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사강의(經史講義) 19 ○ 중용(中庸) 3 갑인년(1794)에 김근순(金近淳), 이존수(李存秀), 조만원(趙萬元), 서준보(徐俊輔), 조석중(曺錫中), 이면승(李勉昇), 유태좌(柳台佐), 홍낙준(洪樂浚), 유원명(柳遠鳴), 김희락(金煕洛), 구득로(具得魯), 송면재(宋冕載), 신현(申絢), 강준흠(姜浚欽), 홍명주(洪命周), 황기천(黃基天), 이동만(李東萬), 김이재(金履載), 김처암(金處巖), 이영발(李英發), 홍석주(洪奭周) 등이 대답한 것을 뽑았다 ○ 김이재(金履載)는 경술년(1790)에 뽑은 것을 그대로 붙였다. 김처암(金處巖), 이영발(李英發), 홍석주(洪奭周)는 을묘과(乙卯科)로 나중에 뽑아 넣었다.
편제(篇題)
불편불의(不偏不倚)는 미발(未發)의 중(中)이고 무과불급(無過不及)은 이발(已發)의 중(中)이라는 것은 대개 도체(道體)의 전체를 들어서 동(動)과 정(靜)을 겸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편(偏)과 의(倚)라는 두 글자는 끝내 의문이 남는다. 마음이 이미 형체(形體)와 방소(方所)가 없는 것이고 보면 어찌 한곳에 치우침이 있다거나 한쪽으로 기울어짐이 있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불의(不倚)라는 두 글자는 본디 여여숙(呂與叔)의 중용설(中庸說)에서 나왔는데, 정자(程子)가 비판하기를, “불의(不倚)가 중(中)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지 못한 말이다. 만약 불의라는 말을 하려면 반드시 사방(四旁)이 있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주자의 기의(記疑)에도 이 말을 실어 놓았는데, 유독 여기서는 도리어 여씨의 학설을 가져다 따른 것은 어찌해서인가?
[김희락이 대답하였다.]
마음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치우침이 없고 방소(方所)가 없기 때문에 기울어짐이 없습니다. 형체가 있고 방소가 있다면 바로 치우치거나 기울어지는 곳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 불의(不倚)라는 두 글자만 놓으면, 중(中)이 일찍이 한쪽으로 기울어짐이 없다고 한 것에는 참으로 맞는 말이겠으나, 중(中)이 일찍이 한곳에 치우침이 없다는 데에는 흠결이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정자가 분명하지 못하다고 비판한 것입니다.
‘용(庸)은 평상(平常)이다’라는 한 구절은 중도(中道)의 평상을 거듭 밝힌 것이지 중(中) 이외에 다시 용(庸)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주자가 일찍이 자로문강장(子路問强章)의 중립불의(中立不倚)의 뜻을 논하여 말하기를, “백이(伯夷)가 이와 같다.”고 하였고, 또 일찍이 용(庸) 자의 뜻을 논하여 말하기를, “백이가 한 일은 전혀 용(庸)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두 말을 합쳐서 보건대, 중(中)을 할 수 있는 자라고 해서 반드시 용(庸)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용(庸)을 할 수 있는 자라고 해서 반드시 중(中)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중(中) 밖에 용(庸)이 있고 용(庸) 밖에 중(中)이 있으니, 이것은 《장구》의 뜻과 과연 모순이 없겠는가?
[김희락이 대답하였다.]
중립불의(中立不倚)의 중(中)과 중용(中庸)의 중(中)은 다소 분별이 있습니다. 백이의 중은 바로 중립불의의 중이고,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아니하고 지나침도 없고 못 미침도 없는[不偏不倚 無過不及] 중이라고는 아직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맹자》에 이르기를, “세 사람은 마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각기 그 한 시절을 차지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여기서 백이가 한쪽으로 매우 치우쳤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미 치우쳤다고 하였으면, 중용(中庸)의 용(庸)으로써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혀 용은 아니다’라고 한 뜻입니다.
여기 “중(中)은 천하의 정도(正道)이고 용(庸)은 천하의 정리(定理)이다.”라고 하여, 중(中)에는 도(道)를 말하였고 용(庸)에는 이(理)를 말한 것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중(中)에는 이(理)를 말할 수 없고 용(庸)에는 도(道)를 말할 수 없는가? 그리고 《주역(周易)》에 대한 정자(程子)의 전(傳)에는 ‘중(中)은 정(正)보다 무거우니 정(正)이더라도 반드시 중(中)인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있으니, 중(中)과 정(正)은 경중이 분명히 다르고 차이가 분명히 있는데, 유독 여기서는 곧바로 정(正)으로써 중(中)을 풀이한 것은 어찌해서인가? 정(正)이라는 한 글자가 과연 중(中) 자의 뜻을 다 담고 있을 수 있는가?
[이면승이 대답하였다.]
이(理)에는 치우치거나 온전하거나 함이 없는데 치우치지 아니함을 중이라고 한다면, 치우치지 아니한다는 말 아래에는 이(理) 자를 붙일 수가 없고, 도(道)는 허위(虛位)인데 바뀌지 아니함을 용(庸)이라고 한다면, 바뀌지 아니한다는 말 아래에는 도(道) 자를 붙일 수가 없습니다. 이미 정도(正道)라고 하였으면 무게가 정(正) 자에 있고, 정(正) 자 하나를 낱개로 들어서 중(中) 자를 풀이하는 것과는 다름이 있을 것입니다.
위는 편제(篇題)이다.
[篇題]
不偏不倚。未發之中也。無過不及。已發之中也。蓋所以擧道體之全。而兼動靜爲言者也。然偏倚二字。終屬可疑。心旣無形體方所。則豈有偏於一處。倚於一邊之可言耶。且不倚二字。本出於呂與叔中庸說。而程子批之曰不倚之爲中。其言未瑩。若說不倚。須是有四旁。朱子記疑亦載是說。而獨於此反襲呂氏之說者何也。
煕洛對。心無形體故不偏。無方所故不倚。若有形體而有方所。便有偏倚處矣。然孤著此不倚二字。則於中未嘗倚於一邊誠得矣。而於中之未嘗偏於一處爲有欠。故程子批以未瑩。
庸平常也一句。所以申贊中道之平常。非謂中之外復有庸也。然朱子嘗論子路問強章中立不倚之義曰伯夷如此。又嘗論庸字之義曰伯夷所爲。都不是庸。合二說而觀之。則能中者未必能庸。能庸者未必能中。而中外有庸庸外有中。此與章句之旨。果無所矛盾耶。
煕洛對。中立不倚之中。中庸之中。煞有分別。伯夷之中。政是中立不倚之中。而謂之不偏不倚無過不及之中則未也。孟子章句曰三子如春夏秋冬之各一其時。是伯夷之極於一偏可知。旣謂之偏則不可以中庸之庸言之。此政都不是庸之意也。
此云中者天下之正道。庸者天下之定理。中則言道。庸則言理者。其義何居。中不可以言理。庸不可以言道歟。且程子之傳易。有曰中重於正。正未必中。則中與正之輕重同異。蓋亦較然。而獨於此直以正解中者何也。正之一字。果可以盡中字之義耶。
勉昇對。理無偏全。而不偏之謂中則不偏之下不宜著理字。道爲虛位。而不易之謂庸則不易之下不宜著道字。旣曰正道云爾則重在正字。與單擧正字以釋中字。有異也歟。以上篇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