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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하나님은 어디계신거야? 왜? 나로 하여금 이렇게 힘든 길을 걷게 하는 거야?”라는 생각과 함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시지 않는다고 불평한 적은 없습니까? 또,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듣지 않는다고, 원망한 적은 없습니까? 이러한 생각이 들면, 내가 하나님의 보호 속에 있지 않다는 압박 속에서, 불안감이 더 심해지고, 마음은 더욱 답답해집니다. 그리고는, 고통과 서러움의 눈물이 멈추지 않습니다. 본문을 기록한 시인이 이러한 상황에 있습니다. 기록자에 대해, 혹자는, “고라 자손이 보관하던 다윗의 시라면서, 본문은 다윗의 시”라고도 하며, 어떤 이는, “고라 자손 가운데, 알려지지 어떤 인물일 것이다”라고 하지만, 이보다,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본문을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해, 천천히 읽어보면, 하나님을 향해 믿음의 몸부림을 치는 시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을 치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접지 않았고, 포기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더욱더, 강하게 믿음의 몸부림를 칩니다. 본 시편을 관찰해 보면, 시인은 “나, 내, 네”라는 1인칭 대명사를, 직간접적으로 33번 사용합니다. 반면, “하나님” 또는, “여호와”라는 말은, 14번 사용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내 자신만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럴 경우, 어떤 결과가 나오겠습니까? 시인이 본문에서, “나”라는 말을 연속적으로, 사용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자신 안에 갇혀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서라든지, 다른 무엇을 할 때, 연약한 내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어, “나는 어찌해서 못해, 나는 어찌해서 부족해”라며, 할 수 없는 정황들만 내세운다면, 우리는 낙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시인이, 이러한 관점을 가졌기에, 부정적으로 자신을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까지,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내세운다면,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행할 수 있는 것을, 모두 잃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무기력해지면, 우울증에 걸리게 됩니다. 우울증에 시달려본, 경험이 있습니까? 그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정적인 면만, 바라본다면, 영적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침체에서 벗어나는 4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겁니다. 본문 5절을 보시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합니다. 환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는 겁니다. 둘째, 하나님을 찬송하는 겁니다. 다시 5절을 보시면,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성도의 입에서 찬양이 그치면 안 됩니다. 주변을 의식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혼자 있을 때도, 그의 입에서 찬양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배당에서, 성도들의 기도와 찬양 소리가 그친다면, 하나님이 떠난 예배당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며, 우리의 마음에, 평안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겁니다. 본문 6절을 보시면,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이라고, 뚜렷하게 지명을 언급합니다. 시인은, 영적침체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의 자리를 기억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언제입니까? 우리교회에 성도들이 많이 모이던 시기입니까?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초점을 잘못 잡은 겁니다. 수정하세요. 사도바울의 경우를 보면, 다메섹으로 가던 중,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던 것과 삼층천으로, 올라갔던 때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껏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언제입니까? 끝으로,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하는 겁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시인은,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곳곳에서, 신앙의 실패 소리가 들립니까? 과거에는, 성도들이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승리 소리가 들렸는데, 왜? 오늘날에는, 실패의 소리가 더 큽니까? 메스컴의 발달이 아니라, 기도를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의 믿음에 대해, 걱정하는 부모는 많아도, 그 자녀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부모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방탕한 어거스틴을 위해, 10년 이상을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자녀의 믿음을 위해, 10년이 아닌, 5년이라도 눈물로 기도한 부모님이 계십니까? 자녀의 신앙은, 부모의 뒷모습에서 보이는, 신앙을 보고 자랍니다.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 58: 9을 보시면,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고 합니다. 기도하는 만큼, 하나님을 경험하며, 은혜의 자리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성도들은, 모든 환경과 상황을 뛰어넘어, 기도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잃어버린 기도의 자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신앙의 핵심도 하나님입니다. 은혜의 중심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빠진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성도된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고,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본문을 살피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 – 2절을 보시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둔 성도는, 간절함 속에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본문에서 비유하는 사슴을 보면, 열이 많은 짐승입니다. 