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보감(人天寶鑑)
도법사(道法都)는 서경(西京) 순창(順昌) 사람이다.
선화(宣和 :1119∼1125) 연간에 조서를 내려 법명을 덕사(德士)로 바꾸게 한 일이 있었다. 법사는 임영소(林靈素 :道士)와 옳고 그름을 항변하고 조정에 상소하였는데, 황제의 뜻을 거슬려 도주(道州)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때 호송하는 관졸〔監防〕이 말하기를 “여기서 만리 길이나 되니 마늘 등 냄새나는 음식이나 술 등으로 몸에 힘을 돋구어야 합니다”라고 하자, 법사가 “죽는 것은 천명인데 불법에 금한 일을 범할 수는 없다”라고 하니 관졸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복종하였다.
법사가 유배지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 군수가 밤에 불상이 형틀을 지고 성에 들어 오는 꿈을 꾸었고, 군의 관리들도 같은 꿈을 꾼 사람이 있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법사가 도착하니 태수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죄를 짓고 오는 사람은 반드시 남다른 인물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곳에 유배된 지 한달이 안되었는데 그 군 사람의 반 이상이 병에 걸렸다. 법사가 못을 파서 물에 축원을 드리니 그 물을 마신 사람은 병이 나았다. 그리하여 그 지방 사람들 모두가 어버이나 스승 이상으로 법사를 공경하고 섬겼다.
이에 그곳에서 추방당하여 그 길로 떠나 장사(長沙) 땅을 지나다가 적음존자(寂音尊者·慧洪覺範:1071∼1128)를 만났는데 그가 시를 남겨 주었다.
도법사의 간담은 몸집보다 더 커서
감히 황제의 뜻을 거슬리고 간언을 올렸도다
어깨에는 가사를 걸치고 등에는 불법을 지고자 하여
때문에 달갑게 목을 내밀어 형틀을 받겠다 하였네
3년 유배에도 마음에 부끄러움 없었고
만리 길 돌아와도 모습 여위지 않았도다
훗날 불교문중에 벼리〔綱紀〕가 될 분인데
요즘 듣자니 벼슬아치들 조정으로 달려간다 하네.
道公膽大過身軀 敢逆龍鱗上諫言
只欲袒肩擔佛事 故甘引頸受誅鋤
三年竄逐心無愧 萬里歸來貌不枯
他日敎門網紀者 近聞靴笏 朝趨
당시 공경대부들은 법사에게 문무(文武)의 재략(才略)이 있으니 조정에 청하여 벼슬을 주어 관직에 충당하고, 군사 통솔권을 나누어 주어 옛 강토를 되찾게 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법사가 극구 사양하자 조정의 명신들이 법사의 지조를 뺏을 수 없음을 알고 황제께 아뢰어 ‘보각원통법제대사(寶覺圖通法濟大師)’라는 호를 하사하도록 하였다.
소흥(紹興 :송 고종 즉위년, 1131)으로 연호가 바뀌자 황제의 명으로 궁에 들어 가니 황제가 말하였다.
“선황제(先皇帝 :徽宗)께서 요망한 술수에 속아 그대의 얼굴과 법복을 망가뜨렸으니 짐이 그대 얼굴의 먹자욱을 없애주어도 되겠소?”
그러자 법사가 대답하였다.
“신이 비록 성은에 감복하오나 선황제께서 내리신 보배 먹자욱을 지워 없앨 수는 없습니다.”
황제는 “이 스님이 늙어서까지 꼬장꼬장하구나!”하면서 편할대로 하라고 허락하였다.
소흥 3년(紹興 : 1133)에 법사는 도사(道士) 유약겸(劉若謙)과 함께 조정에 들어가 기도도량의 서열을 정비하였는데 그때 올린 상소〔箚奏〕는 대략 다음과 같다.
“숭녕(崇寧:1102∼1106) 연간에 임영소(林靈素) 등이 높은 벼슬을 멋대로 차지하여 조정의 기강을 문란케 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도교가 불교의 서열을 누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건염(建炎:1127∼1130)이 연간 후로 도사들의 모든 재산은 이미 다시 몰수되고 관의 비호를 없어졌으니 마땅히 조종의 옛 제도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조정에서 현명한 지휘를 내려주셨으면 합니다. 특히 개정령을 내려 천하에 반포하고 시행케 하여 풍속을 바로 잡아주시기 바랍니다.”
당시 국정에 일이 많아 이 주장은 유보되었으나 소흥 13년(1143)에 와서 다시 정돈하는 모임을 열어 승려들은 왼쪽에, 도시들은 오른쪽에 자리할 것을 영원한 규정으로 삼았다.
