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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은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라는 <화엄경>의 중요 명제이다.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 여럿 속에 하나가 있어 하나가 곧 일체요, 여럿이 곧 하나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비슷한 맥락의 말들이 아래와 같이 여럿이 있다. 조금씩 표현이 다르지만 의미는 비슷하다.
•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 화엄경
•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 법성게
• 일즉일체 다즉일(一卽一切 多卽一) ― 밥성게
•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 ― 신심명
1)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하나가 곧 여럿이고 여럿이 곧 하나라는 말아다. 하나가 곧 전체고, 전체가 곧 하나라는 것이다.
전체 속에 부분이 있지만 부분 속에도 전체가 들어 있다는 뜻이다. 제법은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서로 의지해 존재하는 중도연기(中道緣起)의 세계를 말하고 있다.
신라가 삼국통일 후 분열된 민심을 하나로 통합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이러한 어려운 국면을 불교를 통해 통합하기 위해 의상(義湘) 대사가 애쓴 흔적이 여기에도 나타난다.
즉, 여기서 일(一)을 부처(佛) 혹은 국왕(國王)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화엄의 논리로 삼국의 정신적 통일을 이루는 한편 신라왕의 왕권강화에 이념적 기반을 제공한 것이다.
그러니까 전체와 내가 둘이 아님은 오늘날의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구성원 전체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은 서로 분리할 수 없다. 분리하려야 분리할 수 없는 그런 관계에 놓여있다는 말이다.
그게 하나가 곧 전체고, 전체가 곧 하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하나 빠져나가면 결국 전체가 없어진다. 전체(全體)라고 하는 건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전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잘 돼야 전체가 잘 되고, 전체가 잘 돼야 나도 잘 되는 것이다. 화엄(華嚴)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연기법(緣起法)이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돼 있고, 연결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적인 인간관은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이다. 단순히 개인이 모여서 사회를 형성하는 것만은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사회(전체)를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나 이외의 백 명이 있는 것이 아니고 백 명 속에 내가 있는 것이며, 나에게 있어서 그 백사람이 모두 어떤 관계를 갖고 있다. 곧 나 자신이
백 명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은 비단 인간사회의 삶의 모습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현상으로까지 확장되기도 한다. 이 우주와 나, 이 주변화경 삼라만상과 내가 둘이 아니란 말이다.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리
깊이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과학의 소립자 세계에서도 이 사실이 그대로 성립되고 있다. 물리학의 발달로 인해 미세한 물질을 깊이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신비스러운 성질이 밝혀지고 있고, 특히 소립자는 끊임없이 변하며 유동적이라는 성질과 한 개의 소립자에는 다른 모든 소립자의 영향이 투사돼 있으며, 하나하나의 소립자의 존재는 다른 소립자와의 관계에서 성립된다는 성질이 밝혀지고 있다.
근대과학은 생명의 가장 작은 단위로서 세포를 생각했었다. 그러나 한 세포 속에 그것을 형성하는 보다 작은 단위가 있고, 그들은 나름대로의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마치 한 개의 소립자가 다수의 소립자에 의해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즉, 일즉다 다즉일로서 일심사상(一心思想)과 맥을 같이 한다.
사람의 세포 하나를 떼어내서 검사를 하면 그 사람의 DNA 전체를 다 읽어낼 수 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생활습관을 갖고 있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왔는지도 다 읽어낼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그 사람의 조상까지도 해석해 낼 수 있다. 세포 하나를 떼어내서 봤는데 일즉다(一卽多)라, 하나 속에 모든 것을 다 해석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러니 미운 사람 고운 사람이 어디 있으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내 부모요, 내 형제자매인 것을, 이게 화엄의 세계이다.
20세기 최고 역사학자의 한 사람인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는 <화엄경>을 읽고 탄복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다가올 21세기는 ‘화엄’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한국 수학계의 거장이자 오랫동안 카오스(chaos) 이론과 불교사상을 연구해온
김용운(金容雲, 1927~2020) 교수는 그의 저서 <카오스와 불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불교사상은 모든 현상에는 본질이 없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
하나가 곧 전체이며 전체가 곧 하나라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그리고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해가므로,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철학이다.
