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윤의 미술치유] 조선과 중세유럽 미술 속 감각
김홍도, 그리고 바니타스(Vanitas)
“ 아 안되는데 ”
추운 겨울 이른 새벽, 좌석 버스 꽁무니를 바라보며 나라 잃은 표정을 짓는다. 찬 바람에 몸이 움추러 든다. 투덜대며 정류장 좌석에 앉는 순간, 어라? 따스함이 올라온다. 온열좌석이라니. 따끈한 엉덩이가 마음의 여유를 넘어 애국심까지 일으킨다. 군 시절 혹한기 훈련의 핫팩도 떠오른다. 기억에 남는 소중한 물건이었는데, 제대 후엔 눈길조차 준 적이 없다. 몸의 감각(sense)이란 참 간사하다.
버스가 한강교을 넘는다. 아름다운 한강에 걸쳐 있는 많은 다리들.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강물을 감상하던 중, 초록색 공중전화 한통이 눈에 띈다. ‘SOS 생명의 전화’ 다. ‘한강의 기적’ 뒤엔 ‘자살의 명소’ 라는 그늘이 있다.
2021년부터 지금까지 한강교량에서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사람은 2,000 명이 넘는다 한다.
보다 못한 한강대교에 2013년 처음 자살 예방 문구가 새겨졌다. 그러나 투신은 줄지 않았고, 몇몇 부주의한 문구들, ‘하하하하하하’, ’수영은 잘해요?’ 등은 논란과 함께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다. 결국 예방 문구들은 사라졌다.
스스로 목숨을 던질만큼 절박한 인간에게 건넬 도움의 손길은 적어도 ‘글’은 아닌 것 같다. 반대로 ‘생명의 전화’ 가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던 건 멋들어진 말이 아닌 누군가의 따뜻한 목소리 때문 아니였을까.
한강다리의 난간도 따스하고 부드럽게 만들어 보고 싶다. 떨리는 손에 전해진 온기는 그 급박한 마음을 순간 누그러뜨리지 않을까. 차갑고 딱딱한 촉감은 생각의 단호함을 부추기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운 촉감은 생각을 잠시 쉬고, 내려놓게 한다.
한강의 기적을 이끈 역동성은 얼핏 한국을 감각적인 사회로 보이게 한다. 하지만 자극적인(stimulating) 사회와 감각적인(sensuous) 사회는 다르다. 진정한 오감의 향유는 침묵과 여유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때서야 감각은 삶의 여백 가운데 마음을 치유한다.
아동교육학자 몬테소리(Maria Montessori, 1870-1952) 는 배움의 기초는 감각의 연습에서 비롯된다며 감각을 등한시하는 기존 교육을 비판했다. 현대 디지털 사회도 정서적 감각인 촉각, 후각, 미각 보다 이성적 감각인 시각과 청각에 편중하는 경향이 있다.
유교 중심의 조선시대 미술 속에서 다양한 감각을 느껴보는 것은 쉽지 않다. 대부분 선비들도 화려한 색채보단 담백한 수묵화를 선호하여, 물의 농담만으로 절제와 여백의 미학을 표현했다. 관념지향의 그림들이 주는 미학은 우리의 정신을 고양시키지만, 그 높은 격조가 때로는 답답하고 숨이 막힌다.
조선시대 미 의식과 숨가쁘게 달려온 사회에서 소흘했던 감각의 향유. 우리는 높은 격의 문화예술과 눈부신 경제성장을 얻고 또 무엇을 놓쳤을까.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 김홍도, 18세기. 삼성미술관 리움
조선의 미술에 감각의 숨통을 트이게 한 화가는 단원 김홍도(1745-1806)였다.
생생한 감각의 표현을 사랑했던 중인 출신 예술가 김홍도의 그림은 엄숙한 시대 분위기에서도 싱싱한 들꽃처럼 피었다. 그는 당대의 미의식을 충실히 따른 산수화나 정조의 ‘어진’ 으로 중요한 입지를 다졌으나 결국은 ’서당’,’빨래터’,’무동’,'씨름' 등의 풍속화로 모든 한국인의 사랑을 받는 화가로 우리 곁에 남았다.