그후 가뭄 귀신으로 백성들이 시달리자 황제의 누가 명을 받아 궁으로 들어가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법사는 자리에 올라가자 금으로 된 물병 네 개를 빌려서 병마다 산 붕어를 넣고 물을 뿜어주며 가만히 축원하였다. 그리고는 곧 발빠른 사람 넷을 시켜 물고기를 강과 소(沼)에 놓아주게 하였는데, 그들이 돌아오기도 전에 비가 쫙 퍼부으니 황제의 얼굴이 매우 기쁜 기색이었다.
회암 미광(晦菴彌光: ?∼1155) 선사는 민현( 縣) 장락(長樂) 사람이다. 영남으로 나와서 원오 극근(圖悟克動:1063∼1135, 임제종 양기파) 불심 본재(佛心本才 : 임제종 황룡파) 등 큰스님을을 찾아법다가 마침 대혜 종고(大慧宗 :1089∼1163, 임제종 양기파) 선사가 광인사(廣因寺)에 살고 있다 하여 찾아가 그 밑에서 공부하였다.
미광선사가 하루는 대혜선사를 모시고 가다가 물었다. “저는 이곳에 와서도 철저하게 깨닫지 못했으니 그 병통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대혜스님이 대답하였다.
“그대의 병은 가장 모진 병이다. 세상에서 이름난 의원도 속수무책이니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다른 사람은 죽어서 살아나지 못하는데, 그대는 살아 있기만 하지 아직 죽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크나큰 안락의 땅에 도달하려면 한번은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미광선사가 더욱 의심이 생겨 방장실에 들어가니 대혜선사가 물었다.
“죽은 먹었는가? 발우는 씻었는가? 약을 먹느라 가리는 음식(藥忌)일랑 집어 치우고 한마디 던져 보아라.”
미광선사가 “찢어버렸습니다”하자, 대혜선사가 엄한 기세로 악! 하고 할(喝)을 하고는 “그대는 와서 또 선을 이야기할 참이냐!”하니, 미광선사는 여기서 크게 깨달았다.
대혜선사는 북을 쳐서 대중을 모아놓고 알렸다.
토끼털을 뽑았다고 해해거리다가
일격에 만겹 관문의 쇠사슬이 열렸도다
평생에 통쾌한 경사는 오늘같은 날이데
누가 말하나 천리 밖에서 나를 속여 먹었다고.
兎毛拈得笑 一擊萬重關鎖開
慶快平生在今日 孰云千里 吾來
그러자 미광선사는 송을 지어 바쳤다.
한번 부딪쳐 기연을 만나니 성난 우레같은데
놀라 일어나 수미산을 북두성에 감추었구나
넘실대는 큰 파도는 하늘에 닿는데
콕구멍〔鼻孔: 본리면모〕을 뽑아드니 입(언어문자)을 잃어버렸네.
一 當機怒雷吼 驚起須彌藏北斗
洪波浩渺浪滔天 拈得鼻孔失却口
바야(波若)스님은 고려(高麗:고구려) 사람이다. 개황(開皇 :581∼601) 연간에,
아와 지자(智者)선사에 선법을 구하였는데, 얼마 안되서 깨달은 바가 있어 지자선사가 말하였다.
“그대는 이곳에 인연이 있다. 그러니 꼭 조용한 곳에 한거해서 오묘한 행을(天台山)의 화정봉(華頂峯)은 지금 이 절에서 6,7 리 떨어져 있는데, 그곳은 지난날 내가 고행〔頭陀行〕을 하던 곳이다. 그대가 그곳으로 가서 도를 닦아 수행이 진보되면 반드시 싶은 이익이 있을 것이다. 먹을 걱정, 입을 걱정은 하지 말아라!”
바야스님은 가르침을 따라 그곳으로 가서 새벽에서 밤까지 수행하였다. 한번도 누워서 자는 일이 없었고 그림자가 산을 나오지 않은지 16년이나 되었는데, 하루는 홀연히 산을 내려와서 여러 도반에게 알렸다.
“나 바야는 명이 다한 것을 알고 있기에 다만 산을 나와 대중들과 이별할 뿐이다.”
그리고는 곧 화정봉으로 돌아가서 죽었다.
정언(正言) 진료옹(陳了翁 :陳瓘)은 남검주(南劍州) 사람으로 젊은 나이에 급제하였다. 성품이 조용하고 단아하여 세상사람들과 다투는 일이 없었으며, 남의 단점을 보면 한번도 면전에서 꺾어버리지 않고 약간의 뜻만 보여서 일깨워줄 뿐이었다.