이는 20세기 이후의 과학이
절대성,
완전성,
확정성,
명백성을 부정하면서
상대성,
변화,
무아(無我)의 개념으로 이어지는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가령 카오스 이론의 특징 중 하나인 프랙털(fractal)은 전체 속의 어느 한 부분이
곧 전체임을 나타내는데,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과 정확히 일치한다.”
※프랙탈(fractal)---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비슷한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 되는 구조부분과 전체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는 자기 유사성 개념을 기하학적으로 푼 구조를 말한다. 프랙탈은 단순한 구조가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복잡하고 묘한 전체 구조를 만드는 것으로, 즉 ‘자기 유사성(self-similarity)’과 ‘순환성(recursiveness)’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자연계의 리아스식 해안선, 동물혈관 분포형태, 나뭇가지 모양, 창문에 성에가 자라는 모습, 산맥의 모습도 모두 프랙탈이며, 우주의 모든 것이 결국은 프랙탈 구조로 돼 있다.
그리고 카오스와 불교는 한결같이 연기(緣起)의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기계론적인 과학이 아니라 성장하고 사멸해가는 모든 생명현상에 나타나는 복잡한 과정을 과학의 눈으로 바라보려는 것이 카오스 이론이다. 북경에 있는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다음날 뉴욕에 폭풍을 몰고 올 수도 있다는 기상학자 로렌츠의 ‘나비효과’는 카오스 이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불교는 바로 이러한 ‘인연(因緣)’으로 세계를 설명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우리 인간사 자체가 우주의 한 부분이고 우주는 카오스이며, 하나가 전체요 전체가 곧 하나[일즉다 다즉일]라는 관점에서 우리네 개개 인간사 자체가 곧 카오스라고 할 수 있고, 이는 진즉부터 불교가 말해온 진리이다.
2)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이는 의상(義湘) 대사의 <법성게(法性偈)>에 나오는 말이다.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 여럿 속에 하나가 있다.
즉, 하나가 곧 여럿이고 여럿이 곧 하나라는 말이다. 그러니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과 맥을 같이 하는
말이다.
연기법(緣起法)의 근본원리는 낱낱의 이것과 저것은 그 자체로 존립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낱낱이 모두 온 우주만큼이나 큰 생명의 장(場)으로 살고 있으며, 우주는 모든 생명체의 수만큼 겹쳐진 생명의 우주인 것이다. 이를
화엄에서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고 한다.
화엄의 실상(實相)인 연기법을 표현하는 말 가운데 인드라(Indra) 그물망의 비유가 있다.
인드라신[제석천(帝釋天)]의 궁전을 덮고 있는 그물망을 인드라망(網)이라 한다.
그 인드라망 그물코마다 빛나는 보석이 박혀 있다. 그 그물코에 박힌 보석들에는 저마다
다른 모든 보석들이 반사되고 있다. 이와 같이 보석들은 서로가 서로를 모두 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낱낱의 무한 보석들이 서로 반사하고 있는 것을 비유해서
화엄에서는 중중무진세계(重重無盡世界)라 한다.
연기법의 근본원리는 존재 낱낱은 그 자체로 존립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관계의 그물망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의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은 원인이면서 동시에 결과로서 서로를 존립하게 한다는 말이다. 곧 원인인 나에 의해서 결과인 네가 있게 되지만 나의 원인도 너에
의해서 있게 된다. 결과인 나에게 원인은 네가 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과 결과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 만물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홀로 존립하는 것은 없고 상대와 더불어 상호의존관계를 맺으면서 자체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개별은 전체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전체는 개별을 떠나서는 전체로서의 존재성을 지닐 수 없는 것이 우주 만물의 존재원리이다.
모든 사물도 그러하고 중생의 삶도 이 도리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이러한 우주 만물의 상호의존관계의 이치를 법계연기(法界緣起)로 설명하고 있다. 개개의 중생들이 모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이치를 일중일체(一中一切)라고 한다면, 반대로 그 사회 구성원의 하나로서 ‘나’가 존재하는 것은 다중일(多中一)이 된다.
