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三國遺事)>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함께 현존하는 우리 고대(古代) 사적(史籍)의 쌍벽으로 일컬어져 온다.
<삼국사기>는 왕명(王命)에 의하여 사관(史官)이 저술한 정사(正史)로서, 체재(體裁)가 정연하고 문사(文辭)가 유창하고 화려하다. 이에 비하여 <삼국유사>는 선사(禪師) 한 개인의 손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야사(野史)로서, 체재가 짜여지지 못했고 문사 또한 박잡(駁雜)하다 하겠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많은 값어치를 지니고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신라·백제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史書)이지만, 그 밖에 고조선·기자 및 위만조선을 비롯하여 가락 등의 역사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고조선에 관한 서술은 오늘날 우리들로 하여금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할 수 있고, 단군을 국조(國祖)로 받드는 배달 민족의 긍지를 갖게 해 주었다. 만약 이 기록이 없었던들 우리는 삼국 시대 이전에 우리 역사를 중국의 사료(史料)인 <삼국지(三國志)>의 동이전(東夷傳)에 겨우 의존하는 초라함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는 당시의 사서 찬술이 규범에는 벗어나는 체재의 부정연(不整然)과 내용의 탄괴(誕怪)·잡다(雜多)함이 오히려 오늘날 이 책을 더욱 귀한 재보(財寶)로 여기지 않을 수 없는 소이(所以)가 되고 있다.
우선 <삼국유사>에는 단군 신화를 비롯한 많은 신화와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실로 <삼국유사>는 우리의 신화와 원형적 옛 전설의 모습을 알게 하는 유일한 책으로 가위 설화 문학(說話文學)의 보고라 할 만하다. 게다가 이 땅 최고(最古)의 정형 시가(定型詩歌)인 향가(鄕歌) 14수가 실려 있어 <균여전(均與傳)>에 전하는 11수와 함께 주옥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으니 국문학 관계로는 사서 이상의 귀한 보전(寶典)이 되고 있다. 수록한 향가의 수는 비록 많은 것이 못 되지만 향가를 집대성한 책으로 알려진 <삼대목(三代目)>이 전하지 않는 지금, <삼국유사>의 문학사적 가치는 실로 절대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밖에도 <삼국사기>에는 빠졌거나 또는 고의로 빼 버린 많은 사실들이 수록되어 있다. 불교에 관한 풍부한 자료와 신앙 사상·민속·일화 등 다방면에 걸친 내용은 모두가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물론 저자가 사관이 아닌 승려의 신분으로서 이 같은 책을 저술함에 있어, 더러는 인용서와 그 내용이 같지 않은 것도 있고, 잘못 전해져 오는 것을 그대로 수집·수록한 것도 없지 않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 책 자체가 그 서명(書名)이 말하듯이 일사 유문적(逸事遺聞的)인 것이기 때문에 따르는 불가피한 것이라 하겠다.
이 책의 저자 일연(一然)은 고려 희종(熙宗) 2년(1206)에 경산(慶山)에서 출생했다. 속성(俗姓)은 김씨요, 이름은 경명(景明), 자는 회연(晦然)이다. 9세 때 출가하여 남해(南海)의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 수도 생활을 했다. 22세 때에 선과(禪科)에 급제하고 54세 때에 대선사가 되었다. 78세 때 충렬왕(忠烈王)이 승지(承旨)를 보내어 왕명으로 국사의 예를 갖추고자 하였으나, 굳이 이를 사양하므로 다시 근친의 장군을 보내어 국존(國尊)으로 책봉하고 궁내로 맞이해 들였다. 그러나 그는 궁성에 있기를 싫어하여 노모의 병을 빙자하고 구산(舊山)으로 내려갔다. 84세 되던 1289년 7월 8일 제자로 하여금 북을 치게 하고 자기는 의자에 앉아 여러 승려와 더불어 담소자약(談笑自若)하게 선문답을 하다가 갑자기 손으로 금강인(金剛印)을 맺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높은 덕과 깊은 학문으로 왕의 극진한 존경을 받았으며 많은 사람들의 추상의 대상이었다 한다.
비문에 의하면 그의 저·편저로는, 어록 2권, 게송 잡서(偈頌雜書) 3권, 조동 오위(曹洞五位) 2권, 조도(祖圖) 2권,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3권, 제승 법수(諸乘法數) 7권, 조정 사원(祖庭事苑) 30권, 선문 점송 사원(禪門拈頌事苑) 30권 등 불서(佛書) 80권이 넘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는 것이 거의 없고, 어찌 보면 그로서는 희작(戱作)이라 할 수 있어 비문에도 적혀 있지 않은 <삼국유사>만이 유저(遺著)로 전해지고 있다.
<삼국유사>는 모두 5권으로 다음과 같은 체재로 되어 있다.
제 1권: 왕력 제 1(신라·고구려·백제·가락 및 후삼국의 연대표), 기이 제 1(고조선 이하 삼한·부여·고구려와 통일 삼국 이전의 신라의 유사)
제 2권: 기이 제 2(신라 문무왕 이후 통일 신라 시대를 비롯하여 백제·후백제 등에 관한 약간의 유사와 가락국에 관한 유사)
제 3권: 흥법 제 3(불교 전래의 유래 및 고승의 행적), 탑상 제 4(사기와 탑·불상 등에얽힌 승전과 사탑의 유레에 관한 기록)
제 4권: 의해 제 5(고승들의 행적)
제 5권: 신주 제 6(이승들의 전기), 감통 제 7(영험·감응의 영이한 기록), 피은 제 8(은둔한 일승들의 기록, 효선 제 9(효행·선행·미담의 기록)
<삼국유사>의 간행 연대는 확실히 알 길이 없으나 대체로 충렬왕 8년 전후, 즉 서기 1281∼1283년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삼국유사>의 고판본으로는 중종 정덕본과 그 이전에 된 듯한 판각의 영본이 있고, 시간본으로는 일본 토교 대학본, 조선 사학회본, 계명 구락부에서 간행한 육당의 교감본과 또 육당의 증보본이 있다. 그 밖에 안순암 수택의 정덕본을 영인한 일본 교토 대학본과 고전 간행회본이 있다.
이 책의 번역은 중종 임신본(壬申本)을 원본으로 했다. 때문에 흔히 유행되는 육당 증보본과는 간혹 틀리는 곳이 있을 것이다. 원문이 너무도 난해한 구절이 많아 역자로서는 힘에 겨운 작업이었다. 특히 향가의 번역은 더구나 완벽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내 딴에는 충실히 다루려고 애썼다. 이번에 판을 바꾸어 내면서 먼저 판 번역에서 잘못된 부분이나 문맥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은 바로잡아 독자의 이해를 돕도록 하였다. 삼가 제언(諸彦)의 질정(叱正)이 있으시길 빈다.
대체로 옛날 성인(聖人)은 예절과 음악을 가지고 나라를 세웠고, 인(仁)과 의(義)를 가지고 백성들을 가르쳤다. 때문에 괴상한 일이나 힘이나 어지러운 일, 귀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왕(帝王)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부명(符命)을 얻고 도록(圖록)을 받게 된다. 때문에 보통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뒤에라야 큰 변의 틈을 타서 대기(大器)를 잡아 대업을 이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하수(河水)에서 그림이 나왔고, 낙수(洛水)에서 글이 나와서 이로써 성인(聖人)이 일어났던 것이다. 무지개가 신모(神母)의 몸을 두르더니 복희(伏羲)를 낳고, 용이 여등(女登)에게 교접하더니 염제(炎帝)를 낳았다. 황아(皇娥)가 궁상(窮桑)이라는 들판에서 노는데 자칭 백제(白帝)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동(神童)이 와서 황아와 교접하여 소호(少昊)를 낳았다. 간적(簡狄)은 알[卵] 하나를 삼키더니 설[契]를 낳고 강원(姜嫄)은 한 거인(巨人)의 발자취를 밟고서 기(充)를 낳았다. 요(堯)의 어머니는 잉태한 지 14개월이 된 뒤에 요(堯)를 낳았고, 패공(沛公)의 어머니는 용(龍)과 큰 연못에서 교접해 패공을 낳았다. 이 뒤로도 이런 일이 많지만 여기에선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이렇게 볼 때 삼국(三國)의 시조가 모두 신비스러운 데서 나왔다고 하는 것이 어찌 괴이할 것이 있으랴. 이 기이편을 이 책의 첫머리에 싣는 것은 그 뜻이 실로 여기에 있다.
고조선(古朝鮮) 왕검조선(王儉朝鮮)
<위서(魏書)>에 이렇게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 왕검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阿斯達; 경經에는 무엽산無葉山이라 하고 또는 백악白岳이라고도 하는데 백주白州에 있었다. 혹은 또 개성開城 동쪽에 있다고도 한다. 이는 바로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고 불렀으니 이것은 고(高)와 같은 시기였다."
또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환인(桓因; 제석帝釋을말함)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란 이가 있었는데 자주 천하를 차지할 뜻을 두어 사람이 사는 세상을 탐내고 있었다. 그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산(三位太伯山)을 내려다보니 인간들을 널리 이롭게 해 줄 만했다. 이에 환인은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환웅(桓雄)에게 주어 인간(人間)의 세계를 다스리게 했다. 환웅(桓雄)은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마루턱(곧 태백산太白山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에 있는 신단수(神檀樹) 밑에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고, 이 분을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 이른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수명(壽命)·질병(疾病)·형벌(刑罰)·선악(善惡) 등을 주관하고, 모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敎化)했다. 이때 범 한 마리와 곰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항상 신웅(神雄), 즉 환웅에게 빌어 사람이 되어지기를 원했다. 이때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했다.
이에 곰과 범이 이것을 받아서 먹고 삼칠일(21일) 동안 조심했더니 곰은 여자의 몸으로 변했으나 범은 조심을 잘못해서 사람의 몸으로 변하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혼인해서 같이 살 사람이 없으므로 날마다 단수(壇樹) 밑에서 아기 배기를 축원했다. 환웅이 잠시 거짓 변하여 그와 혼인했더니 이내 잉태해서 아들을 낳았다. 그 아기의 이름을 단군 왕검(檀君王儉)이라 한 것이다. 단군 왕검은 당고(唐高)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庚寅年; 요堯가 즉위한 원년元年은 무진戊辰년이다. 그러니 50년은 정사丁巳요, 경인庚寅은 아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닌지 의심스럽다)에 평양성(平壤城; 지금의 서경西京)에 도읍하여 비로소 조선(朝鮮)이라고 불렀다. 또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옮기더니 궁홀산(弓忽山; 일명 방홀산方忽山)이라고도 하고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그는 1,500년 동안 여기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나라 호왕(虎王)이 즉위한 기묘(己卯)년에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했다. 이에 단군(檀君)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서 아사달(阿斯達)에 숨어서 산신(山神)이 되니, 나이는 1908세였다고 한다."
당나라 <배구전(裴矩傳)>에는 이렇게 전한다. "고려(高麗)는 원래 고죽국(孤竹國; 지금의 해주海州)이었다. 주(周)나라에서 기자(箕子)를 봉해 줌으로 해서 조선(朝鮮)이라 했다. 한(漢)나라에서는 세 군(郡)으로 나누어 설치하였으니 이것은 곧 현토(玄토)·낙랑(樂浪)·대방(帶方;북대방北帶方)이다."
<통전(通典)>에도 역시 이 말과 같다(한서漢書에는 진번眞蕃·임둔臨屯·낙랑樂浪·현토玄토의 네 군郡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세 군郡으로 되어 있고, 그 이름도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일까?).
위만조선(魏(衛)滿朝鮮)
<전한서(前漢書)>의 조선전(朝鮮傳)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다. "맨 처음 연(燕)나라 때부터 진번(眞蕃)·조선(朝鮮; 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전국戰國 시대에 연燕나라가 처음으로 이 땅을 침략해서 차지했다고 한다)을 침략해서 이를 차지하고, 관리들을 두어 변방(邊方)의 요새(要塞)를 쌓았다. 그 뒤에 진(秦)이 연(燕)을 멸망시키자 이 땅을 요동군(遼東郡) 변방에 소속시켰다. 한(漢)나라가 일어나자 이 땅이 너무 멀어 지킬 수 없다 하여 다시 요동의 옛날 요새(要塞)를 수리해서 쌓고 패수(浿水)로 경계를 삼아(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낙랑군樂浪郡에 있다고 했다) 연(燕)나라에 소속시켰다.
연(燕)나라 왕 노관(盧관)이 한(漢)나라를 배반하고 흉노(匈奴)에게로 들어가니,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은 망명(亡命)해서 무리 1,000여 명을 모아 요동(遼東)의 요새지를 넘어 도망하여 패수(浿水)를 건넜다. 여기에서 진(秦)나라의 옛 빈 터전인 상하(上下)의 변방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차츰 진번(眞蕃)·조선(朝鮮)의 오랑캐들과 또 옛날에 연(燕)과 제(齊)에서 망명(亡命)해 온 자들을 자기에게 소속시켜 왕이 되어 왕검(王儉; 이기李寄는 땅이름이라 했고, 신찬臣瓚은 말하기를 왕검성王儉城은 낙랑군樂浪郡의 패수浿水 동쪽에 있다고 했다)에 도읍했다. 위만(衛滿)은 군사의 위력(威力)으로 그 이웃의 조그만 읍(邑)들을 침략하여 항복시켰다. 이에 진번(眞蕃)과 임둔(臨屯)이 모두 복종해 와서 그에게 예속되니 사방이 수천 리나 되었다. 위만은 아들에게 왕위를 전하고 손자 우거(右渠; 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위만의 손자 이름이 우거右渠라고 했다)에게 이르렀다.
진번과 진국(辰國)이 한나라에 글을 올려 천자(天子)를 뵙고자 했으나 우거(右渠)는 길을 가로막고 지나지 못하게 했다(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진국辰國은 진한辰韓이라고 했다). 원봉(元封) 2년에 한나라에서는 섭하(涉何)를 보내어 우거를 타일렀지만 우거는 끝내 명령을 듣지 않았다. 섭하(涉何)는 그곳을 떠나 국경에 이르러 패수에 당도하자 말을 모으는 구종(驅從)을 시켜서 자기를 호송(護送)하러 온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 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장長은 섭하涉何를 호송護送하는 자의 이름이라고 했다)을 찔러 죽였다. 그리고는 곧 패수를 건너 달려서 변경 요새를 넘어 자기 나라에 돌아가 이 사실을 보고했다.
한나라 천자는 섭하를 임명하여 요동의 동부(東部) 도위(都尉)를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불의에 그를 쳐 죽였다. 천자는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보내서 제(齊)에서 배를 타고 발해(渤海)로 건너가 조선을 치게 하니 병력은 5만이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체)는 요동으로 나와서 우거(右渠)를 쳤다. 우거는 지세가 험한 곳에 군사를 내어 그를 막았다. 누선장군(樓船將軍)은 제(齊)의 군사 7,000명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성(王儉城)에 이르렀다. 이때 우거는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누선(樓船)의 군사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정탐해서 알고 곧 나가서 누선을 공격하니 누선이 패해 달아났다.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은 군사들을 잃고 산 속으로 도망해서 죽음을 면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체)도 조선의 패수 서쪽을 쳤지만 깨뜨리지 못했다.
천자는 누선장군과 좌장군의 형세가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이에 위산(胃散)을 시켜 군병(軍兵)의 위력을 가지고 가서 우거를 타이르게 했다. 우거는 항복하기를 청하고 태자(太子)를 보내어 말[馬]을 바치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1만여 명이나 되는 병력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패수를 건너려 하는데 사자(使者)인 위산과 좌장군은 혹시 변을 일으킬까 의심하여 태자에게 일렀다. '이미 항복한 터이니 병기(兵器)는 가지고 오지 마시오.' 태자도 사자인 위산이 혹 자기를 속여 해치지 않을까 의심하여 마침내는 패수를 건너지 않고 군사를 데리고 돌아갔다. 이 사실을 천자에게 보고하자 천자는 위산을 목베었다. 좌장군(左將軍)은 패수 상류에 있는 조선 군사를 깨뜨리고 바로 전진하여 왕검성 밑에까지 이르러 성의 서북쪽을 포위했다. 누선장군도 역시 왕검성 밑으로 와서 군사를 합쳐 성 남쪽에 주둔했다. 우거가 굳게 성을 지켜 몇 달이 지나도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천자는 이 싸움이 오래 되어도 끝이 나지 않자 옛날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시켜서 치게 하고, 모든 일을 편의에 의해서 처리하게 했다. 공손수는 우선 누선장군을 묶어 놓고 그 군사를 합쳐서 좌장군과 함께 급히 조선을 공격했다. 이때 조선의 상(相) 노인(路人)과 상(相) 한도(韓陶)와 또 이계(尼谿)의 상(相) 삼(參)과 장군(將軍) 왕겹(王겹; 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이계尼谿는 지명地名으로 이들은 모두 네 명名이라고 했다)은 서로 의논하여 항복하려 했으나 왕은 이 말을 좇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한도(韓陶; 음陰)와 왕겹(王겹)은 모두 도망해서 한나라에 항복했고 노인은 도중에서 죽었다. 원봉(元封) 3년 여름에 이계(尼谿)의 상(相) 삼(參)은 사람들을 시켜서 왕 우거를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했다. 하지만, 왕검성은 아직도 함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거의 대신(大臣)인 성기(成己)가 또 자기 나라를 배반했다. 좌장군(左將軍)은 우거의 아들 장(長)과 노인(路人)의 아들 최(最)로 하여금 자기들의 백성을 타이르고 성기를 죽이도록 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임둔·낙랑·현토(玄토)의 네 군(郡)으로 삼았다.
마한(馬韓)
위지(魏志)에 이렇게 말했다. "위만(魏滿)이 조선(朝鮮)을 공격하자 조선왕(朝鮮王) 준(準)은 궁인(宮人)과 좌우 사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서쪽 한(漢)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고 했다."
또 견훤(甄萱)이 고려(高麗) 태조(太祖)에게 올린 글에, "옛적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뒤를 이어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났으며, 백제(百濟)는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최치원(崔致遠)은 이렇게 말했다. "마한은 고구려(高句麗)이고, 진한(辰韓)은 신라(新羅)다."(<삼국사기三國史記> 본기本紀에 의하면 신라新羅는 먼저 갑자甲子년에 일어났고, 고구려高句麗는 그 뒤 갑신甲申년에 일어났다고 했다. 여기에 말한 것은 조선왕朝鮮王 준準을 가리킨 것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동명왕東明王이 일어날 때에 마한馬韓까지 차지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고구려高句麗를 마한馬韓이라고 부른다. 지금 사람들은 혹 금마산金馬山이 있다고 해서 마한馬韓을 백제百濟라고 하지만 이것은 대개 잘못된 말이다. 고구려高句麗 땅에는 본래 읍산邑山이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마한馬韓이라 한 것이다)
사이(四夷)·구이(九夷)·구한(九韓)·예맥(穢貊)이 있는데, <주례(周禮)>에 직방씨(職方氏)가 사이(四夷)와 구맥(九貊)을 관장(管掌)했다고 한 것은 동이(東夷)의 종족이니 곧 구이(九夷)를 말한 것이다.
<삼국사(三國史)>에는 이렇게 씌었다. "명주(溟州)는 옛날의 예국(穢國)이었다. 야인(野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穢王)의 도장을 얻어서 바쳤다. 또 춘주(春州)는 옛날의 우수주(牛首州)인데 곧 옛날의 맥국(麥麴)이다. 또 혹은 지금의 삭주(朔州)가 바로 맥국(貊國)이다. 혹은 평양성(平壤城)이 맥국이다."
<전한서(前漢書)>에 이렇게 말했다.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 기해(己亥)년 두 외부(外府)를 두었다. 이것은 조선(朝鮮)의 옛 땅인 평나(平那)와 현토군(玄토郡) 등을 평주도독부(平州都督府)로 삼고, 임둔(臨屯) ·낙랑(樂浪) 등 두 군(郡)의 땅에 동부도위부(東部都尉府)를 둔 것을 말함이다."(내가 생각하기에 조선전朝鮮傳에는 진번眞蕃·현토玄토·임둔臨屯·낙랑樂浪 등 네 군郡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이 글에는 평나平那가 있고 진번眞蕃이 없으니 대개 한 지방을 두 이름으로 불렀던 것 같다)
칠십이국(七十二國)
<통전(通典)>에 이렇게 말했다. "조선의 유민(遺民)은 모두 70여 나라로 나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땅이 사방(四方) 백 리(百里)이다."
또 <후한서(後漢書)>에는 "서한(西漢)이 조선의 옛 땅에 처음으로 네 군(郡)을 두었다가 뒤에 두 부(府)를 두었다. 법령(法令)이 차츰 번거로워지자 이것을 78개의 나라로 나누니, 이들은 각각 만호(萬戶)였다"했다(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어 54개의 조그만 읍邑을 가지고 있었는데 모두 나라라고 불렀다. 진한辰韓은 동쪽에 있고 12개의 작은 읍邑을 차지했는데 모두 나라라고 했다. 변한卞韓은 남쪽에 있어 역시 12개의 작은 읍邑을 차지했는데 이들도 저마다 나라라고 일컬었다).
낙랑국(樂浪國)
전한(前漢) 때 처음으로 낙랑군(樂浪郡)을 두었다. 응소(應邵)는 말하기를 이것을 "고조선국(古朝鮮國)"이라 했다.
<신당서(新唐書)> 주(注)에, "평양성(平壤城)은 옛 한(漢)나라의 낙랑군(樂浪郡)이다"했다.
<국사(國史)>에는 이런 말이 있다. "혁거세(赫居世) 30년에 낙랑(樂浪) 사람들이 신라(新羅)에 항복했다. 또 제3대 노례왕(弩禮王) 4년에 고구려(高句麗)의 제3대 무휼왕(無恤王)이 낙랑(樂浪)을 멸망시키니 그 나라 사람들은 대방(帶方; 북대방北帶方)과 함께 신라에 투항해 왔다. 또 무휼왕(無恤王) 27년에 광호제(光虎帝)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郡縣)을 삼으니, 살수(薩水) 이남의 땅은 한(漢)나라에 소속되었다."(이상의 여러 글에 의하면 낙랑樂浪이 곧 평양성平壤城이란 것이 마땅하다. 혹은 말하기를, 낙랑樂浪의 중두산中頭山 밑이 말갈靺鞨과의 경계이고, 살수薩水는 지금의 대동강大洞江이라고 한다. 어느 말이 옳은 지 알 수가 없다)
또한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의 말에는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靺鞨)이 있다"고 했다.
이는 아마도 옛날 한(漢)나라 때 낙랑군에 소속되었던 현(縣)일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역시 이곳을 낙랑(樂浪)이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 고려(高麗)에서도 또한 여기에 따라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이라 불렀다. 또 태조(太祖)가 그 딸을 김부(金傅)에게 시집보내면서 역시 낙랑공주(樂浪公主)라 불렀다.
북대방(北帶方)
북대방(北帶方)은 본래 죽담성(竹覃城)이다. 신라 노례왕(弩禮王) 4년에 대방(帶方) 사람들이 낙랑(樂浪) 사람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해 왔다(이것은 모두 전한前漢 때에 설치한 두 군郡의 이름이다. 그 후에 참람되이 나라라고 불러 오다가 이때에 와서 항복한 것이다).
남대방(南帶方)
조위(曹魏)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이라 한 것이다.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年間에 마한馬韓 남쪽의 황무지를 대방군帶方郡으로 삼았다. 왜倭와 한漢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말갈(靺鞨; 혹은 물길勿吉)과 발해(渤海)
<통전(通典)>에 이렇게 말했다. "발해(渤海)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이다. 그 추장(酋長) 조영(祚榮)에 이르러서 나라를 세우고 국호(國號)를 스스로 진단(震旦)이라고 했다. 선천(先天) 연간(年間; 현종玄宗의 임자년壬子年)에 비로소 말갈(靺鞨)이라는 명칭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고 일컬었다. 개원(開元) 7년(己未)에 조영(祚榮)이 죽자, 그 시호(諡號)를 고왕(高王)이라 했다. 세자(世子)가 대(代)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명황(明皇)은 그를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했다. 사사로이 연호를 고치고 드디어 해동(海東)의 큰 나라가 되었다. 그 땅에는 오경(五京)·십오부(十五府)·육십이주(六十二州)가 있었다. 후당(後唐) 천성(天成) 초년에 거란(契丹)이 이것을 쳐서 깨쳤다. 그 뒤로는 마침내 거란에게 지배를 받게 되었다."(<삼국사三國史>에는 이렇게 말했다. "의봉儀鳳 3年, 고종高宗 무인년戊寅年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그 여당餘黨을 모아 북으로 태백산太伯山 밑에 의지해서 국호를 발해渤海라고 했다. 개원開元 20年 경에 당唐의 명황明皇이 장수를 보내서 발해渤海를 토벌했다. 또 성덕왕聖德王 32年, 현종玄宗 갑술甲戌년에 발해渤海·말갈靺鞨이 바다를 건너 당唐나라 등주登州를 침범하자 현종玄宗은 이를 쳤다." 또 <신라고기新羅古記>에 이런 말이 있다. "고구려高句麗의 구장舊將 조영祚榮의 성姓은 대씨大氏이다. 그는 남은 군사를 모아 태백산太伯山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발해渤海라고 했다." 위의 여러 글을 상고하건대 발해渤海는 바로 말갈靺鞨의 별종別種이다. 다만 그 갈라지고 합한 것이 서로 같지 않을 뿐이다. 또 <지장도指掌圖>를 상고해 보면 발해渤海는 만리장성萬里長城 동북東北 모퉁이 밖에 있었다)
가탐(賈眈)의 <군국지(郡國志)>에는, "발해국(渤海國)의 압록(鴨綠) ·남해(南海) ·부여(扶餘) ·추성(추城) 등 사부(四府)는 모두 고구려(高句麗)의 옛땅이었다. 신라(新羅) 천장군(泉井郡; <지리지地理志>에는 삭주朔州의 영현領縣에 천정군泉井郡이 있었으니 지금의 용주湧州이다)에서 추성부(추城府)에 이르기까지 도합 39역(三十九驛)이 있다"고 하였다. 또 <삼국사(三國史)>에는 "백제(百濟)의 말년에 발해·말갈·신라가 백제의 땅을 나누어 가졌다"고 했다(이 말에 의하면 발해는 또 나뉘어서 두 나라가 된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북쪽에는 말갈이 있고 남쪽에는 왜인(倭人)이 있고, 서쪽에는 백제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나라의 해가 된다"고 했고, 또 "말갈은 땅이 아슬라주(阿瑟羅州)에 연접되어 있다"고 했다.
<동명기(東明記)>에는, "졸본성(卒本城)은 땅이 말갈(혹은 지금의 동진東眞이라 함)에 연접되어 있다. 신라의 제6대 지마왕(祗摩王) 14년(丑乙)에, 말갈의 군사가 북쪽 국경으로 크게 들어와 대령(大嶺)의 성책(城柵)을 습격하고 이하(泥河)로 지나갔다"고 했다.
<후위서(後魏書)>에는, "말갈은 바로 물길(勿吉)이다"고 했고, <지장도(指掌圖)>에는, "읍루(읍婁)와 물길(勿吉)은 다 숙신(肅愼)이다"했다.
흑수(黑水)와 옥저(沃沮)에 대해서는 동파(東坡)의 <지장도(指掌圖)>를 보면 "진한(辰韓) 북쪽에 남북의 흑수(黑水)가 있다"고 했다. 상고하건대, 동명제(東明帝)는 왕위(王位)에 선 지 10년만에 북옥저(北沃沮)를 멸망시켰고, 온조왕(溫祚王) 42년에 남옥저(南沃沮)의 20여 집이 신라(新羅)에 투항(投降)했다. 또 혁거세(赫居世) 52년에 동옥저(東沃沮)가 신라에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고 했다. 그러니 동옥저(東沃沮)란 땅도 있었던 것이다.
<지장도(指掌圖)>에, "흑수(黑水)는 만리장성(萬里長城) 북쪽에 있고, 옥저는 만리장성 남쪽에 있다"고 했다.
이서국(伊西國)
노례왕(弩禮王) 14년에 이서국 사람이 와서 금성(金城)을 공격했다. 운문사(雲門寺)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제사납전기(諸寺納田記)에 보면, "정관(貞觀) 6년 임진(壬辰)에 이서군(伊西郡)의 금오촌(今오村) 영미사(零味寺)에서 밭을 바쳤다"고 했다. 금오촌은 지금 청도(淸道) 땅이니 청도군(淸道郡)이 바로 옛날의 이서군인 것이다.
오가야(五伽耶)
<가락국기駕洛國記>의 찬贊을 상고해 보면, 자줏빛 끈 하나가 내려와 둥근 알[난卵] 여섯 개를 내려 주었다. 이 중 다섯 개 알은 각 읍邑으로 돌아가고 한 개는 이 성城에 있어서 수로왕首露王이 되었고, 각 邑으로 돌아간 다섯 개는 각각 다섯 가야伽耶의 주인이 되었다 한다. 그러므로 금관국金官國이 이 다섯 개의 수에 들지 않은 것은 마땅하다. 그런데 <본조사략本朝史略>에는 금관金官까지 그 수에 넣고 창녕昌寧까지 더 기록했으니 잘못이다)
아라(阿羅; 야耶라고도 했다)·가야(伽耶; 지금의 함안咸安)·고령가야(古寧伽倻; 지금의 함녕咸寧)·대가야(大伽耶; 지금의 고령高靈)·성산가야(星山伽耶; 지금의 경산京山 혹은 벽진碧珍)·소가야(小伽耶; 지금의 고성固城)이다.
또 본조사략(本朝史略)에는, "태조(太祖)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에 오가야(五伽耶)의 이름을 고쳤다. 즉 1은 금관(金官; 김해부金海府로 됨), 2는 고령(古寧; 지금의 가리현加利縣이 됨), 3은 비화(非火; 지금의 창녕昌寧이니, 고령高靈의 잘못인 듯 싶다)요, 나머지 둘은 아라(阿羅)와 성산(星山)이다"했다(위 주注와 같다. 성산星山은 혹 벽진가야碧珍伽耶라고도 한다).
북부여(北扶餘)
<고기(古記)>에 이렇게 말했다. "전한(前漢)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壬戌; 전 58) 4월 8일에 천제(天帝)가 흘승골성(訖升骨城; 대요大遼 의주醫州 지경에 있음)에 내려왔다. 오룡차(五龍車)를 타고 도읍을 정하여 왕이라 일컫고 국호를 북부여(北扶餘)라고 하고, 스스로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고 했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로 씨(氏)를 삼았다. 왕은 뒤에 상제(上帝)의 명령으로 도읍을 동부여(東扶餘)로 옮겼다. 동명제(東明帝)는 북부여(北扶餘)를 계승하여 일어나서 졸본(卒本州)에 도읍을 정하고 졸본부여(卒本扶餘)가 되었으니, 이것이 곧 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이다(아래에 보인다).
동부여(東扶餘)
북부여(北扶餘)의 왕인 해부루(解夫婁)의 대신(大臣)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천제(天帝)가 내려와서 말했다. "장차 내 자손을 시켜서 이곳에 나라를 세울 터이니 너는 다른 곳으로 피해 가도록 하라(이것은 동명왕東明王이 장차 일어날 조짐을 말함이다). 동해(東海) 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지니 왕도(王都)를 세울만 할 것이다." 이에 아란불(阿蘭弗)은 왕을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東扶餘)라 했다.
부루(夫婁)는 늙도록 자식이 없었다. 어느 날 산천(山川)에 제사를 지내어 후사(後嗣)를 구했는데, 이때 타고 가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는 서로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히 여기고 사람을 시켜 그 돌을 들추어 보니 거기에 어린애가 하나 있는데 모양이 금빛 개구리와 같았다. 왕은 기뻐하여 말했다. "이것은 필경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시는 것이로구나."
그 아이를 거두어 기르면서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했다. 차츰 자라자 태자(太子)로 삼았고 부루(夫婁)가 죽자 금와가 위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의 위를 태자 대소(帶素)에게 전했다.
지황(地皇) 3년 임오(壬午)에 이르러서 고구려왕(高句麗王) 무휼(無恤)이 이를 쳐서 대소를 죽이니 이것으로 나라가 없어졌다.
고구려(高句麗)
고구려(高句麗)는 곧 졸본부여(卒本扶餘)다. 혹은 말하기를 지금의 화주(和州), 또는 성주(成州)라고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잘못이다. 졸본주(卒本州)는 요동(遼東)의 경계에 있었다.
<국사(國史)> 고려본기(高麗本紀)에 이렇게 말했다. "시조(始祖)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성(姓)은 고씨(高氏)요,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이보다 앞서 북부여(北扶餘)의 왕 해부루(解夫婁)가 이미 동부여(東扶餘)로 피해 가고, 부루가 죽자 금와(金蛙)가 왕위를 이었다. 이때 금와는 태백산(太伯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여자 하나를 만나서 물으니 그 여자는 말하기를, '나는 하백(河伯)의 딸로서 이름을 유화(柳化)라고 합니다. 여러 동생들과 함께 물밖으로 나와서 노는데, 남자 하나가 오더니 자기는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고 하면서 나를 웅신산(熊神山) 밑 압록강(鴨綠江) 가의 집 속에 유인하여 남몰래 정을 통하고 가더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혼인한 것을 꾸짖어서, 드디어 이곳으로 귀양보냈습니다'" 했다. (<단군기檀君記>에는 "단군檀君이 서하西河의 하백河伯의 딸과 친하여 아들을 낳아서 부루夫婁라고 이름했다"고 했다. 지금 이 기록을 상고해 보면 해모수解慕漱가 하백河伯의 딸과 사사로이 통해서 주몽朱蒙을 낳았다고 했다. <단군기檀君記>에는,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夫婁라고 했다" 했으니 그렇다면, 부루夫婁와 주몽朱蒙은 배다른 형제일 것이다)
금와(金蛙)가 이상히 여겨 그녀를 방 속에 가두어 두었더니 햇빛이 방 속으로 비쳐 오는데, 그녀가 몸을 피하면 햇빛은 다시 쫓아와서 비쳤다. 이로 해서 태기가 있어 알[卵] 하나를 낳으니, 크기가 닷 되[五升]들이 만했다. 왕은 그것을 버려서 개와 돼지에게 주게 했으나 모두 먹지 않는다. 다시 길에 내다 버렸더니 소와 말이 그 알을 피해서 가고 들에 내다 버리니 새와 짐승들이 알을 덮어 주었다. 왕이 이것을 쪼개 보려고 했으나 아무리 해도 쪼개지지 않아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다. 어머니가 이 알을 천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놓아 두었더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과 외모가 영특하고 기이했다. 나이 겨우 일곱 살에 기골이 뛰어나서 범인과 달랐다.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는데 백 번 쏘면 백 번 다 맞히었다. 나라 풍속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朱蒙)이라고 하므로 그 아이를 주몽이라 이름했다.
금왕에게는 아들 일곱이 있는데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으니 재주가 주몽을 따르지 못했다. 장자(長子) 대소(帶素)가 왕에게 말했다. '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식이 아닙니다. 만일 일찍 없애지 않는다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주몽을 시켜 말을 기르게 하니 주몽은 좋은 말을 알아보아 적게 먹여서 여위게 기르고, 둔한 말을 잘 먹여서 살찌게 했다. 이에 왕은,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왕의 여러 아들과 신하들이 주몽을 장차 죽일 계획을 하니 주몽의 어머니가 이 기미를 알고 말했다. '지금 나라 안 사람들이 너를 해치려고 하는데, 네 재주와 지략(智略)을 가지고 어디를 가면 못 살겠느냐. 빨리 이곳을 떠나도록 해라.' 이에 주몽은 오이(烏伊) 등 세 사람을 벗으로 삼아 엄수(淹水)에 이르러 물을 보고 말했다.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손자이다. 오늘 도망해 가는데 뒤쫓는 자들이 거의 따라오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느냐.' 말을 마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주어 건너게 하고, 모두 건너자 이내 풀어 버려 뒤쫓아오던 기병(騎兵)은 건너지 못했다. 이에 주몽은 졸본주(현토군玄토郡과의 경계)에 이르러 도읍을 정했다. 그러나 미처 궁실(宮室)을 세울 겨를이 없어서 비류수(沸流水) 위에 집을 짓고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고(高)로 씨(氏)를 삼았다(본성本姓은 해解였다. 그러나 지금 천제天帝의 아들을 햇빛을 받아 낳았다 하여 스스로 고高로 씨氏를 삼은 것이다). 이때의 나이 12세로서, 한(漢)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 갑신(甲申)에 즉위하여 왕이라 일컬었다. 고구려(高句麗)가 제일 융성하던 때는 21만 508호나 되었다."
