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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축 우보만리 한옥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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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이야기 스크랩 조선시대의 궁궐과 역사
우보만리 추천 0 조회 187 12.05.01 07: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조선의 궁궐

- 궁궐의 구조

1. 경복궁의 역사

2. 창덕궁의 역사

3. 창경궁의 역사

4. 경운궁의 역사

5. 경희궁의 역사

 

 

- 조선의 궁궐

 

조선은 태조1년(1392)부터 순종 4년 (1910)까지 27대 518년 동안 지속된 왕조이다. 475년 동안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을 버리고 새로운 왕조의 수도와 궁궐을 건설한 곳은 한양, 지금의 서울이다. 이곳은 이미 삼국시대 초기에 백제의 도읍지였고 삼국의 치열한 쟁탈지였다. 통일신라 이후로는 한양군에 불과하였으나 고려시대에는 수도를 보좌하는 곳으로 특별히 남경으로 승격되었다. 또한 숙종대(1095-1105)와 공민왕(1351-1374)에 남경 천도 계획이 있었으나 실행되지 못하고 고려는 멸망하였다.

 

조선 건국과 함께 처음 지은 궁궐은 경복궁이었다. 이후 태종은 한양으로 재천도 하면서 이궁의 역할을 하게 될 창덕궁을 지었다. 9대 임금 성종은 주거공간을 보완하기 위해 창덕궁 옆에 창경궁을 짓게한다. 임진란으로 인해 궁궐이 화재로 모두 소실되고 광해군 때에 창덕궁과 창경궁이 중건되며 새로이 인경궁과 경덕궁(경희궁)이 창건되었으며, 고종 연간에 경복궁이 다시 중건되었다. 지금 서울에는 조선시대 궁궐이 다섯이 남아 있다. 이처럼 궁궐들이 번갈아 지어지고 없어지고 하면서 모두 다섯이 된 것이지 다섯 궁궐이 동시에쓰인 적은 없다.

 

어느 한 시점에서 동시에 쓰인 궁궐은 언제나 크게 보아 법궁과 이궁 둘이었다. 그 법궁과 이궁은 고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어느 궁궐이 법궁이 되고 또 다른 궁궐이 이궁이 되었다 하여도, 그러한 궁궐들이 때로는 전란으로 모두 불타 없어지고, 새로운 궁궐을 새로 짓는 과정에서 법궁과 이궁이 바뀌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조선 말기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의 숨가쁜 사건들을 거치면서 고종은 경운궁에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일제시기에 주인을 빼앗긴 궁궐은 왜곡과 파괴의 칼날을 피하지 못하고 미술품 전시장 등으로 용도 변경되거나 박람회장이나 동물원과 같은 구경거리로 전락한 채 유원지화 되고 말았다.

 

이렇게 수난과 고통을 감내했던 조선의 5대 궁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은 조선 왕조사의 명암을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 궁궐의 구조

 

현재 보는 궁궐은 빈공간들이 많아 마치 공원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조선시대에는 궁궐에 건물(전각)과 건물을 둘러쌓은 담과 문으로 시설물들이 빽빽하게 꽉차있었다. 우리가 보는 궁궐에 남아있는 건물들은 가장 많이 세워졌을  때의 약 10%정도도 남지 않았다고 보면 된다.

 

처음에 궁궐을 지을 때 원칙적인 기준으로 중국의 '오문삼 조'라는 방식을 참고 하였는데 오문삼조는 5개의 문이 있고 이 문에 따라 구역을 3개의 영역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비 교적 경복궁은 이 오문삼조의 형식에 맞게 건축되었지만 다 른 궁궐들은 그렇지 않다. 궁궐은 그 용도에 따라 공간을 내 전(內殿), 외전(外殿), 동궁(東宮), 주거공간, 궐내각사(闕內各司), 후원(後苑) 등으로 분류한다.

 


 
내전(內殿)

왕과 왕비의 공적?사적 활동공간으로, 위치와 기능면에서 궁궐의 중심이 되며, 크게 대전(大殿)과 중궁전(中宮殿)으로 분류된다. 대전은 왕이 기거 하는 곳으로 왕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며, 주요 인물을 만나는 곳이므로 궁궐의 가장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편전(便殿)은 왕의 생활공간 안에 만들어진 업무공간이지만 때로는 외전에 속하기도 한다. 중궁전은 왕비가 기거하는 공간으로 궁궐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다.

 

외전(外殿)

왕이 신하를 만나는 의식, 연회 그리고 사신접견 등 공식적 행사를 치르는 공간으로 가장 화려하고 권위가 있어 왕의 위엄을 드러내는 곳이다. 이곳의 중심은 "정전(正殿) 혹은 법전(法殿)"이라 부르는 건물로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 창경궁의 명정전, 경운궁(덕수궁)의 중화전 등이 여기에 속한다. 정전 건물 주변에는 회랑이라는 담이 둘러싸여 있고 그 둘러싸인 공간을 조정이라 부른다.

 

동궁(東宮)

세자를 지칭하는 말이면서 세자가 기거하는 공간을 말한다. 동궁(세자)은 다음 왕통을 이을 예비국왕으로 앞으로 떠 오를 태양과도 같으므로 동궁의 위치 또한 외전의 동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는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과 세자의 경호를 담당하는 부서가 함께 있다.

 

주거공간

외전과 내전 동궁주변에는 왕, 왕비, 세자 등 왕실사람들의 시중을 드는 내시, 궁녀, 군병들의 기거 공간이 자리를 잡고 있다.

 

후원(後苑)

궁궐의 북쪽에 조성되어 있는 왕실의 공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어서 금원이라고도 불렀다. 이곳에는 산언덕과 아름다운 정자 등 휴식공간으로 잘 가꾸어져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휴식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고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하고, 왕이 직접 군사훈련을 참관하기도 하였으며 내농포라고 하는 작은 논을 만들어 농사를 체험해 보기도 하였다.

 

궐내각사(闕內各司)

궁궐 안에 들어와 활동하는 여러 관청 관리들의 활동공간이다. 이곳에는 정치·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정규 관원들의 활동공간, 경비와 호위 등 군사관계업무를 맡는 군사기구, 왕실 시중과 궁궐의 시설관리를 맡는 관리기구 등이 있었는데 이를 통칭하여 “궐내각사”라 부른다. 여타 국가의 주요기관들은 주로 궁궐 정문 앞에 관청들이 위치한다. 광화문 남쪽 좌우에 의정부, 육조, 사헌부, 한성부 등이 있었는데 이러한 관서들은 궐외각사라 칭하기도 한다.

 

궁궐에서 볼거리들

 

 

부시 - 궁궐 건물 위를 보면 그물 같은 것이 쳐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을 ‘부시’라고 부른다. 전통 가옥의 처마는 새들이 둥지를 틀기 좋은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새들의 분비물로 인한 건물의 부식을 막고, 새를 잡아먹기 위해 뱀이 기둥을 타고 올라와 살생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 하기 위하여 부시를 설치했다고 한다.

차일고리 - 각 궁궐의 중심이 되는 근정전, 인정전, 명전전 등 법전의 기둥과 조정의 박석에는 둥근 쇠고리가 있다. 이 쇠고리는 중요 행사나 의례가 있어 관료들이 장시간 모여있을 때에 햇살이나 비를 가려줄 차일(천막)을 쳤는데, 이 고리가 바로 그런 차일을 치는 줄을 매던 고리이다.

 

- 법전 어귀에서는 다리가 셋이고 귀가 둘 달린 둥근 청동 솥을 보게 되는데, 이를 정이라 한다. 처음에는 흙을 구워 만들었으나 나중에는 청동으로 만들었고, 주로 고대 종교 의례나 국가의 큰 잔치 때 사용되었던 예식용 그릇 가운데 솥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는데, 중국의 옛 기록에 따르면 천자는 9개의 정, 제후는 7개의 정을 썼다는 기록이 있다. 이 구정(九鼎)은 왕권과 중국의 아홉 개의 주를 상징하며 또한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고 하늘의 복을 받기를 기원하는 상징물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역시 왕권의 상징물로 보여진다.

