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미술평론투의 글을 빗대어 현대미술의 허위를 까발기는 형식을 취해본 글이다.
한때 현대미술의 사기성을 폭로하는데 전념해볼까 하던시기에 쓴 글이고 소개하는 부산 광안리
테마거리의 몇개의 시설물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
광안리 테마거리의 발칙한 현대미술 산책
바위를 오브제로 즐겨 인용하는 작가들 중에서 그들 대부분의 성향은
주로 복고적인 테마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지질학적 형성기간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오브제로서의 바위는 상대적으로 찰라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유력한 수단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들 작가들의 공통분모를 복고에 한정시켜서 그들이 추구하는 세계의 아젠다를
관객들이 감히 엿볼 수 없게 만드는 경향을 참고하더라도 우리는
시간에 집착하는 작가들의 내면을 저절로 인지하게 하는 그 무엇을 모른 체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왕래하는 길 위에 아무렇게나 배치해놓은 바위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느낄 것인가?
길은 인간의 삶의 속도를 표상한다.
그 속도를 가로막고 있는 바위는 삶의 속도를 정지시키는 메시지를 품고 있다.
삶의 무게에 짓눌린 사람들은 시간이 정지된 바위 위에 잠시 걸터앉아서 명상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 작품은 중장비 기사를 중심으로 수 십 명의 일용직 인부들과
자연 경관을 훼손했을지도 모를 채석업자들에 의해서 제작되었다.
그들은 이름을 남기기를 거부하였다.
아니 어쩌면 이름을 남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구청의 요청에 의해서 아무런 사심 없이 예술가의 자존심을 버리고
터무니없는 가격에 기꺼이 용역을 제공하였을 뿐인 것이다.
예술과 테크놀로지와의 접목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면서 언제부턴가 양자 간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조명기사들은 당당하게 예술가의 반열에 오르기를 요구하였고 실제로 그것은 이루어졌다.
프랑스의 Yann KERSALE는 LED조명을 빼곡하게 설치하여 <은하수 바다>라고 명명하였다.
유감스럽게도 수영구청인지 부산광역시청인지는 알 수 없으나
수 천 개의 조명기구를 설치할 막대한 예산을 국내기사에게 할애하지 않고 과감하게 외국인에게 줘버렸다.
덕분에 뛰어난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국내기사는 순전히 예산상의 문제로
예술가의 반열에 오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때문에 그들은 오늘도 사다리를 타고 건물 외벽에 매달려서
조명간판을 설치하는 육체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는 텔레비전의 재활용의 모범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그 재활용이 한 개인의 전매특허로
한정되는 바람에 재활용 본래의 취지는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
더구나 천문학적인 비용이 지불된 점은 차라리 새로운 텔레비전 공장설립을 고려해 봄직한 사안이어서
또 다른 논쟁을 은밀하게 제기하고 있다.
한국 작가로서 드물게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한 공로가 테마거리의 보행기능을 완전히 가로막은 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사람들은 길 한복판에 설치된 구조물을 비켜서 지나가더라도
그 구조물이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한 작가의 작품이기 때문에 그 어떠한 불편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만에 하나 공개적으로 불평을 제기하는 사람이면 그의 전 생애는 예술을 박해했다는 죄목으로 매장당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예술을 위해서라면 통행권도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는
국제적 문화강국으로서의 체통을 온 몸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작품은 백남준에 비해 명성이 못 미치는 징후가 확연하다.
감히 통행인들의 보행을 가로막을 뱃심 따위는 아예 처음부터 포기한 자의식이
테마거리에 설치된 이 작품의 구성에서 엿보인다.
그러나 발상은 참신해 보인다.
원형의 구조물을 잘라낸 균형 감각에다 좌우 대칭의 전통적인 미학적 원리도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겸손은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찬양을 받기에 충분한 미덕이다.
교만은 길을 막고 겸손은 길을 낸다.
녹녹치 않는 공학적 성과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비례는 수학적 원리이나 노동의 현장에는 골치 아픈 걸림돌일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이 구조물을 설치하는 노동자들은 그 어떠한 군말도 없이 이 까다로운 과업을 완수하였다.
결코 공사발주 개념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숭고한 희생이 엿 보인다.
통행을 보장했다는 차원에서 백남준의 그것과는 확연하게 구분이 되는 작품이다.
역시 이름을 남기기를 사양한 숭고한 노동자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다만 제 멋에 치우친 감이 있어 빈틈이 너무 많은 것이 거슬린다.
실제로 비오는 날 빗줄기를 제대로 막아주지 못하는 약점이 노출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존재가치는 기상 이변시 보행인의 피난처보다는
이 시대의 세속적 담론의 중심에 있는 S라인에 동참하고 있다는 데 의의를 두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수많은 부녀자들이 S라인을 목표로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는 테마거리인 만큼
현실적인 수혜보다는 교조적인 메신저로서의 역할이 주어졌을 때
작품의 진가는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될 수 있는 것이다.
감동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 작품이다.
소박한 재질, 튼튼한 역학적 구도, 저렴한 제작비, 한없이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함,
이름 없이 사라질 무념무상의 자세....... 무엇보다도 수없이 짓밟힐수록 그 진가가 빛나는 작품.......
인류 문명의 궁극이 여기에 집결돼 있다.
그 어떤 종교의 가르침도 이 작품을 능가할 수는 없다.
보라! 스스로를 모래에 함몰시키는 구도자의 경지.......
오체투지의 보석 같은 치열한 수행의지가 이 소박한 목제구조물에서 묻어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렇게 빛나는 작품일수록 작자를 확인하기가 힘들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역사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실은 뒤안길에, 허위는 전면에서 날뛰는 역사가 아니던가........
<낯설게 하기>의 상투적인 방법은 인상적인 의사전달에 목을 매는 부류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메뉴이다.
Jean-Pierre RAYNAUD 역시 단골 메뉴를 탈피하지 못했다.
화분을 확대한 시설물에다 생명의 원천이란 제목을 갖다 붙였다.
해설을 새겨 넣은 명패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현대 작가 장피에르 레노의 <화분>은
지금까지 제작된 작가의 화분 중 가장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작품이다.
작가는 40년이 넘도록 우리 일상 생활속에서 보이는 오브제를
미술계 안으로 옮겨 놓으며 화분이라는 상징적인 기호를
작가 고유의 강렬한 예술적 상징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
이 작품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기쁨과 위안은
<프랑스를 대표>한다는 사실과 <작가의 화분 중 최대 규모>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세계열강에서 제외되었던 우리의 정신세계의 갈증은
알게 모르게 <대표>나 <최대>와 같은, 오르지 못할 나무만 바라보는 것이었는데
이젠 목돈깨나 들여서라도 <대표>나 <최대>같은 나무에 능히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이 해변의 풍광에 조화가 되건 말건 상관할 일이 아닌, 경제발전의 당당한 전리품인 것이다.
우리는 이 위대한 전리품에 경배를 드려야 한다.
그것이 비록 길 한가운데에서 통행을 가로막는 교만을 부리더라도 경배는 우리의 몫이다.
이 작품이 길을 막는 행패를 사양한 것은 겸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작품의 명성에 비례하는 교만의 극치에서 비롯된다.
어디에다 이 작품을 모셔야 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던 행정 관료들은
광안리 해수욕장의 전 시선을 집결시킬 드높은 반석을 별도로 건설하여 <덩치 큰 화분>을 안치하였다.
2008. 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