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강집 발}
[추강집 뒤에 적다]
하늘이 우리 추강을 낳으니
곧은 절개로 세상에 홀로 섰네
성품이 영합하기를 싫어한지라
세상을 피하여 치욕을 멀리했네
취중의 얘기는 공연히 준엄했고
세상을 경시하며 늘 크게 웃었네
지위에 벗어나 국시를 의논하다
집안을 깨뜨리고 부관참시당했네
평소에 유독 나를 대우해 주어
두 사람이 울며 서로 좇았더니
타고난 기질이 본래 같은지라
담론을 때로 살촉처럼 펼쳤네
머리 숙여 동야에게 절하니
나의 실은 대나무만 못했네
재앙 끝에 유고를 얻었는지라
흩어져서 한 묶음도 못 채웠네
눈을 문지르며 살펴서 교정하고
손으로 적으며 백 번을 읽었네
얼음 누에 실로 베를 짜다가
이 고상한 선비의 옷을 기웠으니
찬란한 비단 무늬는 없을지라도
조각조각 모두 속기를 벗어났네
특이한 맛으로 소문난 조갯살은
멀리 강해의 굽이에서 구했으니
육미처럼 배부르게 하진 않지만
진기한 맛을 어찌 감히 깔볼까
모래를 헤쳐서 금 구슬 가리고
-원문 빠짐- 피육을 집어내니
우리 추강을 마주 대한 듯하여
수염 비틀며 눈 부릅뜨고 보네
이어 몇 글자의 발문을 적으며
그대를 위하여 한 번 통곡하노라
정덕 경오년(1510, 중종5) 가을에 적암 조신 숙분은 삼가 발문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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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 발문]
공은 성이 남씨, 휘가 효온, 자가 백공), 자호가 추강거사, 본관이 의령으로, 휘 전의 아들이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 이씨를 섬겨 효자로 소문났다. 사람됨이 충담하고 홍의하며 소탈하고 전아하며, 가슴속이 시원스러워서 한 점의 속기도 없었다.
일찍이 점필재 김종직에게 수업하였다. 점필재 공이 감히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우리 추강〔오추강〕’이라 하였으니, 존중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김굉필, 정여창, 김시습), 안응세 등의 제현과 더불어 형제처럼 서로 추중하였다.
성종조에 소를 올려 소릉의 복위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드디어 이 세상에 뜻을 끊고 유랑함을 일삼아 명승지로 일컬어진 곳은 발걸음이 거의 다 미쳤다.
정통 갑술년(1454, 단종2)에 태어나서 성화 임자년(1492, 성종23)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39세이다.
연산조 갑자년(1504, 연산군10)에 소릉의 복위를 청했던 상소를 추후에 처벌하여 뜻밖에 부관참시의 재앙을 만나게 되었다. 하나 남은 아들 휘 충세 또한 연좌되어 죽임을 당하니, 이분이 곧 나 유홍의 외조부이다. 집안사람들이 공의 유고가 다시 재앙의 빌미가 될까 염려하여 모두 불 속에 던져 넣어 현존하는 것이 거의 없으니, 애석하도다.
오호라! 사마천은 옛날의 훌륭한 사관이었으나 그 글이 생질 양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천하에 선포되었다. 나 또한 외람되이 외손의 처지인지라, 오직 양운에게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산일된 나머지를 수습해 온 지가 몇 해 되었다. 참의 임보신이 앞에서 돕고 대사성 이충작이 뒤에서 계속하였고, 사문 신호와 학관 권응인이 또 이어서 교정하였다.
시문 총 몇 편으로는 비록 그 유문을 다 전할 수 없지만, 또한 한 점의 고기로써 한 솥의 국 맛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니, 나의 오랜 소원이 이에 조금 이루어진 셈이다. 연원 있는 학문과 절의에 찬 풍모에 대해서는 국사에 기록되어 있으니, 내가 어찌 감히 덧붙일 수 있겠는가.
