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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홍깨마을 고향집, 초가집 사이에 학장국민학교 서편교실이 보이네요
1971 고향집앞 들판에서 초등동기와 함께 뒤편은 낙동강 을숙도 방향
1969 학장 구덕터널 회차로 입구 부근
학장동 1950
내가 태어난 곳은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학장리 홍깨마을 이다.
국민학교 3학년때(1963년.1월1일) 경상남도 부산시가 정부직할인 부산직할시로
승격되면서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이 부산직할시에 편입되어 사상면의 감전리,덕포리,
괘법리,삼락리,모라리,엄궁리,주례리,학장리 등 8개 리가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감전동,덕포동,
괘법동,삼락동,모라동,엄궁동,주례동,학장동 등 8개 동으로 바뀌었다.
그후 부산진구에서 북구가 분할(1978)되면서 북구가 되었고
그 뒤엔 북구에서 사상구가 분할(1995)되면서 옛 사상면이 사상구가 되었다.
사상면이 통째로 사상구로 바뀌는데 32년이 걸렸다.
그 당시 학장리엔 지명도 많았는데 학성, 장문안(웃각단,아래각단), 개논, 붉은디이,
구덕골짜기, 야시골짜기, 새밭, 통재이골짝, 대동도, 열두꼽부, 홍깨, 진자리 등
열두가지가 넘었다.
학장이란 명칭은 사람이 많이 사는 부락인 학성, 장문안의 앞글자를 따서 지었다고 하며,
홍개마을은 학장초등학교 뒤편 일대를 홍개라고 한 데에서 유래한다. 한자로 ‘홍개(洪介)’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실제로 홍개의 ‘개’는 포구 또는 바다를 의미한다. 즉 홍개는 홍포(洪浦)로 넓은 갯벌을 의미한다.
홍깨마을이라고도 불렀다.
홍깨마을과 학장초교 1950
내가 태어난 학장리 홍깨마을은 어머니의 고향이다.
김해사람인 아버지가 어머니와 결혼하면서 처가동네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는데
그때 아버지의 직장이 서면에 있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옛날 학장 사람들의 주업은 논농사였고 밭농사도 일부 하였다. 그리고
가축업 특히 닭을 많이 키워서 달갈과 닭을 내다 파는 집도 몇 집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부지런한 동네 남정네들은 발로 밟아서 작동하는 새끼꼬는 기계로 새끼를 꼬아서 부산시내에
내다 팔기도 하였고, 갈구리 만들어 파는 집도 있었고, 방비자루도 만들어 파는 집도 있었다.
다다미 만드는 공장도 두어개 있었고 정미소 하는 집도 있었지 그런집은 제법 잘사는 집이었
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발소는 한 곳 있었고 목욕탕은 아예 없었다.
'50년대 새끼를 실고 가는 소수레
농토가 많은 집은 농사 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었지만 농토가 작은 집이나 소작을 하는 집의
부지런한 아낙네들은 농한기에 낙동강에서 재첩을 잡아 가마솥에 끓여 재첩국을 만들어 무거운
재첩동이를 머리에 이고 구덕고개를 넘어 대신동 쪽으로 재첩장사를 하러 다녔었다.
그리고 단술장사도 하였는데 집에서 단술을 만들어 동이에 이고 구덕고개를 넘어 멀리 부두가
에 까지 가서 단술동이를 놓고 부두노무자들을 주고객으로 단술장사를 하였다고 한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상상하기도 힘던 그런 일들을 농사일, 집안일에 또 한두명도 아닌 자식들
키워가며 하셨을까? 그 당시 어르신들(특히 어머니들)의 고생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것 같다.
그렇게 고생하며 사셨던 어르신들 자식들 살 만하게 해 놓으시고 자신들은 옳게 즐기시도
못 하시고 안타깝게도 거의 다 돌아가시고 말았지 ~~~
~ 사상 古 문서에 따른 동별 유래 ~
ㅇ 학장동의 유래
1966 학장리와 홍깨 호수
1979 학장천 주례 방향
1979 학장천 엄궁방향
학장동(鶴章洞)은 동쪽으로는 옛 주례 남천(南川)인 학장천 중간지점을 경계로 주례동과 경계하고
있으며 북쪽 감전동은 가야로를 가운데 두고 북서쪽으로 경계하고 있다. 서쪽의 엄궁동은 학장천 하류
중간을 경계로 하고 있다.
동남쪽 산지는 엄광산(嚴光山) 능선과 승학산(乘鶴山) 능선의 구덕령(九德嶺)을 가운데 두고 대신동,
당리동,엄궁동과 경계를 이루고 엄광산 동부쪽 능선을 가운데 두고 주례동과 경계하고 있다.
