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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불가사의(不可思議)를 가지고 경론(經論)의 전요(詮要)로 하느니라. 이 마음을 깨달아 앎을 이름하여 여래(如來)라 하며, 이를 깨달아 알고나면 십계(十界)는 나의 몸이고, 나의 마음이고 나의 모습이니라. 본각(本覺)의 여래(如來)는 나의 신심(身心)이기 때문이니라. 이를 알지 못하는 때를 이름하여 무명(無明)이라 하며 무명(無明)은 밝음이 없다고 읽느니라. 나의 마음의 모습을 분명(分明)하게 깨닫지 못함이라. 이것을 깨달아 아는 때를 이름하여 법성(法性)이라 하니, 고(故)로 무명(無明)과 법성(法性)은 일심(一心)의 이명(異名)이니라. 이름과 말은 둘일지라도 마음은 오직 하나의 마음이며, 이런 까닭에 무명(無明)을 단절(斷切)해서는 안 되느니라. 꿈의 마음인 무명(無明)함을 단절(斷切)하면 생시(生時)의 마음을 잃게 되는 고(故)로 통틀어 원교(圓敎)의 뜻은 일호(一毫)의 혹(惑)마저도 단절(斷切)하지 않으니 고(故)로 일체(一切)의 법(法)은 모두 이는 불법(佛法)이라고 하느니라.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三世諸佛總勘文敎相廢立) 미노부에서 58세에 술작『어의구전御義口傳』에「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나무南無란 범어梵語이고,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는 한어漢語이며, 범한梵漢 공시共時에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하느니라.」(신편어서 p.1719)라고 있습니다.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영구불변의 법法이며, 구극의 언어입니다. 그것을 번역하여 제목을 불러서는 안됩니다.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의미를 배우기 위해 어서御書를 우리나라에서는 우리말로, 영국에서는 영어로 번역하여 해석하는 것은 괜찮지만, 부르는 제목은 어디까지나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입니다.
제목은 순간에 부처에게 통하는 세계 공통어입니다. 예를 들면, 범어에서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를 살달마薩達磨분다리가芬陀梨伽소다람蘇多覽으로 말한다고 해서 제목을 나무 살달마 분다리가 소다람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소리나 리듬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음악에도 각각의 곡에는 독특한 음률이 있습니다. 베토벤의 곡을 봐도 그 곡은 베토벤이 느끼는 마음의 음률이며 민족이나 언어, 문화의 차이를 뛰어넘어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습니다.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란 우주의 법칙이며, 대우주의 근본 리듬에 합치해 가는 음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제목 소리의 울림에 생명이 감응하는 것입니다. 제목이란 그처럼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입니다.
그런데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각 나라 언어로 번역한다면 제목의 음률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제목을 각 나라 언어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칠자중(七子中)에서 제일(第一) 제이(第二)는 일천제(一闡提) 방법(謗法)의 중생(衆生)이며, 제병중(諸病 中)에서는 법화경(法華經)을 비방(誹謗)하는 것이 제일(第一)의 중병(重病)이니라. 제약중(諸藥中)에는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가 제일(第一)의 양약(良藥)이니라.
법화취요초(法華取要抄) 미노부에서 53세에 술작“일련정종日蓮正宗은 일본의 종교가 아닌가?”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분명 일본에서 태어난 니치렌 대성인이 창시한 종교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일본인이 믿었기 때문에 일본종교라는 사고방식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 종교의 목적과 가치관이 일본이라는 한나라에 국한되느냐 아니면 전세계를 향하고 있느냐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계적인 종교란 민족을 초월해 세계에서 신앙하는 종교를 말합니다. 불교, 크리스트교, 이슬람교가 그렇게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크리스트교와 이슬람교도 처음부터 세계종교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에 비해 불교는 처음부터 세계종교로 설해지고 출발했습니다.
법화경에는「염부제閻浮提의 내內에 넓게 유포流布시켜 단절斷絶케 하지 않으리라.」(개결 p.668) 라고 설해져 있습니다. 또 열반경에는「염부제閻浮提에 있어서 마땅히 널리 유포할지어다.」라고 설해져 있습니다.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구극究極은 일체중생에게 불성佛性을 인정하고, 생명의 존엄을 구체화하는 방도를 제시하고 진정한 평등을 설합니다. 전인류에게 공통된 보편성을 갖고 있습니다. 본래부터 세계에 유포될 필연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체중생의 성불의 요체要諦를 밝히신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佛法도 당연히 세계종교입니다. 그것을 대성인 자신이 명확하게 선언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어서御書속에서 전세계를 의미하는 일염부제一閻浮提, 남염부제南閻浮提 또 그 약칭인 염부제閻浮提, 부제浮提라는 말은 약 2백군데 이상 사용하시고 있습니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대성인의 불법이 세계에 널리 개방된 스케일이 큰 가르침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디 종교는 국적을 불문하는 사안이기에 일련정종日蓮正宗을 일본종교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큰 잘못입니다.지금 니치렌(日蓮)은 지난 건장(建長) 오년(五年) 계축(癸丑) 四月二十八日부터 금년(今年) 홍안(弘安) 삼년(三年) 태세(太歲) 경진(庚辰) 十二月에 이르기까지 이십팔년간(二十八年間) 또한 타사(他事)는 없었다, 다만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칠자(七字) 오자(五字)를 일본국(日本國)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입에 넣으려고 힘쓸 뿐이로다. 이는 즉(卽) 모(母)가 적자(赤子)의 입에 젖을 넣으려고 힘쓰는 자비(慈悲)이니라, 이는 또 때가 맞지 않음이 아니며 이미 불기(佛記)의 오오백세(五五百歲)에 해당(該當)하였다, 천태(天台)·전교(傳敎)의 때는 때가 아직 오지 않았었지만 일분(一分)의 기(機)가 있는 고(故)로 조금 유포(流布)하였는데, 황차 지금은 이미 때가 이르렀으니 설령 기근(機根)이 없고 수화(水火)와 같이 반대(反對)한다 해도 어찌 홍통(弘通)하지 않겠느뇨.
