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 지난 꽃길
시월 중순 정기고사 사흘째였다. 국어과 동료들과 학교 바깥에서 점심을 같이 드는 날이었다. 전날 연락받은 데로 ‘언양각’이라는 식당에서 점심 자리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출근했다. 그러면 점심 식후 내가 마음 둔 산책과 생태탐방이 가능하리라 여겼다. 그런데 학교 출근해 컴퓨터를 켜니 밤을 재운 메신저에는 ‘청사포 횟집’도 추천이 들어와 점심자리가 어디가 될지 불투명했다.
언양각은 어딘지 분명한 기억이 나는데 청사포는 가물가물했다. 고사 기간 학생들과 부모들은 시험에 몰두하는데 교사들은 여유가 느긋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 그렇구나! 나는 퍼덕 떠오르길 해운대와 인접한 청사포로 가 점심을 들고 올 것이라는 기대 반 우려 반이었다. 창원에서 해운대까지 가려면 적어도 한 시간 반은 족히 걸릴 텐데 왕복 이동에만 세 시간은 넘게 걸리리라.
나는 바깥 속세 사정에 어둡다. 긴장 속에 고사 감독을 마치고 나오니 아침에 열람한 메신저가 암호문이 풀리듯 이해가 되었다. 창원 시내에는 ‘언양각’ 고기집이 있듯이 ‘청사포 횟집’도 있는 듯했다. 내 혼자서 점심 한 끼 나누려고 공연히 부산까지 번거롭게 오가는가 싶어 지레 겁을 먹었다. 궁금했지만 어디 물어볼 곳도 없어 꾹 눌러 참았다. 지나고 보니 참길 잘했다 싶었다.
오전에 고사 감독과 서술형 채점을 끝내고 점심을 들려고 자리서 일어섰다. 등 뒤에 같은 교과 인성부장과 예약된 식당으로 향했다. 인성부장 역시 초행이었는지 내비가 시키는 대로 갔더니 그곳이 아니란다. 창원 시내도 청사포가 두 곳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점심자리를 찾아간 것만도 어딘가 싶었다. 세발나물과 방풍나물에 게찜이 밑반찬으로 나왔다. 단호박도 뚝딱 비웠다.
동과 동료는 모두 열 한 명인데 내 말고는 성이 달랐다. 오전 업무에 바빠 미처 예약을 못해 생선회는 늦게 나왔다. 난 근무부담에 자유로워 ‘좋은 데이’를 시켜 잔을 비웠다. 그러자 성이 다른 동료들도 질 수 없다는 듯 ‘설중매’를 한 병 시켜 골고루 잔을 채워 건배 의식을 치렀다. 평소보다 늦은 점심이다 보니 동료들은 앞 차림은 물론 생선회에다 뒤 차림 음식까지 깔끔하게 비웠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등산복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반나절 코스로 산행이 아닌 산책을 다녀올만한 데로 떠났다. 도계동 만남의 광장으로 나가 1번 마을버스를 타려니 무점마을로 가는 34번 버스가 뒤따라와 바로 탔다. 용강고개를 넘은 용잠삼거리에선 하굣길 남녀 중학생들이 가득 탔다. 자여마을과 외단계를 거쳐 무성을 지나 무점까지 갔다. 종점에선 여학생 한 명과 같이 내렸다.
내가 목표로 한 무점마을이었다. 무점은 읍 소재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지만 섬처럼 고립된 외딴 마을이다. 대방동과 남마산에서 하루 몇 차례 마을버스가 다녀가는 종점이기도 했다. 가까이 동판저수지가 위치했다. 그 둑길에 수년 전부터 무점마을 주민 박갑용 님이 코스모스 꽃씨를 심어 꽃길을 가꾸었다. 이제 마을 주민 전체가 나서 꽃길을 조성해 한 달 전 코스모스 축제가 열렸다.
나는 코스모스 꽃의 잔영이 남은 꽃길을 걸어보려고 무점마을을 찾았다. 평일이라 사람들의 왕래가 뜸했다. 동판저수지 둑에는 예상대로 코스모스 꽃은 거의 저물어 꽃씨를 채집하는 중이었다. 동판저수지는 주남저수지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동월과 판신 마을의 첫 글자를 따 붙여진 이름이다. 왕버들을 비롯한 수생식물이 우거져 철새들이 주남저수지보다 더 많이 찾는 곳이다.
코스모스 꽃씨의 열병을 받으며 둑길을 걸었다. 저수지에 숲을 이룬 왕버들은 철새들의 은신처요 보금자리일 테다. 벌써 선발대로 날아온 쇠기러기와 청둥오리들이 오글거리고 있었다. 둑 아래는 추수를 하지 않은 벼들이 익어 황금 들판을 이루었다. 그 들판은 겨울이면 쇠기러기를 비롯한 오리들의 놀이터가 될 것이다. 날이 금방 어두워져 용산마을까지는 못 가고 여정을 끝냈다. 16.10.19
첫댓글 아^^ 코스모스가 벌써 파장이네요^^ 여기 낙동강가는 아직 코스모스 꽃이 남아 있던데--쇠기러기 선발대가 오고^^ 그리운 풍경이 그려지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