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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30. 연중 제22주일.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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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치욕만 되었습니다.>(예레20,7-9) 7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압도하시고 저보다 우세하시니 제가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모든 이에게 조롱만 받습니다. 8 말할 때마다 저는 소리를 지르며 “폭력과 억압뿐이다!” 하고 외칩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 9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 제2독서<여러분의 몸을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로마12,1-2)
1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2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복음<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마태16,21-27)
21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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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30. 연중 제22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8.30 05:09
- 앞에 있지 말고 뒤에 있어야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들은 하느님 말씀을 따르려면, 주님을 따라가려면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필연이며 피할 수 없다는 곧 불가피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 말씀에서 “내 뒤를”이라는 말에 저나 여러분이 특별히 초점을 둔 적이 있었을까요?
저는 없었고 오늘 처음 주님의 뒤라는 말이 도드라져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제 눈에 특별히 들어온 건 주님의 다음 말씀 때문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우리는 말할 것도 없고 베드로 사도가 주님께 걸림돌일 수 있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걸림돌 같은 존재이고 그런 짓을 했어도 주님께서 거기에 걸려 넘어질 분일까요?
우리가 아무리 걸림돌같이 주님 앞에 있어도 주님께서는 그것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실 뿐 아니라 능히 넘어가실 분이며 디딤돌 삼아 하늘로 올라가실 분이시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곧 당신이 가실 길에 아무 지장 받지 않기 위해 이 말씀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내게서 물러서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저 꺼지라는 말이 아니라 내 뒤로 물러서라, 내 앞에서는 꺼지라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이 뜻이 영어 번역을 보면 더 선명합니다. 영어는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Get behind me, Satan!
주님 앞에 있지 말고 주님 뒤에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고, 주님 앞에서 알짱거리거나 앞서 멋대로 가지 말고 주님 뒤에 있어야지만 따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앞서서 이 길로 가고 싶다거나 이 길은 싫다거나 해서는 안 되고, 주님 뒤에 겸손하게 있으면서 주님께서 이리 가시며 그리 따라가고 저리 가시면 저리 따라가라는 말씀입니다.
옛날 우리 말에 여필종부(女必從夫)라는 말이 있었지요. 여자는 남편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뜻으로 요즘 사람에게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말이지만 이 표현을 빌려 사제의 관계를 표현하면 제필종사(弟必從師), 곧 제자는 반드시 스승을 따라야 합니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오늘 마태오 복음은 다른 복음과 달리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만 하셨지요.
다시 말해서 마르코나 루카 복음에서는 이 말씀을 모든 사람에게 하셨는데 마태오 복음에서는 제자들에게만 이 말씀을 하셨지요. 이것이 진정한 제자도(弟子道)라는 뜻이겠습니다.
아무튼 스승님 뒤에 있어야 제자들이고, 우리도 주님 뒤에 있어야지 제자들이며, 앞서 이 길 저 길 내 마음대로 가려 하면 제자가 아님을 명심하는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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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30. 연중 제22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16,21-27
지난 주일 베드로는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빛나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시자 그 베드로가 “그런 일은 안 됩니다!” 하고 막아섭니다.
주님의 대답은 놀랍도록 매섭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바로 어제까지 ‘반석’이라 불린 그가, 오늘은 ‘걸림돌’이 됩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십자가 없는 메시아’를 바라는 ‘사람의 생각’이었습니다.
여기에 영적 성찰의 첫 물음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가, 아니면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가?’ 성 예로니모는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며, ‘내 생각’을 끊임없이 ‘말씀’에 비추어 살폈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오늘 제2독서에서 권합니다.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로마 12,2). 영적 성찰이란 바로 이것 ― ‘내 생각’을 ‘하느님의 눈’에 비추어 새롭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성찰의 가장 깊은 물음을 던지십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영혼)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것이야말로 8월을 마무리하며 우리가 조용히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물음입니다. ‘나는 무엇을 얻으려고 이토록 애쓰는가?’ ‘그것을 다 얻는다 해도, 정작 나의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이 물음 앞에서 우리는 지난 한 달의 열매들을 되돌아봅니다. 나는 성실·온유·절제를 살았는가? 친절과 선행, 평화와 인내, 사랑과 기쁨은 어떠했는가? 이 되돌아봄은 ‘자책’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로운 눈’으로 나를 다시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시,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기로 결심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 중 무엇을 생각하는가? 나는 ‘온 세상을 얻으려’ 정작 영혼을 잃고 있지 않은가? 나는 ‘십자가 없는 편한 길’만 바라지 않는가? 지난 한 달, 나의 ‘열매’를 하느님의 눈으로 되돌아본다면?