당시의 ‘학장 마을’은 현재의 ‘학장동 사무소’와 ‘학장천’을 부근으로 마을이 형성되어져 있었으며, 또
지금의 ‘구덕 터널’ 위 ‘부산 대남 병원’ 부근으로 ‘구덕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고 , 엄광산(嚴光山) 기슭
을 따라 굽이굽이 나있는 비포장 길이 나있어 엄궁동(嚴弓洞)으로 연결되어져 있었고 길 주위를
따라 듬성듬성 집이 몇 채 씩 있었을 뿐이었었다.
사상 古 문서에 의하면...
“1950년대 까지 학장동에는 일제 때 일본군이 개설한 좁은 도로가 있었으나 사상과 왕래하는 좁고 험한
자갈길이었고, 그 도로가 엄궁동을 통하여 사하로 이어졌지만 마을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버스는 통행
하지 않아서 외지에 볼일이 있을 때에는 사상이나 주례,하단까지 걸어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학장동이 이러한 비 문화촌의 설움에서 벗어난 것은 사상공업지역이 조성되면서 부터이다.”
1968 홍깨마을에서, 왼편에 학장초교, 뒤편에 장산과 황령산이 보임.
당시...
지금의 ‘학장공단’ 부지는 전부가 논밭과 이었으며 당시...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부산市’에
편입되어 있었으면서도 ‘구덕산(九德山)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었다.
그래서 초가집에 호롱불을 켜고 살았었다.
학장동에서 구덕령(九德嶺)으로 오르는 산길 좌측 산비탈에는 “구덕마을”이 있다.
지금의 ‘구덕 턴널’ 위에는 ‘노인복지병원’이 있고 ‘구덕 민속촌’으로 음식점이 있는 마을이다.
사상 古 문서에 의하면...
“이 마을이 언제 형성되었는지 사람이 언제부터 살았는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학성’과 ‘장문 마을’
이 바다였을 때 이곳에 사람이 먼저 살았을 것으로 보아지며, 이 마을 여러 곳에 소규모의 조개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 구덕리(九德里)의 농지는 계단식 자갈밭을 일구어 전답으로 개간하였다.
사상들판이 홍수의 피해로 물바다가 되어도 가뭄에 벼가 타 들어가도 이곳에는 수해와 가뭄이 없는
마을로 옛 부터 이 마을에는 ‘아홉 집’이 살았으며 아홉 호가 넘는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것은 이곳에
서 생산되는 농작물이 9세대가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되어있어 한번도 9호가 넘는 예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하늘에서 복을 내려주시니 이 마을을 ”구덕마을“이라 했다는 속전이 있다.”
구덕령에서 본 학장동 모습 1956
사상 古 문서의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병과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부민포(富民浦)에서 이곳 ‘구덕령(九德嶺)’을 넘어서
내륙지방으로 침공하였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학장동은 그들 통로의 한 요지였을 것이다.
이뿐 아니라 부산장과 구포장 또는 사상장을 왕래하는 장꾼들도 ‘구덕령’을 넘어 통행하였으므로 장날
만 되면 최근세까지도 이 고갯길은 인파가 이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구덕령을 넘던 시절의 옛 추억
을 잊게 해 주는 [구덕터널]이 민자 유치로 1986년에 개통되면서 시내로 가는 교통이 더욱 편리해졌던
것이다.”
구덕리(九德里) 암자 앞을 지나 가파른 계단식 전답 사이로 뱅뱅 돌아 구덕고개에 이른다. 옛날에는
이 고갯마루 지역이 소나무 숲으로 되어있었는데 일제 때 이 숲을 벌채하고 이곳에 대신동, 부민동,
보수동의 ‘공동묘지’로 조성하였다.
옛날부터 ‘사상사람’들은 이곳 구덕령(九德嶺)을 넘어서 부산포 가는 것을 “관(館)에 간다”라고 하였었다.
“성님 어데 가는기요?”
“내 볼일이 있어서 관(館)에 간다!”
여기서 관(館)이라는 곳은... ‘부산포’에는 왜관(倭館)이 있었다. 이때 서민들에게는 ‘부산’ 이라는 지명
보다 ‘부산포’에 있는 왜관(倭館)이라는 이름이 더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왜관 근처에 가면 진귀한 물품들을 살 수 있었고 우리 물품들을 비싸게 팔 수 가 있었고, 기모노 입은
일본인들을 구경할 수 있었기에 왜관이 더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한편, ‘냉정고개’를 넘으면 “부산 간다!”고 하였는데...
