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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전도여행과 섬
그리스 지역 지도
미항 로마로 압송돼 가던 바울이 무라에서 갈아탄 알렉산드리아호는 풍랑으로 인해 그레데 섬 동쪽 살모네 앞을 지나 남쪽 해안을 따라가다가 간신히 라새아 성에서 가까운 미항에 도착했다. 바울은 금식하는 절기가 지나 행선하기가 위태함을 알고 이곳에서 겨울을 보낸 후 이달리야(이탈리아)로 가기를 백부장에게 권했다(행 27:6∼11) 미항(Fair Havens)은 잘 정돈되지 않은 채 해수욕장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지명이 의미하는 ‘아름다운 항구’ ‘좋은 항구’라는 뜻 그대로 경치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리더노스곶의 동쪽에 있는 하나의 만과 동일시되는 미항의 항구는 동쪽과 남동쪽으로 열려있다. 라새아의 유적지를 발견했던 스프레트 선장은 1853년에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바울에게 드렸던 한 교회의 유적을 발견했다(행 27:8). 성경에 보면 바울을 로마로 압송해 가던 배가 이곳 미항에 정박해 있는 동안 바울은 이곳에서 겨울을 지나기를 백부장에게 권했으나 그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고 미항을 떠나 뵈닉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났다(행 27:7∼15)고 기록하고 있다. 뵈닉스는 미항에서는 배로 3∼4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다. 그렇다면 선장과 선주가 말한 대로 몇 시간만 가면 겨울을 안전하고 편하게 보낼 수 있는 뵈닉스로 가는 것이 더 합리적인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몇 시간의 항해만 하면 겨울을 편하고 안전하게 보낼 수 있는데 구태여 불편한 미항에서 겨울을 보내자는 바울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합리적인 판단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바울의 태도를 더 기뻐하시는 것을 미항을 떠나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만나 배가 파선 지경에 이른 사건에서 깨닫게 하셨다(행 27:9∼26) 바울이 이곳에서 잠시 머무르는 동안 기도했다고 전해지는 바울동굴은 항구 언덕 위에 나무십자가를 세워놓았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다.
사모드라게 섬은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들렀던 곳으로 성경에서 꼭 한번 언급된 곳이다(행 16:11). 사모드라게(Samothrace: 트라키아의 사모스라는 뜻) 섬은 트라키아 해안에서 떨어져 있는 그리스 군도상의 섬으로 에게해 동북부에 위치해 있다. 이 섬은 그리스로부터 흑해로 들어가는 굽은 뱃길에 위치하고 있어 고대에는 여행자들과 식민지 개척자들,그리고 상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항구 중의 하나였다. 이 섬에는 4개의 산봉우리가 있는데 그 중 가장 높은 펩가리산은 해발 1650m로 에게해의 선원들에게 등대 구실을 하고 있다. 이 섬에는 BC 8세기에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이곳에서 트라키아인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 섬을 트라키아의 사모스라고 명명했다.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은 이 섬의 꼭대기에 서서 트로이 전쟁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전성기에는 해군기지의 역할도 한 곳이다.
19세기 중엽 ‘사모드라게의 승리’로 알려진 배의 유물이 발견된 후 시작된 발굴작업이 1938년 이후 재개돼 알렉산더와 그의 후계자들 시대에 건축된 12개의 건물 잔해를 포함하는 ‘위대한 신들의 사원’의 유적을 발굴해냈다.
이 위대한 신들에 대한 예배는 헤로도토스와 플라톤,아리스토파네스의 글에도 언급돼 있다. 그 예배의 제사에는 각 도시의 사절과 순례자들이 그리스 전국과 소아시아 지역에서까지 모여들었다.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때 네압볼리로 가는 도중 이곳을 방문했다(행 16:11). 바울이 탔던 배는 일단 사모드라게 섬에 기항했는데 아마 기항한 곳은 현재 이 섬의 북서쪽에 있는 가장 큰 항구인 카마리오티사 항구였을 것이다. 초기 기독교 교회의 유적이 1938년 이 항구의 변두리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교회는 바울이 마을 상륙을 기념해 세운 것인지도 모른다. 바울은 터키의 드로아에서 이곳 사모드라게를 거쳐 유럽의 첫 입항지인 네압볼리로 갔다. 항구에서 6㎞쯤 떨어진 유적지에는 아직도 많은 유적이 남아있다. 특별히 니케(Nike) 신의 신전 기둥이 있다.