주님, ‘사람의 생각’을 넘어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게 하소서. 온 세상보다 제 영혼을 귀히 여기게 하시고, 지난 날들을 당신의 자비로운 눈으로 되돌아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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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30. 연중 제22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08.29. 17:22 가면 뒤에 숨은 참 자아를 발견하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는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참 자아와 거짓 자아 가면 뒤에 숨은 참 자아를 발견하기! 2026년 8월 29일 토요일 타라 브랙(Tara Brach)은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의 참된 자아를, 세상 속에서 쓰는 거짓된 가면과 혼동하는 모습을 일깨워 줍니다: 정체성(identity)의 문제를 살펴볼 때 제가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농담이 있습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직장 회의에 늦게 도착했습니다. 상사가 "어디 있었나?" 하고 묻자, 그는 "건물 앞에서 광대를 봤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동료가 묻습니다. "그게 진짜 광대였습니까, 아니면 광대처럼 꾸민 사람이었습니까?" 제가 이 이야기를 수업에서 나누면 잠시 정적이 흐른 뒤, 곧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모두가 이해하는 것이죠. 가면이 있고, 그 가면 뒤에 있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 둘이 뒤섞여 혼동되곤 합니다. "인격(person)"이라는 말은 본래 그리스어 페르소나(persona)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배우들이 특정 인간이나 동물, 신을 나타내기 위해 쓰던 가면을 뜻했습니다. 우리도 일상에서 상황에 맞추어 저마다의 "페르소나", 곧 가면을 쓰곤 합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배우와 관객은 공연이 끝나면 가면을 벗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반면, 우리는 종종 그 가면과 자신을 동일시해 버리고 오랫등안 그것이 나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때로는 유능하고 지식 있는 듯한 가면을, 때로는 불안하고 위축된 가면을 씁니다. 어떤 동료는 판단적이고 분노에 찬 가면을 쓰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핵심적인 페르소나는 깊은 두려움과 초기 방어기제에서 비롯되는데, 그것을 내려놓는 법을 배우기보다 오히려 그것이 곧 "나 자신"이라고 믿어버리곤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가면 뒤에 갇힌 채 살아간다면, 세상과 맺는 친교와 깊은 일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 존재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기억의 은총은 깨어 있는 의식 속에서 우리 안을 지나가는 생각과 감정, 정서를 바라볼 때 주어집니다. 고요와 맑은 현존 안에서 우리는 가면이 본래 무엇인지 깨닫습니다. 그것은 잠시 쓰이는(때로는 유익하기도 한) 페르소나일 뿐, 우리의 본질적 존재는 아닙니다. 또한 현존 안에서 우리는 타인의 가면 너머를 바라보며, 그들의 눈을 통해 비추는 의식과 마음 속에 깃든 온유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True Self, False Self,” Radical Grace 25, no. 4, (2012): 39, 40, 41.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Mick Haupt, untitled (detail), 2022, photograph.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산산이 부서진 거울은 각 조각마다 내재된 빛을 드러냅니다. 거짓 자아를 내려놓는 것은 상실이 아니라, 더 많은 빛이 스며들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돌파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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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30. 연중 제22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08.30. 05:36 우리는 우리 삶의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우리는 변화를 받아들이기보다는 차라리 파멸을 택하네./ 우리는 두려움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편을 택하네./ 지금 이 순간의 십자가를 지고 오르려 하지 않고,/ 우리의 헛된 환상을 내려놓는 일을 거부하네." (W.H. 오든) 오든의 이 시는 우리 인간이 회개와 변모를 두려워하며, 그 때문에 오히려 스스로 파멸을 선택하는 비극적인 태도를 묘사합니다. 또한 우리는 지금 환상을 버리고 자기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받아들이려는 용기가 필요한데, 그러지 못하는 비겁하고 용기 없는 삶의 자세를 묘사합니다. 이 시를 통해 오든은 우리가 세속적 집착과 자기기만(환상)을 버려야만 참된 자유와 부활에 이를 수 있는데, 이것을 거부하는 우리 인간의 현실을 비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suffer(고통받다)'라는 영어 단어는 라틴어 'sub'(아래)와 'ferre'(지다, 짊어지다)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밑에서 떠받치며 짊어진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단순히 수동적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스스로 짊어지고 용기 있게 걸어가는 적극적이고 힘 있는 느낌을 줍니다. 