 

박석 - 조정은 법전에 들어서면 보이는 조회를 하는 넓은 뜰을 의미한다. 조정에는 화강암으로 된 큰 돌들이 깔려 있는데, 이렇게 얇고 넓적한 돌을 박석이라고 부른다. 박석은 크기가 일정치 않으며 표면도 울퉁불퉁하다. 궁궐에 이런 돌을 깔았던 첫 번째 이유는 왕이 행사에 참가시 건물안에서 밝은 뜰 위에 서있는 신하들을 보게 되는데, 땅에 반듯한 돌들이 깔려 있으면 눈이 부시므로 난반사를 일으켜 빛이 분산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당시의 관원들은 가죽신을 신었는데, 돼지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미끄러운 바닥에서는 그런 가죽신이 미끄러지기 마련이니, 5센티미터 정도 되는 얇은 박석을 울퉁불퉁하게 처리하여 임금님 앞에서 행여나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도록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정(朝廷)에 있는 박석은 약간 바깥 쪽을 향해 경사가 져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비가 올 경우 박석 옆으로 물이 빠지게 되어 배수시설을 따로 설치할 필요가 없었다.

 

 


굴뚝 - 우리나라의 전통가옥에는 그 규모나 격식에 걸맞는 굴뚝을 만든다. 특히 경복궁의 후원 아미산의 굴뚝은 정말 아름답다. 그리고 굴뚝이 있는 것은 온돌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리고 굴뚝위에는 작은집 연가가 있는데 이 연가는 연기속의 재를 걸러주는 기능을 한다고 한다.

드므 - 법전이 위치하고 있는 월대 위에 각 모서리에는 쇠솥처럼 생긴 것이 있다. 이것은 드므라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궁궐의 건물들은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화재 발생시 주로 대화재가 일어나므로 불을 끌수 있는 소방수를 갖다 놓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정도 물을 갖고는 화재를 진압 할 수 없다. 이것은 일종의 의식용이다.

불귀신은 자기 얼굴이 얼마나 흉측하고 무서운지 알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불귀신이 불장난을 치기 위해 법전으로 달려 오다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게 되는데, 평소에 자기 얼굴을 모르고 있던 불귀신이 자기 얼굴에 놀라 도망간다고 한다.

일월오악도 - 법전 안을 들여다 보면 임금님의 용상 뒤에 큰 그림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은 일월오악도, 일월오봉도, 일월오봉병(병풍)이라 부르는 것으로 왕권을 상징한다. 그림의 양쪽에 해와 달이 있고, 다섯 봉우리가 있으며, 소나무와 폭포, 그리고 푸른 물결이 그림을 구성하고 있다. 이 그림은 임금을 향한 백성들의 칭송과 나라 융성의 염원, 그리고 우주 질서에 대한 외경심이 나타나 있다.


잡상 - 큰 건물의 처마 마루에는 줄지어 앉아 진흙으로 만든 와제 토우를 말한다. 우리는 이를 잡상이라 부르는데 궁궐지붕위에서 잡귀를 쫓는 벽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잡상들의 모습은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 현장스님,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이다. 삼장법사는 가사장삼대신 머리에 갓을 쓰고 몸에는 갑옷을 걸쳤으며 눈은 부릅뜨고 다리를 벌리고 위풍당당하게 앉아있어 수행자의 모습이 아니라 오직 무사로서의 위엄을 갖추어 있고 손오공도 삿갓을 쓴 포졸의 모습이다. 이들은 주로 천지를 떠도는 잡신이나 귀신을 잡아 궁궐을 지키는 일종의 군사들인 셈이다.

 

잔디 - 궁궐을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잔디이나, 하지만 궁궐의 전통 조경에서는 잔디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궁궐에서 보이는 잔디들은 대부분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궁궐에 심어졌다. 잔디가 깔려있는 곳에 조선시대에는 건물들과 담이 빽빽하게 세워져 있었다고 보면 된다.

 

 

 

 

1. 경복궁의 역사

 

경복궁은 1392년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이성계에 의해 세워진(만들어진) 첫 궁궐이다. 조선왕조의 법궁(法宮)으로서 개국공신 정도전으로 하여금 <시경(詩經)> 주아편의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 만년에 큰 복(景福)을 누리리라’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궁궐의 이름을 경복(景福)이라 정하게 했다고 한다.

한때, 이방원 (태조의 5번째 아들 - 후에 태종)주도의 왕자의 난으로 조선 2대왕 정종(태조 2째 아들) 등극 및 정종의 개경환도로 잠시 경복궁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으나, 3대 태종의 한양 재환도와 4대 세종의 즉위를 기점으로 법궁으로 써 제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그런데, 3대 임금인 태종의 한양환도 때에 또 다른 궁궐인 창덕궁이 제2의 궁궐로 창건되어 궁궐이 2개로 늘어났으며, 그 후 9대 성종 조에 이르러 창경궁이 중건되니 궁궐의 수가 3개로 늘어나게 된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궁궐의 수가 늘어났으나 그 중에서도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명실상부한 「제1의 궁궐」로 통치자의 권위의 상징이자 국권의 중심부로 역사의 표면에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창덕궁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었고, 그 후 창덕궁, 창경궁은 복구되나 경복궁만은 273년간 재건되지 못한 채 빈 터로만 남아있다가 1865년(고종2)에 흥선대원군 주도로 중건에 착수, 1868년(고종5)에 다시 복원됨으로써 왕조의 법궁으로 써 면모를 되찾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비극의 시작을 알리는 1895년 8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왕비살해)이 일어나고 이듬해인 1896년(고종33)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이동, 1897년 경운궁(덕수궁) 에 기거하시니 주인 없는 집은 그 의미를 잃듯이 경복궁 역시 빛을 잃게 된다.

 

그 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궁궐은 크게 훼손되어 고종 중건 당시의 10%정도의 전각만이 남게 되는 비운을 겪으며 공원화 되는 위기를 극복하고 현재 장기복원 계획에 의해 본래 모습을 되찾는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경복궁은 사적117호로 종로구 세종로 1-56 번지에 위치, 규모는 연 면적 약 127,000평 (416,990㎡)에 이르며, 궁궐 내에 근정전, 경회루의 국보와 자경전, 아미산 굴뚝 등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광화문


경복궁의 정문(正門)이자, 국권(國權)이 드나드는 왕권의 상징성을 갖는 문이기도 하다. 창건초기에는 오문(午門)  이라 칭하다가 세종 조에 이르러 동서남북 4방위의 문들이 각각 이름이 붙여져 오문(남문을 뜻함)은 광화문으로 명명되는데 의미는『빛이 나라밖 사방을 덮고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光被四表化及萬方)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역사의 부침 속에서 이 광화문도 수난을 많이 당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경복궁 내 「조선총독부」신축으로 원래의 위치에서 철거당하여 건춘문(동쪽문) 북쪽으로 이전 되었다가 1968년에 현 위치로 자리잡게 되는데 본 위치에서 약15m 가량 뒤로 물러나게되고 문루(문의 상부)는 6.25동란에 소실되는 아픔도 간직하고 있으며, 3개의 홍예(아치)가 아름다움과 권위를 겸비한 조선궁궐의 정문이다.


