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본 받으라고 할 수는 없는지
요 10:4 / 양들은 앞장서서 걸어가는 그를 뒤 따라간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부르신 제자들】하루는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설교를 하시는데 많은 군중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왔다. 그때 호숫가에서 작은 배 두 척을 대어 놓고 어부들이 그물을 씻고 있는 것을 보신 예수께서 그 배들 중 시몬의 배에 오르셨다. 그리고 배를 호숫가에서 약간 떼어놓게 하신 후에 앉으셔서 군중들을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말씀을 다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제 깊은 데로 나가서 그물을 내리라. 그러면 많은 고기가 잡힐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시몬이 대답하였다. `선생님, 저희가 어제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다시 해보겠습니다.' 시몬이 그대로 하였더니 그물이 가득 차서 찢어질 지경이었다.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소리쳐 도움을 청하였다.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곧 두 배에 고기가 가득 찼다.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오 주님, 제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주님을 모시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죄인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많이 잡힌 고기를 보고 놀랐다. 시몬의 동료인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똑같이 놀랐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게 될 것이다.' 그들은 곧 배를 호숫가에 댄 후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갔다(눅 5:1-11).
제자들을 부르셔서 3년 동안 동거동락하시며 많은 가르치셨고, 많은 기적을 베푸시며 제자들로 하여금 사도가 된 후에 이렇게 하여 복음을 전함으로 불쌍한 영혼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게 하도록 하셨다. 특히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날 저녁 예수님은 특별한 교육을 하셨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다】예수께서는 유월절 전날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기 전에 세상에서 지내실 마지막 밤인 것을 알고 계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맡기신 것과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가실 것을 알고 자기의 제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한층 더하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식탁에서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동이고는 대야에 물을 떠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허리에 둘렀던 수건으로 그들의 발을 닦아 주기 시작하셨다. 이렇게 하여 시몬 베드로 차례가 되었을 때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께서 제 발을 씻기시다니 말도 안 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이렇게 하는 까닭을 네가 지금은 모르겠지만 훗날에 가면 알게 될 것이다.', `안 됩니다. 주님, 제 발은 절대로 못 씻기십니다.' 하고 베드로가 우겨대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내 친구가 될 수 없다.' 시몬 베드로가 소리쳤다. `그러시다면 제 발만이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도 씻어주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미 목욕한 사람은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이제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여기 있는 사람이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 제자들의 발을 다 씻어주신 예수께서는 겉옷을 다시 입고 식탁에 앉아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긴 뜻을 알겠느냐? 너희는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옳은 말이다. 사실이 그렇다. 그렇다면 주요,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주었으니 너희도 남의 발을 씻어주어야 옳지 않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베푼 것같이 너희도 남에게 베풀도록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종이 주인보다 높지 못하며 보냄을 받은 사람은 보낸 사람보다 높지 않다. 너희가 이것을 깨달아 이제 그대로 행하면 복을 받을 것이다(요 13:1-17).'
예수님의 지상 생애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본이 되게 하시려는 삶이었다.
‘모델링’이란 말은 심리학자 밴듀라가 처음 사용한 용어이다. ‘어떤 사람을 모델로 하여 스스로 변해가는 것’을 모델링이라 한다. 누구를 모델링의 대상으로 삼느냐 하는 것은 인생이 달라질 수 있는 효과가 있다. 어떤 사람을 모델로 삼고 살면 그 사람과 내가 동일시되는 효과가 있다.
사람들은 함께 살다보면 저절로 닮아간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자녀들은 자기도 모르게 부모를 닮아가고 생긴 모습뿐만 아니라 행동과 삶이 ‘붕어빵’이 되어간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존경하는 선생님을 제자들은 닮아가게 된다. 그리고 부부가 닮아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사회적 적응’이란 사회학적인 용어가 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본받아 닮아가려는 본능이다.
‘부창부수’(夫唱婦隨), ‘부전자전’(父傳子傳), ‘유유상종’(類類相從), ‘초록동색’(草綠同色) 같은 용어들이 많이 있다. 부부나 부모와 자녀나 같은 유의 사람들이나 누구나 함께 있으면 본받아 닮게 되는 것이 자연적인 인간관계의 이치이다.
이스라엘 군대의 장교들은 ‘돌격 앞으로’라는 말을 절대 하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대신 ‘나를 따르라’라고 한다고 한다. 부하들을 앞서 보내고 지휘관은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휘관이 앞서고 부하들을 뒤에 따르게 하는 것이다. 부하가 지휘관을 따를 때, 부하직원이 상사를 따를 때 몸만 따른다면 한계가 있다. 마음이 따라야 온전히 따를 수가 있다. 윗사람이 본이 되고 모델이 돼야 아랫사람이 기쁘게 따를 수가 있을 것이다.