사모스 섬은 터키 트로길라온곶에서 1.6㎞ 지점에 있으며 에게해 동남부 이오니아 제도 중의 한 섬으로 에베소 남서쪽, 밀레도의 북서쪽에 있다. 이 섬은 동서의 길이가 43㎞,가장 넓은 곳은 24㎞ 정도이다. 흰 모래 해안과 마을,그리고 고기잡이 항구가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이곳을 한글개역 성경에서는 사모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섬의 주요 도시들은 바울 시대에는 자유시였다. 바울은 전도여행 중 기오 섬을 떠나서 사모스 섬에 들렀다가 다음날 밀레도로 갔다(행 20:15). 특히 피타고리온 항구는 피타고라스 정리로 유명한 그리스 수학자 피타고라스의 고향으로 그의 이름을 따라 명명되었다. 그래서 이 항구 부두에는 삼각형 형태의 피타고라스 동상이 세워져 있다. 항구 옆에는 해수욕장,언덕 위에는 교회와 옛 성채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 처음으로 정착한 사람들은 기원전 11세기께 이오니아인들로 이들은 일찍부터 무역에 나서서 기원전 620년께에는 지브롤터 해협 밖에까지 진출하였다. 기원전 6세기에는 폴리크라테스라의 통치로 절정기를 이루었으며 문학 예술 철학 등 다방면으로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수도가 건설되고 항구와 헤라 신전도 건조되었는데 피타고리온 항구 산중턱에는 당시 바위를 파서 건설한 수로가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이후 아테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가 헬레니즘 시대에는 남쪽에 있는 로도스 섬(행 21:1)의 번영과 함께 쇠퇴하였다. 그
후 기원전 133년 오랜 기간 로마의 속주로 있다가 15세기 이후에는 터키의 지배를 받았고 1923년에 로잔 조약에 의해 그리스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모스 섬의 동남쪽 해안에는 평야지대가 있어 포도 올리브 목화 등이 생산되는데 이곳의 포도는 예부터 맛이 좋기로 유명했으며 오늘날에도 이곳의 포도주는 국제적으로 인정 받고 있다. 그리고 이곳은 섬지역치고는 나무가 많아 조선업이 발달했는데 빌린 차로 섬을 가로지르자 지금도 산중턱에서 나무로 배를 만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현재 이곳에서 가장 큰 도시는 북쪽에 있는 바티항으로 천혜의 입지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다.
해변에는 역사박물관이 있는 공공도서관을 비롯해 은행 여행사 영국?독일?프랑스영사관들이 들어서 있고 일렬로 늘어선 쇼핑점과 카페,레스토랑들이 아름다운 해안과 잘 어우려져 바티항의 독특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4만여명이 거주하는 이 섬의 중앙에는 해발 1433m나 되는 케르케테우스 산이 있다. 헤라 신전은 사모스 섬의 예배장소였으며 문화적으로 자랑할 만한 건축물이다. 이곳의 신전은 사모스의 역사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기원전 2000년초에 헤라 신전은 투박한 헤라상을 가진 단순한 은신처에 불과했으나 기원전 8세기에는 길이 100ft의 헤라 신전이 건축되었고 이후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던 기원전 7세기에는 더욱 화려한 신전이 재건축되었다. 그 러다가 100년후인 기원전 6세기께에는 고대 그리스 신전 중 가장 큰 신전이 되었다. 독재자 폴리크라테스가 지배할 당시에는 길이가 108.7m나 되는 이오니아식의 장엄한 신전이 재건축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헤라 신전에는 기둥 1개만 외롭게 우뚝 솟아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부서지고 무너진 채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이 신전에서는 기원전 6세기 중엽 사모스파의 작품인 여성 입상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원주를 연상시키는 원통형의 직립상으로 오른손은 겨드랑이에 붙이고 왼손은 가슴에 대고 있으며 세로로 섬세하게 주름이 새겨진 키톤(chitoon:그리스에서 기원전 8세기 무렵부터 남녀가 함께 입었던 옷)을 입고 있다.
이 여성 직립 입상 중에서 잘 알려진 것 가운데 하나가 현재 파리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케라뮤에스 봉납의 부인상’이다. 이러한 엄청한 규모의 헤라 신전이 있었던 사모스 섬에 오늘날 도시 뿐 아니라 산중턱과 꼭대기까지 쥬도코스 피기 수도원을 비롯하여 수많은 수도원과 교회가 세워진 것은 바울이 이곳에 최초로 뿌린 복음의 씨앗 때문이다
기오 섬은 에게해의 동부 중앙지역에 자리잡고 있으며 터키 본토에서 직선거리로 8㎞밖에 안 떨어져 있지만 그 사이에는 작은 섬들이 산재해 있다. 기오 섬은 남북이 51.2㎞,동서가 12.8∼28.8㎞에 이른다. 이 섬의 가장 큰 항구는 섬 이름과 같은 기오 항으로 오늘날의 명칭은 시오(Chio) 또는 히오스(Hios)이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고스 섬에서 레스보스(성경의 미둘레네)로 가려던 헤롯왕이 북풍에 의해 기오 섬에 밀려와 그 도시의 기둥들을 재건할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바울 시대에 기오 섬은 아시아의 로마 영토에 있는 자유도시 중의 하나였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던 노정에서 미둘레네로부터 남으로 항해하여 밤새도록 기오 맞은편 본토에 정박하였다가 다음날 보다 더 넓은 바다를 건너 사모에 도착하였다(행 20:14∼15). 그러나 나는 바울과는 반대 방향인 남쪽의 사모스 섬에서 이곳 기오 섬으로 들어왔다.