간효팔번초(諫曉八幡抄) 미노부에서 59세에 술작남묘호렌게쿄는 한자로 南無妙法蓮華經이라고 쓰며, 나무아미타불은 南無阿彌陀佛이라고 씁니다. 조금 어렵지요?
여기에 공통으로 앞에 두 글자, 나무南無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나무南無란 귀명歸命한다는 말이며, 신앙의 대상에게 몸과 마음을 모두 깊이 귀의歸依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은 아미타불阿彌陀佛에 귀의歸依한다는 뜻이며,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에 귀명歸命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는 석존이 설한『법화경法華經』, 즉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경전經典 제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제목題目을 부른다고 하지요. 『법화경法華經』은 불교의 최고 경전으로 가장 넓은 지역과 많은 민족들에 의해서 애호된 경전經典중의 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성인은 석존이 설한 『법화경法華經』을 통해 묘법妙法의 이치이자 우주의 근본 법칙을 깨달았기에 그 이름으로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부른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아미타불阿彌陀佛이란 이 세계에서 십만억토를 지난 서방 극락세계에 있는 부처입니다. 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본존本尊으로 하고 있으며, 염불念佛의 가르침입니다. 염불은 이 세상은 오염된 세계이며 거기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불도를 닦을 수 없습니다. 단지 아미타불阿彌陀佛에게 매달려 그 이름을 부름으로써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염불종에서는 “염불 이외의 가르침으로는 한 사람도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하여“염불의 경(經) 이외의 경을 버려라, 닫아라, 제쳐놓아라, 팽개쳐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석존의 진의眞意이며 가장 올바른 법인『법화경法華經』을 비방하는 것이 되므로 염불종의 가르침을 믿고 염불을 불러도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오히려『법화경法華經』에는 “법화경을 믿지 않고 비방하는 자는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진다”고 설해져 있습니다. 따라서 법화경을 비방하고 있는 염불의 가르침을 믿고 나무아미타불이라고 부른다면 무간지옥이라는 끊임없는 괴로움의 경애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잘못이라고 말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독을 아무리 약이라고 믿어도 독은 독이기 때문이지요.
특히 종교의 경우 무엇을 믿는 대상으로 하는가에 따라 인생의 행과 불행이 결정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한편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니치렌대성인의 가르침의 구극究極이며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그 일단을 말하자면 『법화경法華經』의 간요肝要이며 우주와 생명을 관철하는 구극의 법리입니다.
대성인은『아키모토어서秋元御書』에「삼세시방三世十方의 부처는 반드시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字를 종種으로 해서 부처가 되시었다.」(신편어서 p.144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듯이 대성인님이 나타낸 삼대비법三大秘法의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야말로 성불이라는 절대적 행복경애를 실현할 수 있는 진실한 불법입니다.니치렌(日蓮)은 태어났을 때부터·지금껏 일일(一日) 편시(片時)도·마음 편한 일은 없었다.이 법화경(法華經)의 제목(題目)을 홍통(弘通)하려고 생각할 뿐이니라. 명심(銘心)하고 명심(銘心)하여 자타(自他)의 생사(生死)는 알 수 없지만, 임종(臨終)의 시각(時刻), 생사(生死)의 중간(中間)에 니치렌(日蓮)이 반드시 마중하러 나갈 것이외다.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성도(成道)는 자축(子丑)의 끝, 인(寅)의 시각(時刻)의 성도(成道)이니라. 불법(佛法)의 주처(住處)는 귀문(鬼門)의 방향(方向)으로 삼국(三國) 다같이 서느니라. 이들은 상승(相承)의 법문(法門)이로다, 상세(詳細)히는 다시 또 말씀드리겠소. 공공근언(恐恐謹言). 굶주려서 먹을 것을 바라고·목말라서 물을 그리듯이·그리워서 사람을 보고 싶어하듯이·병(病)에 약(藥)을 의지하듯이 용모(容貌)가 좋은 사람·연지 분을 바르듯이 법화경(法華經)에 신심(信心)을 다하시라, 그렇지 아니하면 후회(後悔)가 있으리라, 운운(云云).
우에노전답서(上野殿答書) 미노부에서 58세에 술작총본산 제66세 닛다쓰상인(日達上人)은 “모두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세 구절을 끊어서 부르나, 그것이 아니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하고 두 번 이어집니다. 그리고 잠시 숨을 끊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이렇게 불러야 합니다.”라고 지남(指南)하시고 있습니다.
본종은 상전(相傳)의 종지(宗旨)이며, 제목삼창에 있어서 바르게 선사(先師)가 전해주는 대로 불러야 할 것입니다.
또 미노부(身延) 일련종(日蓮宗)에서는 나무묘호렌게쿄라고 부르나 본종에서는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릅니다.
같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제목일지라도 본종에서 부르는 제목과 오노승(五老僧)의 뒤를 잇는 일련종(日蓮宗)의 그것과는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오노승 문류에서는 천태사문이라고 자칭한 위(位)이므로 대성인님이 말법의 부처라는 것도 모르고 석존 재세 및 정상(正像)시대의 이행(理行)의 제목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대성인은『삼대비법품승사(三大秘法稟承事)』에서「말법(末法)에 들어와서 이제 니치렌(日蓮)이 부르는 바의 제목(題目)은 전대(前代)와는 달리 자행화타(自行化他)에 걸쳐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이며」(신편어서 p.1595)라고 말씀하셨듯이 대성인이 소지하신 자행화타 사행(事行)의 제목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어본존에는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니치렌(日蓮) 재어판(在御判)’이라고 있어, 이것이야말로 대성인이 건립하신 인법일개의 어본불의 당체입니다.