‘멘토’의 자격이 있다. 멘토는 멘토리에게 솔직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멘토는 멘토리와 깊은 유대관계가 있는 사람이다. 멘토는 교사와 같은 사람이다. 멘토는 멘토리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멘토는 멘토리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본받다’라는 말의 헬라어 단어 ‘미메타이’(mimetai)는 ‘모방하다’ 혹은 ‘그림자’라는 뜻이다. 모방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행한 것을 보고 조금도 더함이나 덜함이 없이 그대로 따라한다는 의미이다. 모방이란 창조의 앞걸음이다. 어떤 이를 모방하다 보면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지게 되는 법이다.
요즘 ‘짝퉁’하면 중국을 떠올린다. 중국은 정말 짝퉁의 천국이다. 명품이라고 말하는 의류, 시계, 가방, 신발뿐만 아니라 심지어 달걀도 짝퉁이 있다고 한다. 짝퉁을 보면 진품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고 기술력도 대단한 것을 발견한다. 짝퉁천국이라고 중국을 욕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도 한 때 그랬다. 어떤 제품을 모방하여 짝퉁을 만들다 보면 기술력이 발달하여 진품을 능가하는 제품을 만들 수 있게 된다. 모방은 중요하다.
예수님은 우리의 본이시다. 바울 역시 예수님이 자신의 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으로 삼은 자신이 다른 사람의 본이라고 하였다. 베드로전서 5:3에는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하였다. 베드로도 교회의 일꾼들에게 성도들의 본이 되라고 권하였다.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들이 되고 그리스도의 본을 보이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사도 바울도 자기를 본받으라는 말을 여러 곳에서 하였다.
고전 11:1 /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으십시오.
빌 3:17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내 생활을 본받으십시오. 그리고 나를 본받아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
특히 마음에 큰 감동을 주는 바울의 교훈이 있다.
【자비에 대한 감사】 딤전 1:12-17 /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어떻게 다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나를 자기의 심부름꾼으로 선택하셨을 뿐 아니라 충실하게 섬길 힘을 주셨습니다. 과거에 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비방하며 다녔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며 온갖 방법을 다 써서 그들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주께서는 내게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때는 내가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고 또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는 걸 아셨기 때문입니다. 오, 우리 주님은 얼마나 은혜로운 분이신지요. 주님은 내가 어떻게 주님을 신뢰해야 하며 또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은 참말입니다. 누구나 다 이 사실을 진심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죄인 중에서도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런 내게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아무리 악한 죄인일지라도 크나큰 관용으로 감싸주신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나 같은 것을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영광과 존귀가 하나님께 영원무궁토록 함께 하소서! 하나님은 영원한 왕이시며 결코 죽지 않으시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유일한 분입니다. 아멘.
바울이 빌립보서 3:17에서 자기를 본받으라는 말은 조금 듣기 거북한 이야기였다. 바로 전 장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서로를 낫게 여기라’고(빌 2:3) 가르친 사람이 남들에게 자기를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되는 발언같고 약간은 거만한 태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바울은 왜 이런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말을 하였을까? 그리고 바울의 이런 면도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일까?
❶ 바울은 교만한 사람이 아니다. 바울은 그의 말대로 훌륭한 가문에서 출생하여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또 종교적으로도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서 세상적으로 내세울 것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이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여긴다고 하였다. 자기 자신에 관하여서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는 겸손한 자세를 가졌으며 자신의 업적에 관하여는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이라고 고백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 그러므로 ’나를 본받으라‘는 바울의 선포는 결코 자신을 내세우는 교만한 발언이 아니었다.
❷ ’나를 본받으라‘는 말의 뜻은 비록 부족한 죄인이지만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자신의 모습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1에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으십시오.‘라고 했다.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고(빌 1:21) 선언할 정도로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했고 그와 항상 동행하는 삶을 산 사람이다 비록 우리와 같이 끊임없는 죄의 유혹을 받았지만 예수님만 바라보고 나아가며 변화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나 같은 사람도 변화시킬 수 있다면 당신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나처럼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사세요!‘라고 외쳤다.