반면, 고통과 관련된 다른 영어 단어들은 조금 다른 시각에서 고통을 바라보게 합니다. 'depression(우울함)'은 '눌러 짓누르다'라는 뜻에서 왔고, 'grief(슬픔)'은 '무겁다'를 뜻하는 'gravis'에서 왔으며, 'affliction(고난)'은 '내리쳐 쓰러뜨리다'라는 뜻에서 나왔습니다. 이런 단어들은 고통을 겪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우리를 짓누르고 내려치는 짐의 관점에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받는 사람의 힘과 용기보다는, 약함과 패배의 느낌을 더 강하게 전달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고통은 단순한 단어가 아니라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방식으로 고통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것을 어깨에 메고 그것과 함께 용기 있게 걸어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그 아래 주저앉아 피해자로 머무는 길입니다. 어느 쪽도 쉽지 않습니다. 쉽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닐 것입니다. 본능적으로 우리는 고통을 피하려 하지만, 피할 수 없을 때는 고통을 원수처럼 대하며 원망과 자기연민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이 더 힘든 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고통을 원수로가 아니라 친구로 맞이하라고 가르칩니다. 고통을 통해 배우고, 우리를 자기-감옥에 가두어 버리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 수난을 통해 드러나는 참된 사랑에 참여하는 길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는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라고요. 예수님은 근심이 단순히 사라지고 기쁨으로 대체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근심의 한가운데서 기쁨이 태어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 기쁨은 흔들리지 않고, 슬픔을 위협이나 원수로 보지 않게 됩니다. 슬픔 자체가 깊은 기쁨을 낳는 것입니다. 한 명상 지도자가 딸의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자, 사람들이 놀라면서 어찌하여 그렇게 슬피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명상 지도가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예, 저는 웁니다. 그러나 제 눈물 하나하나가 보석입니다." 그 명상 지도자가 느낀 고통은 진짜 고통이었지만, 그것이 자신을 절망으로 이끌지 않고 더 깊은 영성으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주님의 말씀이 저에 날마다 치욕과 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예레 20,8)라고 말하면서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불처럼 타올라" 그 말씀을 선포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는 그것이 십자가였습니다. 그 십자가 안에는 예레미야가 고백하는 치욕은 물론이고 처절한 고통의 죽음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고 말씀하시며 그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그 내적인 불길이 그들을 큰 고통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피해 가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죽음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셨고, 그것은 부활로 변모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참된 믿음은 삶과 슬픔을 피하게 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하느님께 이르는 참된 길로 변화시켜 줄 것입니다. 이 힘이 바로 우리에게서가 아니라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삶과 믿음의 여정을 걸으면서 어려움들과 시련들을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늘 우리를 앞서 가시며 불길처럼 강한 힘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주님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분께서 내미시는 손을 붙잡고 그분을 굳세게 따라가야 합니다! 이렇게 한 발 한 발 가다 보면 어느새 그분과 함께 영원의 문으로 들어서는 시간이 오겠지요?!! 예전에 더 젊었을 때 흥얼거렸던 심재영이라는 가수의 "젊은 날의 초상"이라는 노래가 생각나네요. "가다 보면 어느새 그 바닷가, 바닷가! 나~ 여기까지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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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30. 연중 제22주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4327 2026.08.29 04:43
가장 고독할 때 쓰는 시
가장 고독할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시린 문장을 고릅니다. 창밖의 어둠은 잉크처럼 번져가고, 방 안을 떠도는 것은 식어버린 온기의 잔상뿐입니다.
