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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의 벽을 뛰어 넘어
34: 4-10
4.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대로 시내산에 올라가니
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실쌔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
8.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리어 경배하며
9. 가로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컨대 주는 우리 중에서 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로 주의 기업을 삼으소서
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치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너의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소위를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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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주께서 그에게 명하신 대로, 돌판 두 개를 처음 것과 같이 깍았다. 이튿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그는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으로 올라갔다.
그 때에 주께서 구름에 싸여 내려오셔서, 그와 함께 거기에 서서, 거룩한 이름 주를 선포하셨다.
주께서 모세의 앞으로 지나가시면서 선포하셨다.
"주, 나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며,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나는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기지는 아니한다.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서 경배하며 아뢰었다.
"주님, 주께서 저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 사실이면, 주께서는 우리와 함께 가 주시기 바랍니다. 이 백성이 고집이 센 백성인 것은 사실이나, 주께서 우리의 악과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주의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너희와 언약을 세운다. 내가 너희 모든 백성 앞에서 이 세상 어느 민족들 가운데서도 이루어진 적이 없는 놀라운 일을 하여 보일 것이다. 너희 주변에 사는 모든 백성이, 나 주가 너희에게 하여 주는 그 일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보게 될 것이다. “
서신서의 말씀: 야고보서 5:13 ~ 18
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18.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송하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십시오. 그리고 그 장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마음으로 간절히 드리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니, 주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은 것이 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자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이 나음을 받게 하십시오. 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는 큰 효력을 냅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지만,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하니, 삼 년 육개월 동안이나 땅에 비가 오지 않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내리고, 땅이 그 열매를 맺었습니다.
복음서의 말씀: 요한복음 5:1 ~ 9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그 뒤에 유대 사람의 명절이 되어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드자다라는 못이 있는데, 거기에는 다섯 개의 행각이 있었다. 이 행각 안에는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 환자들 등, 많은 환자들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때때로 주의 천사가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놓는데 물이 움직일 때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낫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삼십팔 년이 된 병자 한 사람이 있었다. 예수께서 누워 있는 그 사람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랜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을 아시고는 "낫고 싶으냐?"하고 물으셨다.
그 환자가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으로 들어갑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하시니,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갔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지금부터 약 90년 전 세계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획기적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가 1910년입니다. 영국의 에딘버러에 전세계의 교회 지도자들이 몰려들었고, 전세계로 선교하러 갔던 선교부 대표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선교대회가 열린 것입니다.
그 대회의 주제는 뭐냐 하면, 이 세계를 복음화하는 데 모두가 힘을 합치자는 것이었습니다. 1910년 에딘버러 선교대회, 이것은 근대 에큐메니컬 운동을 창설시킨 중요한 모임이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주제강연을 했던 사람은 YMCA 창설자 존 모트(John R. Mott)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강연 내용은 지금도 '고전'처럼 남아 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런 말입니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이 살아 있는 동안 전세계의 복음화는 가능합니다. 함께 일어나십시다. 여러분이 죽기 전에 이 세계 전체의 복음화는 가능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중국입니다. 중국 대륙의 선교만 끝나면 전세계는 완전 복음화됩니다. 지금 중국 선교가 불길처럼 일어나고 있으니, 중국은 곧 기독교적인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때가 1910년이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1910년이면 일본에 합방된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 나라 사람은 누구도 에딘버러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사 기록에 보면 한국 교회를 대신하여 두 사람이 참석했는데, 한 사람은 연세대학을 세운 언더우드 목사이고, 또 한 사람은 감리교의 아펜젤러 선교사였습니다. 하여간 1910년 에딘버러 대회는 전세계를 복음화하자고 외쳤습니다. 그것도 거기 모인 사람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말입니다. 마치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내가 다시 올텐데, 여기서 내가 승천하는 것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죽기 전에 다시 오리라."고 말씀하시는 장면과 똑같았겠다고 생각합니다.
