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군화>와 <마틴 에덴>의 저자로 유명한 미국 작가 잭 런던Jack London(1876~1916)은 자본주의의 인간 착취에 대한 비판적인 소설들을 많이 썼고 그래서 미국보다 옛 소련에서 더 높이 평가받았던 작가다. 동물을 소재로 한 그의 소설 <야성의 부름The Call of the Wild>(1903)과 <늑대 개White Fang>(1906) 역시 어떤 면에서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착취를 다룬 우화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야성의 부름>을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만 보는 것은 대단히 편협한 책읽기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의 보다 더 절실한 주제는 사실 ‘문명과 자연’ 그리고 ‘순치와 야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것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늑대 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늑대 개>는 개가 야생으로 돌아가 늑대가 되는 <야성의 부름>과는 반대로 늑대가 순치돼 개가 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알래스카 유콘 지방에서 늑대 개와 늑대 사이의 혼혈로 태어나 ‘화이트 팽’은 인디언의 소유였다가 잔인한 투견 도박사 비유티 스미스에게 팔려간다. 비유티 스미스를 위해 투견장에서 싸우던 화이트 팽은 어느 날 목에 심한 상처를 입고 죽어간다. 광산기사인 젊은이 위든 스캇은 화이트 팽을 간호해 살린 다음, 애정과 친절로 늑대 개를 길들이는 데 성공한다. ‘화이트 팽’과 친해지자 스캇은 늑대 개를 캘리포니아의 자기 집으로 데려간다. ‘화이트 팽’은 대자연에서 문명세계로 이주한 후 완전히 순치된 개가 된다. 그곳에서 화이트 팽은 탈옥수들의 공격에 맞서 충성스럽게 주인집을 지키다가 중상을 입는다.
<늑대 개>는 1991년 랜들 클라이저가 감독하고 에단 호크(스캇)와 클라우스 마리아 부랜다우어(알렉스)가 주연한 영화가 단연 압권이다. 비록 루치오 풀치가 감독하고 프랑코 네로와 비르나 리지가 주연한 1972년 영화가 있지만 1991년 영화의 수준을 따라가지는 못한다. 클라이저 감독의 영화에서 우선 놀라운 것은 늑대들의 놀라운 연기다. 예컨대 자신이 잡아온 토끼를 새끼가 먹고 있는 모습을 근심스럽고도 대견하게 바라보고 있는 어미 늑대의 그윽한 눈빛, 어미의 시체를 핥다가 슬피 울며 잠이 드는 새끼 늑대, 화이트 팽과 회색 곰의 박진감 넘치는 싸움, 그리고 스캇과 화이트 팽이 처음엔 서로 두려워하다가 점점 친해져가는 과정 등의 절묘한 촬영과 동물들의 표정 연기는 가히 예술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 부분은 원작과는 다소 다르다. 영화에서는 스캇(영화 속 이름은 잭)이 화이트 팽을 캘리포니아로 데려가지 않고 야생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알래스카의 광야로 쫓아버린다. 그러나 친구 알렉스만 떠나보내고 홀로 남아 불탄 집을 수리하고 있는 그에게 화이트 팽이 다시 찾아온다. 둘은 서로 끌어안고 대자연 속에서 뒹굴면서 영화는 끝난다. 드디어 인간과 자연의 합일이 이뤄진 것이다. 자연은 정복이나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조화와 포옹의 대상이다. 그걸 깨달을 때 비로소 자연은 우리 품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늑대 개>는 바로 그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첫댓글 아주 오래전에 ㅡ 황야의 부름 ㆍ을 읽고 그 뒤에 다시 읽을 만큼 큰 감명을받았습니다 ㆍ
다시 보고싶은 영화
앤서니퀸 주연의 * 바렌 ㆍ이 지금도 생각나지만
방법이 있을런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