당종에서는 이 어본존께 귀의귀명하여 부르는 제목인 고로 사행(事行)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오노승 문류의 본존에는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만이 있고 그 밑에 자기의 이름을 적든가 하고 있으므로 종조내증(宗祖內證)의 인법일개의 의미도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이에 대하여 대성인은『삼대비법품승사(三大秘法稟承事)』에서「말법(末法)에 들어와서 이제 니치렌(日蓮)이 부르는 바의 제목(題目)은 전대(前代)와는 달리 자행화타(自行化他)에 걸쳐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이며」(신편어서 p.1595)라고 말씀하셨듯이 대성인이 소지하신 자행화타 사행(事行)의 제목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어본존에는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니치렌(日蓮) 재어판(在御判)’이라고 있어, 이것이야말로 대성인이 건립하신 인법일개의 어본불의 당체입니다.
당종에서는 이 어본존께 귀의귀명하여 부르는 제목인 고로 사행(事行)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오노승 문류의 본존에는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만이 있고 그 밑에 자기의 이름을 적든가 하고 있으므로 종조내증(宗祖內證)의 인법일개의 의미도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세 번 부르는 제목삼창의 의미는 공(空)·가(假)·중(中)의 삼제(三諦)와 법(法)·보(報)·응(應)의 삼신(三身)을 뜻합니다.
먼저 삼제(三諦)란 불법의 진리를 세 가지 측면에서 보는 것인데, 공제(空諦)·가제(假諦)·중제(中諦)를 말합니다.
공제란 사물의 성질이나 성분을 보는 것, 가제란 사물의 표면만을 보는 것, 중제란 존재 그 자체를 분명히 보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을 예로 들면, 육체는 신진대사를 되풀이하면서 순간순간 변합니다[가제]. 마음도 연(緣)에 따라 달라집니다[공제]. 그렇지만 어릴 때나 나이가 들어서나 그 사람의 일관된 인격이 존재합니다[중제].
그리고 삼신(三身)이란 불신(佛身)을 세 가지 측면에서 파악하는 것으로 법신(法身)·보신(報身)·응신(應身)을 말합니다.
법신은 부처의 진리 그 자체, 보신은 진리를 깨닫는 지혜, 응신은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 역용을 가리킵니다.
실천상으로 본다면 우리들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불러 청정한 생명으로 되는 것은 법신(法身)에 해당합니다. 또 불법의 지혜로 올바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보신(報身)에 해당하며, 고뇌하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자비의 행동은 응신(應身)에 해당합니다.실천상으로 본다면 우리들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불러 청정한 생명으로 되는 것은 법신(法身)에 해당합니다. 또 불법의 지혜로 올바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보신(報身)에 해당하며, 고뇌하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자비의 행동은 응신(應身)에 해당합니다.이 법화경(法華經)의 본문(本門)의 간심(肝心)인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는 삼세제불(三世諸佛)의 만행만선(萬行萬善)의 공덕(功德)을 모아서 오자(五字)로 하였으니, 이 오자(五字) 내(內)에 어찌 만계(萬戒)의 공덕(功德)을 포함하지 않았겠느뇨. 그러나 이 구족(具足)의 묘계(妙戒)는 한번 가진 후(後)·행자(行者)가 파(破)하려고 해도 파(破)해지지 않으니, 이를 금강보기계(金剛寶器戒)라고 말한다는 등으로 주장을 하여라.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은 이 계(戒)를 갖고 법신(法身)·보신(報身)·응신(應身) 등(等) 어느 것이나 무시무종(無始無終)의 부처가 되셨느니라, 이것을 「제교(諸敎) 중(中)에 있어서 이를 숨기고 전(傳)하지 않음」이라고 천태대사(天台大師)는 쓰셨느니라, 지금 말법당세(末法當世)의 유지(有智)·무지(無智)·재가(在家)·출가(出家)·상하(上下)·만인(萬人)이 이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를 갖고 설(說)과 여(如)히 수행(修行)함에 어찌 불과(佛果)를 득(得)하지 못하겠느뇨. 그리고 보니 결정무유의(決定無有疑)라 함은 멸후탁악(滅後濁惡)의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정판(定判)하신 것이로다.
교행증어서(敎行證御書) 미노부에서 54세에 술작지금 말법당세(末法當世)의 유지(有智)·무지(無智)·재가(在家)·출가(出家)·상하(上下)·만인(萬人)이 이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를 갖고 설(說)과 여(如)히 수행(修行)함에 어찌 불과(佛果)를 득(得)하지 못하겠느뇨. 그리고 보니 결정무유의(決定無有疑)라 함은 멸후탁악(滅後濁惡)의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정판(定判)하신 것이로다.
