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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166회 : 역사교사시리즈 제2편 조선최대의 음모, 광해군은 왜 쫓겨났나? (2002.8.10.)
방송일: 20020810 조회수 : 90113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역사스페셜
조선 최대의 음모, 광해군은 왜 쫓겨났나?
PD : 김형운
작가 : 빈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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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담너머로 카메라 넘어가 광해군 무덤.. 20" (보다가...)
(광해군무덤으로 카메라 들어갔다가..빠져나올때..멘트)
-아담하게 꾸며진 두 기의 무덤...
(흘리고)
-비석에서 무덤으로 9" -이 무덤의 주인공은 조선 15대왕인 광해군과 그의 부인이다.
(보고)
-석상 2" -경기도 양주군의 어느 산기슭에 묻힌 광해군..
-비석과 무덤 4" 그의 무덤은 그렇게 아무도 관심을 갖지않는 곳에
-두기의 무덤에서 화면이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한때 조선의 왕이었지만...
주-욱 빠진다... 19" 광해군에게 남겨진 이름은 폭군이요...쫓겨난 임금...광해군은 왜 궁에서 쫓겨나게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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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타이틀> 조선 최대의 음모... 광해군은 왜 쫓겨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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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이 궁금한 역사인물 1위...광해군..
#기본세트...뒷백에 넓은 그림 걸리듯이 광해군무덤이 펼쳐져 있고...
-혹시 왕릉에 가보신 적 있으십니까...?
대개의 왕릉은 규모도 거대할뿐만아니라 릉 주변엔 화려한 석상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지금 제 뒤에 보이는 이 광해군의 무덤은 왕의 무덤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초라합니다.
규모도 작을 뿐만아니라 주변의 석물도 이끼가 끼어있고...일부는 깨어져있기까지 한데요..어떤 사연이 있길래..
.왕의 무덤이 이토록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있게된걸까요...?
-지난주부터 보내드리고있는 여름방학특집 역사스페셜...
오늘은 이 무덤의 주인공인 광해군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광해군 무덤 지우개로 지우듯이......C.G.도표
지난 6월 1000여명의 교사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주제별로 가장 관심이 많은 분야가 바로
인물입니다.
#두번째 C.G.나오면
그리고 인물 중에는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진 명성황후나 이순신보다...
많은 교사들이 관심을 보인 인물이 바로 광해군입니다.
저희 제작진에게도 의외의 결과였는데요... 왜 이렇게 광해군에 대한 관심이 높을까요?
-광해군은 1608년...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그러나 광해군은 여느 왕들처럼 임종하는 순간까지...왕의 자리를 지키지는 못했습니다.
왕위에 오른지 15년만에 인조반정이 일어나 궁에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광해군하면 그저...쫓겨난 왕....혹은 폭군이란 이미지 정돈데요...
그러나 광해군을 새롭게 보자는 시각이 학계에서는 꾸준히 있어왔습니다.
아마 일선 교사들이 광해군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도 이때문일텐데요...
사실 광해군이 15년이란 짧지않은 세월동안 왕위에 있었지만
광해군이 어떤 왕이었는지....그리고 왜 쫓겨났는지 우리는 잘 알지못합니다.
그만큼 광해군은 역사속에서 철저히 외면당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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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역사속에 철저히 외면당해온 광해군...
-바다...달리고... 10" (4-"5 보다가....)
-궁에서 쫓겨난 광해군이 마지막 생애를
보낸 곳은 한반도 남단의 섬,제주도...
-제주민속촌 트래킹 12" -제주민속촌 박물관엔 광해군의 유배생활을 짐작해볼 수 있는 전시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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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으로 들어가는 두사람 현장음
이 쪽 가옥들은 옛날 그모습 그대로?
네..이건 옛날 있었던 집을 그대로... 장소만 옮겨놓은 것..
그래서 그대로 모든 구조가 재현되어있다..이건 작은 방이고...여기가 마루가 되고 여기는 나인이라든지
이렇게 따라온 사람들이 이용했던 곳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건 마루고..공동용이지요 여기 죄인이 있었던 그런 방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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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방...마루...광해군 방 25" -광해군의 유배형은 위리안치였다.
위리안치는 왕족이나 고위관리에게 내려지는 유형으로 유배인을 좁고 허름한 집에 가둔 채...
외출은 물론이고 외부인과의 접촉도 허락하지않는 중형이다.
-울타리 틸다운 10" -집 주변에 울타리를 치는 것도 광해군을 외부와 완전히 차단시키기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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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만인터뷰(2610) ...중간 가시 인서트
탱자나뭅니다.
옛날 죄인을 위리안치할 경우에는 이 탱자나무집에 했습니다.
이게 상당히 가시가 날카롭습니다.
상당히 날카로워서 완전 외부와 차단시키는거지요 이속에서 죄인생활을 하게되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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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자나무의 가시 15" -(탱자나무가시를 손으로 만지는 모습 보다가 가시 선명히 보이면)
날카로운 가시를 가진 탱자나무...이것이 유배인을 가두는 가시울타리역할을 한다.
-가시 너머...집으로 22" -겹겹이 쌓인 가시울타리속에 지어진...작고 초라한 집...
광해군은 67 나이에 이곳에서 홀로 눈을 감는다.
기록에 의하면 부음을 듣고 온 제주목사가 열쇠를 부수고 들어가 광해군의 시신을 염을 했다고
한다. 처량한 죽음이었다.
-서가에 꽂힌 실록들... 11" -광해군은 죽은 뒤에도 제대로 대접받지못한다.