풍속화 속 사람들은 춤추고, 일하고, 퍼져있고, 엿보고, 음미하고, 마신다. 아마도 퇴근 후 홀로 평민들의 생명력 넘치는 오감을 그리며 그는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포의풍류도’ 를 보면 버선도 벗어버린 맨발로 비파를 타며 다양한 예술의 감각들에 둘러싸인 행복한 선비 김홍도가 쉬이 떠오른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에로틱한 ‘춘화도’ 도 남긴다.
황묘농접도(黃猫弄蝶圖), 김홍도, 18세기. 간송미술관
‘황묘농접’ 은 조선 시대 그림 중 가장 ‘따뜻한’ 그림이다.
‘몽글몽글’한 늦 봄의 정경, 자연 속 일상의 순간을 포착한 단원의 따뜻한 시선이 예쁜 한 조각의 꿈 같다. 그림의 제목은 ‘노란 고양이(황묘)가 나비(접)를 놀리다’ 란 뜻이다. 섬세하게 묘사된 ‘보들보들’ 한 노란 털은 몰래 쓰다듬고 싶고, 제비나비의 날개짓은 ‘하늘하늘’ 가볍고 우아하다. 계절의 내음이 한가로이 코 끝을 스치고, 고양이의 시선은 녀석만의 호기심을 드러내 미소 짓게 한다.
이 따사한 그림엔 따뜻한 소망도 담겨있다.
고양이의 ‘묘’ 는 70세 노인의 ‘모’ 와, 나비의 ‘접’은 80세 노인을 뜻하는 ‘질’ 과 비슷한 발음으로 장수한 노인을 상징한다. 왼쪽의 빨간 꽃은 패랭이 꽃으로 ‘젊음’ 과 ‘건강’ 을, 아직 꽃피지 않은 보라색 제비꽃은 ‘무언가를 이룬다’ 는 뜻을, 왼쪽 아래의 바위 또한 영원한 ‘장수’를 의미한다.
이 그림은 만수무강, 만사형통을 기원하며 누군가에게 전해진 선물로 추측된다. 조선의 유교사상은 인간을 본으로 내세보다는 현세를 중시하였기에, 그림을 받은 이는 흐뭇한 마음으로 천천히 감상했을 것이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 지구 반대편, 한 부유한 네덜란드 상인이 펼쳐 든 그림 선물에는 난데없는 ‘해골’ 이 그려져 있었다.
‘대체 해골을 왜 이렇게들 좋아하지?’
서구 유럽 문화와 미술을 볼 때마다 들던 호기심은 중세의 유럽을 알게되며 자연스레 풀렸다. 당시 유럽의 예술가들이 기원했던 것은 장수가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일깨우는 것이였다.
중세 유럽의 예술가들에게 죽음은 평화로운 것이였다. 현세보다는 사후의 영생이 더 중요했던 시대, 죽음은 단지 생의 일부였다. 16,7세기에 등장한 ‘바니타스 (Vanitas, 라틴어로 허영)’ 라는 장르는 중세 예술가들이 죽음을 표현했던 가장 독특한 방식이였다.
‘바니타스’ 는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우리 모두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의 라틴어 경구와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 라는 구약성서의 메시지를 그림으로 담은 하나의 우화였다.
위트헤르트, 꽃다발과 해골이 있는 정물, 1642년, 개인소장
플랑드르 화가 위트헤르트(Adriaen van Utrecht, 1599-1652)의 대표적인 바니타스 그림에는 꽃다발과 두개골이 나란히 놓여있다. 해골과 화사한 꽃의 거리만큼, 삶과 죽음은 딱 그만큼 가깝다. 활기차게 싹트는 꽃과 울퉁불퉁하게 썩어가는 해골. 이 정반대의 두 대상은 삶의 무상함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해골은 바니타스의 주요 상징으로 죽음을 항상 잊지말고 삶을 소중히 여기라 한다. 사랑스러운 꽃다발은 즐거움을 선사하지만, '유통기한'이 정해져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다. 꽃은 자라고, 피우고, 시드는 삶의 순환을 상징한다.
그림 속에는 시간의 흐름을 상징하는 오브제들로 짧은 삶의 무상함과 인간의 필멸성을 일깨운다. 테이블 위에는 휴대용 시계와 나무 케이스에 담긴 모래시계가 있다. 담배 파이프와 술잔은 공허한 즐거움에 소비된 시간을 나타낸다.