교행증어서(敎行證御書) 미노부에서 54세에 술작단(但) 성인(聖人)이 부르시는 제목(題目)의 공덕(功德)과 우리들이 부르는 제목(題目)의 공덕(功德)과는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나이까 라고 운운(云云). 조금도 승렬(勝劣)은 있을 수 없소이다. 그 까닭은 우자(愚者)가 가진 금(金)이나 지자(智者)가 가진 금(金)이나 우자(愚者)가 켜놓은 불이나 지자(智者)가 켜놓은 불이나 그 차별(差別)은 없느니라. 다만 이 경(經)의 뜻에 배반(背反)하여 부르면 그 차별(差別)이 있는 것이로다. 이 경(經)의 수행(修行)에는 겹겹의 차별이 있는데 그 대강(大綱)을 말하면 기(記)의 오(五)에 가로되 「악(惡)의 수(數)를 밝힘에 있어 지금의 문(文)에는 설(說)·불설(不說)이라고 할 뿐」 어떤 사람이 이것을 분별(分別)하여 가로되 「먼저 악인(惡因)을 열기(列記)하고 다음에 악과(惡果)를 열기(列記)하리라. 악(惡)의 인(因)에 십사(十四)가 있으니·일(一)에는 교만(憍慢)·이(二)에는 해태(懈怠)·삼(三)에는 계아(計我)·사(四)에는 천식(淺識)·오(五)에는 착욕(著欲)·육(六)에는 불해(不解)·칠(七)에는 불신(不信)·팔(八)에는 빈축(顰蹙)·구(九)에는 의혹(疑惑)·십(十)에는 비방(誹謗)·십일(十一)은 경선(輕善)·십이(十二)는 증선(憎善)·십삼(十三)은 질선(嫉善)·십사(十四)는 한선(恨善)이니라」 이 십사비방(十四誹謗)은 재가(在家) 출가(出家)에 걸치는지라 두렵도다 두렵도다, 과거(過去)에 불경보살(不輕菩薩)은 일체중생(一切衆生)에게 불성(佛性)이 있으니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하면 반드시 성불(成佛)하리라. 그를 가벼이 하면 부처를 가벼이 하는 것으로 된다고 하여 예배(禮拜)의 행(行)을 세우셨느니라. 법화경(法華經)을 갖지 않은 사람마저도 만약 갖게 된다면, 불성(佛性)이 있다 하여 그와 같이 예배(禮拜)하시었다. 하물며 수지(受持)한 재가(在家) 출가(出家)의 자(者)에 있어서랴, 이 경(經)의 사(四)의 권(卷)에는 「혹은 재가(在家)이든 출가(出家)이든 법화경(法華經)을 갖고 설(說)하는 자(者)를 일언(一言)이라도 헐뜯는 일이 있으면 그 죄(罪)가 많기를 석가불(釋迦佛)을 일겁(一劫)동안 직접(直接) 헐뜯는 죄(罪)보다도 더하다고 쓰여 있느니라. 혹(或)은 「약실(若實) 약부실(若不實)」이라고도 설해져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이를 생각 하건대 어떠한 경우라도 법화경(法華經)을 가진 자(者)를 서로 헐뜯지 말지어다. 그 까닭은 법화경(法華經)을 가진 자(者)는 반드시 모두 부처이며, 부처를 헐뜯는다면 죄(罪)를 받는 것이니라.
이렇게 알고서 부르는 제목(題目)의 공덕(功德)은 석존(釋尊)의 공덕(功德)과 동등(同等)하니라, 석(釋)에 가로되 아비(阿鼻)의 의정(依正)은 전(全)혀 극성(極聖)의 자신(自身)에 처(處)하고 비로(毘盧)의 신토(身土)는 범하(凡下)의 일념(一念)을 넘지 않음 운운(云云). 십사비방(十四誹謗)의 본의(本意)는 문(文)에 따라서 추량(推量)하시라
마쓰노전답서(松野殿答書) 미노부에서 55세에 술작창제를 한다는 것은 부처와 대면하는 것이므로 엄숙한 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만, 순수한 마음으로 본존님을 대하면 됩니다.
본존님은 대자비의 부처님이십니다.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 고민하는 것, 희망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기원해 가는 것입니다.
힘들고 슬플 때, 괴로울 때에 아이들이 어머니의 팔에 몸을 던져 매달리듯이 ‘본존님! 본존님!’이라고 부르며 사심 없이 부딪쳐 가면 됩니다.
본존님은 무엇이든지 들어주십니다. 마음속을 다 털어놓듯이, 대화하듯이 제목을 거듭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윽고 지옥 같은 괴로움도 거짓말처럼, 이슬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만약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으면 사죄하고 고치는 것입니다. 똑같은 실수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또 승부를 낼 때에는 반드시 이긴다고 정하고 사자가 으르렁거리듯이, 대우주를 곧 흔들기라도 할 듯이 끝까지 기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의 밤에는 ‘본존님!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깊은 감사의 제목을 드리는 것입니다.
『어의구전-상(御義口傳券-上)』에는 「조조(朝朝) 부처와 함께 일어나며, 석석(夕夕) 부처와 함께 눕고 시시(時時)로 성도(成道)하며 시시(時時)로 현본(顯本)함이라.」(신편어서 p.174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만, 제목을 끝까지 부른 사람은 언제나 본존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것도 현세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본존님과 제천제불(諸天諸佛)이 지켜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 깊은 곳에서 안도할 수 있고 그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유하게 인생을 즐기면서 끝까지 살아가면 됩니다. 제목은 고뇌를 환희로 바꿉니다. 더욱이 환희를 대환희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무슨 일이 있어도 오로지 제목을 끝까지 불러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의 지름길입니다. 이 제목은 자신의 인생을 승리로 이끄는 제일의 요체(要諦)입니다.우리들의 부모(父母)·세존(世尊)은 주사친(主師親)의 삼덕(三德)을 갖추고, 일체(一切)의 부처에게서 빈출(擯出)당한 우리들을 유아일인(唯我一人)·능위구호(能爲救護)라고 격려(激勵)하시니, 그 은혜(恩惠) 대해(大海)보다도 깊고 그 은혜(恩惠) 대지(大地)보다도 두터우며 그 은혜(恩惠) 허공(虛空)보다도 넓구나. 두 눈을 빼어서 불전(佛前)에다 하늘의 별의 수(數)만큼 바친다 해도, 몸 가죽을 벗겨서 백천만(百千萬)·천정(天井)을 바른다 해도, 눈물을 알가(閼伽)의 물로 해서 천만억겁(千萬億劫)·불전(佛前)에 꽃을 바친다 해도, 몸의 육혈(肉血)을 무량겁(無量劫)·불전(佛前)에다 산(山)처럼 쌓고 대해(大海)처럼 가득차게 한다 해도 이 부처의 일분(一分)의 은혜(恩惠)를 보답(報答)하기 어려우니라.
