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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쿠기엔(六義園)
리쿠기엔(六義園)은 도쿄도 분쿄구(文京区) 혼코마고메(本駒込)에 있는 도립정원으로, 회유식 축산천수정원(回遊式築山泉水庭園) 방식의 다이묘정원(大名庭園)이며, 국가 특별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리쿠기엔(六義園)이 조성된 코마고메(駒込)는 당시는 벌판이었고, 1596-1624년 당시의 에도는 오쿠루와나이(御曲輪内) 지역, 즉 소토보리우치(外堀内)인데, 지금의 분쿄구(文京区)는 오쿠루와가이(御曲輪外)라 불렸다. 분쿄구시(文京区史)에 따르면, 게이쵸(慶長) 연간(1596-1615) 당시 분쿄구(文京区) 지역에 지어진 주요 부케야시키(武家屋敷)로는, 센다기 니쵸메(千駄木二丁目)의 오가사와라 히데마사(小笠原秀政, 1569-1615), 니시카타잇쵸메, 니쵸메(西片一丁目・二丁目)의 아베 마사츠구(阿部正次, 1569-1647), 혼코마고메잇쵸메, 니쵸메(本駒込一丁目・二丁目) 도이 도시카츠(土井利勝, 1573-1644) 정도가 눈에 띄인다. 리쿠기엔(六義園) 땅은 당시 무사시노(武蔵野)로 이어지는 넓은 벌탄으로, 숲이 울창하고 풍부한 수량의 조경에 유리한 곳이었다. 혼고우쿠시(本郷区史)에서는, 1628년, 쇼군가(将軍家)의 매사냥터로 에도 인근 52개 촌이 지정되어, 조우시가야(雑司ヶ谷), 혼고우(本郷), 고이시가와무라(小石川村) 정도가 기록되어 있다.
에도가 일본 정치의 중심지가 되면서, 주민 수가 늘어나 주거지가 부족해지면서, 점점 외곽까지 거리가 생겨났다. 또, 1657년 혼고(本郷)에서 시작한 후리소데카지(振袖火事), 메이레키 대화재(明暦の大火) 당시 사상자만 10만 7천명이었다고 전해진다. 1682년에 발생한 오시치카지(お七火事), 텐나노다이카(天和の大火) 대화재에 에도 거의 전역을 태웠다. 한편으로 거리가 계속 정비되어 부케야시키(武家屋敷)도 외곽에 속속 들어섰고, 신사나 사찰도 연이어 세워지고, 점차 상점도 많아지게 되었다.
5대 쇼군 츠나요시(綱吉, 1646-1709)의 가신 야나기사와(柳沢) 데와노카미(出羽守) 야스아키(保明, 1659-1714), 훗날의 야나기사와 요시야스(柳沢吉保)는 1695년 마츠다이라(松平) 카가노카미(加賀守)의 가미야시키(上屋敷)였던 소메이무라(染井村)의 약 45,862 평에 달하는 땅을 하사받았다. 겐로쿠(元禄) 문화가 무르익던 당시 요시야스(吉保)는 별장정원(別荘庭園)을 조성할 계획을 세웠다. 지금까지의 헤이안시대(平安時代)의 신덴즈쿠리(寝殿造)의 정원,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의 쇼인즈쿠리(書院造)의 정원, 또한 선종(禅宗)의 카레산스이(枯山水)의 정원과는 다른 에도시대의 회유식축산천수정웡(廻遊式築山泉水庭園)을 짓고자 하였다. 즉, 야스아키(保明)의 문예 취향에 맞춰, 혼고우다이(本郷台)의 넓고 평탄한 대지에 산을 쌓고, 연못을 파서 물길을 만들어 기슈(紀州)의 와카노우라(和歌の浦)의 경승을 모방했고, 또한 만요슈(万葉集)와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에서 골라 뽑은 88경을 곳곳에 묘사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렇게 해서 조성한 정원을 리쿠기엔(六義園)이라 이름지었는데, 무쿠사노소노(むくさのその)로 불렀으며, 집을 리쿠기칸(六義館)이라 하였고, 무쿠사노타치(むくさのたち)라고 불렀다. 육의(六義)는 시도(詩道)의 기본이 되는 여섯가지의 체(体)로, 후(賦)는 감상을 서술한 시, 히(比)는 예시하며 감상을 표현한 시, 코우(興)는 사물에 대한 감상을 읊은 시, 후우(風)는 민간에서 부르던 가요, 가(雅)는 조정(朝廷)에서 읊었던 기품이 높고 반듯한 사조(詞藻), 쇼우(頌)는 종교에서 공덕을 칭송하는 사조(詞藻)를 말한다.