이 섬의 최초의 주민은 크레타인과 가리아인들이었으나 이오니아인에게 정복되었다. 이오니아인들은 이곳을 번창시켰다. 현재 이 섬의 가장 큰 기오 항은 비잔틴 시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도시답게 아직까지도 당시의 모습들이 남아 있다. 도시의 중심부에는 1210년 터키 시대에 세워진 성의 일부가 남아있는데 지금은 조각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의 특산물로는 청색의 대리석이 유명한데 지금도 많은 양의 대리석이 채굴되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생산되는 비단은 프랑스 리옹으로 수출될 만큼 질이 좋으며 그 외에 오렌지 아먼드 유향수지 피혁 등도 수출 품목들이다. 항구의 서쪽에는수도원이 자리잡고 있다. 유네스코 지정문화재인 이 수도원은 1045년 세워진 비잔틴 시대의 것으로 건물 중심부는 기둥이 없는 15.5m 높이의 둥근 지붕에 정사각형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곳에는 당시의 유명한 성모 마리아의 이콘이 있다. 그러나 1822년 터키인들에 파괴돼 지금은 모자이크 벽의 일부만 남아 있다. 그리고 기오 섬에는 호메로스를 비롯하여 유명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가우다 섬
가우다 섬은 로마로 압송되어 가던 바울이 탄 배가 유라굴라라는 광풍을 만났을 때 간신히 피난했던 곳이다(행 27:14∼16). 가우다섬은 오늘날의 그리스어로는 ‘가브도스’라고 하며 이탈리아어로는 ‘고조’(Gozzo)라고 한다. 이 섬은 그리스 최남단에 있는 작은 섬이다. 바울을 로마로 압송해 가던 배가 항해 중 풍랑을 만나 그레데 남쪽 해안을 따라 표류하다가 이곳 가우다 남쪽 아래쯤 왔을 때 간신히 피난할 수 있었다(행27:15∼16)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들른 로도(Rhodes) 섬은 고스 섬 남쪽으로 85㎞쯤, 터키 소아시아의 해협으로부터는 약 17㎞ 떨어져 있는 지중해의 작은 섬이다. 에게해 대부분의 섬과 마찬가지로 로도 섬도 터키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으나 그리스에 속해 있다. ‘로도’는 섬 이름인 동시에 항구 이름이기도 하며 그 이름의 뜻은 ‘장미꽃’이다. 섬의 크기는 에게해에서 그레데 다음으로 크며 너비 67.2㎞,길이 27.2㎞가 된다. 이 섬은 땅이 비옥하고 기후가 온화하여 숲이 무성하고 농산물과 과일이 많이 생산된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도중 고스를 떠나 이곳을 거쳐 바다라로 갔다(행 21:1). 바울의 배가 정박한 곳은 공항 근처의 로도 항구가 아니라 남쪽에 있는 린도스라는 항구이다. 아크로린도스는 북쪽 로도스시에서 동해안을 따라 약 55㎞ 지점에 위치해 있다.
현재의 아크로린도스는 마을의 정상에 있다. 아크로린도스에느 바울의 정박을 기념하는 교회가 항구 남쪽 해안에 세워져 있다. 로도 섬의 옛 항구인 만드라키 항구(로도 항구 바로 옆)는 고대 7대 불가사의인 태양신 헬리오스 거상이 있는 곳이다
고스섬
사도행전 21장 1절에 언급되고 있는 고스 섬은 터키의 밀레도 항구에서 남쪽으로 68㎞ 거리에 있는 비옥한 작은 섬이다. 3만여명이 사는 작은 이 섬은 바울 사도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도중 일박하고 이튿날 로도 섬으로 향한 곳이다(행 21:1). 로마 제국이 통치할 때는 자치도시였으며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에는 주치의인 고안의 간언에 따라 모든 세금을 면제해주었다. 로마가 멸망한 뒤에는 오스만제국과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1947년 그리스령이 되었다. 오늘날 섬 사람들은 대부분 중심도시인 고스시에 살고 있으며 섬 중앙에는 해발875m의 오로메돈 산이 있다.