주림전(珠琳傳) 제21권에 이렇게 실려 있다. "옛날 영품리왕(寧稟離王)의 시비(侍婢)가 임신했는데, 상(相) 보는 자가 점을 쳐 말하기를, '귀하게 되어 왕이 될 것입니다'고 하자 왕은 '내 아들이 아니니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했다. 시비(侍婢)가 말하기를 '무슨 이상한 기운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더니 임신한 것입니다'했다. 드디어 아이를 낳자 왕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돼지우리에 내다 버리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 보호해 주고, 마구간에 내다 버리니 말이 젖을 먹여서 죽지 않게 해 주었다. 이 아이가 자라서 마침내 부여(扶餘)의 왕이 되었다."(이것은 동명제東明帝가 졸본부여卒本扶餘의 왕이 된 것을 말한 것이다. 이 졸본부여卒本扶餘는 역시 북부여北扶餘의 딴 도읍이다. 때문에 부여왕扶餘王이라 이른 것이다. 영품리寧稟離는 부루왕夫婁王의 다른 칭호이다)
변한(卞韓)과 백제(百濟; 또는 南扶餘라고도 하는데 곧 泗차(비)城이다)
신라(新羅)의 시조(始祖) 혁거세(赫居世)가 즉위한 19년 임오(壬午; 前 39)에 변한(卞韓) 사람이 나라를 가지고 항복해 왔다.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에는 모두 "변한(卞韓)의 후손들이 낙랑(樂浪) 땅에 있었다"했고, <후한서(後漢書)>에는, "변한(卞韓)은 남쪽에 있고,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고, 진한(辰韓)은 동쪽에 있다"고 했다.
최치원(崔致遠)은 "변한은 바로 백제(百濟)"라고 했다.
본기(本紀)를 상고해 본다면, 온조왕(溫祚王)이 일어나서 나라를 세운 것은 홍가(鴻嘉) 4년 갑진(甲辰; 前 17)의 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혁거세(赫居世)나 동명왕(東明王) 시대보다 40여 년이나 뒷 일이 된다. 그런데 <당서(唐書)>에, 변한(卞韓)의 후손들이 낙랑(樂浪) 땅에 살았다고 한 것은 온조왕(溫祚王)의 계통이 동명왕(東明王)에게서 나온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혹시 어떤 사람이 낙랑에서 나서 변한(卞韓)에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 등과 대치한 일이 온조왕 이전에 있었던 모양이며, 그 도읍한 곳이 낙랑 북쪽에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구룡산(九龍山)을 잘못 알고 역시 변나산(卞那山)이라고 불렀던 까닭에 고구려(高句麗)를 가지고 변한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대개 잘못일 것이다. 마땅히 옛날 현인(賢人)의 말을 좇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백제 땅에도 변산(卞山)이 있었기 때문에 변한이라 하는 것이다. 백제가 전성(全盛)했을 때는 호수가 15만 2,300이나 되었다.
진한(辰韓; 진한秦韓이라고도 했다)
<후한서(後漢書)>에 이렇게 말했다. "진한(辰韓)의 늙은이가 말하기를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한국(韓國)에 오자 마한(馬韓)이 동쪽 경계의 땅을 베어 주었다. 그리고 서로 부르기를 도(徒)라고 하여, 마치 진(秦)나라 말에 가까웠다. 그런 때문에 혹은 이곳을 진한(秦韓)이라고 했다. 여기에는 12개의 조그마한 나라들이 있어 각각 1만호(萬戶)나 되는데 저마다 나라라고 일컬었다."
또 최치원(崔致遠)은 이렇게 말했다. "진한은 본래 연(燕)나라 사람이 피난해 와 있던 곳이다. 그런 때문에 탁수(탁水)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사는 읍(邑)과 마을을 사탁(沙탁)·점탁(漸탁)이라고 불렀다."(신라新羅 사람의 방언方言에 탁탁의 음音을 도道라고 했다. 때문에 지금도 혹 사량沙梁이라 하는데, 양梁을 도道라고도 읽는다)
신라(新羅) 전성기(全盛期)에는 서울에 17만 8,936호(戶), 1,369방(坊), 55리(里), 35개의 금입택(金入宅; 부윤富潤한 큰집을 말함)이 있었다. 이것은 남택(南宅)·북택(北宅)·우비소택(우比所宅)·본피택(本彼宅)·양택(梁宅)·지상택(池上宅; 본피부本彼部)·재매정택(財買井宅; 유신공庾信公의 조종祖宗)·북유택(北維宅)·남유택(南維宅; 반향사하방反香寺下坊)·대택(隊宅)·빈지택(賓支宅; 반향사反香寺 북쪽)·장사택(長沙宅)·상앵택(上櫻宅)·하앵택(下櫻宅)·수망택(水望宅)·천택(泉宅)·양상택(楊上宅; 양부梁部 남쪽)·한기택(漢岐宅; 법류사法流寺 남쪽)·비혈택(鼻穴宅; 위와 같음)·판적택(板積宅; 분황사상방芬皇寺上坊)·별교택(別敎宅; 내의 북쪽)·아남택(衙南宅)·금양종택(金梁宗宅; 양관사梁官寺 남쪽)·곡수택(曲水宅; 내의 북쪽)·유야택(柳也宅)·사하택(寺下宅)·사량택(沙梁宅)·정상택(井上宅)·이남택(里南宅; 우소택우所宅)·사내곡택(思內曲宅)·지택(池宅)·사상택(寺上宅; 대숙택大宿宅)·임상택(林上宅; 청룡사靑龍寺의 동쪽으로 못이 있음)·교남택(橋南宅)·항질택(巷叱宅; 본피부本彼部)·누상택(樓上宅)·이상택(里上宅)·명남택(椧南宅)·정하택(井下宅)이 있었다.
우사절유택(又四節遊宅)
봄에는 동야택(東野宅), 여름에는 곡량택(谷良宅), 가을에는 구지택(仇知宅), 겨울에는 가이택(加伊宅)에서 놀았다.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때에는 성 안에 초가집은 하나도 없고, 집의 처마와 담이 이웃집과 서로 연해 있었다. 또 노랫소리와 피리 부는 소리가 길거리에 가득 차서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왕(赫居世王)
진한(辰韓) 땅에는 옛날에 여섯 촌(村)이 있었다. 1은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이니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촌장(村長)은 알평(謁平)이니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瓢암峰)에 내려왔으니 이가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노례왕弩禮王 9년에 부部를 두어 급량부及梁部라고 했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940)에 중흥부中興部라고 이름을 고쳤다.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의 동촌東村이 여기에 소속된다).
2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이니, 촌장(村長)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에 형산(兄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沙梁部; 양梁은 도道라고 읽고 혹 탁탁으로도 쓴다. 그러나 역시 도道라고 읽는다)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 하여 구량벌(仇梁伐)·마등오(麻等烏)·도북(道北)·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여기에 소속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태조高麗太祖 때에 설치한 것이다. 아래도 이와 같다).
3은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이다. 촌장(村長)은 구(俱; 구仇라고도 씀) 예마(禮馬)이다. 처음에 이산(伊山; 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함)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부(漸梁(혹은 탁)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한다. 여기에는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소속된다.
4는 취산(자山) 진지촌(珍支村; 빈지賓之·빙지빙之라고도 한다)이다. 촌장(村長)은 지백호(智伯虎)로 처음에 화산(花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본피부 최씨(本彼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한다. 시파(柴杷) 등 동남촌(東南村)이 여기에 소속된다. 최치원(崔致遠)은 바로 본피부(本彼部) 사람이다. 지금은 황룡사(黃龍寺) 남쪽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 터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최후(崔侯)의 옛집임이 분명하다.
5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지금의 금강산金剛山 백율사栢栗寺 북쪽 산)이다. 촌장(村長)은 지타(祗타; 혹은 지타只他)이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다. 지금은 임천부(臨川部)라고 하는데 물이촌(勿伊村)·잉구미촌(仍仇미村)·궐곡(闕谷) 등 동북촌(東北村)이 여기에 소속되었다.
위의 글을 상고해 보건대, 이 여섯 부(部)의 조상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弩禮王; 윤리왕倫理王) 9년(32)에야 비로소 여섯 부(部)의 명칭을 고치고, 또 그들에게 여섯 성(姓)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는 중흥부(中興部)를 어머니로 삼고, 장복부(長福部)를 아버지, 임천부(臨川部)를 아들, 가덕군(加德郡)을 딸로 삼고 있다. 하지만 그 실상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元年) 임자(壬子; 前 69, 고본古本에는 건호建虎 원년元年이라 했고, 건원建元 3년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잘못이다) 3월 초하루에 상부(上部)의 조상들은 저마다 자제(子弟)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 의논했다. "우리들은 위로 임금이 없어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모두 방자하여 저 하고자 하는 대로 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서 임금을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에 그들이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가에 번갯빛처럼 이상한 기운이 땅에 닿도록 비치고 있다. 그리고 흰 말 한 마리가 땅에 굻어 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을 찾아가 조사해 보았더니 거기에는 자줏빛 알 한 개(혹은 푸른 큰 알이라고도 함)가 있다. 그러나 말은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알을 깨고서 어린 사내아이를 얻으니, 그는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 놀라 이상하게 여겨 그 아이를 동천(東泉; 동천사東泉寺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따라서 춤을 췄다. 이내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 이에 그 아이를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고 이름하고(이 혁거세赫居世는 필경 향언鄕言일 것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니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해설하는 자는 말하기를, "이는 서술성모西述聖母가 낳을 때의 일이다. 그런 때문에 중국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양한 말에, 어진 이를 낳아서 나라를 세웠다는 말이 있으니 바로 이 까닭이다"한다. 또 계룡계龍이 상서祥瑞를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어찌 서술성모西述聖母의 현신現身을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위호(位號)를 거슬감(居瑟邯)이라고 했다(혹은 거居西干이라고도 하니 그가 처음 입을 열 때에 스스로 말하기를, "알영거서간閼英居西干이 한번 일어났다"한 그 말로 인해서 일컬은 것이다. 이 뒤부터 모든 왕자王者의 존칭이 거서간居西干으로 되었다).
이에 당시 사람들은 다투어 치하하기를, "이제 천자(天子)가 이미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 있는 왕후(王后)를 찾아 배필을 삼아야 합니다"했다.
이날 사량리(沙梁里)에 있는 알영정(閼英井; 아리영정娥利英井이라고 함) 가에 계룡(鷄龍)이 나타나서 왼쪽 갈비에서 어린 계집애를 낳았다(혹은 용龍이 나타났다가 죽었는데 그 배를 가르고 계집애를 얻었다고 했다). 얼굴과 모습이 매우 고왔으나 입술이 마치 닭의 입부리와 같았다. 이에 월성(月城) 북쪽에 있는 냇물에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떨어졌다. 이 일 대문에 그 내를 발천(撥川)이라고 한다.
남산(南山)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昌林寺)에 궁실(宮室)을 세우고 이들 두 성스러운 어린이를 모셔다가 길렀다. 남자아이는 알에서 낳았고, 그 알의 모양이 박[匏]과 같았는데, 향인(鄕人)들은 박을 '박(朴)'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성(姓)을 박(朴)이라고 했다. 또 여자아이는 그가 나온 우물 이름으로 이름을 삼았다. 두 성인(聖人)은 13세가 되자 오봉(五鳳) 원년(元年) 갑자(甲子; 전 57)에, 남자는 왕이 되어 이내 그 여자로 왕후(王后)를 삼았다.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 지금 풍속에 경京을 서벌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이라 하고, 혹은 사라(斯羅)·사로(斯盧)라고도 했다.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혹 나라 이름을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했다. 이것은 계룡(鷄龍)이 상서(祥瑞)를 나타냈기 때문이다. 일설(一說)에는 탈해왕(脫解王)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는데 닭이 숲속에서 울었다 해서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이라 했다고도 한다. 후세에 와서 드디어 신라(新羅)라는 국호로 정했던 것이다.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되던 어느 날 왕은 하늘로 올라갔는데 7일 뒤에 그 죽은 몸뚱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그러더니 왕후(王后)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한다. 나라 사람들은 이들을 합해서 장사지내려 했으나 큰 뱀이 나타나더니 쫓아다니면서 이를 방해하므로 오체(五體)를 각각 장사지내어 오릉(五陵)을 만들고, 또한 능의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 했다. 담엄사(曇嚴寺) 북릉(北陵)이 바로 이것이다. 태자(太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계승했다.
제2대 남해왕(南解王)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을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존장(尊長)에 대한 칭호인데 오직 남해왕(南解王)만을 차차웅(次次雄)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혁거세(赫居世)요, 어머니는 알영부인(閼英夫人)이며, 비(妃)는 운제부인(雲帝夫人; 운제雲梯라고도 한다. 지금 영일현迎日縣 서쪽에 운제산雲梯山 성모聖母가 있는데 가뭄 때 여기에 기도를 드리면 감응感應이 있다)이다. 전한(前漢)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 갑자(甲子; 4)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 만인 지황(地皇) 4년 갑신(甲申; 24)에 죽었다. 이 왕이 삼황(三皇)의 첫째라 한다.
<삼국사(三國史)>를 상고해 보면, "신라에서는 왕을 거서간(居西干)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진한(辰韓)의 말로 왕이란 말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는 귀인(貴人)을 부르는 칭호라고 하며, 차차웅(次次雄) 혹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김대문(金大問)은 말하기를, "차차웅(次次雄)이란 무당을 이르는 방언(方言)이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고 공경한다. 그래서 드디어 존장(尊長)되는 이를 자충(慈充)이라 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사금(尼師金)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잇금[齒理]을 이르는 말이다"라고 했다.
처음에 남해왕(南解王)이 죽자 그 아들 노례(弩禮)가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물려 주려 했다. 이에 탈해(脫解)가 말하기를, "나는 들으니 성스럽고 지혜 있는 사람은 이가 많다고 한다"하고 떡을 입으로 물어 시험해 보았다.
고전(古典)에는 이와 같이 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임금을 마립간(麻立干)이라고도 했다. 이것을 김대문(金大問)은 해석하기를, "마립간(麻立干)이란 서열을 뜻하는 방언(方言)이다. 서열(序列)은 위(位)를 따라 정하기 때문에 임금의 서열은 주(主)가 되고 신하의 서열은 아래에 위치한다. 그래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했다.
사론(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왕(新羅王)으로서 거서간(居西干)과 차차웅(次次雄)이란 이름을 쓴 이가 각기 하나요, 이사금(尼師金)이라고 한 이가 열 여섯이며, 마립간(麻立干)이라 한 이가 넷이다. 신라 말기의 명유(名儒) 최치원(崔致遠)이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을 지을 적에는 모두 모왕(某王)이라고만 하고 거서간(居西干) 등이라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혹시 그 말이 야비해서 부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인가. 그러나 지금 신라의 일을 기록하는 데 방언(方言)을 모두 그대로 두는 것도 또한 마땅한 일일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추봉(追封)된 이들을 갈문왕(葛文王)이라고 불렀는데, 이 일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남해왕(南解王) 때에 낙랑국(樂浪國)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침범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다. 또 천봉(天鳳) 5년 무인(戊寅; 18)에 고구려(高句麗)의 속국인 일곱 나라가 와서 항복했다.
제3대 노례왕(弩禮王)
박노례이질금(朴弩禮尼叱今; 유례왕儒禮王이라고도 함)이 처음에 매부(妹夫)인 탈해(脫解)에게 왕위(王位)를 물려 주자 탈해는 말했다. "대개 덕이 있는 사람은 이[齒]가 많은 법이오. 그러니 잇금을 가지고 시험해 봅시다." 이리하여 떡을 물어 시험해 보니 왕의 이가 많았기 때문에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런 일로 인하여 왕은 잇금[尼叱今]이라고 한 것이다. 이질금(尼叱今)이란 칭호는 이 왕 때부터 시작했다.
유성공(劉聖公) 갱시(更始) 원년(元年) 계미(癸未; 23)에 즉위하여(연표年表에는 갑신甲申년에 즉위했다고 함) 육부(六部)의 이름을 고쳐서 정하고 여섯 성(姓)을 하사했다.
이 때 비로소 도솔가(兜率歌)를 지었으니 차사(嗟辭)와 사뇌격(詞腦格)이 있었다. 또 비로소 보습과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와 수레를 만들었다. 건호(建虎) 18년(42)에 이서국(伊西國)을 쳐서 멸망시켰다. 이 해에 고구려(高句麗) 군사가 침범해 왔다.
제4대 탈해왕(脫解王)
탈해치질금(脫解齒叱今; 토해니사금吐解尼師今이라고도 함)은 남해왕(南解王) 때(고본古本에는 임인壬寅년이라고 했으나 이것은 잘못이다. 가까운 일이라면 노례왕弩禮王의 즉위 초년보다 뒤의 일일 것이니 양위讓位를 다투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또 먼저의 일이라면 혁거세왕赫居世王 때의 일일 것이다. 그러니 이 일은 임인壬寅년이 아닌 것임을 알겠다)에 가락국(駕洛國) 바다 가운데에 배 한 척이 와서 닿았다. 이것을 보고 그 나라 수로왕(首露王)이 백성들과 함께 북을 치고 법석이면서 그들을 맞아 머물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배는 나는 듯이 계림(鷄林)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의 아진포(阿珍浦)로 달아났다(지금도 상서지촌上西知村·하서지촌下西知村의 이름이 있다). 이때 마침 포구에 한 늙은 할멈이 있어 이름을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고 하였는데 이가 바로 혁거세왕(赫居世王)의 고기잡이 할멈이었다.
그는 이 배를 바라보고 말했다. "이 바다 가운데에는 본래 바위가 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까치들이 모여들어서 우는가."
배를 끌어당겨 찾아 보니 까치들이 배 위에 모여들었다. 그 배 안에는 궤 하나가 있었다. 길이는 20척(尺)이오. 너비는 13척이나 된다. 그 배를 끌어다가 나무 숲 밑에 매어 두었다. 그러나 이것이 흉(凶)한 것인지 길(吉)한 것인지 몰라서 하늘을 향해 고했다.
이윽고 궤를 열어 보니 단정히 생긴 사내아이가 하나 있고 아울러 칠보(七寶)의 노비(奴婢)가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을 7일 동안 잘 대접했더니 사내아이는 그제야 말을 했다.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이오(정명국正明國 혹은 완하국琓夏國이라고도 한다. 완하琓夏는 또 화하국花厦國이라고도 하니, 용성龍城은 왜국倭國 동북쪽 1천리 떨어진 곳에 있다). 우리 나라에는 원래 28 용왕(龍王)이 있어서 그들은 모두 사람의 태(胎)에서 났으며 나이 5, 6세부터 왕위(王位)에 올라 만민(萬民)을 가르쳐 성명(性命)을 바르게 했소. 팔품(八品)의 성골(姓骨)이 있는데 그들은 고르는 일이 없이 모두 왕위에 올랐소. 그때 부왕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積女國)의 왕녀(王女)를 맞아 왕비(王妃)로 삼았소. 오래 되어도 아들이 없자 기도를 드려 아들 낳기를 구하여 7년 만에 커다란 알[卵] 한 개를 낳았소. 이에 대왕은 모든 신하들을 모아 묻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았으니 고금(古今)에 없는 일이다. 이것은 아마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하고, 궤를 만들어 나를 그 속에 넣고 칠보와 노비들을 함께 배 안에 실은 뒤 바다에 띄우면서 빌기를, '아무쪼록 인연 있는 곳에 닿아 나라를 세우고 한 길을 이루도록 해 주시오'했소. 빌기를 마치자 갑자기 붉은 용이 나타나더니 배를 호위해서 지금 여기에 도착한 것이오."
말을 끝내자 그 아이는 지팡이를 끌고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吐含山) 위에 올라가더니 돌집을 지어 7일 동안을 머무르면서 성(城)안에 살 만한 곳이 있는가 바라보았다. 산봉우리 하나가 마치 초사흘달 모양으로 보이는데 오래 살 만한 곳 같았다. 이내 그곳을 찾아가니 바로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아이는 이에 속임수를 썼다.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곁에 묻어 놓고, 이튿날 아침에 문 앞에 가서 말했다. "이 집은 우리 조상들이 살던 집이오." 호공은 그렇지 않다 하여 서로 다투었다. 시비(是非)가 판결되지 않으므로 이들은 관청에 고발하였다. 관청에서 묻기를, "무엇으로 네 집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느냐"하자, 어린이는 말했다. "우리 조상은 본래 대장장이었소. 잠시 이웃 고을에 간 동안에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는 터요. 그러니 그 집 땅을 파서 조사해 보면 알 수가 있을 것이오." 이 말에 따라 땅을 파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다. 이리하여 그 집을 빼앗아 살게 되었다.
이때 남해왕(南解王)은 그 어린이, 즉 탈해(脫解)가 지혜가 있는 사람임을 알고 맏 공주(公主)로 그의 아내를 삼게 하니 이가 아니부인(阿尼夫人)이다.
어느 날 토해(吐解)는 동악(東岳)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백의(白衣)를 시켜 물을 떠 오게 했다. 백의(白衣)는 물을 떠 가지고 오다가 중로에서 먼저 마시고는 탈해에게 드리려 했다. 그러나 물그릇 한 쪽이 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꾸짖자 백의는 맹세하였다. "이 뒤로는 가까운 곳이거나 먼 곳이거나 감히 먼저 마시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물그릇이 입에서 떨어졌다. 이로부터 백의는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감히 속이지 못했다.
지금 동악(東岳) 속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세상에서 요내정(遙乃井)이라고 부르는 우물이 바로 이것이다.
노례왕(弩禮王)이 죽자 광호제(光虎帝) 중원(中元) 6년 정사(丁巳; 57) 6월에 탈해(脫解)는 왕위에 올랐다. 옛날에 남의 집을 내 집이라 하여 빼앗았다 해서 석씨(昔氏)라고 했다. 혹 또 까치로 해서 궤를 열게 되었기 때문에 까치[鵲]라는 글자에서 조자(鳥字)를 떼고 석씨(昔氏)로 성(姓)을 삼았다고도 한다. 또 궤를 열고 알을 벗기고 나왔다 해서 이름을 탈해(脫解)로 했다고 한다.
그는 재위(在位) 23년 만인 건초(建初) 4년 기묘(己卯; 29)에 죽어서 소천구(疏川丘) 속에 장사지냈다. 그런데 뒤에 신(神)이 명령하기를, "조심해서 내 뼈를 묻으라"고 했다.
그 두골(頭骨)의 둘레는 석 자 두 치, 신골(身骨)의 길이는 아홉 자 일곱 치나 된다. 이[齒]는 서로 엉기어 하나가 된 듯도 하고 뼈마디는 연결되어 있었다. 이것은 이른바 천하에 짝이 없는 역사(力士)의 골격(骨格)이었다. 이것을 부수고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 안에 모셔 두었다. 그랬더니 신(神)이 또 말하기를, "내 뼈를 동악(東岳)에 안치해 두어라"했다. 그래서 거기에 봉안케 했던 것이었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탈해脫解가 죽은 뒤 27世 문호왕文虎王 때 조로調露 2년 경진庚辰(680) 3월 15일 신유辛酉 밤 태종太宗의 꿈에, 몹시 사나운 모습을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내가 탈해脫解이다. 내 뼈를 소천구疏川丘에서 파내다가 소상塑像을 만들어 토함산吐含山에 안치하도록 하라." 王은 그 말을 좇았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지금까지 제사를 끊이지 않고 지내니 이를 동악신東岳神이라고 한다).
김알지(金閼智), 탈해왕대(脫解王代)
영평(永平) 3년 경신(庚申; 60, 중원中元 6년이라고도 하나 잘못이다. 중원中元은 모두 2년 뿐이다) 8월 4일에 호공(瓠公)이 밤에 월성(月城) 서리(西里)를 걸어가는데, 크고 밝은 빛이 시림(始林; 구림鳩林이라고도 함) 속에서 비치는 것이 보였다. 자줏빛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에 뻗쳤는데 그 구름 속에 황금(黃金)의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그 빛은 궤 속에서 나오고 있었다. 또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이 모양을 호공(瓠公)은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그 숲에 가서 궤를 열어보니 동남(童男)이 있는데 누웠다가 곧 일어났다. 이것은 마치 혁거세(赫居世)의 고사(故事)와도 같았으므로 그 말에 따라 그 아이를 알지(閼知)라고 이름지었다. 알지(閼知)란 곧 우리말로 소아(小兒)를 일컫는 것이다. 그 아이를 안고 대궐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면서 기뻐하여 뛰놀고 춤을 춘다.
왕은 길일(吉日)을 가려 그를 태자(太子)로 책봉했다. 그는 뒤에 태자의 자리를 파사왕(破娑王)에게 물려 주고 왕위(王位)에 오르지 않았다. 금궤(金櫃)에서 나왔다 하여 성(姓)을 김씨(金氏)라 했다.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는 구도(俱道; 혹은 구도仇刀)를 낳고, 구도는 미추(未(味)鄒)를 낳으니 미추(未鄒)가 왕위에 올랐다. 이리하여 신라의 김씨(金氏)는 알지에서 시작된 것이다.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이 즉위한 4년 정유(丁酉; 157)에 동해(東海) 바닷가에는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연오랑이 바다에 나가 해조(海藻)를 따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물고기 한 마리라고도 한다)가 나타나더니 연오랑을 등에 업고 일본(日本)으로 가 버렸다. 이것을 본 나라 사람들은, "이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하고 세워서 왕을 삼았다(<일본제기日本帝紀>를 상고해 보면 전후前後에 신라 사람으로 왕이 된 사람은 없다. 그러니 이는 변읍邊邑의 조그만 왕王이고 참말 王은 아닐 것이다).
세오녀(細烏女)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이상해서 바닷가에 나가서 찾아 보니 남편이 벗어 놓은 신이 있었다. 바위 위에 올라갔더니 그 바위는 또한 세오녀를 업고 마치 연오랑 때와 같이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이리하여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 그녀로 귀비(貴妃)를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에 광채(光彩)가 없었다. 일자(日者)가 왕께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精氣)가 우리 나라에 내려 있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생기는 것입니다"했다. 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서 두 사람을 찾으니 연오랑은 말한다.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인데 어찌 돌아갈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비(妃)가 짠 고운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비단을 주니 사자가 돌아와서 사실을 보고하고 그의 말대로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그런 뒤에 해와 달의 정기가 전과 같았다. 이에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간수하고 국보(國寶)로 삼으니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한다. 또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한다.
미추왕(未鄒王)과 죽엽군(竹葉軍)
제13대 미추니질금(未鄒尼叱今; 미조未祖 또는 미고未古라고 함)은 김알지(金閼智)의 7대손(七代孫)이다. 대대로 현달(顯達)하고, 또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 첨해왕(沾解王)의 뒤를 이어서 비로소 왕위(王位)에 올랐다(지금 세상에서 미추왕未鄒王의 능陵을 시조당始祖堂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대개 김씨金氏로서 처음 왕위王位에 오른 때문이며, 후대後代의 모든 김씨왕金氏王들이 미추未鄒를 시조始祖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왕위에 있은 지 23년 만에 죽었으며 능(陵)은 흥륜사(興輪寺) 동쪽에 있다.
제14대 유리왕(儒理(禮)王) 때 이서국(伊西國)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공격해 왔다. 신라에서도 크게 군사를 동원했으나 오랫동안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이상한 군사가 와서 신라군을 도왔는데 그들은 모두 댓잎을 귀에 꽂고 있었다. 이들은 신라 군사와 힘을 합해서 적을 격파했다. 그러나 적군이 물러간 뒤에는 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댓잎만이 미추왕의 능 앞에 쌓여 있을 뿐이었다. 그제야 선왕(先王)이 음(陰)으로 도와 나라에 공을 세웠다는 것을 알았다. 이리하여 그 능을 죽현능(竹現陵)이라고 불렀다.
제37대 혜공왕(惠恭王) 대력(大曆) 14년 기미(己未; 779) 4월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유신공(庾信公)의 무덤에서 일어나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준마(駿馬)를 탔는데 그 모양이 장군(將軍)과 같았다. 또 갑옷을 입고 무기(武器)를 든 40명 가량의 군사가 그 뒤를 따라 죽현능(竹現陵)으로 들어간다. 이윽고 능 속에서 무엇인가 진동(振動)하고 우는 듯한 소리가 나고, 혹은 하소연하는 듯한 소리도 들려왔다. 그 호소하는 말에, "신(臣)은 평생 동안 어려운 시국을 구제하고 삼국(三國)을 통일한 공이 있었습니다. 이제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보호하여 재앙을 제거하고 환난을 구제하는 마음은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온데 지난 경술(庚戌)년에 신의 자손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것은 임금이나 신하들이 나의 공렬(功烈)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신은 차라리 먼 곳으로 옮겨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해서 힘쓰지 않을까 합니다. 바라옵건대 왕께서는 허락해 주십시오"한다. 왕은 대답한다. "나의 공(公)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공(公)은 전과 같이 힘쓰도록 하오." 세 번이나 청해도 세 번 다 듣지 않는다. 이에 회오리바람은 돌아가고 말았다.
혜공왕(惠恭王)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이내 대신(大臣) 김경신(金敬信)을 보내서 김유신공(金庾信公)의 능에 가서 잘못을 사과하고 김공(金公)을 위해서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結)을 취선사(鷲仙寺)에 내려서 공(公)의 명복(冥福)을 빌게 했다. 이 절은 김공이 평양(平壤)을 토벌(討伐)한 뒤에 복을 빌기 위하여 세웠던 절이기 때문이다.
이때 미추왕(未鄒王)의 혼령(魂靈)이 아니었던들 김공의 노여움을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미추왕의 나라를 수호한 힘은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그 덕을 생각하여 삼산(三山)과 함께 제사지내어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으며, 그 서열(序列)을 오릉(五陵)의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 일컫는다 한다.
내물왕(奈勿王; 나밀왕那密王이라고도 함)과 김제상(金(朴)堤上)
제17대 나밀왕(那密王)이 즉위한 36년 경인(庚寅; 390)에 왜왕(倭王)이 보낸 사신이 와서 말했다. "우리 임금이 대왕(大王)이 신성(神聖)하다는 말을 듣고 신(臣) 등으로 하여금 백제(百濟)가 지은 죄를 대왕에게 아뢰게 하는 것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왕자(王子) 한 분을 보내서 우리 임금에게 신의를 표하게 하십시오." 이에 왕은 셋째아들 미해(美海; 미토희未吐喜라고도 함)를 왜국에 보냈다. 이때 미해는 열 살이었다. 말하는 것이나 행동이 아직 익숙하지 못했으므로 내신(內臣) 박사람(朴娑覽)을 부사(副使)로 삼아 딸려 보냈다. 왜왕은 이들을 30년 동안이나 억류(抑留)하여 돌려 보내지 않았다.
눌지왕(訥祗王)이 즉위한 3년 기미(己未; 419)에 고구려(高句麗) 장수왕(長壽王)의 사신이 와서 말했다. "우리 임금은 대왕의 아우 보해(寶海)가 지혜와 재주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서로 친하게 지내기를 원하여 특히 소신(小臣)을 보내어 간청하는 바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다행스럽게 여겼다. 이 일로 해서 화친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아우 보해에게 명하여 고구려로 가게 했다. 그리고 내신(內臣) 김무알(金武謁)을 보좌(補佐)로 함께 보냈더니 장수왕도 그들을 억류(抑留)해 두고 돌려 보내지 않았다.
눌지왕 10년 을축(乙丑; 425)에 왕은 여러 신하들과 나라 안의 호협(豪俠)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친히 잔치를 베풀었다. 술이 세 순배 돌고 모든 음악이 울려퍼지자 왕은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옛날 우리 아버님께서는 성심껏 백성의 일을 생각하신 까닭에 사랑하는 아들을 동쪽 멀리 왜국(倭國)까지 보내셨다가 마침내 다시 만나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또 내가 왕위(王位)에 오른 뒤로 이웃 나라의 군사가 몹시 강성(强盛)하여 전쟁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그런데 유독 고구려만이 화친하자는 말이 있어서 나는 그 말을 믿고 아우를 고구려에 보냈던 바, 고구려에서도 또한 억류해 두고 돌려 보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내 아무리 부귀(富貴)를 누린다 해도 일찍이 하루라도 이 일을 잊고 울지 않는 날이 없었다. 만일 이 두 아우를 만나 보고 함께 아버님 사당에 뵙게 된다면 온 나라 사람에게 은혜를 갚겠다. 누가 능히 이 계교를 이룰 수 있겠는가."
이 말을 듣자 백관(百官)이 입을 모아 아뢰었다.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지혜와 용맹이 겸한 사람이라야만 될 것입니다. 신 등의 생각으로는 삽라군(삽羅郡) 태수(太守) 제상(堤上)이 가할까 합니다."
이에 왕은 제상을 불러 물었다. 제상은 두 번 절하고 대답했다. "신이 듣기로는,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가 욕을 당하며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다고 합니다. 만일 일의 어렵고 쉬운 것을 따져서 행한다면 이는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옵고 또 죽고 사는 것을 생각한 뒤에 움직인다면 이는 용맹이 없는 것입니다. 신이 비록 불초(不肖)하오나 왕의 명령을 받아 행하기를 원합니다."
왕은 매우 가상히 여겨 술잔을 나누어 마시고 손을 잡아 작별해 보냈다. 제상은 왕의 앞에서 명령을 받고 바로 북해(北海)길로 향하여 변복(變服)하고 고구려에 들어가 보해가 있는 곳으로 가서 함께 도망할 일자(日字)를 약속해 놓았다. 제상은 먼저 5월 15일에 고성(高城) 수구(水口)에 와서 배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한 날짜가 가까워지자 보해는 병을 핑계하고 며칠 동안 조회(朝會)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밤중에 도망하여 고성(高城) 바닷가에 이르렀다. 고구려 왕은 이를 알고 수십 명 군사를 시켜 쫓게 하니 고성에 이르러 따라가게 되었다. 그러나 보해는 고구려에 있을 때에 늘 좌우에 잇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왔기 때문에 쫓아온 군사들은 그를 불쌍히 여겨 모두 화살의 촉을 뽑고 쏘아서 몸이 상하지 않고 돌아올 수가 있었다.
눌지왕은 보해를 만나 보자 미해(美海)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한편으로는 기뻐하고 한편으로는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좌우 사람들에게 말한다. "마치 한 몸에 팔뚝이 하나만 있고, 한 얼굴에 한 쪽 눈만 있는 것 같구나. 비록 하나는 얻었으나 하나는 잃은 대로이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느냐."
이때 제상은 이 말을 듣고 말을 탄 채 두 번 절하여 임금에게 하직하고 집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율포(栗浦) 갯가에 이르렀다. 그 아내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율포까지 쫓아갔으나 남편은 이미 배에 오른 뒤였다. 아내는 간곡하게 남편을 불렀다. 하지만 제상은 다만 손을 흔들어 보일 뿐 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왜국(倭國)에 도착해서 거짓말을 했다.
"계림왕(鷄林王)이 아무 죄도 없는 우리 부형(父兄)을 죽였기로 도망해서 여기 온 것입니다." 왜왕(倭王)은 이 말을 믿고 제상에게 집을 주어 편히 거처하게 했다. 이때 제상은 늘 미해를 모시고 해변(海邊)에 나가 놀면서 물고기와 새를 잡아다 왜왕에게 바치니 왜왕은 매우 기뻐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어느 날 새벽 마침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는데 제상이 미해에게 말했다. "지금 빨리 떠나십시오." 미해는 "그러면 같이 떠나십시다"했으나 제상은 말한다. "신이 만일 같이 떠난다면 왜인(倭人)들이 알고 뒤를 쫓을 것입니다. 원컨대 신은 여기에 남아 뒤쫓는 것을 막겠습니다." 미해가 다시 말한다. "지금 나는 그대를 부형(父兄)처럼 여기고 있는데 어찌 그대를 버려 두고 혼자서만 돌아간단 말이오." 제상은 말한다. "신은 공의 목숨을 구하는 것으로, 대왕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면 그것으로 만족할 뿐입니다.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리고는 술을 부어 미해에게 드렸다. 이때 계림(鷄林) 사람 강구려(康仇麗)가 왜국(倭國)에 와 있었는데 그를 딸려 호송(護送)하게 했다.
미해를 떠나보내고, 제상은 미해의 방에 들어가서 이튿날 아침까지 있었다. 미해를 모시는 좌우 사람들이 방에 들어가 보려 하므로 제상이 나와서 말리면서 말했다. "미해공은 어제 사냥하는 데 따라다니느라 몹시 피로해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녁때가 되자 좌우 사람들은 이상히 여겨 다시 물었다. 이때 제상은 대답했다. "미해공은 떠난 지 이미 오래 되었소."
좌우 사람들이 급히 달려가 왜왕에게 고하자 왕은 기병을 시켜 뒤를 쫓게 했으나 따르지 못했다. 이에 왕은 제상을 가두고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너의 나라 왕자를 몰래 돌려 보냈느냐." 제상이 대답한다. "나는 계림 신하이지 왜국 신하가 아니오. 이제 우리 임금의 소원을 이루어 드렸을 뿐인데, 어찌 이 일을 그대에게 말하겠소." 왜왕은 노했다. "이제 너는 이미 내 신하가 되었는데도 계림 신하라고 말하느냐. 그렇다면 반드시 오형(五刑)을 갖추어 너에게 쓸 것이다. 만일 왜국 신하라고만 말한다면 후한 녹(祿)을 상으로 주리라." 제상은 대답한다.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 차라리 계림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을 받지 않겠다."
왜왕은 노했다. 제상의 발 가죽을 벗기고 갈대[겸가]를 벤 위를 걸어가게 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냐." "계림의 신하다." 왜왕은 또 쇠를 달구어 그 위에 세워 놓고 다시 물었다. "어느 나라 신하냐." "계림의 신하다." 왜왕은 그를 굴복시키지 못할 것을 알고 목도(木島)라는 섬 속에서 불태워 죽였다.
