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 후회 쪽으로
자꾸만 살이 닿을 때
한 집 건너오는 동안 몸이 반쯤 지워진
노래들
따뜻했다
어떤 맹세는
어깨 위 물방울처럼 이해되었고
어떤 말은
끝나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시작되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이제 그만 손을 놓아도 되는 거리가 있는가
이 모든 결의 안쪽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
오늘은 어제 도망치고 싶었던 내일이
아니었다고
상한 걸음마다 바람 불었다
내가 당신을 견디고
당신이 나를 견디는 동안
우리는 서로를 잊었을지 모른다
그러한 사랑의 방식으로
우리는 결에 이르기도 한다
익명의 여행자처럼
어긋남의 골목을 지나
지워진 입들이 폭우로 내리는 밤은
어두웠으므로
조금만 덜 어긋났으면
나는 당신의 결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 결 / 이승희

꽃보다 열매를
열매보다 이파리를
흰색보다 검정색을
좋아한다지
그게 그거지
걸어가네
바다를 향해서? 묘지를 향해서?
그게 그거지
폭우에 잠긴 도시보다 저수지를 저수지보다 수영장을
샴푸보다 리필 샴푸를
금발보다 갈색 모발을 모발보다 가발을
여자보다 남자보다
장난 아니더라
침대에서
차에서
여름날 해질 무렵 공원보다 겨울 골목길을
힙합이라 록이나
들은 건 있어 가지고
오 고통이여
오 감각이여
그러고 그러지
어찌나 순진하던지 어찌나 웃기고 웃기던지
죽어가면서 말했지
팔을 놔주세요
사랑하긴 했죠?
- 너의 취향 / 김이듬

그리움이란 막연한 것들의 이름이다
어떤 존재가 그 가치를 찾아내지
못했을 때 느끼는 감정은 슬픔이지
숨 쉴 틈 없이 바쁜 중에도
그리운 모습, 그 표정은 중독처럼 살아나고
길을 찾는 일은 새롭게 길을 여는 것보다
더 힘들고 어렵더군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은
두려움 없는 발걸음이야 그러니
그 걸음을 슬픔이라 부르지 말아다오
저 길을 바라보는 일은 참으로 경이롭구나
누가 너와 함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길 위에 서 있다는 그것이 좋은 것이지
이미 슬픔이라든가 우울이라든가
네 몸 안 어디엔가 숨어 있다 불쑥 튀어나와
잠깐의 간지름을 태우기라도 하듯이
한없이 가라앉는 늪같이
한없이 가벼워지는 깃털같이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하면서도 자주
지배 당하는 것
너는 이미 가고 있는 것이다
붉은 까치밥처럼, 툭
- 막차를 기다리며 / 진란

님은 이제 떠나간다
저 먼 바다 수평선 넘어
그리움을 남기고
기다림을 뒤로 한 채
님 실은 하얀 돛단배
이별에 눈물이 보일 듯 말 듯
조금씩 조금씩
깊고 깊은
푸른 바다 속으로 숨는다
- 이별의 뒷모습 / 최수홍

우리는 사랑을 나눈다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아주 밝거나 아주 어두운 대기에 둘러싸인 채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
달빛을 받아 은회색으로 반짝이는 네 귀에 대고 나는 속삭인다
너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너는 지금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가
사랑해. 나는 너에게 연달아 세 번 고백할 수도 있다
깔깔깔. 그때 웃음소리들은 낙석처럼 너의 표정으로부터 굴러 떨어질 수도 있다
방금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미풍 한 줄기
잠시 후 그것은 네 얼굴을 전혀 다른 손길로 쓰다듬을 수도 있다
우리는 만났다, 여러 번 만났다
우리는 그보다 더 여러 번 사랑을 나눴다
지극히 평범한 감정과 초라한 욕망으로 이루어진 사랑을
나는 안다. 우리가 새를 키웠다면,
우리는 그 새를 우울한 기분으로
오늘 저녁의 창밖으로 날려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함께 웃었을 것이다
깔깔깔. 그런 이상한 상상을 하면서 우리는 사랑을 나눈다
우리는 사랑을 나눌 때 서로의 영혼을 동그란 돌처럼 가지고 논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사랑이 끝나면 너의 손은 흠뻑 젖을 것이다
방금 태어나 한줌의 영혼도 깃들지 않은 아기의 살결처럼
나는 너의 손을 움켜잡는다, 나는 느낀다
너의 손이 내 손 안에서 조금씩 야위어가는 것을
마치 우리가 키우지 않았던 그 자그마한 새처럼,
너는 날아갈 것이다
날아가지 마
너는 날아갈 것이다
- 새 / 심보선