흥례문

 


이 문은 본디 홍례문이라 했는데 고종 중건때 흥례문으로 바뀌었고 궁궐 내로 들어가는 두 번째 문이다.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의좌우공간은 궁궐을 지키는 군사들을 위한 관청 및 부속건물들이자리하고 있었으며, 기타 궁궐 내 작은 행사나 큰 행사의 준비가이루어졌던 공간이었다고 한다. 과거 일제에 의한 조선역사 말살과 왜곡의 희생지는 1차로 이 지역에서 단행되어 이곳에 「조선 총독부」건물이 지어졌다. 그런연후 궁궐의 중심부를 시야에서 차단하여 역사의 관념을 지워버리려 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오늘날 그 옛 모습으로 근간에 복원되어 중심축을 이루니 궁궐의 본래 모습이 조금씩 되살아 나고 있다. 간혹, 역사의식 없이 구 조선총독부 건물에 대한 미련을 가진 분이 계시다면 궁궐은 ‘건축’만을 감상하는 곳이기보다 "역사를 음미하는" 장소임을 생각해주시기를 바란다.


영제교


흥례문을 들어서 근정전으로 나아가기 전 또 하나의 통과례를 거치는 곳. 일반사회의 공간에서 지엄하신 공간으로의 이동은 무언가 마음속으로 생각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곳은 서에서 동으로 금천(禁川)이  흐르고 다리가 놓이는데 바로 영제교라 한다. 금천의 의미는 잡스러운 것이 함부로 근접하지 말라는것으로 해석되며 이는 마치 사찰을 방문할 때 중생의 세계와 부처의 세계를 경계짓는 상징물과 같다. 금천에 흐르는 물은 명당수라 칭하며 행여 사악한 것이 물줄기를 타고 접근할 새라 파수꾼의 역할을 하는 서수가 영제교를 중심으로 네 마리가 버티고 있다. 또한 영제교 위에도 네 마리의 서수가 있어 다리를 건너는사람의 마음가짐이나 언행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여러분도 이러한 상징물들의 의미를 헤아려보면서 조선조 궁궐을 드나들던관리들처럼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영제교를 건너 보신다면...


근정문, 근정전


궁궐(宮闕)은 나라를 다스리는 왕과 그 가족들이 거처하던 곳이며 그 외 나라를 다스리는 곳, 즉 통치를 하는 공적인 공간이다. 근정전은 이 공적인 공간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국가적 큰 행사로, 조하(朝賀)라고 해서 군신간에 연초 하례가 있고 조회(朝會), 즉위식(卽位式), 책봉례(冊封禮), 고급관리임용식, 사신영접(중국) 등 국가의 대사가 행하여졌다. 중심건물인 근정전은 궁궐 내 가장 높은 건물로 상, 하 월대와 돌난간을 두루고 난간의 모퉁이에는 12지신상 및 방위신상의 서수를 조각하여 위용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표현해 놓았다. 그 외에 답도, 드므, 정, 품계석, 박석, 근정전내 어좌, 보개, 일월오봉병 등 보고느끼고 생각할 것이 많은 조선조의 조정이 있는 곳이다.


사정전


근정전이 큰 행사의 공간이라면 사정전 권역은 구체적 통치행위가이루어진 실질적 업무공간이다. 이곳에는 두 개의 부속건물도자리하는데 동쪽에는 만춘전, 서쪽에는 천추전이 있으며 두 부속건물은 아궁이가 있어 난방이 가능하나 중심건물 사정전은 마루로 되어 있어 계절에 따라 용도를 달리하였나 보다. 사정전은 생각 思, 정치할 政, 곧 만백성을 생각해 가면서 어진 정치를 행하여 달라는 염원을 담아내고 있다. 조선의 통치이념인 유교적 도덕률을 엿볼 수 있는데 근정전도 근면한 마음으로 정치를 행해 달라는 의미와 연관된다. 조선의 군주는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폭군이 아니라 따뜻한 어버이이기를 바랬다.


수정전, 궐내각사


현재 수정전은 고종 때 중수한 것으로 고종의 집무실(편전), 개혁 기구인 군국기무처, 내각청사, 일제의 물산공진회 때는 전시관으로 1960년대에는 민속관, 전시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조선 전기로 올라가면 역사적 유래가 의미심장한 곳이다. 세종연간에 집현전이있던 곳. 한글창제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이며 당시엘리트 집단의 근무처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 일대를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궁궐 내 관청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를 궐내각사라고 한다. 지금은 그 건물들의 자취를 느낄 수 없으므로 궁궐기능이 왜곡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데 현재 잔디와 나무로 단장되어 있는 공간이 과거엔 관청으로 꽉 들어차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궁궐은 잔디와 나무가 아무 곳에나 있지 않았으며, 공원 놀이마당 정원 같은 곳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유념하길 바란다.


경회루


경복궁을 찾는 모든 관람객이 최고로 여기는 장소 중 하나이다. 웅장하고, 늠름한 자태의 경회루를 바라보면 조선건축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만다. 현재도 그러하거니와 과거에는 더욱더 경외의대상이었다. 바로 앞 궐내각사에 근무하던 관리들도 높은 담장으로 막혀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던 왕실전용 연회의 공간이자 사신 접대의 장소인 경회루. 1, 2층 기둥의 재료와 그 모양새, 천원지방(天圓地方)과 주역원리(周易原理)의 동양사상을 표현한 건축술, 또 인공섬 세 개를 만들어 봉래, 방장, 영주라는 전설의 삼신산을 상징화한 의미있는 구도, 동양 제일의 누마루 집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건축미를 자랑한다. 또한, 실용성을 도입한 경회루 3개 다리의 배치, 지붕 잡상의 궁궐 내 최다 배열 등 어느 하나 소홀히 보아 넘길 수 없는 곳이 이곳이다.

 <국보 제224호로 지정>

 

 

 

 

2. 창덕궁의 역사

 

태조 3년 한양 천도가 있은 후, 정종은 그 원년 3월 개경으로 환도하였고 다시 태종이 즉위하여 재차 서울로 천도하게 되었다. 창덕궁은 태종이 재천도하면서 창건된 궁이다.  태종이 말하되 “개성은 왕씨의 구도이므로 거처할 수 없는 곳인데 지금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은 태조시조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한성은 태조상왕의 창건지이며 종묘와 사직이 있다. 이곳에 거처하지 않는 것은 뜻을 잇는 바 효(孝)가 못되니 근년 겨울에 내가 옮아가 거처할 것이니 궁실을 짓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태종 4년에 시작한 창덕궁 공사를 만 1년만에 완공하고 이름을 “창덕궁”이라 하였다. 태종 11년에 이르러서는 진선문석교(금천교)를 시축하고 태종 12년에는 돈화문을 건립함으로써, 창덕궁은 완전한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로부터 임진왜란까지 약 180여년간은 별로 큰 재난이나 큰 건물의 신축은 없었고 다만 인정전 후원 담장 증축과 수문당과 대조전의 중수 등이 있었으며 임진왜란 후 폐허로 있다가 광해군 때 재건을 시작하여 광해군 5년경 완전히 재건하였다. 그후 인조반정 때 큰 화재가 발생하여 인정전만 남는 수난을 당했으나 그후 다시 여러 전각들을 재건하여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때 새로 지어진 건물은 대조전, 선정전, 희정당, 정묵당, 집상당, 보경당, 옥화당, 태와당 등이다.