미해는 바다를 건너 돌아왔다. 그는 먼저 강구려(康仇麗)를 시켜 나라 안에 사실을 알렸다. 눌지왕은 놀라고 기뻐하여 백관들에게 명하여 미해를 굴헐역(屈歇驛)에 나가서 맞게 했다. 왕은 아우 보해와 함께 남교(南郊)에 나가서 친히 미해를 맞아 대궐로 들어갔다. 잔치를 베풀고 국내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려 죄수를 풀어 주었다. 또 제상의 아내를 국대부인(國大夫人)에 봉하고, 그의 딸은 미해공의 부인을 삼았다.
이때 의론하는 사람들은 말했다. "옛날에 한나라 신하 주가(周苛)가 형양(滎陽) 땅에 있다가 초(楚)나라 군사에게 포로로 잡힌 일이 있었다. 이때 항우(項羽)는 주가를 보고 말하기를, '네가 만일 내 신하 노릇을 한다면 만호후(萬戶侯)를 주겠다'했다. 그러나 주가는 항우를 꾸짖고 굴복하지 않으므로 그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런데 이번 제상의 죽음은 주가만 못하지 않다."
처음에 제상이 신라를 떠날 때 부인이 듣고 남편의 뒤를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했었다. 이에 망덕사(望德寺) 문 남쪽 사장(沙場) 위에 이르러 주저앉아 길게 부르짖었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 하여 그 사장을 장사(長沙)라고 불렀다. 친척 두 사람이 부인을 부축하여 돌아오려 하자 부인은 다리를 뻗은 채 앉아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곳을 벌지지(伐知旨)라고 이름지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오래 된 뒤에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치述嶺)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를 치술신모(치述神母)라고 하는데, 지금도 그를 제사지내는 사당(祠堂)이 있다.
제18대 실성왕(實聖王)
의희(義熙) 9년 계축(癸丑; 413)에 평양주(平壤州)의 대교(大橋)가 완성되었다. 왕은 전왕(前王)의 태자(太子) 눌지(訥祗)가 덕망이 있는 것을 꺼려서 이를 죽이고자 했다. 이에 고구려의 군사를 청하여 거짓 눌지에게 맞도록 했다. 그러나 고구려 사람들은 눌지에게 어진 행실이 있음을 알고는 창끝을 뒤로 돌려 실성왕(實聖王)을 죽이고 눌지를 세워 왕을 삼고 돌아갔다.
사금갑(射琴匣)
제21대 비처왕(毗處王; 소지왕炤智王이라고도 한다)이 즉위한 10년 무진(戊辰; 488)에 천천정(天泉亭)에 거동했다. 이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 보시오"한다(혹은 말하기를, 신덕왕神德王이 흥륜사興輪寺에 가서 행향行香하려 하는데 길에서 보니 여러 마리 쥐가 꼬리를 물고 있었다. 괴상히 여겨 돌아와 점을 쳐 보니 "내일 제일 먼저 우는 까마귀를 따라가 찾아 보라"고 했다 한다. 하지만 이 설說은 잘못이다).
왕은 기사(騎士)에게 명하여 까마귀를 따르게 했다. 남쪽 피촌(避村; 지금의 양피사壤避寺村이니 남산南山 동쪽 기슭에 있다)에 이르러 보니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다. 이것을 한참 쳐다보고 있다가 문득 까마귀가 날아간 곳을 잊어버리고 길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때 한 늙은이가 못 속에서 나와 글을 올렸는데, 그 글 겉봉에는, "이 글을 떼어 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떼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입니다"했다. 기사(騎士)가 돌아와 비처왕(毗處王)에게 바치니 왕은 말한다. "두 사람을 죽게 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떼어 보지 않아 한 사람만 죽게 하는 것이 낫겠다." 이때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두 사람이라 한 것은 서민(庶民)을 말한 것이요, 한 사람이란 바로 왕을 말한 것입니다."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겨 글을 떼어 보니 "금갑(琴匣)을 쏘라[射琴匣]"고 했을 뿐이다. 왕은 곧 궁중으로 들어가 거문고 갑(匣)을 쏘았다. 그 거문고 갑 속에는 내전(內殿)에서 분향수도(焚香修道)하고 있던 중이 궁주(宮主)와 은밀히 간통(奸通)하고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을 사형(死刑)에 처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그 나라 풍속에 해마다 정월 상해(上亥)·상자(上子)·상오일(上午日)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여 하고, 감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16(5)일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지어 제사지냈으나 이런 일은 지금까지도 계속 행해지고 있다. 이언(俚言)에 이것을 달도(달도)라고 한다. 슬퍼하고 조심하며 모든 일을 금하고 꺼린다는 뜻이다. 또 노인이 나온 못을 이름하여 서출지(書出池)라고 했다.
지철로왕(智哲老王)
제22대 지철로왕(智哲老王)의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또는 지도로(智度路)이며 시호(諡號)는 지증(智證)이다. 시호를 쓰는 법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또 우리말에 왕을 마립간(麻立干)이라 한 것도 이 왕 때부터 시작되었다. 왕은 영원(永元) 2년 경진(庚辰; 500)에 왕위(王位)에 올랐다(신사辛巳라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영원永元 3년이다).
왕은 음경(陰莖)의 길이가 한 자 다섯 치가 돼 배필을 얻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자(使者)를 삼도(三道)에 보내서 배필을 구했다. 사자(使者)가 모량부(牟梁部) 동노수(冬老樹) 밑에 이르니 개 두 마리가 북만큼 큰 똥덩어리의 양쪽 끝을 물고 싸우고 있다. 사자는 그 마을 사람을 찾아 보고 누가 눈 똥인가를 물었다. 한 소녀가 말하였다. "이것은 모량부 상공(牟梁部相公)의 딸이 여기서 빨래를 하다가 숲속에 숨어서 눈 것입니다." 그 집을 찾아가 살펴보니 그 여자는 키가 7척 5촌이나 된다. 이 사실을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수레를 보내서 그 여자를 궁중으로 맞아 황후(皇后)를 봉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하례했다.
또 아슬라주(阿瑟羅州; 지금의 명주溟州) 동쪽 바다에 순풍(順風)으로 이틀 걸리는 곳에 우릉도(于陵島; 지금의 우릉羽陵)가 있다. 이 섬은 둘레 2만 6,730보(步)이다. 이 섬 속에 사는 오랑캐들은 그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몹시 교만하여 조공(朝貢)을 바쳐 오지 않았다. 이에 왕은 아찬(伊飡) 박이종(朴伊宗)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했다. 이때 이종은 나무로 사자(獅子)를 만들어 큰 배에 싣고 위협했다. "너희가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놓아 버리겠다." 이에 오랑캐들은 두려워하여 항복했다. 이에 이종을 상주어 주백(州伯)을 삼았다.
진흥왕(眞興王)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은 즉위할 때 나이 15세이므로 태후(太后)가 섭정(攝政)했다. 태후는 곧 법흥왕(法興王)의 딸로서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비(妃)이다. 진흥왕이 임종(臨終)할 때에 머리를 깎고 법의(法衣)를 입고 돌아갔다.
승성(承聖) 3년(554) 9월에 백제(百濟) 군사가 진성(珍城)을 침범하여 남녀 3만 9,000명과 말 8,000필을 빼앗아갔다. 이보다 먼저 백제가 신라와 군사를 합쳐서 고구려(高句麗)를 치려고 했었다. 이때 진흥왕은 말하기를,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늘에 매여 있다. 만일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감히 고구려가 망하기를 바랄 수 있겠느냐"했다. 그리고 이 말을 고구려에 전하게 하니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되어 신라와 평화롭게 지냈다. 이런 때문에 백제가 신라를 원망하여 침범한 것이다.
도화녀(桃花女)와 비형랑(鼻荊郞)
제25대 사륜왕(四輪王)의 시호(諡號)는 진지대왕(眞智大王)으로, 성(姓)은 김씨(金氏), 왕비(王妃)는 기오공(起烏公)의 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대건(大建) 8년 병신(丙申; 576, 고본古本에는 11년 기해己亥라고 했는데 이는 잘못이다)에 왕위(王位)에 올랐다. 나라를 다스린 지 4년에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럽자 나랏사람들은 그를 폐위시켰다.
이보다 먼저 사량부(沙梁部)의 어떤 민가(民家)의 여자 하나가 얼굴이 곱고 아름다워 당시 사람들은 도화랑(桃花郞)이라 불렀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욕심을 채우고자 하니 여인은 말한다. "여자가 지켜야 하는 것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있는데도 남에게 시집가는 일은 비록 만승(萬乘)의 위엄을 가지고도 맘대로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왕이 말한다. "너를 죽인다면 어찌하겠느냐." 여인이 대답한다. "차라리 거리에서 베임을 당하더라도 딴 데로 가는 일은 원치 않습니다." 왕은 희롱으로 말했다.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 "되겠습니다." 왕은 그를 놓아 보냈다.
이 해에 왕은 폐위되고 죽었는데 그 후 2년 만에 도화랑(桃花郞)의 남편도 또한 죽었다. 10일이 지난 어느 날 밤중에 갑자기 왕은 평시(平時)와 같이 여인의 방에 들어와 말한다. "네가 옛날에 허락한 말이 있지 않느냐. 지금은 네 남편이 없으니 되겠느냐." 여인이 쉽게 허락하지 않고 부모에게 고하니 부모는 말하기를, "임금의 말씀인데 어떻게 피할 수가 있겠느냐"하고 딸을 왕이 있는 방에 들어가게 했다. 왕은 7일 동안 머물렀는데 머무는 동안 오색(五色) 구름이 집을 덮었고 향기는 방안에 가득하였다. 7일 뒤에 왕이 갑자기 사라졌으나 여인은 이내 태기가 있었다. 달이 차서 해산하려 하는데 천지가 진동하더니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을 비형(鼻荊)이라고 했다.
진평대왕(眞平大王)이 그 이상한 소문을 듣고 아이를 궁중에 데려다가 길렀다. 15세가 되어 집사(執事)라는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비형(鼻荊)은 밤마다 멀리 도망가서 놀곤 하였다. 왕은 용사(勇士) 50명을 시켜서 지키도록 했으나 그는 언제나 월성(月城)을 날아 넘어가서 서쪽 황천(荒天) 언덕 위에 가서는 귀신들을 데리고 노는 것이었다. 용사(勇士)들이 숲 속에 엎드려서 엿보았더니 귀신의 무리들이 여러 절에서 들려 오는 새벽 종소리를 듣고 각각 흩어져 가 버리면 비형랑(鼻荊郞)도 또한 집으로 돌아왔다. 용사들은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했다. 왕은 비형을 불러서 말했다. "네가 귀신들을 데리고 논다니 그게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그 귀신의 무리들을 데리고 신원사(神元寺) 북쪽 개천(신중사神衆寺라고도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이것을 황천荒天 동쪽 심거深渠라고도 한다)에 다리를 놓도록 해라." 비형은 명을 받아 귀신의 무리들을 시켜서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 그래서 다리를 귀교(鬼橋)라고 했다. 왕은 또 물었다. "그들 귀신들 중에서 사람으로 출현(出現)해서 조정 정사를 도울 만한 자가 있느냐." "길달(吉達)이란 자가 있사온데 가히 정사를 도울 만합니다." "그러면 데리고 오도록 하라." 이튿날 그를 데리고 와서 왕께 뵈니 집사(執事) 벼슬을 주었다. 그는 과연 충성스럽고 정직하기가 비할 데 없었다. 이때 각간(角干) 임종(林宗)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은 명령하여 길달(吉達)을 그 아들로 삼게 했다. 임종은 길달(吉達)을 시켜 흥륜사(興輪寺) 남쪽에 문루(門樓)를 세우게 했다. 그리고 밤마다 그 문루(門樓) 위에 가서 자도록 했다. 그리하여 그 문루를 길달문(吉達門)이라고 했다. 어느 날 길달(吉達)이 여우로 변하여 도망해 갔다. 이에 비형은 귀신을 무리를 시켜서 잡아 죽였다. 이 때문에 귀신을 무리들은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하여 달아났다.
당시 사람들은 글을 지어 말했다.
성제(聖帝)의 넋이 아들을 낳았으니, 비형랑(鼻荊郞)의 집이 바로 그곳일세.
날고 뛰는 모든 귀신의 무리, 이곳에는 아예 머물지 말라.
향속(鄕俗)에 이 글을 써붙여 귀신을 물리친다.
천사옥대(天賜玉帶; 청진淸秦 4년 정유丁酉(937) 5월에 정승正承 김부金傅가 금으로 새기고 옥玉으로 장식한 허리띠 하나를 바쳤다. 길이는 10위圍요. 전과鐫과가 62개나 되었다. 이것을 진평왕眞平王의 천사대天賜帶라고 한다. 고려高麗 태조太祖는 이것을 받아 내고內庫에 간직했다)
제26대 백정왕(白淨王)의 시호(諡號)는 진평대왕(眞平大王), 성(姓)은 김씨(金氏)다. 대건(大建) 11년 기해(己亥; 579) 8월에 즉위했다. 신장(身長)이 11척이나 되었다. 내제석궁(內帝釋宮; 천주사天柱寺라고도 하는데 왕王이 창건創建한 것이다)에 거동하여 섬돌을 밟자 두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이 좌우 사람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돌을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었다가 뒷 세상 사람들이 보도록 하라.” 이것이 바로 성 안에 있는 다섯 개의 움직이지 않는 돌의 하나다. 왕이 즉위한 원년(元年) 천사(天使)가 대궐 뜰에 내려와 왕에게 말한다. "상제(上帝)께서 내게 명하여 이 옥대(玉帶)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왕이 꿇어앉아 친히 이것을 받으니 하늘로 올라갔다. 교사(郊社)나 종묘(宗廟)의 큰 제사 때에는 언제나 이것을 띠었다.
그 후에 고려왕(高麗王)이 신라를 치려 하여 말했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서 침범하지 못한다고 하니 그게 무엇 무엇이냐." 좌우가 대답한다. "황룡사(皇龍寺)의 장육존상(丈六尊像)이 그 첫째요, 그 절에 있는 구층탑(九層塔)이 그 둘째요, 진평왕(眞平王)의 천사옥대(天賜玉帶)가 그 셋째입니다." 이 말을 듣고 신라를 공격할 계획을 중지하고 찬(讚)하여 말했다.
구름밖에 하늘이 주신 긴 옥대(玉帶)는, 임금의 곤룡포(袞龍袍)에 알맞게 둘려 있네.
우리 임금 이제부터 몸 더욱 무거우니, 이 다음날엔 쇠로 섬돌을 만들 것이네.
선덕왕(善德王)의 지기삼사(知幾三事)
제27대 덕만(德曼; 만曼은 만萬으로도 씀)의 시호(諡號)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 성(姓)은 김씨(金氏), 아버지는 진평왕(眞平王)이다. 정관(貞觀) 6년 임진(壬辰; 632)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지 16년 동안에 미리 안 일이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붉은빛·자줏빛·흰빛의 세 가지 빛으로 그린 모란[牧丹]과 그 씨 서 되[升]를 보내 온 일이 있었다. 왕은 그림의 꽃을 보더니 말하기를, "이 꽃은 필경 향기가 없을 것이다"하고 씨를 뜰에 심도록 했다. 거기에서 꽃이 피어 떨어질 때까지 과연 왕의 말과 같았다.
둘째는,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3, 4일 동안 울어 댄 일이 있었다. 나라 사람들이 괴상히 여겨 왕에게 물었다. 그러자 왕은 급히 각간(角干) 알천(閼川)·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병(精兵) 2,000명을 뽑아 가지고 속히 서교(西郊)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이 어딘지 찾아 가면 반드시 적병(賊兵)이 있을 것이니 엄습해서 모두 죽이라고 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각각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서교(西郊)에 가 보니 부산(富山) 아래 과연 여근곡(女根谷)이 있고 백제(百濟) 군사 500명이 와서 거기에 숨어 있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백제의 장군(將軍) 우소(우召)란 자가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었으므로 포위하고 활을 쏘아 죽였다. 또 뒤에 군사 1,200명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모두 쳐서 죽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
셋째는, 왕이 아무 병도 없을 때 여러 신하들에게 일렀다.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도利天) 속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여러 신하들이 그게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말하였다. "낭산(狼山) 남쪽이니라." 그 날이 이르니 왕은 과연 죽었고, 여러 신하들은 낭산 양지에 장사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호대왕(文虎(武)大王)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는데 불경(佛經)에 말하기를,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도利天)이 있다"고 했으니 그제야 대왕(大王)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가 있었다.
왕이 죽기 전에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었다. "어떻게 해서 모란꽃에 향기가 없고, 개구리 우는 것으로 변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왕이 대답했다.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므로 그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것은 당나라 임금이 나에게 짝이 없는 것을 희롱한 것이다. 또 개구리가 성난 모양을 하는 것은 병사(兵士)의 형상이요. 옥문(玉門)이란 곧 여자의 음부(陰部)이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흰데 흰빛은 서쪽을 뜻하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남근(男根)은 여근(女根)이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그래서 잡기가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모두 왕의 성스럽고 슬기로움에 탄복했다. 꽃은 세 빛으로 그려 보낸 것은 대개 신라에는 세 여왕(女王)이 있을 것을 알고 한 일이었던가. 세 여왕이란 선덕(善德)·진덕(眞德)·진성(眞聖)이니 당나라 임금도 짐작하여 아는 밝은 지혜가 있었던 것이다.
선덕왕(善德王)이 영묘사(靈廟寺)를 세운 일은 <양지사전(良志師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별기(別記)>에 말하기를, "이 임금 때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고 했다.
진덕왕(眞德王)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은 왕위에 오르자 친히 태평가(太平歌)를 지어 비단을 짜서 그 가사로 무늬를 놓아 사신을 시켜서 당(唐)나라에 바치게 했다(다른 책에는, 춘추공春秋公을 사신으로 보내서 군사를 청하게 했더니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기뻐하여 소정방蘇定方을 보냈다고 했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현경現慶 이전에 춘추공春秋公은 이미 왕위王位에 올랐다. 그리고 현경懸磬 경신庚申은 태종太宗 때가 아니라 고종高宗 때이다. 정방定方이 온 것은 현경現慶 경신庚申년이니 비단을 짜서 무늬를 놓아 보냈다는 것은 청병請兵한 때의 일이 아니고 진덕왕眞德王 때의 일이라야 옳다. 대개 이때는 김흠순金欽純을 석방해 달라고 청할 때의 일일 것이다).
당(唐)나라 황제(皇帝)는 이것을 아름답게 여겨 칭찬하고 진덕여왕(眞德女王)을 계림국왕(鷄林國王)으로 고쳐 봉했다. 태평가(太平歌)의 가사(歌詞)는 이러했다.
큰 당(唐)나라 왕업(王業)을 세우니, 높고 높은 임금의 계획 장하여라.
전쟁 끝나니 천하를 평정하고, 문치(文治)를 닦으니 백왕(百王)이 뒤를 이었네.
하늘을 거느리니 좋은 비 내리고, 만물을 다스리니 모든 것이 광채가 나네.
깊은 인덕(人德)은 해와 달에 비기겠고, 돌아오는 운수는 요순(堯舜)보다 앞서네.
깃발은 어찌 그리 번쩍이는가, 징소리 북소리는 웅장도 하여라.
외이(外夷)로서 황제의 명령 거역하는 자는 칼 앞에 자빠져 천벌을 받으리.
순후(淳厚)한 풍속 곳곳에 퍼지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상서(祥瑞)를 바치네.
사시(四時)의 기후는 옥촉(玉燭)처럼 고르고, 칠요(七曜)의 광명은 만방에 두루 비치네.
산악(山嶽)의 정기는 보필할 재상을 낳고, 황제(皇帝)는 충량(忠良)한 신하에게 일을 맡겼네.
오제(五帝) 삼황(三皇)의 덕(德)이 하나로 이룩되니, 우리 당(唐)나라 황제(皇帝)를 밝게 해 주리.
왕의 대(代)에 알천공(閼川公)·임종공(林宗公)·술종공(述宗公)·호림공(虎林公; 자장慈藏의 아버지)·염장공(廉長公)·유신공(庾信公)이 있었다. 이들은 남산(南山) 우지암(우知巖)에 모여서 나랏일을 의논했다. 이때 큰 범 한 마리가 좌중에 뛰어들었다. 여러 사람들은 놀라 일어났지만 알천공(閼川公)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면서 범의 꼬리를 잡아 땅에 메쳐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처럼 세었으므로 그를 수석(首席)에 앉혔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유신공(庾信公)의 위엄에 심복(心腹)했다.
신라에는 네 곳의 신령스러운 땅이 있어서 나라의 큰 일을 의논할 때면 대신(大臣)들은 반드시 그곳에 모여서 일을 의논했다. 그러면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이 네 곳의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靑松山)이요, 둘쩨는 남쪽의 우지산(우知山)이요, 셋째는 서쪽의 피전(皮田)이요,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金剛山)이다. 이 왕 때에 비로소 정월 초하룻날 아침의 조례(朝禮)를 행했고, 또 시랑(侍郞)이라는 칭호도 이때에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김유신(金庾信)
호력(虎力) 이간(伊干)의 아들 서현각간(舒玄角干) 김(金)씨의 맏아들이 유신(庾信)이고 그 아우는 흠순(欽純)이다. 맏누이는 보희(寶姬)로서 소명(小名)은 아해(阿海)이며, 누이동생은 문희(文姬)로서 소명(小名)이 아지(阿之)이다. 유신공(庾信公)은 진평왕(眞平王) 17년 을묘(乙卯; 595)에 났는데, 칠요(七曜)의 정기를 타고났기 때문에 등에 일곱 별의 무늬가 있었다. 그에게는 신기하고 이상한 일이 많았다.
나이 18세가 되는 임신(壬申)년에 검술(劍術)을 익혀 국선(國仙)이 되었다. 이때 백석(白石)이란 자가 있었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여러 해 동안 낭도(郎徒)의 무리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때 유신은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의 두 나라를 치려고 밤낮으로 깊은 의논을 하고 있었는데 백석이 그 계획을 알고 유신에게 고한다. "내가 공과 함께 먼저 저들 적국에 가서 그들의 실정(實情)을 정탐한 뒤에 일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유신은 기뻐하여 친히 백석을 데리고 밤에 떠났다. 고개 위에서 쉬고 있노라니 두 여인이 그를 따라와서 골화천(骨火川)에 이르러 자게 되었는데 또 한 여자가 갑자기 이르렀다. 공이 세 여인과 함께 기쁘게 이야기하고 있노라니 여인들은 맛있는 과자를 그에게 주었다. 유신은 그것을 받아 먹으면서 마음으로 그들을 믿게 되어 자기의 실정(實情)을 말하였다. 여인들이 말한다. "공의 말씀은 알겠습니다. 원컨대 공께서는 백석을 떼어 놓고 우리들과 함께 저 숲속으로 들어가면 실정을 다시 말씀하겠습니다." 이에 그들과 함께 들어가니 여인들은 문득 신(神)으로 변하더니 말한다. "우리들은 나림(奈林)·혈례(穴禮)·골화(骨火) 등 세 곳의 호국신(護國神)이오. 지금 적국 사람이 낭(郎)을 우인해 가는데도 낭은 알지 못하고 따라가므로, 우리는 낭을 말리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소." 말을 마치고 자취를 감추었다. 공은 말을 듣고 놀라 쓰러졌다가 두 번 절하고 나와서는 골화관(骨火館)에 묵으면서 백석에게 말했다. "나는 지금 다른 나라에 가면서 중요한 문서를 잊고 왔다. 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 가지고 오도록 하자." 드디어 함께 집에 돌아오자 백석을 결박해 놓고 그 실정을 물으니 백석이 말한다.
"나는 본래 고구려 사람이오(고본古本에 백제 사람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추남楸南은 고구려 사람이요, 도한 음양陰陽을 역행逆行한 일도 보장왕寶藏王 때의 일이다). 우리 나라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신라의 유신은 우리 나라 점쟁이 추남(楸南; 고본古本에 춘남春南이라 한 것은 잘못임)이었는데, 국경 지방에 역류수(逆流水; 웅자雄雌라고도 하는데, 엎치락 뒤치락 하는 일)가 있어서 그에게 점을 치게 했었소. 이에 추남(楸南)이 아뢰기를, '대왕(大王)의 부인(夫人)이 음양(陰陽)의 도(道)를 역행(逆行)한 때문에 이러한 표징(表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했소. 이에 대왕은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고 왕비는 몹시 노했소. 이것은 필경 요망한 여우의 말이라 하여 왕에게 고하여 다른 일을 가지고 시험해서 물어 보아 맞지 않으면 중형(重刑)에 처하라고 했소. 이리하여 쥐 한 마리를 함 속에 감추어 두고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물었더니 그 사람은, 이것이 반드시 쥐일 것인데 그 수가 여덟입니다 했소. 이에 그의 말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죽이려 하자 그 사람은 맹세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는 꼭 대장이 되어 반드시 고구려를 멸망시킬 것이라 했소. 곧 그를 죽이고 쥐의 배를 갈라 보니 새끼 일곱 마리가 있었소. 그제야 그의 말이 맞는 것을 알았지요. 그날 밤 대왕의 꿈에 추남(楸南)이 신라 서현공(舒玄公) 부인의 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더니 모두 '추남이 맹세하고 죽더니 과연 맞았습니다' 했소. 그런 때문에 고구려에서는 나를 보내서 그대를 유인하게 한 것이오." 공은 곧 백석을 죽이고 음식을 갖추어 삼신(三神)에게 제사지내니 이들은 모두 나타나서 제물을 흠향했다.
김유신의 집안 재매부인(財買夫人)이 죽자 청연(靑淵) 상곡(上谷)에 장사지내고 재매곡(財買谷)이라 불렀다. 해마다 봄이 되면 온 집안의 남녀들이 그 골짜기 남쪽 시냇가에 모여서 잔치를 열었다. 이럴 때엔 백 가지 꽃이 화려하게 피고 송화(松花)가 골짜기 안 숲속에 가득했다. 골짜기 어귀에 암자를 짓고 이름을 송화방(松花房)이라 하여 전해 오다가 원찰(願刹)로 삼았다. 54대 경명왕(景明王) 때에 공(公)을 봉해서 흥호대왕(興虎(武)大王)이라 했다. 능은 서산(西山) 모지사(毛只寺) 북쪽 동으로 향해 뻗은 봉우리에 있다.
태종(太宗) 춘추공(春秋公)
제29대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이름은 춘추(春秋), 성(姓)은 김씨(金氏)이다. 용수(龍樹; 혹은 용춘龍春) 각간(角干)으로 추봉(追封)된 문흥대왕(文興大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평대왕(眞平大王)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며 비(妃)는 문명황후(文明皇后) 문희(文姬)이니 곧 유신공(庾信公)의 끝누이였다.
처음에는 문희의 언니 보희가 꿈에 서악(西岳)에 올라가서 오줌을 누는데 오줌이 서울 안에 가득 찼다. 이튿날 아침에 문희에게 꿈이야기를 하자 문희는 이 말을 듣고 "내가 그 꿈을 사겠어요"하고 말하니, 언니는 "무슨 물건으로 사려 하느냐"하고 물었다. "비단치마를 주면 되겠지요." 언니가 "그렇게 하자"하여, 동생이 옷깃을 벌리고 받으려 하자 언니는 "어젯밤 꿈을 네게 준다"했고, 동생은 비단치마로 값을 치렀다. 그런 지 10일이 지났다. 정월(正月) 오기일(午忌日; 위의 사금갑射琴匣에 보였으니 최치원崔致遠의 설說이다)에 유신(庾信)이 춘추공과 함께 유신의 집 앞에서 공을 찼다(신라 사람은 공 차는 것을 농주弄珠의 희롱이라 한다). 이때 유신은 일부러 춘추의 옷을 밟아서 옷끈을 떨어뜨리게 하고 말하기를 "내 집에 들어가서 옷끈을 달도록 합시다"하매 춘추공은 그 말을 따랐다. 유신이 아해(阿海)를 보고 옷을 꿰매 드리라 하니 아해는 말한다. "어찌 그런 사소한 일로 해서 가벼이 귀공자(貴公子)와 가까이한단 말입니까"하고 사양했다(고본古本에는 병 때문에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이에 유신은 아지(阿之)에게 이것을 명했다. 춘추공은 유신의 뜻을 알고 드디어 아지와 관계하고 이로부터 자주 왕래했다. 유신은 그 누이가 임신한 것을 알고 꾸짖었다. "너는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아이를 배었으니 그게 무슨 일이냐." 그리고는 온 나라 안에 말을 퍼뜨려 그 누이를 불태워 죽인다고 했다. 어느 날 선덕왕(善德王)이 남산(南山)에 거동한 틈을 타서 유신은 마당 가운데 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질렀다. 연기가 일어나자 왕이 바라보고 무슨 연기냐고 물으니, 좌우에서 아뢰기를, "유신이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이는 것인가 봅니다"했다. 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 누이동생이 남편도 없이 임신한 때문이라고 했다. 왕이 "그게 누구의 소행이냐"고 물었다. 이때 춘추공은 왕을 모시고 앞에 있다가 얼굴빛이 몹시 변했다. 왕은 말한다. "그것은 네가 한 짓이니 빨리 가서 구하도록 하라." 춘추공은 명령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王命)을 전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고 그 후에 버젓이 혼례를 올렸다.
진덕왕(眞德王)이 죽자 영휘(永徽) 5년 갑인(甲寅; 654)에 춘추공은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린 지 8년 만인 용삭(龍朔) 원년(元年) 신유(辛酉; 661)에 죽으니 나이 59세였다. 애공사(哀公寺) 동쪽에 장사지내고 비석을 세웠다.
왕은 유신과 함께 신비스러운 꾀와 힘을 다해서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런 때문에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고 했다. 태자 법민(法敏)과 각간(角干) 인문(仁問)·각간 문왕(文王)·각간 노차(老且)·각간 지경(智鏡)·각간 개원(愷元) 등은 모두 문희가 낳은 아들들이었으니 전날에 꿈을 샀던 징조가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서자(庶子)는 개지문(皆知文) 급간(級干)과 거득(車得) 영공(令公)·마득(馬得) 아간(俄間)이다. 딸까지 합치면 모두 다섯 명이다.
왕은 하루에 쌀 서 말(三斗) 밥과 꿩 아홉 마리를 먹었다. 그러나 경신(庚申; 660)에 백제(百濟)를 멸한 뒤로는 점심을 먹지 않고 다만 아침 저녁뿐이었다. 그래도 하루에 쌀 여섯 말, 술 여섯 말, 꿩 열 마리를 먹었다.
성안 물건값은 포목(布木) 한 필에 벼가 서른 섬 혹은 쉰 섬이어서 백성들은 성대(聖代)라고 불렀다.
왕이 태자로 있을 때 고구려를 치고자 군사를 청하려고 당(唐)나라에 간 일이 있었다. 이때 당나라 임금이 그의 풍채(風彩)를 보고 칭찬하여 신성(神聖)한 사람이라 하고 당나라에 머물러 두고 시위(侍衛)로 삼으려 했지만 굳이 청해서 돌아오고 말았다.
이때 백제 마지막 왕 의자(義慈)는 곧 호왕(虎(武)王)의 맏아들로서 영웅(英雄)스럽고 용맹하고 담력(膽力)이 있었다. 부모를 효성스럽게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당시 사람들은 그를 해동증자(海東曾子)라 했다. 정관(貞觀) 15년 신축(辛丑; 641)에 왕위에 오르자 주색(酒色)에 빠져서 정사는 어지럽고 나라는 위태로웠다. 좌평(佐平; 백제百濟의 벼슬 이름) 성충(成忠)이 애써 간했지만 듣지 않고 도리어 옥에 가두니 몸이 파리해지고 피곤해서 거의 죽게 되었으나 성충은 글을 올려 말했다. "충신(忠臣)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습니다. 원컨대 한 마디 말만 여쭙고 죽겠습니다. 신(臣)이 일찍이 시국의 변화를 살펴보오니 반드시 병란(兵亂)이 있을 것입니다. 대체로 용병(用兵)은 그 지세(地勢)를 잘 가려야 하는 것이니 상류(上流)에 진을 치고 적을 맞아 싸우면 반드시 보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陸路)로는 탄현(炭峴; 침현沈峴이라고도 하니 백제의 요새지要塞地임)을 넘지 말 것이옵고, 수군(水軍)은 기벌포(伎伐浦; 곧 장암長암이니 손량孫梁이라고도 하고 지화포只火浦 또는 백강白江이라고도 함)에 적군이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험한 곳에 의지하여 적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그 말을 깨닫지 못했다. 현경(現慶) 4년 기미(己未; 659)에 백제 오회사(烏會寺; 오합사烏合寺라고도 함)에 크고 붉은 말 한 마리가 나타나 밤낮으로 여섯 번이나 절을 돌아다녔다. 2월에는 여우 여러 마리가 의자왕(義慈王)의 궁중으로 들어왔는데 그 중 한 마리는 좌평(佐平)의 책상 위에 올라앉았다. 4월에는 태자궁(太子宮) 안에서 암탉과 작은 참새가 교미했다. 5월에는 사자수(泗차水; 부여扶餘에 있는 강 이름) 언덕 위에 큰 물고기가 나와서 죽어 있었는데 길이가 세 길이나 되었으며 이것을 먹은 사람은 모두 죽었다. 9월에는 궁중에 있는 홰나무가 마치 사람이 우는 것처럼 울었으며, 밤에는 귀신이 대궐 남쪽 길에서 울었다. 5년 경신(庚申; 660) 봄 1월엔 서울의 우물물이 핏빛이 되었다. 서쪽 바닷가에 작은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이것을 백성들이 다 먹을 수가 없었다. 또 사자수의 물이 핏빛이 되었다. 4월에는 청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였다. 서울 시정인(市井人)들이 까닭없이 놀라 달아나는 것이 마치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았다. 이래서 놀라 자빠져 죽은 자가 100여 명이나 되었고 재물을 잃은 자는 그 수효를 모를 만큼 많았다. 6월에는 왕흥사(王興寺)의 중들이 보니 배가 큰 물결을 따라 절문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또 마치 들사슴과 같은 큰 개가 서쪽에서 사자수 언덕에 와서 대궐을 바라보고 짖더니 이윽고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으며, 성안에 있는 여러 개들이 길 위에 모여들어 혹은 짖기도 하고 울기도 하다가 얼마 후에야 흩어졌다. 또 귀신 하나가 궁중으로 들어오더니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하다가 이내 땅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하니 석 자 깊이에 거북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등에 글이 씌어 있었다.
"백제는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새 달과 같네."
이 글뜻을 무당에게 물으니 무당은, "둥근 달이라는 것은 가득 찬 것이니 차면 기우는 것입니다. 새 달은 차지 않은 것이니 차지 않으면 점점 차게 되는 것입니다"하자 왕은 노해서 무당을 죽여 버렸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둥근 달은 성(盛)한 것이옵고, 새 달은 미약(微弱)한 것이오니, 생각건데 우리 나라는 점점 성하고 신라는 점점 약해진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왕은 이 말을 듣고 기뻐했다.
태종(太宗)은 백제에 괴상한 변고가 많다는 소식을 듣고 5년 경신(庚申; 660)에 김인문(金仁問)을 사신으로 당나라에 보내서 군사를 청했다. 당 고종(高宗)은 좌호위장군(左虎(武)衛將軍) 형국공(荊國公) 소정방(蘇定方)으로 신구도 행군총관(神丘道 行軍摠管)을 삼아 좌위장군(左衛將軍) 유백영(劉伯英)과 좌호위장군(左虎衛將軍) 빙사귀(馮士貴)·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농효공(龐孝公) 등을 거느리고 13만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치게 했다. 또 신라 왕 춘추(春秋)로 우이도 행군총관(우夷道 行軍摠管)을 삼아 신라의 군사를 가지고 합세하도록 했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신라 서쪽 덕물도(德勿島)에 이르자 신라 왕은 장군 김유신(金庾信)을 보내서 정병(精兵) 5만을 거느리고 싸움에 나가게 했다. 의자왕은 이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싸우고 지킬 계책을 물으니 좌평(佐平) 의직(義直)이 나와 아뢴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 큰 바다를 건너왔고 또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하여, 또 신라 군사는 큰 나라가 원조해 주는 것만 믿고 적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일 당나라 군사가 싸움에 이롭지 못한 것을 보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진격해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決戰)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달솔(達率) 상영(常永) 등은 말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서 왔기 때문에 속히 싸우려고 서두르고 있으니 그 예봉(銳鋒)을 당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한편 신라 군사는 여러 번 우리에게 패한 때문에 이제 우리 군사의 기세를 바라만 보아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오니 오늘날의 계교는 마땅히 당나라 군사의 길을 막고 그 군사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일부 조그만 군사로 신라를 쳐서 그 예기(銳氣)를 꺾은 연후에 편의를 보아서 싸운다면 군사를 하나도 죽이지 않고서 나라를 보전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왕은 망설이고 어느 말을 따를지 모르고 있었다. 이때 좌평(佐平) 흥수(興首)가 죄짓고 고마며지현(古馬며知縣)에 귀양가 있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물었다. "일이 급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흥수는 말한다. "대체로 좌평 성충(成忠)의 말과 같사옵니다." 대신들은 이 말을 믿지 않고 말하기를, "흥수는 죄인의 몸이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오니 그 말은 쓸 것이 되지 못합니다.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白江; 기벌포伎伐浦)에 들어가서 강물을 따라 내려오되 배를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또 신라군은 탄현(炭峴)에 올라와서 소로(小路)를 따라 내려오되 말[馬]을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 놓고 군사를 놓아 친다면 마치 닭장에 든 닭과 그물에 걸린 물고기와 같을 것입니다" 했다. 왕은 "그 말이 옳다" 했다.
