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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열전(25) 김유신
황원갑 <역사소설가>
김유신(金庾信)은 신라가 당나라와 합세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이른바 삼한통일을 이룩하는데 가장 공이 큰 인물로서 신라 천년사의 대표적 명장으로 손꼽힌다. 그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가장 많이 나오고, <삼국유사>에도 나오며, 오랫동안 실전되었다가 근래 필사본이 나타난 김대문의 <화랑세기>에도 제8세 풍월주를 역임한 것으로 나온다.
<화랑세기>에는 김유신의 가계가 비교적 상세히 나온다. 가야의 마지막 임금 구충왕(仇衝王)은 가야 여인 계화(桂花)에게서 무력(武力)과 무득(武得)을 낳았고, 신라에 항복한 뒤 ‘무력은 진흥제(眞興帝)의 딸 아양(阿陽)을 아내로 맞아 서현(舒玄)을 낳았고, 서현은 만호태후(萬呼太后)의 딸 만명(萬明)을 아내로 맞아 유신을 낳았다고 전한다.
김유신의 어머니인 만명부인은 진평왕의 모후인 만호태후의 딸이다. 만호태후는 본남편인 동륜태자(銅輪太子)가 먼저 죽자 갈문왕 김입종(金立宗)의 아들이며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肅訖宗)과 사통하여 낳은 딸이다. 근친혼은 물론 근친상간까지 흔하던 신라 왕족․귀족 사회에서 이렇게 정식 혼인에 의하지 않고 사통하여 낳은 아들딸을 사자(私子)․사녀(私女)라고 불렀다. 만호태후의 사녀인 이 김만명이 길에서 김서현과 눈이 맞아 야합한 끝에 김유신을 낳았던 것이다.
한편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신라 제30대 법민왕(法敏王), 즉 문무왕이 수로왕의 제사에 관한 조서를 내린 사실을 전하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 가야국 시조의 9세손 구형왕(仇衡王)이 우리나라에 항복할 때 거느리고 온 아들 세종(世宗)의 아들이 솔우공(率友公)이요, 그 아들 서운(庶云) 잡간의 딸 문명왕후(文明王后)께서 나를 낳으셨다. 때문에 시조 수로왕은 나에게는 15대조가 된다. 그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그 묘는 아직 남아 있으니 종묘에 합사하여 제사를 계속하도록 하라. -
문무왕 김법민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들로서 경주 김씨이다. 그런데 그가 김해 김씨 시조인 수로왕이 자신의 15대조라고 한 것은 가야의 마지막 임금 구형왕의 증손 서운의 딸이 자신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서운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김서현으로 김유신의 아버지이며, 김유신의 비문에는 소연(逍衍)으로 나오는 사람이다. 솔우공은 졸지공(卒支公)이라고도 하고, 구형왕과 세종은 <삼국사기>에는 각각 구해왕과 노종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구형왕을 <화랑세기>에서는 구충왕이라고 했다. 문무왕의 어머니 문명왕후는 김서현과 만명부인의 둘째딸이며 김유신의 누이동생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열전’과 <화랑세기>에는 김유신의 할아버지가 세종도 노종도 아닌 무력이라고 나온다. <삼국사기> ‘열전’은 김유신의 출생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다.
- 처음에 서현이 길에서 갈문왕 임종의 아들인 숙흘종의 딸 만명을 보고 마음에 들어 그에게 눈짓해 중매도 없이 야합하게 되었다. 서현이 만노군 태수가 되어 만명을 데리고 함께 가려 하니 숙흘종이 그제야 자기 딸이 서현과 야합한 줄 알고 그를 미워하여 딴 집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했다. 그러자 갑자기 그 집 대문에 벼락이 쳐서 지키던 자가 놀래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만명이 구멍으로 빠져나와 곧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달아났다. -
갑자기 대문에 벼락이 쳤다는 것은 아마도 서현이 만명을 구출하기 위해 대문을 때려 부수었거나, 숙흘종이 하늘의 조화를 핑계삼아 신라 귀족들의 비난을 사지 않고 두 사람을 도망치게 하려고 꾸민 행위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오늘의 충북 진천인 만노군에 가서 만명은 김유신을 낳게 되었다. 김유신이 태어나기 전에 두 부부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서현은 화성과 토성이 자신에게 내려오는 꿈을 꾸었고, 만명은 황금 갑옷을 입은 동자가 구름을 타고 방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하여 스무 달 만에 김유신을 낳으니, 때는 진평왕 17년(595년)이었다.