❸ 우리도 바울과 같이 ’나를 본받으라‘는 말을 외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또 너희는 지도자라고 불려서도 안 된다.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마 23:3)라고 경고하셨다. 아무리 진리를 외쳐도 진리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자신들은 현대판 바리새인에 지나지 않는다. 진리의 선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진리의 삶이다. 이 세상은 더 이상 ‘진리를 가르쳐 주세요’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진리를 보여주세요’라고 절규하고 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성경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같이 자신의 죄를 겸손히 고백하고, 예수님을 날마다 닮아가며, 그분의 말씀대로 살면서 담대하게 세상을 향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외칠 수 있는 거룩한 성도가 되기를 원하신다. 죄로 물들어가는 이 세상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자.
바울은 자신이 완전하기 때문에 ‘나를 본받으라!’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슨 뜻인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 여정의 태도를 본받으라는 것이다.
①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바울도 완전무결 점자가 아니라 우리와 같이 연약함이 있었지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내려놓았다.
빌 3:5-8 / 나는 순수한 유대인 혈통을 이어받아 오랜 전통의 베냐민 가문에 태어났으며, 난 지 여드레 만에 유대인의 표지를 받기 위해 할례의식을 치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디 한군데 흠잡을 데 없는 진짜 유대인입니다. 게다가 유대교의 모든 율법과 관습을 지키기를 가장 엄격하게 요구하는 바리새파 회원이었습니다. 6) 얼마나 그악스러웠던지 교회를 모조리 핍박했고 유대교의 모든 규칙과 규정을 빠짐없이 지키려 온 힘을 쏟았습니다. 7) 그러나 한때 대단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이런 것들을 지금에 와서는 모조리 내던졌습니다.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그분에게만 소망을 두기 위해서입니다. 8) 그렇습니다. 나의 주님 그리스도 예수를 알게 된 것이 너무도 존귀해서 이것과 비교하면 다른 것은 다 무가치하게 여겨질 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외에는 다 쓰레기처럼 여기고 모두 내버렸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②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빌 3:14 / 목적지까지 달려서 상을 타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상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그 일을 바탕으로 하여 내리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 상을 주시려고 나를 하늘로 부르고 계십니다.
내 구원의 완성과 내 신앙의 성숙(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그 목표)을 향해 내가 쉬지 않고, 중단하지 않고, 끊임없이 달려가고 있는데, 여러분들도 그런 내 모습을 좀 본받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 기독교 칼럼 (송영일 목사) – 앞서가는 목자 뒤따라가는 목자 / 리저스 다이제트에 있는 서양 목동과 동양 목동을 비교한 글이다. 서양 목동은 가축을 뒤에서 몰아간다. 서부영화에서 종종 보는 장면인데 목자가 양떼나 혹은 소 떼를 몰 때 그들을 앞서가게 하고 목자는 목장개들을 풀어 뒤에서 몰아간다. 고삐를 풀어 때리기도 하고 곁길로 가는 녀석은 올가미를 걸어 붙들어 오기도 한다. 이리 때리고 저리 때리고 앞으로 그냥 몰아붙인다. 그런데 동양목자는 양을 앞에서 인도한다. 목자가 앞서가면 양떼들은 일사불란하게 뒤를 따라간다. 이런 두 종류의 풍속에 대한 차이점을 비교했다. 가축들을 앞에 놓고 뒤에서 몰고가면 어떻게 될까? 앞에 놓고 뒤에서 몰 때는 결국은 강권이 발동한다. 왜 그래야 할까? 앞으로 몰고 가려고 하면 할수록 양떼들은 두려워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한다. 그래서 뒤에서 계속 위협을 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간다. 잘못된 길로 가는 녀석은 때려가면서 인도한다. 이것이 독재자들의 방식이다. 그러나 앞에서 목자가 이끌어 갈 때는 어떻게 될까? 목자는 양떼들이 뒤에서 따라올 것을 믿고 앞을 향해 인도한다. 이것이 이스라엘 목자들의 방식이다. 예루살렘의 성지여행자들을 위한 안내광고를 본 일이 있는데, 10살도 안 되어 보이는 어린 목동이 양 삼백 마리를 인도하는 장면을 봤는데, 참 인상적이었다. 어린 소년 목동은 때로는 피리를 불고 휘슬을 불면서 앞서가면 양떼들은 그 소리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구름 떼처럼 움직였다. 조그만 소년 목동이 댕강댕강 급하게 종을 치면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양떼들이 일제히 목동을 쳐다본다. 그때 평화로운 음률로 피리를 불면 일제히 목동을 따라간다. 이탈자가 하나도 없다. 이것이 예수님의 방식이다.