그곳에는 부산진영(鎭營) 즉 부산 첨사영(釜山僉使營)이 있었고 부산장(釜山場)이 있었기에 “부산 간다”
고 하였던 것이다.”
해방 후에는...
6.25사변 때 피난민들이 이 ‘구덕고개’에 정착하여 동북쪽 분지에 꽃을 가꾸어 부산 시내 꽃집에
팔아서 생계를 이어갔었다. 그래서 “구덕 꽃동네 마을”이 생겨났던 것이다.
이 ‘구덕고개’는 예로부터 김해, 밀양, 양산 등지로 가는 ‘유일한 지름길’로 이곳 사상주민들은 등짐
을 지고 수없이 넘어가고 넘어오는 삶의 애환이 담긴 고갯길이었다.
1956 홍깨마을에서, 뒤편에 학성마을과 포구나무
부산시 사상구 학장동 326번지에 위치하고 있던 팽나무는 수령이 약 350여년으로 전하며 높이는
20m 에 둥치의 둘레가 4.5m였는데 사상공단 조성으로 인한 환경변화(공장폐수 등)로 1990년도에
고사하고 말았다. 소중한 문화유산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옛날 (350여년전)학성마을에 당시 심한 폭우로 인하여 원래 구덕산에 있던 나무가 학장천으로
떠내려온것을 당시 주막집을 경영하고 있던 전씨노인이 도로변에다 심었다고 전하며 그 당시에는
김해 사상 등의 주민들이 구덕령을 넘어 부산관내로 가는 유일한 길목으로 사용된것으로 여행
도중에 이 나무가 휴식처 및 이정표였다.
이 팽나무는 마을 주민들이 "포구나무"로 불렀으며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여겨지고 있었는데
이에 관한 내용은 일제시대에 일본군이 마을상징이며 주민들의 단결의 표상인 이 팽나무를 없애기
위해 나무의 가지가 갈라지는 중심부에다 수차례에 걸쳐 불을 질렀는데도 죽지않고 조금 타고 들어
가서는 곧 꺼지곤 하여 일본군은 포기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이나무는 더욱더 마을 사람의
상징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 팽나무는 이와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므로 인하여 우리 민족이 일제에
대항하여 싸운 민족의 얼로서 고이 간직해왔던 나무였다고 한다.
'60년대 장문리의 당산
'60년대 학성리의 당산
학장동에는 2000년경까지 5곳에 당산이 있었다.
그 중 가장 오래 된 장문리의 할배당산과 할매당산이 학장 우성아파트 쪽에 있었으며
학성리의 할배,할매당산은 지금의 동양아파트 쪽에 있었다.
그리고 장문리와 학성리 및 구덕리가 합쳐서 학장리가 생기니 학장리에도 마을의 풍년과
주민의 안녕을 기원하는 학장제당이 지금의 구덕입구 쪽에 세워짐으로써 당시 사상면에서
가장 많은 당산과 제당을 가진 마을이 되었으나 급속한 도시 개발로 산지가 아파트 숲으로 변하고
당산목인 소나무, 팽나무등이 잘려나가고 제당도 한 곳 두 곳 없어지면서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지금은 학성 할매당이 있었다고 하는 자리에 돌탑 형태만 남아있어 당산에 대한 이야기만 전해오고 있다.
ㅇ 주례동의 유래
주례 마을 1955
주례동(周禮洞)은 고원견산(高遠見山)과 백양산(白楊山)을 등지고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북서쪽이
주례 1동이고 남동쪽은 주례 2동이다. 동쪽은 개금 1동 2동과 이어지고 서쪽은 학장동(鶴章洞), 감전동(甘
田洞)과 이어지는 한편, 산지는 서대신동(西大新洞), 당감동(堂甘洞), 괘법동(掛法洞)의 산지와 접하고 있다.
개금동(開琴洞)에서 냉정고개를 넘어서는 곳 부터가 주례동이다.
주례동은 산지가 넓어 산답(山畓)이 많고 지대가 다른 마을보다 높아 낙동강 제방을 쌓기 전부터 홍수의
피해가 적었던 곳이다.
사상 古 문서에 의하면...
“1902년 8월 부산 초량에서 구포까지 경부선 철로 부설공사가 시작되어 1905년 5월 경부선 철도가 개통
되자 주례동과 감전동은 마을 가운데를 열차가 지나가게 되었다.
그 결과 마을이 위 아래로 갈라져서 윗각단 아랫각단이 각각 생겼다.
