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묵
손 원
성주에 살고 있는 처 질녀로 부터 전화가 왔다고 했다. " 고모, 마을 뒤 산에 도토리 줍게 오세요, 어제 오후에 유서방과 같이 산책 나갔다 잠시 줍었는데 등산가방 가득히 지고 왔어요"
처 질녀는 대구에 살다가 새집으로 이사할 시기가 맞지 않아 당분간 친정생활을 하고 있다. 고모를 잘 따르는 처 질녀가 친정집으로 이사 왔다기에 그저께 고령 아버님께 다녀오는 길에 들렸다. 그때 소쿠리에 담긴 도토리가 눈에 띄었다.
" 그래 한번 가야지"
우리 부부는 이튿날 처가 집으로 갔다. 처 질녀는 두 번 주웠다는데 거의 한 말은 될 듯했다.
처 질녀는 도토리가 많이 떨어져 있는 장소로 안내 해 주고 자신은 볼일이 있다며 산을 내려갔다.
산 입구에 이르자 진입로부터 떨어진 도토리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도토리를 줍는 우리에게는 토실한 도토리가 금화처럼 여겨졌다. 우리 부부는 쪼그리고 앉아 도토리를 쇼핑백에 열심히 주워 담았다. 한 톨씩 줍고 어떤 곳에는 도토리 삼형제, 오형제가 모여 있어 한꺼번에 줍기도 했다. 도토리 줍는 재미에 푹 빠져 계속 가다보니 산 중턱 까지 올랐다. 등산 가방을 가득 채워 처가 집으로 돌아 와 승용차 트렁크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울에 달아 보니 18kg이나 되었다. 베란다에 내어 놓고 깨끗이 씻어 물기를 말렸다.
이튿날 동네 방앗간에서 껍질 채 갈아 고운 분말로 만들었다. 아파트에서 거르는 작업이 용이하지가 않아 다시 처가 집으로 갔다. 처가 집까지는 승용차로 20분 거리로 가깝다.
벌써 처 질녀 내외는 도토리 분말 거르는 작업을 끝내고 분말을 고무다라이에 담가 두고 있었다. 우리가 껍질채 빻은 도토리 분말을 성근 마대자루에 담았다. 다음은 마대자루를 큰 고무다라이에 넣어 장화 신은 발로 마구 밟으니 고동색의 엑기스가 흘러나왔다. 색이 옅어질 때까지 마대자루를 밟고 쥐어짜고 하여 빼낸 엑기스를 모으니 고무다라이에 가득 찼다. 흐르는 수돗물에 하루 쯤 담가 우려내면 떫은맛이 가신다고 했다. 하루가 지난 후 가보니 미세한 분말이 고무다라이 바닥에 가라 앉아 있었다. 이제 분말을 건조용 채반에 천을 깔아 얇게 펴서 햇볕에 내어 놓고, 남은 분말로 도토리묵을 쑤기로 했다.
무릎수술을 한 처남댁이 옆에 앉아서 지도를 했다. 건조대에 올려놓고 남은 껄쭉한 분말에 물을 부어 마당 한 쪽의 큰 솥에 넣어 장작불을 지폈다. 큰 솥이 가득 찼다. 분말이 눌어붙지 않도록 주걱으로 계속 저어 주니 걸쭉해 졌고 보글보글 끓어오를 때쯤 약한 불로 농도를 맞추어 풀죽을 만들었다.
풀죽을 스텐다라이에 떠서 식혀야 했다. 처가는 어제 묵을 쑤었기에 남겨 두지 않고 다라이채 트렁크에 싣고 대구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묵은 굳어 단단해 져 있었다.
아내는 " 성공했다." 하며 환호했다. 육수를 내고 묵장을 만들고 하여 묵은 김치 송송 썰어 곁들여 먹으니 별미였다. 나는 평소 묵을 좋아해서 아내는 가끔 묵 한 두모 사와서 묵채를 쳐주곤 했는데 직접 공들인 것이 보람도 있고 맛도 좋았다. 한 다라이나 되는 묵이기에 아내는 나눠 먹을 대상을 정하고 있었다. 옆집, 친구 등 다섯 집이나 나눠주었다. 잘 먹었다는 전화가 빠짐없이 왔다.
도토리 엑기스 짜 말리던 날은 햇볕도 좋아 오후 3시가 되자 분말이 꼬들꼬들해졌다. 트렁크에다 싣고 대구로 돌아왔다. 아파트 베란다에 늘어놓고 이틀이 지나자 완전 건조가 되었다.
도토리 분말을 냉장고에 넣어 두고 수시로 도토리묵을 쑤어 먹을 수 있다고 했다.
도토리를 줍고 묵 만들기가 흥미로운 것은 어릴 적 추억 때문 일 것이다. 어머니는 도토리를 주워 빻아 다라이에다 며칠 간 우려내어 떫은맛을 뺐다. 그런 다음 무쇠 솥에 다 넣어 묵을 쑤었다. 출출할 때 윤기 나는 먹음직스러운 묵을 썰어 내어 놓으셨다. 묵 한모를 들고 이웃에 심부름 가면 "묵이 이리도 잘 되었네, 잘 먹을게" 하고 반색을 했다.