만명이 서현을 따라 만노군으로 도망친 뒤 만호태후는 오래도록 서현을 사위로 인정하지 않다가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또 그 아이가 잘 생겼다는 말도 들었다. 외손자가 보고 싶은 만호태후는 아이를 데려오라고 하여 안아보니 과연 생김새가 영특한지라 “참으로 너는 나의 외손자로다!”하고 좋아했다. 그리고 비로소 서현을 사위로 인정했다. 김유신은 자라면서 자신이 만호태후의 핏줄을 이어받은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자신의 출신 성분이 신라 중앙 정계에서 아직도 정치적 세력이 약한 가야계였으므로 신라 왕실의 피를 받아 태어났다는 사실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졌던 것이다.
김유신이 화랑이 된 것은 15세 때였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따르는 낭도를 가리켜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다. <화랑세기>는 김유신이 그 해에 만호태후의 명에 따라 제11세 풍월주 하종(夏宗)의 딸 영모(令毛)를 아내로 맞았다고 한다.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에는 김유신이 한때 천관(天官)이란 여인에게 빠졌다가 어머니의 엄한 훈계로 애마의 목을 치면서 매정하게 천관과의 인연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천관은 오랫동안 기생이라고 알려졌지만 최근의 연구 결과 신당의 여제관이라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김유신이 화랑 중의 화랑인 풍월주가 된 것은 입산수도를 마치고 하산한 18세 때였다. 비록 외할머니 만호태후의 후광으로 풍월주가 되기는 했지만 가야 출신이라는 성분 때문에 신분상승에 많은 제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할아버지 김무력의 벼슬이 신라 16관등 가운데 으뜸인 각간이었으나 아버지 김서현은 제3위인 소판에 그친 것만 보아도 그의 가문이 쇠락해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세운 계획이 누이동생을 김춘추에게 시집보내는 일이었다. 이 이야기는 다음 태종무열왕 편에서 자세히 이야기한다.
김유신이 무인으로서 두각을 드러낸 것은 역시 전쟁터였다. 때는 진평왕 51년(629년), 김유신이 34세 때였다. 그해 8월에 이찬 임영리(任永里), 파진찬 김용춘(金龍春)과 김백룡(金白龍), 소판 김대인(金大因)과 김서현 등이 왕명에 따라 고구려의 낭비성을 쳤다. 낭비성은 오늘의 충북 청주. 이때 고구려군의 맹렬한 반격으로 신라군의 사상자가 많았다. 그러자 중당당주로 출전했던 김유신이 적진으로 돌격하여 적장의 목을 베어 돌아오니 신라군의 사기가 충천, 단숨에 전세를 역전시켜 5000여 명의 적군을 죽이고 1000여 명을 사로잡아 마침내 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선덕여왕 11년(642년)에 백제가 대야성을 함락하고 김춘추의 사위인 성주 김품석과 딸 고타소를 죽였다. 김춘추가 이에 한을 품고 고구려에 군사를 빌리러 떠나기 전에 김유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와 공은 한 몸과 같이 나라의 팔다리가 되었소. 이번에 내가 고구려에 가서 만일 해를 당한다면 공은 어떻게 하겠소?”
김유신이 대답했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와 백제왕의 대궐마당을 짓밟아버릴 것이오!”
“내가 만일 6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오.”
