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강릉원주대학교 해람지로 죽헌저수지로 차가운 비가 되어 저리저리 내렸었다. 봄꽃으로 흥건히 젖어 이슬방울들을 매달고 길 찾아 정 찾아 헤매다녔었다. 홀로 걸은 길 다소 힘들었지만 느낌이 진했기에 가슴 속 울림이 크다. 지난 2월부터 걷기 시작한 강릉바우길은 이제 두 구간만 걸으면 열일곱구간의 끝이고 완주다. 하지만 일반 바우길 열일곱구간 이외에 또 다른 길들, 예를 들면 울트라바우길, 아리바우길, 계곡길, 눈꽃길 등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차피 5박 6일 강릉에 왔으니 한 번 걸었던 아리바우길의 나머지구간과 조금은 낯선 울트라바우길도 맛보고 싶었다.
결국 난 "Please help me!" 바우님들을 향해 도움의 손짓을 보냈다. 바우님들이 모른 체 할 리 없겠지만, 그토록 감동으로 다가와줄 줄은 몰랐다. 숫제 내가 가고픈 아리바우길과 울트라바우길까지 포함한 나의 5박 6일 바우길 일정을 다 짜 주었다. 난 왜 이 세상에 이리도 잘 태어난 걸까? 이 고마움들을 다 어찌 할까?
둘째날인 4월 18일 화요일 아침, 바우길 4구간인 사천둑방길 시작점 명주군왕릉으로 그리메님과 민들레님 가비님이 18.3km를 동행한다고 나와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비에 젖어 쓸쓸하던 혼자만의 어제 길과 달리 오늘 길은 정겨움으로 무지개가 뜰지도 모르겠다. 어명정 가던 길, 심스테파노길 갈 때에도 지나가던 이곳 명주군왕릉엔 키가 큰 하얀 벚꽃이 반쯤 진 채로 하롱하롱 꽃잎을 날려주고 있었다. 그리메님 길잡이에 민들레님 가비님 둘이서 도란도란 정겨운 어깨들을 보여준다. 나는 한 걸음 떨어져서 햇살 뒤로 역광에 빛을 발하는 연연두 잎사귀들과 싱그러운 녹색 계열의 나무들, 시원하게 펼쳐진 청녹빛 들판, 길가마다 갓 피어난 야생꽃들을 마구 네모상자에다 끌어담는다. 닉네임 민들레님은 노란 민들레보다 유난히 하얀 민들레에 반가워한다. 핸폰에 하얀 민들레를 여러 송이 담아내고, 어떤 하얀 민들레는 한 뿌리 봉지에 담는다. 집 뜰에서 매일 보면서 키우고싶어한다.
사천진리 해변까지 이어지는 사천둑방길에는 서울에서 내가 접해보지 못한 온갖 야생화들의 천국이다. 봄 들꽃들의 축제이다. 보고 또 봐도 또 다시 보고 싶은 작은 색색의 꽃들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차마 두고 갈 수가 없어 끌어안다 보면 바우님들은 어느 새 모퉁이를 돌고 사라져버린다. 하얀 홀씨로 포르르르 바람에 날리는 민들레를 보며 단숨에 뛰어가면 그님들도 역시나 들꽃들에 정신을 팔고 있다. 파란 빛의 무더기 별꽃, 보랏빛의 제비꽃, 노랑 제비꽃, 기린 목 같은 노랑 꽃무리들이 한창 꿈을 꾸고 있고, 꿀벌 말벌들은 실컷 놀고 있다. 죽순 밭의 새순들, 엄나무 두릅나무 밭의 잎사귀들이 두릅축제를 한껏 기다리고 성큼성큼 자라나고 있다.
