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산 연가
청량산(淸凉山 : 323미터)과 연이 닿은 지 십년이 훌쩍 넘었고 지금 신는 여섯 번째 등산화의 바닥에 구멍이 뚫어져 나달거려 새 것을 구입해 놓고 바꿔 신어야 할 택일을 저울질하고 있다. 처음엔 지척에 두고도 소 닭 보듯이 여겼던 존재였다. 그런데 갑자기 곤두박질한 건강 때문에 일방적으로 청량의 너른 품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댓거리 부근 서항 매립지 아파트에서 한국철강 담벼락을 끼고 돌아 월영마을 옆 산자락의 비탈길을 거쳐 밤밭고개 초입에서 시작되는 임도(林道)의 끝까지 오가기를 되풀이 했다.
청량산에서 임도나 갈마봉을 오가려는 작정은 어수룩한 결정이다. 산을 야무지게 즐기며 참다운 맛을 만끽하기 위한 선택의 백미이자 압권은 등산로와 만남이다. 숨겨진 진면목을 들추며 진정한 사랑을 나누고 싶다면 걸출한 자태의 등산로가 제격이다. 나도 처음엔 기초 체력을 기를 요량으로 임도나 갈마봉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했다. 그러다가 등산로에 첫발을 디딘 뒤로는 스스로 백기를 들고 투항하고 포로를 자청했다. 그렇게 날이 가고 해가 바뀔수록 새록새록 깊은 정이 쌓여가는 모양새가 찰떡궁합의 연인을 빼닮았다. 어쩌면 짝사랑의 열병처럼 지나치게 집착하여 무리가 따라도 맘을 접거나 이성적으로 응대하지 못해 중독자의 꼴로 비춰질지도 모르겠다. 환상의 등산길은 이렇다.
밤밭고개 언저리의 임도의 초입에서 가포 쪽으로 대략 600미터쯤 걷다보면 오른편에 육각정(六角亭)이 있다. 그 옆의 이정표에 ‘청량산 정상 3.6킬로미터’라는 내용과 함께 등산로 이정표가 있다. 이 길은 초입부터 정상을 지나 반대편의 산 아래 동네 부근까지 온통 나무숲으로 뒤덮여 한여름의 살인적인 햇볕도 걱정 없는 몽환의 경관이 펼쳐지는 수려한 노정이다.
육각정 옆으로 개설된 임도의 시멘트 배수로를 건너뛰면 곧바로 된비알의 솔숲으로 올라가는 등산로다. 만만치 않은 비탈을 치고 올라가다가 약약한 오르막을 터덜터덜 걸으며 숨을 돌렸는가 싶을 지음 몹시 가파른 계단 길과 맞닥뜨려 헉헉대다가 호흡이 엉켜 들숨과 날숨 고르기가 어려워 쩔쩔매게 마련이다. 이 구간은 지독하게 힘겨워 걸음을 멈추고 어정쩡한 자세로 숨을 고르는 경우가 흔하다. 심한 비탈을 어렵사리 벗어나 산기슭을 휘돌다가 언덕의 너럭바위를 딛고 올라 눈을 들면 자그마한 능선을 만난다. 능선을 따라 몇 발짝 앞으로 내딛으면 봉우리를 피해 갈 샛길이 왼쪽 숲으로 뚫려있고 곧바로 직진하면 오뚝한 작은 봉우리이다.
이 봉우리에 간단한 운동기구와 벤치가 있고 ‘청량산 정상 2.8킬로미터’라는 표지판이 있다. 따져보니 육각정에서 숲길 초입으로 들어서서 기를 쓰고 힘겹게 올라온 여기까지의 거리가 기껏해야 800미터인 셈이다. 숨을 고르고 나서 내리막을 지나 밋밋한 능선 길을 걷다가 꽤나 가파른 오르막과 드잡이를 하면서 끙끙대다 보면 언덕배기에 우뚝 솟은 송전용 철탑을 마주한다. 벤치에 앉아 굽어보는 마창대교, 마산만, 시가지와 무학산, 팔용산의 정경은 한 폭의 동양화 같다.
송전탑에서 정상까지는 콧노래를 부르며 산마루 능선을 따라가는 몽환의 노정으로 얼추 20분쯤이면 족하다. 숲이 울창해서 바로 산 아래 모습이 투영되는 꼴이 깨진 거울 조각에 비추는 파편 같아 조바심이 일기도 한다.
정상에는 운동기구 몇 가지가 구색을 맞춰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비탈에 자리 잡은 정자에서 굽어보면 마산 외만(外灣)과 진해 제황산 전망대, 부산과 거제를 잇는 거가대교가 저 멀리 아른거린다. 신마산 쪽에서 등정한 사람들의 목표는 정상이다. 정상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운동을 하다가 올라온 길을 되짚어 내려간다.