그렇게 떠난 김춘추는 보장왕과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억류당해 60일이 지나도 돌아올 수 없었다. 군사를 빌려주는 대신 전에 진흥왕 때 신라가 탈취해간 죽령 서북쪽 고구려 고토를 반환하라는 요구를 김춘추가 거부하자 감금해버린 것이었다. 약속기일이 넘어도 김춘추가 돌아오지 않자 김유신은 정병 3000명을 이끌고 고구려와의 국경에 다다랐다. 그 사이에 김춘추는 돌아가 임금에게 말씀드려 땅을 돌려주겠다는 거짓 맹세를 하고 풀려나 가까스로 돌아왔다. 물론 보장왕이나 연개소문이 그 말을 믿어서 풀어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고구려가 김유신을 두려워한 것도 아니고, 또 김춘추를 죽여야 별 득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게다가 당나라와의 결전을 앞두고 굳이 신라를 자극해서 유사시 협공을 당할 필요는 없다는 전략적 판단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김유신은 그 동안 오늘의 경북 경산 지방인 압량주 군주가 되었다가 선덕여왕 13년(644년)에는 소판으로 승진했다. 그해 9월에는 상장군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가혜성․성열성․동화성 등 7개 성을 쳐서 크게 이겼다. 그 이듬해 1월에 서라벌로 개선했으나 백제가 매리포성을 침공한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김유신은 가족을 만나지도 못하고 다시 출전해 백제군 2000여 명을 죽이고 승리했다. 그리고 3월에 서라벌로 돌아왔는데 또다시 백제군이 공격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김유신은 이번에도 집에 들르지 않고 군사를 훈련시키고 병기를 수리하여 서부전선으로 출전했다. 신라군이 국경에 이르자 백제군이 그 기세를 보고 그대로 물러가 김유신은 싸우지 않고도 이기고 돌아왔다.
그런데 선덕여왕 16년(647년) 정월에 상대등 비담과 염종이 반란을 일으켰다. 명목은 여왕이 정치를 잘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선덕여왕이 백성들의 곤궁함은 돌보지 않은 채 자신의 원찰인 분황사를 짓고, 첨성대를 만들고, 황룡사 구층탑을 세운 것 등을 구실로 삼은 것이지만, 사실 그들의 목적은 김춘추와 김유신을 제거하고 왕위를 차지하려는데 있었다.
김춘추가 비록 폐위당한 진지왕의 손자로서 진골로 몰락했지만 선덕여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데다가, 김유신의 강력한 무력 지원까지 업고 있으니 이들을 제거해야만 자신들이 대권을 장악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비담의 군사는 명활성에 진치고 김유신이 이끈 여왕군은 월성에 진쳐 열흘간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았다. 아무리 김유신이 명장이라도 반란군의 군세가 훨씬 우세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유성이 월성에 떨어졌다. 비담이 이를 보고, “큰 별이 떨어지면 반드시 귀인이 죽는다 했으니 이는 여왕이 패하고 우리가 이길 징조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반란군의 함성이 천지를 울렸다. 선덕여왕이 이 소문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자 김유신이 이런 말로 위로했다.
“길흉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람 하기에 달린 것이니 폐하께서는 심려를 놓으소서!”
그리고 그날 밤 불붙인 허수아비를 연에 달아 띄워 올리니 마치 별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튿날 아침 김유신이 군사들에게 “어젯밤에 떨어졌던 별이 도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그리고 다시 사기가 오른 군사들을 휘몰아 마침내 비담의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김유신은 비담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명성이 더욱 높아지고 군부에서도 최고의 실력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해에 선덕여왕이 재위 16년 만에 죽고 신라 왕실에서 남녀를 통틀어 마지막 성골이며 선덕여왕의 사촌동생인인 진덕여왕이 뒤를 이었다. 진덕여왕은 이찬 김알천(金閼川)을 수상인 상대등에 임명했지만 실권은 이미 이찬 김춘추와 대장군 김유신이 장악하고 있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김유신의 빛나는 전공 기록을 보면 신라는 김유신 혼자 힘으로도 능히 백제를 정복하고도 남았을 것인데 무엇이 부족하여 굳이 당나라 군사를 불러들였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진덕여왕 3년(649년) 8월에 백제 장군 은상(殷相)이 석토성 등 신라의 7개 성을 치므로 여왕이 김유신을 비롯하여 죽지(竹旨)․진춘(陳春)․천존(天存) 장군 등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막게 했다. 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출전했지만 열흘이 지나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김유신이 오늘의 천안인 도살성 아래 군사를 주둔시킨 뒤 다음 전투를 대비하는데 물새 한 마리가 동쪽에서 날아와 김유신의 막사를 지나 백제 진영으로 날아갔다. 신라 군사들이 모두 불길한 징조라고 불안해하자 김유신이 이렇게 말했다.
