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의 구체화, 교시성의 변주
- 『공단문예』 2013년 제11집을 읽고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수필은 어디까지나 인간적 온기의 총체여야 한다. 정말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생각해야 할 문제, 가슴 깊이 담아두어야 할 가치 있는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수필이 궁극적으로 표현하는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그가 속한 환경과 이에 대처하는 인간의 보편적 성향이기 때문이다. 수필은 총체적이고 추상적인 현실을 보다 심미적 가치를 지닌 삶의 실상으로 구현하는 작업이다. 가슴이 서늘하거나 후끈한 인간미가 배어 나오지 않은 글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비록 개인사적인 문제를 가지고 글이 출발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인간의 보편성을 발견하고 새로운 가치 발견의 문을 열어야 할 것이다. 언제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수필이 문학 장르로서 확고한 자리를 굳히기 위해서는 기쁨을 주는 높은 차원의 교시성을 가져야 한다. '공단문예 제11집은 과연 이런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지 작품을 통해 확인해 보기로 하겠다.
II.
고은희의 <정구지>는 식물성적인 향기로움이 전해져오는 자연친화 수필이다. 작가는 자연 속으로 직접 들어가서 무정물과 대화하면서 인생을 반추하기를 즐긴다. 수필이 문학일 수 있는 근접성은 바로 성찰에 있다. 작가는 어머니가 주는 정구지를 청록의 들판으로 의미화할 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고향의 혼이 깃든 냄새로 인식한다. 어머니의 체취이기도 한 정구지를 통해 작가는 자연의 섭리를 배우고 자연과 교감을 나누면서 식물성적인 삶의 태도를, 그리고 향토적인 서정과 모성원리의 소중함을 수필 속에 잘 드러내고 있다.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자신을 정구지를 통해 성찰하는 모습도 아름답다. 때 묻지 않은 삶, 그 무엇을 힘껏 치닫는 어머니의 텃밭으로 달려갈 꿈을 꾸는 작가의 건강한 모습이 아침 햇살처럼 그려진다. 그녀가 걸어가는 산책길은 싱그러운 청록이 물결치는 삶의 축제가 펼쳐지는 추억의 공간이고 어머니가 있는 인정의 곳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열망 중의 하나는 자연을 삶의 주변으로 끌어들여 동행을 이루는 일이다. 이 수필은 어머니의 사랑이 곧 자연이라는 주제의식이 잘 형상되어 있다고 하겠다.
김순희의 <수박화채>는 쉬는 날 고향집에 가서 어머니와 수박을 먹으면서 유년 시절을 추억하는 내용이다. 어릴 때 철이 없어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조금만 부족해도 어머니가 자신을 차별한다고 여겼던 작가는 어른이 된 지금, 그런 자기 행동을 반성하면서 어머니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며, 어머니야말로 존재의 근원이라는 사실이다. <천년의 아름다움! 수덕사의 여름>은 남편의 배려로 친구와 수덕사를 구경하고 난 후 느낀 점을 적은 기행문이다. 이 작품의 감상 포인트는 ‘온고이지신’이란 주제의식을 엿보는 데 있다. 김순희 수필세계의 한 축에는 자기 성찰의 축제가 항상 열리고 있다. 우정의 소중함으로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작가의 빈 마음가짐이 우리에게도 평화로운 안식을 안겨주기에, 이 수필은 문학적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김진희의 <나를 찾아서>도 일독을 권할 만한 좋은 수필이다. 이 수필에는 삶의 지혜가 담겨 있다. 작가는 통도사 말사인 법륜사와 운문사를 돌면서 기도를 통해 참 나를 찾으려는 구도자적 자세를 견지한다. 그녀의 글에서 유난히 촉촉한 정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주체자의 의지만에 의해서 주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삶은 우리들의 기대와 희망과는 무관하게 전개될 수 있고, 그것으로 인해 고통은 시작된다. 자연 앞에 서서 내면의 먼지를 털고 ‘일체유심조’의 철학을 깨우치는 성자적 모습도, 저녘 찬거리를 손질하면서 참 나를 찾아가는 소박한 모습도 모두 애잔한 감동을 준다. <우리 집 보물>은 영문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아부다비에서 일하고 있는 작가의 딸이 두바이 여행을 시켜준 것을 계기로, 작가는 자신을 일깨워주고 있는 딸을 보물 제1호로 생각한다. 이 글은 살면서 아들보다 딸 때문에 더 행복했다는 고백을 담고 있다.
박혜경의 <냉장고>는 늘 작가의 집으로 와서 수시로 냉장고를 채워주는 친정 어머니의 헌신을 칭송하는 글이다. 한 사람이 고생하면 여러 사람이 편해진다는 어머니의 철학이 있어 모든 식구가 행복하다는 전통적 가치관이 수필을 통해 구체화됨으로써 이 글은 이타적 행동에 대한 가치, 즉 헌신의 소중함을 주제의식으로 내세우고 있다.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말하는 그녀의 글 마당에 서면, 문체에서도 힘이 느껴진다. 희생을 통한 공존의 역학 관계가 공감을 자아내고 있기 때문에 감동을 준다. 어머니가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도 내어 놓겠다는 작가의 견고한 의지는 전통적인 가치관의 수용이다. 요즘 시대는 내가 우선되는 게 상식이고,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녀는 한사코 한국적 정황과 현실 속에서 인간의 도리와 규범을 설정하려 한다. 공존의 전제는 한 발 물러설 수 있는 양보 정신이요, 비움의 철학이다. <코스모스 목걸이>는 어려운 가정 형편에 칠남매를 학교에 보내고, 무척 힘들어 하셨을 어머니를 위해 형제들이 코스모스로 목걸이를 해드렸다는 이야기를 통해 자식의 참된 자세가 무엇인지 말해주어 감동을 준다.