공은 처음에는 잡화엄(雜華嚴 :화엄경의 다른 명칭)을 받들어 자못 조예가 있었다. 그러다가 명지(明智)법사를 만나 천태종(天台宗)의 종지를 물으니, 명지법사는 지관(止觀)법문 중에서 상근기가 닦는 부사의경〔上根不思議境〕을 가르쳐 주었는데, 본성으로 수행을 부정하여 작위 없는 행을 이룬다는 것이었다. 공은 여기서 홀연히 깨달았다. 만년에는 유배당하여 섬에 살았는데 그때도 전혀 불만이 없었고 오직 서방정토에 돌아가기를 염하였다. 공은 또 「연경정토원기(延慶淨土院記)」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여래께서 9품을 정하셨을 때에도 지성으로 하는자를 상상품으로 삼으셨고, 지자(智者)대사가 「10론(十論)」을 지을 때도 빈틈없이 얽힌 의심을 깨라 하셨다. 얽힌 것이 풀리면 정식(情識)이 흩어져 지(智)가 나타난다. 그렇게 되면 미타정토의 경계를 다른데서 구할 것이 없으니 마치 맑은 거울을 보면 자기 모습을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또 이렇게도 말하였다.
“마치 맑고 깨끗한 둥근 달이 그림자를 모든 물속에 드리우되 그 바탕은 둘이 아니고 물결대로 흩어지는 것을 거두어 한곳으로 돌아오게 하듯 시방세계를 한곳으로 모은다. 또한 거울 열 개를 빙둘러 쳐놓고 가운데 등불 하나를 켜둔 것과 같아서 등의 모습이 거울 속에서 교차되어 동서를 가릴 수가 없으나 반드시 제자리는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쪽은 원래 서쪽이 아니고 각각 비춰지는 영상에 따라 자리가 뒤섞이니 보이는 경계를 뉘라서 집착할 수 있겠는가.
번뇌 속에 살며 한쪽 방향에만 집착하는 견해로 어찌 여래의 걸림없는 경계를 헤아릴 수 있겠는가.”
혜인(慧因)법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옹(了翁)의 정토에 관한 말은 불조의 오묘한 종지를 깊히 씹어 본 말이라고 할 만하다.”
석벽사(石壁寺)는 항주(抗州) 월주(越州)에서 20리 거리에 있다. 용산(龍山)을 따라 서쪽으로 달려가 그윽한 골짜기로 들어가면 아름다운 계곡과 바위가 펼쳐진다. 비록 그곳은 기상이 맑은 곳이나 처음에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가 행소(行紹)대사와 행정(行靖)법사가 그곳에 살면서부터 비로소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으니, 역시 땅은 사람 때문에 유명해 지는 것이다.
행정과 행소스님은 모두 전당(錢塘) 사람이며, 함께 영명 연수(永明延壽)선사에게 귀의해서 출가하여 율부(律部)를 공부하여 통달하였다. 당시 천태덕소(天台德韶)국사의 도가 크게 떨칠 때라 행정스님과 행소스님은 그곳을 찾아가 배우게 되었다. 덕소국사가 보고는 그릇이 되겠다고 하여 곧 나계 의적(螺溪義寂)법사를 찾아가 3관법(三觀法)을 배우게 하였다. 이에 두 사람이 함께 찾아가 의적법사를 모시고 3관의 대의(大義)를 익혔는데 얼마 안되어 공부가 성취되었다.
행정스님과 행소스님은 다시 석벽사(石壁寺)로 돌아와 대중을 모아 강론하며 지냈다. 전후로 모두 50년을 산림의 지조를 지켜 한번도 고향집이나 마을에 다녀본 적이 없고, 처신을 깨끗히 하여 오(吳) 땅의 학승이나 큰스님들이 모두 그들을 고결한 분이라 추대하였다.
명교 설숭(明敎契嵩)스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연수(延壽)선사에게 출가하고 의적(義寂)법사에게 법을 배웠으며 덕소(德韶)국사가 알아주었으니, 위 세 분은 모두 그 절개와 수행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여 세상에서 흔히 만나볼 수 있는 분들이 아니다. 그런데 두 분 법사는 이 분들을 모두 만나 직접 가르침을 받았으니 가령 한 번 만나보기만 해도 매우 좋은 일인데, 하물며 이 분들에게 법을 얻기까지 했으니 두 법사는 복이 많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