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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실수로 깊은 구렁텅이에 빠졌습니다. 도저히 자기 힘으로는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 살려”하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때마침 어떤 점잖은 사람이 그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구렁텅이에 있는 사람을 건져 올릴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나무라기만 합니다. “이 사람아, 조심해야지, 조심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빠지지 않나.” 그러면서 나무라기만 하고 그냥 지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조금 후에 두 번째 사람이 지나갑니다. 머리를 빡빡 밀고 등에 봇짐 하나 매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구렁텅이에 빠진 사람을 보고 “참 안 됐구만. 가엾구나. 나무아미타불.” 그리고는 또 그냥 지나 가 버립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사람이 지나갑니다. 도포자락을 휘날리면서 가다가 “사람 살려”하는 고함소리를 듣고서 그는 구렁텅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면서 하는 말이 “당신이 태어난 생년월일과 시간이 언젠가?”라고 물어 봅니다. 그런 뒤에 혼자 갑자을축이 어쩌고저쩌고 따지더니 “에이, 당신은 지금 이 구렁텅이에 빠져 죽을 팔자구만!” 그러고는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이상은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세상적인 종교들의 특성을 간단하게 이야기로 꾸며 본 것입니다. 제일 먼저 지나간 사람은 여러 종교 가운데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삼강오륜을 따지면서 나무라기만 하는 종교, 유교를 의미합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머리 빡빡 깎고 나무아미타불 하는 것은 불교입니다. 세 번째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지나가는 사람은 도교, 점쟁이들, 역술가들 이런 것들을 총망라해서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다릅니다. 네 번째 사람이 지나갑니다. 이 사람은 “사람 살려”하는 소리를 듣고서 그곳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을 구해주고는 자기는 나오지 못하고 빠져 죽었습니다.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그 사람을 구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전도자중의 한 분이신 빌리그래함목사님은 아들과 자신의 산책가운데 경험했던 한가지 일로 성탄의 의미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한 번 들어보십시오.
어느 날 빌리그래함목사님이 아들과 함께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산길을 가는데 지난 밤에 큰 비가 내려 개미집이 무너지고 개미들이 집에서 나와 사방팔방으로 흩어져서 비를 피할 곳을 찾다가 산책나온 사람들의 무심한 발걸음에 개미들이 밟혀서 이곳저곳에 개미의 사체가 즐비하게 흩어져 있었습니다.
이 장면을 본 빌리그래함목사님의 아들은 개미들이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 개미들이 불쌍해요. 개미들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나요?”빌리그래함목사님은 아들의 착한 마음을 알았지만 무슨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사람이 개미를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단다. 아무리 개미들에게 위험을 알려도 개미들은 사람의 말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사람이 개미가 되어 개미에게 위험을 알리는 방법이 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방법이란다.”
사람이 개미가 되어 개미에게 위험을 알려주고 구원의 길을 알려주는 불가능한 일이 우리 인간 세상에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높은 하늘보좌를 내놓으시고 이 낮고 낮은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신 성탄의 날이 바로 그 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오신 날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그런 의미라는 것입니다. 신이신 하나님께서 왜 사람으로 오셨습니까? 인간들이 죄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을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이 사건은 인류 역사 가운데서 가장 최대의 사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탄은 '온 인류에게 미치는 가장 큰 기쁨의 소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때에 모든 사람들이 다 기뻐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 성경본문에 보면 잘못된 반응을 나타낸 세 종류의 사람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잘못된 반응을 한 첫째 사람은 헤롯왕입니다.
그는 아기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 헤롯왕은 얼마나 나쁜 사람이냐 하면 왕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아내도 죽이고, 처남도 죽이고, 장모도 죽였습니다. 그리고 왕 자리를 빼앗을까봐 자기 아들도 죽였습니다. 이 헤롯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베들레헴 근방에 있는 두 살 아래 남자아이들을 남김없이 다 죽여 버리는 잔인한 짓을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현대판 헤롯들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를 박해하는 공산주의자들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교회를 모두 없애고 성경을 불태우고 수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여 순교자를 내게 했습니다. 아기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헤롯이 비참하게 죽었듯이, 기독교를 박해하는 사람들도 역시 비참한 운명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잘못된 반응을 보여준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말로만 성탄을 지켰습니다. 헤롯왕이 “그리스도라는 메시아가 어디서 탄생할 것이냐?”고 물었을 때 저들은 구약 성경 미가서 5장2절을 근거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정확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잘 알면서도 아기 예수님이 탄생했는데도 아무런 감동도 반응도 없었습니다. 저들의 말대로 거기서 메시아가 태어날 것을 믿었더라면 먼저 가서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저들은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중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만든 장본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스스로 반성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성탄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마음에 기쁨과 감사와 감격이 있습니까? 그저 습관적으로 형식적으로 성탄을 지키는 우리가 아닌지 깊이 반성해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잘못된 반응을 보인 세 번째의 사람들은 예루살렘 시민들입니다.
마태복음 2장 3절입니다.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3절을 보면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도 알지 못하고 시끄럽고 떠들면서 분산하게 성탄을 맞이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성탄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거리에서, 상점에서, 백화점에서, 술집에서 시끄럽게 떠들면서 기분이 들떠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탄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성탄절을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성스럽게 지내는 날이 아닌 죄를 짓고 흥청망청지내는 날로 사탄마귀가 만들어버렸습니다.
우리는 헤롯왕과 같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거부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되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인들처럼 습관적이고 형식적으로 아무런 감동도 없이 성탄을 지키는 사람도 되어서는 안 되고, 예루살렘 시민들처럼 성탄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마음만 들떠서 떠들어대며 성탄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뜻 깊은 성탄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요?