그것을 보면서 느낀 것이 있었다. 모든 성도들이 그처럼 목자 예수님을 따라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모든 성도들을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할 수 있을 텐데… 목자는 양떼들이 따라올 것이라고 믿는다. 또 가끔 따라오다가 쓰러지는 녀석도 있고 또 비틀거리는 녀석도 있다. 그러면 목자는 그 양을 둘러업고 간다. 이것이 목자와 양의 관계이다. 목자가 양을 믿고 앞서가면 양떼는 또 목자를 신뢰하고 따라간다. 그래도 따라오지 않고 살짝 몰래 샛길로 벗어나면 어떻게 될까… 이리떼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 버림받은 양일 수밖에 없다.
■ ‘한 목자의 눈으로 본 시편 23편’(A shepherd looks at Psalm 23)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저자 필립 켈러(Philip Keller)는 아버지가 아프리카 케냐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 일할 때 케냐에서 탄생하고 자랐다. 그는 한 때 8년 동안 목자생활을 했는데 실제경험을 토대로 양의 습성을 관찰한 책이다. 이 책에서 양의 습성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말한다면 양은 매우 나약한 동물이라는 사실이다. 양은 자기를 스스로 보호 능력이 전혀 없다. 게다가 거북이처럼 한 번 뒤집히면 결코 혼자서 몸을 뒤집고 스스로 일어나지 못한다. 목자가 구해주지 않으면 얼마 못 가 죽게 된다. 양은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 동물이다. 또 양은 시력이 나쁜 동물이다.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짐승이 가까이 다가와도 잘 보지 못한다. 그냥 놔두면 독초를 먹거나 더러운 물을 마셔서 병에 걸리거나, 위험한 곳을 돌아다니다가 죽게 된다. 시력이 나쁜 양은 보통 시각장애인들이 그렇듯 다니던 길로만 가려 하고, 풀을 뜯던 곳에서만 뜯으려고 한다. 그래서 양들이 다니는 길을 보면 반들반들하게 길이 나 있다. 양은 스스로 살아갈 수 없다. 목자가 얼마나 양에게 필요한지 알 수 있다. 선한 목자의 돌봄을 받아야 한다. 양의 일생이 전적으로 목자에게 달려 있다. 다른 동물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없다. 뿔이 없어서 적이 공격하면 대항할 능력이 전무하다. 적이 공격해 오면 물어뜯을 수 있는 송곳니도 없다. 그저 무방비상태로 잡아먹히는 나약한 동물이다. 자기보다 더 작은 동물한테도 꼼작 못하고 잡아먹힌다. 혹시 무서운 짐승에게 잡아먹히는 순간의 양의 얼굴을 본적이 있는가? 동물의 왕국이라는 TV Program에 보면 양이 잡아먹히는 순간에도 발버둥을 치거나 두려운 모습으로 소리를 지르지도 않는다. 전혀 대항할 힘도 없이 순진한 얼굴로 그저 잡혀 적힐 뿐이다. 죽어가면서도 그야말로 순하고 착한 양이다.
▶ 하나님의 일을 하다 보면 목자가 뒤에서 양떼들을 밀고 간다고 해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그렇게 해서는 결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아이들을 키워보면 자녀들을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밀어 부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그것을 깨달었을 때는 이미 아이들은 나름대로 다 자란 뒤였다. 무엇일까? 앞서가는 길 밖에 없다. 그것이 예수님의 방식이다. 예수님께서는 양떼들 앞에 ‘앞서가면 … 따라온다’(요 10:3-4)고 하셨다. 본을 보이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양떼들이든 자식들이든 따라오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목자이다. 그것이 선한 부모이다. 한 가지 잊지 말아야할 것은 ‘앞서 간다’는 말은 ‘희생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없이는 결코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예수님의 희생이기 때문이다.
■ 돌을 바로 놓는 선생님 / 어느 교사의 체험담. 결혼 전 그가 시골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하루는 징검다리를 건너다 돌을 잘못 디뎌 물속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어머니가 있는 하숙집으로 급히 달려갔다. ‘돌을 바로 놓고 왔느냐?’라는 어머님의 물음에 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뇨’ ‘이 녀석, 그래 가지고 무슨 선생이냐? 빨리 돌부터 바로 놓고 와 옷을 갈아입어라.’ 그는 이날 이후 ‘돌을 바로 놓고 왔느냐?’는 어머니의 말씀을 늘 새기며 교육현장에 임했다고 한다.
1. 다윗처럼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나 자신도 선한 목자가 되자.
어떤 지도자를 만나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사람을 지도자로 만나 그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것은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것과 같아서 둘 다 구덩이에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한다. 어떤 지도자를 따르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구약시대에도 종교지도자들이 타락했다. 그들은 종교지도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괴롭히는 사람들이었다.