六義園八十八境
야나기사와 야스아키(柳沢保明)가 88이란 숫자에 집착한 것은, 8은 팔운(八雲)과 통하고, 야쿠모노미치(八雲の道) 즉 와카노미치(和歌の道)를 의미하여 곧 미래영겁(未来永劫)을 뜻하기 때문이다.
1. 유키노몬(遊芸門), 2.야마미루이시(見山石), 3.시겐세키(詞源石), 4.코코로노이즈미(心泉), 5.코코로노하시(心橋), *6.타마모노이소(玉藻磯), 7.카세타다시키마츠(風雅松), 8.신슈노마츠(心種松), 9.코후우세우(古風松), 10.시린세우(詞林松), 11.나카쿠루마츠(掛名松), 12.유우히노오카(夕日岡), *13.데시호노미나토(出汐湊), *14.이모노야마(妹山), *15.세노야마(背山), 16.타마자사(玉笹), 17. 토키와(常磐), 18.카키와(堅磐), 19.세키레이세키(鶺鴒石), 20.고토바노하나이시(詞花石), 21.후하우세키(浮宝石), 22.구와레우세키(臥龍石), 23.스소노노무매(裾野梅), *24.키노카와(紀川), 25.에이카세키(詠和哥石), *26.카타오나미(片男波), 27.타즈노하시(仙禽橋), *28.아시베(蘆辺), *29.나모후루야마(名古山), 30.니이타마마츠(新玉松), 31.카네코토노미치(兼言道), *32.하코야노야마(藐姑射山), 33.코토토후마츠(言問松), *34.스기가테노미네(過勝峯), 35.후지나미노하시(藤浪橋), *36.츠키야도루와다(宿月湾), 37.토게츠케우(渡月橋), 38.와카노마츠바라(和歌松原), *39.오이가미네(老峯), 40.치토세노사카(千年坂), *41.오호로노오카(朧岡), *42.키노카와카미(紀川上), 43.아사히노이와(朝陽岩), 44.미즈와케이시(水分石), 45.마쿠라노호라(枕流洞), 46.타마히로후나기사(拾玉渚), *47.키지노토오야마(紀路遠山), 48.시라토리노세키(白鳥関), 49.시오리노미네(下折峯), 50.하나토후코미치(尋芳径), 51.긴카테이(吟華亭), 52.미네노하나조노(峯花園), *53.코로모데노오카(衣手岡), *54.쿠모카카루미네(掛雲峯), *55.시루베노오카(指南岡), 56.치도리노하시(千鳥橋), *57.시쿠레노오카(時雨岡), 58.란코세키(覧古石), 59.이모노마츠(妹松), 60.세노마츠(背松), 61.키후쿄우(亀浮橋), *62.카스미이리에(霞入江), *63.후키아게노하마(吹上浜), 64.후키아게노마츠(吹上松), 65.후키아게노오노(吹上小野), *66.후키아게노미네(吹上峯), *67.코가라시노미네(木枯峯), 68.카스마누사카(霞渟坂), 69.운코우바이(雲香梅), 70.오우하세키(桜波石), 71.로쿠카세키(浪華石), 72.카모메노하시(白鷗橋), 73.모시오기노미치(藻塩木道), *74.후지시로토우게(藤代峠), 75.후데스테마츠(擲筆松), 76.노우켄세키(能見石), 77.누노비치노마츠(布引松), *78.시라누시오지(不知汐路), 79.자젠세키(座禅石), 80.요로즈요노오카(万世岡), *81.스이코우노에(水香江), *82.하나카키야마(花垣山), 83.스스노시타미티(篠下道), 84.후요우노하시(芙蓉橋), 85.야마카게노하시(山陰橋), *86.젠케이노나가레(剡渓流), 87.사사가니노미치(蛛道), 88.후지노사토(藤里) (굵게 표시된 28경 포함)
리쿠기엔(六義園) 조성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막부로부터 대지를 하사받을 무렵으로 여겨지고 있다. 완성된 것은, 1702년으로, 야스아키(保明)는 7년 동안 조경에 힘써 에도에서 손꼽히는 일대정원을 만들었으며, 당시 에도는 겐로쿠타이헤이(元禄泰平)를 구가하고 있었지만, 크고 작은 사건이 연이어 있었다. 시민들의 낭비는 점차 심해지고, 화폐개혁이 있었으며, 1696년 에도를 중심으로 대지진이 일어나 야스아키(保明) 영지 카와고에(川越)에서는 2차례 큰 풍수해를 입었다. 야스아키(保明)는 공사다망한 중에도 조경에 게을리하지 않고, 도면을 펼쳐 조경에 필요한 재료, 정원석, 정원수 등을 기부받는 등, 연락닿는 모든 사람을 총 동원했다. 1701년, 야스아키(保明)는 츠나요시(綱吉, 1680-1709)로부터 마츠다이라(松平)라는 성과 츠나요시(綱吉) 중 '요시(吉)'를 하사받아, 마츠다이라 미노노카미 요시야스(松平美濃守吉保)로 개명했다. 보에이(宝永) 연간(1704-1711), 이에노부(家宣,1662-1712)가 쇼군이 되면서, 그간의 공적을 인정받아 3만9천석의 봉록이 더해져 15만 1,200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그리고, 1705년, 무사시(武蔵) 가와고에(川越) 성주이자 야나기사와미노노카미요시야스(柳沢美濃守吉保)이 되었다.
