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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제5위 고봉 마칼루Makalu(8,463m)의 산악미는
주로 안개와 구름 그리고 폭풍이 일으킨 눈보라 속에 감추어져 있다가 부지불식不知不識 간에 노출되어 전체의 미를 포착하기 힘들고,
또한 폭풍설 속에서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듯 생기를 발산한다.
그리고 이 산은 주변의 더 높은 산들, 즉 에베레스트(8,848m)와 로체(8,516m)의 준엄한 산 그림자를 투영한다.
‘자연이 만든 완벽한 피라미드’라고 알려진 마칼루는 빛의 작용으로 이상한 색채를 발하기도 하는데,
이 장엄한 봉우리를 등반하기를 염원하는 산악인들이 항상 다수에 달했다.
그러나 이산은 결코 등반이 만만한 산이 아니다. 에베레스트 초등자 에드먼드 힐러리가 두 번씩이나 고배를 마셨고,
예지 쿠쿠츠카가 서벽에서 한 번 실패했고, 1980년 더그 스코트가 2명의 동료와 함께 마칼루의 남동릉~북서릉 트래버스라는 죽음의 행진에 나섰다가,
남동릉 상의 ‘검은 장다름Black Gendarme’(산등성이의 뾰족한 암탑) 아래쪽 7,760m 지점에서 제트기류와 맞닥뜨려 텐트가 박살나는 바람에
폐수종에 걸린 조르주를 후송하며 구사일생으로 귀환했다.
더그 스코트는 4년 뒤인 1984년 2명의 동료와 이 능선에서 죽음의 행진을 되풀이하던 중 남동릉 상부에서 1976년 실종된 체코 산악인 슈베르트가 눈과 바위 사이에서 동사한 것을 목격했다.
그들은 8,370m 지점의 암탑 밑에서 비박하고 등반을 계속하는 도중 폭풍설을 만난 뒤 남동릉 상부 정상 아래쪽 심설지대에서 탈진한 아파나시예프를 이끌고 죽음의 탈출을 감행했다.
그의 일행은 1988년 폭설 속에서 마칼루 서벽 7,300m 위쪽의 화강암 벽을 돌파하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에베레스트와 K2 등정자, 여성 클라이머 반다 루트키에비치가 두 번 등정에 실패한 사실이 이 산의 험난함을 무언으로 증언한다.
이 ‘폭풍의 산’은 날림 건축 공사하듯, 마르첼 뤼에디처럼 고소적응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중하지 않은 등반을 하다가는 십중팔구 목숨을 잃게 된다.
1955년 프랑코 대장이 이끌었던 프랑스 대의 장쿠지와 리오넬 테레이 대원이 설릉 북서릉을 따라 초등해 마칼루의 제1루트가 탄생했다.
이틀 후 프랑코 대장, 마뉴옹, 셰르파 기알첸이 2차로 등정했고, 다음날 부비에르, 레루, 비알라트, 쿠페가 3차로 등정해 등반대 전원이 등정했다.
테레이는 백주 대낮에 정상의 하늘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별들을 목격하는 기현상을 산악영화 ‘한낮의 별들Stars at Midday’ 속에 에피소드로 기록했다.
마칼루의 제2루트 남동릉은 정상에서 남동봉(8,010m)과 ‘검은 장다름’을 지나 남동 콜Col(일본대 콜)로 이어지는 칼날 능선인데, 1970년 마코토 하라 대장이 이끈 일본대가 3,000m의 고정 자일을 깔고 개척했다.
포터들이 짐을 지고 검은 장다름을 넘을 수 없자 그들은 능선의 일부를 포기하고 검은 장다름과 남동봉 뒤쪽 설원으로 우회해 남동릉 상부로 이어지는 루트를 선택했다.
1971년 프랑스의 로베르 파라고 대장은 웨스트 필라에 루트를 개척했다.
등정자는 베르나르 멜레와 야니크 세뉴에르Yannik seigneur로 그들은 7,000m 위쪽의 난이도 V급 A2의 록밴드를 돌파하고 등정했다.
1975년 10월 웨스트 필라West Pillar 우측에 있는 높이 3,000m의 남벽에 유고슬라비아 대가 캠프 3개를 구축하고, 벨라크와 만프레다가 등정해 마칼루의 제4루트가 개척되었다.