500여년간의 조선왕조의 역사를 기록해놓은 방대한 역사서인 실록...
-선조실록에서 틸다운하면 광해군일기 15" (보다가 광해군일기 보이면)
-그런데 광해군대의 기록은 실록이란 이름 대신 일기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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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인호 인터뷰(13 0801)
조선왕조실록중에서 실록이라고 호칭하지않고 유일하게 일기라고 호칭하는 왕이 두명 있습니다.
바로 연산군과 광해군인데...이 두명은 모두 반정에 의해 폐위된 왕입니다.
이 '군'이라는 것은 왕에 대한 호칭이 아니라 왕자때의 호칭입니다.
따라서 광해군일기라고 표현된 데는 광해군이 조선시대내내 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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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 줌아웃 책장 넘긴다 20"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다.
(책장 넘기면)
광해군일기를 펼쳐보면 군데군데 붉은색으로 선을 긋고 칸을 쳐놓았다. 왜 이런 흔적이 남은 것일까?
-한명기선생과 투샷 17" (현장음 "광해군일기를 만든 인조대에 만들시점....)
실록 한권이 완성되기위해선 여러차례 수정작업을 거쳐야한다...
실록에 붉은 줄을 친 건.. 바로 실록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완성본 실록 줌아웃 8" -광해군일기는 단 두권만이 완성본으로 제작되었고
(끊고...잠시 쉬고)
-줌아웃된 상태에서 12" -나머지는 중간수정본상태로 남아있다.
그래서 중간수정단계에서 어떤 부분이 고쳐지고 삭제되었는지 확인이 가능하다.
그런데 중간수정본의 수정된 내용을 보면 석연치않은 점들이 눈에 띈다.
-지도 풀 줌인 5"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의 활약상이 완전히 삭제되어있다.
-한양 표시되면 8"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선조는 급히..의주로 피난을 떠난다.
-의주에서 화살표 나오면 좀 보다가 16" -이때 왕세자 광해군은 지금으로치면 임시정부라고 할 수 있는 분조를
이끈다.
조정의 일부를 분리해...황해도와 함경도일대의 전쟁터를 누비고 다니며 백성과 병사들을 격려하는 것이다.
-한양에서 아래쪽으로 20" -전쟁이 나고 1년6개월만에 한양을 수복해..선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 뒤에도
광해군의 활동은 계속된다. 남쪽으로 밀려내려가는 왜군을 쫓아..충청도와 전라도일대에서...광해군은
분조활동을 펼친다.
-실록 25" -이러한 광해군의 분조활동은 광해군일기.....중간수정본에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음악과함께..
첫번째 자막은 그냥 보고)
(두번째 자막 나오면 멘트)
광해군의 분조활동으로 인해 전국곳곳에서 의병이 봉기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내용이 광해군일기 완성본에는 완전히 삭제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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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인터뷰(9 2720)
광해군은 어차피 쫓겨난 인물이고 그가 왕으로 있던 시절의 행적을 기록한 실록이...그를 쫓아냈던 승자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광해군일기의 내용이 승자의 입맛에 맞게 서술되었을
가능성이 굉장히 큰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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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수정본 6" -광해군을 묘사한 부분 중엔 이런 부분도 있다.
광해군이 안질이 있어 눈이 충혈되었다는 것을
-완성본 10" 완성본에서는 광해군이 성질이 광폭해서 눈이 붉어졌다고 전혀 사실과 다르게 적고 있다.
광해군을 의도적으로 폭군으로 그린 것이다.
-실록들 14" -뿐만아니라 후대 기록에서는 광해군을 광해군이란 이름대신 혼군, 폐주로 적고잇다.
광해군은 조선후기내내...폭군으로 인식되게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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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2> 광해군을 쫓아낸 세가지 이유
#서가....책들 양쪽으로 꽂혀있고...
실록을 보면...
광해군은 마치 조선시대 "폭군"의 대명사인것처럼 보입니다.
그 정도로 현재 실록은 광해군을 철저히 폭군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광해군은 왜 이렇게 폭군으로 기록되게 된걸까요?
#인조실록 꺼내 들고..걸어나오며
지금 이 책은 인조실록인데요..인조는 광해군이 궁에서 쫓겨난 뒤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인조를 비롯해 새롭게 정권을 잡은 세력들은 광해군을 쫓아낸 뒤..그의 죄목을 자세히 밝혔는데요...
그 내용을 보면
#서가에서 걸어나오면....왼쪽에 공간 보이고...엠씨 말에 따라 글씨가 왼쪽 공간에...박히고
크게 외교와 내정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외교부분은...."배은망덕하여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다"는 것이고
내정부분은..".민가 수천을 철거하고 궁궐을 지었다."는 것과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했다"는 것입니다.
#명시된 글들 좀 보는듯하다가..손으로 가리키며
뭐 여기 거론된 죄목들만 보면...광해군이 폭군이라는 건...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같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우선 외교부분부터 보겠습니다.
"배은망덕하여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다.."
이는 명나라를 배신하고 오랑캐인 후금에게 호의적이었다는 얘긴데요...
무슨 이야긴지...당시 국제정세를 보겠습니다.
#글씨 사라지고 그 자리에 지도 등장..
명나라는 오랫동안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은 명나라를 상국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동북아시아에...새로운 강자가 등장하게 됩니다. 바로 후금입니다.
당시 새롭게 등장한 나라...후금은...빠르게 성장해 점점 영토를 확장해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1618년 명나라의 무순성을 공격해 함락합니다.