1709년 쇼군 츠나요시(綱吉)가 64세 나이로 죽고, 요시야스(吉保) 부부는 가독을 요시사토(吉里,1687-1745)에게 넘기고 본가에서 리쿠기엔(六義園)으로 옮겼다. 1712년, 요시야스(吉保)의 부인 사다코(定子)가 풍토병으로 리쿠기엔(六義園)에서 죽고, 요시야스(吉保)도 1714년 57세 나이에 리쿠기엔(六義園)에서 죽었다.
이후 리쿠기엔(六義園)의 주인이 된 요시사토(吉里)는 1724년 야마토노쿠니(大和国) 고오리야마번(郡山藩)으로 옮겨감으로써, 리쿠기엔(六義園)에 자주 들르지는 못하게 되었지만, 정원은 꾸준히 관리하였고, 3대째 노부토키(信鴻,1724-1792)대까지는 비교적 창건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1792년 노부토키(信鴻)가 죽고 나서, 정원을 들르는 일이 거의 없이 1809년까지 약 20년간 화폐해져 옛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4대 야스미츠(保光, 1753-1817)에 이르러서는, 1809년 가신에게 명하여 리쿠기엔(六義園)을 복구하도록 하여 1년에 걸쳐 공사를 지휘하였고, 명승의 비문주(碑文柱) 중 일부는 소실되어 88경(八十八境)을 다 복구하지는 못하여 53곳의 석주만 복구되었다.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 1837-1913)에 의해 타이세이호칸(大政奉還)이 이루어져, 260여년간 지속되었던 에도시대는 막을 내렸다. 리쿠기엔(六義園)의 7대째 주인 야스노부(保申,1846-1893)은 메이지(明治) 신정부에 협력하여 173년에 걸친 야나기사와 가문(柳沢家) 별저(別邸)도 막을 내렸다. 이 후, 1874년, 토사번(土佐藩) 로시(浪士)의 아들인 이와사키야타로(岩崎弥太郎, 1835-1885)가 리쿠기엔(六義園)을 매수하여 이와사키 가문(岩崎家)의 별저(別邸)로 삼아 1938년 도쿄시에 기증할 때까지 60년간 살았다. 이와사키 가문(岩崎家)은 1874년 상경하여 현재의 분쿄구(文京区) 유시마 욘쵸메(湯島四丁目)에 거처를 마련하여, 리쿠기엔(六義園)과는 지척에 살고 있었다. 야타로(弥太郎)가 리쿠기엔(六義園)을 매입한 경위에 관해서는, 이와사키 가문(岩崎家)의 전기인 '이와사키 히사야 전(岩崎久弥伝)'에서, 야타로(弥太郎)는 '나는 이타바시(板橋) 근처까지 사들여서 국가에 도움되는 일을 해보겠다'고 말하며, 광대한 대지를 손에 넣었다.
당시 리쿠기엔(六義園)은, 계속해서 황폐해졌던 상태였고, 야타로(弥太郎)는 1878년에는 키요스미정원(清澄庭園)을 매입하고, 인접한 토도 가문(藤堂家), 안도 가문(安藤家), 마에다 가문(前田家) 등 저택을 합쳐 12만평에 달하는 넓은 땅을 손에 넣었다. 야타로(弥太郎)가 죽고나서, 야노스케(弥之助)가 1886년 리쿠기엔(六義園) 복구공사를 시작해서 시모우사(下総) 숲에서 나무를 옮겨 심고, 각지에서 정원석을 모아, 센카와죠스이(千川上水)로부터 연못으로 물을 끌어와 연비로소 예전의 모습을 회복했다.
