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일보’는 1945년 10월 7일 인천에서 창간되었고 한국전쟁의 발발로 1950년 6월 폐간된 신문으로 해방 직후 서울을 제외한 수도권지역에서 가장 먼저 창간된 한국어신문이다. ‘대중일보’에 대한 인천과 학계의 관심은 지대하지만 이러한 관심이 일부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자료가 중요한 것은 가장 오래되었다거나 다른 곳에 없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를 보고 읽고 참고하고 생각하는 근간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그 첫 걸음으로 그간 잘 알려져 있지 않던 재미있고 인상적인 ‘대중일보’의 기사를 골라 다시 읽어보며 해방기의 시선으로 오늘의 인천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
어쩌면 일부에게는 갑작스러웠던 해방을 맞이하고 반년이 지나 1946년 3월 1일! 아직 이렇다 할 거국적 합의에도 이르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이날이 국경일이고 크게 기념해야 한다는 생각은 너나없이 한마음이었다.
이 날 신문들을 살펴보면 동아일보는 기념식 참여를 독려하는 기사를 헤드라인으로 삼았고 삼일운동에 대한 회고를 중심으로 이승만, 오세창의 회고와 송진우에 대한 기억을 회고를 쓴 김준연의 글이 1면을 채웠다. 조선일보는 삼일절의 의의를 짚어보며 백범과 엄항섭의 글을 1면에 안배했다.
▲독립선언서, ‘대중일보’ 1946.3.1.
우리의 대중일보는 ‘기미독립선언서’ 전문을 1면에 실었다.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라는 헤드라인 아래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고 시작하는 감격적인 선언서를 실어 기미독립선언의 의미를 다시 짚어보고자 하였다.
해방된 1946년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다시 읽었을 당시 독자의 절절한 심정도 짐작되려니와 100년을 채워 2019년 3월 1일 다시 읽는 감개도 더욱 무량하다.
삼일운동을 특정인의 이름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선언서 자체로 기억하려 했던 대중일보의 안목은 다시 생각해도 경탄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삼일운동을 겪은 이들의 회고란 그날의 감격을 개인적인 업적이나 감상으로 환원하기 쉽다.
그러나 삼일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그날의 정신이다. 조선이 독립국이고 조선인이 자주민이라는 이날의 선언은 어느 사람에게 귀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날의 대표자였던 33인의 훼절을 염두에 두어도 ‘사람 때문에 말을 폐하지 않고, 말 때문에 사람을 폐하지 않는다.(不以言擧人 人廢言)’고 하였으니 독립선언서를 다시 읽는 일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역사와 현재와 미래를 점검하는 일이었을 터이다.
그리고 하단에 사설을 덧붙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목이 ‘삼일혁명기념일’이다. 삼일절의 혁명성을 전면에 내세운 명칭이니 단순히 명절로 일컫기보다 훨씬 선명하다. 사설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첫째는 호국영령의 명복을 빌며 기뻐하시라 고하는 뜻이요 둘째는 전민족의 참여에 따른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짚었다. 셋째는 이날의 정신을 이어 사사로이 지위와 재물을 추종하지 말고 민족상쟁을 불식하고 역사적 창업에 성심을 다해야 한다는 시대적 의무의 이행을 촉구하였다. 삼일절을 기리는 미래의 의미이니 오늘과 다르지 않다.
▲사설 삼일혁명기념일, ‘대중일보’, 1946.3.1.
삼일혁명기념일
1 3월 1일은 천추만대로 영구불망할 조선민족의 역사 혁명기념일이다. 기미년 후 이제 26회, 일적에게 합병 당한지 37년만이요 해방 후 처음 맞는 경축일이라 천도 어찌 무심타 하오리. 천운이 순환하야 삼천리 근역에 회생의 춘서(春瑞) 베푸시고 역대성조의 홍은이 지후(至厚)하시어 이 복지 이 강토의 중생에게 천여(天與)의 활로를 열어주시니 이는 오로지 조국을 이하여 순절한 혁명투사의 거룩한 공덕이라 이제 여러 영령들에 삼가 머리를 숙여 명복을 축원하오며 아울러 오늘의 해방은 국제상조의 혜택임을 알려오니 비록 고혼이오나 응감환열(應感歡悅)하소서. 2
잔인한 폭정에서 벗어나 조국의 독립과 자유의 획득을 위함은 인류평등의 대의에 불타는 한민족의 정의감에서 우러나는 천심이라. 이 어찌 고목이 아닌들 방관하며 그 참혹한 학대를 감수하랴. 자손만대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야 철천의 원한을 풀고자 기미년 3월 1일을 기하야 전민족은 일정에게 항쟁의 봉화를 들게 되었으니 이것이 조선민족의 독립운동이며 전세계 약소민의 해방운동의 성스러운 전조곡이라. 세계사적 의의가 크고 길이 역사에 찬연하야 ○餘음이 영원하리라. 3
