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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그치게 하는 처방 196
권두언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의 경륜이 오묘라면, 죄의 본질도 오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의 시작과 그 존재 이유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수수께끼가 되고 있습니다. 죄악의 시작은 그 존재 이유와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서 죄를 최종적으로 어떻게 처리하시는지, 그리고 그 죄악을 처리하는 데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에 대해서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아무 책임이 없으시며, 또한 그분께서 속히 죄의 역사를 마치시기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죄에 대한 유일의 정의는 “죄는 불법이라”(요일 3:4)는 말씀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가 되는 위대한 사랑의 율법에 대항하여 싸우려는 정신의 표현입니다.
이 세상과 인간의 마음속에 만연해 있는 죄는 보통 힘이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를 그치게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삶 속에서 경험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되기를 그렇게 원하시는 “악한 자가…만지지도 못하”는 자가 되기 위해 여러분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고 계십니까?
죄를 이기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죄를 이기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특별하게 처방해주신 방법입니다. 이번 호 신앙기사에서 다루어지는 하나님의 특별한 처방을 연구하시고, 죄를 그치는 놀라운 기적이 여러분의 생애에 일어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강 병국 목사
Love Letter_당신의 겟세마네로
강 영은
주님,
저를 데려가십시오.
죄의 무게로 쓰러질 듯 휘청이며 걸어가
땀이 핏방울로 돋을 때까지 엎드려 기도하시던
당신의 고통의 겟세마네로…
빛깔 좋은 욕망이 옷자락을 잡을 때,
죄가 고운 치장으로 다가와 영혼을 흔들 때,
포기하고 싶잖은 욕심으로 발걸음이 비틀거릴 때,
주님,
저를 데려가십시오.
신비스러운 고통의 잔이 당신의 손에서 떨리고
인간 위해 지불할 값에 당신의 영혼 흔들리던
고뇌의 겟세마네로…
주님,
저를 데려가십시오.
아직도 죄가 넘실거리며 파도처럼 저를 넘보거든…
하나님의 빛의 임재가 떠나고
죄악의 무게 만큼 진노가 당신의 어깨를 누르던,
그 어둠 속에서 당신의 영혼이 조금씩 파쇄되던
슬픔의 겟세마네로…
그곳에서
제 죄의 무게로 가슴 아프고
제 죄책으로 심장 눌려 엎드린
당신의 머리를 두 손으로 받쳐드리고
당신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울게 하십시오.
그곳에서
보게 하십시오.
타인보다 상하신 당신의 얼굴,
인생보다 상하신 당신의 모양을…
나의 윤택과 나의 안일과 나의 호사와 바꾼
당신의 초췌와 당신의 비통과 당신의 번민을…
그곳에서
당신과 함께 뜨거운 눈물 한없이 흘리게 하십시오.
주님,
저를 데려가십시오.
인류의 운명이 저울 위에서 떨던 그 순간,
저를 위해 멸시와 고통의 쓴잔을 마시기 위해
눈물로 기도하시던 곳,
떨리는 입술에 그 잔을 대시던
당신의 번민의 겟세마네로…
그러나 끝내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축원하며
한 방울 남김없이 잔을 비우시던 곳,
당신의 생명과 내 죄악이 맞바꿔지던
그 인고의 겟세마네로…
인생의 짐 무겁고
고난의 세파 힘겨워 맘 흔들릴 때,
어둠의 터널 지나며
영혼의 슬픔에 가시 박힌 듯 맘 아플 때,
주님,
저를 데려가십시오.
벌써 십자가의 그늘 덮였던 외로운 겟세마네로…
거기서
이미 피 흘리시는 당신의 옆구리로 가까이 다가가
가만히 당신의 숨소리를 듣게 하십시오.
거기서
이미 못 박히신 당신의 손에 내 손을 얹고
영겁의 세월 울며 죄를 미워하게 하십시오.
주님,
데려가십시오.
영혼이 으스러질 때까지 저를 위해 기도하시던
당신의 아름다운 겟세마네로…
당신은 사라져 없어져도
저를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당신의 사랑의 겟세마네로…
그곳에서 제 영혼 함께 죽고
그곳에서 제 영혼 당신과 함께 살아나게 하소서.
제1부_죄가 좋은 걸 어떡해요?
총 제목: 죄를 그치게 하는 처방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께 한가지 고민이 있으십니다. 그것은 바로 불행과 파멸의 근원인 죄를 온 우주에서 없애버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죄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시는 인간의 마음 속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 속에 있는 죄는 멸하시면서 죄인은 구원하실 수 있을까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면하고 있는 문제이며, 이 일을 위해 지금 예수님께서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처방이 필요합니다.죄를 그치게 하는 하나님의 처방이 필요합니다. 그 처방이 무엇일까요? 이번 호에서 다루어지는 신앙 기사를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방법과 그분의 사랑을 더 이해하고 경험하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 편집실 –
제1부: 죄가 좋은 걸 어떡해요?
세상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버리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다. 아니,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술을 좋아하던 사람이 술이 싫어져서 금주하는 일은 쉬워도, 술을 아직도 좋아하면서 술 마시는 일을 억지로 참는다면, 금주는 그 사람에게 고역이 될 것이며 그 사람이 다시 술을 마시게 되는 것은 한순간의 일이 될 것이다. 자신이 좋아서 하게 되는 어떤 일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사실 이 세상에 없다. 만일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할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해도, 외압에 의해서 참게 되거나 억지로 종용되어 잠깐 포기상태로 들어간다 해도, 그것은 잠시 자기의 소욕을 중단하는 것이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소욕은 결코 포기되지 않으며, 항상 마음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다시 이루고 성취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일 뿐이다. 죄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그 사람이 죄를 좋아하고 있다면, 죄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죄를 버리라고 말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죄가 좋은 걸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1) 처절한 절망
사람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지만,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과 죄에 연약해진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조상과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그릇된 유전적 기질로 우리는 더 쉽게 죄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 힘으로는 죄를 이길 힘이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아무리 의롭게 살려고 한다 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는 것일 뿐이다. 인간은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미 7:4).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고 부르짖었다. 또한 그 생각은 우리로 이런 처절한 부르짖음을 하게 한다.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구원할 수 있겠는가?”
우리 자신 속에 선함이나 의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인간은 죄를 대항하기에 너무 약하여 스스로는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뼈저리게 느껴야만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이런 깨달음이 생길 때에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게 된다.
2) 죄가 가진 파워
죄에서 벗어나고 죄를 그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죄는 파워를 가지고 있다. 성경은 죄가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인간을 지배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다음의 성경 절을 보자.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롬 6:12~13).
