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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16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은혜 / 한서노회
근자에 들어서 우리나라에 자본투자를 위해서 몇 번 왕래함으로 우리들에게 더욱 친숙해진 가수 겸 사업가인 마이클 잭슨을 기억합니다.
이 사람은 무대에 설 때 거의 신적인 존재로 추앙을 받는 팝스계의 대스타입니다.
지금까지 천만장이 넘는 음반을 팔았고, 그 수익금만 해도 300억원을 넘습니다.
한마디로 명예와 부를 한꺼번에 쥔 사람입니다.
이 사람 자체가 하나의 기업입니다.
가는 곳곳마다 관중을 몰고 다니고, 또한 그들을 열광시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도 자기 자신은 정작 만족함이 없었고, 기쁨도 평안함도 없었습니다.
이사람 표정을 보면 웃는 모습이 거의 없습니다.
마이클 잭슨은 공연이 끝나고, 썰물처럼 관객이 다 빠져나간 빈 무대위에 서서 고독한 눈물을 한없이 흘리곤 했습니다.
한번은 그가 무대 뒤에서 슬피 울고 있을 때 무대의 청소를 담당하는 청소부가 다가와서 이렇게 조용히 속삭였습니다.
<"돈은 인간을 파멸시킬 소망을 주지 못합니다. 정말로 당신이 참 기쁨을 얻으려면 주 예수를 영접하십시오.">
그리고 청소부는 휘파람을 불면서 행복한 모습으로 떠나갔습니다.
마이클 잭슨은 태풍과 같은 소용돌이가 지난 후 찾아 온 고독을 가슴에 안고 조용히 교회당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비로소 기쁨과 소망과 평화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언제 우리가 가장 행복했습니까?
어떠한 형편에 있을 때 우리가 가장 사랑 받는다고 느꼈습니까?
어떠한 형편에 있을 때 우리가 가장 사랑 받는다고 느꼈습니까?
어떠할 때 우리의 마음이 가장 평안했습니까?
언제 우리가 가장 인간적으로 아름답고, 바르게 살았습니까?
하던 일이 잘 될 때 였습니까?
건강할 때 였습니까?
의욕이 넘치고, 분주하게 일할 때 였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로 행복할 때는 형통할 때보다 오히려 힘든 때 아니었습니까?
성공할 때 보다 오히려 실패했을 때 이웃의 소중함을 알았고, 이웃을 더 뜨겁게 사랑하지 않았습니까?
부유할 때보다 오히려 가난했을 때 건강할 때 보다 병들었을 때, 우리는 조그마한 것에 감동하고, 기뻐하지 않았습니까?
저 자신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나라가 어렵다고 하지만 과거와 비교하면 지금 우리가 얼마나 잘 먹고, 잘 입고, 잘 삽니까?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보통 집은 냉장고가 없었습니다.
아이스박스만 있어도 문화 생활한 것 아닙니까?
설령 냉장고가 있었다해도 냉장고 속에 채워 넣을 음식 자체가 별로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김치 밖에 더 넣었습니까?
그러나 지금 우리의 냉장고 속에는 무언가 먹을 음식으로 가득차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우리는 만족할 줄 모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짐으로 우리의 입맛이 못되게 변했습니다.
진수 성찬을 놓고도 맛이 없다고 불평을 늘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음악감상을 잘 못하고 있습니다마는 원래 제가 음악감상을 좋아합니다.
음악을 제일 많이 들었을때는 1주일 동안 아무일도 안하고, 밖에 나가지도 않고 음악만 들었습니다.
그래서 결혼하고 방하나 얻을 여유가 없어서 처가집에 얹혀서 살았지만, 조그마한 오디오 기기를 사서 음악을 듣게 되었을 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아침마다 즙폐의 '경마병 서곡'을 들으면서 행복감에 젖어서 직장에 출근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더 좋은 오디오 기기를 놓고도 잘 듣지도 못할뿐더러, 들어도 그 때 만큼의 진한 감동이 오지를 않습니다.
얼마나 모순된 모습입니까?