1910년이면 서유럽에서는 모든 것이 잘 되어 갈 때입니다. 낙관주의가 창궐하던 시대입니다. 산업혁명의 여파로 모든 산업이 발전했습니다. 진보주의 사관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인류역사에는 진보만 있을 뿐 후퇴는 없다, 잘 되어 간다고 확신했습니다. 교회들도 "우리가 노력한 결과 이 세상은 하늘나라를 닮아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제일 많이 외운 성서 구절과 기도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였습니다. 이 기도가 제일 많이 드린 기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1910년에 에딘버러 대회에서는 5년 후에 다시 모여서 "세계선교협의회"라는 기구를 만들기를 결의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5년이 되기 전 4년이 되었을 때, 바로 낙관주의와 진보사관과 인간의 이성과 능력에 대한 믿음이 최고조에 달했던 그 시기에, 유럽은 철퇴를 맞고 맙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인간의 낙관적 진보사관이 지배하던 유럽 한복판에서 터졌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 터진 전쟁이 유럽 대륙을 다 휘저었습니다.
이것은 인류의 정신사에 크나큰 충격이었습니다. "우리가 죽기 전에" 이 세상을 몽땅 구원할 줄 알았는데, 처참한 전쟁 하나로 그 모든 꿈이 산산조각이 난 것입니다. 철학사상이 변했습니다. 과학사상도 변했습니다. 신학에도 일대 변혁이 일어났습니다. "지금까지는 인간의 제도와 체제와 문화와 역사가 진보를 거듭하여, 그 자체가 하나님나라가 될 줄 알고 믿어왔으나, 인간은 악합니다. 이 세상은 악합니다. 체제도 악합니다. 체제도 이데올로기도 산업혁명으로 일군 사회도 다 악합니다." 그러고 나서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이성과 진보의 옷을 벗고 난 알몸의 인간, 인간의 개개인의 실존 이것 하나만 남았습니다.
"우리는 벌거벗고 서 있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실존주의 철학입니다. 신학에서도 우리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대할 수가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만든 세상과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에게 인간이 어떻게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타자(他者)로만 있습니다." 많은 신학자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은 벌거벗은 실존으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서 있든가, 아니면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벌거벗은 저 실존 스스로가 자기 생의 결단을 하고 스스로의 운명을 만들어 가든가 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이성과 진보의 폐허 위에서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두 길만이 인간에게 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서는 하나님은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가까이 계시지 않고, 아주 멀리, 그것도 도대체 넘나들 수 없는 절대적 타자로서 계신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에게 절대적 타자인, 죄 된 인간으로 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이제 우리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절대 주권의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머리 숙여 신앙을 고백하고,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5년 전 1910년에, 에딘버러에서 소리 높여 외쳤던 꿈, "우리가 죽기 전에 전 세계를 복음화할 수 있다."는 꿈은 불과 4년만에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4년 동안 이루어진 세계의 급변입니다. 물론 에딘버러에 모였던 사람들은 생각은 일리가 있어 보였습니다. 1840년에서 42년까지 영국은 중국과 아편전쟁을 벌였습니다.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고서, 인도에서 나오는 목화와 아편을 중국에 수출했고, 거기서 얻은 이익금을 다시 인도의 식민지 통치자금으로 썼습니다. 중국, 당시 청나라는 반발했습니다. 아편 판매를 금지시켰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청나라와 영국의 전쟁이 벌어지고, 그 결과 청나라는 졌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중국은 수세에 몰리다가, 우리가 아는 대로 홍콩은 영국 손에, 마카오는 포르투갈 손에 빼앗깁니다. 이때가 1910년 에딘버러 총회를 하기 1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서구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세계는 바야흐로 기독교 문명이 지배할 때가 되었다. 이제 곧 복음화를 끝내자. 곧 끝날 것이다." 그런데 그때 전쟁이 발생한 것입니다.