지중해성 기후인 이곳은 옛날에는 고운 직물과 포도주가 명물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어업은 물론 밀 감귤류 포도 채소류가 많이 생산되고 있다. 특히 작은 섬임에도 불구하고 구리와 철 등 광산물도 많이 나오고 있다. 고스 섬은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히포크라테스의 출생지이다. 또한 이곳은 화가 아펠테스(Apeltes), 시인 필레테스(Pilletes) 등을 배출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기원전 5세기께 히포크라테스는 이곳에 의학교를 세웠다. 현재 이 섬의 코스(고스)시에는 2400년전 히포크라테스가 그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 된 플라타너스 나무가 있다. 그래서 이 섬 서쪽에는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유적이 있다. 아스클레피오스 유적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는데 왼쪽에 대신전터임을 보여주는 7개의 기둥이 서 있고 오른쪽에는 2개의 기둥이 남아 있는 또 다른 작은 신전터가 있다. 다시 계단을 오르면 아폴론 신전의 제단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항구 옆에는 바울 도착을 기념하는 그리스정교회가 있다.
멜리데섬 말타 지도
멜리데 바울 만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로마로 압송되던 바울이 탔던 배가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만나 14일 동안 표류하다가 도착한 멜리데(Melth) 섬은 오늘날 몰타공화국이다. 이곳은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섬 남쪽에 위치해 있다. 멜리데 섬은 이탈리아 남부의 시실리 섬 남쪽 약 100㎞,아프리카까지는 약 340㎞ 지점에 있는 작은 섬이다. 현재는 몰타(Malta)라고 불린다. 섬의 길이는 약 29㎞,너비는 13㎞,높은 곳은 해발 258m 정도이다. 남서쪽은 바다와 급경사를 이루는 가파른 절벽이고 북동쪽 해안에는 크고작은 만이 많이 있다. 멜리데는 지중해를 동서로 횡단하는 여행자나 북쪽에서 남쪽 아프리카로 건너가는 여행자에게 매우 중요한 곳이다. 현재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조선소 폐쇄와 수출입 저조로 경제 사정이 매우 나쁜 상황이다.
바울이 이 섬의 추장인 보블리오를 만난 곳에는 기념교회만 세워져 바울이 보블리오를 만났다는 것만을 전해주고 있다. 바울과 일행은 이곳에 도착하여 보블리오를 만나 사흘 동안 그의 집에서 머무르면서 후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바울은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있는 보블리오의 부친을 기도와 안수로 고쳐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병자도 고쳐주었다(행 28:1∼10). 그래서 이 섬의 가장 큰 항구 발레타시 언덕에는 보블리오를 기념하는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이는 보블리오가 바울과 일행 276명을 잘 대접해준 것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이다. 이 교회 앞에는 보블리오 동상이 세워져 있다. 표류하던 바울이 처음 도착했다는 곳은 발레타에서 북서쪽으로 12.9㎞쯤 떨어져 있다.
바울은 금식 절기가 지난 뒤 그레데의 미항을 떠나 항해하다 난파돼 표류하였고 이곳 멜리데 북서쪽에 상륙하였다(행 28:1). 오늘날 이곳 해안을 사람들은 바울만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겨울에 이곳에 도착했는데 날씨가 춥자 원주민들은 불을 피워 따뜻하게 바울 일행을 접대했다.
그때 뜨거움을 참지 못한 독사가 나와 바울의 손을 물자 원주민들은 ‘저가 살인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했다’(행 28:4)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은 손이 붓거나 쓰러져 죽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런 바울을 신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뱀에게 물린 바울이 죽지 않은 사건을 기념하는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이곳 멜리데 섬은 이외에도 중앙의 라바트에 바울 기념교회와 카타콤 등 바울과 관련된 유적이 많이 있으며 모스타에는 유명한 모스타돔이 있다.
