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가 해체된다는 느낌은 신체 이미지, 외부 지각 또는 시간 인식에 혼란이 있거나 불안정하면 쉽게 곧바로 생긴다. 그리고 우리가 보아왔듯이, 이 모든 것은 편두통 아우라가 진행되는 동안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환자들은 상상할 수 없는 공포스러운 과정을 통해 우주의 반을 잃어버렸음을 갑작스럽게 알 수도 있다. 그런데 고차원적인 기능은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관찰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장애가 좀더 만성이 되거나 확장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모든 감각과 여러 가지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잃게 된다. 이런 환자들은 반쪽 공간과 반쪽 우주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의식이 재구성되기 때문에 자신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에덜먼은 의식이 지각의 통합에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그 지각의 통합은 과거와 현재의 지속적인관계인 역사적 연속성이라는 감각과 관련된 것이다. 에덜먼의 용어로 말하면, ‘최초의’ 의식은 몸이 받아들인 세상에 대한 감각으로 만들어져서, 공간에 대한 의식(‘개인적인’공간으로서)과 시간에 대한 의식(‘개인적인’ 시간 또는 역사)으로 확장된다. 그런데 심한 암점을 겪게 되며 이 세 가지 의식이 모두 사라져버린다. 더 이상 자신의 몸이나 시야의 일부(예를 들면 왼쪽 반)를 지각할 수 없게 되는데, 그러면서 ‘공간’도 사라지고 과거도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암점은 신체의 자아나 최초의 자아 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의식 속에도 있다. 이 암점은 참으로 사람을 공포감에 휩싸이게 만드는데, 인간의 고위의식과 초자아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할 수 있지만, 그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깊은 ‘자아’와 의식의 교번은 편두통을 겪는 동안 몇 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짧은 시간 동안에도 인간은 신체와 정신의 절대적인 정체성에 대해 저항할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 또한 의식과 자아와 같은 인간의 최고 기능은 실재하지 않고 자족적이지 못하며 몸을 ‘넘어서지’ 못하지만, 신경심리학적인 구조와 그 과정은 신체적인 경험과 그 통합의 계속성에 의존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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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광암점과 음성암점, 안구함몰, 서맥, 저혈압, 기절, 앙고르 아니미 Angor Animi....
기이한 아우라와 맹점의 발생이라는 내 증상을 의사들에게 설명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의사들과 대화하기를 포기했다. “안구가 함몰되는 느낌이 듭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나를 쳐다보는 안과의사의 기괴한 눈빛이란! 다행히도, Dr. Sacks의 저작을 통해 섬광암점과 음성암점과 함께 시작되는 내 증상이 ‘아우라를 동반한 편두통’임을 발견해 낼 수 있었고, 이 발견과 더불어 내 ‘골치 아픈’ 삶에는 한줄기의 빛과 안식이 찾아왔다.
(Oliver Sacks가 아니었다면 나는 어찌되었을까. 세상의 모든 기이한 증상에 관심을 갖고, 증상 너머의 ‘사람’을 보고자 갖은 애를 썼던 그가 아니었다면, 그렇잖아도 어둑하던 내 삶은 말 그대로 암흑과 같은 지하동굴이나 터널 속에 유배된 신세나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Dr. Sacks 생전에, 그에게 무수한 편지가 당도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데, 만약, 그분이 여태 살아 계셨다면, 나도 편지를 쓰지 않을 길이 없다.)
소위 ‘인간’이라는 범주 안에서 경험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정신과 육체의 선입견으로 인해, 인간이라는 위태로운 균형이 아차 하는 순간 무너지는 그 실조(失調)의 찰라에서야만 슬밋 드러나는 인간됨의 놀라운 비밀과 가능성을 세상은 죄다 놓치고야 만다. 그 일례로, 흔히들 말하는 ‘환각’, 즉, 현실에 없는 것을 보는 양성(또는 긍정적) 환각이 뒤집힌 형태라 할 수 있는, 현실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음성환각(negative hallucination)은 소위 ‘정상인’들에게 만연해 있는 증상이다(“자극하는 면은 섬광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고, 억제하는 면은 음성환각, 근육긴장, 상실, 기절 등으로 나타난다”).
아우라를 동반한 편두통을 겪는 나의 경우, 음성환각은 음성암점의 등장과 함께 발생하는 반맹과 유사한 시야상실로서 드러나는데, 음성환각이 비단 육체의 문제에 국한되거나 육체를 통해서만 발현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볼 수 없도록 구조화되어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깊은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나는 동물들에게는 음성환각이 발생하지 않거나, 발생한다 해도 그 빈도가 인간에 비해 극도로 미미할 것이라고 예상해본다).
나는 음성환각의 발현여부와 수준을 결정하는 주요한 parameter중 하나가 바로 ‘상처’와 연관이 되어 있다고 여기는 중이다. 누구나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방어하기 위한 일종의 자아준위(準位)를 운용하고 있는데, 에덜만의 용어를 빌리자면, <몸의식+시간의식+공간의식>의 복합체로서 존재하는 의식구조 안에서 마치 전자(電子)처럼 존재하는 상처의 맹아들에 역치 이상의 내외부적 충격이 가해지는 순간, 바닥 준위 또는 기저 준위(Ground Level/State)에서 높은 에너지 준위로 자아에너지는 천이하게 된다.
