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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이 있는 가르침
성경본문 : 잠언 22: 5-6
5. 패역한 자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거니와 영혼을 지키는 자는 이를 멀리 하느니라
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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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희 목사
고대 기독교 전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영혼을 포기했던 그 곳에서 그분은 곧장 지옥으로 내려가 고통 속에 있던 죄인들을 모두 풀어주었습니다. 악마는 더 이상 지옥에 올 죄인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울지 말아라. 자신들의 선을 의식하면서 자기만족에 빠져 있고 죄인들을 저주하면서 자기 의에 빠져 있는 거룩한 사람들을 내가 네게 보내마. 그러면 지옥은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몇 세대가 지나기 않아 죄인들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고 하셨답니다.
자기만족, 자기 선, 자기 의란 행함이 없는 신자의 모습을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자기만족과 자기 선, 자기 의로 하나님의 믿던 전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적이었습니다. 의식적이고 문자적인 그리스도인을 일컫습니다. 이런 모든 것은 결과적으로 죄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이기 때문은 참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천이 없는 가르침은 참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1초에 4만개, 하루에 30억 개가 팔리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상품이 있습니다. 코가콜라입니다. 콜라는 1886년에 미국 애틀란타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존 펨블튼 박사가 소다에 갖가지 약재를 섞어 소화제 대신으로 판매한 것에서 유래합니다. 처음엔 청량음료가 아닌 소화제 대신 판매하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콜라의 잠재력을 예감한 챈들러라는 사업가가 제조법을 사들이고 코카콜라라는 상표명으로 등록하여 콜라의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가 1893년, 우리 교회의 창립보다 한 해 앞섭니다. 우리교회가 세워질 때 벌써 코카콜라가 세상에 있었습니다. 코카콜라의 올해 브랜드 가치는 약 840억 달러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약 100조원입니다. 코카콜라라는 이름의 가치를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브랜드 가치는 삼성이 약 110억 달러로서 세계 25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코카콜라 이름의 가치가 얼마나 큰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 해 전에 코카콜라 회장이 인터뷰한 기사를 읽어보았습니다. “지금 이렇게 많이 팔리고 있고 전 세계적인 상품인데 왜 광고를 계속합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코카콜라를 모르는 사람이 계속 태어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알고 있고 있지만 계속해서 가르치고 알려야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복음도 우선 알고, 깨닫고, 그리고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는 것이 힘입니다. 그러나 알고만 있으면 참 힘이 아닙니다. 지식은 행함으로 비로소 힘이 됩니다. 미국의 철학자이며 교육학자인 죤 듀이는 “행함으로 배운다”(Learning by Doing)고 하였습니다. 가장 좋은 교육은 행함을 통하여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똑같은 설교를 그 다음 주일, 그 다음 주일에 반복하였습니다. 교인들이 의아해서 “왜 그렇게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여러분들이 그렇게 행할 때까지 계속하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듣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설교의 중요성입니다.
개혁주의에서는 신앙을 세 단어로 해석합니다. 지식, 동의, 신뢰입니다. 지식은 머리로 이해하는 단계의 신앙입니다. 동의는 가슴으로 느끼는 단계의 신앙입니다. 그리고 신뢰는 온 몸으로 행하는 단계의 신앙입니다. 살아있는 신앙은 몸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온 몸으로 가르치고 온 몸으로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하니 “이만큼” 하시면서 양 팔을 쫙 벌리고 죽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8:19-20에는 예수님의 최후의 명령이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게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 말씀에도 가르치는 것은 지키게 해야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가르쳐 지키게 해야 참 교육입니다. 예수님의 분부인 성경의 가르침은 많습니다. 성경에는 약 32,500가지의 명령이 있습니다.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들이 이렇게 많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잘 지켜야 할 것들입니다.
조선조 후기에 나타난 실학파를 아시지요? 정약용에 와서 집대성되었다는 실학은 실증과 실용을 중시하고 사실로부터 옳은 결론을 얻어내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중시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다스려 쓰는데 이르게 한다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을 강조했습니다. 학문이나 정치가 실생활에 이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학문은 실제 사회에 이바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이런 실용성이 있고 살아있는 학문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자기 몸으로 실제로 이행하는 '실천궁행'(實踐躬行)의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은 손발이 살아 있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영어 문법이 아니라 영어 회화가 가능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활용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신앙입니다.
