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남평 드들강 옆에 서재 방원재를 열면서 욕심은 버리고 나를 찾아야겠다는 마음의 각오를 다졌다. 물론 지금도 나를 버리고 버린 나를 찾는다는 일은 진행형이다. 2018년부터 그 하나의 방안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화두를 정해 서재에 붙여놓고 매일 읽으며 마음을 다잡고 있다.
2021년 매년 정하던 화두를 정하지 못했다. 그만큼 마음이 심란하여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증좌다. 우선 생활이 차분하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코로나로 인한 점도 조금은 영향을 미쳤겠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내 마음안에 있다. 표현할 수 없는 마음으로 인해 평안을 가져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스럽게 3월이 되어 이청득심(以聽得心)이라는 화두를 정했다.
이청득심은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이야기로 '듣는 것으로 마음을 얻는다'는 뜻이다. 노나라 왕이 바닷새를 궁으로 데려와 술과 산해진미를 권하고 음악과 무희 등으로 융숭한 대접을 했으나 바닷새는 어리둥절 슬퍼하며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사흘 만에 죽었다는 일화에서 유래했다. 장자는 노나라 왕의 일화를 통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 노나라 왕은 자신이 즐기는 술과 음악 그리고 좋은 음식이 바닷새에게도 좋을 것이라는 착각을 한 것이다.
경청과 배려는 의사소통의 기본일 뿐아니라 서로의 관계를 돈독히 하여 신뢰를 만들고 그로인해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경청은 나를 발견하게 하고, 상대와의 공감을 이루며, 모두를 위해서는 상생을 가져다 준다. 옛 선인들은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라고 하여 말을 잘 하기 보다는 잘 듣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상대에 대한 험담은 자신의 쇠망을 가져오는 지름길이다. 상대의 눈높이에서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한해가 되고자 한다. 작년 말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진면목을 깨우쳤던 것처럼 상대의 완전한 입장이 되어 이청득심을 실천하고자 한다.
2020년에는 지도자는 겸손이 미덕이라는 학택지사(涸澤之蛇)를, 학택지사는 한비자에 나오는 말로 ‘물이 말라버린 연못 속의 뱀’이라고 직역할 수 있는데 어느 여름 연못 속의 물이 말라버려 뱀들은 물이 있는 다른 연못으로 옮겨 가야 했다. 날씨는 덥고 땅은 메말라 멀리 돌아가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어 뱀들은 위험이 따르더라도 사람 사는 마을들 가까이로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뱀들이 모여 의논을 하는데 작은 뱀이 큰 뱀에게 말하길 우리가 큰 뱀을 따라가면 모두 사람들에게 잡히겠지만 ‘큰 뱀이 작은 뱀인 나를 업고 가면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잡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면서 자기를 업고 가라고 제안했다. 이를 타당하다고 여긴 큰 뱀은 작은 뱀을 업고 이동하였는데, 사람들은 그 신기한 모습을 보면서 신령스러운 뱀이라 생각하여 감히 접근할 마음조차 갖지 않게 되어 뱀들은 무사히 물이 있는 연못으로 옮길 수 있었다.
이 고사는 아래 사람을 존중하면 자기 자신 역시 존중받게 된다는 의미로 ‘지도자는 겸손의 미덕을 갖춰야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보통 사람들은 후배나 아랫 사람을 약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렇게 행동한다고 해서 자신이 더 나아지거나 존경받는 게 아니다. 오히려 후배나 아랫 사람을 존중하고 우대해 주면 그 사람의 인품을 보고 사람들은 그 사람을 더욱 존경하게 되는 것이다.
2019년에는 공관병수(公觀並受)를, 공관병수란 '공평하게 보고 두루 받아들이다'는 뜻이다. 홍대용의 공부 태도를 두고 표현한 말이다. 홍대용은 학문이 크고 넓어 공평하게 보고 두루 받아들였다. 한쪽으로 얽매이는 편견이 없었다. 요즘 세상의 학자들이 학문을 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닦으려고 하기 보다는 출세를 하거나 돈을 벌려는 마음이 앞서있어 이론만 숭상하고 실용과 실행을 중시하지 않으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자신의 지식만이 옳다는 주장을 버리고 모든 것을 두루 받아들이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대도로 돌아가 작고 좁고 사사로움을 버리고 차이와 차별을 뛰어넘는 호연지기를 키워나가야 한다.
2018년에는 고간(古澗)을, 고간이란 높은 산속의 개울은 늘 깨끗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노자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하여 물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사람의 선(善)과 물의 맑음(淸)은 같다. 그렇다면 왜 사람에게 악이 생기는가? 욕심이 유혹하기 때문이다. 물 역시 흐리게 보이는 이유는 오물이 더럽히기 때문이다.
물의 형태는 작은 도랑과 못이 있고, 크게는 강과 바다가 있다. 모두 같은 물이지만, 도랑과 못은 오물이 모두 흘러들어 더러워지기 쉽고, 강과 바다는 넓으므로 탁한 물도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이니 맑을 수만 없다. 하여 맑은 물은 산의 개울뿐이다. 개울은 높은 곳에 있으므로 더러운 것이 흘러들 수 없고, 물살이 빠르므로 탁한 물이 남아 있을 수 없는 데다 돌과 모래가 걸러 준다.
물은 흐르고 쏟아지고, 가득 차고 넘치기도 하며, 돌아가기도 하고 빠르게 흐르기도 하고, 부딪치기도 하고 솟구치기도 한다. 벼랑에서는 폭포가 되고 구덩이에서는 소용돌이가 되며, 어떤 곳에서는 잔잔하고 곧게 흐르지만 어떤 곳에서는 구불구불 굽이치기도 하고, 사나운 듯도 하고 성난 듯도 하며, 잠기기도 숨기도 한다. 장마가 지면 불어나고 가뭄이 들면 숨고 얼음이 얼면 막힌다.
이렇듯 변화가 지극하지만 맑기는 그대로이다. 졸졸 흐르고 콸콸 흐르며 밤낮으로 멈추지 않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쉬지 않는다. 움직여 흐르는 물은 막힘없이 두루 통한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앞뒤를 다투지 않으니 거울로 삼아야 한다. 또한 멈추어 있는 물은 차기도 하고 비기도 하니, 도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물을 보고 스스로 노력하여 마음을 맑게 하고 항상 선을 잃지 않기 위해 정진해야 한다. 고간의 뜻이다.
아울러 함께 화두를 삼았던 '상우천고(尙友千古)'도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시대에 마음에 맞는 벗을 구하지 못하여 천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옛사람과 벗이 되고자 한다는 의미다.
맹자(孟子)가 만장(萬章)에게 말씀하기를 - 한 고을의 선사(善士)는 한 고을의 선사들과 사귀고, 일국(一國)의 선사는 일국의 선사들과 사귀고, 천하의 선사는 천하의 선사들과 사귄다. 천하의 선사들과의 사귐으로 만족하지 않으면 고인(古人)들을 상론(尙論: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논함)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인들의 시(詩)를 읊고 책을 읽는데, 그 사람들의 사람됨이 어떠했는지 모른대서야 되겠는가. 그러한 까닭에 옛사람이 살던 시대를 논하게 되는 것이니, 이렇게 하는 것이 상우(尙友) 즉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서 옛사람을 벗으로 사귄다고 하는 것이다.
선각자의 뜻을 따르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랴, 그러나 게을리하지 않고 그 실천에 진력한다면 언제인가는 가까이라도 가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