1976년 체르빈카 대장이 이끈 체코 대가 바룬빙하에서 남동봉까지 이어지는 ‘사우스 버트레스’ 루트에 5개의 캠프를 구축하며 도전했다.
두 명의 체코 대원 크리사크와 슈베르트, 그리고 스페인 대원 한 명이 남동봉 밑의 거대한 필라를 돌파하고 남동봉을 초등했다.
그들은 남동릉으로 계속 등반해 주봉을 밟았는데, 하산 도중 슈베르트가 탈진으로 사망하고 나머지 대원들은 심한 동상에 걸려 귀환했다(제5 루트).
1988년 장 트루아예가 마칼루에서 패러글라이더를 암벽에 세게 부딪치는 바람에 우리는 등반을 시도하지도 못했다.
그해 가을 우리는 마칼루의 웨스트 필라 7,400m 지점까지 진출했지만, 강풍을 만나 다시 쫓겨났다.
데포 장비는 얼음에 묻히고 크램폰은 금 가고
1991년 가을 이 봉우리에 세 번째 도전했다. 8월 13일 비행기로 스위스를 출발했다.
우리가 이렇게 일찍 서두른 까닭은 몬순 기세가 꺾이자마자 ‘마칼루의 제2 요새’인 거대한 서벽을 등반할 작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높이 3,000m의 이 거벽 등반은 1930년대 알프스의 마지막 난제들(마터호른 북벽, 아이거 북벽, 그랑드조라스 북벽)처럼 히말라야에서 마지막 난제 중의 하나였다(이 벽은 이미 1982년 등정되어, 이 서술은 팩트가 아님: 역자註).
이 벽의 첫 번째 구간은 가파른 빙사면이고, 7,800m 부근 지점에서 높이 396m의 가파르고 오버행을 이룬 바위 장벽으로 가로막혀 돌파하는 데 고난도 등반기술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혼합구간 등반에 필수적인 장비들, 즉 짧은 줄사다리와 피톤, 너트, 프렌드와 같은 철물 인공보조등반 장비들을 휴대할 계획이었다.
우리의 신 루트는 웨스트 필라 좌측의 서벽을 지나는 루트였다.
1981년 알파인스타일 등반 대가들인 폴란드의 예지 쿠쿠츠카와 보이테크 쿠르티카, 영국의 알렉스 매킨타이어가 이 루트에서 알파인 스타일 등반을 시도했지만, 7,830m 지점에 위치한 높이 500m 오버행 바위절벽을 돌파할 수 없어 퇴각했다.
[로레탕은 자신의 등반기에 1981년 예지 쿠쿠츠카가 마칼루 서벽을 초등했다고 기록했으나,
이 기록은 팩트가 아님. 쿠쿠츠카는 1981년 북서릉의 암릉, 즉 북서 립North-West Rib(마칼루의 제6루트)을 알파인 스타일로 단독 등정하고,
정상 바위 위에 놓인 피톤들 옆에 자신의 아들 소유의 마스코트인 플라스틱 무당벌레를 남겨두었음.
우리나라 산악인 허영호가 마칼루 정상에서 가져온 쿠쿠츠카의 ‘무당벌레’ 마스코트로 그의 등정을 확인했음.
오랫동안 ‘난공불락의 요새’로 평가되던 마칼루 서벽의 초등자는, 1982년 멕시코-폴란드 합동대에 참가했던 폴란드의 유명 산악인 안드르제이 쵸크Andrzei Czok로,
그는 최종 캠프에서 단독으로 서벽의 오버행 좌측을 돌파하고 북서릉 상부로 등정했음(마칼루의 제7루트). 그의 루트는 로레탕 일행이 등반을 계획했던 서벽 루트에서 좌측으로 멀리 떨어져 있음.
그는 예지 쿠쿠츠카와 1985년 캉첸중가의 남서벽 동계등반 중에 기흉증으로 사망했음.
이 등반대에 훗날 8,000m 14개봉 4번째 완등자가 된 멕시코 산악인 카를로스 카르솔리오도 참가했음]
8월 28일 우리 네 사람, 쉴비Sylvie, 아니크Annick, 장 트루아예Jean와 나는 마칼루의 5,300m 지점에 위치한 베이스캠프에서 서로 만났다.
9월 10일 화요일, 폭설이 내리는 가운데 우리들은 서벽의 6,500m 지점에 장비를 데포시킬 계획으로 오전 7시 경에 마지막의 거대한 세락 밴드 밑에 도달했다.