선무외삼장초(善無畏三藏抄) 가마쿠라에서 49세에 술작똑같은 신앙을 하고 있을지라도 어본존께 기원하는 것, 바라는 것은 가지각색입니다.
그 차이점은 과거세부터의 각자의 숙업 특히 방법(謗法)의 죄장(罪障)과 또 금세의 방법(謗法)에 인한 것으로 사람마다 현재의 상황, 놓여진 입장, 걸어온 인생 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의 소망, 기념(祈念)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우선 현재까지 이르는 자기의 인연을 생각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파고 들어가면 방법의 죄장을 소멸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들의 괴로움의 근원, 불행의 원인은 방법(謗法)에 있는 것입니다. 그 방법의 죄장소멸은 정법(正法)의 신심을 현재, 미래에 걸쳐 더욱 더 정진(精進)해 가야 하며, 그 이상으로 아직 신심하지 않는 사람들을 교화(敎化)하여 올바른 법(法)으로 이끄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곧 광선유포의 기념(祈念)으로 되어 절복행의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어떠한 남자(男子)를 지아비로 삼으실지라도, 법화경(法華經)의 적(敵)이라면 따르지 말지어다. 더욱더 강성(强盛)한 신심(信心)을 가지시라. 얼음은 물에서 나왔지만 물보다도 차갑고, 청(靑)은 남(藍)에서 나왔지만·거듭하면 남(藍)보다도 색(色)이 짙어진다. 같은 법화경(法華經)이라고 해도·신심(信心)을 거듭하면·타인(他人)보다도 색(色)도 더하고 이생(利生)도 있을 것이니라. 나무는 불에 타 버리지만, 전단(栴檀)의 나무는 타지 않으며, 불은 물에 꺼져 버리지만, 부처의 열반(涅槃)의 불은 꺼지지 않느니라. 꽃은 바람에 져 버리지만 정거(淨居)의 꽃은 시들지 않으며·물은 대한발(大旱魃)에 없어지지만 황하(黃河)에 들어가면 없어지지 않느니라.
오토님어소식(乙님御消息) 미노부에서 54세에 술작무량겁(無量劫)부터 지금까지 부모자식(父母子息) 때문에 소령(所領) 때문에 목숨을 버린 일은 대지(大地)의 미진(微塵)보다도 많았으나 법화경(法華經) 때문에는 아직 한 번도 버리지 않았었다. 법화경(法華經)을 많이 수행(修行)하였지만 이러한 일이 출래(出來)하였으므로 퇴전(退轉)하고 말았느니라. 비유(譬喩)컨대 물을 끓여서 냉수(冷水)에 붓고 부시를 치는데 이루지 못함과 같으니, 각자(各自)는 결단을 내리시라. 이 몸을 법화경(法華經)과 바꿈은 돌을 금(金)으로 바꾸고 분(糞)을 쌀로 바꾸는 것이니라.
부처의 멸후(滅後)·이천이백이십여년(二千二百二十餘年) 동안·가섭(迦葉)·아난(阿難) 등(等)·마명(馬鳴)·용수(龍樹) 등(等)·남악(南岳)·천태(天台) 등(等)·묘락(妙樂)·전교(傳敎) 등(等) 조차도 지금까지 홍통(弘通)하시지 않았던 법화경(法華經)의 간심(肝心)·제불(諸佛)의 안목(眼目)인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字)·말법(末法)의 초(初)에 일염부제(一閻浮提)에 홍통(弘通)이 되실 서상(瑞相)으로서 니치렌(日蓮)이 앞장섰느니라.
나의 동류(同類)들은 이진삼진(二陣三陣) 이어져서 가섭(迦葉)·아난(阿難)보다도 수승(殊勝)하고 천태(天台)·전교(傳敎)보다도 월등(越等)할지어다. 조그마한 소도(小島)의 국주(國主) 등(等)의 위협(威脅)을 두려워 한다면 염마왕(閻魔王)의 책망을 어찌 하리오. 부처의 사자(使者)라고 자칭하면서 두려워 하는 것은 하열(下劣)한 사람들이라고 타일렀느니라.
사도초(佐渡抄) 미노부에서 55세에 술작『법화경(法華經)』에「단좌(端坐)해서 실상(實相)을 생각하라.」라고 있듯이 눈을 똑바로 뜨고 어본존을 정시(正視)한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남묘호렌게교(南無妙法蓮華經)의 전체를 바라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십계(十界)의 자세를 하나하나 바라보는 것도 무관하며, 맨 가운데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문자를 보면서 근행하는 것도 좋습니다.
보통 본존님의 묘(妙)자를 보고 창제를 하면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자연스러운 자세로서 눈의 위치를 정하면 됩니다.
어본존님을 모시지 않은 분은 해가 뜨는 쪽을 향해서 아니면 근행시의 장소 형편에 따라 약간 각도를 달리해서 정좌하고 근행을 시작하면 눈의 높이에서 약간 위를 쳐다보는 정도로 눈의 위치를 정하고 근행하면 되겠습니다.
물론, 눈이 불편한 사람이라면 본존님을 마음속에 그리며 기원하면 됩니다.
어쨌든 진지하게 신심을 지속하면 기원은 모두 본존님에게 통합니다.-하락장은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다른 전문가보다는 내가 좀 길게 본다. 하락장은 7년 정도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 5년 정도는 하락하고, 2년 정도는 횡보할 것이다. "
- 2~ 3년 정도 지나면 바닥을 찍을 것이라고 보는 전문가들도 많다.