#명이 조선에 화살표..
그러자 다급해진 명나라는 조선에 지원군파병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광해군은 명나라의 요구를 들어주지않고...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지원군파병을 미루기만합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난뒤에야 어렵게 파병을 결정합니다.
뿐만아니라 ..뒤늦게 파병된 지원군은 전혀 전쟁에 적극적으로 임하지않습니다.
광해군을 궁에서 쫓아낸 세력들은 이러한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대해 비난을 했습니다.
바로 명을 배신하고..오랑캐인 후금에게 성의를 보였다는 것인데요...
과연 그 전말은 어떻게된건지...17세기초로 돌아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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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명을 요리한 광해군...
-차 트래킹 7" (앞의 스튜디오멘트 물리고...)(조금 보다가)
-17세기초 명에 파병된 대명지원군은 어떻게
-마을 팬 9" 되었을까..?중국 번시시 번시현..이곳에서 대명지원군의 행적을 찾을 수 있다.
-비석으로 걸어가고 3"
-앉으면 비석 보이고 7" -이 마을의 이름은 박가보...조선에서 건너온 박씨들이 많이 모여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주머니 찾아들어가고...현장음 살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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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음
-성이 박씨입니까...네 박씨입니다..우리 어머니도 박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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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라고 쓰는 아주머니 8" -그러나 여느 조선족과는 달리 아주머니는 박씨가 언제 어떻게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기억하지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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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 인터뷰
왜 조선족인지는 모른다.
그냥 박씨는 조선족이라고 하니까 또 호구에도 조선족으로 등록되어 있으니까 조선족인 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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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나가고 7" -그러나 마을엔 이들이 조선에서 건너온 사람임을 증명해주는 또다른 흔적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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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가리키며 아주머니 설명
원래 조선에서 온 사람들이 저기에서 살았는데 나중에 가오리팡즈라고 불렀다.
왜 고려방이라고 불렀는지는 어렸을 때 들어서 잘 모르겠고 옛날부터 어르신들이 그냥 그렇게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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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할아버지 찾아가는 13" -그렇다면 박씨들은 언제 이곳으로 건너와 정착하게된걸까?
박씨의 유래를 알고있다는 할아버지를 찾았다.
-할아버지 얼굴 5" -이 할아버지 역시 박씨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집안내력이 상세히 적힌 족보를
가지고 있었다.
-족보 꺼내오는 (윗멘트에 이 그림
조금 걸려도 상관없을 듯) 14" (보고...)
-펼치고 -화려한 그림이 그려진 이 종이는 제사때 쓰는 족보라고 한다...
(조금 쉬고)
-박문삼대종친 7" -(박문..현장음 듣고)
-족보내용 4" 족보엔...모두 11대가 기록되어있었다...
-풀에 그림 보이게 5" 그러니까 이곳에 박씨가 처음 정착한 건..삼,사백년전...조선중기가 되는 셈이다.
-조선의 신 타이트 5"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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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중국테이프 2 4219)
1619년 원래 신빈에서 왔고
1631년 쯤에 지금 이곳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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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펼치고 14" (페이지 넘길 때)
-1619년이라면 조선군이 중국에 파병되던 바로 그 해다.
(좀 보다가...해당 페이지 펼쳐지면)
-족보엔 박씨의 유래에 대한 보다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었다.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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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중국테이프 3 10255)
명조말년 1619년...후금 누루하치와 명나라 사이에 전쟁이 발생하자 조선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강홍립장군이 만여명을 이끌고 명나라를 도왔는데 그 지원병중 한명이 저희 조상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모두 포로가 됐는데 나중에 중국에 남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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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분위기... 20" -중국 번시현의 박씨촌에 모여사는 사람들은 광해군때...파병되었던 대명지원군의 후손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었길래 만여명의 조선군이 포로가 되어 이곳에 남게된걸까?
-차 트래킹 7" (흘리고)
-신빈시전경 5" -중국 신빈현..
-성 외경 4" 이곳은 후금의 첫도읍지였다.
-성으로 걸어들어가고 10" -시내엔 후금이 건국할 당시...세웠던 성이 그대로 남아있다.
당시 후금의 지도자였던 누르하치는
-성팬 궁궐 11" 이곳에 머물며 명과의 전쟁을 지휘하고 있었다.
(보다가)
-궁궐 6" -압록강을 건너와 명나라군대와 합류한 조선군의 공격목표는 바로 이 성이었다.
-C.G.붉은선네개 20" -명나라군대는 네 방향으로 나눠...후금의 도읍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C.G...파란선 올라간다 -그 중 조선의 지원군은 남동쪽으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현장 팬 7" -이곳이 당시 조선군의 전투현장이다...이 고개만 넘으면 후금의 도읍인 신빈이다.
-숲으로... 16" (보다가)
-그러나 당시 조선군은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않는다..
(한호흡 쉬고)
-명나라군과 합류한 조선군은 명나라군을 지원
-나무 팬 11" 하기위해 후방에 남아있었다.그런데 전방에 나갔던 명나라군이 후금에게 크게 패하고 돌아온다.
그러자 조선군은 뜻밖의 행동을 보인다..곧바로 후금에 투항의사를 밝히고 12,000여명의 병사들이 모두 후금에
투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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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명과 청은 두 번의 전쟁을 했는데 그때마다 명은 조선에 파병을 요구했다. 조선은 강홍립을 원수로 하여
한 개 부대를 파견했는데 조선군대는 이번 전투에 힘을 제대로 쏟지않았다.