멜리데 바울 만
멜리데 발레타 항구
멜리데 발레타 고건축물
멜리데 발레타 시내
멜리데섬 성당 내부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멜리데 그레이트 항 멜리데섬 말타 므나즈드라 고건축물
멜리데섬 말타 므나즈드라 유적
멜리데섬 말타 므나즈드라 유적 바울의 전도여행 ■ 제1차 전도여행 : 바울의 대 전도여행은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에게 대한성령의 지시에 의해 시작되었다(행 13:1- 3). 교회는 이 지시에 따라 바나바와 바울을 전도사로 파송하게 되었다. 요한 마가가 조수로 동행하였다. 이들은 먼저 구브로 섬에건너가 섬 전체를 순회하고 그 후 소아시아에 건너가 밤빌리아의 버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을 돌아다니면서 전도하였다. 이것이 소위 제1차 전도여행인데, 사도행전 13장, 14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바울이 왜 이 코스를 취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바울이 이때 소아시아의 남해안을 따라 전도할 계획이어었는데, 버가에서 풍토병인 말라리아에 걸렸으므로 건조한 고원 지방인 갈라디아 지방으로 발길을 돌렸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어떤 학자는 바울이 지금까지 전도한 수리아, 길리기아의 주변 지방으로 전도의 범위를 확대하는 뜻으로 이 여정을 택했다고 한다. 이 전도여행의 구체적인 내용은 사도행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생략하고 일반적 고찰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 소아시아 – 아시아의 서쪽끝을 가르킴 )
① 이 여행의 처음에는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구브로 섬 바보 전도이후는 거의 `바울과 바나바' 또는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로 고쳐 기록되어 있다. 즉, 여행의 중간 이전에 이미 바울은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이방인에 대한 사도로서의 실력을 발휘하기에 이른 것을 시사하고 있다. 바울이 바보에서 서기오 바울을 개종시킨 때부터 누가는 히브리 이름 사울을 라틴 이름 바울로 바꾸어 놓았다.
② 바울은 항상 지방의 중심 도시에 집중적으로 전도하였다. 이것은 그의 전도 방침의 하나였다. 혹은 주님의 재림이 가까왔다는 신념에서 하루 속히 가급적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도시 중심의 전도 방법을 택한 것 같다. 또 도시 출신인 그가 특히 도시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③ 그는 어떤 도시에 들어가면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서 전도했다. 이것은 첫째, 동포를 구원하려는 생각에서였으나, 둘째, 유대인 회당에 출입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즉 경건한 이방인 구도자를 인도하기 위해서였다고 믿어진다. 초대 기독교가 눈부신 발전을 할 수 있었던 큰 원인 중의 하나는 이미 유대교에 의해 종교적 윤리적으로 양육되고 있던 이방인 구도자가 계속 기독교로 개종한 데 있다. 바울은 재빨리 이점에 착안했던 것이다.
④ 바울의 메세지는 대체적으로 유대인에 대해서는 예수에 의한 구약 종교의 성취 완성, 이방인에 대해서는 유일하시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실재를 역설하여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파하였다. 사도행전 13:16 41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설교, 14:15 17의 루스드라인에 대한 설교 등은 그의 메세지의 내용이 있다.
⑤ 바울은 단순히 설교하고 신도를 만들 뿐만 아니라 교회를 조직하고, 장로를 세우고 성도의 교제를 유지시키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가 귀로에 자연스럽고 안전한 더베, 다소, 안디옥의 코스를 택하지 않고 지금까지 더듬어 온 길을 다시 순회한 것은 이와 같은 교회 조직을 촉진시키고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열렬한 전도자임과 동시에 용의주도한 목자인 바울의 면목을 엿볼 수 있다. 이 전도여행 후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말하고 감사했다.
■ 예루살렘 회의 : 상술한 바와 같이 바울의 이방인 전도는 대 성공적이었으나 유대주의적 신자들은 전통을 중시하여 이를 기뻐하지 않고 그들 사이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바울 일행이 안디옥 교회에서 전도여행의 결과 보고를 하고, 일동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을 때, 유대에서 온 유대주의적인 어떤 신자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행 15:1)고 주장하여 바울의 예수를 믿는 신앙에 의한 구원의 교리에 정면 도전했다. 이 때문에 교회 내에 분규와 논쟁이 일어났으므로 이 문제에 대해 예루살렘에서 바울, ˙바나바, 사도들, 그리고 장로들이 회집하여 협의하게 되었다. 갈라디아서 2장은 이때의 사정을 기록한 것이며, 사도행전도 이 회의를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 회의 결과는 기독교의 장래를 결정할 만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격렬한 논쟁 끝에 예루살렘의 중심적 사도들, 특히 베드로가 바울의 입장을 지지하여 유대주의적 입장을 부결함으로써 논쟁은 종결되었다. 이때 베드로는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은 줄을 믿노라"라는 연설을 했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라는 결의문을 각 교회에 보내자는 야곱의 제의가 채택되었다. 바울은 복음의 자유원칙이 승인되었으므로 야곱의 제의에 찬성했고, 그 결의문을 이방인 교회에 주지시키는 역을 바나바, 바사바, 실라와 더불어 맡았다. 이것은 바울측의 승리였다. 원래 위의 네 가지 금지령(행 15:20=15:29)은 유대적 관습에서의 양보를 의미한다. 바울은 원칙적으로 자기의 주장이 인정된 이상 지엽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교회의 평화와 일치를위해 관대히 양보했다. 이렇게 그들은 상호 양보함으로써 위기를 무사히 극복할 수 있었다(네 가지 금지령 중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는 것은 계 2:14, 고전 10:16- 22에, 음행을 멀리 하라는 것은 신약에 많이 있으니 논할 필요도 없고, 피를 먹지 말라는말씀은 살인하지 말라는 뜻으로 본다. 또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은 구약의 사상이기도하다. 