죄가 ‘왕 노릇을 한다’는 표현과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드린다’는 표현은, 마치 사람이 권세를 가진 어떤 자에게 꼼짝없이 굴복하고 그 권세 아래 자신을 갖다 바치듯이, 인간이 죄의 파워에 꼼짝없이 끌려 다니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죄는 분명히 다스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죄를 좋아하고 그 죄를 그치지 못하고 그것에 끌려 다닌다는 것은, 그 사람이 죄에 종 된 상태, 곧 죄의 노예로 팔려있는 상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죄의 다스리는 파워 중에 또 한가지, 죄는 유혹의 힘을 가지고 있다. 죄에도 일시적인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 많은 사람은 처음의 달콤한 유혹과 쾌감 때문에 죄에 빠져서 결국에는 그 죄의 노예가 되고 만다. 죄는 마치 마약 중독과 같아서 잠깐의 쾌락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게 하는데, 그 유혹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사람을 옭아매는 파워를 발휘한다. 그래서 죄의 습관에 빠지면 헤어나오기가 그렇게 힘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죄는 일시적인 기쁨은 주지만 사실은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앗아간다는 사실이다. 죄의 결국은 사망과 파멸이다.
죄는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죄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을 일으켜서 죄인 스스로가 하나님을 피하게 한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우리 안에서 왜곡시켜 놓는다. 그러므로 죄를 품고 그 죄를 고집하여 버리지 않을 때에 우리 영혼은 서서히 좀먹어 들어가듯이 파괴되며,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죄에 물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죄가 무엇인지 알고서 좋아하는 것인가? 아니면 죄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지 못해서인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안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의 뜻을 따르는 데서 오는 참된 기쁨과 만족을 안다면, 죄가 주는 즐거움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쓸데없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독자 여러분은 그 기쁨을 경험하고 있는가?
3) 은혜의 파워와 소망
그렇다면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구원을 얻는 것일까? 인간은 죄의 본성을 가졌으니, 그냥 그렇게 죄짓고 용서받고 또 죄짓고 용서받는 일을 계속하다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인가? 죄는 어차피 이길 수 없고 계명을 순종할 수 없기에 그냥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인가? 아니면 죄를 그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한 어떤 방안을 마련해 놓으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죄의 파워와 유혹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셨는데, 그것은 죄보다 강력한 파워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은혜의 파워가 죄의 파워를 이기게 한다고 말씀하셨다. 다음의 말씀을 읽어보자.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4).
여기에 희망이 있다! 우리가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신다고 하셨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시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하신다.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1).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죄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파워로 죄를 이긴다고 말하고 있다. 죄를 짓고 죄의 권세 아래 매일 끌려 다녀도 은혜로 다 덮어주셔서 구원을 받게 하신다는 가르침은 바른 것이 아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5).
성경은 은혜로 죄를 다스리고 죄를 이겨야 한다고 가르친다.죄를 승리하는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죄의 파워를 벗어나 죄를 그칠 수 있는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이루실까?
제2부_사랑과 증오심의 파워
인간에게는 어떤 것에 생명을 바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두 가지 동기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과 증오이다. 인간은 사랑하는 무엇인가를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는 반면, 끓어오르는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생명을 버릴 수도 있다. 그렇게 사랑과 증오는 동기 부여를 하게 하는 막강한 것이다. 영적인 면에서 선과 악의 전쟁을 살펴보더라도 우리는 그 사실을 간파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그분의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일하시지만, 증오심의 대부 사단은 그의 증오심으로 인해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과 율법에 대한 반역을 꾀하며 인간을 파멸시키기 위해 일하고 있다. 설사 영적인 면이 아니더라도 인간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아도 우리는 그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사랑과 증오 때문에 얼마나 수많은 일들과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가! 특히 증오심 때문에 일어나는 강력한 범죄들을 보면, 증오심이 인간 속에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는 근원이 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1) 하나님이 주시는 증오심?
만일 우리의 마음 가운데 있는 죄에 대한 사랑이 죄에 대한 증오심으로 바뀐다면 어떻게 될까? 죄를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죄를 버리거나 승리할 수 없다. 죄를 증오하게 하는 그 힘만이 죄를 버리고 승리하게 할 것이다. 그런데 아는가? 하나님께서 죄를 이기기 위해 우리 마음속에 넣어주신 증오심이 있다는 사실을…. 그 증오심(?)에 대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처음 선포하신 구원의 계획, 복음에 나타나 있다. 그것은 놀라운 복음이었다! 그 복음을 함께 읽어보자.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여자의 씨 사이에 적개심(enmity)을 두리니, 여자의 씨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KJV). 여기에 적개심, 증오심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하나님께서 어디에 적개심을 두시겠다고 하셨는가? 사단과 여자 사이에, 사단의 일과 하나님의 역사 사이에, 사단을 따르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 적개심을 넣어주시겠다고 하셨다. 그 적개심이야말로 죄를 승리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2) 복음 속에 들어있는 새 원칙
인류의 타락 후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내리신 이 선고는 복음인 동시에 하나의 예언이었다. 그것은 세상 역사의 시작에서 종말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를 사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있을 선과 악의 대쟁투를 미리 보여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원수가 되게 하리”라고 선언하셨다. 이 원수 관계는 선천적으로 되지 않는다. 인류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했으므로 그 본성이 악해졌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히 사단과 조화되고 반목하지 않게 되었다. 죄인과 죄의 창시자인 사단 사이에 아무런 원수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사단과 인간은 둘 다 반역으로 악해졌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그들의 힘을 모으는데 협력하게 되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특별히 간섭하지 않으셨을 것 같으면 사단과 인류는 동맹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대항하였을 것이며, 인류는 사단과 원수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반대하는 일에 계속 연합하였을 것이다. 사단은 천사들을 반역에 가담시켰던 것처럼 인류를 범죄하도록 유혹하여 하나님을 대항하는 싸움에 협력하게 했다. 그런데 사단과 여자와 그리고 그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원수가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복음이 선포된 것이다. 이제 인간의 본성을 타락시키려는 사단의 노력은 방해를 받게 되었으며, 인류는 사단의 세력을 저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사단과 죄악에 대한 증오심을 일으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영혼 속에 주입하시는 은혜이다. 이렇게 인간을 회개하게 하는 은혜와 새롭게 하는 능력이 없었으면, 인류는 계속 사단에게 사로잡혀 그에게 종 노릇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 속에 들어있는 새로운 원칙이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복음의 선포는 지금껏 죄에 매여 죄악 속에서 사단과 조화를 이루며 살던 인간의 마음속에 투쟁을 일으켜 새로운 삶이 가능하게 만들었는데, 곧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인간의 마음의 지배자요 폭군인 사단을 거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죄를 사랑하는 대신에 미워하고,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죄의 세력과 죄의 정욕을 정복할 수 있는 새 탈출구가 열린 것이다. 복음을 통하여 하늘의 새 원칙이 역사하게 된 것이다.
3) 죄를 증오한다면?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여자의 씨 사이에 적개심(enmity)을 두리니.” 여기서 “적개심”이란 원어적 의미는 서로 미워하고 혐오하여 합할 수 없는 마음을 말한다. 만일 우리 마음에 죄에 대한 적개심이 있다면, 죄를 몸서리칠 만큼 혐오하고 도저히 죄와 하나 될 수 없는 마음이 주어진다면 죄를 이기는 것은 얼마나 자연스럽고 쉬워질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죄에 대한 증오심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증오심은 어떻게 생기는가? 일반적으로 증오심은 누군가가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것에 큰 해를 끼칠 때에 온다. 누군가가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자신의 사랑하는 대상을 죽게 했다고 가정한다면, 그 사람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이 무섭게 일어나는 것이 상례이다.