 

1863년 철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함에 따라 고종은 인정전에서 즉위하였다. 그후 대원군에 의해 왕이 경복궁으로 이어한 뒤로는 창덕궁에 별로 수리나 영건이 없다가 고종 10년 겨울 경복궁 자경전의 화재로 인해 왕은 다시 창덕궁으로 어어하게 되었으며, 그후 10년간 이궁에 거처하면서 고종13~14년에 걸쳐 일대 수리를 하여 궁궐의 면모를 되찾았다. 그러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치르고 난 왕은 22년 봄 다시 경복궁으로 이어하였다. 그후 창덕궁은 왕이 잠시 들르는 일이 있었을 뿐 이렇다할 변천 없이 20여년을 지내다가 융희 원년 10월에 다시 순종 이하 왕실 일행을 맞이하여 황궁으로서의 출발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일제의 침략 세력이 궁중을 장악하고 있었을 때이므로 황궁으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광무 11년 8월 경운궁에서 즉위한 순종은 그해 10월에 창덕궁의 수리를 명하고 11월에 창덕궁으로 이어하였지만 궁중은 일제 침략자들이 무상 출입하는 장소가 되었다. 인정전, 의정당, 주합루 등 건물은 수시로 이토 히로부미 이하 저들의 접견 향응에 제공되고 후원에는 학생들의 운동회가 열리기도 하니 전일 궁중의 위엄은 다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융희 4년 8월에는 매국노 이완용 등이 총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지시에 따라 우리나라를 일본에 합병하기로 정한 다음 이 창덕궁에서 마지막 어전 회의를 열고 황제를 핍박하여 한국의 통치권을 일본 황제에게 양여한다는 조서에 옥새를 빼앗아 누르니 오백년 왕조의 창덕궁은 순종이 “창덕궁 전하"라는 칭호로 여생을 보내는 비운의 궁이 되고 말았다.


돈화문


돈화문
창건된 것은 태종 12년(1412)이며, 2층 문루에는 큰 종을 걸고 시각을 알리거나 비상시 위급을 알리는 용도로 썼다고 전한다. 그 뒤 임진왜란 때에 불탄 것을 선조 40년(1607)에 중건하여 광해군 원년에 완공되고 이때의 건물 모습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의 대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보물383호).

정면 5칸에 측면 2칸의 2층 우진각 지붕의 다포양식이다. 궁궐의 대문 가운데 정면이 5칸인 것은 돈화문이 유일한 것이나 좌우쪽 협칸은 벽으로 막았으므로 실질적으로는 3칸 대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황제가 아닌 군주는 대문을 3칸으로 해야 하는 중국과의 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 곧 3칸 대문으로 만들어 중국의 사신을 의식하면서도 외관은 크고 장중하게 만들려는 의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회화나무, 느티나무


돈화문을 들어서서 왼편으로 안내판 뒷편 일대에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나무들이 서너그루 있다. 가시가 없고 크기도 큰 이 나무들은 괴목, 회화나무 또는 홰나무라 한다. 
돈화문을 지나면, 느티나무가 자리잡고 있다. 느티나무는 특히 우리나라, 우리민족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 나무이다. 우리나라의 마을에는 대개 큰 정자나무가 있었으니 이때 가장 뛰어난 기능을 발휘한 것이 느티나무였다. 느티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군림하기도 했고 동네 사람들의 휴식처로 때로는 서당의 선생이 강학하는 민족의 애환이 모인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입구에서 만난 이 나무가 다른 어떤 나무보다 정답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는 한자로 쓰면 모두 “괴(槐)”가 된다. 괴는 주나라 이래 궁내에 심는 나무의 대표적 수종이다. 주례에 보면 주나라 시대에는 궁의 고문(궁성의 가장 바깥누문을 말함)과 응문(궁중의 정문)사이에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를 심어서 이 나무 밑에 삼공(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아 오는 이를 맞이하였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이 제도에 따라 궁궐 입구에 괴수를 심었다.

 

원래 경복궁의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에도 느티나무와 회화나무가 심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건물의 건설 당시 사라져 버렸다. 물론 경희궁터와 경운궁에도 느티나무가 있었다. 현재 신문로 시립박물관 동쪽 주변이나 정동일대에 군데 군데 보이는 거목들이 바로 궁궐에 속해 있던 느티나무들이다. 궁안에 심는 나무 하나에도 돌 하나에도 의미와 철학을 담는 우리 조상들의 대단함에 또한번 놀란다. 창덕궁 안 다른 곳에서도 가끔 눈에 띄는데, 나무에도 뜻을 심은 그 뜻을 헤아릴 수 있으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금천교


돈화문을 들어서면 길은 메마른 느낌의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다. 원래는 박석이 깔려있던 길이라 한다. 그리고 가운데 부분은 어도로 그 길은 돈화문에서 북쪽으로 진행되다가 금호문이 있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여 창덕궁 내부로 향하게 되어있다. 흘러내리는 산자락에 맞춰 자연스럽게 건물을 배치하다 보니 그렇게 축이 꺾이게 된 것이다. 그렇게 꺾인 길앞에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개울이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그 개울을 금천이라 하는데 궁궐의 안팎을 구별하는 의미와 배산임수의 뜻을 살리기 위한 명당수의 의미가 있다. 옛날에는 당연히 맑은 물이 흘렀을 금천에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는다.

금천과 어도가 만나는 지점에는 다리가 놓인다. 이 다리를 일반적으로 “금천교”라 하는데 이것은 태종 11년(1411) 창덕궁을 처음 지을 당시의 것으로 창덕궁과 다른 궁궐을 통틀어 가장 나이가 많은 건축물이다. 다른 것들은 임진왜란이나 혹은 일제시대 때 불타고 헐렸으나 금천교는 60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아직 끄떡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금천교는 돌다리치고는 상당히 넓은 다리다. 전체가 세 구획으로 이루어진 삼도인데, 가운데의 어도가 상당히 넓고 좌우에 돌난간을 세웠는데 난간 네 귀퉁이에 동물 석상이 감시를 하고 있다. 네마리 짐승이 제각각 다른 몸짓에 다른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 재미있다. 다리 밑의 물길에는 홍예를 틀었는데 두 홍예 사이 역삼각형이 이루어진 부분에는 도깨비 얼굴이 돋을 새김으로 새겨져 있고 그 앞뒤 도깨비 얼굴 앞에는 짐승들이 앉아 있다. 남쪽에 있는 것은 얼핏 보면 해치같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몸에 털이 아니라 비늘이 덮여있고, 뿔도 두 갈래로 갈라져 있는 것을 보면 해태는 아니다. 혹 백택(白澤)이라고 하는 또 다른 상상의 짐승이 아닐까 추측된다. 북쪽에 있는 것은 몸통은 거북이 같으나 얼굴을 보면 사람 얼굴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것이 무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거북인 아니다. 거북이 몸통에 용의 얼굴을 하고 북쪽을 지키는 상서로운 짐승을 현무라 하니 이것도 현무라고 해야 할까. 현무는 청룡, 백호, 주작과 함께 넷이 짝을 이루어야 하나 여기는 둘뿐이니 현무라고 하기도 어렵다.


진선문


금천교를 건너면 진선문이 있다. 일제시기 언젠가 없어진 것을 지금 완공해 제자리를 잡은 듯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금천교와 진선문은 엇갈려 있다. 옛사진을 보면 금천교에서 눈을 감고 곧장 걸으면 바로 진선문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축이 똑바르지 않아 보인다.

진선문에는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이 와서 치면 왕이 듣고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주마고 하는 큰북이 달려 있었는데, 태종대에 처음 설치하였다가 중간에 유명무실해진 것을 영조대에 다시 설치하였다 한다. 이 북을 “신문고" 혹은 “등문고"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이 궁궐 문으로 들어가서 북을 쳤다고는 쉽게 생각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상징적인 의미일 것이다.


선원전


진선문 북쪽으로 가면 벽돌건물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전통 건축 기법이 아니다. 이곳은 일제시대 때 일제가 창고나 또는 검도장으로 쓰던 곳이라 한다. 그 건물 북쪽에는 제대로 된 우리 건물이 있다. 주변의 부속건물들은 모두 잃어버린채 홀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어딘지 범접할 수 없는 격조가 있다. 안내판에는 구선원전으로 되어 있다. “종묘"가 역대 왕과 왕비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일년에 다섯 차례 제사를 모시는 국가의 사당이라면 선원전은 태조와 현왕의 4대조의 초상화-어진을 모셔놓고 초하루, 보름, 생신이나 기일 등 수시 로 왕이 직접 가거나 혹은 대리인을 보내어 차례를 모시는 왕실의 사당이다.