오늘 성경에 나오는 동방박사들의 모습을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천리도 넘는 먼 길을 밤하늘에 떠 움직이는 별을 따라 아기 예수님이 태어난 곳까지 찾아 왔습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사막을 지나서 그 먼 길을 별이 인도해 주는 대로 주로 밤중에 걸어 왔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여행길이 고생스럽고 험난했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성탄의 주인공 되신 예수님을 반드시 만나야 되겠다는 불굴의 신앙, 끈질긴 신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옛날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10리, 20리 되는 먼 길을 걸어서 예배당에 출석했습니다. 그렇게도 먼 거리를 밤에도 예배드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너무 쉽게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고, 너무 쉽게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보여주었던 그 끈질긴 신앙이 우리들에게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불굴의 신앙!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아니하면 살 수 없다"고 하는 신념과 끈질긴 일편단심의 신앙, 성탄의 주인공 되시는 아기 예수님을 꼭 만나야 되겠다고 하는 그 마음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만나 경배했습니다.
마태복음 2장 11절입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동방박사들이 마리아에게 엎드려 경배했습니까? 아닙니다.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했습니다. 성탄의 주인공은 마리아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아기 예수님을 낳아준 마리아에게 경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탄의 주인공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에는 예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모든 행사의 초점이 예수님께 맞추어져야 합니다. 사람이 높임 받고 박수 받고 즐기는 성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박사면 많이 배운 사람들이 아닙니까? 나이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기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했다는 것은 그들의 겸손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겸손한 마음으로 아기 예수님께 경배해야 할 것입니다. 어이없지만 결혼식 주례 할때도 박사 까운입고 폼 재면서 박사모까지 쓰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는 시대입니다.
다시 11절을 보시면 “보배합을 열었다”고 했습니다. 저들은 미리 길을 떠날 때부터 정성스럽게 아기 예수님께 드릴 선물, 보배합을 준비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만났을 때 뒤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몇 장 꺼내서 예수님 앞에 놓은 것이 아닙니다. 올 때부터 보배합에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정성스럽게 준비해 와서 아기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이 예물들은 영적 해석이 어떻든지 간에 가장 정성스럽게 준비한 예물임에 틀림없습니다. 성탄을 맞는 우리들에게도 이와 같은 정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께 우리의 마음과 물질의 정성을 드려서 경배하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옛날 우리 할머니나 어머니들은 새 돈이 들어오면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을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주일날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에 사용하려고 새 돈을 쓰지 않고 일부러 보관했습니다. 새 돈이 없으면 헌 돈이라도 깨끗하게 다림질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만큼은 정성스럽게 드려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졌습니다. 그것이 우리 믿음의 조상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와 같은 정성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대통령에게 예물을 드린다면 정성 없이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만왕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예물을 드리는데 어떻게 정성도 없이 되는 대로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동방박사들이 보여주었던 그 정성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저들은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12절입니다.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동방박사들은 헤롯왕이 예수를 찾거든 자기에게 보고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동방 박사들은 왕명을 어겼습니다.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왕의 명령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지시해 주는 길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살다가 보면 우리 마음속에 헤롯의 음성이 들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너는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아라. 다른 길로 돌아가라.” 뜻 깊은 성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과거의 구태의연한 모든 모습을 떨쳐 버리고, 버릴 것은 버리고 끊을 것은 끊고,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해서 하나님께서 지시해주시는 길로만 삶의 방향을 바꾸어 살아야 합니다.
오늘 저녁 10시에 KBS1TV에서 손양원목사의 일대기 다큐멘터리를 방영한다고 합니다. 꼭 보십시오.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강한 이 때에 기독교가 이나라를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 지를 보여주는 일례로서 중요한 복음증거의 수단이 될 것입니다. 이런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높아야 기독교의 이미지제고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기독교에 대한 좋은 프로그램이 많이 제작될 것입니다. 손양원목사님은 <사랑의 원자탄>이란 별명으로 유명하신 분입니다. 그 분은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시다가 일본 경찰에 붙들려 갔습니다. 일본 검사가 위협을 했습니다. “일본 천황폐하의 명을 거역하다가 어떠한 벌을 받는지 너는 모르느냐?” 그때 손양원 목사님이 대답합니다. “세상 나라의 왕의 명을 어겨서 내가 이런 벌을 받는데 만왕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을 어기고 내가 신사참배를 한다면 나중에 내가 얼마나 큰 벌을 받겠소?” 그러면서 끝까지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다가 보면 우리 마음속에 헤롯의 음성이 들려올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헤롯에게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 그 길은 사망의 길이요, 멸망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지시해 주시는 길로만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시해주시는 그 길이 생명의 길이요, 영생의 길이요, 축복의 길인 줄로 믿습니다.
그 옛날 동방 박사들이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성탄절을 맞이했는지를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와 같은 불굴의 사랑, 끈질긴 신앙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만났을 때 아기 예수께 경배했습니다.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미리 정성껏 준비해 간 보배합을 열어서 최상의 선물을 아기 예수님께 드리면서 경배했습니다. 그 옛날 동방 박사들이 보여주었던 겸손과 정성이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겸손과 정성을 가지고 우리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는 경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동방 박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다른 길로 조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뜻 깊은 성탄을 맞으면서 우리에게도 세상 중심적으로 살던 삶에서 완전히 방향 전환해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과거의 구태의연했던 모든 옛 모습들을 이제는 다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여,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그 길로 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013년 성탄을 맞으면서 무엇보다도 성탄의 주인공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반드시 영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동방 박사들이 처음 오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한 것처럼 우리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 모두도 기쁨으로 영접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 옛날 예루살렘 시민들처럼 소동을 부리거나 당황해 하는 그러한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우리들의 마음이 그 옛날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신 베들레헴의 말구유와 같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