렘 2:8 / 너희의 제사장들은 내게 물어보는 일이 없었고 백성을 가르치는 스승들도 내가 준 율법을 존중하지 않았다. 백성의 지도자들도 언제나 내게 대항하여 범죄하였고, 예언자들도 바알신의 이름을 내걸고 떠들어 댔다. 어느 누구도 내게 묻거나 내 율법을 존중하지 않았으며 모두가 한결같이 우상을 숭배하고 전혀 도와줄 수 없는 우상에게만 도움을 요청하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종교지도자들이 타락하면, 나라가 망한다. 그러므로 나라의 정치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목회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종들이 타락하면 양떼들도 타락한다. 그래서 나라가 망하는 것이다.
시편 23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택하여 세우신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고백했다. 다윗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라고 고백했다.
비록 다윗이 곁길로 갔을지라도 부하들은 그의 잘못을 이해하며 용서하며 따를 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다윗이 계속 범죄의 길로 간 것은 아니었다. 무서운 죄를 지었지만 회개다운 회개를 하였기에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힘입었기에 그 누구 하나 감히 다윗을 정죄하거나 판단할 수가 없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듯이 누가 다윗을 정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열왕기상 15:5에 보면,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다윗이 대표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한 것은 역시 골리앗과 싸움에서였다. 그 어느 누구도 골리앗과 싸우려고 나서지 않는데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기름 부음을 받았던 목동인 소년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나가서 싸워 승리하였다.
삼상 17:45-49 /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너는 칼과 창과 투창을 들고 내 앞에 나왔지만 나는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무장하고 나왔다. 너는 만군의 여호와를 조롱하였으나 46) 여호와께서는 오늘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네가 여호와를 저주하였기 때문에 너는 그 벌로 죽게 될 것이다. 이제 여호와께서 내가 너를 쳐죽이고, 네 목을 자르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네 시체뿐만 아니라 블레셋 족속의 시체를 모조리 하늘의 새와 들짐승들의 밥으로 주겠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천하만민이 알게 될 것이다. 47) 또한 여기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도 여호와의 승리가 칼이나 창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여호와께서 직접 나서서 싸우시어 너희 블레셋 족속을 모조리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48) 골리앗이 앞으로 나아와 다윗에게 가까이 이르자, 다윗은 날렵하게 그의 앞으로 달려가면서 49) 주머니에서 돌을 하나 꺼내어 물매로 던졌다. 그 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정통으로 꽂혔다. 이렇게 돌이 이마에 박히자 골리앗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삼상 17:45-47에서 소년 다윗은 6-7번이나 여호와(하나님)란 말을 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전지전능하시며, 공의로우시고, 사랑과 긍휼이 넘치시는 하나님만을 믿고 따랐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 후대 사람들이 다윗을 존경하는 것이다.
다윗뿐 아니라 아브라함과 모세를 많은 사람이 따르게 된 것도 오직 한 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히 11:8 /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굳게 믿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향을 떠나 약속해 준 먼 땅으로 가라고 지시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대로 순종하였다. 그는 자신이 가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 고향을 떠났다.
히 11:24-26 / 모세가 어른이 되었을 때 애굽 왕의 손자로 불리는 것을 거절한 것도 그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세는 잠시 동안의 쾌락을 위해 죄에 빠지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나누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26) 애굽의 모든 보화를 소유하는 것보다는 장차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편이 훨씬 더 낫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실 큰 상을 더 바란 것이다.
하늘나라는 좁은 문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넓고 그 문도 커서 쉬운 길을 택한 많은 사람이 다 그리로 들어간다. 그러나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은 좁고 그 문도 작아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별로 없다(마 7:13-14). 선한 목자는 좁은 길을 개척하며 양들을 이끌고 간다.
2. 모든 양의 모범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실 뿐 아니라 몸소 실천하심으로 본을 보여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15)”고 하셨다. 또한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라고 하셨다(요 15:12). 예수님은 말씀만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가르치신 바를 직접 행하시며 본을 보이셨다. 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그렇지 않았다. 이에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마 23:2-4)라고 하셨다.
평상시의 교훈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마지막 호소는 죄인들을 위한 용서의 기도였다.