우리는 참으로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고 있으면서도 행복을 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희승이라는 작가는 그의 수필에서 인간을 약간 비꼬으면서 사람을 이렇게 정의를 했습니다.
"사람이란 대체로 묘한 존재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우선 묘하고,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묘하고, 그러면서도 무엇을 생각하려고 하는 것이 묘하고, 백인백색으로 얼굴이나 성미가 다 각각 다른 것이 또한 묘하다.
모르면 약이요, 아는게 병인데도 아는체 하는 것이 묘하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건만은 뛰려고 하는 것이 묘하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삶속에 기쁨과 평안이 넘칩니까?
아니면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이 있습니까?
미래가 다 불안합니까? 염려스럽습니까?
그렇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너무나 분주하고 탈진된 상태로 살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우리 모두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 보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가장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르호보암 왕의 범죄 이후 이스라엘은 남와국, 북왕국으로 나뉘게 됩니다.
그리고 북왕국은 계속적으로 쿠테타가 일어나게 되고, 피 의 살육으로 정권이 바뀌게 됩니다.
그러다가 오므리가 권좌에 앉음으로 조금씩 왕권은 안정을 찾게됩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아합이 북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세상적으로 본다면 아합은 정치를 잘했고, 외교술도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합왕을 가장 사악한 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6장 30절 이하의 말씀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사당속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게 하는 가장 악한 왕, 그러기에 그 어느 때 보다, 선지자가 열심히 일해야 할 때였습니다.
왕의 잘못을 지적하고, 우상 숭배하는 백성들을 바르게 지도할 영적 지도자, 선지자가 가장 필요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상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 엘리야를 세상사에서 떠나게 하고, 조용한 시냇가에 머물게 하십니다.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한 삶의 우선순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더라도 그것보다 우선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일대 일로,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마음 속에 세미한 음성으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붙들어 주시고, 강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온전하시고, 기뻐하시고, 선하신 뜻을 바르게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세움을 입고, 능력을 받고, 훈련을 받는 것이 가장 우선된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맡기실 때, 일부터 하라고, 지시하시지 않았습니다.
먼저 기다리고, 능력을 힘입고, 사명을 깨닫고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복음 24장 48절, 49절 말씀에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사도행전 1:4절 이하의 말씀에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나를 향한 히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기 위해서 기다리는 것은 결코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가장 바른 판단이고, 가장 바르게 효과적으로 사는 지혜로운 사람의 모습입니다.
요즈음 우리나라가 왜 이렇게 혼란스럽고 어지럽습니까?
한마디로 기다릴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아니, 아예 생각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니 지혜가 없고, 상대방과 대화가 안되는 것입니다.
요즈음 많은 국민들과 정치인들, 또한 실업문제로 고통받는 수많은 근로자들,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아픔을 공감합니다.
정부 여당이 잘못한 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우리들은 모든 면에서 너무 서두른다는 것입니다.
기다려 줄줄을 모릅니다.
여론이 가장 발달한 미국도 대통령이 취임한 후 6개월 동안 허니문기간을 줍니다.
잘못해도 비판을 자제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일이 잘 진행되지 않는다고, 시위부터 하는 것입니다,
데모하고, 또 걸핏하면 노동자들도 가장 극약처방인 전면파업을 주장합니다.
여러분!
오늘의 한국의 문제, 수십년동안 잘못된 것이 지금 한꺼번에 터진 것 아닙니까?
집권한지 이제 겨우 5개월 됐는데, 오래된 잘못된 관행이 하루 아침에 말끔히 씻어집니까?
무너지는건 하루 아침에 무너지지만 복구는 하루아침에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얼마 동안은 차분히 계획성 있게 일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고 격려해 주며, 힘도 실어 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문제를 가지고 우리들이 기도할때에도 그저 그 문제가 빨리 해결되기만을 바랍니다.
그 문제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섭리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저 무병장수, 만사형통을 원합니다.
