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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카페 게시글
시 해석 및 시 맛있게 읽기 스크랩 장엄송 / 문인수
은하수 추천 0 조회 43 17.08.08 10: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장엄송 / 문인수

 

세 사내는 친하다. 작당이 아니라 모국어처럼 합수처럼 친하다. 1955년생, 동갑내기에 똑같이 삼형제 중 장남이다. 세 사내는 오늘의 시동인이다. 표정이 비슷하다. 그늘이 깊다. 나고 자란 이야기가 애솔 같아서 과목이 같은 침엽의 어둠이 전신에 예민한 것이겠다. 나는 세 사내의 성명 첫 글자를 따 장엄송이라 부른다. 셋 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다. 아버지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모습 그대로 빼닮았단 소릴 들으며 자랐다. 예감처럼 전이처럼 그리움처럼 아버지의 병마가 수도 없이 마음속 문맥을 건드리며 다녀갔다. 오래 전 아버지 나이를 마침내 간신히 넘겼다. 사실, 살면서 또 여러 갈래 마음이 수시로 넘긴다, 넘기지 못한다. 수시로, 거울 앞에 선 듯 왈칵

받아 입었다 벗었다 한 아버지, 세 사내는 일견 번듯하게 힘껏 산다. 아이들을 낳아 행복하게 안아 올리곤 했지만 그럴 때 마다 또 한 새끼 덥석 안겨들던 그 어린 시절이 남몰래, 가족들도 몰래 따로 딸린 애물단지 같았다. 인생은 단벌일까, 세 사내는 쉬! 죽음에 대해 평소 구면인 듯한 말투다. 전력처럼, 혹은 마중이라도 나갈 것처럼 죽음을 말하곤 한다. 공것처럼, 덤이라도 얻은 것처럼 서둘러 노년을 시작하려는 눈치다. 세 사내는 자주, 근처 금호강 본다. 여기까지, 여러 굽이를 자필로 적어 본다. 어머니! 그 긴 긴 수역에 걸쳐 붉은, 저 목 깊은 저녁노을을 나는 장엄송이라 부른다.

 

- 시집 적막 소리』(창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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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에 나온 문인수의 시집 적막소리에 수록된 작품이지만, 2005서정시학여름호에 처음 발표했던 시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2년도 넘었다. ‘세 사내는 각자의 성을 따다 붙인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장옥관, 엄원태, 송재학 시인이다. 이들은 오래 전부터 대구 시단의 중심이고 자부심이다. 이들을 빼고 대구의 시를 말한다면 그야말로 앙꼬 없는 찐빵이다. 이들은 대구 시단을 굳건히 떠받히고 있는 시인들로서 동류항에 자주 묶인다. 이때 가나다순으로 하면 송재학, 엄원태, 장옥관이 되고 등단 순으로 쳐도 그렇다. 여기서는 그 역순이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순서를 바꾸어도 그들은 불만이 없다. 시에서도 짐작하듯이 그들은 오랫동안 절친이고 도반이며 서로가 서로를 경배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70년대에 등단한 송재학, 엄원태 시인과 달리, 장옥관은 1987<세계의 문학>을 통해 정식 데뷔한다. 대학 4학년 때인 1976년 신춘문예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응모를 했다. 그러나 투고한 두 신문사 모두 최종심에 올랐으나 당선되지 못했다. 영남일보는 동네친구이자 고등학교 동창인 김재진 시인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김재진은 원래 첼로를 전공한 첼리스트였다. 하지만 고2가 되어서야 뒤늦게 음악을 시작한 관계로 불투명한 장래에 회의를 가졌고, 그 돌파구로 문학을 선택했던 것인데 시가 새로운 활력이 되었던 것이다. 반면 장옥관의 입장에서는 낙담이 매우 컸으리라 짐작된다. 그 여파로 시를 작파하고 외면하면서 직장생활에 충실했지만 시에 대한 미련을 떨칠 수 없었다.