피는 생명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유대전통과 바울의 갈등 요점 è 오랜 역사와 완고한 전통 속에 있던 유대교를 뛰어넘어 기독교시대를 연 인물이 바울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부름을 통해서 유대인의 하나님을 만인의 하나님으로 유대인의 구원의 하나님을 만인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지평을 넓힌 사람이다. 그는 에베소서 2장 19절에서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말하기를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와 같은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고 했다. 로마서 10장 12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꼭 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라고도 했다. 에베소서 3장 6절에서는 “그 비밀이라는 것은 이방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한 몸이 되고, 함께 약속을 받은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라고도 했다. 일찍이 유대인들이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던 이런 파격적인 선언이 계시로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고 말한 내용이라고 했고,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신 것이라고도 했다. 여기서 다른 세대의 사람의 아들들이란 하나님이 자기 민족만의 하나님이란 편협한 사고에 빠진 유대인들을 말한다. 예수님을 믿으면 이방인도 유대인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된다는 것, 유대인도 예수님을 믿어야 예수님을 믿는 이방인과 동등한 자격을 얻는다는 것,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등하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된다는 것, 이것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8절)이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였던 비밀의 경륜”(9절)이며,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11절)이라고 했다. 유대인들이 누구며,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알기 전에는 바울의 이러한 선언이 얼마나 파격적인 것인가를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런 파격적인 대 선언 때문에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이하의 말씀대로 바울은 수없이 옥에 갇히고, 수없이 매를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고, 유대인들에게 39대의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고, 날마다 교회들을 위하여 염려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이방인 구원에 대해서 유대인과 한 점 차별도 두지 않고, 언약의 하나님과 조상의 하나님을 자랑하며 유일신 하나님의 선민이 된 것과 언약서인 토라를 자랑하는 유대인과 동등하게 취급한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다.이방나라와 이스라엘의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만의 하나님이란 편협한 사고에 빠진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높은 벽을 뛰어넘어 문화가 다른 이방나라에 하나님을 소개한 사람들이었다. 열방을 품은 크고 넓은 활짝 열린 마음으로 세계로 뻗어나간 자들이었다.
■ 제2차 전도여행 : 예루살렘 회의 결과 바울의 전도 방침과 주의에 대해서는 전교회적인 공식 지지를 받아 이방인에 대한 전도가 더욱 확고하게 정해졌으므로 바울은 바나바와 더불어 제2차 전도여행을 떠나려 하였다. 그런데 제1차 전도여행 도중 버가에서일행을 버리고 도중 하차한 요한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에 대해 두 사람의 의견이 엇갈려 서로 "심히 다투어" 마침내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 섬으로 건너가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소아시아를 향하여 떠났다. 바울은 도중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났는데, 그도 일행에 가담했다. 바울은 처음에 소아시아 서쪽 에베소의 전도를뜻했으나,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므로 드로아로 내려가 하나님의지시를 기다렸다. 그런데 밤에, 환상에 한 마게도냐 사람이 바울에게 나타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라고 청하므로, 바울은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하고 이에 비로소 구라파의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리게 되었다(행 16:9, 10). 사도행전에 있어서는 이때 홀연히 `우리'라는 대명사를 쓰기 시작하고 있다(행 16:10). 이것은 본서의 저자가 이 전도여행에 동행한 사실을 말해 준다. 즉, 누가라는 의사이다. 그 이유는, 본서에 의학술어가 있고, 또 바울의 동역자 누가는 의사인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환상에 나타난 `마게도냐 사람 하나'는 실은 다름 아닌 누가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누가의 종용(慫慂)이 구라파 전도의계기가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바울 자신의 심중에는 하루 속히 구라파에 복음을전파하지 않으면 못견딜, 참을 수 없는 열정이 있어 그를 서쪽으로 서쪽으로 발걸음을재촉한 것은, 사도행전 16:1- 10의 글쓴 태도로써도 짐작할 수 있다. 이리하여 빌립보˙데살로니가˙베뢰아˙아덴, 그리고 고린도로 다채롭고 의의깊은 전도가 펼쳐진다.
①마게도냐 지방에서는 여자 결신자가 많았다는 것이다. 빌립보에 있어서, 즉 구라파에 있어서의 최초의 그리스도인은 기록으로 전해지는 한에 있어서는 루디아라는 부인이었다는 것은 초대교회에 있어서 부인의 위치를 시사하는 사실로서 의의가 깊다. 빌립보 교회에는 또 순두게와 유오디아라는 유력한 여신도들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는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신앙의 길에 들어섰으며, 아덴에서는 `다마리아라 하는 여자'가 회심자들 중에 섞여 있었다.