1920년에 들어오면서는 사상에도 세칭 “신작로”라는 도로가 개설되었다. 서면에서 전답 사이로 도로가
개설되어 가야동을 지나 개곤(開坤:개곤이)고개를 넘어 개금동을 지나서 ‘냉정고개’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 도로가 개설되어 사람들의 내왕이 빈번하게 되자 냉정 앞 철로 주변에도 주막이 생기고 철둑에 아카
시아가 무성하자 이곳을 “아카시아마치(町)”라 불렀다. 경부선 철로 부설을 전후하여 감전동의 포플러마치
와 주례동의 아카시아마치가 각각 생겨났던 것이다.”
특히 지금의 주례 2동의 “냉정(冷井)고개”는 길이 가파른 고개로 이름이 나 있었고, 서면 방면으로 통할 수
있었던 길이었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 “냉정(冷井)고개”를 오르내리면서 목을 축였었던 우물의 터가 지금의 ‘냉정역’
(고개)부근에 남아있다.
1955 주례 다랭이 논
주례동(周禮洞)은 사상구에서 비교적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옛부터 모라동과 더불어 호구수가 많고
부촌으로 불리웠다. 또한 주례동(周禮洞)은 서쪽 낙동강에서 대중현 또는 동평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
하였기에 <국방상> 아주 중요한 ‘지리적 위치’에 있었다.
사상 古 문서의 기록에 의하면...
“1740년의 <<동래부지(東萊府誌)>> 성곽(城郭)조에 목장성(牧場城)이 나온다. 거기에 보면 목장성 관련
기록이 나오는데 ‘엄광산’ 강변 산록에서 시작하여 부산 ‘범천산’까지 이어져 그 길이가 15리가 된다고 하였
으며 지금은 무너져 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성의 축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대중현 때나 그 뒤의 동평현때 축성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왜놈들이
낙동강에서 배로 주례까지는 순식간에 이르러 동평현을 공격했을 것으로 보아 이곳 둘레에 성을 쌓고 동편현
으로 들어가는 [냉정고개]에 관문이 있고 중간지점인 학장에도 학성(鶴城)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도 관문이 있었을 것이다.
1955 오른쪽 아래 주례 범남산과 냉정마을, 뒤편 백양산 자락, 중앙 원통은 저유탱크 시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냉정고개] 고갯마루에 주례성의 관문이 있었다고 하며 150년 전 까지만 해도
이곳의 소나무 사이에 성지(城址)가 있었다고 한다. 1960년 까지도 개금 안마을(개금3동)에서 당리(댕풍)
넘어가는 산길 아랫쪽에 성지(城址)를 볼 수 있었다. 당시 동평현 성이 이곳까지 성지가 뻗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성이 [냉정 고갯마루]의 관문까지 이어져 있었다고 볼수 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성(城)이 성(城)으로서 구실을 하지 못하고 곳곳에 허물어진 곳이 많아 고려시대부터
조선전기까지 목장성(牧場城)으로 변하게 된것으로 보여 진다. 이 목장성의 성지가 잘 보존된 곳이 [냉정
마을]뒷산 범남산 중록이다. 이곳에는1950년 까지도 폭 2m 높이 1m의 석성(石城)이 군데 군데 있었으며
성위에서 아이들이 놀았었다. 이 성은 ‘가야공원’까지 남아 있었는데, 성벽을 쌓았던 돌은 자연석으로 깎은
듯이 반듯한 돌로 몇 사람이 달라붙어도 들지 못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무조건적인 [개발]만을 생각하다가 문화재를 잘 관리하지 못하여>, 미군 히야리아
부대를 조성할 때 이곳의 돌을 실어갔으며 ‘가야로 확장 공사’때 이곳의 돌을 실어다가 저습지에 깔아
사용하고 일부는 분쇄하여 자갈로 사용하고, 지금은 동서대학 경남정보대학이 건립되어 성지(城址)의 흔적을
찾을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ㅇ 엄궁동의 유래
엄궁 1970년대
학장(鶴章)에서 엄광산(嚴光山) 기슭을 따라 굽이굽이 나있는, 당시의 비포장 길을 가노라면... 산 아래에
나타나는 마을이 엄궁동(嚴弓洞)이며 사상의 ‘최남단 마을’이다.