어쩌면 우리는 죄를 너무도 쉽게 짓는지 모른다. 별생각도 없이 우리 자신의 욕망과 쾌락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자. 만일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의 가족 중 한 사람이 불치병에 걸리게 된다면 어떨까? 우리가 쉽게 죄를 지을 수 있을까?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 나의 죄 때문에 죽을 병에 걸려 고통당해야 한다면 그래도 무심코 죄를 지을 수 있을까?
한 장례식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한 남자아이가 관속에 누워있었다. 관 곁에는 슬픔에 싸여 눈물을 흘리는 가족들이 서 있었다. 그 아빠와 엄마와 친척들은 흐느껴 울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그 아이의 아빠는 다른 아빠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애통해 했다. 그 전날, 이 아빠는 출근하려고 차고에서 차를 후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어린 아들이 아장아장 걸어서 아빠를 따라 나갔고, 아빠가 후진하여 나가던 차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아빠는 그것도 모르고 후진을 하다가 아들을 본의 아니게 죽이게 된 것이다. 물론 사고였지만 자기의 실수로 사랑하는 아들을 죽게 한 그 찢어지는 듯한 아빠의 마음을 누가 이해할 수 있으랴? 그 아빠는 자기의 조심성 없는 운전 습관을 얼마나 후회하고 자기 자신을 혐오했을 것인가? 여러분은 그 사건 후 그 아빠가 아무 생각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를 후진시켰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에게 다른 자녀들이 있었다면 차를 후진할 때마다 얼마나 조심하고 또 조심했을 것인가?
4) 십자가가 주는 죄에 대한 증오심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주민들 위에 은혜의 영과 간구하는 영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나 곧 자기들이 찌른 나를 바라보고 사람이 자기 외아들을 위하여 애곡하듯 그를 위하여 애곡하며, 사람이 자기의 처음 난 자를 위하여 몹시 슬퍼하듯 그를 위하여 몹시 슬퍼하리로다”(슥 12:10). 갈보리의 십자가를 바라보라! 거기에는 죽임을 당하신 한 분이 보인다. 우리를 가장 사랑하는 분, 우리의 창조주, 온 우주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께서 돌아가셨다. 우리의 지은 죄가, 즉 우리가 그분을 죽였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자기 외아들을 위하여 애곡하듯이” 그렇게 슬퍼하는가? 우리가 진정으로 갈보리 십자가의 의미를 알게 된다면, 죄가 사랑하는 주님께 무엇을 하였는지를 보게 된다면 우리는 죄를 증오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심판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죄를 미워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더 이상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고 회개하게 될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너(사단)와… 여자의 씨 사이에 적개심을 두”겠다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 죄에 대한 증오심, 그것은 십자가를 통해 주시는 놀라운 파워이다.
사람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죄가 얼마나 흉악한 것인지 알게 된다. 바로 영광의 주님을 징벌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이 말로 다할 수 없는 따뜻한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배은망덕과 반역으로 일관된 생애를 살아왔음을 알게 된다. 그는 가장 좋은 친구를 버리고 가장 귀중한 하늘의 선물을 모독해 온 것이다. 계속해서, 그것도 직접,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상처를 받아 피가 흐르는 그분의 심장을 찔러 온 것이다. 그는 넓고 어둡고 깊은 죄의 심연에 의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어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느낀다. 이런 슬픔과 애통은 죄를 미워하고 증오하게 한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죄를 드러내시는 것은 죄에 대한 흉악성을 보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명상하는 데 매일 많은 시간을 바쳐야 한다. 예수님의 생애 중에서 특히 그분의 생애의 마지막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좋겠다. 우리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분의 크신 희생을 깊이 생각할 때에,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더 많이 일어나고 그분을 그렇게 고통 중에 돌아가시게 한 것이 우리의 죄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어 죄를 몹시 증오하게 될 것이다.
제3부_용서 받은 삶
온 우주의 원칙인 하나님의 율법은 죄의 대가로 사망을 요구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셔야 하셨다.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죄인을 죽이시든지 아니면 율법을 폐지하셔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에게 살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죄인 대신 예수님께서 죄의 대가를 담당하게 하시어 희생당하게 하시므로 십자가를 통해 율법의 권위를 높이 세우심과 동시에 인간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입 맞춘 곳이다. 우리가 십자가에 대해 진정으로 알게 될 때에, 주님의 사랑이 죄를 증오하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주시는 용서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1) 죄지으라고 용서해 주심?
많은 교인들을 보면 마치 하나님께서 또다시 죄를 지으라고 용서해주신 것으로 착각하고 사는 것 같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빚진 자에 대한 비유(마 18:23~35)에서 예수님은 용서의 조건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그 주인은 1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빚을 모두 탕감해주었다. 영적인 해석을 적용해 볼 때에 그는 용서받고 의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종은 자기가 받은 대로 행하지 않았는데, 곧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을 용서하지 않고 잡아 옥에 가둔 것이다. 그 일을 들은 주인은 슬퍼하면서 자기 종에게 1만 달란트 탕감해준 것을 무효화시켰다. 성경은 분명하게 용서받은 자는 반드시 용서받은 자의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은,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고 용서해주시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모든 죄를 용서해 주고 덮어주므로 그냥 죄를 짓고 살다가 영생에 들어간다고 믿고 있다. 십자가에서 치러진 죄의 값을 생각하지 않은 채 말이다. 죄의 대가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죄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는 용서받고 생명을 얻은 것이다.
2) 용서의 값
만일 우리가 수백억의 빚을 지고 빚쟁이들에게 시달리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금액은 보통 사람이 평생을 일해도 갚기 힘든 금액이다. 아무리 노력하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갚을 길이 없다. 절망 가운데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감옥에 갈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 부자 친구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빚을 탕감받게 된다. 그 때에 우리의 감사와 기쁨이 어떠할까? 모든 근심 걱정이 없어지고 하늘이 열리듯 희망의 빛이 마음에 비치면서 새로운 용기와 꿈이 생길 것이다. 어제는 염려와 불안으로 잠이 오지 않았으나 이제는 꿈만 같은 이 사실에 잠을 설치게 될 것이다. 우리를 염려하던 사람들에게 전화하여 이 기쁜 사실을 전할 것이다. 그리고 도와준 친구의 은혜를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고마운 친구의 은혜를 갚기 위해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이 일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다. 우리의 죗값을 모두 치르시고 용서해 주셔서 사망에서 건져주신 것이다. 이러한 진정한 용서의 경험은 우리의 삶의 목적을 완전히 바꿔놓을 것이다. 우리는 용서의 대가와 그 가치를 정말 알고 있는가?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것은 용서이다. 죄의 용서를 위해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 지불되었다. 이보다 더 값비싼 것이 우주에 또 있을까? 우리는 용서에 대해 얼마나 그 가치를 느끼고 감사하고 있는가?