즉 전쟁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않아 바로 투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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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트래킹 8" -과연 조선군은....전투에 참여할 의사가 없었던 것일까?
-진주강씨 사무실외경 4" -당시 대명지원군의 총책임자는 강홍립이란
-유지 꺼내오고 8" 인물이었다. 강홍립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의문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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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 펼치며
강홍립장군의 순검사라는 교집니다. 지금 국내외적으로 단 하나밖에 없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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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지 줌인 11" -순검사라면..지금의 국방부 특별검찰단으로 군부대를 감사하는 역할이다.
그런데 강홍립의 이력은 이것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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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 인터뷰
강홍립장군께서는 원래 문과에 급제한 문관이었습니다.
근데 중국 서장관으로 다녀오시면서 국제적 감각을 가졌으리라 보이고 또한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하시면서
당시 국경지대인 후금의 정세를 잘 아시고 문무를 같이 겸비한 인물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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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의 강홍립 이력을 c.g.로 23" -(표지 넘기는 것 보다가 강홍립 페이지넘길 때)
족보에 기록된 강홍립의 이력은 두페이지를 넘어간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서장관...지금으로치면 외교관이다.
그렇다면 광해군이 강홍립을 선택한 건 유창한 중국말과 외교적인 감각을 높이 샀기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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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인터뷰
광해군은 당시 왜란이 끝난지 얼마 되지않은 상황에서 또다시 10000여명의 군대를 전쟁터로 보낸다는 것이
사회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단한 부담이라고 생각했지요
따라서 가능하면 그 전쟁에 말려들지않으려고 시도했었고 결국 명의 압력에 밀려 어쩔수없이 참전하게된
경우에도 최후까지 강홍립이라고 하는 인물을 전쟁터로 보내 명나라군사와 협상으로..
전쟁에 깊이 발을 들이지않으려고 강홍립을 정한걸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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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시내에서 궁으로 11" -광해군이 대명지원군파병을 달갑게 여기지않은데엔
-궁앞의 자전거 탄 사람들 6" 이유가 있다.
-당시 패망의 기운이 짙었던 명에 비해 후금은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성 팬 24" -현재 선양시내엔
후금의 누르하치가 세운 고궁이 남아있다.
원래 명나라 땅이던 선양을 점령한 후금은 이곳을 새로운 도읍으로 정하고 화려한 왕궁의 면모를 갖추게된다.
-대정전 14" -지금도 옛모습 그대로 보존되어있는 고궁은 당시 후금의 세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짐작케한다,
-황제자리로 줌인 8" -명의 쇠퇴와 후금의 부상..광해군은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국제정세를 읽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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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인터뷰(14 4110)...이 부분 살릴 수 있을까..앞과는 맞지않는데...)
광해군은 이미 아버지 선조를 따라 의주로 피난 갔을 무렵..
------ 실록의 이야기를 보면 명이 쇠퇴하고 후금이 떠오르고 있는 상황에 대해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파악하는
부분이 도처에 보인다. 따라서 대륙정세의 변화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예민하게 주시해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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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관왕묘 풀 5" -그런데...광해군이 명을 배신했다고 비난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건물 팬 9"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중국식사당인 동묘...
-관우상 16" -중국의 장수인 관우를 모신 사당으로 흔히 관왕묘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서울한복판에 관우의 사당이 세워진게 된 건...당시 조선과 명의 독특한 관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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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 동묘가 건립되게된 건 임진왜란이 끝나고 중국황제가 보낸 칙서에 당시 조선에 지원병으로 왔던 명군이
왜군을 물리친 건 관우의 혼백이 많이 도와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당을 짓고 모시라는 칙서를 받고 3년공사 끝에 이 건물을 짓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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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지도 26" -명의 요구대로 관왕묘를 짓게된 배경엔 임진왜란이 있다.
1592년...조선을 침공한 일본은 무서운 속도로 조선을 점령해갔다...
부산에 상륙한 지...불과 20여일만에 일보은 한성을 점령하고...한반도 최북단까지 올라갔다.
-평양성탈환도 팬 16" -다급해진 조선은 명에 지원군 파병을 요청했고...
한반도최북단까지 밀고올라온 일본군이 명나라까지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명나라는 지원군을
파병한다.
-탈환도두번째커트 틸업 12" 조명연합군이 전과를 거둔 건...평양성에서였다.
평양성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에 맞서...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틸업(세번째커트) 20" 조명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고..왜군은 남쪽으로 밀리게된다.
(조금 보고)
-틸업....(세번째 컷) 20" 그러나 평양성탈환이후 선조와 조정대신들은 명나라덕분에 나라를 다시 찾게 되었
다는 생각을 갖게된다. 이른바 재조지은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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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인터뷰
재조지은이라는 것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국란을 맞이해서 이 명나라가 조선을 도와줌으로써 조선이
다시 이렇게 건설할 수 있는
------- 왕실이라든가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며아라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켜야된다는 논리가 상당히
파급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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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왕묘 4" -관왕묘가 세워진 건 이러한 사회분위기 때문이었다.
-현판 12" -당시 관왕묘공사를 명령하기위해 중국황제는 직접 글씨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
-관우상 줌아웃 16" -이렇듯.광해군 집권당시 조선의 명나라에 대한 사대는 어느때보다 심했다..
중립외교를 펴려했던 광해군이 명나라를 배신했다는 비난을 받게된 건 이러한 분위기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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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3>광해군...명의 파병요청을 받아들이지않다
#관왕묘 외경앞에서....