눅 23:34 /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이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용서의 교훈] 마 18:21-22 / 그때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물었다. `주님, 형제가 제게 죄를 지었을 경우에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22)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아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라.‘
마태복음 18:23-35을 보충 설명을 한다. 1달란트 = 6,000데나리온 / 1만 달란트 = 6,000만 데나리온 / 1데나리온 = 하루 품삯(최저 10만원) / 1만 달란트 = 60,000,000일×10만원 = 164,384년 동안 한 푼도 안 쓰고 저축한 액수.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았다면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빚은 탕감해 주는 것은 기본적인 의무이다. 그것도 형제에게 말이다. 이것조차 못한다면 그는 사람도 아니요 미물만도 못한 극악(極惡)한 인간이다. 누가 뭐라 할지라도 일만 달란트를 빚질 정도의 사람이라면 1백 데나리온은 적은 돈으로 충분히 탕감해 줄 수 있었다. 아니 더 한 것이라도 탕감해 주었어야 한다. ‘내가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남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은 결코 무리하거나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닌 주머닛돈처럼 동냥도 할 수 있는 액수일 것이다.
■ 물 한 컵의 사랑 / 학교에서 분유와 건빵을 배급해주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들은 늘 배가 고파 무엇이든 한번 실컷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어느 날 몇 명의 아이가 급식창고 문을 열고 들어가 저마다 주머니에 가득 건빵을 쑤셔 넣고는 분유를 퍼먹었다. ‘콜록! 콜록!’ 분유를 퍼먹다 보니 마른기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필 그때 창고 옆을 지나던 선생님께 발각되었다. 아이들은 단단히 각오하고 교무실로 불려갔다. 그런데 예상 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이놈들아! 분유를 먹다 목이 막히면 어쩌려고. 자! 물부터 마셔라.’ 코끝이 찡해진 아이들은 이렇게 다짐했다. ‘이 다음에 나도 선생님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선생님은 회초리 대신 물 한 컵으로 아이들을 가르치셨다.
■ 참스승 함석헌 선생 / 함석헌 선생께서 평북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학교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 여러 명의 학생이 교무실에 난입했다. 요즘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당시로써는 도저히 있어서는 아니 될 일이었다. 난입한 학생들은 기물들을 부수고 선생님들을 마구 때렸다. 교사들의 고함이 들리고 화난 교사들과 난입한 학생들 간에 난투가 벌어졌다. 그런데 그 난리가 벌어진 가운데서도 유독 함석헌 선생만은 얼굴을 두 팔에 파묻고 책상에 엎드린 채 꼼짝하지 않았다. 함석헌 선생의 그 모습에 많은 학생이 궁금점을 가졌다.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날 그때 학생들 몇 명이 함석헌 선생을 찾아와 그 연유를 물었다. 선생의 대답은 자신이 얼굴을 들면 자신을 치는 학생들이 누구인지를 보았을 터인데, 그렇게 되면 당신도 인간인지라 당신을 친 학생들을 기억하고 평생 잊지 못할 것이므로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분을 어른이라고 말할 것이다.
3. 자식과 같이 연약한 양을 사랑하라
예수님은 선한 목자와 삯꾼에 비유해서 말씀하셨다. 삯꾼은 누구일까?
요 10:11-13 /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12) 삯꾼은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난다. 양들도 자기 양이 아니고 그도 또한 양들의 목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리가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들을 흩어 버린다. 13) 삯꾼이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이어서 양들을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다윗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 중에 새끼를 물어 가면 목숨을 걸고 따라가 사자의 입에서 양 새끼를 건져내었다. 그래서 양 새끼 한 마리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윗의 아버지는 안심하고 다윗에게 양을 맡겼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며 기도하라고 하신다.
마 9:36-38 / 또 모여든 군중을 보시며 목자없는 양처럼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너무나도 큰데,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에 가서 도움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는 가엾은 백성들이었기 때문이었다. 3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구나. 38) 그러니 너희는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
‘불쌍히 여기사, 긍휼이 여기사’란 말은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말한다. 고대 사람들은 창자에 영혼이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말로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프다’는 뜻이다.
■ 포기하지 않는 사랑 / 수년 전 한 아가씨가 스코틀랜드 주일학교에서 장난꾸러기 소년만 모인 반의 담임을 자청하고 나섰다. 그중에서도 보비라는 소년은 다룰 수 없는 골칫거리 아이였다. 주일학교에서는 이 여선생님에게 새 옷 한 벌을 가지고 보비의 집을 방문하여 계속 출석을 잘하도록 했다. 여선생님이 보비의 집을 방문했을 때 보비는 씻지 않아 땟물이 흐르는 얼굴에 머리는 빗질을 하지 않아 헝클어져 있었고,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진흙에 뒹굴어 거의 걸레가 되어 있었다. 여선생님은 보비에게 새 옷을 갈아 입히고 교회에 잘 나오도록 부드럽게 얘기했다. 그러나 보비는 또 더러워졌고 교회도 나오지 않았다. 여선생님은 다시 보비를 방문했다. 이미 새 옷은 다 망쳐지고 걸레가 되어 있었다. 또 한 벌의 새 옷을 선물하고 잘 타일렀다. 그러나 여전히 보비는 달라지지 않았다. 여선생님은 힘이 빠지고 말았다. 주일학교 부장을 찾아가 이제 더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주일학교 부장은 "용기를 잃지 말고 계속해 보십시오."하고 격려했다. 그 여선생님의 계속적인 노력으로 고삐 풀어진 망아지 같은 이 소년은 나중에 훌륭하게 성장하여 중국에 선교사로 갔다. 그가 바로 로버트 스미슨 목사이다. 그는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수백 만의 영혼을 주께로 나오게 했다.