망국의 원한과 자유없는 민족의 비참하고 기구한 역사적 운명의 개척을 위하야 절치부심한지 몇 해나 되었던가. 민족의식도 시대의 변천에 의하여 다소 새로워질 것이며 민족 심리에도 날카로운 시대적 반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족 상쟁이 불식하고 국난타개책이 사연(査然)하니 이 어찌 민족의 장래를 우려하지 않으리요. 전도거익(前途去益)○○하고 생도(生道) 막연한 오늘의 기념일을 당하매 희비상반한 심리를 무엇으로 형언하리요. 이제 27년전 금일을 회고하여 편○적 주관의 재비판이 있고 아(阿)○추종과 탐위취재(探位取財)를 삼가하야 스스로 반성의 ○○를 얻어 역사적 창업에 성심을 다하기 바라 마지 않는 바이다. |
기미독립선언서와 이날의 사설을 다시 읽으니 우리의 역사적 책무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날 대중일보의 의취를 오늘날의 말로 바꾸어 “사사로운 당리당략을 버리고 민족 대통합과 민생 활로를 찾아 스스로 반성하며 역사적 창업에 성심을 다하자”고 써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100년 전 시작한 삼일정신의 혁명적 목표를 더이상 미룰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2면 머릿기사는 ‘금일은 해방 후 첫 삼일 성전 경국하자. 삼천만 일심으로’라는 큰제목 아래 ‘축하식장과 직장, 가정에서’라고 작은제목을 달고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최고 국경일에는 우리 삼천만 겨레는 당파와 계급을 초월하여 한 맘, 한 뜻으로 어디에 있든 선열에 추념묵상하며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축복하자고 호소하였다. 이날 기념식은 공설운동장에서 있었다.
3월 3일 대중일보에는 서울 보신각 앞에서 열렸던 기념식은 물론 인천 공설운동장에서 있었던 삼일기념식의 경과를 자세히 보도하고 있다.
조봉암, 곽상훈, 하상훈, 이범진 등 말 그대로 해방공간 인천을 대표하는 좌우 인사가 모두 한 마음으로 동석하여 5만 시민과 한 뜻으로 삼일정신을 기리고 가장행렬을 포함한 시가행진을 즐겼던 모양이다. 상상만으로도 설레고 자랑스러운 광경이다. 다소 긴 기사지만 함께 그려볼 수 있도록 덧붙인다.
인천시에서도 이날의 경축식은 개항 이래 처음 보는 대성황리에 무사히 마치었다. 이날 인천시는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하여 전 시(市)는 그야말로 태극기 일색이었고 모든 공장의 사업장도 이날을 경축하기 위하여 업을 쉬었으며 각 동민들은 동회에, 공원들은 공장에서 학생과 아동은 학교에서 각기 경축식을 올린 다음 오전 11시를 목표로 이날의 중심 기념축하식장인 도산정 공설운동장으로 앞을 다투어 열을 지어 집합하여 정각까지에 식장에 모임 축하회 참열시민은 임(임홍재) 시장을 비롯하여 무려 5만 명으로 추산되는 초유의 성황이었다.
장래 가장행렬을 예비한 채인 기괴한 차림의 각 단체의 수풀 같은 슬로건 등의 깃발과 그리고 누구든지 들고 있는 태극수기로 장내는 깃발의 바다로 화하였고 미급하여 장(場)의에 넘친 민은 부근의 산과 언덕 위를 덮었었다.
조봉암 씨의 사회로 식순에 들어 주악 감격한 국기게양이 끝난 다음 일동의 애국가 제창에 이어 조선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선열을 추모하는 묵도가 있은 후 대책위원 곽상훈 씨의 “우리 인천은 좌우 양익이 합심하여 이 뜻있는 성전을 경축하게 되었으니 우리의 자주독립은 멀지 않아 획득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의 개회사로 개회하여 혁명투사에 대한 하상훈 씨의 감사사(感謝辭)가 있고 이범진 씨가 의의 깊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때에는 장내가 잠자는 듯이 정숙으로 돌아가서 이 날의 일동은 감격을 새롭게 하였다.
다음에는 선언문과 결의문을 낭독하고 내빈 축사에 들어서는 스틸맨 군정장관이 조선독립운동을 위하여 축복하는 간결한 축사가 있었고 이기정 씨의 폐회사로 식은 순조롭게 끝난 다음 대회장 김영섭 씨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 ‘연합군 만세’를 삼창하고 경축가두행진에 올라 동서악대와 갖은 가악이며 트럭과 승용자동차의 교차, 남녀학생, 아동 그리고
허리굽은 노인도 끼어 ‘무궁화 삼천리’를 회상하는 감격스러운 장사의 행렬은 화정대로~ 시청 앞~ 경동 네거리~ 상인천역 앞~ 배다리를 돌아 제 2송림국민학교 앞에서 오후 4시경 아무 사고 없이 이날의 성전은 끝을 마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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