정상에서 유산삼거리나 덕동 쪽의 능선 길로 머리를 틀어 대략 1.5킬로미터 거리에 방공포대 터까지 걷는다면 금상첨화의 길이 된다. 특히 이 길은 인적이 드물어 혼자 터덜터덜 걷는 경우가 많으며 길바닥 거의가 낙엽이 두툼하게 깔려 있다. 그 길에서 색다른 맛과 멋을 한껏 즐기며 일상의 잡다한 일을 잊고 사유의 기쁨을 덤으로 누릴 수 있어 더욱 애착이 가는 구간이다.
계절 따라 그 맛과 멋이 사뭇 각별한 청량산의 등산로이다. 전체 노정이 거의 나무숲으로 뒤덮이고 길의 대부분이 산꼭대기 능선으로 이어지면서 낙엽이 양탄자 같이 깔려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봄이 되면 옛 등걸에서 움이 트고 묵은 가지에서 새순이 돋아나며 펼치는 연록의 향연과 생강나무 꽃, 벚꽃, 아카시아 꽃, 진달래와 철쭉을 비롯해 이팝나무 꽃이 발길을 잡는다. 아울러 짝짓기와 새끼치기 때문에 봄날 숲속의 새소리는 유별나게 소란하고 분주하다.
여름의 이 길은 녹음이 우거져 산야의 민낯이 드러나지 않아 답답하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날씨가 우중충한 날 으스스한 기운이 감돌아 외돌아진 곳을 지나치려면 소름이 돋으며 오싹하기도 하다. 여름의 등산길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는 몹시 곤혹스럽다. 그러나 자욱한 운무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운 숲속에서 나 홀로 등정은 신비한 선경의 세계를 경험하는 축복에 비견되리라. 한편, 이 계절엔 기껏해야 칡꽃이나 싸리 꽃이 대부분이고 가끔 가뭄에 콩 나듯이 산나리의 외로운 자태가 유독 눈길을 끈다.
들국화로 알려져 있는 구절초나 쑥부쟁이 꽃이 흐드러지며 단풍으로 만산홍엽을 이루는 장관은 가을의 전매특허이다. 하지만 청량산의 가을은 풍요롭지 않다. 왜냐하면 활엽수의 거개가 참나무로서 칙칙하게 물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옻나무가 많이 자생하며 구색을 맞춰 그런대로 위안을 받는다. 청량산은 단풍보다는 등산로 바닥에 낙엽 이 두툼하게 쌓여 조용히 혼자 거닐 때 독특한 감흥이 한결 멋스럽다.
겨울의 청량은 청아하고 호젓해 혼자 걷는 게 제격이다. 알싸한 칼바람은 언제 마주해도 정갈하다. 폐부를 말끔히 씻어주는 바람의 일깨움은 혼탁한 일상에서 비켜서서 나를 돌아볼 자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북녘처럼 눈이 많거나 혹독한 추위가 없어 내가 가장 즐기는 계절로서 부담 없는 등산을 위한 최상의 조건이다. 게다가 먹이가 부족해 사방으로 어정대는 고라니나 청솔모 등을 자주 접한다.
배산임수의 땅인 마산의 주산은 무학산으로 우백호로 청량산, 좌청룡으로 팔용산을 거느린 형국이다. 그런데 팔용산은 힘찬 근육이 불끈불끈 솟듯이 여기저기에 암반을 숱하게 드러낸 모양새가 젊은 남정네 냄새를 물씬 풍긴다. 이에 비해서 청량산은 상대적으로 암반이 적고 산꼭대기까지 나무숲이 뒤덮인 꼴이 젊은 여인네의 다소곳한 자태가 떠오르는 산이다. 한데, 조물주의 천려일실이련가. 이 산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다.
가벼운 야외활동 차림의 산행에도 기본 철칙이 하나있다. 등산길은 언제나 혼자를 고집한다. 여럿이 무리 지으려면 공생의 법칙을 조율하는 문제로 되레 성가시다. 그래도 예외가 있게 마련이었다. 여름철 낮 시간은 엄청 덥고 힘들다. 그 때문에 첫새벽에 다니기도 했었다. 그 무렵 서항 부근의 집에서 새벽 4시20분쯤 출발하여 등산로 초입에 이르면 사위가 깜깜한데다가 이따금 멧돼지 떼가 출몰해 손전등을 켜고도 두려워 몇몇이 무리지어 다녔었다. 하지만 그도 한 때 일뿐 지금은 예와 같이 외톨이로 수절하고 있다.
지난 정초 청량산에 인접한 월영마을 아파트로 이사해 더욱 지근으로 둥지를 옮겼다. 하기야 바닷가에 살 때나 지금을 막론하고 일주일에 대여섯 번 길을 나선다. 그런데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손주가 나를 닮으려 한다. 현재의 삶터로 이사 온 뒤부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주말이면 등산에 따라 나서 이미 스무 번째 청량산 등정을 했다. 제 할머니의 걱정이 대단하다. 훗날 손주가 전문 산악인의 길로 나서겠다고 박박 우기며 설쳐 대면 어찌 감당하려고 산행을 부추기느냐는 떫고 어이없는 성화를 못들은 척 귓등으로 흘리며 유유자적 내 길을 고집하고 있다.
마산사랑, 2014 마산문협 사화집, 마산문인협회, 2014년 11월 13일
(2014년 7월 19일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