그래서 서로 배제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서로 원융화합하며 현상계를 존재케 하는 이러한 원리를 화엄에서 연기의 또 다른 표현으로서 상입상즉(相入相卽)의 원리라고도 한다. 모든 현상의 본질과 작용은 서로 융합해 있다는
뜻이다. 즉, 주관과 객관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나와 너, 인간과 자연, 개체와 전체가 일체라는 말이다.
3) 일즉일체 다즉일(一卽一切 多卽一)
이 말도 <밥성게>에 나오는 말로서, 하나가 곧 전체요, 여럿이 곧 하나란 말이다. 이것은 전체 속에 부분이 있지만 부분 속에도 전체가 들어 있다는 뜻이다. 역시 <화엄경>의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과 같은 맥락이다.
이것과 저것은 나눌 수 없는 하나의 장(場)에 함께 있다. 우주법계(宇宙法界)의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의 관계도 이와 같다. 낱낱이 우주법계를 이루는 원인이면서 동시에 우주법계의 모든 것이 원인이 돼 또한 낱낱이 존재한다. 일체만물이 연기실상(緣起實相)의 장에서 완전히 동일한 생명을 이루는 전체이며 부분이고, 부분이면서 전체인 것이다.
즉, ‘하나가 일체이고 여럿이 곧 하나’라는 말은 여럿과 하나의 관계성을, 상호융섭(相互融攝)됨을 말한다.
어찌 보면 하나와 일체는 각각의 형태와 모습을 지니고 있어 개별성을 띠고 있지만 그 개별성의 존재는
상호 다른 존재와 거리를 두고 대립돼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이 아닌 하나의 일관성으로 융섭돼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상호관계의 상즉(相卽)원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 그 자체가 바로 상즉의 법계(法界)라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도 개별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속에 하나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차별의 세계가 아니라 차별의 세계를 법안(法眼)으로 바라보면 무차별의 세계이고 절대평등의 실상세계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은 무명(無明)에 가려진 육안(肉眼)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상즉해 있는 융화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큰 병은 자신을 기준으로 삼는데 있다.
여기서 미움이 싹트고, 다툼이 일어나고, 편견이 생긴다.
나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원망이 극성을 부리고,
나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좌절이 찾아온다.
부처가 그토록 강조한 무아(無我)란 바로 자신을 기준 삼지 말라는 것이다.
나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이고, 사물을 ‘그대로’ 보는 것이다.” 법정 스님의 말씀이다.
오늘의 사회의 개별자는 아상(我相)에 사로잡혀 자기주장만 하고 자기욕심만 채우려는 집착으로 말미암아 투쟁과 갈등, 경쟁이 일어나게 된다. 인간과 사물, 자연과의 관계에는 환경파괴와 훼손으로 결국 서로가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따라서 서로 융섭해야 한다. 상호의존관계에 있는 진리의 세계이므로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는 것이며, 어느 것 하나 쓸모없는 것이 없다. 하나의 존재 모습은 우주 전체를 담고 있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진리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한 순간의 마음속에 일체가 있고 하나의 먼지 속에도 일체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큰 생명에서 나온 존재들이며, 남이란 또 다른 나이다.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위한(One for all, All for one) 삶이야말로 함께하는 공동체적 삶의 진수다.”
역시 법정스님의 말씀이다. 남이란 누구인가. 크게 보면 또 다른 나이다.
때문에 위 글에서 ‘즉(卽)’은 긍정의 시(是)이자, 양변을 여읜 중도(中道)이다.
4)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
이는 삼조 승찬(僧璨)대사의 <신심명(信心銘)>에 나오는 말이다.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다.
일즉(一卽)의 일(一)은 전체를 하나로 본 일(一)이고, 일체(一切)는 전체를 하나로 볼 때 그 하나를
구성하는 모든 낱낱 개체의 합을 의미한다.