종묘가 국가의 정신적 구심점이자 서울의 대표적 상징으로 높이 모심을 받았다면 선원전은 왕실의 정신적 지주로서 궁궐에서 가장 신성한 곳으로 인정받았다. 왕이 궁궐을 옮겨갈 떄는 반드시 선원전의 어진부터 챙겨 받들어 모시고 갔다.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고 궁궐을 잡아먹은 일제로서는 그런 선원전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1927년 총독부에서는 창덕궁 후원 서북편에 있던 대보단 자리에 새로 선원전을 짓고 어진들을 옮겼다. 이른바 신선원전이요 원래의 선원전은 빈 건물만 남아 구 선원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지금도 그 구선원전은 저렇게 신주없는 사당의 썰렁함에 젖어있다.


현재는 선원전만이 남아 있으나 건물의 네모퉁이에는 “진설청”과 “내재당”의 부속채가 있었고 동남쪽에는 국왕의 재실인 10칸의 양지당이 있었다. 남쪽 행각에는 연경문이 있고 서쪽에는 승안문과 지난날의 일을 되새긴다는 의미의 건물명인 억석루가 연속되어 있다. 행각 남쪽엔 영의당 선원전 담장 밖 북서쪽에는 숙경재가 있고 동쪽문은 만안문 서쪽문은 만녕문 북쪽에는 경숙문과 영휘문이라 하여 조상을 공경함으로써 영원히 안녕을 누리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건물은 정면 9칸 측면 4칸의 이익공 양식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세벌대의 장대석 기단위에 네모 기둥을 빠짐없이 세우고 내부는 전체를 통칸으로 하여 우물마루로 깔았다. 기단의 앞면과 뒷면엔 3, 5, 7칸 부분에 단순한 장대석으로 계단을 설치하였다. 실제의 출입구는 정면 가운데 1개소임에도 불구하고 앞뒷면으로 6개소에 설치한 계단은 조상의 혼백과 교통하려는 의미가 내포된 것이다.


궐내각사
 

동궐도에서 보듯이 그 당시에는 선원전 앞 넓은 마당에 이십여 채의 건물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한다. 선원전 바로 앞에는 제물을 준비하여 놓은 진설청과 제관이 머무는 재실이 있었고 그 동쪽으로 와서 선원전에 갈 때 머무는 “양지당”이라는 건물과 그 부속 건물들이 있었다. 그 남쪽에는 내의원, 내의원 남쪽으로 홍문관이, 홍문관 동편에는 정청이 있었다. 약방으로 불리기도 하는 “내의원”은 왕과 왕실의 진료를 담당하는 기구이므로 당연히 궁궐 안에 있어야 했다. “홍문관”은 궁궐에 보관하고 있는 서적을 관리하면서 학문과 글짓는 일을 연마하여 왕에게 자문을 하는 일을 담당하는 관서였으며, 정청이란 인사업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홍문관원들은 자동적으로 왕과 함께 경전과 역사책을 읽고 토론하는 경연에 참여하였으며, 또 왕의 명의로 글을 짓는 지제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인사를 담당하던 관서는 이조와 병조로서 역시 본청은 궁궐 밖에 있었지만 인사업무는 담당관원들이 궁궐안 정청에 들어와 처리하였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인사권은 왕에게 있었고 따라서 왕의 의사를 묻고 이를 반영하는 인사업무를 원활히 처리하기 위해서는 정청을 왕이 계신 곳 가까이에 마련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왕을 가까이서 모실 필요때문에 궁궐 안에 들어와 활동하는 관원들의 관서를 통틀어 “궐내각사”라 한다. 일제는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창덕궁 역시 철저히 파괴하였다. 신선원전은 창덕궁의 내의원과 홍문관등을 흔적도 없이 뭉개버리고 들어선 건물이다.


 


3. 창경궁의 역사

 

 

창경궁(昌慶宮)은 성종이 당시의 세 대비, 곧 세조 비 정희왕후 윤씨, 덕종 비 소혜왕후 한씨, 예종 비 안순왕후 한씨를 위해,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머물렀던 수강궁 자리에 1483~1484년에 걸쳐 세운 궁궐이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동시에 독자적으로도 궁궐로서의 완결성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 자체로도 궁궐로서 필요한 공간 구조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에서 법전인 명정전까지는 그 규모나 격식 면에서 창덕궁보다 격이  낮게 조성되었음이 눈에 띈다.

이것은 그 거리가  짧고 중간의 문도 생략되어 있으며, 축도 남향(南向) 이 아닌 동향(東鄕)을 하고 있는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외전과 궐내각사는 빈약한데  반하여 내전과 생활 주거 공간은 상대적으로 발달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창경궁이 왕의 정치와 행정, 제의(祭儀) 등 공식성이 강한 활동을 위한 공간은 미약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창경궁은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 상호보완적 역할을 하였으며 그래서 창덕궁과 더불어 동궐로 불리기도 하였다. 창경궁은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불탄 이후 광해군에 의해 중건되었으나, 인조반정 이후 일어났던 이괄의 난으로 다시 상당히 망가졌다. 이렇게 되자 서궐로 지어졌던 인경궁의 건물을 헐어다 옮겨 짓는 방식으로 궁궐을 보수했다. 1633년 7월 인조는 창덕궁에서 창경궁으로 이어했다. 순조 연간의 화재로 다시 크게 훼손된 이후 수리를 거친 창경궁은, 일제시대 창경원으로 격하되면서 박물관이 들어서고 담이 헐리면서 내전 건물의 바닥은 모두 마루로 바뀌어 전시 공간으로 활용됐으며, 남쪽에 동물원과 북쪽에 식물원 등이 설치되어 일반인에게 놀이터로서 개방되었다.

해방 후에도 산업화로 팽창되는 서울의 부족한 휴식 공간을 채워주기 위해  창경궁의 희생을 강요했고, 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창경궁’이라는 제 이름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찾은 것은 이름 뿐, 빼곡이 건물이 들어차 있던 제 모습은 더 이상 찾을 길이 없다.
현재의 창경궁은 수난을 겪고 최근 약간 복원된 모습이다. 견뎌낸 세월과 고난만큼 왕에서 이름 없는 궁녀들에 이르기까지 그 속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창경궁은, 사람 사는 집인 동시에 국가를 경영하는 최고의 관청인 궁궐로서 역사를 말해주는 살아있는 박물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홍화문


창경궁의 정문은 홍화문이다. 남쪽으로 관리들이 드나드는 선인문, 북쪽으로는 월근문과 성균관에 넘나드는 집춘문까지 많은 문을 거느린 창경궁의 얼굴로서, 명정문, 명정전과 함께 광해군 때인 1616년에 지어진 것이다. 정면 3간에 중층으로 되어 있는 이 문은 경복궁의 광화문이나 창덕궁의 돈화문보다는 소박한 규모이지만 날렵하고 어여쁜 맛이 있다. 홍화문과 인연이 많은 임금은 영조와 숙종이다. 홍화문 앞에서 영조는 백성들을 만나 정책에 대한 의견을 묻기도 하였고 쌀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옥천교


홍화문을 들어서면 작은 내가 보인다. 모든 궁궐에 이러한 내가 있는데  이를 금천(禁川)이라 부른다. 내는 안과 밖을 가르고 부정함을 씻어낸다. 금천 위에 자리잡은 작지만 야무진 돌다리가 옥천교이다. 다리 양옆의 귀면과 네 난간에는 돌짐승 조각이 빈틈없이 사위를 지켜 행여 잡인과 잡귀가범접할까 눈을 부릅뜬다. 금천은 이외에도 명당수로서의 의미, 삿된 욕심을 씻어내 맑은 마음으로 정사에 임한다는 의미, 궁궐에 필요한 물을 얻고 내보내는 실용적인 의미를 품고있다.