푸른 별들이 저 멀리서 떨고 있는 밤, 바람은 잃어버린 계절의 이름을 부르며 지나갑니다. 스치듯 지나간 기억들이 뾰족한 가시가 되어 가슴 깊은 곳을 찌르고, 나는 숨죽인 채 남겨진 그림자의 길이를 잽니다.
한때는 전부였던 것들이 심연으로 가라앉아 사랑했다고 쓰기엔 너무 아리고, 잊었다고 적기엔 밤이 턱없이 깊을 때, 비로소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멎은 이 절대의 빈자리에서 그분이 고요히 걸어 들어오십니다.
세상이 다 빠져나간 가장 쓸쓸한 폐허의 중심, 그 적막의 밑바닥에서 그분과 나는 가장 강렬한 사랑을 나눕니다. 말 없는 눈빛 하나로 시린 상처를 어루만지고, 흘리지 못한 눈물을 그분의 옷자락에 묻으며 영혼의 가장 깊은 살결을 맞댑니다.
시간은 더는 흐르지 않고 거룩한 침묵으로 고여, 내 뺨을 스치던 서늘한 한기는 따스한 숨결로 녹아내립니다. 가장 깊은 고독이 아니었다면 닿지 못했을 이 신비,
가장 아픈 어둠 속에서 마침내 마주 잡은 두 손. 홀로 남겨진 줄 알았던 이 방은 이제 충만한 성소가 되고, 나는 새벽이 올 때까지 그분과 나눈 영원의 호흡으로 내 시를 다시 완성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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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30. 연중 제22주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4342 2026.08.30 05:42 가난과 기도 5 사랑의 아름다움과 위대한 교환
글라라에게 가난은 아름다움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세상은 아름다움을 흠 없는 외모와 젊음과 건강과 화려함에서 찾지만, 글라라는 십자가에 달리신 정배의 상처 속에서 하느님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외형의 균형이 아니라 사랑의 조화였고, 자신을 보존하지 않고 내어주는 삶에서 흘러나오는 빛이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사랑받은 사람의 얼굴에는 부드러움이 생기고, 자신이 용서받았음을 아는 사람의 눈에는 다른 이를 쉽게 단죄하지 않는 깊이가 생기며, 누군가를 오래 기다려 준 사람의 손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함이 남습니다. 아름다움은 꾸미는 데서만 오지 않고 자신을 내어준 흔적에서 옵니다. 오래 돌봄을 실천한 사람의 주름과, 많은 눈물을 닦아 준 손의 거칠음과, 고통 속에서도 타인을 위해 미소 짓는 얼굴에는 십자가의 아름다움이 비칩니다. 가난은 사랑이 들어올 자리를 만들고, 사랑은 우리 안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내가 소유하려는 욕망을 내려놓을수록 사랑할 수 있는 여백이 넓어지고, 나를 증명하려는 욕망에서 자유로워질수록 다른 이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으며, 나 자신을 지키는 일에만 몰두하지 않을수록 누군가의 곁을 지킬 힘이 생깁니다. 가난은 우리를 작게 하지만 초라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가난은 거짓으로 부풀려진 자아를 작게 하여,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참된 나의 크기로 돌아가게 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아픔을 없앨 수 없지만 내 곁에서 우는 사람의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나는 거대한 역사를 바꿀 힘이 없지만 오늘 내가 만난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압니다. 그러나 그 한계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작은 사랑을 하느님의 큰 사랑 안에 맡기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걸음을 충실히 내딛습니다. 가난은 모든 것을 이루려는 영웅적인 야망을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작은 일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순종입니다. 기도가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신의 가난을 더 잘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내가 하느님을 찾는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하느님께서 먼저 나를 찾아오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처음에는 내가 많은 것을 포기하여 하느님께 나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내 안에서 그것들을 놓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심을 알게 됩니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내 안에서 나를 당신께로 이끌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서 소유의 매듭을 하나씩 풀어 가십니다. 