3) 용서받은 자의 삶
세계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에 한 그리스도인 청년이 미 해군 함대에 징집되었다. 그는 그 함대에서 기회가 있는 대로 전도지를 나눠주며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러나 그의 상관은 예수 이야기만 나오면 비웃고 조롱하면서 그리스도인 청년을 골탕먹이고 괴롭혔다. 때로는 그의 소지품들을 바다에 던지기도 하고 기도하는 그의 뒤통수를 신발로 때리기도 하였다. 그럴지라도 이 청년은 늘 한결같이 친절하고 예의 밝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긴급 사이렌 소리가 울리면서 “각자 제 위치로!” 라는 말이 확성기를 통해 나왔고 순식간에 나타난 적의 비행기는 포탄을 함대에 퍼부었다. 배에는 불이 났으며 부서진 곳이 많아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잠시 후 함장은 확성기를 통해 “각자 알아서 자기 생명을 구하라! 행운을 빈다”는 마지막 명령을 전달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든 대원들은 미리 준비해 둔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이 그리스도인 청년이 바다로 뛰어들었을 때 그는 구명조끼를 못 찾아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공포에 질려있는 그의 상관을 보게 되었다. 그 청년은 얼른 그가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벗어 자기를 그렇게 괴롭히던 상관에게 던져주고 “이 전쟁에서 살아남게 되면 예수님을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파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1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후 한 사람이 교회 문을 두드렸다. 그는 위의 이야기를 그 교회의 목사님에게 해주면서 자기가 바로 그 못된 상관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를 위해 생명을 버린 그 어린 졸병을 떠올리며 그 청년이 믿었던 예수님을 알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청년이 살았다면 분명히 그렇게 살았을 전도자의 삶을 살고 싶다고 고백하였다.
우리의 생명은 예수님의 용서로 다시 얻게 된 생명이다. 그렇다면 용서받은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15, 20, 21). 우리는 진정으로 용서받았는가? 그렇다면 용서받은 자로서 그리스도를 위해 살므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야 하지 않겠는가!
4) 사랑이 주는 고통
많은 사람들은 용서에 대해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 예수님이 하늘에서 사무적으로 죄의 기록 책에 “용서받았음” 이라는 도장만 찍어 주면 끝나는 것처럼 생각한다. 도대체 우리가 짓는 죄가 예수님과 무슨 상관인가? 2000년 전에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으므로 우리의 용서와 그분의 고통은 십자가에서 끝난 것인가? 정말 그러할까? 좀 더 실제적인 이야기를 통해 그 주제로 접근해 보자. 한 목사님이 여러 해 전 어느 도시에서 전도집회를 개최하였는데, 마지막 즈음에 한 여자분이 눈물을 흘리며 강당의 입구 쪽으로 걸어 나와서 상담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흐느끼며 말했다. “나의 아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그 여인의 아들에게 어떤 일이 있는 것인가? 너무 아파 위독한 상태인가? 아니었다. 사고가 났는가? 아니었다. 그는 교도소에 갇혀있었다. 그 여인이 그렇게 말하였을 때, 그 강사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을까? “어머니, 이제 그만 슬퍼하시고 기뻐하세요. 적어도 어머님은 감옥에 갇히지 않으셨잖아요?” 결코 아니다. 지금 누가 더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가? 감옥에 있는 그 아들인가, 아니면 감옥 밖에 있는 어머니인가? 자녀들의 죄 때문에 고통당하고 마음 아파하는 부모님들을 볼 때에 우리의 죄 짐을 지시고 중보 하시며 고통스러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엿볼 수 있지 않은가? 그분은 인간 부모가 사랑하는 것보다 몇백 배 더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신가? 인간 부모의 마음이 자녀 때문에 이렇게 고통당한다면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시며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신 구세주의 마음은 어떠하시겠는가!
여러 해 후에 그 목사님은 이 여자분을 또 만나게 되었다. 그 때도 변함없이 그 여자분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같은 말을 하였다. “내 아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여러 해 후에도 여전히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그 아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것이다. 그 때에 여러분 같으면 이렇게 말하겠는가? “어휴, 어머님, 이제 아드님 생각은 잊어버리세요! 그러다 궤양이라도 생기시겠어요. 어느 흥겨운 파티에라도 참석하시든지 해서 좀 잊어버리세요. 아드님 때문에 그렇게 짓눌리실 필요 없습니다. 그 아이는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받고 있을 뿐이잖아요?” 그 어머니의 문제는 대체 무엇인가? 그 어머니가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직 아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어머니의 가슴은 미어지는 것이다. 당신은 왜 죄는 우리가 짓는데 예수님께서 고통당하시느냐고 묻는가? 만일 예수님의 마음속에 우리들에 대한 동정과 사랑이 없다면 그분의 용서는 문자 그대로 사무처리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며 그렇게 고통스러워하시고 안타까워하시는 것은, 우리를 그분 자신의 생명을 주실 만큼 아끼고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죄는 예수님의 생명을 앗아갔으며 인간의 본성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고 세상에 파멸과 불행을 초래했다. 죄는 온 우주에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에 엄청난 슬픔과 고통을 가져왔으며,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그분의 마음은 찢어진다. 왜냐하면, 그분은 죄가 우리의 영혼에 끼치는 해악을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이다.
사랑이 예수님의 마음에 고통을 가져오고 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죄 때문에 예수님께 가해지는 고통에 대해 이해하기는커녕 무관심과 방종 속에서 세상의 것들만을 추구하며 질주하고 있다. 그분의 자녀들이 짓는 죄로 인해 받으시는 예수님의 고통과 눈물을 그치게 할 방법은 없을까? 언제까지 그분의 고통이 계속되어야 하는가? 여러분은 예수님을 기쁘게 하고 싶은가? 그분의 마음의 고통을 줄여주고 짐을 가볍게 해주고 싶지 않은가?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많은 헌금도, 멋진 신앙고백도, 유창한 방언과 떠들썩한 봉사활동도 아니다. 그런 것들이 예수님의 마음에 있는 고통을 없애주지 못한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상한 심령이란 우리의 죄로 인해 그분께 고통을 드린 것을 진정으로 슬퍼하는 마음이다. 그분을 사랑하고 갈급한 마음이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 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 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6~8). 우리의 죄로 인해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우리 마음속에 죄에 대한 슬픔과 비애가 느껴지지 않는가?
제4부_하나님의 처방
그토록 많은 불행과 파멸을 가져오고, 하나님과 예수님의 마음에 그렇게 심한 고통과 슬픔을 가져오는 죄! 어떻게 그 죄를 그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죄를 그치게 하는 놀라운 처방을 가지고 계신다. 그 처방과 해결책을 함께 생각해 보자.