■ 전도한 세 명의 아이 / 미국의 오하이오주의 어떤 교회에 평생 주일학교 교사로 수고한 니믹스라는 노교사가 있었다. 그가 이곳으로 이사왔을 때, 한 교회에 나가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그러나 담임목사로부터 지금은 맡길 반이 없으니 스스로 전도해서 반을 만들어보라는 대답을 들었다. 마침 그는 주일 아침에 길에서 놀고 있는 세 명의 아이를 발견하고 다가가, 주일학교에 출석하여 내 반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이들은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이를 시작으로 그는 평생 주일학교 교사생활을 지속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세 아이가 모두 다 성인이 된 후에도 교사의 생일이 되면 생일축하편지를 보내왔다. 그중 한 사람은 인도 선교사로 일하는 챨스 콘웨이이고, 또 한 사람은 미국의 제29대 대통령인 하딩(W.G. Harding)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대통령의 비서관이 되었다고 한다.
■ 이런 교사가 되세요 / 폴란드의 조그만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웬일인지 독일군이 이 마을에는 나타나지 않아 불안한 가운데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데 드디어 독일군이 나타났다. 일부는 마을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학교로 가서 학생 중에 드문드문 섞여 있는 유대인 어린이들을 끌어내려고 하였다. 독일군의 모습을 본, 가슴에 별을 단 유대인 어린이들은 무서워서 선생님에게 달려가 매달렸다. 코르자크 선생님은 자기 앞으로 몰려온 유대인 어린이들을 두 팔로 꼭 안아 주었다. 선생님은 아무 죄도 없는 어린아이들을 왜 잡아가느냐고 호통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짐승만도 못한 그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트럭 한 대가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오자 아이들은 선생님의 팔에 더욱 매달렸다. "무서워할 것 없단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면 마음이 좀 편해질 거야." 독일군은 코르자크 선생님 곁에서 유대인 어린이들을 떼어놓으려고 했다. 그러자 코르자크 선생님은 군인을 막아서며, "가만두시오. 나도 함께 가겠소!"라고 했다. "자, 우리 함께 가자. 선생님이 같이 가면 무섭지 않지?" "네, 선생님.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코르자크 선생님은 아이들을 따라 트럭에 올랐다. 이 광경을 지켜본 독일군이 선생님을 끌어내리려 하자 "어떻게 내가 가르치던 사랑하는 이 어린이들만 죽음으로 보낼 수 있단 말이오."라고 하며 아이들과 함께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마침내 트레물렌카의 가스실 앞에 도착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손을 꼬옥 잡고 앞장서서 가스실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은 유대인이 아닌데도 사랑하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서 함께 목숨을 버린 것이다. 히틀러에게 학살된 동포들을 기념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세운 기념관 뜰에는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두 팔로 꼭 껴안고 있는 코르자크 선생님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결 론
사람과 사람간의 인간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해주는 수단으로 사랑을 따를만한 게 없다. 그 대상이 연인이든, 동업자든, 부모든, 직장상사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실천하는 한, 인간관계는 절대 깨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사랑 상태의 작동을 방해하는 두 가지 요소는 ‘오해’와 불신에 기초한 ‘시험’이다.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5-3=2’와 ‘2+2=4’의 원리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이는 ‘오(5)해가 생기면 세(3)번을 숙고해보자. 그러면 이(2)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2)해를 하고 나서 또 이(2)해를 하려고 노력한다면 아무리 미워했던 사람일지라도 사(4)랑을 할 수 있다.’라는 의미다. 사랑을 지키고 가꿔나가는 데 있어서 숙고(熟考)와 따뜻한 이해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 복음의 바톤 (baton)을 전달하다 / 제2차 대전 중이었던 일이다. 한 어린 영국 군인이 적군의 총에 맞아 죽어가고 있었다. 군목은 군인의 몸에 손을 얹고 기도하며 유언을 물었다. "제 어머니에게 전해주십시오. 아들은 고통 없이 기쁘게 죽었다고요." 어린 군인은 짤막하게 말했다. 잠시 후, 어린 군인은 무슨 중요한 것이 생각난 듯 숨을 헐떡이면서 간곡하게 말했다. "목사님! 한 가지 부탁이 더 있다. 제가 다니던 교회학교 선생님께 이 말을 전해주십시오. 선생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고요. 그리스도인으로 편안하게 눈을 감게 해주신 선생님께 감사한다고 전해주세요." 군목은 어린 군인의 유언에 따라 교회학교 선생님을 찾아가 마지막 유언을 들려주었다. 여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리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는 지금 교회학교 교사가 아닙니다. 교회학교 교사라는 직분이 대단치 않게 생각돼 그만두었다. 그러나 제자의 유언을 들으며 결심했어요. 다음 주일 때부터 다시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겠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에게 맡겨진 소중한 일들을 망각한다. 우리의 작은 가르침이 때로는 한 인간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 오늘도 수천 년을 이어 와,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 온 이 복음의 바톤을 그 누구에겐가 전달하는 일에 우리 사명을 다해야 한다.