  한동안 사진에 심취했으나 시에 대한 갈증을 대체하지는 못했다. 10년의 유예기간은 다소 길었지만 그는 결국 시인의 자리를 되찾아 지금은 계명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층 시가 무르익어 절정기의 경지에 와있다. 장옥관이 엄원태를 처음 만난 것은 1985년 무렵이라고 한다. 2~30대의 젊은 시인들이 함께 시화전을 열었는데, 뒤풀이 식당에서 그를 처음 만난 것이다. 경북고, 서울대 출신으로 만 27살에 대학교수가 된 억세게 운 좋은 사람이라는 소문을 접한 터여서인지 귀공자 타입의 그가 괜히 밉상스럽게 느껴졌다고 한다. 말하자면 어떤 방면에서든 탁월한 기량을 발휘하여 다른 이를 압도하고 기를 죽게 하는, 선망의 인물쯤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실제로 그는 못하는 게 없고 품격 있는 노래까지 멋들어지게 잘 부른다.


  그에게 시 역시 확장된 취미영역의 애호 수준이 아니겠냐는 남들의 시선을 전복시킨 계기가 되는 일이 30년 전 발생했다. 느닷없이 찾아든 만성신부전증 진단이었다. 병마가 덮친 이후 한참동한 외부와의 통로를 걸어 잠군 그가 문학과 사회1990년 겨울호에 엄붕훈이 아닌 필명 엄원태로 작품을 발표하면서 재등단했을 때 사람들이 보여준 반응은 놀라움이었다. “육신의 절망을 통해, 쓰러질 듯 고통의 터널을 지나며그는 마침내 상투적인 인식과 교양적인 삶을 살해하고 새로운 시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전에 그들은 <오늘의 시> 동인이었다. 송재학, 장옥관, 김재진 등이 주도했던 <오늘의 시>1987년 그때만 해도 자신이 무슨 병을 앓고 있는지를 몰랐던 엄붕훈을 끌어들인 사람은 송재학이었다.


  문인수의 대구고 후배이기도 한 송재학 시인은 경북 영천 출생으로 경북대 치과대학을 나와 지금까지 대구에서 개원의로 일하고 있다. 낮에는 치과의사로 일하고 밤에는 책을 읽고 시를 쓰는 일에 수십 년간 몰두해왔다. 치대예과 재학시절 궁벽한 시골집에 틀어박혀 민음사판 오늘의 시인총서를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읽고 또 읽으며 공부에 매진했다. 그는 그때를 문학공부란 절망에 대한 헌정의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한 사적인 지인의 증언에 의하면 송재학은 대학 재학 중 연극반에 가입해 연극에도 심취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만큼 그의 예술과 미적 취향은 유서 깊고 남달랐던 것 같다. 그 또한 1977년 매일신춘문예 입선으로 등단의 형식을 거쳤으나 1986<세계의 문학>에 시를 발표하면서부터 본격 등단하게 된 셈이다.


  언젠가 문인수 시인으로부터 송재학은 천재에다 공부가 더해진 시인이란 평가를 들은 바 있다. 12년 전, 이 시를 발표할 때만 해도 문인수는 둘레의 후배들로부터 폐경기를 모르는 시인이라는 존경 어린 탄사를 들을 만큼 시가 툭툭 터져 나왔다. 그 역시 늦깎이 등단한 80년대 시인으로 장엄송못지않은 왕성한 창작열로 자신만의 세계와 언어를 조탁해냈다. ‘장엄송시인과 문인수 시인, 그리고 이정록 시인까지를 포함해 공통으로 묶을 수 있는 기재가 바로 김달진 문학상이다. 이들은 모두 김달진 문학상 출신들이다. 그 가운데 지금 문인수 시인은 신작을 생산하기 힘들 정도로 와병중이다. 누구든 자신에게 주어진 소멸의 운명을 쓸쓸한 긍정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냐만, 문인수 시인의 재기를 응원하는 후배들의 연민과 긍휼이 눈물겹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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