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의 종류를 불문하고, 사람이 가난하게 되면 빚을 지기 쉽다.
가난하게 되면 의지할 사람이 거의 없어지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쩔 수 없이
은행에서 빚을 낼 수밖에 없고, 그 빚을 갚기 위해 다른 빚을 내야하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그러다가 은행권에서 마저 신용불량이 되면 최종적으로 사채시장에서 돈을 빌릴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채무자라는 형틀을 벗어나기가 거의 불가한 것이 현실이다.
사전에서의 빚은 남에게 갚아야 할 돈으로, 꾸어 쓴 돈이나 외상값 따위를 말한다.
이렇게 보면 빚이란 돈에 한정된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빚은, 우리가 받은 것에 대해 갚지 못한 모든 것이다.
따라서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이 세상에서 빚지지 않은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 빚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근원적인 힘(하늘· 조물주· 하느님· 신 등)에 대한 빚이다.
이것이 우리가 진 빚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빚으로, 이것이 없다면 우주 만물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근원적인 힘(신)에게 자신의 존재가치만큼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가는커녕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살아간다.
고로 우리는 근원적인 힘(신)에게 자신의 존재 가치만큼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자신이 원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빚이 아니라고 말하거나,
이것은 모든 생물들에게 부여해준 신의 은총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존재를 원했는지 아닌지는 자신의 존재 이전의 문제인데, 그대가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또 신이 언제 모든 생물들에게 공짜로 베푸는 은총이라고 한 번이라도 말한 적이 있는가?
그리고 만일 그대가 신이라면, 자신을 존재하게 해준 것에 대해 단 한 번도 감사하지 않으면서,
수많은 불평불만을 줄줄이 늘어놓는 인간에게 공짜로 은총을 베풀겠는가?
둘째, 대자연(우주만물)에 대한 빚이다. 그 중에서 최우선적인 것은 공기· 물· 음식이다.
사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략 공기는 3분, 물은 3일, 음식은 3주 동안 마시거나 먹지 못하면 인간은 죽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3분, 3일, 3주를 합쳐서 ‘333생존법칙’이라 한다.
또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지구와 햇빛도 필수적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토록 중요한 공기를 마시고 햇빛을 받으며 지구에서 살아가지만,
단 한 푼도 그 대가를 지불한 적이 없다. 이에 대해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것들은 대 자연의 은택(恩澤)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공짜로 주어진 것이라고.
그러나 대자연이 언제 모든 사람들에게 은택으로 주는 공짜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따라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기에 찬 인간들의 입에서 나온 말에 불과하다.
그리고 은택이나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은 빚이 아닌가?
엄격히 따져 은택 또한 하나의 빚이며,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다면 모든 사람들의 빚이다.
그럼에도 한 번도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나,
은택에 감사하는 마음조차 없는 이기적인 인간들에게 누가 공짜로 공기와 햇빛과 지구를 주겠는가?
그런데도 오만한 인간들은 한술 더 떠서 공기나 햇빛과 지구가 당연히 있어야 할 것처럼 생각하고,
이런 것들이 마치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셋째 인간들에게 진 빚으로, 먼저 부모님에 대한 빚이다.
부모님의 은혜는 끝이 없는 것이기에, 우리가 평생 노력해도 부모님 은혜의 수십 만분의 일도 갚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부모님께 한량없는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부모님께 제대로 감사하지도 않고,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살아간다.
다음으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빚이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혼자서는 살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것도, 또 부자가 된 것도 모두 남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모두가 여러 사람들의 덕분이 아닌가?
이렇게 남의 덕분으로 살아가면서도, 사람들에 대해 감사하거나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알게 모르게, 서로가 서로에게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넷째,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이 몸도 내 것이 아니라 빌린 것이다.
빌린 것을 돌려주기 전에는 언제나 빚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나’ 또는 ‘내 것’이라 주장하는 이 몸조차 내 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 내 것이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오로지 빚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한량없는 빚을 지고 살아가는 채무자들이다.
따라서 “나는 단 한 푼의 빚도 없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
이렇게 한량없는 빚을 지고도, 빚을 갚으려는 노력은 고사하고 빚을 진 사실조차 망각하여,
지금 자신의 처지가 남(신· 자연· 인간)의 덕분으로 순간순간 목숨을 연명하고 있음을 모르는
이기적이고 파렴치(破廉恥)한 동물을 과연 인간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만일 남이 자기 돈을 빌려 갚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면,
전후 사정을 살피지 않고 입에 게거품을 물고 잡아먹을 듯이 설치고,
온갖 욕설과 수모· 공갈· 협박· 폭력을 멈추지 않는다.
빚진 자가 빚진 자를 괴롭힌다는 것은 참으로 웃기는 일이 아닌가!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그리고 채무자라고 해서 다 같은 채무자가 아니다.
사치와 낭비로 인하여 스스로 자초하여 빚을 지는 경우도 있지만,
가정의 우환으로 불가항력적으로 빚을 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남에게 진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하겠지만,
우리가 이런 전후 사정을 살펴서 그에 따라 사람을 대할 수 있어야 인간이다.
그리고 또 혹시 아는가!
황당한 얘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지금 그대에게 빚을 진 사람은 전생에 그대에게 빚을 준 사람이고,
그대는 그 사람의 돈을 떼어먹은 사람인지?
그리고 지금 그대에게 빚진 사람이, 다음 생에 그대에게 빚을 주는 사람이 될지?
만일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모를 뿐, ‘그런 일은 없다’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처럼 우리 모두가 한량없는 빚을 지고 살아가는 ‘채무자’라는 사실과 여타 정황들을 이해한다면,
빚진 채무자를 못 견딜 정도로 닦달하거나 죽음으로 내모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폭력이고 간접살인 행위로서 살아서나 죽어서도 환영받지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위 사람들을 좀 더 따뜻하게 대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하지 않을까?
나아가 이러한 사실을 넘어, 궁극적으로 ‘나’ 또는 ‘내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꿰뚫어 볼 수 있을 때, 참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含笑 斷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