엄궁동(嚴弓洞)은 "엄광산(嚴光山)의 서쪽 기슭의 높은 언덕위에 산을 등지고 자리를 잡은 마을로 해 뜨는
시간이 매우 늦고 겨울에는 낙동강의 세찬 바람이 불어 닥쳐 주거지역으로서는 부적합한 마을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갈대가 우거져 있는 낙동강변을 내려다보며 갈대지붕에 토담집을 지어서 평화롭게 모여 살며 농사와
어업에 종사해 온 강안(江岸)의 빈곤한 마을이었었다.
엄궁동(嚴弓洞)은 사상에서 가장 남쪽 끝에 위치한 동리로 학장동과 이어져 있으며, 남쪽은 사하구, 당리동,
하단동과 경계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다.
사상 古 문서의 기록에 의하면...
“1950년대까지는 일본군이 개설한 강안(江岸)도로는 있었으나 길이 좁고험하며 남과 북으로 고개가 높아서
버스가 운행되지 못했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걸어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었다. 특히 하단으로 통하는
도로는 지금의 도로가 아니고 수십 미터나 올라간 산복을 빙빙 돌아서 하단으로 내려가는 길이었었다.
북쪽으로 통하는 도로도 고갯길이었으나 남쪽 길처럼 그리 높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이 길로 사상까지 걸어
나가야 버스를 탈 수 있었으니 얼마나 불편하였겠는가? 짐작이 갈 것이다!
주로 보행이 많았었는데, 보통은 구포나 사상까지 낙동강 제방을 따라서 걸어 다니는 것은 기본(?)이었었다."
“엄궁동(嚴弓洞)은 주민 모두가 농사에 종사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어민생활이었다.
낙동강에서 본 엄궁동 1979
'70년대 엄궁 재첩 채취
사상, 감전, 엄궁, 하단을 잇는 낙동강의 하류는 “재첩”이라는 작은 담수패(淡水貝)의 보고로 강바닥의 흙을
한줌 쥐면 재첩이 한주먹 쥐여질 정도로 많았었다.
“재첩”은 술꾼의 해장국으로 일품이려니와 간장과 폐병에도 좋다는 민간의속 때문에 널리 사랑을 받았었다.
이곳 엄궁동(嚴弓洞)의 명산물은 “재첩”이라는 담수패와 잉어, 뱀장어 그리고 숭어였었는데 특히 재첩의
수확이 많아서 이 부락의 아지매들은 재첩국 장수가 아닌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였었다.
이곳에서 잡아들인 재첩을 자루에 담아서 인근 지역 재첩국 장사들에게도 보내졌었다.
이들은 밤새 끓여서 만든 재첩국을 동이에 담아서 머리에 이고 새벽녘에 마을을 떠나 걸어서 대개는 하단동
을 돌아 ‘대티고개’를 넘어 가기도 하였었고 구덕령을 넘어 대신동, 부민동, 아미동의 새벽거리를 누비며
큰소리로 “재치국 사이소!~재치국!~”를 외쳤었다.
과거... 부산사람들은 이 소리를 매일같이 듣는 아침잠의 첫소리였고 동시에 기상을 알리는 신호처럼 되기도
하였었다. 특히 외지에서 부산을 찾아온 나그네들에게는 잊을 수없는 부산의 추억거리가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인근 공단의 폐수와 오염 하수의 방류로 재첩의 생산이 매년 줄어들다가 1980년대 낙동강 하구 둑
공사로 산소가 없는 강이 되어 재첩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엄궁 1984
~ 사상구청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동별 유래 ~
ㅇ 학장동의 유래
학장초교와 홍깨마을 주변 모습 1955
학장동은 마을 앞의 학장천 물이 흘러내리던 옛날 모래펄 지역인 서북쪽 저지대와 동남쪽으로 구덕고개를
끼고 산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곳은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던 마을이다.
1967년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유적을 답사할 때 도로변에서 기원을 전 후한 김해문화기에 해당되는 토기
조각이 발견된 적이 있었다. 여기에서 패총유적이 발견된 것을 보면 옛날 바닷물이 만입해 들어왔던 사상
지역에 어패류가 풍부했기 때문에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곳임을 말해준다.
학장동의 지명은 옛 성터였던 <학성>과 옛 장터였던 <장문평>에서 유래한다. 동래부지에 목장성이 있었
다는 기록에 보면 <엄광산 기슭 강변으로 부터 부산범천 산장 15리까지>로 나와 있다. 목장성인 학성은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원래 방어성으로 쌓았을 것인데 후세에 이를 수축하여
목장성으로 활용한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보기도 한다.