명정전


명정전(明政殿)은 왕의 존엄을 나타내고 각종 의식을 치르는, 궁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법전(法殿)이다. 다른 궁궐에도 모두 법전이 있지만 명정전은 조금 독특하다. 중층으로 된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과 달리 단층에 아담한 규모이다. 또 홍화문과 명정문 사이에 문이 없고 창덕궁처럼 동선이 꺾여있지 않아 홍화문을 들어서면 명정전이 바로 보인다. 대개가 남향인 다른 법전과는 달리 동향을 하고 있는 것도 색다른 점이다. 명정문을 들어서면 아늑하게 펼쳐진 마당, 조정(朝廷)이 나온다. 조정에는 넓적한 돌인 박석을 깔아 다른 곳과 차별화하고 격을 높인다.

조정의 가운데로 홍화문부터 시작해 명정전을 향해 쭉 이어진 세 마디 길, '삼도'가 길을 안내한다. 비석처럼 쭉 늘어선 '품계석'은 관급별로 늘어서 읍하고 있을 신하들을 위한 것이다. 계단을 올라 명정전 안을 들여다보면 처음에는 실망하기 쉽다. 이 집은 사람이 쓰지 않은지 100여 년이 흘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을 활짝 열어 화강암에 반사되어 들어오는 빛을 받고 명정전 앞 넓다란 월대에서 악공들이 연주하는 유장한 음악을 들으며, 뒷면의 일월오봉병이라는 병풍과 머리 위의 닫집과 천장에 달려있는 나무로 만든 봉황의 호위를 받으며 왕이 앉아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이 건물의 제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밖으로 눈을 돌려 명정전 양옆을 보면 넓적한 독이 있는데 이를 '드므'라 부른다. 드므에 물을 담아놓으면 화마가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놀라 달아난다는 옛 사람들의 생각이 재미있다.


문정전과 숭문당


명정전 옆에 등을 기대어 앉아 남산을 마주 보는 문정전(文政殿)은 왕의 사무용 건물, 편전이다.
왕은 이곳에서 신하들과 함께 국사를 논의하였다. 이 건물은 법전인 명정전과 달리 남향을 하고 있고,기둥도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의 원리에 따라 보통 원기둥보다 격이 낮은 4각기둥을 쓰고있다. 이 건물은 1986년에 복원을 한 것으로, 원래의 문정전은 일제 시기에 없어졌다. 문정전 앞의 조그만 마당에 있는 몇 개의 주춧돌은 1820년대 후반의 그림인 동궐도에서 보이듯이 문정문에서 문정전까지 연결된 복도의 흔적으로 추측된다. 원래 주요 건물은 복도로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명정전, 문정전, 숭문당과 내전으로 향하는 빈양문에 이르는 공간이 복도로 연결이 되어 있음을 지금도 직접 확인해볼 수 있다.

 

명정전 뒷편에 자리잡은 숭문당(崇文堂)은 영조의 어필이 걸려 있으며 왕이 가끔 학자들을 불러 학문을 논하고 대화를 나누던 곳이다. 그러한 탓인지 숭문당은 공식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명정전이나 문정전에 비해 규모가 작고 단청도 소박하다. 숭문당은 지붕을 받치는 둥근 서까래만 있는 홑처마이며 잡상도 없는 등 전체적으로 소박한 외관을 하고 있다. 지금의 숭문당은 순조 연간에 화재가 나서 다시 지은 것이다.


함인정


숭문당 오른편 빈양문(賓陽門)을 넘어서면 왕과 왕비의 기거 활동 공간인 내전이 펼쳐진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물은 정자인 ‘함인정(涵仁亭)’이다. 함인정은 사면이 모두 트인 형태의 정자로 정자로서는 규모가 큰 편이다. 천장을 보면 가운데가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고 둘레는 서까래가 다 드러나 있으며, 내부 바닥에 깐 마루도 중앙부가  둘레보다 한 단 높이 설치되어 있는 등 가운데와 둘레의 구별이 보이는 구조로 되어 있다. 영조는 함인정에서 문무과에 급제한 인재들을 만나보기도 하였다 한다. 함인정 내부의 사면에는 중국 시인 도연명이 지은 사계절에 관한 시, ‘사시(四時)’가 춘하추동 한 구절씩 방위에 맞춰 동남서북에 배치되어 있다.

 

 

 

4. 경운궁(덕수궁)의 역사

 


지금의 덕수궁(德壽宮)은 원래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까지 몽진하였다가 1년 반 만에 서울로 돌아왔으나, 궁궐이 병란에 소실된 까닭에 머물 궁이 없었기에 왜군들이 주둔하여 파괴를   면한 당시 황화방(皇華坊:정릉동 일대)의 종친과 양반가 등의 민가들을 수용하여 임시 궁궐로 개조, 정릉동 행궁으로 삼고 시어소로 머물게 되었다.
생전에 소실된 궁궐을 재건하려 하였으나 나라의 형편이 여의치 않아 결국 이곳 행궁에서 승하하신 선조의 뒤를 이어 1608년 즉위한 광해군은 1611년(광해군 3)에 창덕궁 복구 공사가 마무리되자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이라 부르게 하였고, 광해군은 1615년 4월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였다. 한편 1623년 반정에 성공한 인조가 경운궁 별당(즉조당)에서 즉위한 뒤 광해군에 의해 경운궁에 유폐되었던 인목대비와 함께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인조는 선조가 머물던 즉조당, 석어당과 왕비의 궁방인 명례궁 건물만 남기고, 나머지 경운궁의 가옥과 대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떠나게 된 후로 경운궁은 어려운 시절의 쓰라림을 회상하는 뜻 깊은 공간인 궁으로 남게 되었다.

1895년 10월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 이후, 친일적인 관료들과 일본의 압력이 가중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세자(순종)와 함께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여, 1년이 넘게 러시아공사관에서 머물던 고종은 마침내 1897년(건양 2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還宮)하게 된다. 연호를 광무(光武)로,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원구단(圓丘壇)에서 황제 즉위식을 가지면서 경운궁은 고종에 의해 궁궐의 격식을 갖추어 나갔다. 그런데, 1905년 경운궁 중명전에서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고종이 1907년 7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황제의 특사자격으로 밀사를 파견한 사건을 트집잡아,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 시킨다. 1907년 8월 경운궁 돈덕전에서 황제즉위식을 가진 순종이 11월 창덕궁으로 이어함으로써 경운궁은 마침내 궁궐로서의 임무를 다하게 되었다.

한편, 태황제(太皇帝) 고종에게 덕수(德壽)라는 궁호(宮號)가 붙여지게 되면서 오늘날의 덕수궁이란 이름을 갖게 되는데, 덕수란 궁호는 왕위를 물려준 선왕의 덕과 장수를 기린다는 뜻으로, 조선 초 정종에게 양위(讓位)하고 물러난 태조에게 올렸던 궁호 이기도 했다. 이처럼 덕수궁이란 선왕에게 올리는 궁호의 보통명사인 것이다.
1919년 고종이 침전인 함녕전에서 승하하면서 주인 없는 궁궐 덕수궁은 그 영역이 크게 축소되고, 전각들이 파괴, 왜곡되었다. 1922년 일제는 선원전의 터를 통과하는 도로를 뚫었는데 이 길이 바로 덕수궁 돌담길이며, 이때 도로 서쪽으로 떨어져 나간 엄비의 혼전은 헐려 경기여고가, 또 도로의 동편에 있던 제사준비소 터에는 지금의 덕수초등학교가, 1927년에는 경성방송국이 건립되었다. 이렇듯 대부분의 궁내의 건물을 철거 또는 방매(放賣)하게 되어 훼철된 덕수궁은 1933년 10월 공원으로 일반에게 공개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일제침략기를 거치면서 현재 남아 있는 경운궁의 영역은 대한제국 당시의 1/3정도일 뿐이다.
 