-서울 한복판에 삼국지의 주인공인 관우의 사당이 있다는 걸 아는 분은 그리 많지않을텐데요..
그런데 이러한 관왕묘가 서울에만 세워진 게 아닙니다.
안동과 성주등 당시 명나라 군사가 머물렀던 곳은 어디에나 관왕묘가 건립되었습니다.
더구나...당시 조선은 전쟁으로인해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져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명나라군사들은 관왕묘를
세우는데...조선의 물자를 조달했고...조선의 백성을 동원해 노동을 시켰습니다.
이 관왕묘의 존재는 당시 조선과 명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명에 대해 의외의 정책을 폅니다.
명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지않고...조선에 유리하도록...외교정책을 펼칩니다.
앞서 본 대명지원군 파병 문제가 바로 그 중의 하납니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의 급박한 정세속에서...명과 후금사이에 놓인 광해군의 고민은 끊이질않는데요...
이후 광해군은 어떤 외교정책을 펼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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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명과 후금사이의 실리외교 그리고 자강책
-철원 표충사로 줌인 13" (보다가)
-강원도 철원..이곳에 포충사라는 이름의 사당이 하나 세워져있다.
-사당앞의 PD와 3" (보고)
-사당내부 4" -사당에 모셔져있는 인물은 조선시대
-영정줌인 10" 무장으로 대명지원군의 부장이었던 김응하..광해군은 김응하를 추모하기위한 사당을 전국 곳곳에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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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인터뷰 (3 4153...인터뷰를 살릴지말지..좀 더 생각해봐야할 듯...)
김장군은 1618년..광해군 10년에 명나라의 요청에 의해서 강홍립원수의 휘하장군으로 3천명의 병사를 이끌고
명나라에 가서 천군과 싸우다 40세의 일기로 장렬히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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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앞의 두사람 7" -김응하는 후금군사와 싸우다 전사한 장군이다.
-비석 타이트 팬 10" -광해군때 세워졌다는 이 비석엔 김응하의 전투과정을 자세히 새겨놓았는데
-비석 읽는 틸다운 7" 당시 적이었던 후금의 군사들조차 경의를 표할정도로 그 모습이 비장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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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읽는 후손 목소리...손만 나온다.
버드나무밑에서 검하고 활이 다 하니까 검을 들고 싸우다가 노기가 충천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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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사내부 14" -그런데 광해군은 김응하의 사당을
함경북도 종성과 경원등...중국사신이 다니는 길목에 세우라고 명한다.
광해군에겐 어떤 다른 의도가 있었던 걸까..?
-충렬록 책 넘기면 유상과 그림들 13" -뿐만아니라 광해군은 김응하를 추모하는 책까지 펴내는데...
충렬록이란 이 책엔 김응하의 전투모습이 그려져있고..
-충렬록안의 시 11" 당시 조정대신들이 쓴 김응하 추모시도 실려있다..
-김응하 전투 모습 16" -명나라와의 전쟁을 피하려고했던 광해군이 이렇게 대명지원군으로 활약하다가 죽은
김응하를 대대적으로 추모한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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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 인터뷰
강대국과 약소국사이 외교에서 약소국은 사술을 펼수도 있다.
사술은 사기...명이란 대륙국가 후금이란 당시로선 오랑캐국가 이 사이에서 조선이 생존을 도모하려면 외교
밖에 없다. 그래서 충렬록...사당 지은 건 조선의 투항이 의도된거라는 명의 의심을 제거하기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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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홍립 무덤 걸어올라가는 5" -한편 광해군은 새로운 강국인 후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데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강홍립무덤..후손이 손보는 12" -대명지원군으로 파병되었다가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은....
이후 7년간 후금에 머물다가 조선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후금에 머무는동안
-강홍립묘 돌고 13" 강홍립은 광해군에게 후금의 사정을 소상히 알려줄뿐만 아니라 외교관 역할도 하게된다.
-석상걸치고 실록 기록 등장... 33" -실록엔 당시 광해군과 강홍립사이에 오간 서신내용이 자세히 실려있다.
(내용 본다)
-화기도감의궤 책...조명 줌인 9" -명과 후금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폈던 광해군은 안으로는 또다른 준비를 한다.
-책 넘기면 9" -화기도감이라는..기관을 새로 만들어 무기제작에 심혈을 기울인다.
-책 내용... 13" -화기도감에서는 조총을 주로 만들던 조총청과는 달리...포를 주로 만든다..
-영의정부분 9" -광해군은 화기도감의 총책임자로 영의정을 임명한다..그만큼 광해군은 화기제작을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로 여겼던 것이다.
-전쟁박물관 팬 10" -화기도감에서 주로 만들었던 건 화포 중에서도...
-대형화포 9" 대형화기들이었다.
-불랑기들 훑는 화면 18"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만들었던 것이 불랑기라는 화포다..
(한참 보다가)
당시 제작되던 화포들 중에 최첨단무기라고 할 수 있는 불랑기는 여느 화포에 비해
-불랑기 하나만 타이트 9" 이동이 간편할뿐만아니라 조작이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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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광인터뷰 ( 2930)
불랑기는 유럽에서 사용되던 화포인데...이는 종래 우리 화포와 달리...뒤에서 장전이 가능..
이 자포에 장전...화약을 넣고 발사한 뒤에 이렇게 끼워넣고 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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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이전의 포 8" -일반적인 포와 비교해보면 일반적인 포는 앞으로 포탄을 장전한다.
