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육적 고통과 영적 소망
(욥기 3장 1-26절)
1.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의 친구들이 도착한 후 7일이 지난 때를 가리킨다. 이 기간 동안 욥과 그의 친구들은 침묵을 지켰다. 생일은 히브리어 욤이다. 욤은 날, 생 등을 뜻한다. 욥이 현재 당하는 비참한 운명을 나타낸다. 하나님께 원망을 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의 생일(삶)에 대해 탄식을 했다는 것이다. 결국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로 원망의 방향을 돌릴 것이다.
2-10.욥이 입을 열어 이르되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였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더라면, 흑암이 그 날을 덮었더라면, 그 밤이 캄캄한 어둠에 잡혔더라면, 해의 날 수와 달의 수에 들지 않았더라면, 그 밤에 자식을 배지 못하였더라면, 그 밤에 즐거운 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이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여 내 눈으로 환난을 보게 하였음이로구나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날과 밤에 대한 원망섞인 말이다. 두 단어는 모두 욥의 출생(일)을 가리킨다. 날은 출생 일을 가리키고 그 밤은 잉태된 날을 가리킨다.
전자는 과거 완료, 후자는 현재 완료로 각각 나타난다. 욥은 낮(날)과 밤을 동시에 언급하여 저주하였다.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였더라면”
욥은 빛은 생명(출생), 어두움은 죽음(낙태)으로 동일시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같은 것은 빛을 생명과 탄생의 상징으로, 어두움을 죽음으로 생각했다. 즉 욥은 자신이 아예 태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고통의 심경을 고백하고 있다.
“구름이 그 위에 덮였더라면, 흑암이 그 날을 덮었더라면, 그 밤이 캄캄한 어둠에 잡혔더라면, 해의 날 수와 달의 수에 들지 않았더라면”
구름, 흑암, 캄캄한 밤, 해와 달, 이와 같은 단어들은 영적 암흑 속에 있는 모양이다. 마치 창세기 1장 2절의 모습을 나타낸다. 자신이 영적으로 흑암에 갇혀있다는 생각이다.
해(낮)와 달(밤)의 시간 단위가 합쳐져서 장구한 세월을 형성하는 것을 나타낸다. 욥은 자신의 탄생이 차라리 시간(세월)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 것, 곧 죽음을 갈망하고 있다.
“그 밤에 자식을 배지 못하였더라면, 그 밤에 즐거운 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이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
욥은 자신을 잉태한 날에 기쁨이 있었을 것임을 가정하고, 만일 그러한 소리가 없이 그 날이 적막했더라면 자기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것임을 토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을 잉태한 모친의 태를 저주한 욥의 한탄 속에서 그가 현재 당하는 고통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리워야단은 악어를 의미한다. 욥은 하나님을 악어 등 동물계와 자연 현상의 주관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새벽별이 어두워지는 것은 동이 트기 직전에 별이 사라지는 것을, 광명은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에 내비취는 빛을 가리키며, 동틈은 해가 떠올라서 첫 빛을 발하는 것을 각각 가리킨다. 여기서도 욥은 밤을 자신의 잉태의 시간으로, 낮을 탄생의 시간으로 보고 있다.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여 내 눈으로 환난을 보게 하였음이로구나”
현재 당하는 고난이야말로 그가 자신의 생일과 잉태를 저주하는 이유였던 것이다. 욥의 갈등의 관심사는 하나님이었다. 모태의 문을 열고 닫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11-19.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자기를 위하여 폐허를 일으킨 세상 임금들과 모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을 채운 고관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또는 낙태되어 땅에 묻힌 아이처럼 나는 존재하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을 것이라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피곤한 자가 쉼을 얻으며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호통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
출생은 하나님의 축복이요, 그 반대로 낙태는 하나님의 징벌로 인식되었던 고대 사상에 근거해 볼 때 현재의 고난보다는 차라리 낙태를 바라는 욥의 절규는 그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잘 드러내 준다.
아기를 출생하고 난 다음 산모는 아기를 바로 눕히고 젖을 물리는 것이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지 말 것을 희구한 욥은 여기에서 태어났으되 곧바로 죽었으면 하는 소망을 피력하고 있다. 따라서 욥의 마음이 확대 심화되고 있다.
죽음의 상태에 대한 욥의 최초의 묘사가 나오는 구절이다. 욥은 현재의 모든 고난과 불평등이 종결되고 안식이 보장되는 곳으로 사후의 세계를 믿었던 것 같다.
여기에서 욥 자신이 “나” 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죽고 난 후의 평안한 모습,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라고 말하며, 또한 낙태되어 땅에 묻힌 아이처럼 나는 존재하지 않았겠고 라고 말한다. 위의 나는 영적인 존재, 아래의 나는 육적인 존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육은 죽음으로서 사라지고, 영적인 존재는 평안을 나타낸다.
영적으로 살아나는 존재로서의 나를“자기를 위하여 폐허를 일으킨 세상 임금들과 모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을 채운 고관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라고 표현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영화를 과시하기 위해 거대한 건축물을 짓거나 선조들의 터 위에 새로 지은 것처럼 표현하고 있지만, 그의 마음 속에 영광의 나라가 세워질 것을 그린다.
육적인 죽음이 있는 곳에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피곤한 자가 쉼을 얻으며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호통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라고 표현한다. 육적 죽음 후에는 영적 부활을 암시하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이다. 신약의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거기서는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고통받는 육적인 것이 죽고, 새롭게 영적으로 태어나면, 즉 부활생명을 얻으면, 그곳은 구별이 없으며, 죄로부터 자유로운 자가 되며, 안식을 얻는 자가 될 것이라는 의미다.작은 자나 큰 자나 현세에 상종하는 신분, 재산, 연령상의 구별(차별)이 새롭게 태어나는 세상에서는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20-26.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죽음을 구하는 것을 더하다가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나는 음식 앞에서도 탄식이 나며 내가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 같구나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욥은 자신의 탄생을 저주하였고 도피의 수단으로서 죽음과 새 세계를 갈망하였다. 그런데 왜 고난이 자신에게 임하는가, 왜 고난 가운데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키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네페쉬)이 아픈 자에게 생명(하이 오르)을 주셨는고”
네페쉬는 죽어야 할 육적 생명이다. 하이 오르는 생명의 빛이다. 즉 영생의 부활생명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죽음을 구하는 것을 더하다가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표면적으로는 욥은 현실의 한계 상황에 부딪혀 절망의 벽에 다다를 때 죽음을 최후의 해결책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존재로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의 중압감에 압도되어 그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죽음을 의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죽음의 뒤안길에 피안의 세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아직은 그 세계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마음은 오히려 기쁨을 행해 달려가는 마음을 역으로 나타낸다.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빛은 어두운 길을 밝히는 이정표와 같은 것이다. 결국 스올과 같은 인생 속에서도 빛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현재의 고통을 한탄하며, 육으로는 고통을 고백하지만, 또한 영으로는 기쁨과 영광이 있을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욥의 저주와 한탄을 통해서 인간의 육적 한계성을 알 수 있다. 욥은 그 행위와 성품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두 번씩이나 인정을 받은 의인 중의 의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녀들의 범죄를 사전에 예방하는 조치를 정기적으로 행하는 견실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같이 위대한 신앙을 가진 그도 두 단계로 주어진 시련을 결국 인내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일과 잉태를 저주하며, 무덤을 갈망하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만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고통 속에서도 빛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한 줄기 희망을 암시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