대한문



 





 

 

대한문은 원래의 경운궁의 정문이 아니었으며 본래 이름 또한 대안 문(大安門)이었다. 정문인 인화문이 있었으나 주위에 민가가 교통이 불편한 반면, 동쪽에 있는 대안문은 1900년대 고종의 근대적  도시개조사업의 일환으로 방사상 도로가 나 자연스레 자주 이용되면서 사실상의 정문이 되었다. 1904년 경운궁에 큰 화재가 일어나  대부분의 건물이 중건되는데 이때 대안문도 수리를 했다.

1906년 고 종의 명에 의해서 이름이 지금의 대한문으로 바뀌었다. 바뀐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그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설 에 의하면, 1900년대는 친일파들이 득세했다. 그 중에서도 배정자 라는 여자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로서 사람들은 안(安)자를 빗대어 갓을 쓴 여자가 궁을 드나들면서 고종을 현혹해 나라가 망한다고 하여 대한문으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1914년 태평로가 뚫리면서, 1968년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두 번 뒤로 밀려났다.


중화문
 


법전인 중화전의 정문에 해당되는 문이다. 중화문은 현재 단독 건물 처럼 남아 있으나 원래는 다른 궁궐에서와 같이 좌우로 연결된 회랑이 동서쪽으로는 물론 거기서 다시 남에서 북으로 연결되게 둘러져 있어 중화전 마당 조정(朝廷)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다 철거되고 이 문 동쪽에 그 흔적이 조금 남아 있다.

중화문을 보면 공포 있는 곳에 망이 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을 부시라고 하는데 이는 새가 둥지를 틀게 됨에 따라 구렁이 등에 의해 살생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새의 분비물에 의한 건물 부식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다. 중화문의 둥그런 기둥과 네모난 주춧돌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철학사상을 따른 것이다. 중화문을 보면 가운데가 양쪽보다 크고 높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어문(御門)으로 임금이 지나는 문이기 때문에 신하들이 지나는 문과 차이를 둔 것이다.


중화전
 


중화문에서 중화전을 바라보면 바닥은 박석이 깔려 있고, 벼슬 아치의 높낮이 순으로 관계(官階)의 품(品)을 새겨 세워둔 품계석이 있다. 맨 앞줄에 있는 정일품이 최고의 품계이다. 중화문을 거쳐 삼도를 따라 들어서면 하월대의 석계에 이르고 이 석계를 오르면 다시 상월대 석계에 다다른다. 넓은 이중 월대 위에 우뚝 솟은 전각이 바로 중화전이다.

중화전은 경운궁의 정전(正殿)으로 보물 제 81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왕이 백관의 하례를 받고 조례를 행하며 공식적인 행사를 집행하였던 곳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 단층의 다포계(多包系) 팔작지붕 건물로, 1902년 건립되었으며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06년 중건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중층 건물이었으나 다시 지을 때는 단층으로 중건되어 현재도 단층 지붕으로 남아있다.

중화전 안에 있는 어좌는 부처의 자리와 같이 꾸며 높게 마련한 용상위에 놓는데, 머리 위에는 보개를 두고 포작으로 닫집을 짰다. 어좌 뒤에는 일월오악병풍을 쳐서 임금의 권위를 더욱 높이고 있다.
 

<중화전 내부>

준명당

중화전이 공식행사를 하던 곳이라면 준명당은 고종이 실질적인 업 무를 보거나 신하들과 회의를 하던 편전(便殿)이었다. 이곳의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광무 원년(1897년)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엔 이곳을 준명전이라 불렀다가 언제부터인가 준명당으로 바뀌었다.

전각이름에 붙게 되는 전(殿)은 당(堂)보다 격이 한 단계 높은 것으로서 왕이나 왕에 버금가는 인물인 왕비 혹은 대비 등과 관련된 건물에만 붙게 된다. 고종 나이 예순에 양귀인 과의 사이에서 얻은 고명딸 덕혜옹주의 교육을 위해 1916년 이곳에 유치원을 만들기도 하였다. 즉조당과는 월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즉조당


즉조당의 의미는 왕이 즉위를 한 곳이라는 의미인데 실제로 여기에서 조선조 제15대 광해군과 제16대 인조가 즉위하셨다. 현재의 중화전이 지어지기 전에 이곳이 임시 정전(正殿)으로 사용되면서 광무 원년(1897년)엔 태극전 이라 하였다가 이듬해에 중화전으로 고쳐 부르게 된다. 1902년 지금의 중화전이 지어지면서 다시 원래의 이름인 즉조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은 고종의 후비인 엄비가 돌아 가실때까지 거처했던 곳이기도 하다. 즉조당 현판을 보게 되면 어필(御 筆)이라는 한자와 광무구년을사칠월(光武九年乙巳七月)이라는 한자가 쓰여있다. 어필은 왕이 쓰셨다는 뜻이므로 고종의 글씨임을 알 수 있다. 광무는 대한제국의 연호이니 1904년 화재로 즉조당이 불에 타 버려 1905년에 중건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5. 경희궁의 역사

서궐(西闕)경희궁의 전신은 경덕궁(慶德宮)이었다. 경덕궁은 본래 인조의 생부 원종(元宗)의 사저가 있던 곳으로 이 곳에 왕기가 서린다는 말을 듣고 광해군이 왕기를 없앤다는 뜻으로 광해군 9년(1617) 6월에 궁전을 짓기 시작하였으나, 인경궁과 함께 공사가 진행된 관계로 재력의 소모가 막대하여 공사가 뜻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결국 광해군은 궁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왕 15년 3월계해 반정(癸亥反正)으로 폐위되고 말았는데, 그 뒤 경덕궁은 인조가 인목대비를 받들어 일시 이 곳에 이어한 일이 있었고 그 후에는 역대 왕들이 수시로 이 궁에 거처한 일이 있었으므로 경덕궁은 왕궁의 하나로 손꼽힐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영조 36년(1760)에 경덕의 궁명이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동음이라 하여 이를 피하여 경희궁(慶熙宮)으로 고쳤다. 순조 29년(1829) 10월 경희궁은 화재로 인하여 건물의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순조 31년(1831)에 다시 중건 되었고 철종 10년(1859)부터 11년 사이에 보수 공사가 시행되었다. 그 후 고종 초년 경복궁을 중건하고 법궁을 이어하자 경희궁은 빈 궁궐로 남게 된다. 관청의 필요에 따라 창고나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었으나, 대부분의 시설은 유지되고 궁궐로서의 외양은 지키고 있었다. 광무 5년인 1901년에서 1904년 사이에는 당시 고종이 임어 하고 있던 경운궁과 연결하기위해 운교가 연결되기도 한 것으로 보아 경희궁은 광무연간까지 궁궐로서의 가치를 인정 받고 있었다.