1)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수 있는 조건
많은 이들은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 궁금해한다. 성경에 나타난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의 예언과 가르침에 의하면, 예수님은 지금 하늘 성소에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중보하고 계신다. 왜 그분은 성소에서 중보하고 계시는가? 언제 그분은 중보사업을 마치고 우리를 데리러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그분이 하늘 성소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질 때에 하시던 일을 마치시고 이 땅에 오실 것이다. 다니엘의 계시 가운데 한 천사가 이렇게 묻는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일이(죄가) 계속되어야 합니까?” 그 때에 다른 천사가 대답한다. “성소가 정결케”(단 8:14)될 때까지…”
좀 더 실제적인 예를 들며 이 주제에 다가가 보자. 한 어머니가 마룻바닥을 닦고 있다. 다 닦았을 무렵 그의 꼬마 아들이 흙 발로 뛰어들어와 마루를 더럽혔다. 또 다시 그 어머니는 마루를 닦아야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의 딸이 달려와 진흙 발로 또 마룻바닥을 더럽힌다. 그 어머니는 언제쯤 마룻바닥을 닦는 일을 마칠 수 있을까? 그의 자녀들이 계속 마룻바닥을 더럽히는 한 그 일은 끝날 수 없다. 그것처럼, 만일 우리들이 죄를 짓고 용서받고 또 죄를 짓고용서 받는 일을 계속한다면 예수님의 중보사업이 언제 하늘 성소에서 끝나게 되겠는가? 언젠가는 죄짓고 용서받고 또 죄짓고 용서받는 지긋지긋한 죄의 반복과 그분의 고통스런 중보의 사역이 마쳐져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일을 언제까지 계속하셔야 한단 말인가? 그분의 백성들이 더 이상 그들의 죄로 영혼의 성소를 더럽히지 않을 때까지…우리의 성품이 하나님의 계명과 온전히 조화를 이룰 때까지….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은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는다. 그들은 죽는 한이 있어도 그들을 그렇게 사랑하시는 분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진정한 용서와 회개를 경험하고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을 순종한다. 한편 악인들은 그들의 양심이 너무 무디어지고 성령의 음성을 계속 거절하여 마침내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다. 그들은 더 이상 회개하지 않는다. 의인들은 더 이상 죄를 범치 않고, 악인들은 더 이상 회개하지 않으니 예수님께서 중보 하시기 위해 남아 계실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 때에 온 세상의 은혜의 시간이 마쳐지고 예수님께서 중보사역을 마치시고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다.
2) 죄를 그치게 하는 처방약
어떻게 인간이 죄를 짓는 일을 그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시는가?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히 10:15~18). 놀라운 말씀이지 않은가?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다는 말씀은 더 이상 죄의 용서를 위해 중보 하실 일이 없다는 뜻이다. 왜 그런가? 그분의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실제적인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우리는 우리의 자녀 딸이나 아들을 절대로 죽일 수 없다. 누가 “왜 당신은 아들을 죽이지 않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예, 제가 아들을 죽이면 살인죄로 감옥에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저는 평생을 감옥에서 지내든지 사형선고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양심적으로 그런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아들이 저를 화나게 할 때마다 제 아들을 죽이지 않을 수 있도록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겠는가? 결코 아니다.
부모가 자신 아들을 죽이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이유에서이다. 내가 내 아들을 죽이지 않고자 노력하기 때문이 아니다. 아니, 내 아들을 죽이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런 생각조차 할 수도 없다. 왜 그런가? 사랑하기 때문에… 내 아들에 대한 사랑의 법이 내 마음에 새겨진 것이다. 내 마음에 기록되어 내가 내 아들을 대할 때마다 아들에 대한 그 사랑이 나를 주관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꿔서 말해보자. 만일 누가 “왜 당신은 살인죄를 짓지 않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예, 그것은 십계명의 여섯째 계명을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죄를 지으면 지옥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습니다. 그리고 지옥보다는 하늘나라에 가야 하니까요. 그래서 죄를 안 짓고자 애써 참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법을 지식적으로만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있다. 그분의 법이 그들의 마음과 생각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두뇌에만 지식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어떻게 죄를 이길 수 있느냐고 묻는가? 하나님을, 예수님을, 죽도록 사랑함으로써이다. 자기의 생명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함으로써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 우리 마음과 생각에 온전히 기록됨으로써이다. 그 때 우리는 누가 말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에 즐겁게 순종하게 될 것이고 그 순종의 결과로 우리의 성품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될 것이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고 하셨다. 내가 아들을 죽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죽일 수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범죄치 못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 우리 마음에 새겨지게 할 수 있을까?
3) 마음에 계명이 쓰이게 하려면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되는 것을 우리는 새 언약이라고 부른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법이 우리 마음에 기록되게 할 수 있을까? 그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 때에 그분의 사랑의 법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마음에 기록될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 그것은 개인적인 경험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에 대한 성경 지식을 아는 것을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모세는 돌비에 쓰인 하나님의 계명을 받기 위해 40일간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모세는 40일간 시내 산에 있으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웠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 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 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6). 모세는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그분의 영광, 즉 그분의 성품을 보게 되었다. 모세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그분의 성품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닮게 되었던 것이다.전능하신 하나님, 그러나 오래 참으시고 자비로우신 자상하신 하나님,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인자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사랑의 법을 돌비에만 기록하신 것이 아니라 모세의 마음과 생각에도 기록하셨던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율법이 기록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을 마음으로, 경험으로 아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을 알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전 생애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기록될 때까지 그분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모세처럼, 에녹처럼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분을 개인적으로 사귀어 알아야 한다. 사귄다는 것은 법적인, 형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실제적인 마음의 관계이다. 우리는 그분과 법적인 관계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실제적으로 마음을 나누는 깊은 사귐을 갖고 있는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그분의 말씀속에서 그분을 만나야 한다. 그분의 말씀을 통해 그분을 바라보아야 한다. 기도를 통해 우리 생각에 그분을 모셔야 한다. 그분을 바라보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그분을 바라보는 데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달려있는 것처럼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해 그분을 바라보자! 그분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서 흘러넘쳐 도저히 감출 수 없을 때까지 그분을 바라보자! 그렇게 되면 사도바울의 성경 구절이 우리에게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자. 하나도 남겨놓은 것이 없이 다 드리자. 그래서 그분께서 우리 마음에 그분의 법을 기록하시게 하자. 우리 마음을 다른 것이 점령하지 못하게 하자. 하나님께서만이 차지하시게 하자. 항상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자. 그분을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죽을지언정 죄를 지으므로 그분을 슬프게 해드리는 사람이 되지 말자. 이것만이 온 우주에서 죄를 없애는 방법이며 그분의 고통을 없애고 속히 죄의 역사가 끝나게 하는 길이다.