이후 장남 히사야(久弥, 1865-1955) 대에 이르러, 잠시 주거하기도 했지만, 정원만 남기고 매각되었다. 이와사키 가문(岩崎家)의 별저로 종종 이용되었지만, 특기할 만한 일은, 1905년 러일전쟁후 개선한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이로(東郷平八郎, 1848-1934) 외 장병 6,000 명을 이와사키 가문(岩崎家)에서 초대하여 리쿠기엔(六義園)을 연회장으로 하여 전승축하연을 개최한 것이다.
1938년 이와사키 히사야(岩崎久弥)는 도쿄시의 녹지공원 확충 노력에 공감하여 리쿠기엔(六義園)을 영구보존하고, 일반 공개하는 조건으로 시에 기증했다. 1940년에는 명승으로 지정되었으며, 1945년 2차대전 중 후키아게노차야(吹上の茶屋), 츠츠지노차야(つつじの茶屋) 빼고는 거의 다 소실되었으나, 다행히 정원수는 거의 온전했다. 1953년에는 에도 소재 정원 중에서도 특히 빼어난 경관으로 인해 특별명승으로 지정되었고, 1956년에는 후키아게노차야(吹上の茶屋)가 화재로 소실되었다.
元禄末年頃、狩野派が描いたと伝わる古図「柳沢候六義園全図[2]」と現在の庭園の状況を細部を除いて比較すると、最も著しい違いは池が東と西の二カ所存在したが、現在は東の一カ所だけである[6]。この事から、現在の六義園は創設時代の庭園規模の約三分の一が縮小されているが、現在の主要部分は保存されている[6]。
主な見所
六義園の見どころは、庭園入口近くにある3月末に満開を迎える大きなしだれ桜、春から夏頃にかけ園内は華が咲き誇り色彩豊かな景色を楽しめる。この枝垂桜の満開期と紅葉の最盛期にはライトアップがされる。秋は紅葉、春は桜と、四季折々の変化を楽しめ、冬場は雪に備えた雪吊りと変化を楽しめる。躑躅の花が有名で、地元では「駒込と言えばツツジの花の咲く街」と謳われる象徴的な存在となっている。庭園に歩を進めると出汐湊に出る、広い園内の中で最も展望に恵まれた場所の一つである。大きな池の対岸には造形された島々が広がり、都心とは思えない風情ある景色を楽しむことが出来る。
「つつじ茶屋」(つつじちゃや) - つつじの古材で明治時代に建てられた希少な建物[1]
「滝見茶屋」(たきみちゃや) - 石組には滝が落ち、渓流が走る景観が眺められる[1]
「石柱」(せきちゅう) - 園内には古くは88カ所あったが、現在は33カ所の石柱がある[1]
「蓬莱島」(ほうらいじま) - アーチ形の洞窟石の島で、神仙思想を主題とした石組み[1]
「藤代峠」(ふじしろとうげ) - 築山の高さは35メートルで、「富士見山」と呼ばれている[1]
「蛛道」(ささがにのみち) - 小道が蜘蛛の糸のように細いことから名付けられた[1]
「渡月橋」(とげつきょう) - 和歌から名付けられ、2枚の大石で造られている[1]
「妹山・背山」(いものやま・せのやま) - 園内の中央にある「中の島」の築山である[1]
「出汐湊」(でしおのみなと) - 園内の中央にある「大泉水」の池畔の一つである[1]
「内庭大門」(ないていだいもん) - 正門から園内に入る門で、しだれ桜が美し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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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義園」(りくぎえん)は東京を代表する大名庭園の一つで、国指定名勝・特別名勝。
江戸幕府第5代将軍・徳川綱吉の側用人であり川越城主だった柳沢吉保が、綱吉から拝領された土地に江戸下屋敷とともに7年の歳月をかけて作られた池泉回遊式庭園。そののち明治時代には三菱財閥創業者・岩崎弥太郎が所有していたことも。
イベントごとに何度も訪れている六義園ですが、2016年11月東京で季節外れの雪が積もった際にも訪れました!東京では珍しかった、紅葉と雪の日本庭園の景色――藤代峠からの眺めが特に美しかった…!
また例年春には枝垂れ桜のライトアップ、秋にも紅葉ライトアップのイベントが行われま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