“하락이 본격화되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하락기간이 길다. 실제 2008년 리먼사태이후 하락장이 2013년까지 지속됐다. 리먼 사태 직후 일부 지역에서 반등이 있었지만, 다시 지루한 하락 및 정체 구간을 거쳤다. 이번 하락장도 그때와 비슷하게 7년 정도 하락 및 정체기를 거칠 것이다. 하락장이 다시 상승장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미분양이 쌓이고 미분양이 다시 감소하는 시기를 거쳐야한다. 미분양이 계속 늘어나는 상황에서 집값이 상승세로 전환하기는 어렵다.”
이현철 아파트 사이클 연구소장은 "7년 정도의 하락기를 거칠 것이기때문에 무주택자는 서두를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보통 ‘암에 좋은 식사’라고 하면 신선한 채소와 현미밥·잡곡밥, 고기보단 콩을 떠올린다. 그런데 이 식사는 암 ‘예방’에 좋은 식사에 가까우며 암 ‘치료’에 좋은 식사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암 예방, 치료 등 단계별 알맞은 식사에 대해 알아본다.
◇암 예방 식사
암 예방을 위해서는 흔히 건강식이라고 알려진 잡곡밥과 채소를 충분히 먹는 것이 좋다. 양상추, 시금치, 청경채 등 푸른 잎채소와 브로콜리, 양배추 등 십자화과 채소가 항암 효과가 뛰어나다. 단백질은 닭가슴살이나 콩류를 통해 보충하고 직화구이나 훈제 햄은 조리과정에서 발암물질이 나올 수 있어 피하는 게 좋다. 또 본인의 체중과 활동량에 맞는 적정량을 섭취하고 한 잔의 술도 암 발생률을 높이므로 금주해야 한다.
◇암 치료 중 식사
암 치료 중 식사는 암 예방 식사와 다른 점이 많다. 암세포가 자라면서 분비되는 사이토카인은 뇌하수체에 작용해 암 환자의 식욕을 떨어뜨린다. 또 항암 치료 부작용으로 음식의 맛이나 냄새에 민감해지고 메스꺼움을 느끼는 경우가 왕왕 있어 철분 함량이 높거나 냄새가 강한 고단백·고열량 식사에 거부감을 보일 수 있다. 단백질과 열량 섭취가 줄어들면 백혈구와 항체 기능이 떨어지고 정상세포 활동이 어려워 체력과 면역력이 저하될 수 있다.
암 치료 중에는 건강할 때보다 단백질과 열량 섭취량을 1.5배 더 늘려야 한다. 식물성 단백질인 콩보다 동물성 단백질인 고기나 생선을 먹는 게 좋다. 대신 삶거나 찌는 방식으로 조리해 먹어야 콜레스테롤 수치를 덜 올린다. 잡곡밥이나 채소는 식이섬유가 풍부해 조금만 먹게 되므로 가급적 흰쌀밥 위주로 먹는 게 좋다. 설사 증상이 있을 경우 채소 섭취량을 줄여야 한다.
◇암 치료 후 식사
암 치료 후 체중이 이전보다 줄었다면 고열량 식사를 유지해야 한다. 이는 암 종별로 다를 수 있어 의사와 상의해 식사를 조절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예를 들어 위암 절제 수술을 받아 한 번에 많이 먹기 어려운 환자는 세 끼 식사를 다섯 끼로 나눠 먹으면 된다. 식도암 절제 수술을 받아 위산이 역류할 수 있는 환자는 저녁 과식을 피하고, 밥을 먹은 뒤엔 조금 걷는 게 좋다.
- Copyrights 헬스조선 & HEALTHCHOSUN.COM, 발췌법화본문종혈맥상승사(法華本門宗血脈相承事) 본인묘(本因妙)의 행자(行者) 니치렌日蓮 이것을 기(記)함
..중략..
지난 문영(文永)의 면허(免許)의 날에 이전(爾前) 적문(迹門)의 방법(謗法)을 대치(對治)하고 본문(本門)의 정의(正義)를 세워 주시면 불일간(不日間)에 풍년(豊年)이 되리라고 말씀드렸던 바, 듣는 사람마다 혀를 차고, 귀를 막았느니라. 그 때 나의 편은 한 사람도 없고 유아(唯我)와 니치렌(日蓮) 여아(與我) 닛코(日興)뿐이니라.
물어 가로되, 수량품(壽量品)·문저(文底)의 대사(大事)라고 하는 비법(秘法)은 어떠한가. 답(答)하여 가로되, 유밀(唯密)의 정법(正法)이니 비장(秘藏)하고 비장(秘藏)할지어다. 일대응불(一代應佛)의 경지(境地)에 머무르는 쪽은 이상(理上)의 법상(法相)이므로 일부(一部) 공(共)히 이(理)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이며, 적상(迹上)의 본문수량(本門壽量)이라고 득의(得意)시키는 것을 탈익(脫益)의 문상(文上)이라고 하느니라. 문저(文底)란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명자(名字)의 묘법(妙法)을 여행(餘行)에 걸치지 않고, 직달(直達)의 정관(正觀)·사행(事行)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이것이니라. 권실(權實)은 이(理) 금일본적리(今日本迹理)이며 본적(本迹)은 사(事) 구원본적사(久遠本迹事)이니라, 또한 권실(權實)은 약지약교(約智約敎) 일대응불본적(一代應佛本迹) 본적(本迹)은 약신약위(約身約位) 명자신(名字身) 구원본적(久遠本迹) 또 가로되, 수탈재현(雖脫在現)·구등본종(具騰本種)이라고 했느니라. 석존(釋尊)·구원명자즉(久遠名字卽)의 위(位)의 자신(自身)의 수행(修行)을 말법(末法) 금시(今時)·니치렌(日蓮)의 명자즉(名字卽)의 몸에 옮겼노라. 이(理)는 조작(造作)이 아니니라, 고(故)로 천진(天眞)이라 하고, 증지원명(證智圓明)인 고(故)로 독랑(獨朗)이라 하는 행의(行儀)·본문입행(本門立行)의 혈맥(血脈) 이것을 기술(記述)하니, 비장(秘藏)하고 비장(秘藏)할지어다.