■ 또 다른 사랑을 낳는 헬렌 켈러와 설리번의 사랑 / 사랑이 또 다른 사랑을 낳는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로는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 1880~1968)와 앤 맨스필드 설리번(Anne Mansfield Sullivan) 선생님의 사랑을 꼽을 수 있다. 헬렌 켈러는 어릴 때 앓은 열병의 후유증으로 시각과 청력을 잃고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다가 가정교사인 설리번 선생님과의 만남을 계기로 자신의 잠재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마침내 세계적인 사회복지 사업가로서 인간승리를 일궈낸 인물이다.
자신의 장애를 비관하여 공격적인 성품을 지닌 헬렌 켈러의 닫힌 마음을 열게 한 것은 설리번 선생님의 인내와 사랑, 그리고 기도였다. 설리번 선생님은 헬렌 켈러에게 유일하게 남아있던 인식의 창구, 즉 촉각을 통해서 지적(知的) 충격을 주었고 그것이 그녀의 학구열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스승의 도움을 받아 ‘물’이라는 단어를 배우기까지 7년이 걸렸다. 스승의 가르침은 “시작하고 실패하는 것을 계속하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손의 감각만으로 사물을 깨우치는 법을 배우고 글까지 터득했다.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환경에 졌다면 그녀가 쌓은 업적들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악조건 속에서 누구도 해보지 못한 감각으로 글을 배우는 것을 시도했다. 이 방법으로 그녀를 가로막았던 환경을 이겨냈다.
사실 어린 시절의 설리번은 매우 불행했다. 그녀가 10살 되던 해에 남동생과 함께 보육원에 버려졌고, 이들 남매는 그곳에서 온갖 학대와 시련을 경험하면서 성장했다. 그런 와중에 남동생이 죽었고, 설리번도 원인 모를 눈병에 걸려 실명의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시련과 절망 앞에서 용기를 주는 이야기(김동범 저)≫라는 책에 따르면, 설리번은 정신병까지 얻어 매사추세츠 근교의 한 병원에서 장기간 입원을 했다고 한다. 의사들은 설리번을 산송장처럼 취급하며 더 이상의 희망을 품지 않았다. 그런데 그 병원에는 퇴직을 앞둔 늙은 간호사가 있었는데, 그녀는 설리번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극진한 사랑으로 정성껏 돌봐주었다. 나이 많은 간호사가 행한 사랑과 봉사는 무기력의 블랙홀에 빠져 있던 설리번에게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도저히 나을 것 같지 않았던 정신병이 말끔하게 치유되었다.
퇴원해도 좋다는 통보를 병원 측으로부터 받았지만, 설리번은 돌아가지 않았다.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을 진심으로 돌봄으로써 자신이 받은 사랑을 되돌려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바로 그때 만난 사람이 7살의 어린 장애아인 헬렌 켈러였다. 그리고 설리번은 늙은 간호사로부터 받은 사랑에다 자신의 사랑까지 보탠 ‘아주 큰 사랑’으로 헬렌 켈러의 영혼을 자극해서 그녀의 상상력과 기억력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렇게 헬렌 켈러의 인간승리 이면(裏面)에는 위대한 스승인 설리번 선생님이 있었고, 설리번 선생님의 배후에는 퇴직을 앞두고 불쌍한 설리번을 위해 숭고한 인간애를 발휘했던 늙은 간호사의 조건 없는 사랑이 있었다. 즉 사랑이 또 다른 사랑으로 이어지면서 이들 세 사람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기적을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