첫째, 행함이 있는 가르침은 믿음의 말씀과 선한 교훈입니다.
6절에는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잘 가르쳐야 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용이 좋아야 하고
다른 하나는 교육의 방법이 좋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좋은 내용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가르쳐야 합니까?
믿음의 말씀입니다. 믿음의 말씀을 가르쳐야 행함이 있는 가라침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많은 말들이 있지만 들어서 유익되지 않는 말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갖가지 난무하는 말의 장난을 보세요. 듣지 말아야 하고 듣고 나서 귀를 씻어야 하는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선한 교훈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악한 교훈이 많이 있습니다. 사기 치는 것을 가르치고, 이중장부 기록하는 것을 가르치고, 적당히 거짓말 하는 것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이런 교훈은 악한 교훈입니다. 이런 악한 교훈이 우리 사회에 너무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좋은 말을 들어도 평생 시간이 모자랍니다. 그런데 왜 악한 말을 하고 듣고 삽니까? 우리가 선한 교훈을 하고 선하게 살려고 해도 평생 시간이 모자랍니다. 그런데 왜 악한 교훈을 일삼고 악한 일을 하고 삽니까? 사랑할 시간도 없는데 왜 미워합니까?
빌립보서 4:9에는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합니다.
배우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받고 듣고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행해야 합니다. 배운 것은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잊어버리기 쉬운 것 세 가지가 있답니다.
그것은 우리의 허물과, 친구와, 교훈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허물은 잊고 남의 허물만 기억합니다.
좋은 친구는 잊어버리고 나의 잘난 맛에 삽니다.
그리고 좋은 교훈은 쉽게 잊어버리고 같은 오류를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인간이 교훈을 받는 것은 자연의 미물보다 못합니다. 작은 미물들도 다 자연의 교훈을 따라 삽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삶의 교훈이 널려 있습니다. 자연과 우리 주위에서 시시각각으로 발생하는 사건과 이미 주신 말씀들이 다 교훈입니다. 온갖 교훈에 둘러싸여 살지만 교훈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선한 교훈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의 문제는 교훈을 받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잘못 교훈했다가 큰 코 다칩니다. 그래서 교훈해야 할 일이 있어도 아예 못본 척하고 못 들은 척합니다. 아이들을 교훈하다 지하철에서 망신당하고 심지어 어른들이 청소년들에게 폭행당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무시하고 지나쳐 버리는 것입니다. 교훈을 받지 않는 사회는 진보하거나 변화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회가 병적인 사회입니다.
디모데후서 3:13-14에는 “악한 자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합니다. 거하는 것은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배우는 대로, 믿는 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배우는 것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살아야 지식도, 신앙도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는 마른 버즘도 얼굴에 달고 살았고 입가가 찢어지기를 잘 했습니다. 저의 할머님은 입이 크느라고 찢어진다고 하셔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 키울 때보니 한번도 안 찢어지고 입이 커집디다. 알고 보니 영양가 부족이었습니다. 그 때는 먹는 것이 중요한 때입니다. 있으면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때가 아닙니다. 아직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지만 우리나라도 잘 살아서 대부분은 영양가가 충분한 음식을 잘 먹습니다. 이제는 적당히 먹고 활동을 많이 해야 합니다. 일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지식과 신앙도 먹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일해야 합니다. 행함이 있는 지식과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행함이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행함이 있는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로널드 롤하이저는 아우구스티누스는 두 번 회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한번은 머리로 한 회심이었고, 다른 한번은 가슴으로 한 회심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머리로 하는 회심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머리의 회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가슴의 회심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가슴의 회심만으로도 부족합니다. 온 몸의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4:9에서 “너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행함이 있는 가르침은 경건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7절에는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합니다. 신화와 경건은 서로 상반되는 것입니다. 신화에 매이지 않고 경건을 연습해야 합니다. 경건은 연습을 통하여 우리의 삶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5-7에는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은 자라는 것입니다. 공급하는 것은 쌓아가는 것입니다. 경건은 그 가운데서 연습하고 자라야 할 요소입니다.