당시 부유한 네덜란드 상인들이 앞다투어 소유했던 진주, 금목걸이, 반지, 돈, 희귀한 앵무조개 껍질도 있다. 해골은 서푼짜리 인간 지식의 한계를 나타내는 책 위에 놓여있고, 해골이 쓴 월계수 잎 면류관은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을 넘어서는 승리가 있음을 뜻한다.
찰스 앨런 길버트, 모든 것이 헛되도다(All is Vanity), 1892년
삶의 덧없음과 허영심, 부와 소유의 무의미함을 경고하는 바니타스 그 자체가 값비싼 미술품으로 당시 부유층의 필수 애장품이 된 것은 마치 쿠바의 공산주의 혁명가 체 게바라(1928-1967)의 이미지가 자본주의의 상품으로 소비되는 것 처럼 아이러니 하다. 오늘날 한국으로 말하자면, 소위 ‘강남 좌파’ 의 인기 플렉스(flex) 상품이 되어버린 꼴이다.
당시 바니타스의 인기는 겸손의 중요성과 세속적 욕망의 덧없음을 강조한 개신교 종교 개혁의 시대적 분위기도 한 몫 했다. 바니타스에는 일반적으로 부를 상징하는 물건과 죽음을 상기시키는 해골 및 꺼진 양초, 시계, 시드는 꽃, 썩어가는 과일, 새 및 벌레와 같은 생명체들 간의 묘한 어울림이 있다.
바니타스는 또한 인생의 실수와 잘못된 방향과 가치도 꼬집는다. 십계명에 따라 종교적 인물의 그림을 기피했던 개신교인들에게 바니타스는 영적, 도덕적 지침으로도 여겨졌다. 바니타스가 21세기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물질의 헛됨과 영생의 중요성 만은 아닌 것 같다. 당신이 죽고 싶을만큼 괴로운 순간과 경험도, 지나가고 보면 다 헛되고 헛된, 별 거 아닌 인간사의 허상일 수 있지 않을까?
김홍도는 휴머니스트였다. 그의 이름은 논어의 ‘인능홍도(人能弘道), 비도홍인(非道弘人)’ 에서 딴 것이다. 이는 `사람이 도(道)를 넓히는 것이요, 도(道)가 사람을 넓히는 것은 아니다`는 의미로 인간의 존엄성을 뜻한다.
더불어 김홍도의 자, '사능'은 맹자의 ‘무항산이유항심자 (無恒産而有恒心者), 유사위능(惟士爲能)’, ‘일정한 재산이 없으면서도 한결같은 마음을 갖는 것은 오직 선비만이 가능하다’ 에서 유래한다.
물질에 좌우되지 않는 참다운 선비, 뛰어난 인격자가 되고자 한 김홍도에게 감각의 향유는 자족한 삶의 중요한 원천이 아니었을까.
언뜻 바니타스의 해골은 찰나적 감각의 무상함을 깨우치는 것 같으나, 역설적으로 현대인들이 무시하는 삶 속 감각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오늘이 삶의 마지막인 것처럼, 내 앞의 풍경과 날씨와 음식이 생애 첫 경험인 것처럼, 잠시만 감각에 집중하여 음미하면 어떨까. 그것만으로 우리의 하루는 충분히 행복한 것 아닐까.
1950년대 미국 심리학자 해리 할로 (Harry Harlow, 1905-1981)의 실험은 아기 원숭이가 먹이를 주는 철사 원숭이 보다 그렇지 않은 털로 만든 엄마 원숭이를 더 좋아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생명체에게 생존보다 감각이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힌 의미심장한 결과였다.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긍정적인 감각들을 자주 음미하는 고령자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삶의 만족도가 훨씬 높았다. 이는 건강 상태와 무관했다. 아무리 건강해도 풍부한 감각을 즐기지 못하는 이에게 삶은 충분히 행복하지 못했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감각은 둘러보면 무상으로 널려있다. 진정한 감각의 선물은 스마트폰 속이 아닌 자연과 사람, 예술과 일상에의 관심으로부터 찾아진다.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니 찬 공기가 얼굴을 시원하게 스친다. 빌딩 사이의 햇살이 적당히 따사하고 상쾌하다. 올 봄에는 고양이와 나비, 꽃들이 더 자주 눈에 띌 것 같다.
글 | 임성윤 교수
출처 : 마음건강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