또 들으니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 한다. 의자왕은 장군 계백(階(偕)伯)을 보내 결사대(決死隊) 5,000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으로 나가 신라 군사와 싸우게 했더니 계백은 네 번 싸워 네 번 다 이겼다. 하지만 군사는 적고 힘이 다하여 마침내 패하고 계백은 전사했다. 이에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는 합세해서 전진하여 진구(津口)까지 나가서 강가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때 갑자기 새가 소정방의 진영(陣營) 위에서 맴돌므로 사람을 시켜서 점을 치게 했더니 "반드시 원수(元帥)가 상할 것입니다" 한다. 정방이 두려워하여 군사를 물리고 싸움을 중지하려 하므로 김유신이 소정방에게 이르기를, "어찌 나는 새의 괴이한 일을 가지고 천시(天時)를 어긴단 말이오. 하늘에 응하고 민심에 순종해서 지극히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데 어찌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겠소"하고 신검(神劍)을 뽑아 그 새를 겨누니 새는 몸뚱이가 찢어져 그들의 자리 앞에 떨어진다. 이에 정방은 백강 왼쪽 언덕으로 나와서 산을 등지고 진을 치고 싸우니 백제군이 크게 패했다. 당나라 군사는 조수(潮水)를 타고 전선(戰船)이 꼬리를 물어 북을 치면서 전진했다. 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바로 백제의 도성(都城)으로 쳐들어가 30리쯤 되는 곳에 머물렀다. 이때 백제에서는 군사를 다 내어 막았지만 패해서 죽은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리하여 당나라 군사는 이긴 기세(氣勢)를 타고서 성으로 들이닥쳤다.
의자왕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한다. "내가 성충의 말을 듣지 않고 있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의자왕은 드디어 태자 융(隆; 효孝라고도 했지만 잘못이다)과 함께 북비(北鄙)로 도망했다. 정방이 그 성을 포위하자 왕의 둘째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성을 굳게 지켰다. 이때 태장의 아들 문사(文思)가 태(泰)에게 말한다. "왕이 태자와 함께 성에서 나가 달아났는데 숙부(叔父)가 맘대로 왕이 되었으니, 만일 당나라 군사가 포위한 것을 풀고 물러간다면 그때에는 우리들이 어떻게 온전할 수가 있겠습니까"하고는 좌우 사람들을 거느리고 성을 넘어 나아가자 백성들은 모두 그를 따르니 태(泰)는 이것을 말릴 수가 없었다. 소정방이 군사를 시켜 성첩(城堞)을 세우고 당나라 깃발을 꽂으니 태(泰)는 일이 매우 급해서 문을 열고 항복하기를 청했다. 이에 왕과 태자 융(隆), 왕자 태(泰), 대신 정복(貞福)과 여러 성이 모두 항복했다. 소정방은 왕 의자와 태자 융, 왕자 태, 왕자 연(演) 및 대신·장사(將士) 88명과 백성 1만 2,807명을 당나라 서울로 보냈다.
백제에는 원래 5부(部), 76군(郡), 200성(城), 36만 호(戶)가 있었는데 이때 당나라에서는 이곳에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蓮)·덕안(德安) 등 다섯 도독부(都督府)를 두고 우두머리를 뽑아서 도독(都督)·자사(刺史)를 삼아 다스리게 했다. 낭장(郎將) 유인원(劉仁願)에게 명하여 사자성(泗차城)을 지키게 하고, 도 좌위낭장(左衛郎將) 왕문도(王文度)로 웅진도독(熊津都督)을 삼아 백제에 남아 있는 백성들을 무마하게 했다. 소정방은 포로들을 이끌고 당나라 임금에게 뵈니, 임금은 이들을 책망만 하고 용서해 주었다.
의자왕이 그곳에서 병으로 죽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위위경(衛尉卿)을 증직(贈職)하고 그의 옛 신하들이 가서 조상하는 것을 허락했다. 또 명하여 손호(孫皓)와 진숙보(陳叔寶)의 무덤 옆에 장사지내게 하고 모두 비를 세워 주었다.
7년 임술(壬戌; 662)에 당에서는 소정방을 명하여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을 삼았다가 다시 평양도(平壤道)로 고쳐 고구려군을 패강(浿江)에서 깨뜨리고 마읍산(馬邑山)을 빼앗아 진영(陣營)을 세우고 드디어 평양성(平壤城)을 포위했으나 때마침 큰 눈이 내려서 포위를 풀고 돌아가니, 양주안집대사(凉州安集大使)를 삼아 토번(吐藩)을 평정했다.
건봉(乾封) 2년(667)에 소정방이 죽자 당나라 황제는 슬퍼하여 좌효기대장군(左驍騎大將軍) 유주도독(幽州都督)을 증직하고 시호(諡號)를 장(莊)이라 했다(이상은 <당사唐史>에 있는 글이다).
<신라별기(新羅別記)>에 의하면, 문호(文虎(武))왕이 즉위한 5년 을축(乙丑; 665) 8월 경자(庚子)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웅진성(熊津城)에 가서 가왕(假王) 부여(扶餘) 융(隆)과 만나 단(壇)을 만들고 백마(白馬)를 잡아 맹세하는데, 먼저 천신(天神)과 산천(山川)의 영(靈)에 제사를 지낸 뒤에 말의 피를 뿌리고 글을 지어 맹세했다.
"저번에 백제의 선왕(先王)이 순종(順從)하는 것과 반역하는 이치에 어두워 이웃 나라와 평화를 두텁게 하지 않고 인친(姻親)과 화목하지 않으며, 고구려와 결탁해서 왜국(倭國)과 서로 통하여, 그들과 함께 잔포(殘暴)한 짓을 했다. 신라를 침략하여 성읍(城邑)을 파괴하고 백성을 짓밟아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다. 중국의 천자(天子)는 한 물건이라도 제가 살 곳을 잃는 것을 민망히 여기고 백성들이 해독을 입는 것을 불쌍히 여겨, 자주 사신을 보내서 사이좋게 지내기를 타일렀었다. 그러나 백제는 지리(地理)의 험하고 먼 것을 믿고 천경(天經)을 업신여기니 황제(皇帝)는 크게 노하여 삼가 정벌(征伐)을 행하니 깃발이 가리키는 곳 한 번 싸움에 이 땅을 평정했다. 마땅히 궁실(宮室)과 주택(住宅)을 무너뜨려 못을 만들어서 자손들을 경계하고 그 폐단의 근원을 아주 뽑아 없애어 뒷 세상에 교훈을 보이려 한다. 귀순(歸順)해 오는 자는 회유하고 반역하는 자를 정벌하는 것은 선왕의 아름다운 법이요, 망한 나라를 흥하게 하고 끊어진 대(代)를 잇게 하는 것은 전철(前哲)의 공통된 법칙이다. 일은 반드시 옛것을 본받아야 하는 것은 전의 사책(史冊)에 전해 오는 것이기 때문에, 전백제왕(前百濟王) 사가정경(司稼正卿) 부여(扶餘) 융(隆)을 세워 웅진도독(熊津都督)을 삼아 그 선조(先祖)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상재(桑梓)를 보전케 하는 것이다. 신라에 의지하여 길이 우방(友邦)이 되어 각각 묵은 감정을 없애고 좋은 의(誼)를 맺어 화친하게 지낼 것이며 삼가 조명(詔命)을 받들어 영원히 번국(藩國)이 될 것이다. 이에 사자(使者)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노성현공(魯城縣公) 유인원(劉仁願)을 보내서 친히 권유하여 나의 뜻을 자세히 선포(宣布)하는 것이다. 혼인할 것을 약속하고 맹세를 소중히 여겨 희생(犧牲)을 잡아 피를 뿌리고 함께 시종(始終)을 두텁게 할 것이다. 재앙을 나누고 환란(患亂)을 서로 구원하여 은의(恩誼)를 형제처럼 할 것이다. 삼가 윤언(綸言)을 받들어 감히 버리지 말 것이며, 이미 맹세를 정한 뒤에는 함께 변하지 말도록 힘쓸 것이다. 만일 어기고 배반하여 그 덕을 변하여 군사를 일으켜 변방을 침범하는 때에는 신명(神明)이 이를 살펴서 백 가지 재앙을 내리시어 자손들도 키우지 못하고 사직(社稷)도 지키지 못하여 제사는 끊어져서 남는 씨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런 때문에 여기에 금서철계(金書鐵契)를 만들어 종묘(宗廟)에 간직해 두는 것이니 자손은 만대(萬代)가 되도록 감히 어기지 말 것이다. 신(神)은 이를 듣고 이에 흠향하고 복을 주시옵소서."
맹세가 끝나자 폐백(幣帛)을 단 북쪽에 묻고 맹세한 글은 신라의 대묘(大廟)에 간직해 두었다. 이 맹세하는 글은 대방도독(帶方都督) 유인궤(劉仁軌)가 지은 것이다(위에 있는 <당사唐史>의 글을 상고해 보면, 소정방蘇定方이 의자왕義慈王과 태자太子 융隆 들을 당唐나라 서울에 보냈다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부여왕扶餘王 융隆을 만났다고 했으니, 당唐나라 황제皇帝가 융隆의 죄를 용서하고 돌려보내서 웅진도독熊津都督을 삼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때문에 맹문盟文에도 분명히 말했으니 이것으로 증거가 된다).
또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총장(總章) 원년(元年) 무진(戊辰; 668, 총장總章 무진戊辰이라면 이적李勣의 일이니 하문下文에 소정방蘇定方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만일 정방定方의 일이라면 연호는 용삭龍朔 2년 임술壬戌에 해당하며 평양平壤을 포위했을 때의 일이다)에 신라에서 청한 당나라 군사가 평양 교외에 주둔하면서 글을 보내 말하기를, '급히 군자(軍資)를 보내 달라'고 했다. 이에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묻기를, '고구려에 들어가서 당나라 군사가 주둔한 곳으로 간다는 것은 그 형세가 몹시 위험하다. 그러나 우리가 청한 당나라 군사가 양식이 떨어졌는데 군량을 보내 주지 않는다는 것도 옳지 못하니 어찌 하면 좋겠는가' 했다. 이에 김유신이 아뢰었다. '신 등이 군자(軍資)를 수송하겠사오니 대왕께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했다. 이에 유신(庾信)·인문(仁問) 등이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국경 안에 들어가 곡식 2만 곡(斛)을 갖다주고 돌아오니 왕이 크게 기뻐했다. 또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 군사와 합하고자 할 때 유신이 먼저 연기(然起)·병천(兵川) 두 사람을 보내서 그 합세할 시기를 물었다. 이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종이에 난새[鸞]와 송아지[犢]의 두 그림을 그려 보냈다. 신라 사람들은 그 뜻을 알지 못하여 사람을 보내서 원효법사(元曉法師)에게 물었다. 원효는 해석하기를, '속히 군사를 돌이키라는 뜻이니 송아지와 난새를 그린 것은 두 물건이 끊어지는 것을 뜻한 것입니다' 했다. 이에 유신은 군사를 돌려 패수(浿水)를 건너려 할 때 명(命)을 내려 '뒤떨어지는 자는 베이리라' 했다. 이리하여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강을 건너는데 반쯤 건너자 고구려 군사가 쫓아와서 아직 건너지 못한 자를 잡아 죽였다. 그러나 이튿날 유신은 고구려 군사를 반격하여 수만명을 잡아 죽였다."
<백제고기(百濟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부여성(扶餘城)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는데 아래로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옛날부터 전해 오는 말에 의자왕과 여러 후궁(後宮)들은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서로 이르기를, '차라리 자살해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하고 서로 이끌고 여기에 와서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했다. 때문에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岩)이라고 하나 이것은 속설(俗說)이 잘못 전해진 것이다. 다만 궁녀(宮女)들만이 여기에 떨어져 죽은 것이오 의자왕이 당나라에서 죽었다는 것은 <당사(唐史)>에 명문(明文)이 있다.
<신라고전(新羅古傳)>에는 이러하다. "소정방이 이미 고구려·백제 두 나라를 토벌하고 또 신라마저 치려고 머물러 있었다. 이때 유신이 그 뜻을 알아채고 당나라 군사를 초대하여 독약을 먹여 죽이고는 모두 쓸어 묻었다. 지금 상주(尙州) 지경에 당교(唐橋)가 있는데 이것이 그들을 묻은 곳이다."(<당사唐史>를 상고하건대 그 죽은 까닭은 말하지 않고 다만 죽었다고만 했으니 무슨 까닭일까? 감추기 위한 것인가. 향전鄕傳이 근거가 없는 것인가. 만일 임술壬戌년 고구려高句麗 싸움에 신라 사람이 정방定方의 군사를 죽였다면 그 후일後日인 총장總章 무진戊辰에 어찌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高句麗를 멸할 수가 있었겠는가. 이것으로 보면 향전鄕傳의 근거 없음을 알 수가 있다. 다만 무진戊辰에 고구려를 멸한 후에 唐나라에 신하로서 섬기지 않고 만대로 그 땅을 소유所有한 일은 있었으나 소정방蘇定方·이적李勣 두 공公을 죽이기까지 한 일은 없었다)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평정하고 돌아간 뒤에 신라 왕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백제의 남은 군사를 쫓아서 잡게 하고 한산성(漢山城)에 주둔하니 고구려·말갈(靺鞨)의 두 나라 군사가 와서 포위하여 서로 싸웠으나 끝이 나지 않아 5월 11일에 시작해 6월 22일에 이르니 우리 군사는 몹시 위태로웠다. 왕이 듣고 여러 신하와 의논했으나 장차 어찌할 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유신이 달려와서 아뢴다. "일이 급하여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가 없고, 오직 신술(神術)이라야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하고 성부산(星浮山)에 단(壇)을 모드고 신술을 쓰니 갑자기 큰 독만한 광채가 단 위에서 나오더니 별이 북쪽으로 날아갔다(이 일로 해서 성부산星浮山이라고 하나 산의 이름에 대해서는 다른 설說도 있다. 산山은 도림都林 남쪽에 있는데 솟은 한 봉우리가 이것이다. 서울에서 한 사람이 벼슬을 구하려고 그 아들을 시켜 큰 횃불을 바라보고 모두 말하기를, 그곳에 괴상한 별이 나타났다고 했다. 王이 이 말을 듣고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사람을 모아 기도하게 했더니 그 아버지가 거기에 응모應募하려 했다. 그러나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것은 별로 괴상한 일이 아니옵고 다만 한 집에 아들이 죽고 아비가 울 징조입니다" 했다. 그래서 드디어 기도를 그만두었다. 이날 밤 그 아들이 산에서 내려오다가 범에게 물려 죽었다). 한산성 안에 있던 군사들은 구원병이 오지 않는 것을 원망하여 서로 보고 울 뿐이었는데 이때 적병이 이를 급히 치고자 하자 갑자기 광채가 남쪽 하늘 끝으로부터 오더니 벼락이 되어 적의 포석(砲石) 30여 곳을 쳐부쉈다. 이리하여 적군의 활과 화살과 창이 부서지고 군사들은 모두 땅에 자빠졌다가 한참 만에야 깨어나서 모두 흩어져 달아나니 우리 군사는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이 처음 왕위에 오르자, 어떤 사람이 돼지를 바쳤는데 머리는 하나요 몸뚱이는 둘이요, 발은 여덟이었다. 의론하는 자가 이것을 보고 말했다. "이것은 반드시 육합(六合)을 통일할 상서(祥瑞)입니다." 이 왕대(王代)에 비로소 중국의 의관(衣冠)과 아홀(牙笏)을 쓰게 되었는데 이것은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나라 황제에게 청해서 가져온 것이었다.
신문왕(神文王) 때에 당나라 고종(高宗)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서 말했다. "나의 성고(聖考) 당태종(唐太宗)은 어진 신하 위징(魏徵)·이순풍(李淳風)들을 얻어 마음을 합하고 덕을 같이하여 천하를 통일했다. 그런 때문에 이를 태종황제(太宗皇帝)라고 했다. 너의 신라는 바다 밖의 작은 나라로서 태종(太宗)이란 칭호(稱號)를 써서 천자(天子)의 이름을 참람되이 하고 있으니 그 뜻이 충성되지 못하다. 속히 그 칭호를 고치도록 하라." 이에 신라왕은 표(表)를 올려 말했다.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지만 성스러운 신하 김유신을 얻어 삼국을 통일했으므로 태종(太宗)이라 한 것입니다." 당나라 황제가 그 글을 보고 생각하니, 그가 태자로 있을 때에 하늘에서 허공에 대고 부르기를, "삼삼천(三三天)의 한 사람이 신라에 태어나서 김유신이 되었느니라" 한 일이 있어서 책에 기록해 둔 일이 있는데, 이것을 꺼내 보고는 놀라고 두려움을 참지 못했다. 다시 사신을 보내어 태종의 칭호를 고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
처음에 백제 군사와 황산에서 싸울 때 장춘랑(長春郞)과 파랑(波浪)이 진중(陣中)에서 죽었다. 그 뒤 백제를 칠 때 그들은 태종(太宗)의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신 등이 옛날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쳤고, 이제 백골(白骨)이 되어서도 나라를 완전히 지키려고 종군(從軍)하여 게으르지 않습니다. 하오나 당(唐)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의 위엄에 눌려서 남의 뒤로만 쫓겨다니고 있습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우리에게 적은 군사를 주십시오."
대왕(大王)은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두 혼(魂)을 위하여 하룻동안 모산정(牟山亭)에서 불경(佛經)을 외고 또 한산주(漢山州)에 장의사(壯義寺)를 세워 그들의 명복(冥福)을 빌게 했다.
왕이 처음 즉위한 용삭(龍朔) 신유(辛酉; 661)에 사자수(泗차水) 남쪽 바닷속에 한 여자의 시체(屍體)가 있는데, 키는 73척, 발의 길이는 6척, 음문(陰門)의 길이가 3척이었다. 혹은 말하기를 키가 18척이며 건봉(乾封) 2년 정묘(丁卯; 667)의 일이라고 했다.
총장(總章) 무진(戊辰; 668)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인문(仁問)·흠순(欽純) 등과 함께 평양(平壤)에 이르러 당(唐)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켰다.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은 고장왕(高藏王)을 잡아가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왕王의 성姓이 고高씨이므로 고장高藏이라 했다. <당서唐書> 고종기高宗紀를 상고해 보면, 현경現慶 5년 경신庚申(660)에 소정방蘇定方 등이 백제百濟를 정벌하고 그 뒤 12월에 대장군大將軍 계여하契如何로 패강도浿江道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을, 또 소정방蘇定方으로 요동도遼東道 대총관大摠管을 삼고, 유백영劉伯英으로 평양도平壤道 대총관大摠管을 삼아서 고구려를 쳤다. 또 다음해 신유辛酉 정월正月에는 소사업蕭嗣業으로 부여도扶餘道 총관摠管을 삼고, 임아상任雅相으로 패강도浿江道 총관摠管을 삼아 군사 35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했다. 8월 갑술甲戌에 소정방蘇定方 등은 고구려와 패강浿江에서 싸우다가 패해서 도망했다. 건봉乾封 원元년 병인丙寅(666) 6월에 방동선龐同善·고임高臨·설인귀薛仁貴·이근행李謹行 등으로 이를 후원케 했다. 9월에 방동선龐同善이 고구려와 싸워서 패했다. 12월 기유己酉에 이적李勣으로 요동도遼東道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을 삼아 육총관六摠管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했다. 총장總章 원元년 무진戊辰(668) 9월 계사癸巳에 이적李勣이 고장왕高藏王을 사로잡았다. 12월 정사丁巳에 포로를 황제에게 바쳤다. 상원上元 원년元年 갑술甲戌(674) 2월에 유인궤劉仁軌로 계림도鷄林道 총관摠管을 삼아서 신라를 치게 했다. 우리 나라 <고기古記>에는 "당唐나라가 육로장군陸路將軍 공공孔恭과 수로장군水路將軍 유상有相을 보내서 신라의 김유신金庾信 등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인문仁問과 흠순欽純 등의 일만 말하고 유신庾信은 없으니 자세히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때 당나라의 유병(游兵)과 여러 장병(將兵)들이 진(鎭)에 머물러 있으면서 장차 우리 신라(新羅)를 치려고 했으므로 왕이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쳤다. 이듬해에 당나라 고종(高宗)이 인문(仁問) 등을 불러들여 꾸짖기를, "너희가 우리 군사를 청해다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서 이제 우리를 침해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하고 이내 원비(圓扉)에 가두고 군사 50만 명을 훈련하여 설방(薛邦)으로 장수를 삼아 신라를 치려고 했다.
이때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유학(留學)하러 당나라에 갔다가 인문을 찾아보자 인문은 그 사실을 말했다. 이에 의상이 돌아와서 왕께 아뢰니 왕은 몹시 두려워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것을 막아 낼 방법을 물었다. 각간(角干) 김천존(金天尊)이 말했다. "요새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용궁(龍宮)에 들어가서 비법(秘法)을 배워 왔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십시오." 명랑이 말했다. "낭산(狼山)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 있으니 거기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우고 도량(道場)을 개설(開設)하면 좋겠습니다." 그때 정주(貞州)에서 사람이 달려와 보고한다. "당나라 군사가 무수히 우리 국경에 이르러 바다 위를 돌고 있습니다." 왕은 명랑을 불러 물었다. "일이 이미 급하게 되었으니 어찌 하면 좋겠는가." 명랑이 말한다. "여러 가지 빛의 비단으로 절을 가설(假設)하면 될 것입니다." 이에 채색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만들고 풀[草]로 오방(五方)의 신상(神像)을 만들었다. 그리고 유가(瑜伽)의 명승(明僧) 열두 명으로 하여금 명랑을 우두머리로 하여 문두루(文豆婁)의 비밀한 법(法)을 쓰게 했다. 그때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는 아직 교전(交戰)하기 전인데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서 당나라 군사는 모두 물속에 침몰(沈沒)되었다. 그 후에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四天王寺)라 하여 지금까지 단석(壇席)이 없어지지 않았다(<국사國史>에는 이 절을 고쳐 지은 것이 조로調露 원년元年 기묘己卯(679)의 일이라고 했다).
그 후 신미년(辛未; 671)에 당나라는 다시 조헌(趙憲)을 장수로 하여 5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으므로 또 그전의 비법을 썼더니 배는 전과 같이 침몰되었다. 이때 한림랑(翰林郞) 박문준(朴文俊)은 인문을 따라 옥중에 있었는데 고종(高宗)이 문준을 불러서 묻는다. "너희 나라에는 무슨 비법이 있기에 두 번이나 대병(大兵)을 내었는데도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느냐." 문준이 아뢰었다. "배신(陪臣)들은 상국(上國)에 온 지 10여 년이 되었으므로 본국의 일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멀리서 한 가지 일만을 들었을 뿐입니다. 저희 나라가 상국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삼국을 통일하였기에 그 은덕(恩德)을 갚으려고 낭산(狼山) 남쪽에 새로 천왕사(天王寺)를 짓고 황제의 만년 수명(萬年壽命)을 빌면서 법석(法席)을 길이 열었다는 일뿐입니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이에 예부시랑(禮部侍郞) 낙붕귀(樂鵬龜)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그 절을 살펴보도록 했다. 신라 왕은 당나라 사신이 온다는 사실을 먼저 알고 이 절을 사신에게 보여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새 절을 지어 놓고 기다렸다. 사신이 와서 청한다. "먼저 황제의 수(壽)를 비는 천왕사에 가서 분향(焚香)하겠습니다." 이에 새로 지은 절로 그를 안내하자 그 사신은 절 문 앞에 서서, "이것은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군요"하고는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국인(國人)들이 금 1,000냥을 주었더니 그는 본국에 돌아가서 아뢰기를, "신라에서는 천왕사(天王寺)를 지어 놓고 황제의 수(壽)를 축원할 뿐이었습니다"했다. 이때 당나라 사신의 말에 의해 그 절을 망덕사(望德寺)라고 했다(혹 효소왕孝昭王 때의 일이라고 하나 잘못이다).
신라 왕은 문준이 말을 잘해서 황제도 그를 용서해 줄 뜻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강수(强首) 선생에게 명하여 인문의 석방을 청하는 표문(表文)을 지어 사인(舍人) 원우(遠禹)를 시켜 당나라에 아뢰게 했더니 황제는 표문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인문을 용서하고 위로해 돌려보냈다. 인문이 옥중에 있을 때 신라 사람은 그를 위하여 절을 지어 인용사(仁容寺)라 하고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열었는데 인문이 돌아오다가 바다 위에서 죽었기 때문에 미타도량(彌陀道場)으로 고쳤다. 지금까지도 그 절이 남아 있다. 대왕(大王)이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 만인 영륭(永隆) 2년 신미(辛未; 681)에 죽으니 유명(遺命)에 의해서 동해중(東海中)의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다. 왕은 평시(平時)에 항상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말했다. "나는 죽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용(龍)이 되어 불법을 숭봉(崇奉)해서 나라를 수호하려 하오." 이에 법사가 말했다. "용은 짐승의 응보(應報)인데 어찌 용이 되신단 말입니까." 왕이 말했다. "나는 세상의 영화(榮華)를 싫어한 지가 오래되오. 만일 추한 응보로 내가 짐승이 된다면 이야말로 내 뜻에 맞는 것이오."
왕이 처음 즉위했을 때 남산(南山)에 장창(長倉)을 설치하니, 길이가 50보(步), 너비가 15보(步)로 미곡(米穀)과 병기(兵器)를 여기에 쌓아 두니 이것이 우창(右倉)이요, 천은사(天恩寺) 서북쪽 산 위에 있는 것은 좌창(左倉)이다. 다른 책에는, "건복(建福) 8년 신해(辛亥; 591)에 남산성(南山城)을 쌓았는데 그 둘레가 2,850보(步)다"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진덕왕대(眞德王代)에 처음 쌓았다가 이때에 중수(重修)한 것이다. 또 부산성(富山城)을 처음으로 쌓기 시작하여 3년 만에 마치고 안북하변(安北河邊)에 철성(鐵城)을 쌓았다. 또 서울에 성곽(城郭)을 쌓으려 하여 이미 관리(官吏)를 갖추라고 명령하자 그때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이 말을 듣고 글을 보내서 아뢰었다. "왕의 정교(政敎)가 밝으시면 비록 풀 언덕에 금을 그어 성이라 해도 백성들은 감히 이것을 넘지 않을 것이며, 재앙을 씻어 깨끗이 하고 모든 것이 복이 될 것이나, 정교(政敎)가 밝지 못하면 비록 장성(長城)이 있다 하더라도 재화(災禍)를 없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왕은 이 글을 보고 이내 그 역사(役事)를 중지시켰다.
인덕(麟德) 3년 병인 (丙寅;666) 3월 10일에 어떤 민가(民家)에서 길이(吉伊)라는 종이 한꺼번에 세 아들을 낳았다. 총장(總章) 3년 경오(庚午; 670) 정월 7일에는 한기부(漢岐部)의 일산급간(一山級干; 혹은 성산아간成山阿干)의 종이 한꺼번에 네 아이를 낳았는데 딸 하나에 아들 셋이었다. 나라에서 상으로 곡식 200석(石)을 주었다. 또 고구려를 친 뒤에 그 나라 왕손(王孫)이 귀화(歸化)하자 그를 진골(眞骨)의 지위에 두게 했다.
어느날 왕은 그의 서제(庶弟) 차득공(車得公)을 불러서 말하기를, "네가 재상이 되어 백관(百官)들을 고루 다스리고 사해(四海)를 태평하게 하라"하니 차득공은 말한다. "폐하께서 만일 소신(小臣)을 재상으로 삼으시려 하신다면 신은 원컨대 남몰래 국내를 돌아다니면서 민간부역(民間賦役)의 괴롭고 편안한 것과, 조세(租稅)의 가볍고 무거운 것과, 관리(官吏)의 청렴하고 재물을 탐하는 것을 알아 보고 난 뒤에 그 직책을 맡을까 합니다." 왕은 그 말을 좇았다. 공(公)은 승의(僧衣)를 입고 비파(琵琶)를 들어 마치 거사(居士)의 모습을 하고 서울을 떠났다. 아슬라주(阿瑟羅州; 지금의 명주溟州)·우수주(牛首州; 지금의 춘주春州)·북원경(北原京; 지금의 충주忠州)을 거쳐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해양海陽)에 이르러 두루 촌락(村落)을 돌아다니노라니 무진주의 관리 안길(安吉)이 그를 이인(異人)인 줄 알고 자기 집으로 청해다가 정성을 다해서 대접했다. 밤이 되자 안길은 처첩(妻妾) 세 사람을 불러 말했다. "오늘밤에 거사(居士) 손님을 모시고 자는 자는 내가 몸을 마치도록 함께 살 것이오." 두 아내는, "차라리 함께 살지 못할지언정 어떻게 남과 함께 잔단 말이오"했다. 그 중에 아내 한 사람이 말한다. "그대가 몸을 마치도록 함께 살겠다면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이튿날 일찍 떠나면서 거사는 말했다. "나는 서울 사람으로서 내 집은 황룡사(皇龍寺)와 황성사(皇聖寺) 두 절 중간에 있고, 내 이름은 단오(端午; 속언俗言에 단오端午를 차의車衣라고 함)요. 주인이 만일 서울에 오거든 내 집을 찾아 주면 고맙겠소." 그 뒤에 차득공(車得公)은 서울로 돌아와서 재상이 되었다. 나라 법에 해마다 각 고을의 향리(鄕吏) 한 사람을 서울에 있는 여러 관청에 올려 보내서 지키게 했으니 이것이 곧 지금이 기인(其人)이다. 이때 안길이 차례가 되어 서울로 왔다. 두 절 사이로 다니면서 단오거사(端午居士)의 집을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다. 안길은 길 가에 오랫동안 서 있노라니 한 늙은이가 지나다가 그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말한다. "두 절 사이에 있는 집은 대내(大內)이고 단오란 바로 차득공(車得公)이오. 그가 외군(外郡)에 비밀히 돌았을 때 아마 그대는 어떠한 사연과 약속이 있었던 듯하오." 안길이 그 사실을 말하자, 노인은 말한다. "그대는 궁성(宮城) 서쪽 귀정문(歸正門)으로 가서 출입하는 궁녀(宮女)를 기다렸다가 말해 보오." 안길은 그 말을 좇아서 무진주의 안길이 뵈러 문밖에 왔다고 했다. 차득공이 이 말을 듣고 달려 나와 손을 잡아 궁중으로 들어가더니 공(公)의 비(妃)를 불러내어 안길과 함께 잔치를 벌였는데 음식이 50가지나 되었다. 이 말을 임금께 아뢰고 성부산(星浮山; 혹은 성손평산星損平山) 밑에 있는 땅을 무진주 상수(上守)의 소목전(燒木田)으로 삼아 백성들의 벌채(伐採)를 금지하여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니 안팎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했다. 산 밑에 밭 30무(畝)가 있는데 씨 3석(石)을 뿌리는 밭이다. 이 밭에 풍년이 들면 무진주가 모두 풍년이 들고, 흉년이 들면 무진주도 또한 흉년이 들었다 한다.
만파식적(萬波息笛)
제31대 신문대왕(神文大王)의 이름은 정명(政明), 성은 김씨(金氏)이다. 개요(開耀) 원년(元年) 신사(辛巳; 681) 7월 7일에 즉위했다. 아버지 문무대왕(文武大王)을 위하여 동해(東海) 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절 안에 있는 기록에는 이렇게 말했다. 문무왕文武王이 왜병倭兵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처음 창건創建했는데 끝내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龍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왕위王位에 올라 개요開耀 2년(682)에 공사를 끝냈다. 금당金堂 뜰 아래에 동쪽을 향해서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으니 용龍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개 유언遺言으로 유골遺骨을 간직해 둔 곳은 대왕암大王岩이고, 절 이름은 감은사感恩寺이다. 뒤에 용龍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했다). 이듬해 임오(壬午) 5월 초하루(다른 책에는 천수天授 원년元年이라 했으나 잘못)에 해관(海官) 파진찬(波珍飡) 박숙청(朴夙淸)이 아뢰었다. "동해 속에 있는 작은 산 하나가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는데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왔다갔다 합니다." 왕이 이상히 여겨 일관(日官) 김춘질(金春質; 혹은 춘일春日)을 명하여 점을 치게 했다. "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龍)이 되어 삼한(三韓)을 진호(鎭護)하고 계십니다. 또 김유신공(金庾信公)도 삼삼천(三三天)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 세계에 내려와 대신(大臣)이 되었습니다. 이 두 성인(聖人)이 덕(德)을 함께 하여 이 성을 지킬 보물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만일 폐하께서 바닷가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으실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여 그달 7일에 이견대(利見臺)로 나가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살펴보도록 했다. 산 모양은 마치 거북의 머리처럼 생겼는데 산 위에 한 개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합해서 하나가 되었다. 사자(使者)가 와서 사실대로 아뢰었다. 왕은 감은사에서 묵는데 이튿날 점심 때 보니 대나무가 합쳐져서 하나가 되는데, 천지(天地)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치며 7일 동안이나 어두웠다. 그 달 16일에 가니 용 한 마리가 검은 옥대(玉帶)를 받들어 바친다. 왕은 용을 맞아 함께 앉아서 묻는다. "이 산이 대나무와 함께 혹은 갈라지고 혹은 합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용이 대답한다. "비유해 말씀드리자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오니, 성왕(聖王)께서는 소리로 천하를 다스리실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부시면 온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이제 대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닷속의 큰 용이 되셨고 유신은 다시 천신(天神)이 되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 하여 이런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보내시어 나로 하여금 바치게 한 것입니다." 왕은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五色) 비단과 금(金)과 옥(玉)을 주고는 사자(使者)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때 산과 용은 갑자기 모양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왕이 감은사에서 묵고 17일에 지림사(祗林寺)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太子) 이공(理恭; 즉 효소대왕孝昭大王)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하례하고는 천천히 살펴보고 아뢰었다. "이 옥대(玉帶)의 여러 쪽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 왕이 말한다. "네가 어찌 그것을 아느냐." "이 쪽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 보십시오." 이에 옥대의 왼편 둘째 쪽을 떼어서 시냇물에 넣으니 금시에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이내 못이 되었으니 그 못을 용연(龍淵)이라고 불렀다. 왕이 대궐로 돌아오자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천존고(月城天尊庫)에 간직해 두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敵兵)이 물러가고 병(病)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지면 날이 개며, 바람이 멎고 물결이 가라앉는다.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國寶)로 삼았다. 효소왕(孝昭王) 때에 이르러 천수(天授) 4년 계사(癸巳; 693)에 부례랑(夫禮郞)이 살아서 돌아온 이상한 일로 해서 다시 이름을 고쳐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했다. 자세한 것은 그의 전기(傳記)에 실려 있다.
효소왕대(孝昭王代)의 죽지랑(竹旨郞; 죽만竹曼 또는 지관智官이라고도 한다)
제32대 효소왕(孝昭王) 때에 죽만랑(竹曼郞)의 무리 가운데 득오(得烏; 혹은 득곡得谷) 급간(級干)이 있어서 풍류황권(風流黃卷)에 이름을 올려 놓고 날마다 나오고 있었는데, 한 번은 10일이 넘도록 보이지 않았다. 죽만랑은 그의 어머니를 불러 그대의 아들이 어디 있는가를 물으니 어머니는 말한다. "당전(幢典) 모량부(牟梁部)의 익선아간(益宣阿干)이 내 아들을 부산성(富山城) 창직(倉直)으로 보냈으므로 빨리 가느라고 미처 그대에게 인사도 하지 못했습니다." 죽만랑이 말한다. "그대의 아들이 만일 사사로운 일로 간 것이라면 찾아볼 필요가 없겠지만 이제 공사(工事)로 갔다니 마땅히 가서 대접해야겠소." 이에 떡 한 그릇과 술 한 병을 가지고 좌인(左人; 우리말에 개질지皆叱知라는 것이니 이는 노복奴僕을 말한다)을 거느리고 찾아가니 낭(郎)의 무리 137명도 위의(威儀)를 갖추고 따라갔다.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득오실(得烏失)이 어디 있는가고 물으니 문지기는 대답한다. "지금 익선(益宣)의 밭에서 예(例)에 따라 부역(賦役)을 하고 있습니다." 낭은 밭으로 찾아가서 가지고 간 술과 떡을 대접했다. 익선에게 휴가를 청하여 함께 돌아오려 했으나 익선은 굳이 반대하고 허락하지 않는다. 이때 사리(使吏) 간진(侃珍)이 추화군(推火郡) 능절(能節)의 조(租) 30석(石)을 거두어 싣고, 성안으로 가고 있었다. 죽만랑이 선비를 소중히 여기는 풍미(風味)를 아름답게 여기고, 익선의 고집불통을 비루하게 여겨 가지고 가던 30석을 익선에게 주면서 휴가를 주도록 함께 청했으나 그래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번엔 진절(珍節) 사지(舍知)의 말안장을 주니 그제야 허락했다. 조정의 화주(花主)가 이 말을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서 익선을 잡아다가 그 더럽고 추한 것을 씻어 주려 하니, 익선은 도망하여 숨어 버렸다. 이에 그의 맏아들을 잡아갔다. 때는 중동(仲冬) 몹시 추운 날인데 성안에 있는 못[池]에서 목욕을 시키자 얼어붙어 죽었다.
