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066)-물고기가 고향을 찾는 까닭(180803 연중17주간 금)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태 13,55.57).
삶의 마지막 즐거움은 제자리로 돌아가는 귀락(歸樂)이다.
바다로 나갔던 물고기가 고향을 찾는 까닭은 용이 되기 위해서(魚變成龍)가 아니다.
생을 마치기 위해서다.
샛강에서 태어난 물고기는 넓고 바다로 가 수없이 생사와 희비의 고비를 겪었을 것이다.
그래도 괴로움이 익숙해지고 사는 재미가 생기면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 보다는 이승이 좋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산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욕심이 붙어 이승에서 재물과 명예와 건강을 얻으면 안하무인이 된다.[1]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잊지 않음’이란 자신의 죽음을 늘 기억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귀향하신 것은 ‘귀락’(歸樂)이라는 암호를 심어놓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혈혈단신 고아라도 부모가 있고 고향이 있다.
인간에게는 매사 자기중심적이라는 꼼바름이 있어 물고기의 귀향을 종족번성이나 생존으로만 간주한다.
철새나 물고기의 귀소행동은 목숨을 거는 일이다.
어쩌면 그들의 귀소본능에는 귀락(歸樂)이라는 편안한 죽음, 죽음에 대한 즐거움이 관련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귀향본능에도 편안한 노후만 아니라 영원한 안식,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이 작용하고 있다.
예수님의 귀향은 “개천에서 용 났네!”라며 우셋거리가 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제자리로의 돌아감’과 ‘돌아감의 즐거움’(歸樂), 곧 ‘영원한 안식’을 위한 귀락와[2] 터가 고향에 있음을 짚어내신다.
그 터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인류의 구원의 완성을 의미한다.
[1] 위백규(魏伯珪, 1727~1798)는 “우리 유가의 법문은 방심, 즉 ‘제멋대로 달아난 마음’을 거두는 것을 비결로 삼는 것이다. 장자는 어려 고향을 떠나 돌아갈 줄 모르는 것을 슬퍼할 만한 일로 보았다. 마음을 풀어놓고 거두지 않는 것을 ‘상’(喪)이라 하고, 거두어 제자리로 되돌리는 것을 ‘귀’(歸)라고 한다. 사람이 슬퍼할 만한 일로 마음을 풀어놓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고, 즐거워할 만한 일에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만큼 큰 것은 없다. 마음이 진실로 제자리로 돌아온다면 천지간 만물이 능히 그 마음을 흔들지 못하게 된다.”(牛儒法門, 以收放心爲訣. 外傳以弱喪不知歸爲可哀. 盖放而不收則爲喪, 收而反之則爲歸, 是以人之可哀莫甚於放, 可樂莫大於歸. 心苟歸矣, 天地間萬物, 不能動其心).
그가 덧붙여 말했다.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으면 부귀한 데로 가서 교만해지고, 명리에 나아가면 넘쳐흐르게 된다. 내 여덟 자의 몸뚱이를 끼고도 그 큰 것을 견딜 수가 없게 된다. 늘 발돋움해도 서 있을 수조차 없고, 타고 넘어가려 하나 걸을 수도 없게 된다. 천지간에 잔뜩 움츠러들어 밤낮없이 캄캄한 밤중이다. 이 어찌 슬퍼 만한 할 일이 아니겠는가? 슬프기만 하고 즐겁지가 않으니 무엇으로 백 년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心苟不歸, 則之富貴而驕之, 之名利而溢之. 挾牛八尺之軀, 不歸其大, 恒企而不得立, 常跨而不能步. 跼蹐於天地, 長夜於日月, 斯豈非可哀之甚者乎, 哀而不樂, 何以生百年爲哉).
― 정민 저, 《옛사람이 건넨 네 글자》 중 〈약상불귀(弱喪不歸〉
[2] 위 저자는 ‘귀락와’(歸樂窩)를 “돌아옴이 즐거운 집이다. 멀리 달아났던 마음을 거둬 본래 제자리로 되돌려 놓으니 그제야 마음이 기쁘다. 마음이 달아나면 명예가 즐겁지 않고 부귀도 괴롭다. 허깨비 쭉정이의 삶이다. 그런데도 사람이 마음은 버려두고 부귀와 권세만 붙좇느라 고향으로 돌아갈 날이 영영 없다.”고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