제가 2주 전에 에딘버러에 갔을 때, 1910년 선교대회가 열렸던 그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거기서 90년 전에 세계 교회의 대표들이 모여서 엄청난 꿈을 꾸었던, 낙관적 세계관이 창궐하던 그 당시를 다시 한번 호흡해 보았습니다. "중국 선교가 끝나면 세계의 복음화는 끝날 것이다." 그러나 그 뒤로 끔직한 전쟁이, 세계대전이 두 번이나 발생했고, 지금도 테러를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교회 문을 나오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영국의 전형적인 날씨답게 하늘은 잿빛이고 비는 죽죽 내리고 있었습니다. 에딘버러의 고색 창연한 도심(都心)은 너무나 어두웠습니다. 어둡고 침체되고 비에 젖은 그곳에서 여러 상념에 잠겼습니다. "또다시 전쟁인가? 이곳에서 부풀었던 그 꿈은 어디 갔나?"하고 말입니다.
사실 세상의 위기가 닥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을 찾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찾게 됩니다. 자기의 실존과 거리를 두고 서 있는 신의 존재, 그 신과 자신의 대화, 아니면 신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한테는 자신과 자신의 대화, 이 대화가 끊기면 삶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이제 실존철학을 말하든, 유신론을 말하든, 무신론을 말하든, 하나의 질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한데, 그런데 어디에서 사는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는 도대체 어디냐는 물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계화를 이야기합니다. 동유럽이 망하고 세계가 지금 시장경제 위주로 재편되면서, 모든 문명이, 모든 사고가 이제는 세계화를 향해 몰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세계화는 거대한 하나의 물결이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세계'는 어디 있습니까?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내가 굳게 서야 할 그 세계는 어디에 있습니까? 폭탄이 떨어지는 아프가니스탄에 있습니까? 이게 세계화입니까? 고층빌딩이 주저앉고 펜타곤이 망가지는 뉴욕과 워싱턴에 세계화가 있습니까? 지금 우리 사회에 세계화가 있습니까? 세계화의 물결 속에 세계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니면, 그런 곳이 아니라면 우리 가슴 한구석에 세계화가 있습니까?" 세계화를 말하기 전에 세계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많은 세월 동안, 인간의 이성이 타락하고 물질문명 때문에 인간의 심성이 타락하는 현실을 보고 인간화를 부르짖었습니다. "인간화만이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하고 인간화를 부르짖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니 인간화 속에 인간이 없었습니다. 복음화를 외치는데, 전세계를 복음화하자고 외치는데, 복음이 없습니다. 한국 땅이 교회로 뒤덮인 듯한데, 진정한 교회가 없는 것 같습니다. 신앙을 소리 높여 말하는데, 신이 있을 곳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전쟁을 폭탄으로만 치르는 것이 아닙니다. 세균이 든 흰 가루가 우편물로 배달되면서, 그걸 만진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폭탄을 피해 살 수는 있으나, 생물학이나 화학 무기를 피할 수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이 세상이 지금 세계화니, 컴퓨터니, 과학기술이니, 정보전쟁이니 하면서 물질문명의 첨단을 달리고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 내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안전한 장소는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에 없다면,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그런 곳이 있습니까? 그것이 실존주의라 이름하든, 구조주의라고 이름하든, 안전한 곳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있다고 하든, 없다고 하든, 안전한 곳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2천년 전에 이미 이런 상황을 맛보셨습니다. 인간세계가 너무 악하여, 아들 예수를 통해서 세상 속에 한 자리를 마련하여 인간들과 함께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나 인간 세계는, 인간들은 그분에게 한 곳의 자리도 내어드리지 않았습니다. 몸 누일 데도 없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세상 속에 누울 자리가 없어서 말구유에 누우셨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가 살아야 할 자리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자리가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살고 있는가, 죽어 가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살아 있다고 할 때, 내가 살아 있는 그 자리는 어디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용어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독일어 전문용어로 Sitz im Leben, 삶의 자리입니다. 오늘 모세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에게 이렇게 간구합니다.
"하나님, 저 모세한테 은총을 베풀어주심이 사실이라고 하면, 저의 삶의 자리는 저 백성들이 있는 곳이오니, 저 백성들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사오니, 제 삶의 자리, 저 백성들 가운데로 오셔서 좌정하옵소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 것 압니
다. 우리가 초청하니, 하나님 오셔서 함께하옵소서."