흔히, 들뜬준위 또는 여기 준위(Excited Level/State)로써 명명되는 이 상태는 그 본질에서 몹시 위태로운 것으로서, (전자기학의 개념에서는 나노초 정도 이후에는) 곧장 에너지를 방출하면서 낮은 에너지준위로 이완(Relaxation)하게 마련이고, 그 이동과정에서 열방출이나 형광 등 인광에 의한 광자방출이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바로 이 ‘나노초’에 해당하는 들뜸의 순간, 에너지를 한껏 흡수/응축하게 된 인간은 잠시 ‘나’를 규정 짓던 한계들과 결별하며 ‘나-아닌-나’ 혹은 ‘들뜬 나’의 상태가 되고, 이 같은 고 에너지 준위로터 저 에너지 준위로 하강하는 이완의 순간, ‘들뜬 나’로서의 인간은 증폭되었던 자아의 가능성과 한계가 원상으로 복구되며 ‘빛’이나 ‘온기’를 얻게 되는 것이라고 여겨본다(여담이지만, 모든 치유의 힘은 ‘열’과 ‘온기’를 방출한다고 여겨지는 어떤 신체 혹은 정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 모든 변화의 시작에는 “마치 전자(電子)처럼 존재하는 상처의 맹아”들과, 이에 가해지는 “역치 이상의 내외부적 충격”이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상처의 맹아의 활성화된 수준이 미미하거나, 그에 가해질 적절한 외부적 충격이 없다면, 나의 이론상, 그 인간은 존재론적 섭동에의 가능성이 거의 없다. 좋게 말하면, ‘안정된’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볼 장 다 본’, 변화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다.
어떤 이들은 제 들뜸으로 주변을 긴장케 하고(주변을 향해 정신과 육체의 흥분상태를 그대로 내어 보이는 경우로서, 흔히 말하는 분노조절장애나, 메시아증후군에 가까운 연극성 인격장애가 그러한 경우에 속해 있다), 제 이완으로 주변을 오염시키기도 한다(주변을 향해 정신과 육체의 ‘배설’을 해대는 경우로서, 피해자의 동의 없이 이루어지는 가해자의 ‘회개'가 그러한 경우에 속해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제 들뜸과 이완의 과정과 그 일련의 부산물을 자신과 타인을 이롭게 하는 일에 아낌없이 내어주기도 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발경(發勁)’이라는 개념을 떠올려 본다.
그 정의에 있어 발경이란 중국무술의 용어로, 좁은 의미로는 중국무술의 타격 이론, 넓은 의미로는 모든 무술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타격법을 가리킨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도 발경을 가르치는 곳에서는 근력 뿐만이 아니라 운동에너지의 효과적인 전환 및 그것을 발현시키는 근육과 관절의 움직임 일체를 발경의 가장 근본적인 힘으로 본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 과정이나 그것을 통해 발생하는 에너지를 '기'라는 단어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사실 이것이 내가권에서 흔히 말하는 기를 이용한 발경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https://namu.wiki/w/%EB%B0%9C%EA%B2%BD
사고현장에서 트럭에 깔린 아기를 구하기 위해 트럭을 번쩍 들어 올린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종종 전해지는데, 이야말로 발경(發勁)의 가장 드라마틱한 예시라 할 수 있다. 물론, 내가 궁리하고 꿈꾸고 또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하는 발경은, 이런 놀라운 지경에 속한 수준은 아니다. 내가 꿈꾸는 발경으로서의 삶이란 공부의 소소한 실천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서, 1) 바닥 준위의 ‘나’에게 다가와 안정화되어 굳어가는 자아의 준위체계를 자극시키는, 특히, 역치 이상의 에너지로서 상처의 맹아에 가해지는 모든 자극을 감사히 받아들이며, 2) 그로 인해 발생하는 들뜬 준위에서 얻어지는 위태로운 에너지 과잉상태에 일방적으로 먹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를 ‘물리적’으로 돕는 일에 發勁할 수 있도록 그 과잉에너지를 제어하는 법을 익히고, 3) 그 뒤로 이어지는 이완 상태에서는, 한껏 달구어진 너럭바위가 늦은 저녁까지 그 온기로 주변을 다숩게 하고, 반딧불이가 아무 의도나 의지 없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듯, 들뜬 상태의 자연스러운 해소에서 얻어지는 온기와 빛으로 ‘그저 사는 일’로서 정리/정의 될 수 있다.
아우라를 동반한 편두통으로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보니 생각이 쓸데 없이 길어지고 말았다.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이다: 아우라를 동반한 편두통이라는 증상을 통해 알게 된 작은 깨달음(공부는, 들뜬 준위의 제어와 그 활용에 달려 있다)을 생활 속에 잘 꾸려나가 볼 참이다.
고전적 편두통에게 뒤늦게나마 고맙고, 이 증상을 임상증례학의 관점에서 환히 밝혀주신 Dr. Sacks에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감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