-불랑기 16" -그런데 불랑기는 포 뒤쪽에 구멍이 나있어 그 안에 자포를 장착해....포를 쏜다.
-두개의 포 비교 27" -이러한 차이는 발사속도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일반적인 포는 포를 쏜 뒤에 포를 다시 성안으로 끌어내....포탄을 장전해야한다.
그러나 불랑기는 포는 그대로 둔채...자포만 바꿔주면 되기때문에...일반포에 비해 발사속도가 훨씬 빠른 것
이다.
(조금 보고)
-그렇다면 광해군이 이렇게 화포를 제작하는데에 심혈을 기울인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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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광인터뷰 (3238)
후금 철기는 일본과 달리 기마병
따라서 조총보다 포가 유리 광해군때 화기도감에서 화포제작하는 건 후금기마병을 막아내기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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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유향 책 표지 넘긴다 13" -광해군은 후금을 방어하기위한 무기로 전차에도 마지막에 전차 관심을 기울
였다.
(보다가)
-책넘기면 마지막에 전차보인다 5" -당시 광해군이 만들고자했던 전차는 이런 모양이었다
-전차그림 타이트 5" (보고)
-C.G..전차 하나 만들어지고 6" 수레에 창과 방패를 단....일종의 방패 역할을 하는 전차다..
-C.G.여러 전차생긴다 14" 이 전차로 진영을 만들면 마치 성벽과 같은 역할을 하게돼...
후금 기마병의 돌격을 쉽게 저지할 수 있다.
-광해군일기 책 표지 6" -밖으로는 중립외교를 펴고 안으로는 나라의 힘을 키우고자했던 광해군..
-화친내용 12" 그는 조정대신들에게 후금과 화친하려는 뜻이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명을 배신하고 후금에게 성의를 베풀었다"는 주장은 광해군의 생각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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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4> 중립외교 편 현군,광해군
#고지도 바닥에 깔고...그 위를 걸어다니는 엠씨
이렇게 본다면 광해군을 쫓아낸 이들이 내건 외교부분에 대한 광해군의 죄목은 그리 타당성이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급박했던 동북아시아정세속에서 탁월한 외교정책을 폈던 지혜로운 군주로 평가해야하지않을까요...?
#시선 바꿔서
그럼 이번엔 내정의 문제를 보겠습니다.
광해군을 쫓아냈던 이들은 광해군이 "민가 수천을 철거하고 궁궐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즉 궁궐을 짓느라 수천채의 민가를 철거하고...백성들을 노역에 동원하는등....
백성들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지도에서 궁궐들쪽으로 걸어다니며
이 지도에서 보면 여기가 경복궁이고....그리고 동쪽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이 있고...그리고 서쪽에 경희궁과
덕수궁이 있습니다.
#창덕궁 창경궁 반짝
그런데 당시 광해군이 했던 궁궐공사를 보면 여기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했습니다.
#경희궁 반짝
그리고 여기 경희궁을 새로 지었고
#인경궁 자리에 궁궐 나타나고
지금은 그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않습니다만..
인왕산에 인경궁이란 궁도 새로 지었습니다.
새로 궁궐 하나를 짓기위해선 민가를 헐어야할뿐만아니라
수만명의 백성을 동원해...노역을 시켜야합니다.
그런데...기존의 궁궐을 중건한 것외에도 새로 지은 궁궐만도 두 개나 되니...
분명 지나친 감이 없지않은데요...
광해군은 왜 이렇게 무리하게 궁궐공사를 단행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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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전란후...흐트러진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다!
-시청부감 팬 덕수궁 12" -시청앞광장...그 옆으로 덕수궁이 자리하고 있다.
-덕수궁 풀 5" -덕수궁은 광해군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즉조당앞 걷고 9" -광해군이 왕위즉위식을 가진 곳은 바로 이 덕수궁이기 때문이다.
(보고...자막 나오면)
지금...즉조당이라 불리는 이 건물이
-즉조당현판 4" 1608년 광해군이 왕위즉위식을 거행한 곳이다.
-즉조당내부 9" -그런데 당시 이곳은 지금처럼 궁궐의 모습을 갖추지못했다.
양반집을 개조해..만든 임시궁궐이었다
-C.G.지도 풀에서 줌인 6" -그렇다면 광해군은 왜 정궁인 경복궁을 두고 덕수궁에서 왕위즉위식을 가졌을까?
-경복궁 창덕궁 불나고 11"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건 1608년..궁궐들은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임진왜란으로인해..경복궁과 창덕궁은 잿더미로 변해있었다.
-덕수궁 자리로 줌인 9" -그래서 당시 정릉동의 양반가를 개조해...임시궁궐로 이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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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민인터뷰 (0220)
임시로 쓰는거라 궁으로의 번듯한 자기 모습을 갖추지 못한 채 민가들 야안가들을 수용해서 임시방편으로
옹색하게 불편하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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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밑그림 15" -광해군이 창덕궁과 창경궁중건공사를 한 건 전후복구사업이자...
전란후 왕권을 다시 세우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또다시 두 개의 새로운 궁궐을 짓기시작한다..광해군이 궁궐공
-광해군가계도 14" -사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인 공빈김씨의 둘째아들로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임진왜란당시 분조활동을 계기로 광해군은 왕세자로 책봉된다.
-가계도..인목대비 등장 7" -그런데....선조가 뒤늦게 인목왕후 김씨를 중전으로 맞으면서...영창대군이 태어난다.