<학성>이란 지명은 사상팔경의 <평사낙안>처럼 이곳 강변의 모래펄에 학처럼 귀한 새들이 찾아오는 풍경
을 보고 붙여 졌을 것으로 보이며 <장문평>이란 지명은 옛날<장시,장터>란 뜻으로 이 마을에서는<장문안>
으로 부르고 있다. 이곳에는 구덕고개로 사람의 내왕이 있었고 고갯배도 들어왔을 것이며 목축을 하던 동네
라서 농 ·수산물과 가축의 유통을 위한 조석시로서 장터가 열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학장동의 명소로는 예로부터 이름난 구덕령 고갯길이 있다. 이곳 구덕 골짜기에는 옛날 숲이 많이 우거져
여우가 많이 나와서 야시골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이 <구덕 냇거랑>이다.
구덕천의 바위 틈으로 흘러내리는 계곡물은 예로부터 물이 차기로 소문이 났으며 물이 뱅뱅 돌만큼 깊은
<가메우소>라는 웅덩이도 있어 여름철 피서지로 유명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구덕 골짜기 산에는 명당터가
9곳있는데 이 중에 현재 4곳에는 묘가 들어섰고 5곳이 남아 있다고 한다.
학장동에 전해오는 지명중에는 <홍깨>가 있는데 학장에서 주례쪽으로 흐르는 개울을 말하며 둑길 너머
저지대에는 옛날 <대동도>라는 섬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ㅇ 주례동의 유래
주례본동과 냇바닥 그리고 학장천 1950년 12월
주례동은 예로부터 아래쪽 큰 동네인 주례본동과 고갯길 쪽의 작은동네인 냉정마을로 형성되어 왔다.
조선시대 기록으로 1740년에 편찬한 동래부지에는 사천면 상단 주례리로 나와있고 1872년 제작한
경상도지도에는 사상면 주례촌과 냉정촌이 나와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제방을 쌓았던 기록에는 주례의
하천인 동천과 남천, 그리고 사목포 나루터가 기재되어 있다.
주례의 본 동네 앞에 물길이 합쳐지는 곳을 <냇바닥>이라고 하는데 옛날 이곳에는 강물이 들어와서
나루터가 있었다. 주변에 소나무가 우거져 있어 솔밭이라고 했으며, 주례마을의 중심지는 <골새>였고
<동녘>에도 인가가 있었다. 주례동에서 널리 알려진 곳은 고갯길 중턱에 있던 <냉정>의 약수였다.
'80년대 냉정샘
1714년에 편찬된 이중환의 택리지에 보면 조선13도의 물 중에서 이름난 약수로서 냉정의 물을 꼽고있다.
주례동 지명의 유래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사상지역에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던 주례는 옛날 한 마을의
농사를 동네사람들이 힘을 합쳐 농악을 울리면서 일을 해내었던 공동체로서의 <두레>를 한자로 표기하여
<주례>가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리고 주례가 지형적인 동평현에서 서쪽으로 돌아 나오는 곳으로서 <두루>라는 어원과 낙동강변의 변두리
로서 <두리>와 동평현에서 주례로 나와야 앞이 트인 들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드르>를 들고 있는데 우리의
토속어인 <두레, 두루, 두리, 드르>등에서 주례가 되었다는 풀이를 하고 있다. 주례동은 이처럼 낙동강변
에서 동평현으로 들어가는 입구로서 요지였기 때문에 냉정 산 위쪽으로 있던 성터는 학장동의 학성과 연결
된 목장성인데 방어성으로도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고있다.
이 성터는 해방이후까지 학장동에서 냉정, 개금을 거쳐 가야공원까지 남아있었는데 6·25때 미군이 하야리아
부대를 조성하면서 성벽의 돌을 옮겨가 버려 성터가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성터로 난 길을 따라 가야, 개금, 주례사람들이 냉정 뒤쪽 호랑이굴이 있었다는 오지봉의 구덕재를 넘어
대신동으로 내왕했다. 그런데 주례에 있던 사목포나루터는 가축을 취급하는 배가 드나드는 곳으로서 목장과
연관된 지명으로 보인다.
주례동의 산기슭에는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었고 그 철로를 따라 구도로가 있었는데 냉정 고갯길 쪽으로
새도로가 나면서 지난날 부산에서 서부 경남으로 나아가는 국도가 되었던 것이다. 옛 성터가 있던 산중턱
에는 현재 동서대학교와 경남정보대학이 들어서서 대학촌을 이루고 있다.
ㅇ 엄궁동의 유래
1963 엄궁수문옆 낙동강둑에서 "낙동강칠백리" 영화촬영하는 모습 , 동네 사람들 구경 많이 나와있네요.
