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2) 행 27:24-26
이 세상의 풍랑은 멈출 날이 없다. 풍랑이 멈추는가 싶으면, 또 다른 풍랑이 불어온다. 평안하다 할때 예기치 않은 사고가 일어나고, 잘 나간다고 할 때 풍랑이 덮치고, 건강의 위협으로 침상에 눕게 된다. 이유가 무엇인가? 풍랑 속에 닻을 잘못 내리기 때문이다. 물질에 닻을 내리고, 권력에 닻을 내리고, 명예에 닻을 내리기에 풍랑이 멈추질 않는 것이다.
여기에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닻이 있다. 바로 주님이 주시는 닻이다. 고난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닻을 내어 주신다. 첫째, ‘하나님 말씀’이라는 견고한 닻을 내어주신다. 둘째,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견고한 닻을 내어주신다.(지난 주 말씀)
그리고 오늘 풍랑 가운데 내어주시는 견고한 닻이 있다.
세 번째는 ‘믿음’이라는 견고한 닻이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행 27:25~26)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믿음의 닻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계속해서 선포하고 있다. 그리고 말씀이 임하는 거기에 믿음의 닻을 내린다. 나는 말씀대로 되리라고 믿는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성경은 분명히 그 믿음의 출처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신약성경에서 특히 ‘믿음’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이는 믿음은 구원과 직결되어 있고, 이 세상을 이기는 힘을 담고 있고, 인생의 갖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이 들어 갈 때 비로소 하나님이 일하시는 증거가 따르게 된다. 금년표어와 같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예배자”가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의 삶 속에 믿음에 담긴 말씀의 역사이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우리의 인생이 다할 때까지 끝까지 붙잡고 가는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다. 거센 풍랑 가운데 죽음의 두려움 앞에 선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5)
믿음은 그분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이다. 예수님께서 신변에 큰 어려움이 올 것을 알게 됨으로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한다. 한 마디로, “나를 믿으라.”고 하신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우리는 이 풍랑 가득한 세상에서 근심을 떨쳐버릴 수 있다. 바로 거기에 믿음의 닻을 내린다. 이 세상의 풍랑은 그칠 줄 모른다. 그러나 여기 큰 풍랑의 바다에 우리는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여 믿음의 닻을 내린다.
믿음은 그 분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믿음이 말씀의 권세를 현실로 이루는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경제학자 가운데 하버드대학 교수로 역대 대통령들의 경제자문역을 했던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박사가 있다. 그는 자서전에서 평생 자신을 도왔던 에밀리라는 여성 비서를 소개했다. 어느 날 갤브레이스 박사가 너무나 피곤하여 그 여자에게 누가 전화를 해도 깨우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얼마 안 지나서 벨이 울렸다. 백악관에서 존슨 대통령이 전화를 건 것이다. "존슨인데 갤브레이스 박사를 바꾸어 주시오."
"대통령각하 갤브레이스씨는 지금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리고 깨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깨우시오. 통화를 해야 되겠으니."
"안됩니다. 대통령각하 나는 각하가 아니라, 갤브레이스씨를 위하여 일하고 있습니다."
그 후 갤브레이스가 대통령에게 전화를 했을 때, 존슨 대통령은 유쾌한 기분으로 이렇게 말했다. “자넨 정말 훌륭한 비서를 뒀네. 백악관으로 보낼 수 없겠나.” 믿음은 그 어떤 강한 힘이 다가와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믿음은 신앙인에게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신앙인의 본질이다. 믿음은 세상을 이기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인의 본질이다. 그칠 줄 모르는 풍파에 약속의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께 믿음의 닻을 내리자.
네 번째는 ‘기도’하고 맡기는 견고한 닻이 있다.
목욕탕에서 옷을 벗어 옷장에 넣을 때 보면 옷장에 ‘주인에게 맡기지 않은 귀중품은 책임지지 않습니다.’라는 글이 붙어 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그렇다. 하나님께 맡기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지 않는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시골길에서 농부가 마차를 몰고 가고 있었다. 할머니 한 분이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이고 가고 있었다. 할머니가 반가워서 말했다. ‘여보게! 나 좀 태워 줄 수 있겠나?’ 농부는 얼른 할머니를 마차에 태워 드렸다. 그런데 머리에 무거운 짐을 그대로 이고 있었다. 농부가 말했다. ‘할머니! 짐을 내려 놓으세요.’ 할머니가 말했다. ‘나만 타는 것도 미안한 데 짐까지 어떻게?’
다 맡겨야 한다. 기도는 모든 것을 다 맡기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께 맡긴 것을 하나님은 책임져 주신다.
“열 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서 이리 저리 쫓겨가다가 자정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물을 재어 보니 스무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니라.”(행 27:27~29)
열 나흘 간 바울에게 계속된 풍랑 속에서, 새 날의 새벽을 기다리며 할 수 있었던 일이 무엇이었겠는가? 당연히 주님께 기도하는 일이다. 기도는 언제 어디서나 내릴 수 있는 닻이다.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믿고 기다리는 기도의 닻을 내리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연결된 ‘와이파이’라고 한다. 와이파이(WiFi)는 “Wireless Fidelity”를 줄인 말이다. 와이어레스는 선이 없다는 말이고, 피델러티는 충성을 의미한다. 연결된 선이 없더라도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는데 충실하다는 말이다. “왜? 여기는 와이파이가 안 터져~”하고 말할 때가 있다. 기도는 충실도가 높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해주는 WiFi이다. 따라서 우리 기도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
“왜? 여기서 기도가 안 터지지~”
바울은 말씀의 닻, 목적의 닻을 내리고, 믿음의 닻을 내리고, 기도의 닻을 내림으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한 섬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행 27:26) (->결과 44절)
구림 가족 여러분! 이제 배가 바뀌었다. 그들이 타고 왔던 276명(37절) 그들이 의지했던 배(고난의 배)는 좌초되고, 깨졌다. 더 이상 그 배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 배에서 나가야 한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이 임재하신 말씀이라는 새로운 배(생명선)로 옮겨 탔다.
전북 익산 하림 주식회사의 김홍국 회장실 벽면 액자에 이런 글이 있다. “이 풍랑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그 글은 자신이 운영하던 공장의 1,000억원의 피해를 낸 대형 화재(2003년)를 겪고 난후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한 후의 김 홍국 장로가 재기하면서 붙잡았던 믿음의 고백이었다. 잘 아시는 대로 이 글은 본래 찬송가 “고요한 바다로”(373장)의 한 구절이다.
“(1)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2)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이제 타야할 배가 바뀌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우리는 이 선포 안에 살고 있다. 이제는 안심하라! 우리에게는 이 풍랑이 그치지 않는 세상을 이기고 목적한 항구에 닿기 위해서 주신 닻이 있다. 여러분에게 다가온 고난으로 인해 더 빨리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말씀의 닻을 내리고, 목적의 닻을 내리고, 믿음의 닻을 내리고, 기도의 닻을 내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