또 일문자(日文字)의 구전(口傳)·산탕(産湯)의 구결(口決)·이개(二箇)는 양대사(兩大師)의 현지(玄旨)에 상당(相當)함, 본존(本尊) 칠개(七箇)의 구전(口傳)은 칠면(七面)의 결(決)에 이것을 표시(表示)하고, 교화홍경(敎化弘經)의 칠개(七箇)의 전(傳)은 홍통자(弘通者)의 대요(大要)이니라. 또 이 혈맥(血脈) 및 본존(本尊)의 대사(大事)는 니치렌(日蓮) 적적(嫡嫡) 좌주전법(座主傳法)의 서(書)·탑중상승(塔中相承)의 품승유수일인(稟承唯授一人)의 혈맥(血脈)이니라, 단단히 명심하여 비장(秘藏)하고 비장(秘藏)할지어다 전(傳)할지어다, 법화본문종(法華本門宗) 혈맥상승(血脈相承)을 끝냄.
홍안오(弘安五) 太歲壬午 十月十一日 니치렌재어판(日蓮在御判)
본인묘초(本因妙抄) 미노부에서 61세에 술작문저(文底)란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명자(名字)의 묘법(妙法)을 여행(餘行)에 걸치지 않고, 직달(直達)의 정관(正觀)·사행(事行)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이것이니라. 권실(權實)은 이(理) 금일본적리(今日本迹理)이며 본적(本迹)은 사(事) 구원본적사(久遠本迹事)이니라, 또한 권실(權實)은 약지약교(約智約敎) 일대응불본적(一代應佛本迹) 본적(本迹)은 약신약위(約身約位) 명자신(名字身) 구원본적(久遠本迹) 또 가로되, 수탈재현(雖脫在現)·구등본종(具騰本種)이라고 했느니라. 석존(釋尊)·구원명자즉(久遠名字卽)의 위(位)의 자신(自身)의 수행(修行)을 말법(末法) 금시(今時)·니치렌(日蓮)의 명자즉(名字卽)의 몸에 옮겼노라. 이(理)는 조작(造作)이 아니니라, 고(故)로 천진(天眞)이라 하고, 증지원명(證智圓明)인 고(故)로 독랑(獨朗)이라 하는 행의(行儀)·본문입행(本門立行)의 혈맥(血脈) 이것을 기술(記述)하니, 비장(秘藏)하고 비장(秘藏)할지어다.
또 일문자(日文字)의 구전(口傳)·산탕(産湯)의 구결(口決)·이개(二箇)는 양대사(兩大師)의 현지(玄旨)에 상당(相當)함, 본존(本尊) 칠개(七箇)의 구전(口傳)은 칠면(七面)의 결(決)에 이것을 표시(表示)하고, 교화홍경(敎化弘經)의 칠개(七箇)의 전(傳)은 홍통자(弘通者)의 대요(大要)이니라. 또 이 혈맥(血脈) 및 본존(本尊)의 대사(大事)는 니치렌(日蓮) 적적(嫡嫡) 좌주전법(座主傳法)의 서(書)·탑중상승(塔中相承)의 품승유수일인(稟承唯授一人)의 혈맥(血脈)이니라, 단단히 명심하여 비장(秘藏)하고 비장(秘藏)할지어다 전(傳)할지어다, 법화본문종(法華本門宗) 혈맥상승(血脈相承)을 끝냄.
홍안오(弘安五) 太歲壬午 十月十一日 니치렌재어판(日蓮在御判)
본인묘초(本因妙抄) 미노부에서 61세에 술작전(傳)할지어다, 법화본문종(法華本門宗) 혈맥상승(血脈相承)을 끝냄.
홍안오(弘安五) 太歲壬午 十月十一日 니치렌재어판(日蓮在御判)
본인묘초(本因妙抄) 미노부에서 61세에 술작또 일문자(日文字)의 구전(口傳)·산탕(産湯)의 구결(口決)·이개(二箇)는 양대사(兩大師)의 현지(玄旨)에 상당(相當)함, 본존(本尊) 칠개(七箇)의 구전(口傳)은 칠면(七面)의 결(決)에 이것을 표시(表示)하고, 교화홍경(敎化弘經)의 칠개(七箇)의 전(傳)은 홍통자(弘通者)의 대요(大要)이니라. 또 이 혈맥(血脈) 및 본존(本尊)의 대사(大事)는 니치렌(日蓮) 적적(嫡嫡) 좌주전법(座主傳法)의 서(書)·탑중상승(塔中相承)의 품승유수일인(稟承唯授一人)의 혈맥(血脈)이니라, 단단히 명심하여 비장(秘藏)하고 비장(秘藏)할지어다 전(傳)할지어다, 법화본문종(法華本門宗) 혈맥상승(血脈相承)을 끝냄.
홍안오(弘安五) 太歲壬午 十月十一日 니치렌재어판(日蓮在御判)
본인묘초(本因妙抄) 미노부에서 61세에 술작합장(合掌)이란 손바닥을 서로 합치는 것을 말합니다. 좌우의 열 손가락은 일체중생의 모습인 십계(十界)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열 개의 손가락에는 28개의 마디가 있으며, 이 열 개의 손가락을 합치는 모습은『법화경(法華經)』28품이며, 법문적으로 말하면 십계호구(十界互具)로 되고, 가슴에 양팔을 붙인 곳은 흉중심성(胸中心性)의 백연화(白蓮華) 불성(佛性)에 통합니다.