임마누엘!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모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나는 뭇 백성들이 다 볼 수 있도록 너희와 함께할 것이며, 너희들이 살아가는 자리에 나도 함께 있을 것이다. 너희들의 고통을 나도 함께 당하며, 너희의 죄악의 물을 나도 먹고 함께 심판을 받으리라. 그러나 끝내 나는 너희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줄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성취하시려고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오신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지나서 한 연못가를 향해서 가고 계십니다. 그런데 38년 된 앉은뱅이가 예수께 옵니다. "예수님, 저 연못에는 가끔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요동치게 하는데, 그때 연못에 먼저 들어가기만 하면 병이 낫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앉은뱅이여서 못에 빨리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낫고 싶으냐? 그렇다면 그대가 앉아 있는 자리를 아예 걷어 가지고 일어나 걸어가거라." 일어나서, 그냥 가지 말고 자리를 몽땅 들고 가라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의 자리를 몽땅 걷어 가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이 38년 동안 질병에 시달린 사람의 삶의 자리는 하나님이 없는 자리였습니다. "생명도 없는 자리, 움직일 수 없는 자리, 이 자리를 들고 일어나면, 살아계시고 움직이게 하시는 하나님이 그대와 함께할 것이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가라.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병이 나아, 일어나 자리를 들고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대의 믿음이 그대를 구하였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다고 고백하는 그 자리에 그 믿음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함께하셔야 구원받는 것이지, 믿는다는 고백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 신앙, 임마누엘이 없는 신앙고백은 가짜입니다. 차라리 그런 고백보다는 하나님이 없다는 고백이 훨씬 더 진지합니다. 진실로 하나님이 계신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제 삶의 자리에 하나님이 거하실 공간을 마련해 놓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절대 타자라고 하든 하지 않든, 옆에 있다고 하든, 앞에 있다고 하든, 뒤에 있다고 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는 하나님을 놓고 있느니 없느니,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느니 떠드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 의미가 있는가 하면, 그 하나님이 우리와 임마누엘 하실 때입니다. 제 가슴속에, 제 삶의 한복판에 지금 함께하고 계시는, 눈물을 같이 나누고, 같이 웃고, 같이 찬송하며 그렇게 계시는 그 하나님이 저에게 필요합니다. 그 외의 하나님은 여러분의 상상의 하나님, 학문의 하나님, 합리주의 하나님입니다. 그건 여러분이 관심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직접 인간과 함께하십니다. 고난 당하는 세계 역사 속에 하나님은 함께하십니다. 그래서 앉은뱅이에게 침상을 걷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알을 깨고 나오라고 하십니다.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받는 자 계십니까? 기도하십시오." 그 말은 "여러분의 기도 속에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라는 뜻입니다. 임마누엘! 그래서 낫게 된다는 것입니다. "즐거운 사람 있습니까? 찬송하십시오."라는 말은 하나님이 찬송 가운데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아픈 자 있습니까? 장로들 불러다가 기도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 기도 속에 하나님이 임마누엘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살며, 함께 고난받으며, 함께 즐거워하실 자리, 그 자리를 어디에다 마련하시렵니까? 여러분의 가정에 마련하시면 좋고요, 우리 교회에 마련하시면 좋고, 여러분 가슴속 한복판에다 그 자리를 마련하시면 더 좋습니다. 이 세계가 구원받아야 하겠습니다. 복음화도 되어야 하고, 모두 구원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오실 자리가 없는 한 이 세상은 전쟁과 야욕으로 점철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내가 앉을 자리 좀 마련해다오." 하나님의 부르시면 그 앞에 나아가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우리가 하나님을 초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좀 모십시다. 모시면 변화가 생깁니다.
여러분 귀한 손님 맞으실 때 집안 청소하시죠? 옷매무새도 가꾸시죠? 머리도 빗으시죠? 마음도 정돈하시지요? 손님도 그렇게 맞이하는데, 여러분과 함께 살려고 하시는 하나님을 맞으려면 뭘 준비해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삶의 자리를 한번 들여다봅시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같이 고난받고, 같이 즐거워하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찬송하는 그곳이 바로 우리 중심이 되도록 해봅시다. 우리의 중심에 한번 모셔 보십시다. 하나님이 오십니다. 아멘
출처: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