** 마치면서
죄를 승리하고 이겨야 하는 의무가 여자의 남은 무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옳고 그 법은 지킬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하나님의 증인들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은 죄를 그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죄를 좋아하면서 어떻게 죄를 그치겠습니까? 하나님을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 예수님을 자신의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만 죄를 그칠 것입니다. 죄를 그치게 하는 하나님의 처방은 사랑입니다. 죄를 그치게 하는 하나님의 처방은 죄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가 사랑하는 주님을 그토록 아프게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은 죄를 그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죄를 이길 힘을 얻기 위해 주님께 쉬지 않고 기도할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 속에 매일 매 순간 살아가므로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자신이 매일 죽는 경험을 하는 사람, 진정한 거듭남의 경험을 지속하며 사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는 하나님의 법이 기록됩니다. 그 사람은 이미 생각하는 방향과 살아가는 방향이 하나님과 같은 방향이 되어 있고, 성품과 인격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고스란히 반영하여, 죄를 지으라고 해도 짓지 않을 것입니다. 악한 것이 무엇보다 싫고, 죄의 추악함과 흉악성이 너무 싫어서 죄를 혐오할 것이며, 매일 하늘의 순결을 간구하며 살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를 얼마나 좋아하십니까?
여러분은 죄를 그치기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증오심을 넣어주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 대한 여러분의 사랑은 죄를 증오할 만큼 강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하늘의 처방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처방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 하나님의 은혜의 힘이 독자 여러분의 마음을 변화시키시어 죄를 그치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계동향
15년 09월 톱뉴스
1.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된 일본
일본이 세계 2차대전 패전 70년 만에 전쟁 가능한 나라가 됐다. 일본국회가 집단자위권 관련 안보법안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일본 참의원은 지난 9월 19일 새벽 본회의에서 집단자위권 등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11개 안보 관련 법률 제·개정안을 찬성 148표, 반대 90표로 가결했다. 일본국민 80% 이상이 반대 의사를 표시했고, 야당이 격렬히 반발했지만 아베 정권은 다수 의석을 앞세워 법안을 강행 처리했다.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이 없는 일본이 법적으로 전쟁까지 가능하게 된 사실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2. 프란치스코 교황 미국 방문
프란치스코 교황은 9월 22일부터 5일 동안 미국을 방문한다. 23일에는 백악관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만나며, 24일에는 상하원 합동연설을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는 첫 교황이 될 예정이다. 25일에는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 총회에서 연설하게 된다.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 지도자들 앞에서 하는 연설이 될 전망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포함한 전 세계 160여 개 국가의 정상들이 한꺼번에 모인 자리이다. 이후 프란치스코 교황은 필라델피아에서 3년마다 열리는 가톨릭 세계 가족들과의 만남 행사에 참석한다. 오바마 대통령 내외가 교황을 직접 맞이하며, 전 세계 90%의 지도자들 앞에서 연설하고,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세계 가족들과의 만남 행사 입장권 1만 장이 온라인 신청 시작 30초 만에 매진되는 등 교황 프란치스코의 인기는 세계 1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치솟고 있다.
3. 시리아 내전과 IS 세력 확장으로 늘어나는 시리아 난민들
이슬람 시아파인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의 정부군과 이슬람 수니파인 반군의 충돌로 2011년부터 지속된 시리아 내전은 2014년 수니파 극단주의 IS가 시리아 영토를 점령하면서 더 심각한 상황이 되었다. 현재 IS는 시리아 영토의 50% 이상을 점령하며 세력을 키웠다. 5년 가까이 계속된 내전으로 시리아에서 숨진 사람은 20만 명을 넘었고, 절반 이상이 민간인이다. 시리아의 인구는 약 1천8백만 명인데 이 가운데 절반이 넘는 1천1백만 명이 정부군과 IS에 쫓기는 난민이 되었다. 그 중 4백만 명은 국경을 넘어 주변국에 머물고 있으며, 40~50만 명은 유럽으로 가고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데다 난민들로 위장한 IS가 섞여 들어올 우려 때문에 시리아 난민들은 유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난민 사태를 끝내려면 시리아 내전을 종식시켜야 하는데 아사드를 지지해온 러시아는 시리아에 군대를 파견한 반면 반군을 지원해온 미국 및 서방국가는 시리아 내 IS 퇴치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어 시리아 사태는 당분간 해결이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4. 베네수엘라, 하이퍼인플레이션
올해 초부터 지속되는 저유가와 원자재 가격의 폭락으로 자원 부국들의 경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베네수엘라의 인플레이션이 심각한 상황이다. 미국 워싱턴의 정책연구기관 케이토 인스티튜트에서는 지난 8월 28일 베네수엘라의 올해 인플레율이 808%에 이른다는 추정을 내놨다. 화폐가치가 급속히 떨어지면서 물품을 구입하려는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마트에 몰리다 보니 크고 작은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86세 할머니 마리아 아기레씨는 지난 8월 28일 국영 마트에 갔다가 수천 명이 몰려드는 바람에 압사했다. 베네수엘라만큼은 아니지만 러시아, 우크라이나,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도 물가급등으로 국민들이 큰 고통을 받고 있다.
5. 중국 증시 폭락 및 미 연준 금리 인상 연기
중국 증시는 지난 6월 12일 5,166으로 최고점을 찍으며 1년 전보다 2.5배나 올랐다. 그러나 그 후 중국 증시에 거품이 끼었다는 인식이 확산되며 중국 주가는 40% 가까이 폭락했다. 중국 정부는 지난 8월 11일 위안화 가치를 평가 절하하고, 이자율을 낮추며, 은행의 지급준비율을 낮추는 등 폭락하는 증시를 부양하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중국 증시는 8월 24일까지 4거래일 동안에만 22% 폭락하고 지난 8월 26일 2,850까지 떨어지며 9월 18일 현재까지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국 경제는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지난 9월 17일,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수년간 예고했던 금리 인상을 이번에도 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중국 발 금융시장 충격에 의한 전 세계 경제와 금융 상황이 금리동결의 원인 중 하나라고 발표했다.
간증_감옥에서 온 두 번의 편지
안녕하세요. 저는 전주교도소에서 생활하고 있는 J O O입니다. 우발적인 사고로 12년의 징역을 선고받아 지금까지 10년을 조금 넘게 살았습니다. 밖에서 생명이 있는 교회를 조금 다녀서 거듭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마음이 항상 무겁고 어둡습니다. 그래도 혼자서 성경을 보며 진리를 전하는 교회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는데 어렵게 출역한 공장에서 “오 그리스도(1)”을 발견하고 1/3쯤 읽은 상태에서 보통 책이 아님을 알고 서신을 드립니다.
교도소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 외부 목사님들이 오셔서 말씀을 전하지만 생명이 없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비참한 죄인임을 알아야 하는데 저는 죄를 모릅니다. 죄인임을 알지만 정말로 더럽고 추악한 죄인임을 모릅니다. 소중한 생명을 빼앗고 이곳에 들어왔으면서도 아파할 줄 모릅니다. 때로는 죄를 통감하다가도 다시 밋밋해지고 어두워집니다. 때로는 구원함을 받았다고 하다가도 어둡고 우울한 마음에 빛이 없어서 구원의 확신이 없어지고 맙니다.
인생이 헛된 지도 알고 세상이 부질없다는 것을 알아 세상에 연연하지도 않으면서도 진리에 무릎을 꿇지 못하고 있습니다. 혼자서 힘들어하면서도 제힘으로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겠습니다. 머리로는 복음을 아는데 마음속에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SOSTV 선교센터에 참된 구원과 생명이 있음을 믿고 도움을 청합니다. 참으로 저의 죄를 깨닫고 돌이키고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각박한 이 세상에서 세상에 빠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돌처럼 굳어 있는 저의 마음을 기도와 말씀으로 녹여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주시고 평강과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도와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며 이만 줄입니다.