-줌인..영창군과 광해군 표시 16" -광해군이 왕세자가 된 지 16년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적장자인 영창대군의 탄생은 광해군의 왕위즉위를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적자도 장자도 아니었던 광해군의 왕위즉위과정은 멀고 험난하기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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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민인터뷰
광해군은 정통성이 굉장히 취약한 왕이었다.
적자인 영창대군도 나중에 태어났기 때문에 영창대군이 왕이 되어야하지않느냐는 문제제기도 있었구요
또 명나라에서도 광해군의 왕권..왕위를 인정하지않는 외교적인 문제제기를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런 정통성을 보완하기위해 대규모토목공사를 무리하게 진행한 게 아닌가..
이런 국가적인 사업을 추진함으로인해서...자기에 대한 이의제기나 문제제기를 봉쇄하려는 목적도 있지않았나..
그런 생각도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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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비어천가...책들 팬 6"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임진왜란때 불에 타버린 용비어천가를 새로 발간한다.
-책장 넘기면 26" -용비어천가는 조선창업을 기리는 노래로 광해군이 다른 책들보다...
용비어천가를 먼저 발간한 건 임진왜란으로 무너진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위한 것이었다.
-전란이후라는 시대적인 상황과...적장자가 아니라는 출생의 한계 때문에 광해군은 무엇보다도 왕권강화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충신책 18" -뿐만아니라 광해군은 민심을 수습하고 사회의 윤리기강을 바로잡기위한
사업도 펼친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발간이 그것이다.
-순신역전 그림 24"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충신..열녀등 분야별로 나눠 사례를 소개한 책으로
충신부분엔 이순신처럼 임진왜란당시 활약이 컸던 인물들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열녀책 표지 7" -열녀를 소개한 책에는 임진왜란때..열녀로 소문난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모아놓았다.
-김씨단두 15" -김씨단두라는 이 그림은 목숨을 잃으면서 까지 자신을 능욕하려했던 왜군에게 저항한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다.
-다른 그림들 21" -그림으로 사례들을 소개하고있어 글을 모르는 사람들도 쉽게 볼 수 있도록 만든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전국각지에 배포되었다. 흐트러진 민심을 바로잡기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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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5>
#창덕궁의 인정전앞...
-이곳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대대적인 중건공사를 했던 창덕궁입니다.
궁궐이 완공되자마자 광해군은 덕수궁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는데..제 뒤에 보이는 인정전이라는 건물이
광해군이 주로 집무를 보던 곳입니다...
-당시 광해군의 가장 큰 고민이자 과제는
임진왜란으로 무너질대로 무너진 조선을 다시 일으켜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위해 우선 필요한 건...왕권을 강화해...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었습니다.
광해군이 여러 차례 궁궐공사를 한 건..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선 바꿔서
-즉위이후 왕권확립에 몰두했던 광해군은 이후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개혁적인 정치를 펴나갑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대동법의 시행입니다.
#이이의 동호문답 등장하고...
이 책은 율곡 이이가 쓴 동호문답입니다. 이 책엔 광해군이 시행한 대동법의 원형이 실려있는데요...
#동호문답 책에서...대공수미법(貸工收米法)이란 한자 뽑아져나오고 대공수미법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한자 뜻 그대로 풀이하면 공물 대신 쌀을 거둬들인다는 의미로 이이가 제시한 새로운 세제법입니다
#자막 플레이...나중에
이전엔 모든 백성이 나라에 공물을 바쳐야했습니다.
그런데...이 법은 가난한 농민에겐 세금을 부과하지않고...땅을 가진 지주에게만 쌀을 내도록하는 제돕니다.
가난한 농민을 구제해주기위한 아주 혁신적인 법안입니다.
그러나 이이가 이 법안을 처음 제시했던...선조때엔 기득권층의 거센 반발로인해 직접 시행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이 법을 대동법이라고 이름을 붙여 경기도지역에 시행합니다.
임진왜란 이후...전국토의 반이상이 황폐해져...농민들의 삶이 극도로 어려웠던 당시 상황을 감안해....
기득권층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법을 시행한 것입니다.
광해군은 이렇듯 전란후 나라를 바로 세우기위해...왕권을 확립하고..민을 위한 혁신적인
정치도 단행합니다. 광해군의 내정에 있어서도 폭정을 펼친 왕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광해군이 쫓겨난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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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붕당정치의 희생자
-풀..경남합천 자막뜨고 5" (보다가)
-팬...부음정 보이고 12" -경상남도 합천...이곳에 광해군과 인연이 깊은 인물이 있다.
-부음정으로 들어가고 부음정 풀 14" (들어가는 모습 좀 보고)
-부음정..
이곳은 남명 조식의 수제자인 정인홍이 초야에 묻혀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던 곳이다.
-현판 가리키는 4"
-현판 6" -정인홍과 광해군의 사이는 각별했다.
-유지들 펴놓은 모습 풀 14" 정인홍은 벼슬길에 나가지않는대신 상소를 통해 국정에 참여했다.
그런데..광해군은 정인홍의 상소를 받을때마다..빨리 한양으로 올아오라고 독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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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 손 타이트
경이 먼 곳에 있음으로 듣는 것이 본 것만 못하니 힘써 올라와서 일에 따라 바로잡아주도록 힘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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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교지 27" -광해군은 정인홍에게 영의정을 제수한 뒤...영상이 비어있으니 어서 올라와 시국을 논의
하자고 재촉하기도 했다.
광해군은 왜 이렇게 정인홍에게 의지했던걸까?