만력 기원 5년 정축년(1577, 선조10) 12월 하한에 외증손 가선대부 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기계 유홍은 삼가 발문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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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본 발문]
추강 남 선생은 곧 나의 증조부인 충목공의 외증조부이다. 선생이 성종조에 소를 올려 소릉의 복위를 청하였으나 의견이 시행되지 않자 이로 인하여 다시는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끝내 불우한 신세로 세상을 떠났다. 연산조 갑자년(1504, 연산군10)에 이전에 올린 소를 추후에 처벌하여 드디어 재앙이 무덤 속에까지 미쳤고, 선생의 아들 휘 충세 또한 연좌되어 죽임을 당했으니, 지금까지 사림이 크게 상심하는 바이다.
선생이 지은 시문 몇 권이 집안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충목공이 일찍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 이를 취하여 판목에 새겨 널리 전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임진왜란 때에 판목이 망실되어 선생의 불후의 성업이 민멸되어 전해질 수 없게 되었으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하였다.
나는 불초한 사람이지만 증조부의 유지를 이으려는 생각에 겨우겨우 수습하여 책을 이루었으나, 전사한 것을 얻은 것이라서 비슷한 글자가 뒤섞이는 잘못을 면하지 못하여 이 때문에 흡족스럽지 못했다. 갑인년(1674, 현종15)에 내가 마침 이 고을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얼마 있지 않아 문곡 김 상공이 낭주로 귀양 와서 우연히 이웃 고을 인사를 통해 구본을 얻어 이곳으로 보내왔다. 이에 잘못된 것을 교정하고 판각에 부쳐서 해를 넘겨 공역이 끝났다.
오호라! 이 문집은 갑자년의 재앙에서 겨우 벗어나 충목공에 힘입어 비로소 전해졌고, 또 임진년 난리에 산일되었다가 오늘에 이르러 다시 간행되었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는 실로 사문과 관계된 것이고 한 집안의 후손이 사사로이 할 바가 아니라서 삼가 그 개괄적인 내용을 문집 뒤에 기록한다. 선생의 문장과 절행의 아름다움은 국승과 야사에 갖추어 실려 있어 보잘것없는 소자가 감히 언급할 바가 아니기에 이에 다시 췌언하지 않는다.
숭정 정사년(1677, 숙종3) 늦여름에 외후손 통훈대부 행 금구 현령 유방은 삼가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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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간본 발문]
종선조 추강 선생의 문집이 처음 영남 감영에서 간행되었고 이어 호남의 금구에서 판각되었으니, 이는 실로 선생의 외증손 유 충목공 및 유공의 증손자 현령공이 앞뒤로 힘쓴 덕분이다.
영남 감영의 판목은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지만, 호남에서 간행한 시점이 숙종 정사년(1677)이었으니, 지금과의 거리가 겨우 200여 년이다. 따라서 그 판목이 혹 아직 보존되어 있을 법도 한데 세상에 선생의 문집을 간직한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아득히 듣지 못하였다. 배우기를 좋아하는 선비들도 모두 한번 보기를 생각하거늘 하물며 후손 된 자는 어떠하겠는가.
우리 집의 아이 병우가 달성에서 우연히 인쇄본 4책을 얻어 등사하여 간직하였으니, 이는 호남에서 간행한 판본이다. 이후로 이를 세상에 공간하지 못함을 늘 한스럽게 여기거늘 내가 그 뜻을 아름답게 여겨서 공인을 부르고 비용을 헤아려서 판각에 부친 지 반년이 지나 일이 끝났으니, 선생의 글이 장차 이로부터 세상에 크게 유행할 것이다. 글이 유행하게 되면 선생의 넓은 학문과 맑은 절개 또한 이 세상에 높이 드러나 세상을 면려함이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어찌 다만 이 문집만의 다행이겠는가.
돌아보건대 불초에게는 사적인 감회가 있다. 나의 선조 추계공 휘 진은 선생과 공시의 친족이었다. 재앙을 당한 뒤에 남쪽으로 이사하여 조용히 지냈으니, 의령의 인사들이 전부터 제사를 모셔오다가 선생과 병향하였다. 그러나 유독 그 유문이 모두 유실되고 전해지지 않아 이 문집의 뒤를 이을 수 없다. 지금 이 문집을 간행하면서 서글피 추모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이어 아래쪽에 기록하고 이와 같이 덧붙여 적는다.
선생이 돌아가신 지 430년 된 신유년(1921) 10월에 방후손 남상규는 삼가 기록한다.
신유년 가을 청도군 신안에서 간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