효소왕(孝昭王)이 그 말을 듣고 명령하여 모량리(牟梁里) 사람으로 벼슬에 오른 자는 모조리 쫓아내어 다시는 관청에 붙이지 못하게 하고, 승의(僧衣)를 입지 못하게 하고, 만일 중이 된 자라도 종을 치고 북을 울리는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칙사(勅使)가 간진(侃珍)의 자손을 올려서 칭정호손(秤定戶孫)을 삼아 남달리 표창했다. 이때 원측법사(圓測法師)는 해동(海東)의 고승(高僧)이었지만 모량리(牟梁里) 사람인 때문에 승직(僧職)을 주지 않았다.
처음에 술종공(述宗公)이 삭주도독사(朔州都督使)가 되어 임지(任地)로 가는데, 마침 삼한(三韓)에 병란(兵亂)이 있어 기병(騎兵) 3,000명으로 그를 호송하게 했다. 일행이 죽지령(竹旨嶺)에 이르니 한 거사(居士)가 그 고갯길을 닦고 있었다. 공(公)이 이것을 보고 탄복하여 칭찬하니 거사도 공의 위세가 놀라운 것을 보고 좋게 여겨 서로 마음 속에 감동한 바가 있었다. 공이 고을의 임소(任所)에 부임한 지 한 달이 지나서 꿈에 거사가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공의 아내도 같은 꿈을 꾸었다. 더욱 놀라고 괴상히 여겨 이튿날 사람을 시켜 거사의 안부를 물으니 그곳 사람들이 "거사는 죽은 지 며칠 되었습니다" 한다. 사자(使者)가 돌아와 고하는데 그가 죽은 것은 꿈을 꾸던 것과 같은 날이었다. 이에 공이 말한다. "필경 거사는 우리 집에 태어날 것이다." 공은 다시 군사를 보내어 고개 위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내고, 돌로 미륵(彌勒)을 하나 만들어 무덤 앞에 세워 놓았다. 공의 아내는 그 꿈을 꾸던 날로부터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죽지(竹旨)라고 했다. 이 죽지랑(竹旨郞)이 커서 벼슬을 하게 되어 유신공(庾信公)과 함께 부수(副師)가 되어 삼한을 통일했다. 진덕(眞德)·태종(太宗)·문무(文武)·신문(神文)의 4대에 걸쳐 재상으로서 이 나라를 안정시켰다.
처음에 득오곡(得烏谷)이 죽만랑(竹曼郞)을 사모하여 노래를 지으니 이러하다.
간 봄 그리워하니, 모든 것이 시름이로세.
아담하신 얼굴, 주름살 지시려 하네.
눈 돌릴 사이에나마, 만나뵙도록 기회 지으리라.
낭(郎)이여! 그리운 마음에, 가고 오는 길.
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 있으리.
성덕왕(聖德王)
제33대 성덕왕(聖德王) 신룡(神龍) 2년 병오(丙午; 706)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몹시 굶주렸다. 그 이듬해인 정미년(丁未年; 707) 정월 초하루부터 7월 30일에 이르기까지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곡식을 나누어 주는데, 한 식구에 하루 서 되(三升)씩으로 정했다. 일을 마치고 계산해 보니 도합 30만 500석이었다.
왕이 태종대왕(太宗大王)을 위해서 봉덕사(奉德寺)를 세우고 7일간 인왕도량(仁王道場)을 열고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이때 비로소 시중(侍中)이라는 직책을 두었다(다른 책에는 효성왕孝成王 때의 일이라고 했다).
수로부인(水路夫人)
성덕왕(聖德王) 때 순정공(純貞公)이 강릉태수(江陵太守; 지금의 명주溟州)로 부임하는 도중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곁에는 돌 봉우리가 병풍과 같이 바다를 두르고 있어 그 높이가 천 길이나 되는데, 그 위에 철쭉꽃이 만발하여 있다. 공의 부인 수로(水路)가 이것을 보더니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꽃을 꺾어다가 내게 줄 사람은 없는가." 그러나 종자(從者)들은, "거기에는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입니다"하고 아무도 나서지 못한다. 이때 암소를 끌고 길을 지나가던 늙은이 하나가 있었는데 부인의 말을 듣고는 그 꽃을 꺾어 가사(歌詞)까지 지어서 바쳤다. 그러나 그 늙은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뒤 편안하게 이틀을 가다가 또 임해정(臨海亭)에서 점심을 먹는데 갑자기 바다에서 용이 나타나더니 부인을 끌고 바닷 속으로 들어갔다. 공이 땅에 넘어지면서 발을 굴렀으나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또 한 노인이 나타나더니 말한다. "옛 사람의 말에, 여러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 했으니 이제 바닷 속의 용인들 어찌 여러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경내(境內)의 백성들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지팡이로 강언덕을 치면 부인을 만나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공이 그대로 하였더니 용이 부인을 모시고 나와 도로 바쳤다. 공이 바닷속에 들어갔던 일을 부인에게 물으니 부인이 말한다. "칠보궁전(七寶宮殿)에 음식은 맛있고 향기롭게 깨끗한 것이 인간의 연화(煙火)가 아니었습니다." 부인의 옷에서 나는 이상한 향기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수로부인은 아름다운 용모가 세상에 뛰어나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 차례 신물(神物)에게 붙들려 갔다.
이때 여러 사람이 부르던 해가(海歌)의 가사는 이러했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부인 앗아간 죄 그 얼마나 크랴.
네 만일 거역하고 내놓지 않는다면, 그물로 잡아서 구워 먹으리
노인의 헌화가(獻花歌)는 이러했다.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
저 꽃 꺾어 바치오리다.
효성왕(孝成王)
개원(開元) 10년 임술(壬戌; 722) 10월에 처음으로 모화군(毛火郡)에 관문(關門)을 쌓았는데 지금의 모화촌(毛火村)으로서 경주(慶州) 동남쪽 경계에 속한다. 이것은 곧 일본을 막는 요새(要塞)가 되기도 했다. 둘레는 6,792보(步) 5척(尺), 여기에 쓰인 인부(人夫)는 3만 9,262명이고 역사를 감독한 사람은 원진각간(元眞角干)이었다.
개원(開元) 21년 계유(癸酉; 733)에 당(唐)나라 사람들이 북적(北狄)을 치려 하여 신라에 군대를 청해 왔다. 이때 사신 604명이 신라에 왔다가 돌아갔다.
경덕왕(景德王)·충담사(忠談師)·표훈대덕(表訓大德)
당(唐)나라에서 덕경(德經) 등을 보내 오자 대왕(大王)이 예를 갖추어 이를 받았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五岳)과 삼산신(三山神)들이 때때로 나타나서 대궐 뜰에서 왕을 모셨다. 3월 3일 왕이 귀정문(歸正門) 누각 위에 나가서 좌우 신하들에게 일렀다. "누가 길거리에서 위의(威儀) 있는 중 한 사람을 데려올 수 있겠느냐." 이때 마침 위의 있고 깨끗한 고승(高僧) 한 사람이 길에서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었다. 좌우 신하들이 이 중을 왕에게로 데리고 오니, 왕이 "내가 말하는 위의 있는 중이 아니다"하고 그를 돌려보냈다. 다시 중 한 사람이 있는데 납의(衲衣)를 입고 앵통(櫻筒)을 지고 남쪽에서 오고 있었는데 왕이 보고 기뻐하여 누각 위로 영접했다. 통 속을 보니 다구(茶具)가 들어 있었다. 왕은 물었다. "그대는 대체 누구요?" "소승(小僧)은 충담(忠談)이라고 합니다." "어디서 오는 길이오?" "소승은 3월 3일과 9월 9일에는 차를 달여서 남산(南山) 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彌勒世尊)께 드리는데, 지금도 드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나에게도 그 차를 한 잔 나누어 주겠는가요." 중이 이내 차를 달여 드리니 차맛이 이상하고 찻잔 속에서 이상한 향기가 풍긴다. 왕이 다시 물었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스님이 기파랑(耆婆郞)을 찬미(讚美)한 사뇌가(詞腦歌)가 그 뜻이 무척 고상(高尙)하다고 하니 그 말이 과연 옳은가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하여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주시오." 충담은 이내 왕의 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치니 왕은 아름답게 여기고 그를 왕사(王師)로 봉했으나 충담은 두 번 절하고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안민가는 이러하다.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스런 어머니시라.
백성을 어리석은 아이라 여기시니,
백성이 그 은혜를 알리.
꾸물거리면서 사는 물생(物生)들에게, 이를 먹여 다스리네.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랴, 나라 안이 유지됨을 알리.
後句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하면,
나라는 태평하리이다.
기파랑(耆婆郞)을 찬미한 노래
헤치고 나타난 달이, 흰 구름 쫓아 떠가는 것 아닌가.
새파란 시내에, 기파랑의 모습 잠겼어라.
일오천(逸烏川) 조약돌에서, 낭(郎)이 지니신 마음 좇으려 하네.
아아! 잣나무 가지 드높아,
서리 모를 그 씩씩한 모습이여!
경덕왕(景德王)은 옥경(玉莖)의 길이가 여덟 치나 되었다. 아들이 없어 왕비(王妃)를 폐하고 사량부인(沙梁夫人)에 봉했다. 후비(後妃) 만월부인(滿月夫人)의 시호(諡號)는 경수태후(景垂太后)이니 의충(依忠) 각간(角干)의 딸이었다. 어느날 왕은 표훈대덕(表訓大德)에게 명했다. "내가 복이 없어서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바라건대 대덕은 상제(上帝)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해 주오." 표훈은 명령을 받아 천제(天帝)에게 올라가 고하고 돌아와 왕께 아뢰었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딸을 구한다면 될 수 있지만 아들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왕은 다시 말한다. "원컨대 딸을 바꾸어 아들로 만들어 주시오." 표훈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 천제께 청하자 천제는 말한다. "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아들이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 표훈이 내려오려고 하자 천제는 또 불러 말한다. "하늘과 사람 사이를 어지럽게 할 수는 없는 일인데 지금 대사(大師)는 마치 이웃 마을을 왕래하듯이 하여 천기(天機)를 누설했으니 이제부터는 아예 다니지 말도록 하라." 표훈은 돌아와서 천제의 말대로 왕께 알아듣도록 말했건만 왕은 다시 말한다. "나라는 비록 위태롭더라도 아들을 얻어서 대를 잇게 하면 만족하겠소." 이리하여 만월왕후(滿月王后)가 태자를 낳으니 왕은 무척 기뻐했다. 8세 때에 왕이 죽어서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혜공대왕(惠恭大王)이다. 나이가 매우 어린 때문에 태후(太后)가 임조(臨朝)하였는데 정사가 다스려지지 못하고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 이루 막을 수가 없다. 표훈 대사의 말이 맞은 것이다.
왕은 이미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기 때문에 돌날부터 왕위에 오르는 날까지 항상 여자의 놀이를 하고 자랐다.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도류(道流)와 어울려 희롱하고 노니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지고 마침내 선덕왕(宣德王)과 김양상(金良相)에게 죽음을 당했다.
표훈 이후에는 신라에 성인이 나지 않았다.
혜공왕(惠恭王)
대력(大曆) 초년에 강주(康州) 관청의 대당(大堂) 동쪽에서 땅이 점점 꺼져서 못이 되었는데(다른 책에는 대사大寺 동쪽의 조그만 못이라 했다) 세로가 13척, 가로가 7척이었다. 갑자기 잉어 5, 6마리가 나타나더니 계속해서 점점 커지고 여기에 따라 못도 커졌다.
2년 정미(丁未; 667)에는 또 천구성(天狗星)이 동루(東樓) 남쪽에 떨어졌는데 머리는 항아리만하고 꼬리는 3척 가량이나 되며, 빛은 활활 타오르는 불과 같고, 이 때문에 하늘과 땅도 또한 진동했다.
또 이 해에 금포현(今浦縣)의 오경(頃) 가량의 논 속에서 쌀이 모두 이삭으로 매달렸다. 7울에는 북궁(北宮) 뜰 안에 먼저 두 별이 떨어지고 또 한 별이 떨어지니 세 별이 모두 땅 속으로 들어갔다.
이보다 먼저 대궐 북쪽 뒷간 속에서 두 줄기 연(蓮)이 나고 또 봉성사(奉聖寺) 밭 속에서도 연이 생겨났으며 범이 궁성 안으로 들어온 것을 쫓아가 잡으려다가 놓쳤으며, 각간(角干) 대공(大恭)의 집 배나무 위에 참새가 무수히 모여들었다. <안국병법(安國兵法)> 하권(下卷)에 의하면, 이런 일이 있으면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진다는 것이다. 이에 임금은 대사령(大赦令)을 내리고 몸을 닦고, 반성했다.
7월 3일에 각간 대공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과 오도(五道)의 주군(州郡) 도합 96명의 각간(角干)들이 서로 싸워 크게 어지러웠다. 각간 대공의 집이 망하자 그 집의 재산과 보물과 비단 등을 모두 왕궁(王宮)으로 옮겼는데, 신성(新城)의 장창(長倉)이 불에 타자 사량(沙梁)·모량(牟梁) 등 마을에 있던 역적들의 보물과 곡식을 또한 왕궁으로 운반해 들였다. 난리가 3개월만에 멎으니 상(賞)을 받은 사람도 제법 많았으나 죽음을 당한 자도 수없이 많았으니, 표훈이 "나라가 위태롭다"고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원성대왕(元聖大王)
이찬(伊飡) 김주원(金周元)이 맨처음에 상재(上宰)가 되고 왕은 각간(角干)으로서 상재의 다음 자리에 있었는데, 꿈이 복두(복頭)를 벗고 흰 갓을 쓰고 열두 줄 가야금을 들고 천궁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꿈에서 깨어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했더니 "복두(복頭)를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요, 가야금을 든 것은 칼을 쓸 징조요,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입니다"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근심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이때 아찬(阿飡) 여삼(餘三; 어떤 책에는 여산餘山이라 함)이 와서 뵙기를 청했으나 왕은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았다. 아찬이 다시 청하여 한 번 뵙기를 원하므로 왕이 이를 허락하니 아찬이 물었다. "공께서 꺼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왕이 꿈을 점쳤던 일을 자세히 말하니 아찬이 일어나서 절하고 말한다. "이는 좋은 꿈입니다. 공이 만일 왕위에 올라서도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해서 꿈을 풀어 보겠습니다." 왕이 이에 좌우 사람들을 물리고 아찬에게 해몽(解夢)하기를 청하니 아찬은 말한다.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앉는 이가 없다는 것이요,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요, 열두 줄 가야금을 든 것은 12대손(代孫)이 왕위를 이어받을 징조요,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에 들어갈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이 말한다. "위에 주원(周元)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상위(上位)에 있을 수가 있단 말이오?" 아찬이 "비밀히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지내면 좋을 것입니다"하니 이에 따랐다.
얼마 안 되어 선덕왕(宣德王)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은 김주원(金周元)을 왕으로 삼아 장차 궁으로 맞아들이려 했다. 그의 집이 북천(北川) 북쪽에 있었는데 갑자기 냇물이 불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 이에 왕이 먼저 궁에 들어가 왕위에 오르자 대신(大臣)들이 모두 와서 따라 새 임금에게 축하를 드리니 이가 원성대왕(元聖大王)이다.
왕의 이름은 경신(敬信)이요 성(姓)은 김씨(金氏)이니 대개 길몽(吉夢)이 맞은 것이었다. 주원은 명주(溟洲)에 물러가 살았다. 경신이 왕위에 올랐으나 이 때 여산(餘山)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의 자손들을 불러 벼슬을 주었다. 왕에게는 손자가 다섯 있었으니, 혜충태자(惠忠太子)·헌평태자(憲平太子)·예영잡간(禮英잡干)·대룡부인(大龍夫人)·소룡부인(小龍夫人) 등이다.
대왕(大王)은 실로 인생의 곤궁하고 영화로운 이치를 알았으므로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 노래는 없어져서 자세치 못하다)를 지을 수가 있었다. 왕의 아버지 대각간(大角干) 효양(孝讓)이 조종(祖宗)의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왕에게 전했다. 왕은 이것을 얻게 되었으므로 하늘의 은혜를 두텁게 입고 그 덕이 멀리까지 빛났던 것이다.
정원(貞元) 2년 병인(丙寅; 786) 10월 11일에 일본왕 문경(文慶; <일본제기日本帝紀>를 보면 제55대 왕 문덕文德이라고 했는데 아마 이인 듯하다. 그 밖에 문경文慶은 없다. 어떤 책에는 이 왕王의 태자太子라고 했다)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다가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물리고 금(金) 50냥을 사자(使者)에게 주어 보내서 피리를 달라고 청하므로 왕이 사자에게 일렀다. "나는 들으니 상대(上代) 진평왕(眞平王) 때에 그 피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듬해 7월 7일에 다시 사자를 보내어 금 1,000냥을 가지고 와서 청하며 말하기를 "내가 그 신비로운 물건을 보기만 하고 그대로 돌려보내겠습니다"하였다. 왕은 먼저와 같은 대답으로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은(銀) 3,000냥을 그 사자에게 주고, 보내 온 금은 돌려주고 받지 않았다. 8월에 사자가 돌아가자 그 피리를 내황전(內黃殿)에 간수해 두었다.
왕이 즉위한 지 11년 을해(乙亥; 795)에 당(唐)나라 사자가 서울에 와서 한 달을 머물러 있다가 돌아갔는데, 하루 뒤에 두 여자가 내정(內廷)에 나와서 아뢴다. "저희들은 동지(東池)·청지(靑池; 청지靑池는 곧 동천사東泉寺의 샘이다. 절에 있는 기록을 보면 이 샘은 동해東海의 용龍이 왕래하면서 불법佛法을 듣던 곳이요 절은 진평왕眞平王이 지은 것으로서 오백五百 성중聖衆과 오층탑五層塔과 전민田民까지 함께 헌납했다고 했다)에 있는 두 용(龍)의 아내입니다. 그런데 당나라 사자가 하서국(河西國)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 남편인 두 용(龍)과 분황사(芬皇寺) 우물에 있는 용까지 모두 세 용의 모습을 바꾸어 작은 고기로 변하게 해서 통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그 두 사람에게 명령하여 우리 남편들인 나라를 지키는 용을 여기에 머무르게 해 주십시오." 왕은 하양관(河陽館)까지 쫓아가서 친히 연회를 열고 하서국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어찌해서 우리 나라의 세 용을 잡아 여기까지 왔느냐. 만일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반드시 사형(死刑)에 처할 것이다." 그제야 하서국 사람들이 고기 세 마리를 내어 바치므로 세 곳에 놓아 주자, 각각 물 속에서 한 길이나 뛰고 기뻐하면서 가 버렸다. 이에 당나라 사람들은 왕의 명철(明哲)함에 감복했다.
어느날 왕이 황룡사(皇龍寺; 어떤 책에는 화엄사華嚴寺라 했고, 또 금강사金剛寺라고도 했으니 이것은 아마 절 이름과 불경佛經 이름을 혼동한 것인 듯싶다)의 중 지해(智海)를 대궐 안으로 청하여 화엄경(華嚴經)을 50일 동안 외게 했다. 사미(沙彌) 묘정(妙正)이 매양 김광정(金光井; 대현법사大賢法師가 이 이름을 지었다) 가에서 바리때를 씻는데 자라 한 마리가 우물 속에서 떴다가는 다시 가라앉곤 하므로 사미는 늘 먹다 남은 밥을 자라에게 주면서 희롱했다. 법석(法席)이 끝나려 할 무렵 사미 묘정은 자라에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은덕을 베푼 지가 오랜데 너는 무엇으로 갚으려느냐?" 그런 지 며칠 후에 자라는 조그만 구슬 한 개를 입에서 토하더니 묘정에게 주려는 것같이 하므로 묘정은 그 구슬을 얻어 허리띠 끝에 달았다. 그 후로부터 대왕(大王)은 묘정을 보면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 내전(內殿)에 맞아들여 좌우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이 때 잡간(잡干) 한 사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도 묘정을 사랑해서 같이 가기를 청하자 왕은 이를 허락했다. 이들이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니 당나라의 황제(皇帝)도 역시 묘정을 보자 매우 사랑하게 되고 승상(丞相)과 좌우 신하들도 모두 그를 존경하고 신뢰했다. 관상보는 사람 하나가 황제에게 아뢰었다. "사미를 살펴보니 하나도 길(吉)한 상(相)이 없는데 남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으니 틀림없이 이상한 물건을 가졌을 것입니다." 황제가 사람을 시켜서 몸을 뒤져 보니 허리띠 끝에 조그만 구슬이 매달려 있다. 황제는 말한다. "나에게 여의주(如意珠) 네 개가 있던 것을 지난 해에 한 개를 잃었는데 이제 이 구슬을 보니 내가 잃은 그 구슬이다." 황제가 묘정에게 그 구슬을 가진 연유를 물으니 묘정은 그 사실을 자세히 말했다. 황제가 생각하니 구슬을 잃었던 날짜가 묘정이 구슬을 얻은 날과 똑같다. 황제가 그 구슬을 빼앗아 두고 묘정을 돌려보냈더니 그 뒤로는 아무도 묘정을 사랑하지도 않고 신뢰하지도 않았다.
왕의 능(陵)은 토함산(吐含山) 서쪽 동곡사(洞鵠寺; 지금의 崇德寺)에 있는데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문이 있다. 왕은 또 보은사(報恩寺)와 망덕루(望德樓)를 세웠고, 조부(祖父) 훈입잡간(訓入잡干)을 추봉(追封)하여 흥평대왕(興平大王)이라 하고, 증조(曾祖) 의관잡간(議官잡干)을 신영대왕(神英大王)이라 하고, 고조(高祖) 법선대아간(法宣大阿干)을 현성대왕(玄聖大王)이라 했다. 현성대왕의 아버지는 곧 마질차잡간(摩叱次잡干)이다.
조설(早雪)
제40대 애장왕(哀莊王) 말년 무자(戊子; 808) 8월 15일에 눈이 내렸다.
제41대 헌덕왕(憲德王) 때인 원화(元和) 13년 무술(戊戌; 818) 3월 14일에 많은 눈이 내렸다(어떤 책에는 병인丙寅이라 했으나 이는 잘못이다. 원화元和는 15년에 끝났기 때문에 병인丙寅은 없다).
제46대 문성왕(文聖王) 기미(己未; 839) 5월 19일에 많은 눈이 내렸다. 8월 1일에는 천지가 어두웠다.
흥덕왕(興德王)과 앵무새
제42대 흥덕대왕(興德大王)은 보력(寶曆) 2년 병오(丙午; 826)에 즉위했다. 얼마 되지 않아서 어떤 사람이 당(唐)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다. 오래지 않아 암놈이 죽자 홀로 남은 수놈은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는다. 왕은 사람을 시켜 그 앞에 거울을 걸어 놓게 했더니 새는 거울 속의 그림자를 보고는 제 짝을 얻은 줄 알고 그 거울을 쪼다가 제 그림자인 것을 알고는 슬피 울다 죽었다. 이에 왕이 앵무새를 두고 노래를 지었다고 하나 가사(歌辭)는 알 수 없다.
신무대왕(神武大王)과 염장(閻長)과 궁파(弓巴)
제45대 신무대왕(神武大王)이 왕위(王位)에 오르기 전에 협사(俠士) 궁파(弓巴)에게 말했다. "나에게는 이 세상을 같이 살아나갈 수 없는 원수가 있다. 네가 만일 나를 위해서 이를 없애 준다면 내가 왕위에 오른 뒤에 네 딸을 맞아 왕비로 삼겠다." 궁파가 이를 허락하니 마음과 힘을 같이하여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쳐들어가서 그 일을 성취하였다. 그 뒤에 이미 왕위를 빼앗고 궁파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 하매 여러 신하들이 힘써 간한다. "궁파는 아주 미천한 사람이오니 왕께서 그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왕은 그 말을 따랐다. 그 때 궁파는 청해진(淸海鎭)에서 진(鎭)을 지키고 있었는데 왕이 약속을 어기는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장군 염장(閻長)이 이 말을 듣고 왕께 아뢰었다. "궁파가 장차 충성스럽지 못한 일을 하려 하오니 소신이 가서 이를 제거하겠습니다." 왕은 기뻐하여 이를 허락했다. 염장은 왕의 뜻을 받아 청해진으로 가서 길을 안내하는 자를 통해서 말했다. "나는 왕에게 조그만 원망이 있어서 그대에게 의탁하여 몸과 목숨을 보전하려 하오." 궁파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했다. "너희들이 왕에게 간(諫)해서 내 딸을 폐(廢)하고 어찌 나를 보려 하느냐?" 염장이 다시 사람을 통해서 말했다. "그것은 여러 신하들이 간한 것이고 나는 그 일에 간여하지 않았으니 그대는 나를 혐의치 마십시오." 궁파는 이 말을 듣고 청사(廳舍)로 그를 불러들여 물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는가?" "왕의 뜻을 거슬린 일이 있기에 그대의 막하(幕下)에 의탁해서 해(害)를 면할까 하는 것이오." "그렇다면 다행한 일이오."하고 궁파는 술자리를 마련하여 무척 기뻐했다. 이에 염장은 궁파의 긴 칼을 빼어 궁파를 베어 죽이자 휘하(麾下)에 있던 군사들은 놀라서 모두 땅에 엎드린다. 이에 염장은 이들을 이끌고 서울로 와서 왕에게 복명(復命)했다. "이미 궁파를 베어 죽였습니다." 왕은 기뻐해서 그에게 상을 내리고 아간(阿干) 벼슬을 주었다.
제48대 경문대왕(景文大王)
왕의 이름은 응렴(膺廉)이니 나이 18세에 국선(國仙)이 되었다. 약관(弱冠)에 이르자 헌안대왕(憲安大王)은 그를 불러 궁중에서 잔치를 베풀과 물었다. "낭(郎)은 국선이 되어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놀았으니 무슨 이상한 일을 본 것이 있는가." "신(臣)은 아름다운 행실이 있는 자 셋을 보았습니다." "그 말을 나에게 들려 주게." "남의 웃자리에 있을 만한 사람이면서도 겸손하여 남의 밑에 있는 사람이 그 하나요, 세력 있고 부자이면서도 옷차림을 검소하게 한 사람이 그 둘이요, 본래부터 귀(貴)하고 세력이 있으면서도 그 위력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 그 셋입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낭이 어질다는 것을 알고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떨어뜨리면서 말했다. "나에게 두 딸이 있는데 낭의 시중을 들게 하리라." 낭이 자리를 피하여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물러가 부모에게 고했다. 부모는 놀라고 기뻐하여 그 자제(子弟)들을 모아 놓고 의논하기를, "왕의 맏공주(公主)는 모양이 몹시 초라하고 둘째 공주는 매우 아름답다 하니 그를 아내로 삼으면 다행이겠다"하였다. 낭의 무리들 중에 우두머리로 있는 범교사(範敎師)가 이 말을 듣고 낭의 집에 가서 낭에게 물었다. "대왕께서 공주를 공의 아내로 주고자 한다니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어느 공주에게 장가들려는가?" "부모께서 둘째 공주가 좋겠다고 하십니다." 범교사는 말한다.
"낭이 만일 둘째 공주에게 장가를 든다면 나는 반드시 낭의 면전에서 죽을 것이고, 맏공주에게 장가간다면 반드시 세 가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경계해서 하도록 하라." "그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 뒤에 왕이 날을 가려서 낭에게 사자를 보내어 말했다. "두 딸 중에서 공의 뜻대로 결정하도록 하라." 사자가 돌아와서 낭의 의사를 왕에게 보고했다. "맏공주를 받들겠다고 합니다."
그런 지 3개월이 지나서 왕은 병이 위독했다. 여러 신하들을 불러 놓고 말한다. "내게는 사내자식이 없으니 죽은 뒤의 일은 마땅히 맏딸의 남편 응렴(膺廉)이 이어야 할 것이다." 이튿날 왕이 죽으니 낭이 유언을 받들어 왕위에 올랐다. 이에 범교사는 왕에게 나아가 말했다. "제가 아뢴 세 가지 아름다운 일이 이제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맏공주에게 장가를 드셨기 때문에 이제 왕위에 오른 것이 그 하나요, 예전에 흠모하시던 둘째 공주에게 이제 쉽게 장가드실 수 있게 되신 것이 그 둘이요, 맏공주에게 장가를 드셨기 때문에 왕과 부인이 매우 기뻐하신 것이 그 셋입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고맙게 여겨서 대덕(大德)이란 벼슬을 주고 금(金) 130냥을 하사했다.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경문(景文)이라고 했다.
일찍이 왕의 침전(寢殿)에는 날마다 저녁만 되면 수많은 뱀들이 모여들었다. 궁인(宮人)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이를 쫓아내려 했지만 왕은 말했다. "내게 만일 뱀이 없으면 편하게 잘 수가 없으니 쫓지 말라." 왕이 잘 때에는 언제나 뱀이 혀를 내밀어 온 가슴을 덮고 있었다.
왕위에 오르자 왕의 귀가 갑자기 길어져서 나귀의 귀처럼 되었는데 왕후와 궁인들은 모두 이를 알지 못했지만 오직 복두장(복頭匠) 한 사람만은 이 일을 알고 있었으나 그는 평생 이 일을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죽을 때에 도림사(道林寺) 대밭 속 아무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서 대를 보고 외쳤다. "우리 임금의 귀는 나귀 귀와 같다." 그런 후로 바람이 불면 대밭에서 소리가 났다. '우리 임금의 귀는 나귀 귀와 같다.' 왕은 이 소리가 듣기 싫어서 대를 베어 버리고 그 대신 산수유(山茱萸) 나무를 심었다. 그랬더니 바람이 불면 거기에서는 다만 '우리 임금의 귀는 길다'고 하는 소리가 났다(도림사道林寺는 예전에 서울로 들어가는 곳에 있는 숲 가에 있었다).
국선 요원랑(邀元郞)·예흔랑(譽昕郞)·계원(桂元)·숙종랑(叔宗郞) 등이 금란(金蘭)을 유람하는데 은근히 임금을 위해서 나라를 다스리려는 뜻이 있었다. 이에 노래 세 수(首)를 짓고, 다시 심필(心弼) 사지(舍知)를 시켜서 공책을 주어 대구화상(大矩和尙)에게 보내어 노래 세 수를 짓게 하니 첫째는 현금포곡(玄琴抱曲)이요, 둘째는 대도곡(大道曲)이요, 셋째는 문군곡(問群曲)이었다. 대궐에 들어가 왕께 아뢰니 왕은 기뻐하여 칭찬하고 상을 주었다. 노래는 알 수가 없다.
처용랑(處容郞)과 망해사(望海寺)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때에는 서울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연하고 초가(草家)는 하나도 없었다. 음악과 노래가 길에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어느날 대왕(大王)이 개운포(開雲浦; 학성鶴城 서남쪽에 있으니 지금의 울주蔚州이다)에서 놀다가 돌아가려고 낮에 물 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서 길을 잃었다. 왕이 괴상히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뢴다. "이것은 동해(東海) 용(龍)의 조화이오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해서 풀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왕은 일을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짓게 했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으므로 그곳을 개운포라 했다.
동해의 용은 기뻐해서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덕(德)을 찬양하여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중의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들어가서 왕의 정사를 도우니 그의 이름을 처용(處容)이라 했다. 왕은 아름다운 여자로 처용의 아내를 삼아 머물러 있도록 하고, 또 급간(級干)이라는 관직(官職)까지 주었다. 처용의 아내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신(疫神)이 흠모해서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 집에 가서 남몰래 동침했다. 처용이 밖에서 자기 집에 돌아와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자 이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나왔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동경(東京) 밝은 달에, 밤들어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 가랑이 넷일러라.
둘은 내해이고, 둘은 뉘해인고.
본디 내해지만, 빼앗겼으니 어찌할꼬.
그때 역신이 본래의 모양을 나타내어 처용의 앞에 꿇어앉아 말했다.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이제 잘못을 저질렀으나 공은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맹세코 이제부터는 공의 모양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 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그려 붙여서 사귀(邪鬼)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아들이게 되었다.
왕은 서울로 돌아오자 이내 영취산(靈鷲山) 동쪽 기슭의 경치 좋은 곳을 가려서 절을 세우고 이름을 망해사(望海寺)라 했다. 또는 이 절을 신방사(新房寺)라 했으니 이것은 용을 위해서 세운 것이다.
왕이 또 포석정(鮑石亭)에 갔을 때 남산(南山)의 신(神)이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좌우의 사람에겐 그 신이 보이지 않고 왕만이 혼자서 보았다. 사람이 나타나 앞에서 춤을 추니 왕 자신도 춤을 추면서 형상을 보였다. 신의 이름을 혹 상심(詳審)이라고도 했으므로 지금까지 나라 사람들은 이 춤을 전해서 어무상심(御舞詳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 한다. 혹은 말하기를, 신이 먼저 나와서 춤을 추자 그 모습을 살펴 공인(工人)에게 명해서 새기게 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게 했기 때문에 상심(象審)이라고 했다 한다. 혹은 상염무(霜髥舞)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그 형상에 따라서 이름지은 것이다.
왕이 또 금강령(金剛嶺)에 갔을 때 북악(北岳)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이를 옥도검(玉刀劍)이라 했다. 또 동례전(同禮殿)에서 잔치를 할 때에는 지신(地神)이 나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지백급간(地伯級干)이라 했다.
<어법집(語法集)>에 말하기를, "그때 산신(山神)이 춤을 추고 노래부르기를, '지리다도파(智理多都波)'라 했는데 '도파(都波)'라고 한 것은 대개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미리 사태를 알고 많이 도망하여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뜻이다"했다. 즉 지신과 산신은 나라가 장차 멸망할 것을 알기 때문에 춤을 추어 이를 경계한 것이나 나라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祥瑞)가 나타났다 하여 술과 여색(女色)을 더욱 즐기다가 나라가 마침 내 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진성여대왕(眞聖女大王)과 거타지(居타知)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이 임금이 된 지 몇 해 만에 유모(乳母) 부호부인(鳧好夫人)과 그의 남편 위홍잡간(魏弘잡干) 등 3, 4명의 총신(寵臣)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해서 정사를 어지럽히자 도둑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나라 사람들이 근심하여 이에 다라니(타羅尼)의 은어(隱語)를 지어 써서 길 위에 던졌다. 왕과 권세를 잡은 신하들은 이것을 얻어 보고 말했다. "이 글은 왕거인(王居仁)이 아니고는 지을 사람이 있겠느냐." 이리하여 거인을 옥에 가두자 거인은 시(詩)를 지어 하늘에 호소했다. 이에 하늘이 그 옥에 벼락을 쳐서 거인을 살아나게 했는데 그 시는 이러했다.
연단(燕丹)의 피어린 눈물 무지개가 해를 뚫었고,
추연(鄒衍)의 품은 슬픔 여름에도 서리 내리네.
지금 나의 불우함 그들과 같거니,
황천(皇天)은 어이해서 아무런 상서로움도 없는가.
또 다라니(타羅尼)의 은어(隱語)는 이러했다.
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파가
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 于于三阿干 鳧伊娑婆訶
해설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찰니나제(刹尼那帝)란 여왕(女王)을 가리킨 것이요, 판니판니소판니(判尼判尼蘇判尼)는 두 소판(蘇判)을 말한 것이다. 소판은 관작(官爵)의 이름이요, 우우삼아간(于于三阿干)은 3, 4명의 총신(寵臣)을 말한 것이요, 부이(鳧伊)는 부호(鳧好)를 말한 것이다."
이 왕 때의 아찬(阿飡) 양패(良貝)는 왕의 막내아들이었다. 당(唐)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에 후백제(後百濟)의 해적(海賊)들이 진도(津島)에서 길을 막는다는 말을 듣고 활 쏘는 사람 50명을 뽑아 따르게 했다. 배가 곡도(鵠島; 우리말로는 골대도骨大島라 한다)에 이르니 풍랑이 크게 일어나 10여 일 동안 묵게 되었다. 양패공(良貝公)은 이것을 근심하여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하였더니, "섬에 신지(神池)가 있으니 거기에 제사를 지내면 좋겠습니다"했다. 이에 못 위에 제물을 차려 놓자 못물이 한 길이나 넘게 치솟는다. 그날 밤 꿈에 노인이 나타나서 양패공에게 말한다. "활 잘 쏘는 사람 하나를 이 섬 안에 남겨 두면 순풍(順風)을 얻을 것이오." 양패공이 깨어 그 일을 좌우에게 물었다. "누구를 남겨 두는 것이 좋겠소." 여러 사람이 말한다. "나무 조각 50개에 저희들의 이름을 각각 써서 물에 가라앉게 해서 제비를 뽑으시면 될 것입니다." 공은 이 말을 좇았다.