'먼지도 빛나게 하는 햇빛' 한줄기 잡아다
내 목에 눈물로 걸어 주려고
언 땅을 헤매이던 그대
밤이 깊자 뜨락에 돌아와
순한 눈썹으로 잠이 들었네
잠 속의 잠 속에도
무지개는 끝끝내 아름다워
날개의 파득임에
깊은 궁에서는
또 싹이 트고
끈이 무거운 어깨로
울부짖는 소리를 하며 그대는
저 봄 언덕을 서성인다
- 바람의 아내 / 문정희

시냇물이 흐르며 노래하기를
외로운 그림자 물에 뜬 마름잎
나그네 근심이 끝이 없어서
빨래하는 처녀를 울리었도다
돌아서는 님의 손 잡아당기며
그러지 마셔요 갈 길은 육십리
철없는 이 눈에 물이 어리어
당신의 옷매를 적시었어요
두고 가는 긴 시름 쥐어틀어서
여기도 내 고향 저기도 내 고향
젖으나 마르나 가느니 설움
혼자 울 오늘밤도 머지 않구나
- 흐르는 물을 붙들고서 / 홍사용

언젠가 당신이
내 손이 차다고 말했을 적에
연밥 위에
무밭 위에
아욱 잎 위에
서리가 반짝였지
고양이 귀를
살짝 잡았다가 놓듯이
서리, 라는 말이
천천히 녹도록 내버려뒀을 뿐인데
꼭 당신이 올 것처럼
마을회관을 지나
비닐하우스를 지나
버스정류장을 걸어가네
덜 말라서 엉킨 머리카락이
마를 때까지 걸어가네
- 아무 데도 가지 않는 기자 / 신미나

먼저 와 서성이던 바람이 책장을 넘긴다
그 사이
늦게 도착한 바람이 때를 놓치고, 책은 덮힌다
다시 읽혀지는 순간까지
덮여진 책장의 일이란
바람의 지문 사이로 피어오르는 종이 냄새를 맡는 것
혹은 다음 장의 문장들을 희미하게 읽는 것
언젠가 당신에게 빌려줬던 책을 들춰보다
보이지 않는 당신의 지문 위에
가만히, 뺨을 대본 적이 있었다
어쩌면 당신의 지문은
바람이 수놓은 투명의 꽃무늬가 아닐까 생각했다
때로 어떤 지문은 기억의 나이테
그 사이사이에 숨어든 바람의 뜻을 나는 알지 못하겠다
어느 날 책장을 넘기던 당신의 손길과
허공에 이는 바람의 습기가 만나 새겨졌을 지문
그 때의 바람은 어디에 있나
생의 무늬를 남기지 않은 채
이제는 없는 당신이라는 바람의 행방을 묻는다
지문에 새겨진
그 바람의 뜻을 읽어낼 수 있을 때
그때가 멀리 있을까,
멀리 와 있을까
- 바람의 지문 / 이은규

'부르흐'를 듣는다
'부르흐'속에서 사랑을 꺼낸다
그렇게 아팠었구나
음악이 과거 진행형으로 울고 있다
나의 그 어느 기도가 하늘에 닿아
너를 내 앞에 갖다 놓았을까
시작하고 부서지고 돌아오지 않는
'부르흐'는 나를 피도 없이
피 흘리게 한다
- 과거 진행형으로 우는 음악 / 문정희

살 무르고 눈물 모르던 때
눈 감고도 당신 얼굴을 외운 적 있었지만
한번 묶은 정이야 매듭 없을 줄 알았지만
시든 꽃밭에 나비가 풀려나는 것을 보니
내 정이 식는 길이 저러할 줄 알아요
그래도 마음 안팎에 당신 생각을 못 이기면
내 혼은 지읒 시옷 홑겹으로 날아가서
한밤중 당신 홀로 잠 깰 적에
꿈결엔 듯 눈 비비면 기척도 없이
베갯머리에 살비듬 하얗게 묻어나면
내가 다녀간 줄로 알아요, 그리 알아요
- 눈 감으면 흰빛 / 신미나

사랑은 불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잎새에 머무는 계절처럼
잠시 일렁이면
나무는 자라고
나무는 옷을 벗는
사랑은 그런 수긍 같은 것임을
그러나 불도 아닌
사랑이 화상을 남기었다
날 저물고
비 내리지 않아도
저 혼자 흘러가는
외롭고 깊은
강물 하나를
- 사랑은 불이 아님을 / 문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