1971 엄궁수문옆 강둑에서 주례,학장 방향으로 ...야외전축도 보이고 소울,사이키데릭 양판도 보이네
'80년대 엄궁강변 모습
엄광산의 서쪽 강변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엄궁동의 원 지명은 산 이름따라 엄광리였다. 엄광산은 <엄비치산>
으로서 해가 오랫동안 비치는 산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며 그 아래 마을이 엄광리가 된 것이다. 엄광이란 지명
에는 옛날 이곳이 신을 섬기고 받들던 성스러운 마을이라는 뜻이 담겨 있으며, 1914년 일제시대 산이 활처
럼 생겼다고 엄궁리로 개칭하였다는 말이 있다.
옛날 엄광리의 강변이었던 현 농산물 유통단지 앞쪽으로 서감전의 <장인도>와 마주보고 있었는데 이섬을
엄궁사람들은 물 건너 있다고 <건너섬>이라고 했다. 그리고 배가 와서 닿았던 엄궁선창에는 상선들이 들어
와 객주마당이 형성되었고 주로 선창가 주변에 사람이 살았는데 이곳에는 연자방아도 있었다고 한다.
강변에는 갈대 밭으로 된 <쇠갈밭섬>이 있었는데 그 섬자리의 일부는 강으로 편입되고 일부는 육지로서
강변도로로 변하였다. 이곳의 산쪽에는 전설의 <장군샘>이 있었는데 이 물을 먹으면서 작은 산마을이 형성
되었다고 하며 하단으로 넘어가는 길은 산을 깎아 지금의 도로가 만들어졌지만 옛날에는 산복으로 난 고갯
길로 오르내려야 했다. 그리고 사상쪽으로는 모래둑길로 다녔고 일제때에는 1935년에 생긴 낙동강 제방길
로 구포까지 걸어 다녔다. 그만큼 엄궁은 교통이 불편한 마을이었다,
엄궁 강변과 새갈밭(쇠갈밭,새알섬)'70년대
엄궁에는 잉어와 민물장어, 그리고 숭어가 많이 잡혔는데 이곳의 최고 명물은 재첩이었다. 강 하구지역인
엄궁강변 모래펄에는 재첩의 수확이 특히 많았는데 농사도 별로 없던 이 마을의 부녀자들은 거의 모두가
재첩국 장사를 하였다. 이들은 밤새 고아서 만든 재첩국을 양철동이에 담아서 머리에 이고 걸어서 새벽
어두운 밤길에 마을을 떠나 구덕령을 넘어 대신동으로 가거나 하단을 돌아 괴정을 거쳐 대티고개를 넘어
부민동, 아미동등 시내까지 거리를 누비면서 큰소리로 <째찌꾹(재첩국) 사이소>라고 외치며 다녔다.
이처럼 재첩국은 과거 부산사람들이 매일 같이 듣던 잠결의 첫소리였고 동시에 기상을 알리는 신호처럼 된
것이다. 그리고 부산을 찾는 외지인들에게는 재첩국아줌마의 소리가 잊지 못할 추억거리가 되어주었다.
엄궁동에는 일제시대부터 8·15 해방 이후까지 양어장이 있어 붕어낚시의 명소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6·25
피난 시절 이곳에 와서 낚시질을 한적이 있었는데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라 하여 뒤에 이 마을을 <평화촌>
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 낙동 강변은 철새도래지로서 갈대가 우거진 평화롭고 낭만적인 마을이었
는데 현재는 일부 중소 공장들이 들어섰고 산쪽에는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ㅇ 감전동의 유래
감전동 항공사진 (1947년)
감전동은 오랜 옛날 낙동강 하류와 하구였던 사상지역 내륙 깊숙히 바닷물이 들어 왔던 지역으로서 토사
가 퇴적하여 생긴 모래톱 섬이었는데 강에서 북쪽은 <유도>였고 남쪽으로<장인도>가 있었으며 안쪽으로
<감도>가 위치하였던 것이다.
섬이었던 감도는 조선시대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하여 여름철이 되면 논밭이 홍수의 피해를 입었던 곳인데
1788년 사상지역에 제방을 쌓아 주었던 이경일 동래부사의 공덕이 새겨진 축제혜민비에는 <감동도 일원
에 돌을 세워 새로 물길을 내고 좌우로 둑을 쌓았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1740년에 편찬된
동래부지의 사천면 상단에는 감동의 기록이 없다. 이때는 감동은 높은 지대에서 농사를 짓기는 했으나
대부분 저습지와 갈밭지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1904년에 기록된 문서에는 사상면 감동과 서전리가 나와
있는데 근세에와서 호구가 늘면서 독립된 동네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제방을 쌓았던 기록이나 토지문서에 나오는 <감도>, <감동도>라는 지명은 신의 뜻이 담긴 신성
한 땅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감전동은 옛날 바닷물이 들어 왔던 곳으로 오랜 세월동안 토사가 퇴적된
비옥한 섬이라 <감도>로 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한다.