그러다보니 기독교가 십자가의 은혜보다는 무속 신앙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시키고,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서 오늘까지 무던히 참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우리들을 하루 아침에 기계적으로, 마술적으로 "얏"하고 변화시키신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 만남을 통해서 때로는 채찍과 징계를 통해서 서서히 조금씩 점진적으로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쁜 삶의 현장 속에서 잠시 숨을 돌려 안식하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참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영적으로 깊이 교제해야 할 그릿 시냇가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승리하는 삶의 비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뜻에서 하나님과 조용히 만나는 이 그릿시냇가의 훈련을 거친 사람만이 인생의 항로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오늘의 말씀 가운데서 특이한 점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먹이실 때 까마귀를 사용한 점이고, 또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특별히 시돈에 속한 사르밧 과부를 통해서 그를 먹이셨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영적인 깊은 뜻이 있습니다.
16절 말씀에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저가 시내를 마셨더니……>
무슨 전설이나 안데르센 동화집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까마귀가 입으로 물고 온 음식이라고 한다면 그 양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무리 넉넉하게 쳐준다 해도 배가 부를 정도의 많은 음식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또 세끼도 아닌 두끼뿐 아닙니까?
이왕 주실거면 사자의 입을 통해서 주시든지, 아니면 하다못해 진돗개나 세퍼드를 통해서 주셨다면 엘리야는 더 풍성한 삶을 살았을 것 아닙니까?
복도 한꺼번에 왕창 주시면 좋은 것 아닙니까?
또 얻어 먹을 바에야 좀 부자집을 선택해서 잘 얻어 먹게 하실 것이지, 하필이면 식량이 다 떨어져가는 과부집을 선택할게 무엇입니까?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복의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매일매일 우리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하신 것 만큼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 생활 가운데 만나를 주실 때 일주일치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한달치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아침마다 필요한 만나를 주셨습니다.
오늘도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또 앞으로도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땅에다 너무 부를 많이 모을려고 애쓰지 않아야 합니다.
장래에 대해서 염려하고, 부와 물질을 모으면 모을수록, 우리는 현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땋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등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사실 우리들이 영적인 존재이지만, 육신을 또한 입고 있기 때문에 먹는 문제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번수련회에서도 예산 중에 먹는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먹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말슴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믿음생활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예수님의 삶속에서 분명하게 배웁니다.
사탄은 성령으로 충만한 예수님을 넘어 뜨리기 위해서 3가지 큰 시험을 합니다.
1.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2.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
3. 나에게 엎드려 경배하라.
이 때 예수님은 단호하게 하나님의 뜻을 드러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사단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경제가 회복되고, 권력과 명예을 얻으면 우리들이 바로 살 수 있습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를 넘어뜨리는 사단의 전략이요, 계략입니다.
경제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수단이나 방편이 되어야지, 우리 인생의 목표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을 바르게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여기에 인생의 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돈 버는 것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디에다가 돈을 쓰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한 까마귀나 사르밧 과부의 공궤는 바로 우리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사람은 꼭 힘이 있는 사람이나 재력이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배경이 좋은 사람만이 아닙니다.
까마귀와 같이 힘없고, 과부같이 배경 없는 사람들을 들어서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인간적으로 연약하고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타고 있었을 때 그들은 귀하게 쓰임 받았던 것입니다.
수 많은 선지자가 그러했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우리 자신만의 힘으로는 한없이 연약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 쓰시면 세상이 감당못할 능력의 사람으로 굳게 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사도를 통해서 우리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아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악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우리들이 안고 있는 문제, 경제 논리로 풀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힘의 논리로도 풀리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게 될 때 우리의 인간성도 회복되고, 우리의 모든 문제도 풀릴 줄로 밉습니다.
또한 우리를 들어보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다함이 없으십니다.
세차게 흐르는 시내도 마를 때가 있습니다.
수많은 물질도 복도 명예도, 권세도 다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다함이 없습니다.
16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전능하신 분입니다.
무한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력이 쇠할 때마다 힘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힘과 능력을 공급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서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바얄과 아세라 목상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온전히 드러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과도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의 뜻대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다함이 없는 복으로 우리들에게 채워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도 그릿시냇가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 앞에 우리의 시간과 장소와 물질을 드리시지 않겠습니까?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출처 한서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