처음에는 물건을 놓게 하시고, 다음에는 명예를 놓게 하시며, 마침내는 내가 쌓아 올린 영적인 업적과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마저 놓게 하십니다. 기도한 시간과 봉사한 일과 견뎌 낸 희생까지도 내 공로로 소유하지 못하게 하시고, 모든 것이 은총이었다는 자리로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갈수록 나는 더 강해졌다고 느끼기보다 더 무력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확신했던 것들이 흔들리고, 쉽게 판단했던 일들 앞에서 침묵하게 되며, 나 자신과 타인의 신비가 얼마나 깊은지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이 무력함은 퇴보가 아니라 더 깊은 신뢰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내가 나의 힘으로 살고 있지 않으며, 하느님의 생명이 나를 살리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자리입니다. 성령 안에서 가난은 풍요가 됩니다. 내가 가진 것은 적어도 나눌 수 있는 마음이 커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작아도 사랑의 깊이가 생기며, 내 삶의 시간은 줄어들어도 한 사람에게 온전히 머물 수 있는 현존이 자라납니다. 영적으로 부유한 사람은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글라라가 말한 위대한 교환은 바로 이것입니다. 썩어 없어질 것을 내려놓고 영원한 사랑을 얻으며, 자신을 지키려는 좁은 삶을 버리고 하느님과 피조물이 함께 숨 쉬는 넓은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를 버리고 백배를 받는다는 것은 물질적인 보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뿐인 나의 왕국을 내려놓을 때 수많은 형제자매를 얻고, 소유물의 안전을 버릴 때 관계의 풍요를 얻으며, 자기중심성의 감옥을 떠날 때 하느님의 생명 안에서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가난과 사랑의 이 교환 안에서 우리는 정결해집니다. 정결은 세상과 사람을 멀리하는 차가운 순수함이 아니라, 누구도 소유하지 않고 누구도 이용하지 않으며 모든 존재를 하느님의 선물로 바라보는 깨끗한 사랑입니다. 그분을 사랑할 때 우리는 정결해지고, 그분을 만질 때 우리의 욕망은 씻기며, 그분을 맞아들일 때 마음은 하느님만을 위하여 열린 동정의 땅이 됩니다. 그분은 힘이 세시지만 지배하지 않으시고, 고결하시지만 높은 곳에 머물지 않으시며, 아름다우시지만 화려함으로 사람을 현혹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힘은 약한 이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고, 그분의 기품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도 누구의 존엄도 훼손하지 않는 고결함이며, 그분의 아름다움은 상처 입은 몸으로도 끝까지 사랑하는 충실함입니다. 그분을 바라볼수록 우리는 무엇이 아름다운지를 새롭게 배웁니다. 세상이 성공이라 부르는 것보다 충실함이 아름답고, 높아지는 것보다 낮아짐이 아름다우며,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보다 자신을 나누는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압니다. 상처 없이 사는 삶보다 상처 속에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삶이 더 아름답고,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강함보다 서로 기대어 함께 일어나는 약함이 더 거룩하다는 것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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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기도 1 하느님께서 들어오시는 거룩한 여백 ( 2026.08.26. 10:41 ) http://www.ofmkorea.org/ofmkfb/584127
가난과 기도 2 팔을 벌리시는 하느님과 포옹의 사랑 ( 2026.08.27. 01:21 ) http://www.ofmkorea.org/ofmkfb/584146
가난과 기도 3 십자가를 바라보는 눈과 존재의 가난 ( 2026.08.28. 03:06 ) http://www.ofmkorea.org/ofmkfb/584207
가난과 기도 4 형제 안에서 배우는 가난과 무소유 ( 2026.08.29. 03:36 ) http://www.ofmkorea.org/ofmkfb/584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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