어렵던 시절이지만 이웃과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이 많았다. 그때는 도토리묵이라도 쑤면 꼭 이웃과 나눠먹었다.
명절이 되면 두부를 만드는 집도 있었다. 두부를 만들면 실컷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당시 두부는 귀한 음식이었다. 하지만 묵은 평소에도 먹을 수 있는 구황 음식 정도였다. 가뭄이 들어 벼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때에는 메밀을 갈았다. 그 메밀로 묵을 쑤어 끼니를 해결하기도 했다. 양식이 부족할 때 도토리로 배고픔을 달랬다. 그 도토리가 얼마나 맛있고 긴요했으면 꿀밤이라고 했을까? 당시는 배고픔을 달래 주는 귀한 음식이었다면 지금은 무공해의 건강식으로 인기가 있으니 이를 두고 격세지감이라고 했던가?
도토리의 본래 주인은 야생동물 들이다. 다람쥐, 청설모, 토끼, 멧돼지의 겨울나기 양식인 것이다. 그들의 몫을 뺏은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올 겨울 폭설이 내리면 사료 한 포대 지고 그곳에 뿌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도토리묵은 등산로 주변의 식당에서 내놓는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등산 후 하산하면서 일행이 둘러 앉아 도토리 무침에 막걸리 한 잔이 우리를 유혹한다.
며칠 후 모임에서 등산이 예정되어 있다. 친구들과 같이 도토리묵에 시원한 막걸리 한잔이 기다려진다.(2019. 10. 16.)
첫댓글 오늘은 막걸리에 도토리 묵을 안주로 걸쭉하게 한잔 했습니다. 상상의 세계지만 맛은 변함이 없네요.
도토리 묵에는 늘 어려울 때의 추억이 따라다닙니다. 그리고 지금 아이들은 모르는 절박한 삶이 함께 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도토리 묵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어릴적 생각이 납니다. 당시 꿀밤 묵은 맛 보다 끼니를 이를 방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 입니다. 지금은 웰빙 더하기 맛맛으로 즐기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도토리 묵에 대한 자세하고 재미있게 쓰신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도토리 묵에 막걸리 한사발이 생각나게 하는 계절입니다. 본인이 직접 도토리를 주어서 묵을 쑤어 먹는 일은 시장에서 산 묵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겨울철 동물들의 양식만큼 놓아두고 필요한 양만 주어서 음식을 장만해야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도시에서 나서 자란 저는 도토리 묵 만들기에 대한 추억은 없지만 도토리 묵의 맛에 대한 추억은 있습니다. 겨울철 도토리 묵 장수가 골목을 다니면 부모님께서는 묵을 사다 김치를 잘게 썰어서 참기름을 많이 넣고 버무려 주셨습니다. 어릴 때는 맛있는 줄 몰랐는데 어른이 된 후 그 맛이 가끔 그리워집니다. 도토리의 주인인 다람쥐 청설모의 겨울 양식을 걱정하시는 마음이 따뜻하신 분이십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퇴직한 후 공공근로 인력 100명을 동원하여 1년간 산에서 작업지도할 때 바람이 불면 도토리가 비오듯 떨어져서 그것을 주어서 묵을 만들어 먹은 기억이 생각납니다. 선생님 덕분에 도토리 묵을 만드는 과정을 알았습니다. 처가가 가까이 있어서 정을 나누고, 이웃에 묵도 나누어 주며 생활하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여러가지를 생각하며 잘 읽었습니다.
산행길 입구마다 도토리묵이 많은 이유가 일찍부터 우리 국민들에게 익숙한 음식이었기 때문인가 봅니다만. 저는 고향이 제주여서 그런지 친 한 편이 아닙니다. 그래도 막걸리에 곁드린 도토리 묵이 허기와 갈증을 다스리는 치료제 임을 실감합니다. 도토리 육수와 묵울 만드는 과정을 대강 알게 되었습니다. 친지간의 다정한 정을 느끼게 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처가 동네에 가셔서 도토리를 18kg이나 줍고 도토리 묵도 성공하셨다니.. 올 가을 좋은 먹거리와 추억거리 잘 만드셨습니다. 생생한 일상의 체험이 있기에 좋은 글로 표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도토리묵, 이곳 경산으로 이사온 후 영대 뒷산에 올라가 이웃과 함께 도토리를 주워 모아서 남들이 다 만드는 도토리묵을 만들어 보았는데 그 과정이 생각보다 저의게는 참 어려웠습니다.양이 얼마되지 않아 믹스기로 갈아서 만들다가 죽도 묵도 아닌 음식을 만들어 가족이 외면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도토리묵 만들기는 포기했습니다. 남편이 즐기는 음식이라 매끈매끈하고 네모 반듯한 도토리묵을 자주 사 먹습니다. 실패의 기억이 떠오르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