그 위쪽으로는 암벽 구간이 보였다.
우리는 두서너 개의 불안정한 걸리gullies(도랑)들을 건넌 후, 빙벽에 두 서너 개의 아이스스크루를 박고, 모든 등반장비를 그곳에 매달았다.
포타레지portaledge(이동용 천막) 한 개, 두 개의 침낭, 두 개의 깔개, 두 개의 아이스 액스, 피톤 20개, 카라비너 20개, 프렌드 1개조 등 상당한 양과 무게의 짐이었다.
등반을 재개하면 우리는 그곳에 보관된 장비들을 회수할 작정이었다.
이런 책략은 이미 동물계에서 널리 유포되었다. 개들은 모종의 장소에 감춰두었던 뼈다귀를 찾아내고,
다람쥐들은 여분으로 저장해 두었던 솔방울을 다시 찾아내며, 인간들은 훔쳐갈 수 없도록 감춰둔 수표책을 찾아낸다.
우리들의 은닉물은 첫 번째 록밴드가 시작되는 6,500m 지점 부근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명심해둬야 했다.
장 트루아예는 급히 하산하려다가 눈사태를 유발해 혼쭐이 났다. 그는 급히 하산하려는 유혹을 뿌리치고, 수차례의 긴장이 감도는 스텝을 되풀이한 끝에 위기상황에서 벗어났다.
좋은 날씨가 계속될 조짐이 보였다. 우리는 9월 18일 오후 6시 장비 데포지를 향해 출발, 자정에 세락 밴드 밑에 도달했다. 세락 밴드란 빙사면이 가로로 갈라지며 큰 얼음 토막(빙탑)이 형성되어 생기는 빙하의 한 종류다.
우리보다 먼저 이런 위험 지역에 도달한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 과장에 능숙하다면, 그는 이런 밀집된 거대한 빙탑들은 약간의 충격에도 무너져 내려 그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얼음 벼락을 쏟아 부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실제로 1970년 영국대가 안나푸르나 남벽에 신 루트를 개척하고 하산할 때 맨 나중에 내려서던 이안 클러프 대원이 무너지는 빙탑에 묻혀 사망했음]
우리가 세락 밴드 밑에 보관해 두었던 장비들이 그런 꼴을 당해 얼음덩이 밑에 완전히 파묻혀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는 단 한 개의 아이스 액스로 얼음에 파묻힌 장비를 파내려고 시도했다.
이런 무모한 시도는 마치 한 개의 찻숟가락으로 중국의 만리장성을 파 옮기려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우리는 2시간 동안 빙벽을 할퀴다 말고 올바른 현실을 인식하고 포기했다. 우리는 오전 5시 반에 베이스캠프로 퇴각했다.
9월 21일 실종된 장비가 있는 곳으로 다시 올라갔다.
이번에는 삽을 휴대했다.
우리는 6시간 이상 교대로 얼음덩어리들을 파헤쳤다.
그것은 얼음과 삽의 장시간 싸움이었고, 삽은 마침내 구부러져 엉망이 되었다.
우리의 사라진 장비에 관해 갖은 표현들, 즉 아틀란티스 이야기 같다느니,
여러 척의 선박들과 수많은 항공기들이 불가사의하게 사라진다는 버뮤다 삼각해역Bermuda Triangle에서 발생한 사건 같다느니,
또는 네스호의 괴수처럼 사라졌다느니, 혹은 예티처럼 또는 UFO처럼 사라졌다느니 하며 수다를 떨고 난 후
지쳐서 오후 1시 베이스캠프로 퇴각했다.
그날 저녁 우리의 이웃 스페인 산악인들은 위로차 등강기 한 조와 피톤 서너 개와 오버부츠 몇 켤레와 아이스 액스 한 개를 가져다주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자신들이 등반 중인 웨스트 필라 등반에 참가하라고 권유했다.
우리는 그들의 관대함에 감동받았다. 우리는 위태로운 서벽 등반과 고정 자일이 설치되어 비교적 안전한 웨스트 필라 중에서 양자택일해야 할 상황에 마음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그 문제에 관해 며칠간 숙고한 후, 마침내 안전한 웨스트 필라 등반 쪽을 포기하고, 위험한 서벽을 향해 출발 준비를 했다.
오전 4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 수면제의 약효를 벗어나지 못해서 약간의 메스꺼움을 느꼈다.