이때 군사 중에 거타지(居타知)의 이름이 물에 잠겼으므로 그 사람을 남겨 두니 문득 순풍이 불어서 배는 거침없이 잘 나갔다. 거타지는 조심스럽게 섬 위에 서 있는데 갑자기 노인 하나가 못 속에서 나오더니 말한다. "나는 서해약(西海若)이오. 중 하나가 해가 뜰 때면 늘 하늘로부터 내려와 다라니(타羅尼)의 주문(呪文)을 외면서 이 못을 세 번 돌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물 위에 뜨게 되오. 그러면 중은 내 자손들의 간(肝)을 빼어 먹는 것이오. 그래서 이제는 오직 우리 부부와 딸 하나만이 남아 있을 뿐인데 내일 아침에 그 중이 또 반드시 올 것이니 그대는 활로 쏘아 주시오." 거타는 말했다.
"활 쏘는 일이라면 나의 장기(長技)이니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노인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물 속으로 들어가고 거타는 숨어서 기다렸다. 이튿날 동쪽에서 해가 뜨자 과연 중이 오더니 전과 같이 주문을 외면서 늙은 용의 간을 빼먹으려 했다. 이때 거타가 활을 쏘아 맞히니 중은 이내 늙은 여우로 변하여 땅에 쓰러져 죽었다. 이에 노인이 나와 치사를 한다. "공의 은덕으로 내 성명(性命)을 보전하게 되었으니 내 딸을 아내로 삼기를 바라오." 거타가 말한다. "따님을 나에게 주시고 나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참으로 원하는 바입니다." 노인은 그 딸을 한 가지의 꽃으로 변하게 해서 거타의 품 속에 넣어 주고, 두 용에게 명하여 거타를 모시고 사신(使臣)의 배를 따라 그 배를 호위하여 당나라에 들어가도록 했다. 당나라 사람은 신라의 배를 용 두 마리가 호위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이 사실을 황제(皇帝)에게 말했다. 이에 황제는 말한다. "신라의 사신은 필경 비상한 사람일 게다." 이에 잔치를 베풀어 여러 신하들의 윗자리에 앉히고 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었다. 본국으로 돌아오자 거타는 꽃가지를 내어 여자로 변하게 하여 함께 살았다.
효공왕(孝恭王)
제52대 효공왕(孝恭王) 때인 광화(光化) 15년 임신(壬申; 912. 사실은 주朱(후後)양梁의 건화乾化 2년이다)에 봉성사(奉聖寺) 외문(外門) 동서쪽 21간(間)에 까치가 집을 지었다.
또 신덕왕(神德王) 즉위 4년 을해(乙亥; 915. 고본古本에는 천우天祐 12년이라고 했으나 마땅히 정명貞明 원년元年이라 해야 한다)에 영묘사(靈廟寺) 안 행랑(行廊)에 까치집이 34개나 되고, 까마귀 집이 40개나 되었다.
또 3월에는 서리가 두 번이나 내렸고 6월에는 참포(斬浦)의 물과 바닷물의 물결이 사흘 동안이나 서로 싸웠다.
경명왕(景明王)
제54대 경명왕(景明王) 때인 정명(貞明) 5년 무인(戊寅; 918)에 사천왕사(四天王寺) 벽화(壁畵) 속의 개가 울었다. 이 때문에 3일 동안 불경을 외어 이를 물리쳤으나 반일(半日)이 지나자 그 개가 또 울었다.
7년 경진(庚辰; 920) 2월에는 황룡사탑(皇龍寺塔) 그림자가 금모사지(今毛舍知)의 집 뜰 안에 한 달 동안이나 거꾸로 서서 비쳐 보였다.
또 10월에 사천왕사(四天王寺)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으며, 벽화 속의 개가 뜰로 달려나왔다가 다시 벽의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경애왕(景哀王)
제55대 경애왕(景哀王)이 즉위한 동광(同光) 2년 갑신(甲申; 924) 2월 19일에 황룡사(皇龍寺)에서 백좌(百座)를 열어 불경(佛經)을 풀이했다. 겸해서 선승(禪僧) 300명에게 음식을 먹이고 대왕(大王)이 친히 향을 피워 불공(佛供)을 드렸다. 이것이 백좌(百座)를 설립한 선교(禪敎)의 시작이었다.
김부대왕(金傅大王)
재56대 김부대왕(金傅大王)의 시호는 경순(敬順)이다. 천성(天成) 2년 정해(丁亥; 927) 9월에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이 신라를 침범해서 고울부(高蔚府)에 이르니, 경애왕(景哀王)은 우리 고려(高麗) 태조(太祖)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태조는 장수에게 명령하여 강한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구하게 했으나 구원병(救援兵)이 미처 도착하기 전에 견훤은 그 해 11월에 신라 서울로 쳐들어갔다. 이때 왕은 비빈(妃嬪) 종척(宗戚)들과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열고 즐겁게 놀고 있었기 때문에 적병이 오는 것도 알지 못하다가 창졸간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왕과 비(妃)는 달아나 후궁(後宮)으로 들어가고 종척(宗戚) 및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사녀(士女)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사로잡혔으며, 귀천(貴賤)을 가릴 것 없이 모두 땅에 엎드려 노비(奴婢)가 되기를 빌었다. 견훤은 군사를 놓아 공사간(公私間)의 재물을 약탈하고 왕궁(王宮)에 들어가서 거처했다. 이에 좌우 사람을 시켜 왕을 찾게 하니 왕은 비첩(婢妾) 몇 사람과 후궁에 숨어 있었다. 이를 군중(軍中)으로 잡아다가 왕은 억지로 자결(自決)해 죽게 하고 왕비를 욕보였으며, 부하들을 놓아 왕의 빈첩(嬪妾)들을 모두 욕보였다. 왕의 족제(族弟)인 부(傅)를 세워 왕으로 삼으니 왕은 견훤이 세운 셈이 되었다. 왕위(王位)에 오르자 전왕(前王)의 시체를 서당(西堂)에 안치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했다. 이 때 우리 태조(太祖)는 사신(使臣)을 보내서 조상했다.
이듬해 무자(戊子; 928)년 봄 3월에 태조(太祖)는 50여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신라 서울에 이르니 왕은 백관(百官)과 함께 교외에서 맞아 대궐로 들어갔다. 서로 대하여 정리와 예의를 다하고 임해전(臨海殿)에서 잔치를 열었다. 술이 얼근하자 왕은 말했다. "나는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해서 화란(禍亂)을 불러일으켰고, 견훤으로 하여금 불의(不義)한 짓을 마음껏 행하게 해서 우리 나라를 망쳐 놓았습니다. 이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이내 눈물을 흘리면서 우니 좌우 사람들도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태조 역시 눈물을 흘렸다. 태조는 여기에서 수십일을 머무르다가 돌아갔는데 부하 군사들은 엄숙하고 정제해서 조금도 침범하지 않으니 서울의 사녀(士女)들이 서로 경하(慶賀)해 말했다. "전에 견훤이 왔을 때는 마치 늑대와 범을 만난 것 같더니 지금 왕공(王公)이 온 것은 부모를 만난 것 같다."
8월에 태조는 사자를 보내서 왕에게 금삼(錦衫)과 안장 없는 말을 주고 또 여러 관료(官僚)와 장사(將士)들에게 차등을 두어 물건을 주었다.
청태(淸泰) 2년 을미(乙未; 935) 10월에 사방 땅이 모두 남의 나라 소유가 되고 나라는 약하고 형세가 외로우니 스스로 지탱할 수가 없었으므로 여러 신하들과 함께 국토(國土)를 들어 고려 태조(太祖)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했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분분하여 끝나지 않는지라 왕태자(王太子)가 말했다. "나라의 존망(存亡)은 반드시 하늘의 명에 있는 것이니 마땅히 충신(忠臣)·의사(義士)들과 함께 민심(民心)을 수습해서 힘이 다한 뒤에야 그만둘 일이지 어찌 1,000년의 사직(社稷)을 경솔하게 남에게 내주겠습니까?" 왕은 말한다. "외롭고 위태롭기가 이와 같으니 형세는 보전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도 없고 더 약해질 수도 없으니 죄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간뇌도지(肝腦塗地)케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에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를 시켜서 국서(國書)를 가지고 태조에게 가서 항복하기를 청했다. 그러나 태자는 울면서 왕을 하직하고 바로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서 삼베 옷을 입고 풀을 먹다가 세상을 마쳤다. 그의 막내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華嚴宗)에 들어가 중이 되어 승명(僧名)을 범공(梵空)이라 했는데 그 뒤로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있었다 한다.
태조는 신라의 국서를 받자 태상(太相) 왕철(王鐵)을 보내서 맞게 했다. 왕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우리 태조에게로 돌아가니, 향거보마(香車寶馬)가 30여 리에 뻗치고 길은 사람으로 꽉 차고, 구경꾼들이 담과 같이 늘어섰다. 태조는 교외에 나가서 영접하여 위로하고 대궐 동쪽의 한 구역(지금의 정승원正承院)을 주고, 장녀(長女) 낙랑공주(樂浪公主)를 그의 아내로 삼았다. 왕이 자기 나라를 작별하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살았다 해서 이를 난조(鸞鳥)에 비유하여 공주의 칭호를 신란공주(神鸞公主)라고 고쳤으며, 시호(諡號)를 효목(孝穆)이라 했다. 왕을 봉(封)해서 정승(正承)을 삼으니 자리는 태자(太子)의 위이며 녹봉(祿俸) 1,000석을 주었다. 시종(侍從)과 관원(官員)·장수들도 모두 채용해서 쓰도록 했으며, 신라를 고쳐 경주(慶州)라 하여 이를 경순왕(敬順王)의 식읍(食邑)으로 삼았다.
처음에 왕이 국토를 바치고 항복해 오자 태조는 무척 기뻐하여 후한 예로 그를 대접하고, 사람을 시켜 말했다. "이제 왕이 내게 나라를 주시니 주시는 것이 매우 큽니다. 원컨대 왕의 종실(宗室)과 혼인을 해서 구생(舅甥)의 좋은 의(誼)를 길이 하고 싶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우리 백부(伯父) 억렴(億廉; 왕王의 아버지 효종각간孝宗角干은 추봉追封된 신흥대왕神興大王의 아우이다)에게 딸이 있는데 덕행(德行)과 용모가 모두 아름답습니다. 이 사람이 아니고는 내정(內政)을 다스릴 사람이 없습니다." 태조가 그에게 장가를 드니 이가 신성왕후(神成王后) 김씨(金氏)이다(우리 왕조王朝 등사랑登仕郞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에 이와 같은 말이 있다. "신성왕후神成王后 이씨李氏는 본래 경주慶州 대위大尉 이정언李正言이 협주수俠州守로 있을 때 태조太祖가 그 고을에 갔다가 그를 왕비王妃로 맞았다. 그런 때문에 그를 협주군俠州君이라고도 한다 했다. 그의 원당願堂은 현화사玄化寺이며, 3월 25일이 기일忌日로, 정릉貞陵에 장사지냈다. 아들 하나를 낳으니 안종安宗이다." 이 밖에 25 비주妃主 가운에 김씨金氏의 일은 실려 있지 않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사신史臣의 의론을 봐도 역시 안종安宗을 신라의 외손外孫이라 했다. 그러니 마땅히 사전史傳을 옳다고 해야 할 것이다).
태조의 손자 경종(景宗) 주(주)는 정승공(政承公)의 딸을 맞아 왕비를 삼으니, 이가 헌승황후(憲承皇后)이다. 이에 정승공(政承公)을 봉해서 상부(尙父)를 삼았다. 태평흥국(太平興國) 3년 무인(戊寅; 978)에 죽으니 시호를 경순(敬順)이라 했다. 상부(尙父)로 책봉하는 고명(誥命)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칙(詔勅)을 내리노니 희주(姬周)가 나라를 처음 세울 때는 먼저 여상(呂尙)을 봉했고 유한(劉漢)이 나라를 세울 때에는 먼저 소하(蕭何)를 봉했다. 이로부터 온 천하가 평정되었고 널리 기업(基業)이 열렸다. 용도(龍圖) 30대를 세우고 섭린(섭麟)은 400년을 이으니 해와 달이 거듭 밝고 천지가 서로 조화되었다. 비록 무위(無爲)의 군주(君主)로서 시작되었으나 역시 보좌(輔佐)하는 신하로 해서 일을 이루었던 것이다.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정승 식읍팔천호 김부(觀光順化 衛國功臣 上柱國 樂浪王政承 食邑八千戶 金傅)는 대대로 계림(鷄林)에 살고 있어서 벼슬은 왕의 작위(爵位)를 받았고, 그 영특한 기상은 하늘을 업신여길 만하고 문장(文章)은 땅을 진동할 만한 재주가 있었다. 부(富)는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귀(貴)는 모토(茅土)에 거(居)했으며 육도삼략(六韜三略)은 가슴 속에 들어 있고 칠종오신(七縱五申)을 손바닥으로 잡아 쥐었다. 우리 태조는 비로소 이웃 나라와 화목하게 지내는 우호(友好)를 닦으시니 일찍부터 내려오는 풍도를 알아서 이내 부마(駙馬)의 인의(姻誼)를 맺어 안으로 큰 절의(節義)에 보답했다. 이미 나라가 통일되고 군신(君臣)이 완전히 삼한(三韓)으로 합쳤으니 아름다운 이름은 널리 퍼지고 올바른 규범(規範)은 빛나고 높았다. 상부도성령(尙父都省令)의 칭호를 더해 주고 추충신의 숭덕수절공신(推忠愼義 崇德守節功臣)의 호(號)를 주니 훈봉(勳封)은 전과 같고 식읍(食邑)은 전후를 합쳐서 1만 호(戶)가 되었다. 유사(有司)는 날을 가려서 예(禮)를 갖추어 책명(冊命)하는 것이니 일을 맡은 자는 시행하도록 하라. 개보(開寶) 8년(975) 10월 일."
"대광내의령 겸 총한림 신 핵선(大匡內議令 兼 摠翰林 臣 핵宣)은 받들어 행하여 위와 같이 칙령(勅令)을 받들고 직첩(職牒)이 도착하는 대로 봉행(奉行)하라. 개보(開寶) 8년 10월 일."
추충신의 숭덕수절공신 상부도성령 상주국 낙랑군왕 식읍일만호 김부(推忠愼義 崇德守節功臣 尙父都省令 上柱國 樂浪郡王 食邑一萬戶 金傅)에게 고(告)하노니 위와 같이 칙령(勅令)을 받들고 부신(符信)이 도착하는 대로 봉행(奉行)하라.
주사(主事) 무명(無名), 낭중(郎中) 무명(無名), 서령사(書令史) 무명(無名), 공목(孔目) 무명(無名). 개보(開寶) 8년 10월 일에 내림.”
<사론>(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新羅)의 박씨(朴氏)와 석(昔氏)는 모두 알에서 나왔다. 김씨는 황금(黃金) 궤 속에 들어서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한다. 혹은 황금으로 된 수레를 타고 왔다고 하는데 이것은 더욱 황당해서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세속에서는 서로 전하여 사실이라고 한다. 이제 다만 그 시초를 살펴보건대 위에 있는 이는 그 몸을 위해서는 검소했고 남을 위해서는 너그러웠다. 그 관직을 설치하는 것은 간략히 했고 그 일을 행하는 것은 간소하게 했다. 성심껏 중국(中國)을 섬겨서 조빙(朝聘)하는 사신이 제항(梯航)으로 연락불절하여 항상 자제(子弟)들을 중국에 보내어 숙위(宿衛)하게 하고 국학(國學)에 들어가서 공부하게 했다. 이리하여 성현(聖賢)의 풍화를 이어받고 오랑캐의 풍속을 개혁시켜서 예의 있는 나라로 만들었다. 또 중국 군사의 위엄을 빌어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평정하고, 그 땅을 취하여 군현(郡縣)을 삼았으니 가히 장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불법(佛法)을 숭상해서 그 폐단을 알지 못하고 심지어는 마을마다 탑과 절을 즐비하게 세워 백성들은 모두 중이 되어 군대(軍隊)니 농민(農民)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나라가 날로 쇠퇴해 가니 어찌 어지러워지지 않을 것이며 또 망하지 않겠는가. 이 때에 경애왕(景哀王)은 더욱 음란하고 놀기에만 바빠 궁녀(宮女)들과 좌우 근신(近臣)들과 더불어 포석정(鮑石亭)에 나가 술자리를 베풀고 즐겨 견훤(甄萱)이 오는 것도 몰랐으니, 저 문 밖의 한금호(韓擒虎)나 누각(樓閣) 위의 장려와(張麗華)와 다를 것이 없었다. 경순왕(敬順王)이 태조(太祖)에게 귀순(歸順)한 것은 비록 할 수 없이 한 일이기는 하나 또한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다. 만일 힘껏 싸우고 죽기로 지켜서 고려 군사에게 반항했더라면 힘은 꺾이고 기세는 다해서 반드시 그 가족을 멸망시키고 죄없는 백성들에게까지 해가 미쳤을 것이다. 그런데 고명(告命)을 기다리지 않고 부고(府庫)를 봉하고 군현(郡縣)의 이름을 기록하여 귀순했으니 조정에 대해서는 공로가 있고 백성들에 대해서는 덕이 있는 것이 매우 크다 하겠다. 옛날 전씨(錢氏)가 오월(吳越)의 땅을 송(宋)나라에 바친 일을 소자첨(蘇子瞻)은 충신(忠臣)이라고 했으니, 이제 신라의 공덕(功德)은 그보다 훨씬 크다고 하겠다. 우리 태조는 비빈(妃嬪)이 많고 그 자손들도 또한 번성했다. 현종(顯宗)은 신라의 외손(外孫)으로서 왕위(王位)에 올랐으며, 그 뒤에 왕통(王統)을 계승한 이는 모두 그의 자손이었다. 이것이 어찌 그 음덕(陰德)이 아니겠는가."
신라가 이미 땅을 바쳐 나라가 없어지자 아간(阿干) 신회(神會)는 외직(外職)을 내놓고 돌아왔는데 도성(都城)이 황폐한 것을 보고 서리리(黍離離)의 탄식함이 있어 이에 노래를 지었으나 그 노래는 없어져서 알 수가 없다.
남부여(南扶餘)와 전백제(前百濟)와 북부여(北扶餘; 北扶餘는 이미 위에 나와 있다)
부여군(扶餘郡)은 전 백제(百濟)의 도읍이니, 혹 소부리군(所夫里郡)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백제의 성왕(聖王) 26년 무오(戊午) 봄에 도읍을 사자(泗차)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했다" 하고, 주(注)에 "그 지명(地名)은 소부리(所夫里)이니 사자(泗차)는 지금의 고성진(古省津)이요 소부리는 부여의 딴 이름이다" 했다.
또 양전장부(量田帳簿)에 의하면, "소부리군은 농부의 주첩(柱貼)이다" 했으니 지금 말하는 부여군이란 옛 이름을 되찾은 셈이다. 백제 왕의 성(姓)이 부씨(扶氏)였으므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혹 여주(餘州)라고도 말하는 것은, 군(郡)의 서쪽에 있는 자복사(資福寺) 고좌(高座)에 수놓은 장막이 있는데 그 수놓은 글에 말하기를, "통화(統和) 15년 정유(丁酉; 997) 5월 일 여주 공덕대사(功德大寺)의 수장(繡帳)이다" 했다. 또 옛날에는 하남(河南)에 임주자사(林州刺史)를 두었는데 그때 도적(圖籍) 중에 여주라는 두 글자가 있었으니 임주(林州)는 지금의 가림군(佳林郡)이고 여주는 지금의 부여군이다.
<백제지리지(百濟地理志)>에는 <후한서(後漢書)>에 있는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했다. '삼한(三韓)이 대개 78개 국인데 백제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북사(北史)>에는 이렇게 말했다. '백제(百濟)는 동쪽으로는 신라(新羅)에 접하고 서남쪽은 큰 바다에 접하며, 북쪽은 한강(漢江)을 경계로 했다. 그 도읍은 거발성(居拔城) 또는 고마성(固麻城)이라고 하며, 이 밖에 다시 오방성(五方城)이 있다.'
<통전(通典)>에는 이렇게 말했다. '백제는 남쪽으로 신라에 접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았다.'
<구당서(舊唐書)>에서는 또 이렇게 말했다. '백제는 부여의 딴 종족이다. 동북쪽은 신라이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서 월주(越州)에 이르며 남쪽은 바다를 건너서 왜국에 이르고, 북쪽은 고구려이다. 그 왕이 거처하는 곳에 동서(東西)의 두 성이 있다.'
<신당서(新唐書)>를 보면 이러하다. '백제는 서쪽으로 월주(越州)와 경계를 이루고, 남쪽은 왜국인데 모두 바다를 건너게 된다. 북쪽은 고구려이다.'
<삼국사(三國史)> 본기(本紀)에는 이렇게 말했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溫祚)요, 그의 아버지는 추모왕(雛牟王)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하니, 그는 북부여(北扶餘)에서 난리를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왔었다. 그곳 왕에게 아들이 없고 다만 딸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자 범상치 않은 사람인 것을 알고 둘째딸을 아내로 주었다. 얼마 안 되어 부여주(扶餘州)의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沸流)이고 다음은 온조(溫祚)다. 그들은 후에 태자(太子)에게 용납되지 않을 것을 걱정하여 드디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여 명 신하들과 함께 남쪽으로 가니 백성들도 이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서 살 만한 곳이 있는가 찾아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가서 살자고 하자 열 명의 신하들은 간하기를 "이 하남(河南)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가 흐르며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했고, 남쪽으로 기름진 못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가로놓여 있어서 천험(天險)과 지리(地利)가 좀체로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했다. 그러나 비류는 이 말을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雛忽)에 가서 살았다. 한편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하여 열 명의 신하를 보필(輔弼)로 삼아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했으니, 이 때는 한(漢)나라 성제(成帝) 홍가(鴻佳(嘉)) 3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이란 곳이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 위례성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편안히 살고 있으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해서 죽었다. 이에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그 뒤에, 백성들이 올 때에 기뻐했다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쳤다. 그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씨(氏)를 해(解)라고 했다. 그 뒤 성왕(聖王) 때에 도읍을 사비(泗차)로 옮겼으니 이것이 지금의 부여군이다(미추홀彌雛忽은 인주仁州이고 위례慰禮는 지금의 직산稷山이다).
<고전기(古典記)>에 의하면 이러하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아들 온조(溫祚)는 전한(前漢) 홍가(鴻佳) 3년 계유(癸酉)(묘卯; 前 18)에 졸본부여에서 위례성(慰禮城)으로 와서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일컬었다. 14년 병진(丙辰)에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겨 389년을 지냈으며, 13세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인 함안(咸安) 원년(元年; 371)에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아 도읍을 북한성(北漢城; 지금의 양주楊洲)으로 옮겨 105년을 지냈다. 22세 문주왕(文周王)이 즉위하던 원휘(元徽) 3년 을묘(乙卯; 475)에는 도읍을 웅천(熊川; 지금의 공주公州)으로 옮겨 63년을 지내고, 26세 성왕(聖王) 대에 도읍을 소부리(所夫里)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하여 31세 의자왕(義慈王)에 이르기까지 120년을 지냈다.
당(唐)나라 현경(顯慶) 5년(660)은 의자왕이 왕위에 있던 20년으로 신라 김유신(金庾信)이 소정방(蘇定方)과 백제를 쳐서 평정하던 해이다. 백제에는 본래 다섯 부(部)가 있어 37군(郡)·200성(城)·76만호(戶)로 나뉘었었다. 그런데 당에서는 그 땅에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蓮)·덕안(德安) 등 다섯 도독부(都督府)를 두고, 그 추장(酋長)들로 도독부(都督府), 자사(刺史)를 삼았는데 얼마 안 되어 신라가 그 땅을 모두 병합했다. 그리고 거기에 웅주(熊州)·전주(全州)·무주(武州) 등 세 주(州)와 여러 군현(郡縣)을 두었다.
또 호암사(虎암寺)에는 정사암(政事암)이란 바위가 있는데, 나라에서 장차 재상(宰相)감을 의논할 때에 뽑힐 사람 3, 4명의 이름을 써서 상자에 넣고 봉해서 바위 위에 두었다가 얼마 후에 열어 보아 이름 위에 도장이 찍힌 자리가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있다.
또 사자하(泗차河) 가에는 바위 하나가 있는데 소정방이 일찍이 그 바위 위에 앉아서 물고기와 용을 낚았다 하여 바위 위에는 용이 꿇어앉았던 자취가 있으므로 그 바위를 용암(龍巖)이라고 한다.
또 고을 안에는 산이 세 개가 있어서 그곳을 일산(日山)·오산(吳山)·부산(浮山)이라고 하는데 백제가 전성(全盛)하던 때에 신(神)들이 그 산 위에 살면서 서로 날아 왕래하기를 조석으로 끊이지 않았다.
사자수(泗차水) 언덕에는 또 돌 하나가 있는데 10여 명이 앉을 만하다. 백제 왕이 왕흥사(王興寺)에 가서 부처에게 예(禮)를 드리려 할 때면 먼저 그 돌에서 부처를 바라보고 절을 하면 그 돌이 저절로 따뜻해졌다 해서 그 돌을 환석(煥石)이라고 한다.
또 사자하(泗차河)의 양쪽 언덕은 마치 그림 병풍과 같아서 백제 왕이 매양 그곳에서 잔치를 열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즐겼다. 그런 때문에 지금도 이곳을 대왕포(大王浦)라고 일컫는다.
또 시조(始祖) 온조왕은 동명왕(東明王)의 셋째아들로서 몸이 장대하고 효도와 우애가 지극하고, 말 타기와 활 쏘기를 잘했다. 또 다루왕(多婁王)은 너그럽고 관후했으며 위엄과 인망이 있었다. 또 사비왕(沙沸王; 혹은 사이왕沙伊王)은 구수왕(仇首王)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했으나 나이가 어려서 정사를 보살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즉시 이를 폐하고 고이왕(古爾王)을 세웠다. 혹은 말하기를, 낙초(樂初) 2년 기미(己未)에 사비왕(沙沸王)이 죽고 고이왕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무왕(武王; 고본古本에는 무강武康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백제百濟에는 무강武康이 없다)
제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 어머니가 과부(寡婦)가 되어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龍)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던 것이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으로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항상 마[薯여]를 캐다가 파는 것으로 생업(生業)을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고 이름지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공주 선화(善花; 혹은 선화善化)가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가서 마을 아이들에게 마를 먹이니 이내 아이들이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니 그것은 이러하다.
선화공주(善化公主)님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방(薯童房)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동요(童謠)가 서울에 가득 퍼져서 대궐 안에까지 들리자 백관(百官)들이 임금에게 극력 간해서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보내게 하여 장차 떠나려 하는 데 왕후(王后)는 순금(純金) 한 말을 주어 노자로 쓰게 했다. 공주가 장차 귀양지에 도착하려는데 도중에 서동이 나와 공주에게 절하면서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저 우연히 믿고 좋아하니 서동은 그를 따라가면서 비밀히 정을 통했다. 그런 뒤에 서동의 이름을 알았고, 동요가 맞는 것도 알았다. 함께 백제로 와서 모후(母后)가 준 금을 꺼내 놓고 살아 나갈 계획을 의논하자 서동이 크게 웃고 말했다. "이게 무엇이오?" 공주가 말했다. "이것은 황금이니 이것을 가지면 백 년의 부를 누릴 것입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을 흙덩이처럼 쌓아 두었소." 공주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면서 말했다. "그것은 천하의 가장 큰 보배이니 그대는 지금 그 금이 있는 곳을 아시면 우리 부모님이 계신 대궐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좋소이다." 이에 금을 모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용화산(龍華山) 사자사(師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이것을 실어 보낼 방법을 물으니 법사가 말한다. "내가 신통(神通)한 힘으로 보낼 터이니 금을 이리로 가져 오시오." 이리하여 공주가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금을 사자사(師子寺) 앞에 갖다 놓았다.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 동안에 그 금을 신라 궁중으로 보내자 진평왕(眞平王)은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서동을 존경해서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서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어느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龍華山) 밑 큰 못 가에 이르니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왕에게 말한다. "모름지기 여기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왕은 그것을 허락했다. 곧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비스러운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삼존의 상(像)을 만들고 회전(會殿)과 탑(塔)과 낭무(廊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彌勒寺; <국사國史>에서는 왕흥사王興寺라고 했다)라 했다. 진평왕이 여러 공인(工人)들을 보내서 그 역사를 도왔는데 그 절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삼국사三國史>에는 이 분을 법왕法王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
<삼국사(三國史)> 본전(本傳)에 보면 이러하다. 견훤(甄萱)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으로, 함통(咸通) 8년 정해(丁亥; 867)에 났다. 근본 성(姓)은 이(李)였는데 뒤에 견(甄)으로 씨(氏)를 고쳤다. 아버지 아자개(阿慈개)는 농사지어 생활했었는데, 광계(光啓) 연간에 사불성(沙弗城; 지금의 상주尙州)에 웅거하여 스스로 장군(將軍)이라 했다. 아들이 넷이 있어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는데 그 중에 견훤(甄萱)은 남보다 뛰어나고 지략(智略)이 많았다.
<이제가기(李제家記)>에 보면 이렇게 말했다. 진흥대왕(眞興大王)의 비(妃) 사도(思刀)의 시호는 백융부인(白융夫人)이다. 그 셋째아들 구륜공(仇輪公)의 아들 파진간(波珍干) 선품(善品)의 아들 각간(角干) 작진(酌珍)이 왕교파리(王咬巴里)를 아내로 맞아 각간 원선(元善)을 낳으니 이가 바로 아자개이다. 아자개의 첫째부인은 상원부인(上院夫人)이요, 둘째부인은 남원부인(南院夫人)으로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으니 그 맏아들이 상부(尙父) 훤(萱)이요, 둘째아들이 장군 능애(能哀)요, 셋째아들이 장군 용개(龍盖)요, 넷째아들이 보개(寶盖)요, 다섯째아들이 장군 소개(小盖)이며, 딸이 대주도금(大主刀金)이다.
또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부자 한 사람이 있어 모양이 몹시 단정했다. 딸이 아버지께 말하기를 "밤마다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관계하고 갑니다"하자 아버지는 "너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꽂아 두어라"하여 그 말대로 시행했다. 날이 밝아 그 실이 간 곳을 찾아보니 북쪽 담 밑에 있는 큰 지렁이 허리에 꽂혀 있다. 이로부터 태기가 있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甄萱)이라 일컬었다. 경복(景福) 원년(元年) 임자(壬子; 892)에 이르러 왕이라 일컫고 완산군(完山郡)에 도읍을 정했다. 나라를 다스린지 43년 청태(淸泰) 원년(元年) 갑오(甲午; 934)에 견훤의 세 아들 즉 신검(神劒)·용검(龍劒)·양검(良劒)이 즉위하여 천복(天福) 원년(元年) 병신(丙申; 936)에 고려 군사와 일선군(一善郡)에서 싸워서 패하니 후백제(後百濟)는 아주 없어졌다.
처음에 견훤이 나서 포대기에 싸였을 때,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밥을 가져다 주려고 아이를 수풀 아래 놓아 두었더니 범이 와서 젖을 먹이니 마을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겼다. 아이가 장성하자 몸과 모양이 웅장하고 기이했으며 뜻이 커서 남에게 얽매이지 않고 비범했다. 군인이 되어 서울로 들어갔다가 서남의 해변으로 가서 변경을 지키는데 창을 베개삼아 적군을 지키니 그의 기상(氣象)은 항상 사졸(士卒)에 앞섰으며 그 공로로 비장(裨將)이 되었다. 당(唐)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 원년(元年)은 신라 진성왕(眞聖王)의 재위 6년이다. 이때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곁에 있어서 국권(國權)을 농간하니 기강(紀綱)이 어지럽고 해이하였으며, 기근(饑饉)이 더해지니 백성들은 떠돌아다니고 도둑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견훤은 남몰래 반역할 마음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울의 서남 주현(州縣)들을 공격하니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호응하여 한 달 동안에 무리는 5,000이나 되었다. 드디어 무진주(武珍州)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감히 공공연하게 왕이라 일컫지는 못하고 스스로 신라서남도통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국개국공(新羅西南都統 行全州刺史 兼 御史中承上柱國 漢南國開國公)이라 했으니 용화(龍化) 원년(元年) 기유(己酉; 889)였다. 이것을 혹 경복(景福) 원년(元年) 임자(壬子; 892)의 일이라고도 한다.
이때 북원(北原)의 오둑 양길(良吉)의 세력이 몹시 웅대하여 궁예(弓裔)는 자진해서 그 부하가 되었다.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멀리 양길에게 직책을 주어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巡行)하여 완산주(完山州)에 이르니 고을 백성들이 영접하면서 위로했다. 견훤은 민심을 얻은 것이 기뻐서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백제가 나라를 시작한 지 600여 년에 당나라 고종(高宗)은 신라의 요청으로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서 수군(水軍) 13만 명이 바다를 건너오고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은 있는 군사를 거느리고 황산(黃山)을 거쳐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으니 어찌 감히 도읍을 세워 옛날의 분함을 씻지 않겠는가." 드디어 스스로 후백제 왕이라 일컫고 벼슬과 직책을 나누었으니 이는 당나라 광화(光化) 3년이요 신라 효공왕(孝恭王) 4년(900)이다.
정명(貞明) 4년 무인(戊寅; 918)에 철원경(鐵原京)의 민심이 졸지에 변하여 우리 태조(太祖)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니 견훤은 이 소식을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서 경하(慶賀)하고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智異山)의 죽전(竹箭) 등을 바쳤다. 견훤은 우리 태조에게 겉으로는 화친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시기하였다. 그는 태조에게 총마(총馬)를 바치더니 3년 겨울 10월에는 기병(騎兵) 3,000을 거느리고 조물성(曹物城; 지금의 어딘지 자세히 알 수 없음)까지 오자 태조(太祖)도 역시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와서 싸웠으나 견훤의 군사가 날래어 승부(勝負)를 결단할 수가 없었다. 이에 태조는 일시적으로 화친하여 견훤의 군사들이 피로하기를 기다리려고 글을 보내서 화친할 것을 요구하고 종제(從弟) 왕신(王信)을 인질로 보내니 견훤도 역시 그 사위 진호(眞虎)를 보내서 교환했다. 12월에 견훤은 거서(居西; 지금의 어딘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등 20여 성을 쳐서 차지하고 사자를 후당(後唐)에 보내서 번신(藩臣)이라 일컬으니 후당에서는 그에게 검교태위 겸 시중판백제군사(檢校太尉 兼 侍中判百濟軍事)의 벼슬을 주고, 전과 같이 도독행전주자사 해동서면도통지휘병마판치등사 백제왕(都督行全州刺史 海東西面都統指揮兵馬判置等事 百濟王)이라 하고 식읍(食邑) 2,500호를 주었다. 4년에 진호가 갑자기 죽자 견훤은 일부러 죽인 것이라고 의심해서 즉시 왕신을 가두고 사람을 보내서 전년에 보낸 총마를 돌려보내라고 하니 태조는 웃고 그 말을 돌려보냈다. 천성(天成) 2년 정해(丁亥; 927) 9월에 견훤은 근품성(近品成; 지금의 산양현山陽縣)을 쳐 빼앗아 불을 질렀다. 이에 신라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자 태조는 장차 군사를 내려는데 견훤은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울주蔚州)를 쳐서 취하고 족시림(族始林; 혹은 계림鷄林 서쪽 들이라고 했다)으로 진군하여 졸지에 신라 서울로 들어갔다. 이때 신라 왕은 부인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 나가 놀고 있었으므로 더욱 쉽게 패했다. 견훤은 왕의 부인을 억지로 끌어다가 욕보이고 왕의 족제(族弟) 김부(金傅)로 왕위를 잇게 한 뒤에 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을 사로잡고, 나라의 귀한 보물과 무기와 자제(子弟)들, 그리고 여러 가지 공인(工人) 중에 우수한 자들을 모두 데리고 갔다. 태조는 정예(精銳)한 기병(騎兵) 5,000을 거느리고 공산(公山) 아래에서 견훤을 맞아서 크게 싸웠으나 태조의 장수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은 죽고 모든 군사가 패했으며, 태조만이 겨우 죽음을 면했을 뿐 대항하지 못했기 때문에 견훤은 많은 죄악을 짓게 되었다. 견훤은 전쟁에 이긴 기세를 타서 대목성(大木城)과 경산부(京山府)와 강주(康州)를 노략하고 부곡성(缶谷城)을 공격했는데 의성부(義成府)의 태수(太守) 홍술(洪述)은 대항해 싸우다가 죽었다. 태조는 이 소식을 듣고 말했다. "나는 오른손을 잃었다."
42년 경인(庚寅: 930)에 견훤은 고창군(古昌郡; 지금의 안동부安東府)을 치려고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석산(石山)에 영채를 마련하니 태조는 백보(百步) 가량을 공격해서 고을 북쪽 병산(甁山)에 영채를 마련했다. 여러 번 싸웠으나 견훤이 패하여 시랑(侍郞) 김악(金渥)이 사로잡혔다. 다음날 견훤이 군사를 거두어 순주성(順州城)을 습격하니 성주(城主) 원봉(元逢)은 막지 못하고 성을 버리고 밤에 도망했다. 태조는 몹시 노하여 그 고을을 낮추어 하지현(下枝縣; 지금의 풍산현豊山縣. 원봉元逢이 본래 순주성順州城 사람인 까닭이다)을 삼았다.