근세에 이르러 일제가 침략해 와서 한일합방이 체결될 무렵 경희궁은 숭정전(崇政殿), 회상전(會祥殿),  흥정당(興政堂),  흥화문(興化門) , 황학정(黃鶴亭)만이 남아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들어온 뒤로 숭정전(崇政殿)은 1926년 남산 산록에 이치(移置)되어 조계사(曹谿寺)의 본당으로 사용되었고, 흥정당(興政堂)은 1928년 광운사(光雲寺)로 이건하였으며, 황학정(黃鶴亭)은 1923년 사직단 뒤로 옮겨졌다. 흥화문(興化門)은 1932년 이토오히로부미를 위하여 짓던 절, 박문사(博文寺)의 북문으로 쓰였으며 최근까지는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경희궁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경희궁 자리에는 1910년 일본인 자제를 교육하는 경성중학교(옛 서울중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고종의 강제 퇴위와 일제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접어들면서 일제는 일본인들의 거주지역을 경희궁 근처로 잡고 통감부 중학교를 경희궁 터에 세우고 지형도 높은 곳은 깍고 낮은 곳은 메꿔 버리는 등 그 만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들의 만행은 1922년 6월에는 경희궁의 동편에 전매국 관사를 지으면서 그 부지로 25,500평을 떼어냈고 1927년에서 1928년에는 경희궁 남쪽 도로를 확장하면서 일부를 도로로 편입시킨다. 거기에 건물들은 대부분 매각 시켜 버리고 만다. 중학교 교실로 사용되던 숭정전(경희궁의 정전)은 1926년 3월 일본불교 종파인 조동종의 조계사에 매각 이건 되었다. 대내 정전인 회상전은 1911년 임시소학교 교원양성소의 교실과 기숙사로 그리고 편전인 흥정당은 1915년 소학교 교실로 사용되다 1928년 용산의 광운사로 팔려나갔다. 이렇게 1920년대를 지나면서 경희궁의 건물들은 완벽하게 소멸되고 만다.


흥화문


경희궁(慶熙宮)의 정문으로 경희궁의 창건과 함께 광해군 10년에 세워졌다. 이 문은 궁(宮)의 동남 우(隅)에 위치하여 (운종가를 바라보며)동향(東向)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구세군 빌딩과 마주한 위치쯤 되며 현 “서울 역사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만들어놓은 다리(금천교) 앞쪽이 되겠다. 1915년 8월 도로공사를 하면서 남쪽으로 이전되었다가 1932년 박문사(博文寺)의 사문(寺門)으로 둔갑 되었고, 광복 후에는 신라호텔의 문으로 이용되던 것을 경희궁 복원 계획에 따라 정문(正門)으로 이전해 놓기는 하였는데 본래 위치와는 전혀 다른 현 위치에 남향으로 모습이 바뀌어 있다. 이렇듯 정문의 위치부터 뒤죽박죽 되어버린 몰골로 복원하고 있으니 경희궁의 옛 모습을 상상하기란 여간한 관심 가지고는 힘들게 되어있다. 현재도 궁궐지(宮闕址)의 초라한 모습으로만 경희궁을 바라보면서 또 흥화문은 흥화문이되 본래의 문이 아닌 문을 들어서면서 지금은 기형적이긴 하나 그래도 다 없어져 버렸던 경희궁을 이나마도 되찾았다는 위안으로 삼고 복원되는 몇몇 전각들을 둘러보자.


숭정문/행각


흥화문을 들어서서 얼마정도를 걸어가면 말끔하게(?) 복원된 숭정문 영역이 나타나는데 그 앞의 계단도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계단 일부는 옛 것 그대로이고, 숭정문 좌우로 이어진 행각이 마치 곤룡포 자락처럼 화려하다. 그 행각은 동서쪽 행각과 이어져 있는데 동서행각도 물론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숭전문을 들어서면 법전인 숭정전이 2층 월대 위에 덩그렇게 올라앉아 있다. 물론 이 법전도 최근 새로 복원된 건물이다. 원래 있던 숭정전 건물은 일제 경성중학교 교실로 사용되다가 1926년 훼철될 위기에 이르러 조계사로 넘어갔다. 당시 일본 종파인 조동종(曹洞宗)에 속해 있던 조계사(曹谿寺)는 숭정전을 경내로 옮겨놓고 불전으로 사용했다. 당시 조계사는 현재 동국대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그 숭정전 건물은 지금도 동국대 경내에 남아 정각원이라는 법당이 되어버렸다. 숭정전은 창경궁의 명정전과 함께 조선 중기의 대표적 궁궐 건축이지만 많이 낡았다. 최근 경희궁을 복원하면서 옮겨오려 했으나 너무 낡아서 이건하지 못하였다. 숭정전을 중심으로 둘레의 행각들이 새로 복원되어 있다. 현재 중층 월대 일부는 1985년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옛 것을 그대로 쓰고 있다.

 


특히 계단 소맷돌 측면의 당초문이 환상적일 만큼 아름답다. 계단에 엎드린 해치도 다른 정전의 해치보다 해학성이 뛰어나며, 해치가 Y형 뿔을 달고 있는 것도 이색적이다. 남향 건물인 숭정전은 옛 건물 그대로 본 따서 궁터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정전인 만큼 지붕마루에 잡상과 용두 등이 어김없이 치장되어 있으나, 그 기법은 세월과 기술의 단절이 엿보인다. 마치 조잡한 화장(化粧)술의 여인얼굴을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이라 표현한다면 조금 지나칠까? 어간문을 열고 들어가면 용상과 일월오악도가 정면에 자리하고 있고, 그 위에는 닫집이 있고, 천장에는 근정전의 것을 본뜬 두 마리 황룡이 조각되어 있다.


자정전


숭정전 뒤를 돌아가면 2단의 높은 계단 위에 자정문이 덩그렇게 올라 앉아 있다. 자정문은 자정전 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자정전 영역이 법전인 숭정전 보다 높은 곳에 앉아 있는 것은 오로지 이곳 지형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자정문의 좌우 행각도 지형의 높이에 따라 계단식으로 되어 있다. 이 점이 다른 궁궐들과 다른 점이다.
그래서 경희궁의 전각배치는 마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지대가 높아지는 향교의 전각배치를 연상하게 한다. 정문 계단의 기단석 일부는 한눈에 세월을 읽어볼 수 있는 옛 것 들이다. 새로 깍아 앉힌 것보다 색깔이 붉은 까닭은 오랜 풍화로 돌속의 철분이 산화되어 겉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자정전은 이 궁의 편전 이다. 편전은 왕이 평상시 거처하면서 정사를 보는 집무실과 같은 것으로, 경복궁의 사정전, 창덕궁의 선정전, 창경궁의 문정전 등이 편전이다.  그리고 그 위치는 대개 정전 뒤쪽에 자리잡고 있다. 자정전은 자정문, 숭전전은 숭정문과 일직선상에 있고 흥화문 과 도 거의 축선이 같다. 그러나, 원래의 흥화문 위치는 그 축선에서 동쪽으로 크게 벗어난 곳에 있었다. 이것도 경희궁의 전각배치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그 밖의 전각들


회상전, 집경당(회상전의 남서쪽), 융복전, 흥정당은 한 영역 안에 있다. 회상전은 왕의 사적인 공간인 침전이며 숙종은 이곳에서 탄생하여 만승루에서 승하하였다고 한다. 회상전은 1928년 조계사에 매각되어 주지 집무실로 사용되다가 없어졌다. 궁궐지에 보면, 흥정당은 건물 일부에 누하주가 있는 다락식 건물이었던 것 같고, 흥정당 좌우에는 왕이 독서하던 존현각과 서음각을 끼고 있었다. 회상전 서쪽에 융복전과 주변에 연못, 정자 등이 있었다고 한다.

융복전 동쪽으로는 대비마마의 침전인 장락전이 있었고, 그 옆에 광명전이 있었다고 한다. 왕세자가 거처했던 동궁도 그 부근에 있었다고 전한다. 그 밖에도 단명전, 친현각, 창선각, 영강각 등 무수한 전각과 일신헌, 위선당, 봉황정,용비루 등 헌, 당과 누, 정 등이 궐내 즐비했을 뿐 아니라, 개양문 밖에는 승정원 홍문관 도총부등 관아 32개소와 방림원 등이 있어 궁궐로서의 규모와 위엄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우리궁궐이야기, 청년사, 홍순민 지음> 발췌

회상전

집경당

융복전

흥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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