임도를 지나 도로를 건너니 해살이 마을 마당이 펼쳐진다. 전통체험학교 홍보현수막들이 나붙고, 두릅축제는 곧 시작될 모양이다. 빨간 튤립이며 분홍빛 꽃잔디가 만개한 어느 잘 가꾸어진 정원이 있는 기와집엘 들어선다. 정감이 가는 한옥집은 돌담에서부터 마당이 단정하고 시원하게 열려있다. 봄꽃들의 기운을 함뿍 받고 나오니, 유모차 속의 갓난아기를 바라보는 할머니에게 눈길이 간다. 까꿍까꿍 우리도 아기를 얼러주고 상그레 웃는 아기 모습에 잠시나마 순수해진다. 우릴 기다렸는지 반가워 짖어대는 털복술 강아지들에게도 손을 흔들어주고, 산불조심 빨간 깃발이 빳빳이 나부끼는 다리 위도 지난다. 차차 흐려지더니 이내 봄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우비들을 꺼내 입으며 걷는다. 작은 개울천의 연이은 몇 개의 폭포들도 힘찬 물소리로 봄을 노래한다. 우리들은 도로를 건너면서 반사경에 비치는 모습들을 서로 쳐다보며 재미있어 한다. 하천 둑 아래 드려놓은 낚싯대에도 호기심이 발동하고, 진한 주홍빛 빨간빛 연산홍 꽃들의 묘지와 가지런한 묘비석들을 내려다본다.
저수지 주변의 ‘강릉 오륜벼 재배단지’를 지나 김동명 문학관을 향해 가면서부터 행복한 이벤트는 시작된다. 그리메님은 점심식사를 어느 집에 전화로 예약을 하는 듯 자장면 4그릇을 주문한다. 설명을 들으니 양지농원 주인장인 영의님에게 가는가보다. 이슬비 가랑비는 오다 말다를 반복한다. 우비를 입었다 벗었다 하며 구름을 보다 해를 보며 마냥마냥 걷는 중이다. 아직 양지농원까지는 30분 정도를 더 가야하는데, 자장면을 배달해준다는 영의님의 전화얘길 농담으로 듣고 웃어넘겼다. 그런데 우스개소리가 아니다. 진짜다. 영의님은 정말로 자장면을 배달해오셨다. 김동명 문학관에 도착할 즈음 트럭 한 대가 지나가더니 문학관 마당 보도블럭에 자장면을 펼쳐놓는다. 한 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을 벗삼아 시골문학관 바닥에 앉아 난생처음 자장면을 먹는다. 군만두와 함께 세상의 참 행복한 맛을 느껴본다.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을 근사한 이벤트!
자장면 그릇들을 싣고 유유히 가시는 영의님. 참으로 진솔하고 소탈하며, 재치있는 저런 유머와 여유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양지농원에 도착하니 비닐하우스 밖에선 비가 쏟아진다. 우리는 비닐하우스 안에 햇빛 받아 잘 자라고 있는 하얀 딸기꽃의 새빨간 딸기를 서너개씩 따 먹는다. 방풍나물도 따서 씻지 않고 향긋한 내음 맡으며 그냥 씹어먹고, 로즈마리 허브잎도 쓸어보며 향기에 취한다. 저 넓고 긴 비닐하우스 몇 개나 되는 농원 전체를 혼자서 기르고 관리하는 저분에게 비결을 물었다. 이 하우스의 고랑들이 바로 바우길이란다. 고랑들을 몇 번씩 왔다갔다 하는 동안 바우길을 다 걷는 것이라 기분도 좋고 건강도 최고란다. 물로만 재배해서 씻지 않아도 되는 저 채소들은 저분만의 농작비법일 게 틀림없다. 저분 삶의 농축액을 조금이라도 얻어갈 양으로 우리는 곁에서 알짱거리며 요리조리 묻고 답을 듣는다. 어느 새 비는 그치고 우리는 아쉬운 발걸음을 옮긴다.
운양초등학교 사천중학교를 지나 하평답교 문화재마을 표지석이 있는 힐하우스 팬션들의 그림같은 길을 걷는다. 허균 교산 시비가 있는 곳이다. 허허롭게 시골 산중으로 내려와 마음을 달래어보는 교산의 시를 낭송하며, 오미자 차 한 잔을 마신다. 오락가락하는 비는 다시 또 비를 뿌린다. 드디어 사천진리 해변 공원에 도착하니, 우리를 데리러 차가 와 있다. 테라님이 운전하며 진센님과 함께 도착해 우릴 환영해준다. 이런 두 번째 행복한 이벤트는 사천해변 넘실대는 짙푸른 파도에 하얀 물거품과 함께 영화 속 주인공을 만들어준다. 빨간 우의로 영화들을 찍고 강릉시내로 들어오니, 정말로 소원했던 무지개가 떴다. 남대천 파란 표지판 위로 커다랗게 반원을 그리며 행복한 무지개가 우릴 반긴다. 또 다시 세상에 나와 잘 사는 내가 고맙다. 진센님네 뜨끈뜨끈한 감자탕은 사천둑방길 이슬비 가랑비에 젖은 마음을 훈훈하게 데워주었다. 일부러 리딩해준 그리메님, 동행의 가비님, 민들레님, 픽업의 테라님, 진센님. 오래도록 잊지 않을게요. 바우님들이 참 끈끈하구나! 내일은 바우길의 끝인 17구간 안반데기 운유길을 오르며 완주의 기쁨으로 들떠서 걸을 것이다.