②유대인들의 집요한 반대 운동이 가는 곳마다 바울의 전도를 방해하였다. 특히 데살로니가에서는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라고 하면서 바울 일행을 체포하려한 것은, 그들의 운명에대하여 불길한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는 것이었다.아덴의 마르스 언덕. 바울이 이곳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신"이란 설교를 하였다.
③이여행에 있어서 기독교는 헬라(희랍) 사상과 처음으로 정면에서 접촉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아덴에 있어서 바울은 에비구레오파와 스도이고(스토아) 철학자들과 논쟁하여이에 극히 철학적인 연설을 시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적으로 보아실패였다. 믿은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그 후 바울은 더욱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고", "지혜의 권하는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고전 2:1- 5) 전도하려고 결의를굳혔다.
④고린도 전도에 있어서 기독교는 이교 사상과 접촉했을 뿐만 아니라, 이교적 생활과도 접촉했다. 그리하여 이것을 기독교화하는데 다소의 효과는 거두었음에는 틀림없으나, 아직 교회 그 자체가 그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고린도전서에서 취급되고 있는 제문제는, 사실은 고린도에 있어서의 이교 생활과 기독교와의 접촉에서 생긴 것에불과하다. 이와 같은 이교 사상과 생활의 기독교와의 관계는 더욱 더 복잡하게 되어몇 개의 중대한 문제를 교회에 던지게끔 되었다. 여하튼 이교 생활의 전형적 대표 도시인 고린도에 유력한 교회가 설립된 것은 위대한 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⑤빌립보에서는 로마의 관헌에 체포되었다.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 주었더니 그 주인이수입이 끊어지는 까닭에 군중을 충동시켜 소송하였다. 그러나 밤중에 옥중에서 기도하고 찬송할 때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스스로 열렸다. 그들은 자결하려는 간수에게 전도하고 이튿날 풀려 나왔다(행 16:16- 40). 이렇게 1년 반에 걸친 고린도 전도 후 바울은 고린도에서 얻은 동역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바울이 갇혔던 빌립보 감옥데리고 배로 에베소에 건너가 거기에 이 부부를 남겨 두고, 그와 실라 일행은 일단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안디옥으로 돌아갔다(바울의 고린도 도착은 AD 50년 초라고 한다.
■ 제3차 전도여행 : 제3차 전도는 제2차 전도여행의 연속이었다. 제2차 때 성령으로 금지되었던 소아시아 전도, 특히 에베소 전도에 전력을 집중시켰다. 바울은 일찍부터 중심적 대도시의 중요성에 유의하여 그 전도를 꾀하였으나, 이때까지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겨우 다년 간의 그 숙원을 이루게 된 바울은 약 3년 동안이 도시에 머물렀다. 그의 오랜 전도생활에서 이렇게 한 곳에 오래 머물은 곳은 없었다. 그는 이 동안 부근의 각 도시에까지 전도를 시도했는지의 여부는 분명치 않다. 골로새와 히에라볼리에는 에바브라를 통하여 복음을 전했다(골 4:13). 다른 여러 도시에도 이와 마찬가지로 그의 동역자를 보내 전도를 했을는지도 모른다. 누가는 "아시아에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행19:10)라고 기록했다.그러나 바울 자신은 줄곧 에베소에 머물러 전도에 전념했다고 여겨진다. 그 자신이 말하는 바와 같이 에베소에 있어서는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려" 있었다.한편, 그에게는 "대적하는 자가 많아" 실로 다사다난한 3년이었다. 사도행전 19:1 41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은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가 험악하게 되어 바울은 적어도 한 번은 직접 고린도에 가서 화해에힘쓴 일조차 있었다. 실로 "날마다…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 있었으니 감개무량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에 건너갔을 때"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 술회했다. 그러나 고린도에 보냈던 디도의 기쁜 보고를 받고 그는 비로소환희와 만족을 느낄 수 있었다(고후 7:5- 16). 아마 이때 일루리곤 지방에서의 전도를시도했을 것이다(롬 15:19, 20, 행 20:1- 3). 이렇게 그는 완전히 화해한 고린도 교회를 다시 방문하여 평화로운 3개월을 보냈다.이제 3차에 걸친 전도여행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고"(롬 15:19),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을 정도로되었다(롬 15:23). 전도에 지칠줄 모르는 그의 눈길은 더 서쪽인 로마와, 로마 이서(以西)의 나라에로 돌려졌다. 사실 그는 "여러 해 전부터…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다"(롬 15:18- 29). 