경건주의는 교회의 세속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입니다. 특히 17-18세기에 독일의 루터교회 중심으로 가장 번성하였습니다. 이런 경건주의 운동은 청교도들에 와서 꽃을 피웠습니다.
하워드 헨드릭스는 청교도들은 누구나,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즐겁게 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청교도들의 삶의 목표는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경건하게 다듬어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거짓 경건은 이중 죄악입니다.
디모데후서 3:5에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모릅니다. 경건은 모양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겉모습이 경건이 아니라 내면성이 경건입니다. 경건은 그 자체가 힘입니다.
청교도들은 경건의 삶을 훈련했습니다. 주일에는 반드시 교회에 나오는 것을 훈련하고 강조하였습니다. 어떤 청교도에게 물었습니다. “왜 예배에 빠지지 않습니까?” 그 때 그의 대답은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니까요”였습니다. 항상 준비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경건의 삶입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시절에 워싱턴의 어느 교회에 어떤 낯선 교인이 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안내하는 분에게 물었습니다. “대통령이 참석합니까?” 그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글쎄, 대통령이 올지 안 올지는 몰라도 주님께서 참석하실 것은 확실합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사는 것이 경건입니다.
야고보는 야고보서 1:26-27에서 참된 경건을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 세속에 물들이 아니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꾸준한 연습을 통하여 경건을 쌓을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경건한 자”란 그리스도인의 명칭이었습니다.
사도행전 8:2에는 “겅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고 합니다. 경건한 사람이라는 이름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경건한 이름을 들어야 진짜 성도입니다.
지도자가 되기 위한 열쇠는 지도력을 발휘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경건을 연습하여 경건을 통하여 경건한 자라는 이름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행함이 있는 가르침은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10절에는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라고 합니다. 이 땅에 소망이 아니라 하늘에 소망이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행함이 있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보화입니다. 하늘의 소망이란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랍비 바룩의 손자 여히엘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여히엘이 다른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며 꼭꼭 숨어 있었습니다. 술래가 찾아와 주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20분이 지나도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여히엘은 살짝 나와서 주위를 살펴보고 다시 오랜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잠시 후에 친구가 처음부터 자기를 찾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는 배신감에 울면서 할아버지께 달려와 불평을 하였습니다. 그 때 랍비 바룩이 눈물을 주루룩 흘리면서 하나님께서도 똑같은 말씀을 하고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숨어 있는데 아무도 나를 찾으려 하지 않는구나”. 하나님이 있다고 가르치고, 하나님을 배우고 있지만 머리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최대의 욕은 “소망이 없다”(hopeless)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사람 가운데 인생이 끝난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끝나지 않으면 소망도 끝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이 있는 곳에 소망이 있다”(Where there is life, there is hope)는 말이 있습니다.
도서의 전도자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고 합니다.
소망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목표를 사람에게 두면 헛되고 헛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두면 아직 소망이 있습니다.
골로새서 1:27에는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소망의 주체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머리인 교회도 소망이 있습니다. 그 교회를 구성하
는 우리도 소망이 있습니다.
정신신경면역학이라는 새로운 분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인간은 통합된 전체로서 행동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방식과 감정이 육체적, 정신적 건강에 미묘한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의 경험, 지식, 신앙 그리고 모든 인격이 아우러져서 행함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전 인격을 대변합니다. 여기에 소망이 보여야 합니다.
결론
알바니아 태생인 아그네스 브약스히야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가장 평범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대학을 다닌 적도 없고, 결혼을 한 적도 없으며, 자기 차를 가져 본 적도 없습니다. 죽어가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면서 자기의 믿음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우리 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위인인 마더 테레사입니다. 캘커타에서 ‘사랑의 선교회’를 설립하여 가난한자, 병든자, 장애인, 고아 등 수많은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를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그녀는 죽어서도 아직도 전 세계 수백만의 사람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사랑은 말이 아닌 것을 그녀는 가르칩니다. 선교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닌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함입니다. 사랑은 섬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가장 평범한 우리도 얼마든지 테레사 수녀처럼 살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행함이 있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선한 교훈을 잘 가르쳐서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노벨평화상 이상의 하늘의 귀한 상을 받고 면류관의 상급을 받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