첫댓글 글을 읽으며 놀랍니다.
읽는 내내 걸음걸음, 장면마다
마치 지금 걷고 있는 듯 한 착각에
정신마져 혼미합니다.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추억이 된
사천뚝방길이 현재형임을 실감합니다.
그게 바우길이겠지요.
누구보다 바우길을 사랑하시는
일인이 되셨음에 축하와
감사를 드립니다.
선뜻 후원자가 되시고
바우인이면 누구나 하는 일을
세워주심에 부끄럽지만
후기글을 보며 뿌듯해집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그리메님이 제 글을 읽고
저리도 공감해주시니
함께 내디뎠던 걸음들이
다시 또 생생히 떠오르네요.
진하게 잊을수 없는 추억
간직하고 올수 있게
진심으로 함께 해준 고마움
오래 기억할 거에요.
장배기(정수리)에 머리카락 빠지기 시작하니
짜장면 배달도 해봅니다~~ㅎㅎㅎ
또 배달 됩니다~~ㅋㅋ
아. 그 시골문학관 땅바닥
그 행복한 자장면 흡입.
잊을수 없습니다.
양지농원 새빨간 딸기도
손수 타주신 커피도
마냥 그립습니다.
@화인샘 딸기 아래 식물은 "블랙 커런트(뉴질랜드 포도)"입니다.
열매는 블루베리와 비슷하고, 안토시안이 블루베리 보다 1.5배 많다네요~~
생생한 기록들...
걸음하신 바우님들의 속깊은 정이 느껴지는 따뜻한 후기.
항상 행복하시고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바우길이 점점 더
좋아지는 이유는 바로
그 길을 무던히도 사랑하는
바우님들 때문입니다.
죽고 못사는 바우님들의
끈끈한 정 때문입니다.
제게 울트라바우길의
찬란한 빛을 알게해주신
아띠님 같은 바우님들의
열정 때문입니다.
사천둑방길이
화인샘님의 따끈따끈한 후기로
다시 태어나는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화인샘님도
바우길 중독 말기 증상이 시작 된 것 같아서
ㅎㅎ
조금 걱정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동지가 생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게요.
바우길 사랑 중독 말기증상
맞습니다.
아스라히 눈에 선한 그 곳
도무지 서울에서 일이
손에 잡히질 않으니
또 가고싶어 안달하는 저
어쩜 좋죠?
ㅎㅎㅎ
비가올까봐 우산을 챙기면서도 "제발 비야 오지마라" 하면서 준비하고나간길
날씨가 너무 좋아서
좋았습니다
김동명문학관 넓은 마당에서 영의님께서 사온 자장면을 맛있게 다 먹기도전에 비는시작되고..
어쨋든 4월의 예쁜 사천둑방길을 긴 길 마다않고 우리 네명은 즐겁게 즐겁게...
온화한 표정과
어린 아이처럼 즐거워하시는 화인샘님, 무거운카메라 매시고 멋진작품 만드시느라 애쓰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민들레님의
민들레 민들레 하얀 민들레
사천둑방길에서의
하얀 민들레 사랑 모습이
지금도 아련히 떠오릅니다.
진심으로 함께 해주셔서
참 고마웠습니다.
아기자기 예쁘고 소박하게 가꿔놓은 시골집 꽃밭..
@민들레♡ 아. 이 사진도
참 좋군요.
담아갈게요.
화인셈님과 걷는바우님들 행복바이러스에 끝나는지점까지는 읏을수밖에 없는시간 상상으로 나도함께라 착각을 해봅니다 사진속에 주인공들은 당첨되는날~ㅎ
사진 예쁘게찍어주셔서 제미있게 보고갑니다
네. 방울꽃님.
선자령의 그 큰 카메라
열정적인 촬명 모습
눈에 선합니다.
5월에 또 가려고
시간 짜내봅니다.
다시 또 함께 하기를
소망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