신라(新羅)의 군신(君臣)들은 망해 가는 세상에 다시 일어날 수가 없으므로 우리 태조를 끌어들여 좋은 의(誼)를 맺어서 자기들을 후원해 주도록 했다.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또다시 신라 서울에 들어가 나쁜 짓을 하려 하는데, 태조가 먼저 들어갈까 두려워해서 태조에게 편지를 보냈다. "전일에 국상(國相) 김웅렴(金雄廉) 등이 장차 그대를 서울로 불러들이려 한 것은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호응하는 것과 같으며, 종달새가 매의 죽지를 찢으려 드는 것과 같으니, 반드시 백성들을 도탄(塗炭)에 빠뜨리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빈 터전으로 만들 것이오. 나는 이 때문에 먼저 조적(祖적)의 채찍을 가지고 홀로 한금호(韓擒虎)의 도끼를 휘둘러 백관(百官)들에게 맹세하기를 백일(白日)과 같이 했고, 육부(六部)를 의리 있는 풍도로 설유(說諭)했더니 뜻밖에 간신(奸臣)은 도망하고 임금[경애왕景哀王]은 세상을 떠났소. 이에 경명왕(景明王)의 외종제(外從弟)인 헌강왕(憲康王)의 외손(外孫)을 받들어 왕위에 오르게 해서 위태로운 나라를 다시 세우고 없는 임금을 다시 있게 만들었소. 그런데 그대는 내 충고(忠告)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한갓 흘러 다니는 말만을 듣고 온갖 계교로 왕위를 엿보고 여러 가지로 나라를 침노했으나 오히려 내가 탄 말의 머리도 보지 못했고 내 쇠털 하나도 뽑지 못했소. 이 겨울 초순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星山)의 진(陣) 밑에서 손을 묶어 항복했고, 또 이달 안에는 좌장(左將) 김락(金樂)이 미리사(美利寺) 앞에서 전사(戰死)했소. 이밖에 죽인 것도 많고 사로잡은 것도 적지 않았소. 그 강하고 약한 것이 이와 같으니 이기고 질 것은 알 만한 일이오. 내가 바라는 일은 활을 평양성(平壤城) 문루(門樓)에 걸고 말에게 패강(浿江)의 물을 먹이는 일이오. 그러나 지난달 7일에 오월국(吳越國)의 사신 반상서(班尙書)가 와서 국왕(國王)의 조서(詔書)를 전하기를, '경(卿)은 고려와 오랫동안 좋은 화의(和誼)를 통하고 함께 이웃 나라의 맹약(盟約)을 맺은 줄 알았었소. 그런데 인질로 간 사람이 죽은 것을 보고 드디어 화친(和親)하던 옛 뜻을 잃어버리고 서로 국경을 침범하여 전쟁이 쉬지 않게 되었소. 이제 일부러 사신을 경의 고을로 보내고 또 고려에도 글을 보내어 마땅히 각각 서로 친목해서 길이 평화를 도모하도록 한 것이오.' 내가 생각하는 의리는 왕실을 높이는 데에 독실하고 마음은 큰 나라를 섬기는 데 깊었었소. 이제 오월왕(吳越王)이 조칙(詔勅)을 타이르는 것을 듣고 즉시 받들어 행하고자 하나, 다만 그대가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가 없고 국경에 있으면서도 싸우려는 것을 걱정하는 바요. 이제 그 조서(詔書)를 베껴서 보내는 터이니 청컨대 유의해서 자세히 살피시오. 또 토끼와 사냥개가 다 함께 지치고 보면 마침내는 반드시 남의 조롱을 받는 법이오. 조개와 황새가 서로 버티다가는 역시 남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오. 마땅히 미복(迷復)을 경계하여 후회하는 일을 스스로 불러오지 말도록 하시오."
천성(天成) 2년(927) 정월에 태조는 회답을 보냈다. "오월국(吳越國)의 통화사(通和使) 반상서(班尙書)가 전한 조서(詔書) 한 통을 받들고, 겸하여 그대가 보낸 긴 편지도 받아 보았소. 화초부사(華초膚使)가 조서를 가지고 왔고, 척소호음(尺素好音)과 겸해서 가르침도 받았소. 지검(芝檢)을 받아 비록 감격은 더했지만 편지를 펴 보고 의심스러운 마음을 없애기 어려웠소. 이제 돌아가는 사신에게 부탁하여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려 하오. 나는 위로 하늘의 명령을 받들고 아래로 백성들의 추대에 못 이겨서 외람되이 장수의 직권(職權)을 맡아서 천하를 경륜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오. 저번에 삼한(三韓)이 액운(厄運)을 당하고 모든 국토에 흉년이 들어 황폐해져서 백성들은 모두 황건(黃巾)에 소속되고, 논밭은 적토(赤土)가 아닌 땅이 없었소. 난리의 시끄러움을 그치게 하고 나라의 재앙을 구하려 하여 이에 스스로 선린(善隣)의 우호(友好)를 맺으니 과연 수천 리 되는 국토가 농상(農桑)으로 생업(生業)을 즐기고, 사졸(士卒)은 7,8년 동안 한가롭게 쉬었소. 그러던 것이 계유(癸酉)년 10월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교전(交戰)하게 되었소. 그대가 처음에는 적을 가볍게 여겨 곧장 전진해 와서 마치 당랑(螳螂)이 수레바퀴를 막는 것 같이 하더니, 마침내 어려움을 알고 용감히 물러가서 마치 모기가 산을 짊어진 것과 같이 했소. 그리고 손을 모아 공손한 말로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기를, '오늘 이후로는 길이 화목하며, 혹시라도 이 맹세를 어긴다면 신(神)이 벌을 줄 것이라'하였소. 이에 나도 전쟁을 중지하는 무(武)를 숭상하고 사람을 죽이지 않는 인(仁)을 기약하여 드디어 여러 겹 포위했던 것을 풀어 피로한 군사들을 쉬게 했으며, 인질 보내는 것도 거절하지 않고 다만 백성만을 편안하게 하려 했으니, 이것은 곧 내가 남쪽 사람들에게 큰 덕(德)을 베푼 것이었소. 그런데 맹약(盟約)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흉악한 세력이 다시 일어나 봉채(蜂채)의 독이 생민(生民)을 침해하고 미친 이리와 호랑이가 서울땅을 가로막아 금성(金城)이 군색하고 황옥(黃屋)을 몹시 놀라게 할 줄 어찌 생각했겠소? 큰 의리에 의거해서 주(周)나라 왕실을 높이는 것이 그 누가 환공(桓公)·문공(文公)의 패업(패業)과 같겠는가. 기회를 타서 한(漢)나라를 도모한 것은 오직 왕망(王莽)·동탁(董卓)의 간사함을 볼 뿐이오. 왕의 지극히 높은 지위로서 몸을 굽혀 그대에게 자(子)라고 하게 하여 높고 낮은 차서를 잃게 하였으니 상하(上下)가 모두 조심해서 원보(元輔)의 충순(忠純)이 아니면 어찌 사직(社稷)을 편안케 할 수 있으랴 했소, 나의 마음에는 악한 것이 없고 뜻은 왕실(王室)을 높이는 데 간절하여 장차 조정을 구원해서 나라를 위태로운 데서 구해 내려 했소. 그대는 터럭만한 작은 이익을 보고 천지의 두터운 은혜를 저버려 임금을 죽이고 대궐을 불사르며 대신(大臣)들을 죽이고 사민(士民)을 도륙했소. 궁녀(宮女)들은 잡아서 수레에 실어 가고 보물은 빼앗아서 짐 속에 실었으니 그 흉악함은 걸왕(桀王)·주왕(紂王)보다 더하고 어질지 못함은 경짐승[경]과 올빼미보다 더 심했소. 나는 붕천(崩天)의 원한과 각일(却日)의 깊은 정성으로, 매가 참새를 쫓듯이 국가에 대해 견마(犬馬)의 수고로움을 다하려 했소. 그리하여 두 번째 군사를 일으켜 2년이 지났는데, 육로(陸路)로 진격하는 데는 천둥과 번개처럼 빨리 달렸고, 수로(水路)로 치는 데는 범과 용처럼 용맹스러워 움직이면 반드시 공을 세우고 일을 하는 데 헛일이 없었소. 윤경(尹卿)을 바닷가로 쫓으면 쌓인 갑옷이 산더미 같았고, 추조(雛造)를 성 가에서 잡았을 때에는 시체가 들을 덮었소. 연산군(燕山君)에서는 길환(吉奐)을 군전(軍前)에서 베었고, 마리성(馬利城; 아마 이산군伊山郡인 듯싶다) 가에서는 수오(隨晤)를 깃발 아래서 죽였소. 임존성(任存城; 지금의 대흥군大興郡)을 함락시키던 날에는 형적(刑積) 등 수백 명이 목숨을 버렸고, 청천현(淸川縣; 상주尙州 영내領內의 현縣 이름)을 깨칠 때에는 직심(直心) 등 4, 5 무리가 머리를 바쳤소. 동수(桐藪; 지금의 동화사桐華寺)는 깃발만 바라보고 도망해 흩어졌고, 경산(京山)은 구슬을 입에 물고 항복했소. 강주(康州)는 남쪽으로부터 귀순해 왔고, 나부(羅府)는 서쪽에서 와서 소속되었소. 공격하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수복(收復)될 날이 어찌 멀겠소? 반드시 저수(지水)의 영채에서 장이(張耳)의 묵은 원한을 씻고, 오강(烏江) 기슭에서 한왕(漢王)의 한번 승전(勝戰)한 마음을 이룩해서 마침내 바람과 물결을 쉬게 하여 길이 천하를 맑게 할 것이오. 이는 하늘이 돕는 바이니 천명(天命)이 어디로 돌아가겠소? 더구나 오월왕(吳越王) 전하의 덕은 포황(包荒)에도 흡족하고 인(仁)은 어린 백성에게도 깊어 특히 대궐에서 명령을 내려 우리 나라에서 난리를 그치라고 효유하였소. 이미 가르침을 받았으니 어찌 받들어 행하지 않겠소? 만일 그대도 이 조서(詔書)를 받들어 흉악한 싸움을 그친다면, 다만 오월국의 어진 은혜에 보답할 뿐만 아니라 또한 동방(東方)의 끊어진 대(代)도 이을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만일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할 것이오."(이 글은 최치원崔致遠이 지었다)
장흥(長興) 3년(932)에 견훤의 신하 공직(공直)이 용맹스럽고 지략(智略)이 있었는데 태조(太祖)에게로 와서 항복하니 견훤은 공직의 두 아들과 딸 하나를 잡아서 다리 힘줄을 지져서 끊었다. 9월에 견훤은 일길(一吉)을 보내어 수군(水軍)을 이끌고 고려 예성강(禮成江)으로 들어가 3일 동안 머무르면서 염주(鹽州)·백주(白州)·진주(眞州) 등 세 주(州)의 배 100여 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돌아갔다.
청태(淸泰) 원년(元年) 갑오(甲午; 934)에 견훤은 태조가 운주(運州; 자세히 알 수 없다)에 주둔해 있다는 말을 듣고 갑옷 입은 군사를 뽑아 욕식(욕食)시켜 빨리 가게 하였는데, 미처 영채에 이르기 전에 장군(將軍) 유금필(庾黔弼)이 강한 기병(奇兵)으로 쳐서 3,000여 명을 목베니 웅진(熊津) 이북(以北)의 30여 성은 이 소문을 듣고 자진해서 항복하였으며, 견훤의 부하였던 술사(術士) 종훈(宗訓)과 의사(醫師) 지겸(之謙), 용장(勇將) 상봉(尙逢)·최필(崔弼) 등도 모두 태조에게 항복했다.
병신(丙申; 936)년 정월에 견훤은 그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신라말(新羅末)에 후백제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어 군사는 북쪽의 고려 군사보다 배나 되는데도 오히려 이기지 못하니 필경 하늘이 고려를 위하여 가수(假手)하는 것 같다. 어찌 북쪽 고려 왕에게 귀순해서 생명을 보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러나 그 아들 신검(神劍)·용검(龍劍)·양검(良劍) 등 세 사람은 모두 응하지 않았다. <이제가기(李제家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견훤에게는 아들 아홉이 있으니, 맏이는 신검(神劍), 둘째는 태사(太師) 겸뇌(謙腦), 셋째는 좌승(佐承) 용술(龍述), 넷째는 태사(太師) 총지(聰智), 다섯째는 대아간(大阿干) 종우(宗祐), 여섯째는 이름을 알 수 없고, 일곱째는 좌승(佐承) 위흥(位興), 여덟째는 태사(太師) 청구(靑丘)이며, 딸 하나는 국대부인(國大夫人)이니 모두 상원부인(上院夫人)의 소생(所生)이다." 또 말하기를, "견훤은 처첩(妻妾)이 많아서 아들 10여 명을 두었는데, 넷째아들 금강(金剛)은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아 견훤이 특히 그를 사랑하여 왕위를 전하려 하니 그 형 신검·양검·용검 등이 알고 몹시 근심했다. 이때 양검은 강주도독(康州都督), 용검은 무주도독(武州都督)으로 있고, 홀로 신검만이 견훤의 곁에 있었다. 이찬(伊飡) 능환(能奐)이 사람을 강주와 무주에 보내서 양검 등과 모의했다. 청태(淸泰) 2년 을미(乙未; 935) 3월에 이들은 영순(英順) 등과 함께 신검을 권해서 견훤을 금산(金山) 불당(佛堂)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서 금강을 죽이고 신검이 자칭 대왕이라 하고 나라 안의 모든 죄수들을 사면(赦免)해 주었다"고 한다.
처음에 견훤이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멀리 대궐 뜰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므로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묻자 신검이 아버지에게 아뢰었다. "왕께서는 늙으시어 군국(軍國)의 정사(政事)에 어두우시므로 장자(長子) 신검이 부왕(父王)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해서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는 소리입니다." 조금 후에 아버지를 금산사(金山寺) 불당(佛堂)으로 옮기고 파달(巴達) 등 30 명의 장사(壯士)를 시켜서 지키게 하니, 동요(童謠)에 이렇게 말했다.
가엾은 완산(完山) 아이
아비를 잃어 울고 있네.
당시 견훤은 후궁과 나이 어린 남녀 두 명, 시비(侍婢) 고비녀(古比女), 나인(內人) 능예남(能乂男) 등과 함께 갇혀 있었다. 그러다가 4월에 이르러 견훤은 술을 빚은 뒤에 지키는 장사 30명에게 먹여 취하게 하고는 고려로 도망해 왔다. 이에 태조는 소원보향예(小元甫香乂)·오염(吳琰)·충질(忠質) 등을 보내서 수로(水路)로 가서 맞아오게 했다. 고려에 이르자 태조는 견훤의 나이가 10년 위라고 하여 높여서 상부(尙父)라 하여 남궁(南宮)에 편안히 있게 하고 양주(楊洲)의 식읍(食邑)·전장(田莊)과 노비 40명, 말 아홉 필을 주고, 먼저 항복해 와 있는 신강(信康)으로 아전(衙前)을 삼았다. 견훤의 사위 장군 영규(英規)가 비밀히 그 아내에게 말했다. "대왕께서 나라를 위해서 애쓰신 지 40여 년에 공업(功業)이 거의 이루어지려 하는데 하루아침에 집안 사람의 화(禍)로 나라를 잃고 고려에 따르니, 대체로 정녀(貞女)는 두 남편을 모시지 않고 충신(忠臣)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오. 만일 내 임금을 버리고 반역한 아들[神劍]을 섬긴다면 무슨 낯으로 천하의 의사(義士)들을 본단 말이오. 더구나 고려의 왕공(王公)은 인후근검(仁厚勤儉)하여 민심을 얻었다 하니 이는 아마 하늘의 계시(啓示)로, 필경 삼한(三韓)의 임금이 될 것이니 어찌 글을 올려 우리 임금을 위안하고, 겸해서 왕공에게 은근히 하여 뒷날의 복을 도모하지 않겠소?" 그 아내가 말했다. "당신의 말씀이 바로 저의 뜻입니다." 이에 천복(天福) 원년(元年) 병신(丙申; 936) 2월에 사람을 보내서 태조에게 자기의 뜻을 말했다. "왕께서 의기(義旗)를 드시면 저는 내응(內應)하여 고려 군사를 맞이하겠습니다." 태조는 기뻐하여 사자에게 예물을 후히 주어 보내고 영규에게 치사했다. "만일 그대의 은혜를 입어 한번 합세해서 길에서 막히는 일이 없게 한다면 곧 먼저 장군께 뵙고, 다음에 올라 부인께 절하여, 형으로 섬기고 누님으로 받들어 반드시 끝까지 후하게 보답하겠소. 천지와 귀신은 모두 이 말을 들을 것이오." 6월에 견훤이 태조에게 말했다. "노신(老臣)이 전하께 항복해 온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어 반역한 자식을 죽이기 위한 것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대왕은 신병(神兵)을 빌어 적자난신(賊子亂臣)을 죽이시면 신이 비록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태조가 말했다. "그들을 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이오." 이에 먼저 태자 무(武)와 장군 술희(述希)에게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10만을 거느려 천안부(天安府)로 나가게 하고, 9월에 태조는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천안(天安)에 이르러 군사를 합하여 일선군(一善郡)으로 진격해 나가니 신검이 군사를 거느리고 막았다. 갑오일(甲午日)에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니 고려 군사는 동북방을 등지고 서남쪽을 향해 진을 쳤다. 태조는 견훤과 함께 군대를 사열하는데, 갑자기 칼과 창 같은 흰 구름이 일어나 적군(敵軍)을 향해 가므로 북을 치고 나가자 후백제의 장군 효봉(孝奉)·덕술(德述)·애술(哀述)·명길(明吉) 등은 고려 군사의 형세가 크고 정돈된 것을 바라보고 갑옷을 버리고 진 앞에 나와 항복했다. 태조는 이를 위로하고 장수가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 등은 말한다. "원수(元帥) 신검(神劍)은 중군(中軍)에 있습니다." 태조는 장군 공훤(公萱) 등에게 명하여 삼군을 일시에 진군시켜 협격(挾擊)하니 백제군은 무너져 달아났다. 황산(黃山) 탄현(炭峴)에 이르자 신검은 두 아우와 장군 부달(富達)·능환(能奐) 등 40여 명과 함께 항복했다. 태조는 항복을 받고 나머지는 모두 위로하여 처자(妻子)와 함께 서울로 돌아가도록 허락했다. 태조가 능환(能奐)에게 물었다. "처음에 양검 등과 비밀히 모의하여 대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세운 것은 네 꾀이니, 신하된 의리(義理)에 이래야 마땅하단 말이냐." 능환은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한다. 태조는 명하여 이를 베어라 했다. 신검이 참람되이 왕위를 빼앗은 것은 남의 위협으로, 그의 본심이 아니었으며 또 항복하여 죄를 빌어 특히 그 죽음을 용서하였더니, 견훤은 분하게 여겨 등창이 나서 수일만에 황산(黃山) 불사(佛舍)에서 죽으니 때는 9월 8일이고 나이는 70이었다.
태조는 군령(軍令)은 엄하고 분명해서 군사들이 조금도 범하지 않아 주현(州縣)이 편안하여 늙은이와 어린이가 모두 만세를 불렀다. 태조는 영규(英規)에게, "전왕(前王)이 나라를 잃은 후에 그의 신하된 사람으로서 한 사람도 위로해 주는 이가 없었는데 오직 경(卿)의 내외만이 천리 밖에서 글을 보내서 성의를 보였고, 겸해서 아름다운 명예를 나에게 돌렸으니 그 의리를 잊을 수 없소."하고 좌승(左承)이란 벼슬과 밭 1,000경(頃)을 내리고, 역마(驛馬) 35필을 빌려 주어 가족들을 맞게 했으며 그 두 아들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견훤은 당나라 경복(景福) 원년(元年; 892)에 나라를 세워 진(晉)나라 천복(天福) 원년(元年; 936)에 이르니, 45년 만인 병신(丙申)년에 망했다.
<사론(史論)>에 이렇게 말했다. "신라는 운수가 다하고 올바른 도리를 잃어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이 돌아갈 곳이 없이 되었다. 이에 뭇 도둑이 틈을 타서 일어나서 마치 고슴도치의 털과 같았다. 그 중에서도 강한 도둑은 궁예(弓裔)와 견훤(甄萱) 두 사람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로서 도리어 제 나라를 원수로 삼아 심지어는 선조의 화상(畵像)을 칼로 베었으니 그 어질지 않은 것이 너무 심했다. 견훤은 신라의 백성으로 태어나서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 화심(禍心)을 품어 나라의 위태로움을 기화로 신라의 도읍을 쳐서 임금과 신하를 마치 짐승처럼 죽였으니 참으로 천하의 원흉(元兇)이다. 때문에 궁예는 그 신하에게서 버림을 당했고, 견훤은 그 아들에게서 화(禍)가 생겼으니 모두 스스로 취한 것인데 누구를 원망한단 말인가. 비록 항우(項羽)·이밀(李密)의 뛰어난 재주로도 한(漢)과 당(唐)이 일어나는 것을 대적하지 못했거늘, 하물며 궁예와 견훤 같은 흉한 자들이 어찌 우리 태조를 대항할 수 있었으랴.
가락국기(駕洛國記; 고려高麗 문종조文宗朝 대강大康 연간年間에 김관지주사金官知州事 문인文人이 지은 것이니 그 대략을 여기에 싣는다)
천지(天地)가 처음 열린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 없었다. 그리고 또 군신(君臣)의 칭호도 없었다. 이럴 때에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간(干)이 있었다. 이들 추장(酋長)들이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00호(戶)로서 7만 5,000명이었다. 이 사람들은 거의 산과 들에 모여서 살았으며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42) 3월 계욕일(계浴日)에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귀지(龜旨; 이것은 산봉우리를 말함이니, 마치 십붕十朋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에서 무엇을 부르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백성 2, 3백 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양이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한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干) 등이 말한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그러자 또 말한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귀지(龜旨)입니다." 또 말한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였으므로 일부러 여기에 내려온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되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겠다'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놀게 될 것이다." 구간(九干)들은 이 말을 좇아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추다가 얼마 안 되어 우러러 쳐다보니 다만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서 땅에 닿아 있다. 그 노끈의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싸여 있으므로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백배(百拜)하고 얼마 있다가 다시 싸안고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아 두고 여러 사람은 각기 흩어졌다. 이런 지 12시간이 지나, 그 이튿날 아침에 여러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그 합을 여니 여섯 알은 화해서 어린아이가 되어 있는데 용모(容貌)가 매우 훤칠했다. 이들을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들이 절하고 하례(賀禮)하면서 극진히 공경했다. 이들은 나날이 자라서 10여 일이 지나니 키는 9척으로 은(殷)나라 천을(天乙)과 같고 얼굴은 용과 같아 한(漢)나라 고조(高祖)와 같다. 눈썹이 팔자(八字)로 채색이 나는 것은 당(唐)나라 고조(高祖)와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우(虞)나라 순(舜)과 같았다. 그가 그달 보름에 왕위(王位)에 오르니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고 했다. 혹은 수릉(首陵; 수릉首陵은 죽은 후의 시호諡號다)이라고도 했다.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이라 하고 또 가야국(伽耶國)이라고도 하니 이는 곧 여섯 가야(伽耶) 중의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니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그는 임시로 대궐을 세우게 하고 거처하면서 다만 질박(質朴)하고 검소하니 지붕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 않고, 흙으로 쌓은 계단은 겨우 3척이었다.
즉위 2년 계묘(癸卯; 43) 정월에 왕이 말하기를, "내가 서울을 정하려 한다"하고는 이내 임시 궁궐의 남쪽 신답평(新沓坪; 이는 옛날부터 묵은 밭인데 새로 경작耕作했기 때문에 신답평新畓坪이라 했다. 답자沓字는 속자俗字다)에 나가 사방의 산악(山嶽)을 바라보다가 좌우 사람을 돌아보고 말한다.
"이 땅은 협소(狹小)하기가 여뀌[蓼] 잎과 같지만 수려(秀麗)하고 기이하여 가위 16나한(羅漢)이 살 만한 곳이다. 더구나 1에서 3을 이루고 그 3에서 7을 이루니 7성(聖)이 살 곳으로 가장 적합하다. 여기에 의탁하여 강토(疆土)를 개척해서 마침내 좋은 곳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여기에 1,500보(步) 둘레의 성과 궁궐(宮闕)과 전당(殿堂) 및 여러 관청의 청사(廳舍)와 무기고(武器庫)와 곡식 창고를 지을 터를 마련한 뒤에 궁궐로 돌아왔다. 두루 나라 안의 장정과 공장(工匠)들을 불러 모아서 그달 20일에 성 쌓는 일을 시작하여 3월 10일에 공사를 끝냈다. 그 궁궐(宮闕)과 옥사(屋舍)는 농사일에 바쁘지 않은 틈을 이용하니 그해 10월에 비로소 시작해서 갑진(甲辰; 44)년 2월에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서 새 궁으로 거동하여 모든 정사를 다스리고 여러 일도 부지런히 보살폈다. 이 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夫人)이 아기를 배어 달이 차서 알을 낳으니, 그 알이 화해서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脫解)라 했는데, 이 탈해가 바다를 좇아서 가락국에 왔다. 키가 3척이요 머리 둘레가 1척이나 되었다. 그는 기꺼이 대궐로 나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하니 왕이 대답했다. "하늘이 나를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命)을 어겨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 우리 국민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술법(術法)으로 겨뤄 보려는가?"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깐 동안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고,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새매로 화하는데 그 변하는 것이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본 모양으로 돌아오자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었다. 이에 탈해가 엎드려 항복한다. "내가 술법을 겨루는 마당에 있어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한 것은 대개 성인(聖人)께서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진 때문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실로 어려울 것입니다." 탈해는 문득 왕께 하직하고 나가서 이웃 교외의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대는 수로(水路)로 해서 갔다. 왕은 그가 머물러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水軍) 500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가 계림(鷄林)의 땅 안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기사(記事)는 신라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건무(建武) 24년 무신(戊申; 48) 7월 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조회할 때 말씀드렸다. "대왕께서 강림(降臨)하신 후로 좋은 배필을 구하지 못하셨으니 신들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대왕의 짝이 되게 하겠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일진대,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王后)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 왕은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해서 경주(輕舟)와 준마(駿馬)를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 망산도望山島는 서울 남쪽의 섬이요, 승점乘岾은 경기京畿 안에 있는 나라다)으로 가게 했더니 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빛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을 바라보고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에서 횃불을 올리니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오므로 신귀간은 이것을 바라보다 대궐로 달려와서 왕께 아뢰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이내 구간(九干) 등을 보내어 목연(木蓮)으로 만든 키를 갖추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가서 그들을 맞이하여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왕후가 말했다. "나는 본래 너희들을 모르는 터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느냐."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하니 왕은 옳게 여겨 유사(有司)를 데리고 행차해서, 대궐 아래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은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山神靈)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이 밖에 대종(待從)한 잉신(잉臣) 두 사람의 이름은 신보(申輔)·조광(趙匡)이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의 이름은 모정(慕貞)·모량(慕良)이라고 했으며, 데리고 온 노비까지 합해서 20여 명인데, 가지고 온 금수능라(錦繡綾羅)와 의상필단(衣裳疋緞)·금은주옥(金銀珠玉)과 구슬로 만든 패물들은 이루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가 점점 왕이 계신 곳에 가까워 오니 왕은 나아가 맞아서 함께 장막 궁전으로 들어왔다. 잉신(잉臣) 이하 여러 사람들은 뜰 아래에서 뵙고 즉시 물러갔다. 왕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잉신 내외들을 안내하게 하고 말했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 방에 5,6명씩 두어 편안히 있게 하라." 말을 마치고 난초로 만든 마실 것과 혜초(蕙草)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게 하고, 심지어 옷과 비단과 보화까지도 주고 군인들을 많이 내어 보호하게 했다.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寢殿)에 드니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한다. "저는 아유타국(阿踰타國)의 공주인데, 성(姓)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母后)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의 상제(上帝)를 뵈었는데, 상제께서는, 가락국의 왕 수로(首露)를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리는 데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의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에는 매우 다행한 일이오." 왕은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 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라 이들에게 각각 살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8월 1일에 왕은 대궐로 돌아오는데 왕후와 한 수레를 타고, 잉신 내외도 역시 나란히 수레를 탔으며, 중국에서 나는 여러 가지 물건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이때 시간은 오정(午正)이 가까웠다. 왕후는 중궁(中宮)에 거처하고 잉신 내외와 그들의 사속(私屬)들은 비어 있는 두 집에 나누어 들게 하고, 나머지 따라온 자들도 20여 칸 되는 빈관(賓館) 한 채를 주어서 사람 수에 맞추어 구별해서 편안히 있게 했다. 그리고 날마다 물건을 풍부하게 주고, 그들이 싣고 온 보배로운 물건들은 내고(內庫)에 두어서 왕후의 사시(四時) 비용으로 쓰게 했다. 어느날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구간(九干)들은 여러 관리의 어른인데, 그 지위와 명칭이 모두 소인(小人)이나 농부들의 칭호이니 이것은 벼슬 높은 사람의 명칭이 못된다. 만일 외국사람들이 듣는다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리하여 아도(我刀)를 고쳐서 아궁(我躬)이라 하고, 여도(汝刀)를 고쳐서 여해(汝諧), 피도(彼刀)를 피장(彼藏), 오도(五刀)를 오상(五常)이라 하고, 유수(留水)와 유천(留天)의 이름은 윗 글자는 그대로 두고 아래 글자만 고쳐서 유공(留功)·유덕(留德)이라 하고 신천(神天)을 고쳐서 신도(神道), 오천(五天)을 고쳐서 오능(五能)이라 했다. 신귀(神鬼)의 음(音)은 바꾸지 않고 그 훈(訓)만 신귀(臣貴)라고 고쳤다. 또 계림(鷄林)의 직제(職制)를 취해서 각간(角干)·아질간(阿叱干)·급간(級干)의 품계를 두고, 그 아래의 관리는 주(周)나라 법과 한(漢)나라 제도를 가지고 나누어 정하니 이것은 옛것을 고쳐서 새것을 취하고, 관직(官職)을 나누어 설치하는 방법이다. 이에 비로소 나라를 다스리고 집을 정돈하며,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니 그 교화(敎化)는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서고, 그 정치는 엄하지 않아도 다스려졌다. 더구나 왕이 왕후와 함께 사는 것은 마치 하늘에게 땅이 있고, 해에게 달이 있고, 양(陽)에게 음(陰)이 있는 것과 같았으며 그 공은 도산(塗山)이 하(夏)를 돕고, 당원(唐媛)이 교씨(嬌氏)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그 해에 왕후는 곰을 얻는 꿈을 꾸고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己巳; 189) 3월 1일에 왕후가 죽으니 나이는 157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은 땅이 꺼진 듯이 슬퍼하여 귀지봉(龜旨峰) 동북 언덕에 장사하고, 왕후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으려 하여 처음 배에서 내리던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바지를 벗은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기가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했다.
잉신(잉臣)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와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 등은 이 나라에 온 지 30년 만에 각각 두 딸을 낳았는데 그들 내외는 12년을 지나 모두 죽었다. 그 밖의 노비의 무리들도 이 나라에 온 지 7,8년이 되는데도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오직 고향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품고 모두 죽었으므로, 그들이 거처하던 빈관(賓館)은 텅 비고 아무도 없었다.
왕후가 죽자 왕은 매양 외로운 베개를 의지하여 몹시 슬퍼하다가 10년을 지난 헌제(獻帝) 입안(立安) 4년 기묘(己卯; 199) 3월 23일에 죽으니, 나이는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듯 슬퍼하여 왕후가 죽던 때보다 더했다.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우니 높이가 한 길이면 둘레가 300보(步)인데 거기에 장사 지내고 이름을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했다.
그의 아들 거등왕(居登王)으로부터 9대손인 구충왕(仇衝王)까지 이 사당에 배향(配享)하고, 매년 정월(正月) 3일과 7일, 5월 5일과 8월 5일과 15일에 푸짐하고 깨끗한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신라 제30대 법민왕(法敏王)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 661) 3월에 왕은 조서를 내렸다. "가야국(伽耶國) 시조(始祖)의 9대손 구형왕(仇衡王)이 이 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아들 세종(世宗)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의 아들 서운잡간(庶云잡干)의 딸 문명황후(文明皇后)께서 나를 낳으셨으니, 시조 수로왕은 어린 나에게 15대조가 된다. 그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그를 장사지낸 사당은 지금도 남아 있으니 종묘(宗廟)에 합해서 계속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리라." 이에 그 옛 터에 사자(使者)를 보내서 사당에 가까운 상전(上田) 30경(頃) 공영(供營)의 자(資)로 하여 왕위전(王位田)이라 부르고 본토(本土)에 소속시키니, 수로왕의 17대손 갱세급간(갱世級干)이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밭을 주관하여 해마다 명절이면 술과 단술을 마련하고 떡과 밥·차·과실 등 여러 가지를 갖추고, 제사를 지내어 해마다 끊이지 않게 하고, 그 제삿날은 거등왕이 정한 연중(年中) 5일을 변동하지 않으니, 이에 비로소 그 정성어린 제사는 우리 가락국에 맡겨졌다.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己卯; 199)에 편방(便房)을 설치한 뒤로부터 구형왕(仇衡王) 말년에 이르는 330년 동안에 사당에 지내는 제사는 길이 변함이 없었으나 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후부터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 661)에 이르는 60년 사이에는 이 사당에 지내는 제사를 가끔 빠뜨리기도 했다. 아름답도다, 문무왕(文武王; 법민왕法敏王의 시호)이여! 먼저 조상을 받들어 끊어졌던 제사를 다시 지냈으니 효성스럽고 또 효성스럽도다.
신라 말년에 충지잡간(忠至잡干)이란 자가 있었는데 높은 금관성(金官城)을 쳐서 빼앗아 성주장군(城主將軍)이 되었다. 이에 영규아간(英規阿干)이 장군의 위엄을 빌어 묘향(廟享)을 빼앗아 함부로 제사를 지내더니, 단오(端午)를 맞아 고사(告祠)하는데 공연히 대들보가 부러져 깔려죽었다. 이에 장군(將軍)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다행히 전세(前世)의 인연으로 해서 외람되이 성왕(聖王)이 계시던 국성(國城)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니 마땅히 나는 그 영정(影幀)을 그려 모시고 향(香)과 등(燈)을 바쳐 신하된 은혜를 갚아야겠다."하고, 삼척(三尺) 교견(鮫絹)에 진영(眞影)을 그려 벽 위에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촛불을 켜 놓고 공손히 받들더니, 겨우 3일 만에 진영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서 땅 위에 괴어 거의 한 말이나 되었다. 장군은 몹시 두려워하여 그 진영을 모시고 사당으로 나가서 불태워 없애고 곧 수로왕의 친자손 규림(圭林)을 불러서 말했다. "어제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어찌해서 이런 일들이 거듭 생기는 것일까? 이는 필시 사당의 위령(威靈)이 내가 진영을 그려서 모시는 것을 불손(不遜)하게 여겨 크게 노하신 것인가보다. 영규(英規)가 이미 죽었으므로 나는 몹시 두려워하여, 화상도 이미 불살라 버렸으니 반드시 신(神)의 베임을 받을 것이다. 그대는 왕의 진손(眞孫)이니 전에 하던 대로 제사를 받드는 것이 옳겠다." 규림이 대를 이어 제사를 지내 오다가 나이 88세에 죽으니 그 아들 간원경(間元卿)이 계속해서 제사를 지내는데 단오날 알묘제(謁廟祭) 때 영규의 아들 준필(俊必)이 또 발광(發狂)하여, 사당으로 와서 간원(間元)이 차려 놓은 제물을 치우고 자기가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는데 삼헌(三獻)이 끝나지 못해서 갑자기 병이 생겨서 집에 돌아가서 죽었다. 옛 사람의 말에 이런 것이 있다. "음사(淫祀)는 복(福)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 먼저는 영규가 있고 이번에는 준필이 있으니 이들 부자(父子)를 두고 한 말인가.
또 도둑의 무리들이 사당 안에 금과 옥이 많이 있다고 해서 와서 그것을 도둑질해 가려고 했다. 그들이 처음에 왔을 때는,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활에 살을 당긴 한 용사가 사당 안에서 나오더니 사면을 향해서 비오듯이 화살을 쏘아서 7,8명이 맞아 죽으니, 나머지 도둑의 무리들은 달아나 버렸다. 며칠 후에 다시 오자 길이 30여 척이나 되는 눈빛이 번개와 같은 큰 구렁이가 사당 옆에서 나와 8,9명을 물어 죽이니 겨우 살아 남은 자들도 모두 자빠지면서 도망해 흩어졌다. 그리하여 능원(陵園) 안에는 반드시 신물(神物)이 있어 보호한다는 것을 알았다.