그리하여 이제 여러 해 전부터의 숙원이 이루어지려는 찰라에 우선 로마 교회에 자기의 계획을 말하고, 그와 동시에 전부터 품고 있던 소신을 밝혔던것이다. 이것이 곧 다름아닌 로마서이다. 그러나 로마에 가기 전에 일단 예루살렘에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그는 이 시대의 모든 서신이 보이듯이(고전 16장, 고후 8장,9장, 롬 15:25- 28), 모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연보를 준비하여 이것을 각 교회의 대표자들에게 지참시켜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는 이와 같은 헌금으로 모교회와 이방인의 여러 교회와의 사이에 밀접한 연락을 갖게 하여 굳은 결합을 유지시키려 했던것이다. 이렇게 그는 이 대표자들과 같이 예루살렘으로 갔다(행 20:4).빌립보에서는 누가가 일행에 참가한 것은 `우리'라는 대명사가 다시 쓰여지고 있다는것으로서도 알 수 있다(행 20:5). 오랜 격심한 전도생활 때문에 지칠줄 모르는 바울도피로를 느꼈을 것이다. 특히 그는 `육체에 가시'가 들은 병약한 몸이었다. 여하튼 이때 의사 누가의 간호가 필요한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로마에 이를 때까지누가는 항상 바울의 반려자로서 행동을 같이 하고 있다. 그것은 구약의 다윗과 요나단과의 관계에 못지 않는 아름다운 우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빌립보에서 예루살렘에의 여행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비아 도로로사'(슬픔의 길)였다. 그도, 사람들도불길한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라고 말했다. 그가 도중에 들린 드로아˙밀레도˙두로˙가이사랴 등의 각지에서 형제들과의 작별은 모두 눈물이었다. 특히 밀레도에서의 에베소의 장로들과의 작별장면을 이를 데 없이 애절하였다. 신약성경 중 이 기사만큼 페이쏘스(pathos)에 풍부한 곳이 다른 데는 없다(행 20:17- 38)
■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은 오순절 전날이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울을 따뜻하게 맞았다. 성도는 이 명절 때문에 각처에서 모여들은 유대인으로 붐볐다. 그 중에는 바울의 전도를방해하고 그에게 적의를 품은 극단적인 반바울주의자들도 섞여 있었다. 팔레스틴 이외의 곳에서 로마 관헌의 제지로 바울 살해의 목적을 수행할 수 없었던 그들은 이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온 성이 소동하여" 바울을 죽이려 했으나, 로마의 천부장이 달려와서 바울을붙잡아 안토니아의 영문으로 끌어갔으므로 간신히 무사하게 되었다.누가는 당시의 사정과 그에 뒤따른 그에 대한 신문과 그의 변명 등에 대하여 매우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행21:27- 23:10). 유대인들 사이에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고 마시지 않는다"고까지 맹세한 일단의 혈맹단(血盟團)까지 조직되어 바울의 신변에위험이 밀어닥치고 있었으므로, 그는 밤중에 로마 군대에 의해 가이사랴로 호송되어로마의 총독 벨렉스의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벨렉스는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고, 그의 후임 베스도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하여" 두 사람이 다 신속한 처리를하지 않고 바울을 2년 동안이나 옥에 가둔 채 두었으므로 그는 분연히 가이사에게 상소하겠다고 신청했다. 이리하여 그는 백부장 율리오의 호송하에 로마로 가게 되었다.당시 가이사랴에서 로마에의 항해에는 사도행전의 기자 누가도 동행했는데, 이 항해에대해서는 사도행전 27장에 매우 자세하게, 또 인상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고대의 항해기라는 점에서 보더라도 매우 귀중하고 또 흥미진진한 기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허다한 곤란을 겪은 다음 바울 일행은 AD 60년 초봄 보디올에 도착, 거기서 주 안의 형제들의 영접을 받고 마침내 로마에 입성했다. 이렇게 다년 간의 숙원을 이룰 수있었다고는 하나, 결박된 몸으로서 로마 입성이란 그도 감?[인물편]바울바울개무량했음에 틀림 없었을 것이다. 로마에서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허락"되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재판의 날을 기다렸다. 로마에서는 많은사건이 산적하고 있었으므로 바울의 성소가 심의될 차례가 오기까지는 실로 2년의 세월이 흘렀던 것이다. 그 동안 그는 헛되이 세월을 보낸 것이 아니다. 많은 동역자가그에게 출입한 것은, 그때 집필된 골로새서나 빌레몬서의 끝에 열거되어 있는 인명을보더라도 알 수 있다. 빌레몬서는 이때 있었던 재미있는 한 에피소드를 전하고 있다.빌립보서 1:12- 18에 의하면, 그 당시 바울은 더 적극적인 전도를 하여 비상한 성공을거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도행전은 "바울이…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쳤다"고 말을 끝맺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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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