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에서
백시종 | 문예바다 | 2021. 11. 25.
400페이지 | 신국판 | 값 12,000원
ISBN 979-11-6115-153-3
책 소개
2020년 동리문학상과 2021년 세종문화상 예술부문(대통령 표창)을 수상한 백시종 작가의 서른네 번째 장편소설이 출간됐다. 백시종 작가는 김동리의 인간 구원과 김유정의 해학, 채만식의 서사성을 겸비한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황무지에서』는 백시종 작가가 그만의 독특한 관점으로 우리 역사를 형상화한 장편소설이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치른 이 반도의 민둥산에 생애를 바쳐 산림녹화사업을 하는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이 엮어내는 시대의 아픔과 애환, 사랑 이야기가 숨 가쁘게 전개된다. 때로는 돌바람 동반한 폭풍같이, 때로는 아슴푸레한 판타지로, 때로는 가슴이 메는 안쓰러움과 연민의 정이 전 권에 걸쳐 펼쳐진다. 잘못된 역사는 바로잡아야 하며, 그 바탕 위에서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작가의 나직하고도 굵은 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역사가 지구의 자전처럼 주기적으로 반복된다는 주장은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역사에서 얻은 교훈을 무시하거나 묵살하는 것은 더 옳지 않은 처사다. 우리는 왜 역사를 배우는가. 우리는 왜 역사를 제대로 해석해야 하고, 분석해야 하고, 이해해야 되는가.
내가 이번 『황무지에서』를 집필하면서 깊이 묵상하고 고민했던 것도 바로 그 점 때문이다. 돌이켜보건대 우리는 역사의 잘못을 얼마나 반성했으며, 그것을 청산하는 데 얼마나 열과 성을 다했는지, 혹여 흐지부지 소홀히 하지는 않았는지, 되레 사사로운 권력욕으로 진실을 찬탈하지는 않았는지, 가슴에 손을 얹어야 할 시점이 바로 지금이라고 판단한 탓이다. (…)
나는 여기에 한 가지 아주 중요한 메뉴를 더 추가했다. 일부에서는 결코 들추고 싶지 않은 얘기라고 의도적으로 기피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지만, 나는 과감하게 그것을 치켜들었다. 바로 숲 얘기다. 역사적으로 잔혹하고 처참한 전쟁을 치르고 세계에 유례없는 황폐한 황무지로 변한 양평땅, 아니 한반도 남쪽 지역 전체가 어떻게 그처럼 빠른 시일에 참으로 건강한 자연 숲을 이룰 수 있었는가, 전설 같은 성공담이 그것이다.
나는 지난 2020년 5월부터 2021년 4월까지 만 1년간 『황무지에서』에 매달렸던 매일매일이 들뜸의 연속이었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집필 그 자체가 마치 좋아하는 리듬에 몸을 맡긴 것처럼 나의 어깨를 들썩이게 했기 때문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목정스님이 녹색 비단 같은 이끼를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게 없어지면, 세상이 위태해지느니라.”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끼가 없어지면 세상이 위태해지다뇨?”
“이게 바로 나무들의 오늘을 있게 한 어머니니까.”
“설마! 이끼가 나무들의 어머니라구요?”
어이없어하며 수익이 반문하자,
“당연하지. 애초에 이끼가 없었으면 나무가 살지 못했을 테니까.”
“오히려 나무를 못살게 하는 훼방꾼 아닌가요? 오래된 껍질에 이끼가 앉으면 나무가 죽잖아요?”
“모르는 소리! 생명이 살 수 없는 척박한 땅이라도, 아니, 수백 년 생명의 흔적이 없는 버려진 땅이라도 어느 날 이끼가 파랗게 끼기 시작하면 아 대지가 이제 숨 쉬기 시작하는구나, 하고 나무가 비로소 뿌리를 내리는 법이거든.”
목정스님이 조수익을 건너다보며 물었다.
“왜 그런 줄 아느냐?”
“모르겠는데요.”
“그것은 이끼가 자라면서 만들어 놓곤 하는 부식토 때문이란다. 부식토가 모든 식물의 기본양식이거든. 이끼는 땅속에 숨어 있는 온갖 독성을 제거하며 자기 보호를 위해 독으로, 무서운 가시로 상대방을 위협하지 않고 오로지 다른 식물이 생존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는 데 최선을 다할 뿐이란다.”