2015년 6월에 전주에서 J O O 드림
안녕하세요.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서 문을 두드립니다. 진리가 너무 소중하고 SOSTV 선교센터에 진리가 있기에 간절히 호소합니다. 돈은 징역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만큼 있습니다. 그런 목적이 아닌 진정한 신앙인이 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너무도 귀한 책들을 많이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소책자를 보고 있는데 놀라운 말씀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소책자)의 말씀 안에서 친히 십자가에 달리셔서 저의 죄를 담당해 주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헛되게 살아왔고 죄의 노예가 되어 살아온 저를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살려 주셨고 이미 오래전에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저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SOSTV 선교센터를 알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남은 인생을 결코 헛되게 살지 않겠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구별된 삶을 살겠습니다.
SOSTV 에서 제가 의의 길로 갈 수 있도록 말씀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너무도 연약한 인생이기에 넘어질까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모든 것을 부탁드립니다. SOSTV 선교센터에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하시길 기도드립니다.
2015월 7월에 J O O 드림
진리탐구_“영적 이스라엘” 두 가지 증거 말씀 1
지금까지는 교회를 영적 이스라엘로 해석할 만한 근거의 말씀을 찾아 같이 연구하며 알아보았으나 이번 호에는 성경에 정확하고 확실하게 교회가 영적 이스라엘로 기록된 두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1. 첫 번째 말씀
성경은 이스라엘을 예루살렘으로 대표하여 말씀할 때가 있었고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을 대표 할 때도 있습니다. 마치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포도나무가 주님을 상징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징적 표현으로 서로 둘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를 모으시며”(시편 147:2)
그러나 그 중요도를 생각한다면 예루살렘 속의 이스라엘보다는 이스라엘 속의 예루살렘이 더욱 중요한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궁극적으로 머무르며 살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정한 특별한 절기인 성회에만 올라갈 수 있었으나 주님이 오신 뒤로 그 옛 언약은 전부 개혁됩니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브리서 9:9~10)
이제는 누구나 언제든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살 수 있는 시민권을 얻었습니다. 그 예루살렘에서 진정으로 거할 수 있는 자들이 바로 믿음으로 선택된 참 백성 이스라엘입니다.
영적 이스라엘과 연관 지어 교회와 그리스도인과 예루살렘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교회”란 단어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로 고백하고 따르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며 주님 안에서 서로 지어져 가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에베소서 2:20~22)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로 지어진 “영적 성전”이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준비되는 혼인 잔치의 신부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19:7~8)
신부가 어떻게 성전이 될까요? 그 해답은 계시록 21장에서 찾을 수가 있는데 요한계시록 21장 2절 말씀을 보면 “거룩한 성 = 새 예루살렘 = 신부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요한계시록 21:2)
요한계시록 19장의 어린양의 신부의 모습을 밝히 알려주시는데, 어린양의 신부라고 보여 주는 대상이 바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요한계시록 21:9~10)
이 신부의 모습을 21장에서 보여주는데 그 신부가 바로 하늘의 예루살렘성이라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을 모아서 정리하여 보겠습니다.
교회 = 그리스도인들의 무리 = 하나님의 성전 = 주님의 영적 신부 = 영적 예루살렘 = 영적 이스라엘
“교회”를 “영적 예루살렘”이며 나아가서 “영적 이스라엘”임을 말씀으로 명확히 찾아보았습니다. 다음 호에 두 번째 증거의 말씀으로 찾아보겠습니다.
기독교회사_교황 교회가 점령한 이후의 스코틀랜드
과거 기록들을 소실시키거나 거짓 꾸며내는 승자들의 파렴치함 때문에 켈틱(Celtic) 교회의 이야기가 참 모습이 아닌 거짓으로 꾸며진 얼굴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다. 1120년까지만 해도 이 켈틱 교회와 교황권 사이에는 그 간격이 현격히 벌어져 있었다. 교황권의 시녀 마거릿 왕비의 다른 아들인 알렉산더 왕과 새로이 세인트앤드류스 관구의 수장으로 임명된 캔터베리의 이드머(Eadmer) 사이에는 견해 차이가 매우 컸다. 그가 캔터베리의 두 수사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 그들은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사람들은 만일 이드머가 스코틀랜드 교회(켈틱교회)의 관습을 따른다면 그는 자신의 성품에 굴욕을 안기며 자신의 구원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Maclauchlan, Early Scottish Church, pp.395.
로마 교회는 1120년에 이르러 켈틱 쿨디 교회의 관습이 로마 교회의 관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어서 쿨디 교회를 따르는 주교의 영생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패트릭에게 했던 것처럼 스코틀랜드의 광야교회 영웅인 콜룸바를 로마 교회의 성인 명단에 등록하였다. 6세기와 7세기에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선교 사업이 가장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던 바로 그 지역들에서 후일에 복음적 종파들이 가장 크게 번성한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Newman, A Manual of Church History, vol. 1, p. 414.
켈틱 쿨디 교회의 지도자 콜룸바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품성과 행위의 변화는 여자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아이들에게 애정 어린 관심을 갖게 하고, 신자들로 성경을 사랑하게 하였고, 교회와 국가가 바른 관계를 형성하게 하였으며, 원기 왕성한 서양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선교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스코틀랜드에는 수없이 많은 씨앗이 매우 깊이 심어졌다. 그곳은 복음의 씨를 심기에 매우 비옥한 땅이었다. 이런 비옥함은 후에 교황권의 관습과 전통에 점령당해 그 성장이 묻혀버렸음에도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종교개혁의 바람이 이 지역으로 불어왔을 때, 왕권에 의해서 스코틀랜드에 형성되어 있던 카톨릭의 관습들이 크게 바뀌어 옛 모습으로 돌아갔다. 로마 교황권은 옛 쿨디 교회의 믿음과 그 단순한 체계를 근절할 수가 없었다. 특히 초대 기독교의 초기 거주지들과 후기의 피난처들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이미 종교개혁 이전에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에 개혁자들이 존재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로마 교회의 찬탈 행위에 대해 공개적으로 항의했던 마지막 나라인 스코틀랜드에도 그러한 개혁자들이 계속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그리 잘못된 결론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종교가 아직 멸절되지 않았다고 믿고 있는 이상, 그 어떤 박해도 그 종교를 멸절시킬 수는 없다.”