6시간 후 데포 장소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오후 2시경 짐을 꾸렸다.
우리는 아이스스크루, 프렌드, 9mm 로프 100m, 케블라 로프 100m, 피톤 30개 등 16kg 무게 장비를 짊어지고 등반해야 했다.
오후 5시 30분 등반을 재개했다. 우리의 걸음은 빠른 편이었다.
2시간 후 첫 번째 록밴드에 도착했다. 이미 서벽의 절반을 돌파한 셈이었다.
암벽은 아주 얇은 살얼음으로 덮여 매우 미끄러웠다.
선등자 장 트루아예는 아래쪽으로 내려가며 통과하는 루트에서 공포에 떨다가 위험구간을 돌파했다.
다음날 오전 5시 장 트루아예와 나는 거대한 다이히드럴big dihedral(二面角) 밑에 도달했다.
높이 50m의 최고난도 암벽인 거대한 다이히드럴 돌파는 서벽 등반의 난제로 원정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할 터였다.
우리는 장차 등반해야 할 오버행 루트를 살필 수 없는 지점에 있었다.
장 트루아예가 자신의 크램폰을 벗어서 자세히 살피며 조사했는데, 한 짝이 완전히 금이 간 것을 발견하고, 공포에 질려 고함을 질렀다.
크램폰 중앙에 부착돼 있는 플라스틱판이 상하로 균열되어 있었다.
금 간 두 부분이 접합되어 있는 까닭은 혹한 속에서 얼어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등반을 뒤돌아보고 몸서리쳤다.
지난 24시간 동안의 등반 중 우리는 여러 번 크램폰 앞발에만 의존했다(프론트포인팅 등반법).
만약 그때 장 트루아예의 크램폰이 해빙됐더라면 그의 목숨이 어떤 결말을 맺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다행히 크램폰의 가장자리를 따라 구멍들이 뚫려 있었다.
그 구멍들에 끈을 꿰어 연결하고, 크램폰의 부착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했다.
우리 위쪽으로 난코스가 시작되었다.
그 위험지역을 통과하려면 안전한 발걸음이 필요했다.
한데 장 트루아예가 한쪽 크램폰이 고장난 상태에서 어떻게 그 위험구간을 안전하게 돌파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하산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마칼루 서벽은 우리를 외면하고 박대했다.
우리는 크램폰 구멍들을 이어 놓은 끈을 얼마나 신뢰해야 할지 불안감에 미칠 지경으로 괴로웠다.
평소 발걸음이 빠른 장 트루아예는 이제 불안감에 휩싸여 어느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할지 안절부절못했다.
말할 필요 없이 그는 자신의 구두창 밑의 뱀처럼 꾸불꾸불한 끈을 신뢰할 수 없었다.
나는 난코스마다 확보장비를 설치하고 장 트루아예가 안전하게 하산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가 아주 느린 속도로 하산하는 바람에 6시간이나 소요되었다.
오후 7시 30분에 베이스캠프에 도달했다. 모두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다.
다음날 장 트루아예는 자신의 오버부츠와 여분의 크램폰 소재를 파악할 수 없었다.
나는 쌍안경으로 서벽을 샅샅이 뒤져 그의 장비가 6,300m 부근 제1캠프, 우리의 장비 보관소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스페인 등반가들, “비행기를 타고 올라왔느냐” 질문
하룻밤 휴식을 취하고 난 장 트루아예는 어느 정도 피로가 회복되어, 서벽 위쪽에 있는 자신의 장비를 회수하기 위해 출발했다.
7시간 후 귀환한 그는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몸으로 높이 914m의 치받이 산책을 한 것에 관해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아주 불쾌한 기분을 드러냈다.
심장 전문의들은 이구동성으로 앉아서 하는 직업의 해악을 비난한다.
그런데 장 트루아예는 건강에 좋은 운동을 하고도, 그것에 대해 기뻐하기는커녕 불평을 하다니,
나는 인간이란 장래의 행복보다 즉석의 안락을 더 좋아하는 편견에 사로잡히는 동물이라는 해석을 내렸다.
이제 철학적 이야기는 집어치우자! 우리의 제2의 계획은 마칼루 웨스트 필라 등반이 될 터였다.
[마칼루의 제3 루트인 웨스트 필라 루트는 ‘웨스트 버트레스’라고도 불리고, 또한 마칼루의 디레티시마Direttissima(직등 루트)라고 불리기도 함.