그래서, 사슴은 물을 자주 먹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오랫동안, 물을 찾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물을 찾지 못한 사슴의 모습과 자기를 일치시킵니다. 시인이 거하는 팔레스틴의 일년 강수량은, 600미리정도입니다. 그나마, 우기에나 집중적으로 내리지, 건기에는 극심한 가뭄에 시달립니다. 이러한 가뭄은, 짐승 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고통을 줍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물을 자주 먹는 사슴의 고통이 어떠하겠습니까? 사슴은 본능적으로, 갈증으로 인한 고통을 해결하고자, 물가로 내려옵니다. 사슴은 머리를 들고, 눈을 굴리는 가운데, 혀를 늘어뜨리며, 시냇물을 찾아 내려옵니다. 이 때, 사슴의 습성을 아는 맹수들이, 물가에서 기다렸다가 공격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을 찾는 간절함은, 일반적인 간절함이 아니라, 죽음을 무릅쓰고, 목이 타는 듯한 갈증 속에서, 물가로 내려오는 사슴과 같다고 합니다. 만약, 이 시인에게, 믿음이 없거나 약했더라면, 이같은 고백은, 없었을 겁니다. 또, 시인은, 매년 매절기마다, 하나님의 전에 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제는 하나님의 전에 오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에 오르는 것이 고통이 아니라, 불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뵈는 기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기쁨이, 심각한 갈증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일에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와 예배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믿음의 이웃과 연대하고 깊이 교제하며, 그 안에서 참 행복과 만족, 기쁨을 누리는 것을, 본문에 비추어보면, 정말 아름다운 일이고,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신앙의 모습은, 지속되어야 하고, 더욱 강화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갈급한 심령의 회복입니다. 주의 전에 올라,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면, 그 자체만으로도, 죽을 것 같고, 마지막인 것 같은, 그러한 심정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2절의 “하나님을 뵈올까”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라아”로, 그 의미는, “숙고하다, 경험하다, 즐거워하다”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만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며, 그 분을 즐거워하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를 간절히 바란다는, 이 고백보다, 더 아름다운 고백이, 세상에 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영적 갈급함의 고백이요,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한다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성도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찾는 생활을 한다면, 바로 이것이, 신앙의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미켈란젤로나 다빈치의 작품을 보면, 그들이, 품삯을 위해, 작품들을 만들고, 그렸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음 가득히,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안고, 작품에 임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모든 일이 잘되어 너무나 좋을 때는, 하나님께 모든 존귀와 영광을 돌리고자 하나님을 찾고, 너무나 어렵고 고단하고 힘이 들 때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새 힘을 얻고자 하나님을 찾고, 영혼이 곤고하고 허전할 때는,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삶이어야 합니다. 사슴이 머리를 들고, 눈을 굴리며, 혀를 늘어뜨리며, 시냇물을 찾는 이 모습처럼, 시인은, 곤경 속에서, 자기의 보호자이신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을 이토록, 사모했던 겁니다. 백화점 한 복판에서, 아이가 엉엉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왜 우냐고 물었더니, 엄마를 잊었다는 겁니다. 그 아이에게, 엄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 아이는, 오직 엄마만 있으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영적 갈급함이 있습니까?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재주입니까? 우리의 능력입니까? 실력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원하는 것은, 본문을 통해, 시인이 보여주는 “영적 갈급함”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열정입니다. 어떠한 위기와 고통의 심연에서조차, 심지어는 병상에서든, 절망의 나락에서든, 하나님을 찾는 그 갈급함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암 5: 4, 6에서,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눈 앞에 있는 길갈이나 브엘세바나 벧엘을 찾지 말고, “하나님을 찾으라”고 합니다. 여러분, 시인이 찾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본문을 보시면,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이방의 신처럼, 죽거나 추상적인 신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의 백성을 도우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도 생활하면서, 때로는, 사면초가에 놓일 때가 있고, 때로는, 시초를 다투는 자리에 있을 때도 있고, 때로는, 매우 간절함의 자리에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눈에 초점을 잃고, 혀를 늘어뜨리며, 물을 찾아 내려오는 사슴과도 같습니다. 우리의 생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기갈을 해갈시킬 시냇물은, 하나님입니다. 