1968 서감전마을(서전마을,서편마을)과 장인도마을 모습
그리고, 감전동의 서쪽 낙동강변에는 <서발>이라는 곳이 있었다. 서발은 강물에 의한 유사의 퇴적으로
모래톱의 생성과 변동이 많았기 때문에 새로 생긴 뻘이 라는 뜻으로 새뻘이 서발이 되었거나 서쪽 뻘이라서
서발이라 하였을 것이며 그것이 논밭으로 변하여 서전리가 되었을 것이다. 감전동은1914년 감동과 서전을
합쳐서 생긴 지명이다.
감전동의 지명중에<장인도>가 있는데 이섬은 갈밭지대가 많아 집이 한두채밖에 없었던 섬으로서 강변 모래
펄에는 재첩이 많이 잡혔다고 한다. 제방을 쌓았던 기록에 나오는 <강자도>도 학장동의 건너섬인 <대동도>
와 함께 감도와 이어진 섬으로 보인다. 감전동의 이색적인 지명중에는 <포푸라마치>가 있다. 원래 이곳에는
수해방지를 위한 토종 포푸라 나무가 많이 서 있었다고 하는데 강수로를 통한 배가 드나들었던 곳이다.
일제시대만 하더라도 서감전 입구에는 신선한 생선회를 파는 술집이 포푸라나무 밑에 몇집 있었는데 이곳을
<포푸라마치>라 불렀고 오늘날에도 이지역은 주점가가 형성되어 있다.
ㅇ 학장초등학교의 유래
'60년대 학장초교
현재의 학장초교
학장초등학교는 1949년 11월에 인가받아 1950년 5월에 학장동 홍깨마을에서 개교하였다고 한다.
학장리,주례리,엄궁리 아이들과 감전리의 장인도마을 아이들이 학장초등학교를 다녔고.
모라초등학교는 1948년에 사상초등학교 모래분교로 개교 하였다가, 1954년4월애
모라초등학교로 정식 개교하였고 모라리와 삼락리 아이들이 다녔으며
사상초등학교는 1918년도에 사랍명진학교로 개교하여 1920년에 사상공립보통학교로
인가받아 사상면(지금의 사상구)의 감전리,괘법리,덕포리.모라리,삼락리,엄궁리,주례리,
학장리 등 8개리 아이들 모두가 사상초등학교를 다녔으며 학장초등학교와 모라초등학교
가 분교해 나간 뒤에는 괘법리,덕포리 아이들과 감전리의 서감전마을(서편마을)과
동감전마을(감동)아이들이 다녔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70년대 후반이나 80년대 초까진
동네에 재치국 사이소 하시던 아주머니가 계셨었는데...기억이 새롭네요.
홍깨님, 고향 마을이 알아볼 수도 없이 변해서 서운하시겠습니다. 학장초등학교가 공단 한가운데 있는게 신기했는데 사실 학장 터줏대감인 셈이네요. 80년대 학장초 옆에 태창 이라는 회사가 통근버스 운행할 만큼 컸는데, 어머니가 거길 다니시고, 저는 가끔 그 회사 앞에 가면 정류장 이름이 학장초였습니다.
그리고 홍깨마을은 어릴 적 사실땐 물난리가 안 났습니까? 제가 초중 다니던 시절엔 큰 비오면 덕성병원서 학장초로 내려가면 슬슬 잠기기 시작하고 새벽시장, 옛 77번 종점 부근은 물난리였습니다. 새벽시장, 감전초 근처 하천은 자주 넘었던 것 같습니다.
하얀 네모선 안에 있는 홍깨천 개울가에 있던 지대가 낮은 집들은 비가 많이 와
홍수가 나면 집이 침수가 되어 학장초등학교 교실로 피난 하기도 했지요..
나머지 집들과 학장초등학교는 지대가 높아 내가 기억하는 걸로는
침수된 적이 없었습니다..
@홍깨 항상 친절한 답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많은 공부가 되는 정보들로 가득차 있네요.
요번 앞에는 시간상 다 못보고
오늘 마저봅니다.
이 정도 글이면 정성이 보통가지고는 택도 없겠습니다.
넘 수고하셨네요..
수고하심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