이 루트는 마칼루의 남동릉 상의 거대한 버트레스, 또는 필라에서 시작하여 서쪽의 유모봉Jumeaux·6,420m으로 이어지는 웨스트 리지West Ridge를 말함.]
10월 1일 화요일 나는 자정이 조금 지나서 잠이 깨었다.
장 트루아예와 나는 오전 1시 30분경 최소한의 식량과 장비, 그리고 50m의 로프를 휴대하고 출발했다.
나는 수면제 약기운이 아직 남아서 얼빠진 듯 멍한 상태였다.
내가 과연 몽유병자 같은 걸음걸이로 마칼루를 등정할 수 있을까?
그것이 최대 의문이었다.
장 트루아예에게 선등을 양보하고, 다음에 내가 그 작업을 교대했다. 오전 7시 완전한 직선 쿨와르 아래 도달했다.
1971년 프랑스 대가 이 쿨와르를 돌파하고, 히말라야의 최대 등반 업적 중의 하나를 이룩했다.
[로베르 파라고 대장이 이끄는 프랑스 대의 베라나르 멜레 대원과 야니크 새뉴르 대원이 눈보라와 혹한 속에서 사투를 벌이며 초등했음.
이 루트를 재등한 산악인은 미국의 위대한 산악인 존 로스켈리 일행임]
솔직히 말하자면, 마칼루의 웨스트 필라는 더 이상 과거의 악명 높던 고난이도 루트가 아니었다.
난코스가 고정자일로 도배된 것처럼 변해서 고난도 기술 등반이 필요하지 않았다.
오늘날 마칼루 웨스트 필라를 등반한 산악인들은 5급(V) 루트를 돌파했다는 자긍심을 지닐 수 없다.
그들은 단지 훌륭한 등강기가 필요할 뿐이며, 여러 등급 난이도의 루트에 설치된 고정로프만 신용하면 그만이었다.
이 루트는 고정자일로 인한 난이도의 등급 절하에도 불구하고, 운치는 환상적이었다.
8,000m급 봉우리에 개척된 가장 아름다운 루트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고정 자일을 따라 등반, 오전 10시경 7,400m 지점의 제3캠프에 도착했다. 마칼루의 악명 높은 강풍이 휘몰아치며 고통을 선사했다.
베이스캠프에 머무르고 있는 쉴비 대원이 무선으로 우리보다 선등한 스페인 대의 최신 등반정보를 알려 주었다.
우리가 피워 놓은 스토브가 내뿜는 요란한 소음이 장단을 잘 맞추는 동안, 오후의 시간이 서서히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소설 <침착한 전하殿下 시리즈: 원제 ‘마칼루의 잔인한 죽음의 무도회舞蹈會’>를 읽었다.
오후 3시, 탈진으로 퇴각하는 스페인 등반가 후안Juan이 제3캠프에 도착했다.
우리는 오후 5시 출발준비를 마쳤다. 자정이 되기 전에 스페인 대를 따라잡기를 희망했다.
우리는 웨스트 필라의 가장 흥미 있는 등반 구간에 달라붙었다. 일련의 슬랩들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고정자일이 깔려 있는 구간이었다.
그 다음은 높이 40m의 다이히드럴이 등장했는데, 알루미늄 사다리가 설치되어 등반이 수월했다.
높이 11m 수직벽 다음에 하나의 커다란 직립 바위 덩어리, 즉 오벨리스크obelisk(方尖塔) 밑에 당도했는데, 이것이 난코스의 끝이었다.
오후 8시 30분 7,900m 지점에 도달했다.
그곳에 스페인 클라이머 카를로스 발레스Carlos Valles와 마누 바디올라 오스테기Manu Badiola Ostegi의 텐트(제4캠프)가 있었다.
그들은 잠을 자고 있었다.
얇은 나일론 텐트 천을 통해 그들이 혹한으로 와들와들 떨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깔개 위에 침낭도 없이 누워 있었다.
그들을 깨우자 눈을 크게 뜨고, 눈앞에 보이는 것이 유령인지 아닌지 살피려고 애를 썼다.
마누는 우리의 속도 등반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비행기를 타고 올라왔느냐”고 농담 삼아 질문했다.
우리는 그날 자정에 출발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출발할 때까지 기다릴 장소를 찾았지만 내 몸을 올려놓기에 불충분한 좁은 레지만 발견했다.
