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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곡 영원을 다녀오면서...
묘지는 공사중이라 발가벗겨놓고 대신 연못만 보았어요
고종은 정실부인 명성황후와 9명의 후궁
남은 아들과 딸
순종. 이강. 이은 덕혜옹주
명성황후 초상, 경기 여주시 능현동, 명성황후 기념관
이름은 척(拓), 자는 군방(君邦)이다.
이름뿐이었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1874년(고종 11) 2월 8일에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순종은 2세 때 세자에 책봉되었고,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자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34세가 되던 1907년 7월 20일,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대한제국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순종은 9세 때인 1882년(고종 19)에 민태호(閔台鎬)의 딸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와 혼인했다.
그러나 순명효황후는 1904년에 34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죽었다.
이후 순종은 윤택영(尹澤榮)의 딸을 순정효황후(純貞효皇后)로 맞이했으나 역시 후사를 보지 못했다.
의친왕 이강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그의 어머니는 귀인 장씨(貴人 張氏)이다.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뒤에는 항일독립투사들과 접촉하여 1919년 대동단(大同團)의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과 상해 임시정부로의 탈출을 모의하였으며, 계획을 실행에 옮기던 도중 그해 11월 만주
안동(安東)에서 일본경찰에게 발각당하여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었다.
그뒤 여러 차례 일본정부로부터 도일을 강요받았으나 끝내 거부하여 항일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우 와 건(健) 두 아들을 두었다.
우
이강의 둘째아들 우 (너무나 얼짱으로 잘생겨서 일본인들이 너무 부러워했다고 함)ㄴ
이우는 황가의 후손으로서 의기가 넘쳐 결코 일본에 순종하는 법을 보이지 않았고
반드시 일본왕족과 결혼해야 하는 일본의 지침을 거부하고 만고끝에 조선인 박찬주와 결혼에 성공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의친왕과 고종황제는 힘앞에 굴복하지 않고 황실의 기개를 보여주는 이우를 대단히 사랑하였다.
그러나 그런 이우도 1922년 10세에 숙부 영친왕과 마찬가지로 일본에 유학갈 수밖에 없엇고.
1931년 육사본과 포병과로 입교한 이우는 일본 급우와도 마찰을 일으켜, 일본 정부로서는 요주의인물로
감시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감시와 군대라는 제한적인 공간에서도 이우는 대한의 황족으로서 전혀 굽힘이 없어, 육사생활에서도
일본말을 거의 쓰지 않고, 한국말을 썼으며, 한국인 육사생도에게는 커다랗게 한국말로 소리치며 호령하곤
하였다 그런 그는 일본인들에게는 사납고, 난폭하여 경계의 대상이었지만, 한국 동포에게는 항상 부드럽고
따뜻했다고 한다... 이우는 술자리르 가지면, 꼭 '황성옛터'를 불러 고국의 그리움을 달래곤 하였는데
의친왕의 손자인 이원(李源)은
대한제국의 황실 수장이었던 황태손 이구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 의해 황태손 이구의 양자로 입적되어 대한제국의 황실 수장 자리를 계승하였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고종의 7째 아들이다.
1900년 영왕에 봉해졌고,
1907년 순종황제 때 황태자가 되었으나, 강제로 일본 유학길에 올라 일본에 인질이 되었다.
국권을 빼앗긴 후에는 세제로 강등되었고 1920년 일본의 왕족과 강제로 결혼했다.
순종이 죽은 후, 왕이 되었으나 역사적으로는 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해방 이후 1963년까지 일본에 있었으며, 귀국 당시 이미 건강이 악화되어 별다른 활동은 없었다.
고종의 아들인 이은과 결혼한 일본의 황족 이방자여사
이방자여사는 사실 일본인입니다. 일본 이름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꼬
우리나라 국민들의 독립을 위한 시도들이 반복될 수록
이은과 이방자여사에 대한 일본에서의 입지는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고하는데요.
드디어 우리나라가 독립을 하고,
이은부부는 일본 양쪽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는데요.
이승반정권은 이은부부를 한국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신분이 강등당하고,
한국재산은 몰수당했다고하구요.
일본에서는 엄청난 재산세를 내도록해 사실상 거지가 되었다고하네요.
이은 과 이방자여사
이은부부의 한국 국적 취득을 위한 노력
요즘 이방자여사에 대한 재평가 여론이 생기면서 방자여사는 자신은 한국인이라고 주장해왔고,
계속해서 한국국적을 취득하기위해 노력해왔다
이은부부는 그전까지 무국적자로 있었고,
이승만정권에서는 이은부부를 한국인으로 받아들여주지않아 결국 60년대에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만,
박정희정권 때 한국으로 오게되면서 63년도에 한국국적을 취득하게 된다고합니다.
박정희대통령은 이은부부를 생활비 지원까지 약속하며 귀국을 권유하고 결국 이은부부와 아들 이구 가족은 한국으로
들어오게되지만 이미 이은황태자는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고 약 7여년간 식물인간으로 살다 생을 마감하게 됨
덕혜옹주를 평생 돌보아왔고 여러가지로 마음의 고생을 하고 일본에서는 이방자여사를 평가하기를
진정한 왕비감을 한국에 주었다고 한다하네요. (가엾은 분들이죠)
마지막 황세자 이구
마지막 황세자 이구
이구(李玖, 대한민국의 건축가, 공학자, 교육자, 사업가이다.