― 본문 중에서(pp. 52-54)
조수익은 스승인 현신규를 도와 “리기테다소나무”라는 “나무 종자를 기어코 개발해 낸”다. 이 “우량 교잡종 나무”는 우리의 민둥산에 심겨져 황무지 같은 그곳을 푸른 녹지로 만들어 버린다. 황무지가 푸른 녹음이 우거진 산으로 바뀐다는 것은 일종의 메타포로 볼 수 있다. 벌거벗은 민둥산은 우리의 치부를 드러낸 것이고, 그것을 푸른 녹지로 바꾼다는 것은 그 치부를 가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치부가 드러난 민둥산이 표상하는 것은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일 수 있다. 소설 속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병자호란과 미군에 의한 통치가 될 것이다. 하나의 국가가 국가로서 기능하지 못함으로써 힘없는 국민들이 억울하게 희생당하는(홍덕금과 안옥녀) 역사는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문제는 그 치부를 치부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그것을 은폐하려고 하는 데에 있다. 가령 병자호란이나 미군정 시에 홍덕금이나 안옥녀와 같은 힘없는 약자를 지켜 주지 못하는 것은 분명 국가의 치부를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치부를 치부로 인식하지 못했거나 그것을 알고도 은폐하려고 했던 것이다. 오랑캐에게 겁탈을 당하고 돌아온 며느리 홍덕금을 내치는 소설 속 김 대감이나 자신을 감옥에서 빼내기 위해 미군에게 몸을 허락한 아내 옥녀를 부정하다는 이유로 멀리하는 조수익의 모습은 자신들의 무능을 은폐하기 위한 비겁한 행위로 볼 수 있다. 조수익은 옥녀가 엄나무에 목을 매 자살한 후에 뒤 늦게 자신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반성한다. 그가 딸 명희에게 “집 뒤뜰”에 있는 “엄나무”의 “새순”을 “채취해서 어머니 제상에 따로 놔 주었으면” 하고 간곡하게 부탁하는 장면은 자신의 무능하고 비겁한 행위에 대한 반성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조수익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자각하고 반성할 줄 아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우리의 민둥산을 보면서 그것을 자신의 치부로 인식했으리라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민둥산에서 부끄러움을 보았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치유하려고 한 것이다. 그에게 민둥산은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하나의 타자인 것이다. 그는 이 타자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직접 대면한 것이다. 이 사실은 그가 누구보다도 타자의 상처를 잘 이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기반하여 그를 누구보다도 잘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에게 아내 옥녀 역시 이런 타자로 존재하며, 그녀가 미군과의 사이에서 난 혼혈아인 ‘민우’ 역시 이런 타자로 존재하기에 이른다. 그가 애써 외면해 버린 민우라는 존재를 인정하고 그를 자신의 아들(조민우)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자신을 타자의 시간 내에 두면서 그의(타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감싸 안으려는 타자성의 발로로 볼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조수익이 지니고 있는 사랑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황무지의 불모성에 생명의 싹을 틔우는 힘은 이러한 사랑이 전제될 때 가능하다. 그가 “조선조부터 수백 년에 걸쳐 총 50여 차례 대대적인 식목을 시도했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불모지 중 불모지”인 “영일만 해안 야산들”에 “바위에 부딪치는 사고를 당하”면서까지 나무를 심으려고 하는 그 열정과 의지는 모두 이 사랑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문학평론가 이재복의 작품해설 「지평의 역사, 역사의 지평」 중에서
씨줄과 날줄로 교직되는 『황무지에서』의 서사적 스케일과 의지는 외세에 시달리고 내부적인 알력과 갈등, 분열에 고통받아야 했던 한국사에 대한 안타까운 반성과 서늘한 통찰을 가져다준다. 더불어 작가는 허구적 장치를 뚫고 현실 속에 육박해 들어오는 숭고한 사랑을 제시한다. 한 집안의 영욕과 고난에 찬 간난신고의 굽이치는 길 위에 웅숭깊고 뭉근한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감동의 책 읽기로 흠뻑 젖게 하는 것이 백시종 장편소설 『황무지에서』의 미덕이다.
━ 전상기(문학평론가)
차례 | 황무지에서
작가의 말
제1부 인연
제2부 흔적
제3부 화해
작품해설 | 지평砥平의 역사, 역사의 지평地平 … 이재복
저자 소개 | 백시종
- 1967년 동아일보·대한일보 신춘문예로 데뷔
- 현대문학 추천 완료(김동리 선)
- 한국소설문학상·오영수문학상·채만식문학상
- 류주현문학상·중앙대학문학상·노근리문학상 등 수상
- 황순원문학상양평문인상 수상
- 2020년 김동리문학상 수상
- 2021년 세종문화상 예술부문(대통령 표창) 수상
- 계간 『문예바다』 발행인
2007년 창작집 『주홍빛 갈매기』
2008년 장편소설 『물』
2009년 창작집 『그 여름의 풍향계』
2010년 창작집 『서랍 속의 반란』
2011년 장편소설 『풀밭 위의 식사』
2012년 장편소설 『강치』
2013년 창작집 『돼지 감자 꽃』
2014년 장편소설 『수목원 가는 길』
2015년 장편소설 『팽』
2016년 장편소설 『오옴하르 음악회』
2017년 장편소설 『물 위의 나무』
2018년 장편소설 『호 아저씨를 기다리며』
2019년 장편소설 『누란의 미녀』
2020년 장편소설 『여수의 눈물』
2021년 장편소설 『황무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