“어허, 씰데없는 소리! 절대 불길한 일이 아니다. 오늘 밤 적의 첩자가 와서 염탐할 것이니 느그들은 마카 그눔아를 보더라도 모른 체하그레이.”
그날 저녁 김유신은 장수들을 불러 “구원군이 올 때까지 절대로 나가 싸우지 말고 각자의 진영만 굳게 지키라”고 명령했다. 백제의 첩자가 그 말을 듣고 그대로 돌아가 보고했다. 그 이튿날 김유신은 군사를 몰아 질풍처럼 백제군을 공격했다. 첩저의 보고를 받은 백제군 수뇌부는 과연 신라의 구원군이 온 줄 알고 우왕좌왕하다가 대패했다. 이 싸움에서 김유신은 백제의 최고사령관인 좌평 은상을 비롯하여 달솔 자견(自堅) 등 장수 10명과 군사 8980명을 죽이고, 달솔 정중(正仲)과 군사 100명을 생포했으며, 말 1000필과 갑옷 1800벌을 노획하는 대승을 거뒀다. 그런데 <삼국사기> ‘열전’은 이 대목에서 또 ‘돌아오는 길에 백제의 좌평 정복(正福)이 군사 1000명을 이끌고 항복했지만 모두 놓아주어 마음대로 돌아가게 했다’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좌평은 백제에서 으뜸가는 관직으로 재상급인데 그가 1000명이나 되는 군사를 거느리고 항복했지만 모두 놓아주어 돌아가게 했다? 과연 이것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는 소린가. 어쨌든 그렇게 빛나는 승리를 거두고 개선한 김유신은 진덕여왕이 몸소 도성 밖까지 나와 맞이하고 위로연을 베푸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진덕여왕이 재위 8년 만인 654년 3월에 죽었는데, 성골의 대가 끊어져버렸으므로 진골인 이찬 김춘추가 뒤를 이어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했다. 김춘추의 즉위에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즉 당시 화백회의에서는 수상인 상대등 김알천을 추대했으나 그가 “나는 나이가 많고 덕이 없으므로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다. 지금 춘추공만큼 덕망이 높은 이가 없으니 그야말로 세상을 다스릴 만한 영웅이다”면서 왕위를 양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열전’에는 김유신이 알천과 상의하여 김춘추를 추대했다고 했으니,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결국 무력을 앞세워 김춘추를 왕위에 앉혔다는 뜻이다.
무열왕은 51세 되던 즉위 이듬해에 60세의 김유신을 대각간에 임명하고 오래 전부터 꿈꾸어오던 삼한통일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런데 그해 정월에 고구려가 백제․말갈과 연합하여 신라의 성 33개를 빼앗아가는 일이 벌어졌다. 9월에 김유신은 백제에 쳐들어가 도비천성을 빼앗았다. 김유신은 군사를 훈련시키고 전쟁을 하는 한편 끊임없이 백제와 고구려에 첩자를 보내 정보를 수집했다.
그해 10월에 무열왕은 자신의 셋째 딸 지소(智炤)를 김유신의 아내로 주었다.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김유신은 지소부인에게서 5남 4녀를 낳았다고 한다. 당시 지소부인이 몇 살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나이가 환갑인 김유신은 정력이 비상하게 뛰어났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지소부인의 어머니는 바로 김유신의 누이동생인 문희이니 지소는 외삼촌에게 시집간 셈이다.
무열왕 7년(660년)에 김유신은 문무백관의 으뜸인 상대등에 올랐다. 몰락한 가야의 왕족이 마침내 신라 최고의 관직에 오른 것이다. 상대등이 된 김유신은 무열왕을 보필하여 어린 시절부터 키워온 삼한통일의 꿈을 실현시키기 시작했다.
꾸준히 첩보전을 펼쳐 백제의 내부 사정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환하게 알게 된 김유신은 마침내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여 무열왕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의자왕이 극악무도하여 그 죄가 걸(桀)․주(紂)보다도 더하니 이는 실로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그를 처벌하여 백성들을 구할 때입니다.”