구 대한제국의 황족으로 대한제국 황실 제3대 수장인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의 둘째 아들이다
일제 강점기의 이왕가의 이왕세자(李王世子)이기도 했으며,
신적강하로 이왕세자직을 상실하고 일본에 체류하였다. 한때 미국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고
, 대한민국에 귀국,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에 교수로 출강하기도 했다.
생전에 건축사와 대학교수 등으로 활동했고,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총재, 종묘제례 봉행위원회 총재로도 활동하였다.
군사 정권 박정희 때에 일시적으로 귀국하였으나 사업실패 등으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체류하다.
묘의 이름은 회인원(懷仁園)이다.
뉴욕 시 세인트 조지 성당에서 줄리아 멀록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의 백인 여성과의 결혼은 일부 종친들이 비난, 반대하였으나 그는 결혼을 감행하였고 줄리아가 그보다 8년 연상이고, 백인에 혼혈인이라는 점 등이 끊임없는 비판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그는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신혼생활을 보냈다.
이구는 아들이 없어 이강 의친왕의 손자인 이원(李源)은 대한제국의 황실 수장 자리를 계승하였다.
이구의 묘 회인원(懷仁園)
덕혜옹주
아! 한많은 여자의 일생
왕실의 자손으로 태어나 이 혹독한 삶의 주인공이 되신 덕혜옹주님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고통과 번뇌을 이기지 못해 꽃다운 18세에 정신 병을 앓으며 슬픈 생을 사셨을까
얼마나 곱고 예쁘시던가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시고 아버지 고종도 가셔서 사실상 끝난 행복
일본으로 가기전 기차에서
우아하고 아름다운 시절의
덕혜옹주는 어머니 양귀인의 죽음이후인 18살 부터 조현병을 앓았다고 한다.
덕혜옹주는 일본으로 유학간 후 소심한 성격 등으로 인해 이지매를 당했고 그로인해 심한
우울증을 앓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 백작 소 다케유키와 결혼했다고 소타케유키와 결혼
일본인으로서는 키생긴 분이셨고 자상했다고 한다.
덕혜옹주 미소가 곱다
덕혜옹주와 소오타케유 사이에서 난 딸 마사에 (정혜)
둘 사이에는 예쁜 딸 '마사에' 도 낳았다.
덕혜옹주는 정신병이 발병해 도쿄의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되고,
남편과의 관계도 끝납니다.
1962년 1월 26일 덕혜옹주는 서울에 도착합니다.
그때까지 생존해있던 덕혜옹주의 유모 변복동은
덕혜옹주가 탄 비행기를 향해 큰절을 올렸고,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린 덕혜옹주를 본 모든 사람들은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풀각시처럼 아름답던 소녀의 모습을 기억하고 계신 상태에서 아래 사진을 보면
왜 그런지 충분히 이해가 가시리라고 믿습니다.
얼마나 그리던 고국이던가.
진작 모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부축을 받으며 창덕궁 낙선재로 들어가는 덕혜옹주.
이 때 순정효황후에게 문안 인사를 올린 덕혜옹주는
정신병으로 인해 모든 것을 놓아버린 상황에서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궁중 예법대로 절을 올려 주변을 놀라게 했다
마치 정상인이 행동하는 듯이 하였으니깐..
이혼후 덕혜옹주를 만나러 왔으나일본으로 갔다고 함
세월은 가고 그리움만 남은 ......지나가면 다 그만인 것을,
덕혜옹주의 유모 (늦게나마 유모를 만날 수 있는 것얼마나 다행인가)
덕혜옹주가 38년만에 돌아왔을 때 김포공항에는 그녀의 옛유모 변복동이 마중나와있었다고.
이후 변복동은 80세에 숨을 거두기 전까지 덕혜옹주를 극진히 보살폈다고 한다.
이방자 여사는 평생 덕혜옹주를 돌보아 주셨다고 합니다
낙선재에서 돌아가실때에도...
덕혜옹주지묘
덕혜옹주가 정혼자로 정했던 분 위 형이며
덕혜옹주가 한국에 올수 있도록 주선해준 분이시다.
한스런 덕혜옹주 생 이렇게 끝났다.
아! 가을
모든 것은 흐르고 있다.
대 자연의 순응하는 사심없는 표상 나무들이여
번쩍! 번뇌를 깨우치는가
시뻘겋게 활활 불타는 나무들
하늘의 별은 땅에서 은하수를 이루고
회한의 역사 흐름은 물쌀로 흘러갔어도 우린 그 애틋한 시절의 이야기로 이 낭만 가슴을 적신다. 낭만
사진 글 모두 인터넷에서 복사함
2016년 11월 18일 씀
ㅅ
첫댓글 오늘의 홍 유릉 역사탐방 다른때보다 느낌이 달랐었던 이유는
영친왕 이방자여사 덕혜옹주 이구씨 줄리아 등 왕가의 여러분들을 실제
뵈었었기에 (신문이나 뉴 스 병원 낙선재에서 등등) . 낭만님 자료보며 과거를 회상해 봅니다.
아픔의 역사,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안타까움.아픔.울분, 분노가....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잘읽고 잘기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