너무 비좁은 공간이어서 비박색 안의 두 다리를 올려놓을 수 없었고, 3시간 반 동안 엉덩이뼈로 몸의 균형을 잡으며 보냈다.
자정에 로프를 묶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다.
만일 과거에 미국의 토머스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발명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날밤 암흑을 경험하고 나서 전구를 발명하고 싶어했을 것이다.
서벽에서 올라오는 한기가 우리 몸을 파고들어 와들와들 떨었다.
예상과 달리 능선은 험준했다.
능선이 불룩 튀어나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에서 우리는 휴식을 취하며 새벽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햇볕이 우리 몸에 닿을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지만, 태양은 학교 가기 싫어 꾀를 피우는 어린 아이처럼 마칼루 남서릉 뒤쪽에서 늑장을 부리고 있었다.
오전 6시 등반을 재개했다.
능선에 오르자마자 태양이 뒤따라 와 우리에게 비춰 주었다.
미래의 어느 날, 이 오랜 세월 동안 비추던 별(태양)도 다 타버릴 것이다.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나는 혹한이 군림하는 이 지구상의 마칼루가 아닌 다른 별에 가 있기를 희망했다.
우리는 이 루트 상 8,200m 지점의 마지막 최고 난코스 위에 도달했다. 벽이 눈 덮인 슬랩으로 이어졌다. 등반이 위태로워 고난도 등반 기술을 요했다.
나는 상부로 선등을 속행했고, 장 트루아예는 스페인 산악인들을 위해 고정로프를 깔았다.
뒤처진 스페인 산악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나는 트래버스 구간에서 잘 부서지는 눈 슬랩 지대로 몸이 빠져 들어 갔는데, 눈이 복부까지 차올랐다.
다행히 그 구간은 매우 짧았고, 눈이 단단하게 얼어붙은 구간이 곧 나타났다.
위쪽을 쳐다보니 마칼루의 정상이 보였다.
진짜 정상임을 확신했다.
곧 그곳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 흥분으로 내 목구멍이 부풀어 올랐고, 감격해 통곡을 터뜨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전 10시 나는 마칼루의 정상을 밟았다.
최종 캠프에서 33시간 동안의 등반 끝에 우리는 마칼루 웨스트 필라의 5번째 등정자들이 되었다.
한 시간 후 우리 세 사람 장 트루아예, 마누 그리고 나는 서로 축하의 인사를 나누었다.
카를로스는 아직 정상에 도착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를 기다렸지만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장 트루아예와 나는 하산하기로 결심했다.
마누는 자신의 친구를 기다리며 정상에 남았다.
5일 동안 산에 머물렀던 스페인 산악인들이 제3캠프를 이용할 수 있도록 제2캠프까지 하산할 계획이었다.
스페인 산악인들이 7,900m 지점의 제4캠프에서 하룻밤 더 머물겠다고 말했을 때, 우리는 7,900m 고도는 체력을 더 빨리 고갈시킨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의 제4캠프 체재를 만류했다.
우리의 하산 속도는 점점 빨라져 ‘스타카토staccato(더 빠르게)’로 변했다.
기분이 상쾌했다.
그날밤 베이스캠프에 도착할 수 있다는 전망으로 기운이 더욱 솟아났다.
카를로스와 마누가 그날 제3캠프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에 사용할 수 있도록 우리의 두 번째 비박지에 연료 두 통을 남겨 두었다.
고정 자일이 시작되는 곳에서 스페인 등반대의 셰르파 락파를 만났다.
그는 양식과 음료수를 휴대하고 하산 중인 스페인 등반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친절하게도 약간의 음식과 음료를 제공했다.
우리는 그에게 두서너 시간 더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운명은 산자와 죽은 자로 갈라졌다
우리는 그날 오후 2시 제3캠프에 도착해 얼음을 녹여 만든 반 리터의 물을 마시고 고정자일을 이용해 하산을 속행했다.
우리는 평원을 향해 돌진하는 스파이더맨을 닮았다.
고정자일이 끝나는 곳에서 모든 것을 중력에 의존했다.
즉 우리는 궁둥이로 미끄려져 내리는 글리사드glissade(制動滑降)를 했다.
슬라이드를 할 때 통제 불능 상황을 통제 가능한 조건으로 바꾸며 실행해야 했다.
30분 후 쿨와르 밑에 도달했다.