옛적 콜룸바의 신앙은 영속하는 사랑과 애정으로 옷 입혀진 채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전수되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그들의 지위를 찬탈한 로마 종교로부터 당한 고난들은 마치 표현이 감정을 더 깊게 만들듯이 그들의 신앙을 더 깊게 만들어 줄 뿐이었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천주교회)의 침입을 강력히 저지하였다. 교황권이 스코틀랜드에서 지상권을 행사하고 있던 시기에도 왈덴시안 공동체의 일원이었던 사람들과 위클리프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종교적 폭정에 대한 최종적이고도 항구적인 반대(Protest)는 종교개혁의 물결이 이 땅을 가장 중요한 동맹 중의 하나로 확보하였을 때 일어났다. 스코틀랜드가 종교개혁을 위하여 세상을 두 번 구원했다고 하는 말이 역사에 관하여 그리 불공평한 말은 아닐 것이다. 콜룸바의 놀라운 조직력과 경건한 삶을 통해 주어진 활력에 크게 힘입어서 마침내 광야교회가 승리를 거두었다.
Healing Story_대추와 생강
어느새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가 지나가고 아침이 되면 조금 쌀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름이불을 정리하고 도톰한 이불을 꺼내어 덮었는데, 포근하고 따뜻한 게 참 좋습니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수시로 마시던 얼음물 대신 따뜻한 차 한 잔이 생각납니다. 환절기 감기를 예방하기 위해서 말려두었던 대추와 생강을 꺼내어 대추생강차를 준비해야겠습니다.
대추를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밝고 긍정적인 사람입니다. 나보다 남을 더 생각해 주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은 언제나 주위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줍니다. 대추는 독성이 전혀 없고 어디에나 잘 어울려서 우리 몸에 기운을 더해준다고 합니다. 주성분이 탄수화물로 열량이 높아 칼로리 소모가 많은 사람에게 좋으며 섬유소도 풍부합니다. 대추의 섬유소는 다른 과일의 섬유소보다 부드러워 위장을 자극하지 않습니다. 비타민 C가 풍부하여 노화를 막고 뇌출혈, 고혈압, 성인병 등을 예방할 수 있는 효능이 있습니다. Ca등의 무기질, 루틴과 사포닌 및 알칼로이드 성분이 풍부하여 순환기 계통에도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효능
1. 수족냉증 치료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혈액순환을 돕습니다.
2. 알레르기 비염 완화
말린 대추를 그냥 먹거나 달여서 꾸준히 복용하면 코의 점막을 튼튼하게 만들어 주므로 비염 예방 및 치료에 좋다고 합니다.
3. 스트레스 감소
대추에는 진정작용이 있어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좋은 효능이 있습니다. 스트레스로 인해서 불안, 우울, 불면증이 있으신 분들에게 도움이 됩니다.
4. 이뇨작용
신장 기능을 개선해 주어서 이뇨작용을 도우며 몸속에 노폐물을 배출시켜 줍니다.
5. 감기예방 및 치료
비타민 C가 사과보다 훨씬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 면역력을 향상시켜 주고, 여러 가지 바이러스 질환으로부터 지켜주는 효능이 있습니다.
6. 항산화 작용
‘대추를 보고도 먹지 않으면 쉽게 늙는다.’는 말이 있듯이 대추는 노화방지에 효과가 좋습니다. 풍부한 비타민C, 칼슘, 페놀 성분, 베타카로틴 성분이 사과나 복숭아의 7배 정도로 많아서 활성산소의 독소로부터 피부와 세포의 노화를 방지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7. 갱년기 여성
여성들 갱년기에 좋으며 생리불순, 빈혈, 여성 질환에도 도움이 됩니다.
8. 과민성대장 증후군을 개선하는 데 좋습니다.
우리나라 성인 중 10~15% 정도는 과민성 대장증후군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추에는 플라보노이드 성분과 미네랄이 함유되어 있어서 장 속에 있는 독을 제거하고 가스가 발생하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에 과민성 대장증후군을 개선하는 데 좋습니다.
생강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12제자처럼 각기 다른 향과 맛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맛보아 알게 되면 톡 쏘고 매운맛을 내려놓고 상대방을 먼저 섬기고 사랑하는 생강 같은 사람이 됩니다. 생강은 자기만의 독특한 향과 매운맛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음식들을 만나면 과감히 자기의 특색을 죽이고 그 음식과 화합하여 새로운 맛과 향을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율곡 선생은 "화합할 줄 알며 자기 색을 잃지 않는 생강이 되어라"고 말하기도 했답니다.
* 효능
마늘에 알리신 있다면 생강에는 진저롤(Zingerol)과 쇼가올(shogaol)이 있습니다.
진저롤과 쇼가올은 생강 특유의 매운 향과 맛을 내는 성분으로 진저롤이 조리 중에 진저론(zingerone)이라는 성분이 되는데 이때 달콤한 향으로 변하고 덜 맵게 됩니다. 이 두 성분은 유전자가 활성산소에 의해 손상을 입기 전에 활성산소를 제거해 주므로 항산화 효과와 항암효과를 나타냅니다.
1. 감기 예방과 치료
혈액순환을 촉진시켜 몸을 따뜻하게 하며 백혈구 수를 늘려 면역력을 높여줍니다.
2. 소화흡수 능력 향상
생강에 있는 디아스타아제라는 성분과 단백질 분해효소가 소화액 분비와 장운동을 촉진하여 소화 작용을 향상시키며, 구토를 억제하는 작용을 나타냅니다.
3. 강력한 살균 효과
진저롤과 쇼가올은 콜레라균이나 장티푸스균을 비롯한 각종 병원성 균에 대해 강력한 살균작용을 합니다.
4. 혈액순환과 면역력 향상
체온이 1℃ 떨어질 때마다 면역력이 30% 이상 떨어진다고 합니다. 생강을 섭취하면 혈관이 확장되면서 혈액순환이 원활해지고 체온을 따뜻하게 해주기 때문에 면역력이 떨어지는 것을 예방해 줍니다.
5. 혈관질환 예방과 개선
혈액의 응집을 억제하여 혈관 내의 혈전을 막아주고, 콜레스테롤 수치의 상승을 억제해 줍니다. 따라서 심근경색, 뇌경색, 동맥경화증, 고혈압과 같은 혈관성 질환을 예방 및 개선해 주며 혈관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데 효과적입니다. 또한 심근을 자극해 수축력을 높이지만 맥박을 천천히 떨어뜨려 혈압을 10~15mmHg 정도로 낮춰주므로 결과적으로 심장을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6. 여성 질환 개선
생강은 부신수질이라는 호르몬을 자극해 아드레날린의 분비를 촉진하고 혈관을 확장시켜 혈액순환을 도와 몸을 따뜻하게 해주므로 생리통과 냉대하 등 여성 질환에 도움이 됩니다.
대추생강차
재료 : 대추 15개, 생강 2톨, 물 5컵 (4인분 기준)
1. 대추는 깨끗이 씻고 군데군데 칼집을 내어 주며, 생강은 껍질을 벗겨 얇게 편으로 썰어줍니다.
2. 냄비에 물, 대추, 생강을 넣고 끓입니다.
3. 끓기 시작하면 중불에서 깊은 맛이 우러나도록 더 끓여줍니다.
4. 입맛에 따라 꿀을 타서 마십니다.
서로 다른 대추와 생강이 만나서 건강에 좋고 맛있는 음료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자아를 내려놓고 형제를 사랑하는 따뜻하고 향기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