배재록의 <다시 맞는 방어진의 가을>의 발단부는 ‘가을은 노을녘이요, 새침하게 토라진 소녀의 모습이다. 천년색을 뚝뚝 우려내는 단풍이 산을 염색하기 시작한다,’라는 서정적인 분위기로 시작한다. 자연의 풍경과 변화 속에서 우리 삶의 지혜를 발견하려는 노력은 대단히 의의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레제트는 "무엇을 보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직관과 사색으로 그 본 것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했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수필적 소재가 바로 산이요, 바다 풍경이 아니겠는가. 방어진은 그 중에서도 바로 삶의 끈을 이어가려는 삶터인 것이다. 배재록은 가을의 당당한 모습을 자신의 기억 속에 풍경화로 남기며 노점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아낙을 뒤로 하고 사라진다. 아무 것도 아닌 것도 관심을 가지고 보면, 가치 있는 무엇이 보이고, 그것에서 독특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을 이 수필은 잘 보여주고 있다.
백계순의 <꽃차에 대한 예의>는 꽃차를 만들면서부터 알게 된 꽃과 나무의 특질에 눈떠가면서 자신의 무모함을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글이다. 수필은 무엇을 보고 느낌을 적는 글이 아니라 발견의 기쁨을 적는 글이다. 문명의 폭이 화장되면서 우리 주변에 있던 많은 것들이 그 모습을 감추고 있다. 인간이 닮을 수 없는 꽃차의 빛깔에 감동하여 무릎을 꿇고, 손을 모으는 경지에 도달한 작가의 모습이 성스럽다. 우주를 품고 있는 한 송이 꽃의 그 존재적 가치와 의미에 대한 작가의 한없는 애정이 이 작품에 녹아 있어 감동적이다.
이영희의 <나를 새기다>는 제목만 봐도 성찰을 담은 수필임을 직감할 수 있다. 문학은 단순한 자기애의 표현 수단이 아니다. 수필이 갖추어야 할 요건 중의 하나가 성찰이다. 성찰은 공감의 힘이다. 여기서 말하는 힘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문학 속에 내재하는 강력한 에너지다. 인간의 근원적인 가치와 본질을 규명하려는 자세에 깃들어 있는 설득적 정서, 바로 문학의 힘이다. 이 수필은 시어머니에게서 받은 삼층장에서 꺼낸 목도장과 여행길에서 벼락 맞은 대추나무에 판 도장에 대한 기대가 온고이지신의 정신으로 승화된 작품이다. 행운을 바라는 생활인의 관점에서 도장을 메타포로 활용한 것은 성공적인 발상이었다. 결말의 여운이 문학성을 더해 주었다.
최옥연의 <절차탁마>는 문학적 형상과 현실적 인식이 잘 조화된 수필이다. 이미 제목에서 주제의식이 잘 암시되고 있다. 제목을 보면 수필의 값어치를 재단할 수 있다. 이는 제목이 내용의 단적인 표현으로써 주제의식을 함축하고 상징해야 한다는 숙명적 존재라는 의미다. ‘절차탁마’는 최옥연의 문학관을 엿볼 수 있는 수필이다. ‘글로 행복할 수 있다면, 절차탁마하는 마음으로 심중의 언어를 길어 올리리라’는 결구가 말해주듯, 그녀는 진정한 문학가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느끼게 하며, 이 대목이 뭉클한 감동을 준다. 독자에 대해 두려움을 갖거나 문학에 대한 경외감은 훌륭한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필수다. 글을 통해 일상의 작은 행복을 느끼고자 하는 치열한 작가적인 삶이야말로 소중한 우리 수필가의 모습이라 하겠다.
III.
수필은 인간을 위하여 그리고 인생을 보다 낫게 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울산공단문학회 소속 작가가 보다 충실한 삶의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본문에서 다룬 수필들은 삶의 지향점을 향해 묵묵하게 걸어가는 생활인의 자세와 인생의 정점에서 지나간 세월을 성찰의 자세로 돌아보는 마음의 여유가 존재와 삶에 대한 자각과 어우러져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이들의 작품은 자연과 우리 사회 현실에 대한 진지한 모색을 드러낸 글이다. 결핍의 삶에 필연적으로 따르기 마련인 모정의 힘을 이 수필들이 잘 반영하고 있다. 자신의 삶에서 부딪치고 체득되어지는 여러 가지 환경적, 역사적, 시대적 상황들을 외면하지 못해서 작가들은 이를 자신의 작품 속에 투입시켜 주제의식으로 구체화하였다.
이들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은 결혼 이후에 오는 고독한 영혼의 갈증을 수필로 극복하고자 하는 소박한 작가의식이다. 추억을 되돌리며 행복을 느끼는가 하면, 친정집에 가서 어머니와 음식을 나눠 먹으며 삶의 희열을 구가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철없이 오해했던 과거사에 대한 반성도 하고,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기도 한다. 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것이라 하겠다. 이들의 수필들은 정의 미학을 구축하고 있는가 하면, 생활 체험적 이야기로, 건강한 삶을 주제의식으로 형상화하기도 한다. 열한 편의 글에 ‘어머니’ 비슷한 단어가 팔십여 번 발견되었다. ‘어머니’가 여성 작가들의 삶에 살아 숨 쉬고 있어, 글 또한 독자들에게 깊은 반향을 불러일으킨다고 하겠다. 좋은 글로 더욱 더 공단수필의 숲을 푸르게 가꿔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