그리고 색심(色心)의 이법(二法)으로 어본존(御本尊)께 향하여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무작삼신(無作三身) 사행(事行)의 일삼천념(一念三千) 당체연화불(當體蓮華佛)의 상(相)으로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합장한 손을 잘 보면 마치 연화의 꽃봉오리와 똑같습니다. 이 합장은 부처님을 경배할 때의 최고의 예(禮)를 다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합장을 했을 때는 십지(十指)를 잘 맞추어 몸을 바르게 세우고, 양어깨에 힘을 주지 말며 눈은 본존님의 묘(妙)자를 보아주십시오.
이 때 손을 비비는 일과 제목을 부르는 속도에 맞춰 어깨나 몸을 좌우로 흔들어서는 안됩니다.
『어의구전-상(御義口傳券-上)』에는「합장(合掌)이란 법화경(法華經)의 이명(異名)이니라. 향불(向佛)이란 법화경(法華經)을 만나 뵈옵는다는 것이며, 합장(合掌)은 색법(色法)이고 향불(向佛)은 심법(心法)이니라. 색심(色心)의 이법(二法)을 묘법(妙法)이라 개오(開悟)하는 것을 환희용약(歡喜踊躍)이라 설(說)하느니라.」(신편어서 p.1734)고 설하셨습니다.
즉 합장이란 본존님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며, 그 부처님께 진심을 다하는 것이 부처님께 향할 때의 마음가짐이 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합장하는 모습을 잘 살펴보면 사람에 대해서는 무저항의 모습이고 부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바칩니다하는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믿는 진심을 염(念)하는 것이 향불(向佛)하는 마음으로 되어 그 형태와 마음으로써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오로지 창제해가는 것이 즉신성불(卽身成佛)이며. 환희 중의 대환희, 즉 뛰어 날아가고 싶은 기쁨이라 하겠습니다.『어의구전-상(御義口傳券-上)』에는「합장(合掌)이란 법화경(法華經)의 이명(異名)이니라. 향불(向佛)이란 법화경(法華經)을 만나 뵈옵는다는 것이며, 합장(合掌)은 색법(色法)이고 향불(向佛)은 심법(心法)이니라. 색심(色心)의 이법(二法)을 묘법(妙法)이라 개오(開悟)하는 것을 환희용약(歡喜踊躍)이라 설(說)하느니라.」(신편어서 p.1734)고 설하셨습니다.
즉 합장이란 본존님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며, 그 부처님께 진심을 다하는 것이 부처님께 향할 때의 마음가짐이 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합장하는 모습을 잘 살펴보면 사람에 대해서는 무저항의 모습이고 부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바칩니다하는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믿는 진심을 염(念)하는 것이 향불(向佛)하는 마음으로 되어 그 형태와 마음으로써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오로지 창제해가는 것이 즉신성불(卽身成佛)이며. 환희 중의 대환희, 즉 뛰어 날아가고 싶은 기쁨이라 하겠습니다.나의 문가(門家)는 밤에는 잠을 끊고 낮에는 쉴새없이 이를 생각하라, 일생(一生)을 헛되이 보내고 만세(萬歲)에 후회(後悔)하는 일 없을지어다, 공공근언(恐恐謹言).
도키전어서(富木殿御書) 미노부에서 54세에 술작잠자리에 누워서 근행해도 좋다고 한다면 모두 다 누워서 근행하고 말겠지요.
그러나 병자의 경우 도저히 일어나서 근행을 할 수가 없을 때에는 누워서라도 근행을 올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합장한 손이나 팔이 아파서 도저히 손을 올리고 있을 수 없을 때는 무릎 위에 얹어 놓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근행할 때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본존님을 바라보는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음성으로 힘차고 정확한 제목을 봉창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존님을 모시지 않은 분은 정좌한 자세에서 한군데에 초점을 모아서 똑바로 쳐다보고 근행을 해야 합니다.십계호구(十界互具)의 불어(佛語)는 분명(分明)하니라. 그렇지만 우리들의 열심(劣心)에 불법계(佛法界)를 갖춘다는 것은 신(信)을 취(取)하기 어려운 일이니라. 금시(今時)에 이를 믿지 않는다면 반드시 일천제(一闡提)가 되리니, 원(願)컨대 대자비(大慈悲)를 일으켜서 이를 믿게 하여 아비(阿鼻)의 고(苦)를 구호(救護)하옵소서.
답(答)하여 가로되, 당신은 이미 유일대사인연(唯一大事因緣)의 경문(經文)을 견문(見聞)하고도 이를 믿지 않으니, 석존이하(釋尊已下) 사의(四依)의 보살(菩薩)과 말대(末代) 이즉(理卽)의 우리들이 어떻게 당신의 불신(不信)을 구호(救護)하리요. 그렇지만 시험 삼아 이를 말하리라. 부처를 만나서 깨닫지 않은 자(者)도, 아난(阿難) 등(等)에 의(依)하여 득도(得道)하는 자(者)가 있기 때문이니라. 대저 기(機)에 둘이 있으니, 一에는 부처를 뵈옵고 법화(法華)에 의해서 득도(得道)함이라. 二에는 부처를 뵈옵지 않더라도 법화(法華)에 의해서 득도(得道)하느니라.
관심(觀心)의 본존초(本尊抄) 사도에서 52세에 술작그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자기중심은 범부(凡夫)에게는 항상 있는 일입니다.
범부라고 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어본존께 부딪쳐 가면 됩니다.
무리하게 고상한 척해도 그것은 ‘거짓된 자신’입니다. 거짓은 어본존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장 고민하고 있는 것, 가장 바라는 것을 창제에 의탁해 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경애가 열려 갑니다.
점점 자신의 일 뿐만 아니라 이웃의 행복도, 광선유포도 기원하게 되는 자신으로 바뀌어져 갑니다. 또 그러한 커다란 기원에 도전하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모두 자신의 자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