도의 신자들은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고 부처님의 신자들은 천상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알려주었는데 이렇게 되자 세상 사람들이 점점 외도를 멀리하고 부처님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러자 이에 앙심을 품은 나형외도(裸形外道)들은 사마나굿따까(Samanaguttaka)라는 도적두목에게 천금을 주고 목갈라나 존자를 죽이라고 사주했다. 도적들은 존자를 죽이려고 깔라실라(kālasilā)로 갔지만 멀리서 그들을 본 존자는 하늘을 날아 화를 면하였다. 둘째 날도, 셋째날도 존자는 신통력으로 자리를 피해 살 수 있었지만 7일째가 되자 전생에 지은 순후업(順後業)이 그 과보를 얻을 기회가 무르익었기 때문에 더 이상 예전처럼 신통력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존자가 지었던 순후업은 주석서들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먼저「본생경」주석서(J.522)에 따르면 존자는 과거전생의 어느 때 아내의 말을 쫒아 눈먼 부모를 죽이려고 수레에 태워 숲속으로 데리고 가서 도적이 나온 것처럼 꾸며 부모를 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모는 시력이 없었기 때문에 자식이 때리는 줄은 모르고 진짜 도적이라 생각하고는 아들 보고 빨리 피하라고 소리쳤다. 이러한 말에 감동한 아들은 원래 생각을 접고 부모를 도로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하지만「법구경」주석서(DhA.iii.65ff)에 따르면 존자는 실제로 숲속에서 부모를 때려죽였고 이 악업으로 무수한 세월동안 무간지옥에서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아무튼 이런 업은 오랫동안 그 과보를 받을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재속의 불씨처럼 묻혀 있다가 이렇게 존자의 최후 몸을 붙잡았다.
도적들은 존자를 때려 뼈를 부수어 잘게 썬 볏짚처럼 만들어 놓고는 이제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떠났다. 잠시 후 의식을 회복한 존자는 죽기 전에 부처님을 뵈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부서진 몸을 신통력으로 한데 묶고 하늘로 솟아올라 공중으로 부처님께 가서 인사를 드리고 이제 자신이 반열반에 들 때가 왔음을 알렸다. 그러자 부처님은 마지막 설법을 할 것을 요청하셨고 이에 존자는 여러 기적들을 나투고는 법문을 하였다. 그리고는 깔라실라로 가서 반열반에 들었다. 이때 여섯 욕계천상에서는 대소동이 일어났고 천신들은 하늘의 꽃, 향료와 백단향가루와 갖가지 섶나무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다비장 주변 1유순 이내에 꽃비가 내렸다. 존자의 다비식은 천신과 인간들의 성대한 공경과 예배 속에서 7일 동안 아주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그리고 다비식이 모두 끝나고 나자 부처님은 존자의 사리를 잘 수습하여 죽림정사(Veḷuvana)에 탑을 세우게 하셨다. 사리뿟따 존자는 양력 10월과 11월에 걸쳐있는 깟띠까(Kattika)달 보름날에 입적하였고 보름 후 초승달이 떠오르는 날에 목갈라나도 입적하였다.(SA.iii.181) 그로부터 반년 후에 부처님께서도 무여의열반에 드셨다고 전해진다.
「불종성경」(B.i.58)에 따르면 목갈라나 존자의 몸은 푸른 연꽃이나 비구름의 색깔을 띠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스리랑카에서는 존자가 최근의 과거에 지옥에서 고통 받은 것으로 인한 것이라는 구전이 전해지고 있다.
주석서에 따르면 목갈라나 존자가 마지막 생에 고따마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된 것은 1아승지 10만겁 전 아노마닷시(Anomadassī) 부처님 제세시 시리왓다나(Sirivaḍḍhana)라는 바라문으로 있을 때 사리뿟따 존자의 전신인 사라다(Sarada)와 함께 미래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되고자 원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19세기 중엽 영국의 커닝햄(Cunningham)에 의해 인도의 산치(Sanchi) 대탑에서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의 사리가 들어있는 두 개의 석재 사리함이 발굴되었고 두 존자의 사리 중의 일부가 1950년 10월 20일 미얀마에 전해져 제6차 결집의 사적지에 세워진 양곤의 까바예(Kabaye) 파고다에 안치되었다.
42. 승가(僧伽)로 음역한 상가(saṅgha)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함께 모인 집단을 뜻하며 불교에서는 좁게는 비구, 비구니의 승단, 넓게는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사부대중의 모임을 뜻한다.
43. 낫(Nat)은 오랫동안 미얀마인의 인생관과 우주관을 지배해온 민간 토착신앙의 대상으로 ‘정령’이나 ‘귀신’등을 의미하며 토지, 나무, 산, 하천 등의 자연정령과 마을수호신, 택지수호신, 도로수호신 등 다양한 개인 및 지역의 수호신을 포함한다.
44. 여기서 보듯, 본서에 나오는 영어 illusion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전도(vipallāsa)와 무명(avijjā)을 함축하고 있는 표현이므로 이를 문맥에 따라 전도된 인식과 무명으로 옮겼다.
45. 네 가지 전도는 빨리 경전과「청정도론」등의 주석들에서 항상하다, 즐겁다, 자아다, 깨끗하다는 상락아정(常樂我淨)에 대한 네 가지 전도된 인식(vipallāsa-saññā)들로 정형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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