간절함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5절을 보시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 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둔 성도는,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얼마 전, 아산병원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차장을 지나, 지하통로로 가는데, 핸드폰 매장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요즘, 교회에서의 만족, 그리고, 편리를 추구하는 경향이 많은데, 교회의 지하에도, 이러한 매장이 생긴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어떻겠습니까? 물론, 펄쩍 뛰면서, 교회가 그럴 수는 없다고들 하시겠지만, 교회에 탁구대가 들어온 것이나, 당구대가 들어온 것이나, 카페가 들어온 것에 대해, 그에 맞는, 제각기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두가, 3 – 40년 전만해도, 대부분의 교회에서, 기겁하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교회들 중에는, 주일오후에, 교회에서 탁구를 치다가 장로님에게, 혼쭐난 학생과 청년도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오래 전, 옥한흠 목사님께서 호주의 시드니 연합 집회를 인도하신 뒤에, 들려주신 이야기가, 선뜻 스쳤습니다. 목사님이 묵었던 호텔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틀림없이 교회처럼 보이는데, 꼭대기에, 십자가가 사라진 건물이 있었답니다. 그래서, 기억해 두었다가 그 곳을 지나면서 보았더니, “st. Andrew”라고 쓰여 있더랍니다. Andrew 다음에는 Church 라는 단어가 붙어야 하는데, 그 말이 없었던 겁니다. 즉, “성 안드레 교회”라는 말인데, 교회라는 단어와 꼭대기에 있는 십자가를 떼어 버린 겁니다. 그래서, 주변에 알아보니, 유명한 식당이었습니다. 식당입구에는 메뉴판도 있었고, 장식도 요란했습니다. 그래서, 안내하는 분께, “식당을 하려면, 저 종각을 통째로 잘라서, 교회 모양이 안 나도록 꾸몄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목사님, 그러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인기가 없습니다. 지금 저 모습 때문에, 인기가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몰립니다. 설교자가 설교하던 강대상은 A석입니다. 그 다음, 성가대석은 B석입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옥 목사님은 그 현실을 보면서, “한국 교회라고 이렇게 되지 않는다는 장담을 못하지”라는 생각을 했답니다. 교회의 건물이 식당이 된 것이나, 교회에서의 편리성을 너무 추구한다면, 교회의 순수성은, 사라지게 될 겁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 어떤 경우에서든, 성도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시면, 시인은, 5절과 11절에서, 반복적인 고백을 합니다. 그 고백의 핵심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겁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시인의 신앙이 회복된 겁니다. 그는 목마른 사슴의 자리에서 해갈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눈물을 음식으로 삼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입에서는, 찬송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하나님을 만난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게 된 겁니다. 이제껏, 그를 괴롭히던 환난이, 그에게 찬송을 가져다주었고, 감사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영혼을 향하여,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라며, 하나님을 향해, 반석이며, 살아계시며, 생명과 소망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 밖에 있는 자들에게, “소망”이란, 자신이 바라는 희망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도된 우리에게 소망은 무엇입니까? 찬송가 488장을 보시면,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라고 합니다. 맞습니까? 여러분의 소망도,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나님은 절대로 불변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그 하나님 안에, 우리가 삶 속에서 찾는 시냇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끝까지, 눈을 떼지 말고, 마음을 돌리지 말고, 주목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입니다. 본문의 중간을 보시면,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합니다. 침묵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둔 성도는, 자신만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시인은, 6절에서, “요단과 헬몬과 미살 산”이라는 지명을 확실하게 언급합니다. 그러다보니, 가끔, 이 지명에 몰두하는 분들을 봅니다. 하지만, 이 지명은 무의미합니다. 시인이 지명을 말한 것은, 지명의 위치가 아니라, 시인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한, 구체적인 증거로서 제시한 겁니다. 그러기에, 시인은, 아무리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간다할지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또, 낮과 같이, 기쁨에 가득찬 길을 간다할지라도, 하나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7절을 보시면, 시인은, 폭포의 웅장한 소리가, 또, 깊은 바다에서 출렁이는 사나운 파도와 물결이, 그를 집어 삼킨다 하여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을 잊지 않은 것처럼, 시인은 삶 속에서 하나님을 부인할 수도 없고, 외면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오직, 유일한 반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영혼이 낙망 속으로 빠지는 상황에서조차, 장차 회복시키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 밤과 같은 상황을 지날 때, 또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이 어디있느냐? 기도한다고 뾰족한 수가 나오느냐?는 등의 조롱섞인 소리를 들으면서 조차, 하나님이 베푸시는 회복의 은혜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인은 이제, 그의 시선을 자신에게서, 하나님께로 돌립니다. 그리고, 찬양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두렵고 불안해질 때는, 더욱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낙심이 되고 슬플 때에도,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바라기는, 이 시간,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가, 본문의 시인처럼, 성숙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성도로서의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