그해 6월에 무열왕은 마침내 백제정벌군을 일으켜 태자 김법민과 함께 오늘의 경기도 이천인 남천정으로 올라가 진을 쳤다. 이는 고구려를 치려는 듯이 보여 백제를 기만하려는 양동작전이었다. 한편 당나라에 구원병을 청하기 위해 갔던 무열왕의 둘째 아들 파진찬 김인문(金仁問)이 당나라 대장군 소정방(蘇定方)․유백영(劉伯英)과 함께 13만 대군을 안내하여 덕물도(덕적도)에 이르러 수행원 문천(文泉)을 시켜 이를 보고하게 했다. 신라와 당군은 7월 10일 사비성에서 만나 함께 백제의 도성을 공격하기로 약조했다.
김유신은 장군 김품일(金品日)․김흠순(金欽純) 등과 함께 5만 정병을 이끌고 백제로 진격했다. 그런데 백제의 도성으로 통하는 마지막 요충인 황산벌에는 백제의 달솔 계백(階伯) 장군이 5000결사대를 거느리고 지키고 있었다. 이 싸움에서 김유신은 초전에 4전 4패하는 망신을 당한 끝에 자신의 친동생인 김흠순의 아들이며 친조카인 반굴(盤屈)과 김품일의 아들 관창(官昌) 등 두 어린 화랑을 제물삼아 가까스로 백제군을 물리치고 사비성으로 진격, 당군과 합세하여 백제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삼한통일의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김유신은 백제를 정복한 공로로써 대각간에 올랐다. 당시까지 신라 16관등 중 최고의 벼슬은 각간이었는데, 각간으로도 모자라 대각간 벼슬을 만들어 김유신에게 내린 것이다. 그런데 무열왕이 그 이듬해인 661년 6월에 재위 8년 만에 59세로 죽었다. 그 뒤를 이어 태자 법민이 즉위하니 제30대 문무왕이다.
문무왕 2년(662년) 정월에 김유신은 김인문․김양도 등 아홉 장군과 함께 평양의 소정방에게 군량을 수송하게 되었다. 그는 이미 68세의 고령이었지만 자청하여 이 일을 맡았다. 그러나 소정방이 군량을 받고 그대로 철수하는 바람에 김유신의 신라군도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문무왕 4년(664년) 정월. 70세가 된 김유신은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했으나 문무왕은 궤장과 안석을 내려주고 그대로 조정에 출사하게 했다.
신라가 또다시 당과 합세해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그로부터 4년 뒤인 문무왕 8년(668년). 그 지난해에 고구려는 일세의 영걸 연개소문이 죽은 뒤 그의 아들 삼형제가 권력투쟁을 벌이는 바람에 나라가 사분오열되었고, 당 태종의 패전 이후 설욕의 기회만 노리고 있던 당나라가 이적(李勣)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고구려정벌군을 일으킨 것이었다. 신라도 그해 8월에 문무왕이 친히 대각간 김유신을 비롯하여 30명의 장군과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향해 북진했다. 하지만 당군이 철군하는 바람에 신라군도 회군했다가, 그 이듬해인 문무왕 8년 6월에 당군의 공격 재개에 맞춰 고구려로 다시 출병했던 것이다.
당시 김유신은 대당대총관에 임명되었지만 74세의 고령에 풍질까지 앓고 있었기에 문무왕이 서라벌에 머물도록 하여 출전하지는 못했다. 그해 9월 21일 평양성이 함락됨으로써 고구려도 마침내 망하고 말았다. 고구려를 정복한 뒤 문무왕은 그해 10월에 논공행상을 통해 일등공신인 김유신에게 태대각간 벼슬을 내렸다. 대각간이란 신라 최초․최고의 벼슬에 태(太)자 한 자를 더 보태주었던 것이다. 삼한통일의 위업을 이룬 김유신은 문무왕 13년(673년) 음력 7월 1일에 노환으로 죽으니 그때 나이 79세였다. 그 뒤 흥덕왕 10년(835년)에는 김유신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했으니, 왕족이 아닌 신하로서 왕으로 추봉된 사람은 신라는 물론 우리나라 역사에서 김유신이 유일한 경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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