-무계전투현장으로 가는 ...5" -광해군과 정인홍의 인연은 임진왜란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사람 현장 보는 11" -임진왜란이 터지자..57의 나이에도 불구하고..정인홍은 의병을 일으켰다.
-강 10" 그리고 이곳에서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시켜..왜군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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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인터뷰
새벽부터 공격해가지고 오시까지 한낮까지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보급품을 불지르고 의병의 첫싸움이고
공격전을 해서 적을 무찌른 아주 뜻깊은 자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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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합천 표시된다 4" -임진왜란 당시 정인홍은 합천에 머물러있었는데
-낙동강표시 5" 합천에서 가까운 낙동강은 왜군의 보급품이 운반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합천부분 크게 나오고 18" -정인홍은 청주 고령등 주변마을에서 자신의 제자들을 불러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왜군의 보급로나...기지를 기습공격해...무계리전투외에도 여러차례 전과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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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인터뷰
정인홍은 선조대후반 북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인홍이 선조대후반에 부상하게되는 계기는 적극적인의병활동을 통해 영향력 확보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광해군 역시 임진왜란때 왕세자로 분조의 임무를 맡아서 적극적인 항변활동을 해나가면서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다
그때 당시 정인홍이란 인물은 광해군이 믿음을 가졋을거고 광해군이 보여줬던 전란기 위기대처능력은 정인홍과
상당히 호흡이 맞았던 요소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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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사 외경 5" -합천에 있는 창의사..이곳엔 임진왜란당시 의병활동에 참여했던
-내부 풀 7" 사람들의 위패가 모셔져있다. 당시 의병활동에 참여했던 세력들은
-위패들 팬 20" 대개 정인홍을 비롯한 북인세력들이었다..
그들은 개혁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대동법과 중립적인 외교정책을 펼쳤던 광해군의 개혁정치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세력이었다.
광해군과 정인홍을 비롯한 북인세력의 개혁정치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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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인호인터뷰
선조초년의 당쟁 분쟁속에서 동인서인남인북인 나눠진데 북인은 대부분은 남명의 제자 화담의 제자 일부
이들은 대개 보면 개혁적인 정치...경세정치를 가지고 백성들을 위해 정치를 하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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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에 반대글귀들 올리고 21" -그러나 개혁적인 정책들은 기득권층의 반발로 이어졌다
(좀 보다가)
명에 대한 사대주의에 젖어있던 사대부들은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을 벌주라고 했고...
대동법으로 세금의 부담이 커진..기득권층들은 대동법의 폐지를 거론했다.
-석어당으로 걸어가는 14" -이렇게 기득권층의 반발이 커져갈즈음..결정적인 사건이 터진다.
광해군의 배다른 동생인 영창대군이 배후의 인물로 거론된....역모사건이었다.
-석어당팬 13" -이 사건으로 영창대군은 목숨을 잃게되고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는 폐위되어
덕수궁 석어당에 유폐된다.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사건..
-석어당 풀 8" -이것이 바로 광해군을 내쫓은 새력들이 주장한 광해군의 또하나의 죄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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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인호인터뷰
우리가 왕의 동생을 죽였다 형님을 죽였다는 명분으로 왕을 폐출하면 태종임금은 어떻게 되고 세조임금은
어떻게되고 나중에 아들을 죽이는 인조는 어떻게 되고 손자까지 죽입니다
인조는 그리고 또 영조는 어떻게 됩니까
그런 의미에서 실질적인 인조반정의 명분은 당시 대동법실시나 개혁정치를 하자 기득권세력이 자신의 것이
감소해가고 자신의 권력의 형태가 축소되어가자 이것을 만회해보려한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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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무덤으로 카메라 주-욱 들어가고 15" -결국...광해군은 왕위에 오른지 15년만인1623년....
궁에서 쫓겨나고 만다...
-한때 개혁군주로서 그 면모를 갖췄던 광해군..그러나 죄인의 몸이 되어 19년간 모진 세월을 살아야했다.
-광해군지묘 비석 틸다운 10" -그리고 지금 경기도 양주군에 잠들어있는 광해군...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도 릉이 아닌 광해군묘로 남아있다.
-광해군묘 4"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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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6>..클로징
#광해군 무덤 세팅....비석이나 석등 등이 화면속에 잘 살도록...초라한 느낌..
-광해군을 내쫓고 정권을 잡은 세력들은 광해군이 폈던 개혁정치를 모두 폐지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인조반정직후 폐지된 대동법입니다.
-뿐만아니라 외교정책도 바뀌게되는데...
명에 대한 사대를 다시 강화합니다.
당시 조선은 후금과의 일들을 모두 명에 보고할뿐만아니라 조선이 파악하고있는 후금에 대한 정보들을 명에
알려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외교정책은 결국 조선에 또다시 전쟁을 불러일으킵니다.
후금...즉 청이 조선을 침략해온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바로 그것입니다.
현실을 무시한 외교정책으로 인해..조선은 또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속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오늘 교사들이 뽑은 역사이야기 두 번째 시간으로 광해군에 대해 알아봤는데요...
광해군이 15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펼쳤던 내정과 외교정책은 광해군이 어떤 왕이었는지 우리에게 너무도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금 초라하기 이를데없는 광해군의 무덤은 지난날 광해군이 우리에게 어떻게 평가받아왔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광해군에 대한 평가도...지금의 잣대로 다시 해야하지않을까요?
역사란 지나간 과거로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후세에 의해 늘 새롭게 평가되고 해석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