나는 가끔 암흑 속에서 유령이 출몰한다는 느낌 또는 누군가가 내 앞뒤에 존재한다는 느낌, 틀림없이 시인들의 눈에 띄는 천사들의 존재 같은 것들의 현존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암흑 속에서 하산하기를 꺼렸다.
나는 어두워지기 전에 베이스캠프에 도착하기를 강력히 희구했기 때문에 지친 몸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후 7시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나는 인체가 갈망하는 액체(물)로 탈수(수분이 제거됨)된 인체를 수화水和(물질이 물과 결합하는 과정)시키는 시급한 과정에 몰두했다.
그때 나를 찾는 스페인 산악인들의 음성이 방송전파를 타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제3캠프의 카를로스가 나와 통화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무전기를 넘겨받고 ‘잠 잘자는 거인(카를로스)’한테서 “마누 대원이 추락했다”는 전갈을 받았다.
카를로스의 설명에 의하면, 마누가 8,200m 지점의 암벽 구간에서 자일 끝에 매달려 있다가 미끄러지며 중국 측 암벽으로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마 2,300m 아래 지점의 플라토로 추락했을 것이다.
카를로스는 마음이 심란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고산 체험담을 요청했다.
나는 초오유에서 겪었던 피에르 알랭 슈타이너Pierre Alain Steiner의 비극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의 추락, 그의 반송장 상태, 구조대를 헛되게 기다렸던 일, 우리의 무기력 등 당시 악몽들을 전부 말해 주었다.
두 명의 자식을 둔 마누는 마칼루의 2,300m 추락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우리 앞에는 8,000m 지대로 다시 등반한 후 중국 측 암벽으로 2,300m를 하산해 그의 시신을 현장 확인하는 절차만 남았다. 이 일을 위해 그렇게 커다란 모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을까?
지금까지 고산에서 2,300m를 추락하고 생존한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우리 운명은 12시간 동안 고통과 행복으로 가득차서 뒤얽혔다가 두 패, 즉 산자와 죽은 자로 갈라놓았다.
마누의 죽음이 우리들의 마칼루 등정의 성공에 어두운 그림자, 즉 슬픔을 던졌다.
그 당시 우리가 마칼루에 없었더라면 카를로스와 마누가 마칼루를 등정하지 못했을 것으로 확신했다.
우리가 웨스트 필라에서 그들을 따라잡기 전에 그들은 실제로 한 발자국도 더 전진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들은 전날 50m의 고도를 돌파하는 데 머물러 있었다.
스페인 산악인들은 웨스트 필라의 높은 고도에서 5일간 고정 자일을 설치하며 체력이 고갈된 상태였다.
동시에 나는 스페인 산악인들이 웨스트 필라에서 고정 자일을 설치하며 엄청난 양의 체력을 소모하지 않았다면,
즉 우리가 웨스트 필라에 고정 로프를 직접 설치하며 등반했다면, 우리가 마칼루를 결코 등정할 수 없었을 것으로 확신했다. 나는 이번 마칼루 등정에서 긍지를 느낄 수 없었다.
비록 스페인 산악인들이 그들의 루트 등반에 우리를 초대하긴 했지만, 우리의 등정은 그들의 노고에 크게 힘입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것은 뻐꾸기가 울새의 보금자리를 빼앗아 차지한 후, 그를 따라 다니며 괴롭히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고산 등반가들이란 희비극 배우들과 같아서, 생명이란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 팽팽하게 당겨진 줄 위에서 외줄타기를 하다가
가느다란 줄의 부분이 재수 없게 끊어지면 생명도 따라서 사라지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살아남는다고 생각한다.
나의 친구 한 사람은 아이거 북벽 등반이 아니라 체르마트에서 스키 등반 중에 사망했고, 나의 여자 친구인 스위스의 위대한 여성 산악인 니콜레 니퀴이으Nicole Niquille(그녀는 나의 에베레스트 북벽 등반에 동행했음)는
고산 등반 중이 아니라 버섯 채취 중에 사망했다.
에베레스트의 북벽 혼바인 쿨와르에서 나와 장 트루아예가 몇 분 전 등반하던 정식 루트에서 벗어난 바로 그 순간 눈사태가 그 루트를 휩쓸고 내려가서 우리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다
(로레탕은 2011년 히말라야가 아니라 알프스에서 여자 친구와 로프를 묶고 등반하던 중에 그녀가 실족으로 미끄러지며 자일을 당겨서 추락사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