즉, 일체(一切)는 전체 가운데 있는 모든 개체를 의미한다. 그러하니 일즉일체(一卽一切)는 전체로서의 하나는
그를 구성하는 모든 개체의 합이라고 하는 것이고, 일체즉일(一切卽一)은 모든 개체의 합은 전체로서의 하나이다. 즉, 개체의 합은 전체인 하나가 되고, 전체로서의 하나는 그 속의 개체의 합이라는 말이다.
이 법계(法界)가 일즉(一卽)의 일(一)이라면, 이 법계에 존재하는 일체중생이 일체(一切)가 되니,
‘일즉일체(一卽一切)’라는 어구가 성립될 수 있고, 모든 중생의 합이 곧 법계가 되는 것이므로
일체즉일(一切卽一)이 된다.
좀 쉬운 말로 하면, 일즉일체(一卽一切)란 하나에 통달하면 전체를 다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이고,
일체즉일(一切卽一)은 전체를 알면 그 속의 낱낱에 대한 것도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외롭다 하는 사람도 알고 보면 뭇 생명을 인연으로 하고 있고, 홀연히 떠나가는 죽음마저도
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뭇 사람들의 정을 안고 간다. 내 안에 세계를 담고 있고 인연마다 내가 새겨져 있다.
내 안에 세계가 있고 세계는 나를 감싸고 있다. 하나 가운데 전체를 머금고 있고 각각에 하나가 각인돼 있다.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인 것이다.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거나 서로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물물이 관계돼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일체가 깊은 인연관계로 존재한다. 이 세계는 인연관계가 융통하고 광대무변해 중중무진(重重無盡)하게
전개돼간다. 이러한 세계를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말들은 모두 화엄의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법계연기(法界緣起)의 취지를 나타낸 말이다.
중중무진의 법계연기란 이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독립된 실체를 지니고 있는 것은 없으며,
일체의 존재가 연결되고 서로 의지해 무한히 유동적이란 말이다.
이 우주의 삼라만상은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평등하게 서로 주고받는 상응작용을 하고 있다.
나의 행위는 가역(可逆)작용을 통해 나에게로 언젠가 되돌아온다. 이것이 불교의 화엄사상이다.
의상 대사는 “하나의 먼지가 온 우주를 머금어있고(一微塵中含十方),
한없는 긴 시간이 곧 한 생각(無量遠劫卽一念)이라고 했다.
작은 먼지 하나를 내 밥그릇의 밥알 하나라고 생각해보자. 밥알이 된 쌀 한 톨은 농부의 수고로움으로 영글었다. 그와 동시에 햇볕과 비와 적절한 거름과 땅의 힘 등이 또 작용을 했다. 내 앞의 이 밥이 이렇게 놓이기까지 물류를 도운 운전자와 중개를 한 상인들과 밥을 지은 주부의 노력이 모두 합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쌀 한 톨은 그 전의 볍씨 한 개가 낳은 결과이고, 그 볍씨는 우주일체와 사람들의 협동으로
형성됐고, 또 벼와 벼는 무한 상응 속에서 거슬러 올라간다. 이렇게 보면 내가 먹는 밥 한 알이 엄청나게 많은
다른 인연들과의 관계 속에 상입상즉(相入相卽)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밥 한 알이 무수한 상입상즉의 연관성을 지니고 있듯이, 사회생활에서 한 개인의 생각과 행동
역시 전체 사회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또 사회전체 분위기는 자연환경과도 연관을 맺는다.
서로 미워서 적대감으로 엉킨 사회는 맑고 고운 환경전을 만들지 못한다.
네 일이 곧 내 일이라고 여기는 일심(一心)의 상황이라야 한다. 사회에는 다양한 인격들이 있으나,
결국 그 다양한 인격들은 서로 직간접적으로 의존해서 통일된 그물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 개인주의는 전체주의만큼 망상이고 허상이다. 사회 속에 개인이 독립된 단위가 아니듯이, 개인은 전체를 위해 강압적으로 희생돼도
좋은 하찮은 부품이 아니다. 개인은 일심이다. 그 일심이 일체적인 일심을 돕는 일심이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