건안(建安) 4년 기묘(己卯; 199)에 처음 이 사당을 세운 때부터 지금 임금께서 즉위하신 지 31년 만인 대강(大康) 2년 병진(丙辰; 1076)까지 도합 878년이 되었으나 층계를 쌓아 올린 아름다운 흙이 허물어지거나 무너지지 않았고, 심어 놓은 아름다운 나무도 시들거나 죽지 않았으며, 더구나 거기에 벌여 놓은 수많은 옥조각들도 부서진 것이 없다. 이것으로 본다면 신체부(辛替否)가 말한 "옛날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찌 망하지 않은 나라와 파괴되지 않은 무덤이 있겠느냐."고 한 말은, 오직 가락국(駕洛國)이 옛날에 일찍이 망한 것은 그 말이 맞았지만 수로왕(首露王)의 사당이 허물어지지 않은 것은 신체부(辛替否)의 말을 믿을 수 없다 하겠다.
이 중에 또 수로왕을 사모해서 하는 놀이가 있다. 매년 7월 29일엔 이 지방 사람들과 서리(胥吏)·군졸(軍卒)들이 승점(乘岾)에 올라가서 장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즐겁게 논다. 이들이 동서쪽으로 서로 눈짓을 하면 건장한 인부들은 좌우로 나뉘어서 망산도(望山島)에서 말발굽을 급히 육지를 향해 달리고 뱃머리를 둥둥 띄워 물 위로 서로 밀면서 북쪽 고포(古浦)를 향해서 다투어 달리니, 이것은 대개 옛날에 유천간(留天干)과 신귀간(神鬼干) 등이 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급히 수로왕에게 아뢰던 옛 자취이다.
가락국이 망한 뒤로는 대대로 그 칭호가 한결같지 않았다. 신라 제31대 정명왕(政明王;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한 개요(開耀) 원년 신사(辛巳; 681)에는 금관경(金官京)이라 이름하고 태수(太守)를 두었다. 그 후 259년에 우리 고려 태조(太祖)가 통합(統合)한 뒤로는 여러 대를 내려오면서 임해현(臨海縣)이라 하고 배안사(排岸使)를 두어 48년을 계속했으며, 다음에는 임해군(臨海郡) 혹은 김해부(金海府)라고 하고 도호부(都護府)를 두어 27년을 계속했으며, 또 방어사(防禦使)를 두어 64년 동안 계속했다.
순화(淳化) 2년(991)에 김해부(金海府)의 양전사(量田使) 중대부(中大夫) 조문선(趙文善)은 조사해서 보고했다. "수로왕의 능묘(陵廟)에 소속된 밭의 면적이 많으니 마땅히 15결(結)을 가지고 전대로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그 나머지는 부(府)의 역정(役丁)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일을 맡은 관청에서 그 장계(狀啓)를 가지고 가서 보고하자, 그때 조정에서는 명령을 내렸다. "하늘에서 내려온 알이 화해서 성군(聖君)이 되었고 이내 왕위(王位)에 올라 나이 158세나 되셨으니 자 삼황(三皇) 이후로 이에 견줄 만한 분이 드물다. 수로왕께서 붕(崩)한 뒤 선대(先代)부터 능묘(陵廟)에 소속된 전답을 지금에 와서 줄인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하고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양전사(量田使)가 또 거듭 아뢰자 조정에서도 이를 옳게 여겨 그 반은 능묘에서 옮기지 않고, 반은 그곳의 역정(役丁)에게 나누어 주게 했다. 절사(節使; 양전사量田使)는 조정의 명을 받아 이에 그 반은 능원(陵園)에 소속시키고 반은 부(府)의 부역하는 호정(戶丁)에게 주었다. 이 일이 거의 끝날 무렵에 양전사(量田使)가 몹시 피곤하더니 어느날 밤에 꿈을 꾸니 7,8명의 귀신이 보이는데 밧줄을 가지고 칼을 쥐고 와서 말한다. "너에게 큰 죄가 있어 목베어 죽여야겠다. 양전사는 형(刑)을 받고 몹시 아파하다가 놀라서 깨어 이내 병이 들었는데 남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밤에 도망해 가다가 그 병이 낫지 않아서 관문(關門)을 지나자 죽었다. 이 때문에 양전도장(量田都帳)에는 그의 도장이 찍히지 않았다. 그 뒤에 사신이 와서 그 밭을 검사해 보니 겨우 11결(結) 12부(負) 9속(束)뿐이며 3결(結) 87부(負) 1속(束)이 모자랐다. 이에 모자라는 밭을 어찌했는가를 조사해서 내외궁(內外宮)에 보고하여, 임금의 명령으로 그 부족한 것을 채워 주게 했는데 이 때문에 고금(古今)의 일을 탄식하는 사람이 있었다.
수로왕(首露王)의 8대손 김질왕(金질王)은 정치에 부지런하고 또 참된 일을 매우 숭상하여 시조모(始祖母) 허황후(許皇后)를 위해서 그의 명복(冥福)을 빌고자 했다. 이에 원가(元嘉) 29년 임진(壬辰; 452)에 수로왕과 허황후가 혼인하던 곳에 절을 세워 절 이름을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절 근처에 있는 평전(平田) 10결(結)을 측량해서 삼보(三寶)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쓰게 했다.
이 절이 생긴 지 500년 후에 장유사(長遊寺)를 세웠는데, 이 절에 바친 밭이 도합 300결(結)이나 되었다. 이에 장유사의 삼강(三綱)이, 왕후사(王后寺)가 장유사의 밭 동남쪽 지역 안에 있다고 해서 왕후사를 폐해서 장사(莊舍)를 만들어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 겨울에 저장하는 장소와 말을 기르고 소를 치는 마구간으로 만들었으니 슬픈 일이다.
세조(世祖) 이하 9대손의 역수(曆數)를 아래에 자세히 기록하니 그 명(銘)은 이러하다.
처음에 천지가 열리니, 이안(利眼)이 비로소 밝았네.
비록 인륜(人倫)은 생겼지만, 임금의 지위는 아직 이루지 않았네.
중국은 여러 대를 거듭했지만, 동국(東國)은 서울이 갈렸네.
계림(鷄林)이 먼저 정해지고, 가락국(駕洛國)이 뒤에 경영(經營)되었네.
스스로 맡아 다스릴 사람 없으면, 누가 백성을 보살피랴.
드디어 상제(上帝)께서, 저 창생(蒼生)을 돌봐 주었네.
여기 부명(符命)을 주어, 특별히 정령(精靈)을 보내셨네.
산 속에 알을 내려보내고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추었네.
속은 오히려 아득하고, 겉도 역시 컴컴했네.
바라보면 형상이 없는 듯 하나 들으니 여기 소리가 나네.
무리들은 노래 불러 아뢰고, 춤을 추어 바치네.
7일이 지난 후에, 한때 안정되었네.
바람이 불어 구름이 걷히니, 푸른 하늘이 텅 비었네.
여섯 개 둥근 알이 내려오니, 한 오리 자줏빛 끈이 드리웠네.
낯선 이상한 땅에, 집과 집이 연이었네.
구경하는 사람 줄지었고, 바라보는 사람 우글거리네.
다섯은 각 고을로 돌아가고, 하나는 이 성에 있었네.
같은 때 같은 자취는, 아우와 같고 형과 같았네.
실로 하늘이 덕을 낳아서, 세상을 위해 질서를 만들었네.
왕위(王位)에 처음 오르니, 온 세상은 맑아지려 했네.
궁전 구조는 옛법을 따랐고, 토계(土階)는 오히려 평평했네.
만기(萬機)를 비로소 힘쓰고, 모든 정치를 시행했네.
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으니, 오직 하나이고 오직 정밀했네.
길 가는 자는 길을 양보하고, 농사짓는 자는 밭을 양보했네.
사방은 모두 안정해지고, 만백성은 태평을 맞이했네.
갑자기 풀잎의 이슬처럼, 대춘(大椿)의 나이를 보전하지 못했네.
천지의 기운이 변하고 조야(朝野)가 모두 슬퍼했네.
금과 같은 그의 발자취요, 옥과 같이 떨친 그 이름일세.
후손이 끊어지지 않으니, 사당의 제사가 오직 향기로웠네.
세월을 비록 흘러갔지만, 규범(規範)은 기울어지지 않았네.
거등왕(居登王) 아버지는 수로왕(首露王), 어머니는 허황후(許皇后). 건안(建安) 4년 기묘(己卯; 199) 3월 13일에 즉위(卽位), 치세(治世)는 39년으로 가평(嘉平) 5년 계유(癸酉; 253) 9월 17일에 죽음. 왕비(王妃)는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이며 태자(太子) 마품(麻品)을 낳음. <개황력(開皇曆)>에는 "성(姓)은 김씨(金氏)이니 대개 시조(始祖)가 금란(金卵)에서 난 까닭으로 김으로 성을 삼았다."고 했음.
마품왕(麻品王) 마품(馬品)이라고도 하며, 김씨(金氏). 가평(嘉平) 5년 계유(癸酉; 253)에 즉위. 치세(治世)는 39년으로, 영평(永平) 원년 신해(辛亥; 291) 1월 29일에 죽음. 왕비(王妃)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孫女) 호구(好仇)로 태자(太子) 거질미(居叱彌)를 낳음.
거질미왕(居叱彌王) 금물(今勿)이라고도 하며 김씨(金氏). 영평(永平) 원년에 즉위. 치세 56년, 영화(永和) 2년 병오(丙午; 346) 7월 7일에 죽음. 왕비는 아궁아간(阿躬阿干)의 손녀 아지(阿志)로, 왕자(王子) 이시품(伊尸品)을 낳음.
이시품왕(伊尸品王) 김씨(金氏). 영화(永和) 2년에 즉위. 치세는 62년, 의희(義熙) 3년 정미(丁未; 407) 4월 10일에 죽음. 왕비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으로, 왕자 좌지(坐知)를 낳음.
좌지왕(坐知王) 김질(金叱)이라고도 함. 의희(義熙) 3년(407)에 즉위. 용녀(傭女)에게 장가들어 그 여자의 무리를 관리로 등용하니 국내가 시끄러웠다. 계림(鷄林)이 꾀를 써서 치려 하므로, 박원도(朴元道)라는 신하가 간했다. "유초(遺草)를 보고 또 보아도 역시 털이 나는 법인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하늘이 망하고 땅이 꺼지면 사람이 어느 곳에서 보전하오리까. 또 점쟁이가 점을 쳐서 해괘(解卦)를 얻었는데 그 괘사(卦辭)에 '소인(小人)을 없애면 군자(君子)가 와서 도울 것이다'했으니 왕께선 역(易)의 괘를 살피시옵소서." 이에 왕은 사과하여 옳다고 하고 용녀를 내쳐서 하산도(荷山島)로 귀양보내고, 정치를 고쳐 행하여 길이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렸다. 치세는 15년으로, 영초(永初) 2년 신유(辛酉; 421) 4월 12일에 죽음. 왕비는 도령대아간(道寧大阿干)의 딸 복수(福壽)로, 아들 취희(吹希)를 낳음.
취희왕(吹希王) 질가(叱嘉)라고도 함. 김씨(金氏). 영초(永初) 2년에 즉위. 치세는 31년 동안, 원가(元嘉) 28년 신묘(辛卯; 451) 2월 3일에 죽음. 왕비는 진사각간(進思角干)의 딸 인덕(仁德). 왕자(王子) 질지(질知)를 낳음.
질지왕(질知王) 김질왕(金질王)이라고도 함. 원가(元嘉) 28년에 즉위. 이듬해에 시조(始祖)와 허황옥 왕후(許黃玉王后)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하여 처음 시조(始祖)와 만났던 자리에 절을 지어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밭 10결(結)을 바쳐 비용에 쓰게 함. 치세는 42년. 영명(永明) 10년 임신(壬申; 492) 10월 4일에 죽음. 왕비는 김상사간(金相沙干)의 딸 방원(邦媛). 왕자 겸지(鉗知)를 낳음.
겸지왕(鉗知王)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함. 영명(永明) 10년에 즉위. 치세 30년, 정광(正光) 2년 신축(辛丑; 521) 4월 7일에 죽음. 왕비는 출충각간(出忠角干)의 딸 숙(淑). 왕자 구형(仇衡)을 낳음.
구형왕(仇衡王) 김씨(金氏). 정광(正光) 2년에 즉위. 치세는 42년. 보정(保定) 2년 임오(壬午; 562) 9월에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니 왕은 친히 군사를 지휘했다. 그러나 적병의 수는 많고 이쪽은 적어서 대전(對戰)할 수가 없었다. 이에 동기(同氣) 탈지이질금(脫知이叱今)을 보내서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장손(長孫) 졸지공(卒支公) 등은 항복하여 신라에 들어갔다.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이叱)의 딸 계화(桂花)로, 세 아들을 낳으니, 첫째는 세종각간(世宗角干), 둘째는 무도각간(茂刀角干), 셋째는 무득각간(茂得角干)이다. <개황록(開皇錄)>에 보면, "양(梁)나라 무제(武帝)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壬子; 532)에 신라에 항복했다."고 했다.
논평해 말한다. <삼국사(三國史)>를 상고하건대 구형왕(仇衡王)은 양(梁)의 무제(武帝)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壬子)에 땅을 바쳐 신라에 항복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수로왕(首露王)이 처음 즉위한 동한(東漢)의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42)으로부터 구형왕 말년 임자(壬子; 532)까지를 계산하면 490년이 된다. 만일 이 기록으로 상고한다면 땅을 바친 것은 원위(元魏) 보정(保定) 2년 임오(壬午; 562)에 해당된다. 그러면 30년을 더하게 되어 도합 520년이 되는 셈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설(說)을 모두 기록해 둔다.
순도조려(順道肇麗: 도공道公의 다음에 또한 법심法深, 의연義淵, 담엄曇嚴의 무리들이 서로 계승해서 불교佛敎를 일으켰으나 고전古傳에는 기록記錄이 없으므로 감히 그 사실을 순서에 넣어 편찬하지 못한다. 자세한 것은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있다.)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에 이렇게 말했다. "소수림왕(小獸林王)이 즉위한 2년 임신(壬申; 372)은 곧 동진(東晉) 함안(咸安) 2년이며, 효무제(孝武帝)가 즉위한 해이다.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사신과 중 순도(順道)를 시켜서 불상(佛像)과 경문(經文)을 보내고(이때 부견符堅은 관중關中, 즉 장안長安에 도읍하고 있었다), 또 4년 갑술(甲戌; 374)에는 아도(阿道)가 동진(東晉)에서 왔다. 이듬해 을해(乙亥; 375) 2월에 초문사(肖門寺)를 세워 순도(順道)를 거기에 두고 또 이불난사(伊弗蘭寺)를 세워 아도가 있게 하니, 이것이 고구려에서 불법이 일어난 시초이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순도와 아도가 북위(北魏)에서 왔다는 것은 잘못으로, 사실은 전진(前秦)에서 온 것이다. 또 초문사(肖門寺)는 지금의 흥국사(興國寺)이고 이불란사는 지금의 흥복사(興福寺)라고 한 것도 역시 잘못이다.
상고하건대 고구려의 도읍은 안시성(安市城)이며, 이것을 혹은 안정홀(安丁忽)이라고도 하는데 요수(遼水) 북쪽에 있다. 요수의 다른 이름은 압록(鴨綠)인데 지금은 안민강(安民江)이라고 한다. 그러니 어찌 송경(松京) 흥국사(興國寺)의 이름이 여기에 있을 수 있으랴?
찬(讚)해 말한다.
압록강에 봄 깊어 물빛은 곱고,
백사장 갈매기 한가로이 조네.
갑자기 어디서 들리는 노 젓는 소리에 놀라니,
어느 곳 어선(漁船)인지 길손이 벌써 당도했네.
난타벽제(難타闢濟)
<백제본기(百濟本記)>에 이렇게 말했다. "제15대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14대라 한 것은 잘못이다.) 침류왕(枕流王)이 즉위한 갑신(甲申; 384. 동진東晉 효무제孝武帝의 태원太元 9년)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晉)에서 오자 그를 맞아서 궁중에 두고 예(禮)로 공경했다." 이듬해 을유(乙酉; 385)에 새 도읍인 한산주(漢山州)에 절을 세우고 도승(度僧) 열 사람을 두었으니 이것이 백제(百濟) 불법(佛法)의 시초이다.
또 아신왕(阿莘王)이 즉위한 대원(大元) 17년(392) 2월에 영을 내려 불법(佛法)을 숭상하고 믿어서 복(福)을 구하라고 했다. 마라난타(摩羅難陀)는 번역해서 동학(童學; 그의 이적異迹은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이라고 한다.
찬(讚)해 말한다.
하늘의 조화는 옛날부터 아득한 것,
대체 잔재주로 솜씨부리기는 어려우리.
어른들은 스스로 노래와 춤을 가지고,
옆의 사람 끌어당겨 눈으로 보게 하네.
아도기라(阿道基羅; 혹은 아도我道, 또는 아두阿頭라고 한다)
<신라본기(新羅本紀)> 제4권에 이렇게 말했다. "제19대 눌지왕(訥祗王) 때 중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一善郡)에 오자 그 고을 사람 모례(毛禮; 혹은 모녹毛綠이라고도 씀)가 집 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어 편안히 있게 했다." 이때 양(梁)나라에서 사신을 통해 의복과 향(香; 고득상高得相의 영사시詠史詩에는, 양梁나라에서 사자使者인 중 원표元表 편에 명단溟檀과 불상佛像을 보내 왔다고 했다)을 보내 왔는데 군신(君臣)들은 그 향의 이름과 쓰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이에 사람을 시켜 향을 가지고 두루 나라 안을 돌아다니면서 묻게 했다. 묵호자(墨胡子)가 이를 보고 말했다. "이는 향이라는 것으로, 태우면 향기가 몹시 풍기는데, 이는 정성이 신성(神聖)한 곳에까지 이르는 때문입니다. 신성(神聖)이란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만일 이것을 태우고 축원(祝願)하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입니다."(눌지왕訥祗王은 진晉·송宋때 사람이다. 그런데 양梁에서 사신을 보냈다고 한 것은 잘못된 듯 싶다) 이때 왕녀(王女)의 병이 위중하여 묵호자를 불러 향을 피우고 축원하게 했더니 왕녀의 병이 나았다. 왕은 기뻐하여 예물을 후히 주었는데 갑자기 그의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또 21대 비처왕(毗處王) 때에 이르러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시자(侍者) 세 사람을 데리고 역시 모례(毛禮)의 집에 왔는데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다. 그는 여기에서 몇 해를 살다가 아무 병도 없이 죽었고, 그 시자 세 사람은 머물러 살면서 경(經)과 율(律)을 강독(講讀)하니 간혹 신봉(信奉)하는 사람이 생겼다(주注에 말하기를 "본비本碑와 모든 전기傳記와는 사실이 다르다"고 했다. 또 <고승전高僧傳>에는 서천축西天竺 사람이라고 했고, 혹은 오吳나라에서 왔다고 했다).
아도본비(我道本碑)를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다. 어머니는 고도령(高道寧)이니, 정시(正始) 연간(240~248)에 조위(曹魏) 사람 아(我; 아我는 성姓임)굴마(굴摩)가 사신으로 고구려에 왔다가 고도령과 간통하고 돌아갔는데 이로부터 태기가 있었다. 아도가 다섯 살이 되자 어머니는 그를 출가(出家)시켰는데, 나이 16세에 위(魏)나라에 가서 굴마를 뵙고 현창화상(玄彰和尙)이 강독하는 자리에 나가서 불법을 배웠다. 19세가 되자 또 돌아와 어머니께 뵙자 어머니가 말했다. "이 고구려는 지금까지도 불법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앞으로 3,000여 달이 되면 계림(鷄林)에서 성왕(聖王)이 나서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 그 나라 서울 안에 일곱 곳의 절터가 있으니, 하나는 금교(金橋) 동쪽의 천경림(天鏡林; 지금의 흥윤사興輪寺이다. 금교金橋는 서천교西天橋로서 우리 속명에는 솔다리[松橋]이다. 절은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처음 그 터를 잡았는데 중간에 폐지되었다가 법흥왕法興王 정미丁未(527)에 이르러 공사를 시작하며 을묘乙卯년에 크게 공사를 일으키고 진흥왕眞興王 때에 이루어졌다)이요, 둘은 삼천(三川)의 갈래(지금의 영흥사永興寺로, 흥륜사興輪寺와 한때에 세워졌다)요, 셋은 용궁(龍宮)의 남쪽(지금의 황룡사皇龍寺다. 진흥왕眞興王 계유癸酉에 공사가 시작되었다)이요, 넷은 용궁(龍宮)의 북쪽(지금의 분황사芬皇寺다. 선덕왕善德王 갑오甲午년에 공사가 시작되었다)이요, 다섯은 사천(沙川)의 끝(지금의 영묘사靈妙寺다. 선덕왕善德王 을미년乙未年에 공사가 시작되었다)이요, 여섯은 신유림(神遊林; 지금의 천왕사天王寺. 문무왕文武王 기묘년己卯年에 공사가 시작됐다)이요, 일곱은 서청전(서請田;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이것은 모두 전불(前佛) 때의 절터이니 불법이 앞으로 길이 전해질 곳이다. 너는 그곳으로 가서 대교(大敎)를 전파하면 응당 네가 이 땅의 불교의 개조(開祖)가 될 것이다." 아도(我道)는 이 가르침을 듣고 계림(鷄林)으로 가서 왕성(王城) 서쪽 마을에 살았는데 곧 지금의 엄장사(嚴莊寺)이다, 때는 미추왕(未鄒王) 즉위 2년 계미(癸未; 263)였다. 그가 대궐로 들어가 불법(佛法) 행하기를 청하니 당시 세상에서는 보지 못하던 것이어서 이를 꺼리고, 심지어는 죽이려는 자까지 있었다. 이에 속림(續林; 지금의 일선현一善縣) 모록(毛祿)의 집(록綠은 예禮와 글자 모양이 비슷한 데서 생긴 잘못. <고기古記>에 보면, 법사法師가 처음 모록毛祿의 집에 오니 그때 천지가 진동했다. 당시 사람들은 중이라는 명칭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아두삼마阿頭삼마라고 불렀다. 삼마삼마는 우리말로 중이니 사미沙彌란 말과 같다)으로 도망해 가서 숨었다. 미추왕(未鄒王) 3년에 성국공주(成國公主)가 병이 났는데 무당과 의원의 효험도 없으므로 칙사(勅使)를 내어 사방으로 의원을 구했다. 법사(法師)가 갑자기 대궐로 들어가 드디어 그 병을 고치니 왕은 크게 기뻐하여 그의 소원을 묻자 법사(法師)는 대답했다. "빈도(貧道)에게는 아무 구하는 일이 없고, 다만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세워서 크게 불교를 일으켜서 국가의 복을 빌기를 바랄 뿐입니다." 왕은 이를 허락하여 공사를 일으키도록 명령했다. 그때의 풍속은 질박하고 검소하여 법사는 따로 지붕을 덮고 여기에 살면서 강연(講演)하니, 이때 혹 천화(天花)가 땅에 떨어지므로 그 절을 흥륜사(興輪寺)라고 했다. 모록(毛祿)의 누이동생의 이름은 사씨(史氏)인데 법사에게 와서 중이 되어 역시 삼천(三川) 갈래에 절을 세우고 살았으니 절 이름을 영흥사(永興寺)라고 했다. 얼마 안 되어 미추왕(未鄒王)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이 해치려 하므로 법사는 모록의 집으로 돌아가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그 속에서 문을 닫고 자절(自絶)하여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불교도 또한 폐해졌다. 23대 법흥대왕(法興大王)이 소량(蕭梁) 천감(天監) 13년 갑오(甲午; 514)에 왕위에 올라 불교를 일으키니 미추왕 계미(癸未; 263)에서 252년이나 된다. 고도령이 말한 3,000여 달이 맞았다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본기(本記)>와 본비(本碑)의 두 가지 설(設)이 서로 어긋나서 같지 않은 것이 이와 같다. 내가 시험삼아 의론하자면 이러하다. 양(梁)과 당(唐)의 두 승전(僧傳)과 <삼국본사(三國本史)>에는 모두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의 불교의 시작이 진(晉)나라 말년인 태원(太元) 연간이라 했으니, 순도(順道)·아도(我道) 두 법사가 소수림왕(小獸林王) 갑술(甲戌; 374)에 고구려에 온 것은 분명하여 이 전기(傳記)는 잘못되지 않았다. 만일 비처왕(毗處王) 때에 처음 신라에 왔다면, 그것은 아도가 고구려에 100여 년이나 머물러 있다가 온 것이 되니 아무리 대성(大聖)의 행동이나 동작이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는 하지만 꼭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리고 또 신라에서 불교를 시작한 것이 이처럼 늦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만일 미추왕 때에 있었다고 하면 이것은 고구려에 온 갑술(甲戌; 374)년보다 100여 년이나 앞서는데 이때는 계림(鷄林)에 아직 문물이나 예교(禮敎)가 있지 않았고, 나라 이름조차도 아직 정하지 않았을 때이니 어느 겨를에 아도가 와서 불법 믿기를 청했겠는가. 또 고구려에도 들르지 않고 건너뛰어 신라로 왔다는 말은 맞지 않는 말이다. 가령 잠시 일어났다가 폐해졌다고 하더라도 어찌 그 중간에 적막하게 아무 소문도 없었으며, 향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겠는가? 연대의 하나는 어찌 그리 뒤졌으며, 하나는 어찌 그리 앞섰단 말인가
생각건대 불교가 동방으로 점점 번지던 형세는 필경 고구려와 백제에서 시작하여 신라에서 그쳤을 것이다. 곧 눌지왕(訥祗王)과 소수림왕(小獸林王)의 시대가 서로 가까우니 아도가 고구려를 떠나 신라로 온 것은 마땅히 눌지왕 시대였을 것이다. 또 왕녀의 병을 고친 것도 모두 아도가 한 일이라고 전하니 소위 묵호(墨胡)란 것도 참 이름이 아니요 그저 그를 지목해서 부른 말일 것이다. 이것은 양(梁)나라 사람이 달마(達磨)를 가리켜 벽안호(碧眼胡)라 하고, 진(晉)나라에서 중 도안(道安)을 조롱하여 칠도인(漆道人)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니, 아도는 높은 행동으로 세상을 피하면서 자기 성명(姓名)을 말하지 않은 때문이다. 대개 나라 사람들은 들은 바에 따라서 묵호니 아도니 하는 두 가지 이름으로 두 사람을 만들어서 전했을 것이다. 더구나 아도는 겉모습이 묵호와 같다고 하니 이 말로도 한 사람임을 알 수가 있다. 도령(道寧)이 일곱 곳을 차례로 들어 말한 것은 바로 절을 처음 세운 선후를 가지고 예언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전기(傳記)는 잃었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는 사천(沙川)의 끝을 다섯 번째에 실은 것이다. 또 3,000여 달이란 것도 꼭 다 믿을 수는 없으나 대개 눌지왕(訥祗王)때부터 정미(丁未; 527)년 까지는 무려 100여 년이나 되니, 만일 1,000여 달이라면 거의 비슷하다. 성(姓)을 아(我)라 하고 외자 이름을 한 것은 거짓이 아닌가 의심스러우나 자세하지는 않다.
또 원위(元魏)의 중 담시(曇始; 혹은 혜시惠始)의 전기(傳記)를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담시(曇始)는 관중(關中)사람이다. 출가(出家)한 뒤에 이상한 일이 많았다. 동진(東晉)의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9년(384) 말에 경(經)과 율(律) 수십부(十部)를 가지고 요동(遼東)으로 가서 불교를 선전했다. 여기에서 삼승(三乘)을 가르쳐 즉시 불계(佛戒)에 귀의(歸依)했으니 이것이 대개 고구려에서 불교를 들은 시초였다. 의희(義熙) 초년(405)에 담시(曇始)는 다시 관중(關中)으로 돌아와 삼보(三輔)에 불교를 전파시켰다. 그는 발이 얼굴보다 희었고, 아무리 진흙물을 건너도 더러워지거나 젖는 일이 없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백족화상(白足和尙)이라고 불렀다 한다. 동진(東晉) 말년에 북방(北方)의 흉노(匈奴) 혁련발발(赫連勃勃)이 관중(關中)을 쳐서 빼앗고 죽인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이 때 담시(曇始)도 역시 해를 입었으나 칼이 그를 상하지 못하자 발발(勃勃)은 탄식하고, 중들을 널리 용서해서 석방하고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 이에 담시(曇始)는 비밀히 산택(山澤)으로 도망하여 두타(頭타)의 행실을 닦았다. 탁발도(拓拔燾)가 다시 장안(長安)을 쳐서 이기고 그 위세를 관중(關中)과 낙양(洛陽)에까지 떨쳤다. 이때 단릉(단陵)에 최호(崔皓)란 사람이 있어 좌도(左道)를 조금 익혀서 불교를 시기하고 미워했다. 지위가 위조(僞朝)의 재상에까지 올라서 탁발도의 신임을 받게 되자 그는 천사(天師) 구겸지(寇謙之)와 함께 탁발도를 달래어 "불교는 아무런 이익이 없고 백성들에게 해롭기만 합니다"하고 이에 불교를 폐하도록 권했다고 한다.
태평(太平) 말년에 담시는 비로소 탁발도를 감화시킬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이에 정월 초하룻날 갑자기 지팡이를 짚고 대궐 문에 이르자, 도(燾)는 이 말을 듣고 베어 죽이라고 명했다. 그러나 아무리 베어도 상하지 않으므로 도가 직접 베었지만 역시 상하지 않는다. 이에 북원(北園)에서 기르던 범에게 주었으나 범도 역시 감히 가까이하지 못한다. 도는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크게 나더니 드디어 역질(疫疾)에 걸리자 최호(崔皓)와 구겸지(寇謙之) 두 사람도 서로 잇달아 나쁜 병에 걸렸다. 도는 이 허물이 그들 때문에 생긴 것이라 해서, 이에 두 집 가족을 죽여 없애고 나라 안에 선언해서 불교를 크게 퍼뜨리게 했다. 담시는 그 후 죽은 곳을 알 수가 없다.
논평하여 말한다. 담시는 태원(太元) 말년에 해동(海東)에 왔다가 의희(義熙) 초년에 관중(關中)으로 돌아갔다고 하니 여기에 10여 년 동안이나 머물러 있었는데 어찌 동국역사(東國歷史)에는 이런 기록이 없단 말인가. 담시는 실로 괴이하고 이상한 일이 많아 헤아릴 수가 없는 사람이며, 아도·묵호·난타와 연대나 사적이 모두 같으니 필경 이들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그의 변명(變名)인 듯 싶다.
찬(讚)해 말한다.
금교(金橋)에 눈이 쌓여 얼고 풀리지 않으니,
계림(鷄林)의 봄빛 아직도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네,
예쁘다. 봄의 신(神)은 재주도 많아서,
먼저 모랑(毛郞)의 집 매화(梅花)나무에 꽃이 피게 했네.
원종흥법(原宗興法; 눌지왕訥祗王 때로부터 100여 년이 된다)과 염촉멸신(염촉滅身)
<신라본기(新羅本紀)>에 보면 법흥대왕(法興大王)이 즉위한 14년(527)에 신하 이차돈(異次頓)이 불법(佛法)을 위해서 자기 몸을 죽이니 곧 소량(蕭梁) 보통(普通) 8년 정미(丁未; 527)에 서천축(西天竺)의 달마대사(達磨大師)가 금릉(金陵)에 온 해다. 이 해에 낭지법사(朗智法師)도 또한 영취산(靈鷲山)에 살면서 법장(法場)을 열었으니 불교의 흥하고 쇠하는 것도 반드시 원근(遠近)에서 한 시기에 서로 감응한다는 것을 이 일로 해서 알 수가 있다.
원화(元和) 연간에 남간사(南澗寺)의 중 일념(一念)이 촉향분례불결사문(촉香墳禮佛結社文)을 지었는데, 이 사실이 자세히 실려 있으니 그 대략은 이러하다. 예전에 법흥대왕이 자극전(紫極殿)에서 왕위에 올랐을 때에 동쪽 지역을 살펴보고 말했다. "예전에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꿈에 감응되어 불법이 동쪽으로 흘러들어왔다. 내가 왕위에 오른 뒤로 백성들을 위해 복을 닦고 죄를 없앨 곳을 마련하려 한다." 이에 조신들(향전鄕傳에서는 공목알공工目謁恭 등이라 했다.)은 왕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오직 나라를 다스리는 대의(大義)만을 지켜 절을 세우겠다는 신령스러운 생각에 따르지 않자 대왕은 탄식했다. "아아! 나는 덕이 없는 사람으로 왕업(王業)을 이어받아 위로는 음양(陰陽)의 조화(造化)가 모자라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즐겨하는 일이 없어서 정사를 닦는 여가에 불교에 마음을 두었으니 그 누가 나의 일을 함께 할 것인가." 이때 소신(小臣)이 있었는데 성(姓)은 박(朴)이요, 자(子)는 염촉(염촉; 혹은 이차異次라 하고 또는 이처伊處라고도 하니 방음方音이 다르기 때문이며, 한어漢語로 번역하여 염염이라 한다. 촉촉·돈頓·도道·도覩·독獨 등은 모두 글쓰는 사람의 편의에 따른 것으로, 곧 조사助辭이다. 이제 위 글자는 번역하고 아래 글자는 번역하지 않았기 때문에 염촉염촉이라 하고, 또는 염도염覩 등으로 쓴 것이다)인데, 그의 아버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조부(祖父)는 아진(阿珍) 종(宗)으로 습보(習寶) 갈문왕(葛文王)의 아들이다(신라의 관작官爵은 도합 17등급等級인데 그 넷째를 파진손波珍飡, 또는 아진손阿珍飡이라고도 한다. 종宗은 그 이름이며, 습보習寶도 역시 이름이다. 신라 사람은 추봉追封한 왕을 모두 갈문왕葛文王이라고 했으니 그 까닭은 사신史臣도 역시 자세히 모른다고 했다. 또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비阿道碑를 상고해 보면, 사인舍人은 그때 나이 26세였고, 아버지는 길승吉升, 조부는 공한功漢, 증조曾祖는 걸해대왕乞解大王이라 했다).
그는 죽백(竹栢)과 같은 바탕에 수경(水鏡)과 같은 뜻을 품었으며, 적선(積善)한 집의 증손(曾孫)으로서 궁내(宮內)의 조아(爪牙)가 되기를 바랐고, 성조(聖朝)의 충신으로서 하청(河淸)에 등시(登侍)할 것을 기대했다. 그때 나이 22세로서 사인(舍人; 신라 관작官爵에 대사大舍·소사小舍 등이 있으니 대개 하사下士의 등급이다)의 직책에 있었는데, 왕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그 심정(心情)을 눈치채고 아뢰었다. "신이 듣자오니 옛 사람은 천한 사람에게도 계교를 물었다 하오니 신은 큰 죄를 무릅쓰고 아룁니다"하니 사인은 말한다.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신하로서의 큰 절개이옵고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백성의 곧은 의리입니다. 거짓으로 말씀을 전했다고 해서 신의 목을 베시면 만민이 굴복하여 감히 왕의 말씀을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살을 베어 저울로 달아서 장차 새 한 마리를 살리려했고 피를 뿌려 목숨을 끊어서 일곱 마리 짐승을 스스로 불쌍히 여겼다. 나의 뜻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인데 어찌 죄없는 사람을 죽이겠느냐. 너는 비록 공덕을 남기려 하지만 죽음을 피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사인이 말한다. "일체(一切)를 버리기 어려운 것은 신명(神命)에 지나지 않으며, 소신이 저녁에 죽어서 불교가 아침에 행해진다면 불일(佛日)은 다시 성행하고 성주(聖主)께서는 길이 편안하실 것입니다." 왕은 말한다. "난새와 봉새의 새끼는 어려도 하늘을 뚫을 듯한 마음이 있고 홍곡(鴻鵠)의 새끼는 나면서부터 물결을 깨칠 기세를 품었다 하니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가위 대사(大士)의 행동이라 할 수 있겠다." 이에 대왕은 일부러 위의(威儀)를 정제하고 동서쪽에는 풍도(風刀)를, 남북쪽에는 상장(霜仗)을 벌여 놓고 여러 신하를 불러 물었다. "경(卿)들은 내가 절을 지으려 하는데 일부러 이를 지체시키지 않았느냐."(향전鄕傳에서는 염촉염촉이 거짓 왕명王命으로 신하들에게 절을 세우라는 뜻을 전하니 여러 신하들이 와서 간諫하자 왕王은 이것을 염촉염촉에게 책임지워 노하고 왕명王命을 거짓 전했다 하여 형刑에 처했다고 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벌벌 떨고 두려워하여 황망스레 맹세하고 손으로 동쪽과 서쪽을 가리키니 왕은 사인을 불러 꾸짖었다. 사인은 얼굴빛이 변하여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왕이 크게 노하여 이를 베어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니 유사(有司)는 그를 묶어 관아(官衙)로 데리고 갔다. 사인은 맹세를 했다. 옥리(獄吏)가 그의 목을 베자,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올랐으며(향전鄕傳에는 이렇게 말했다. 사인舍人이 맹세하기를, "대성법왕大聖法王께서 불교를 일으키려 하시므로 내가 신명身命을 돌아보지 않고 세상 인연을 버리니 하늘에서는 상서를 내려 두루 백성들에게 보여 주십시오"했다. 이에 그의 머리는 날아가 금강산金剛山 마루에 떨어졌다고 한다), 하늘은 사방이 어두워 저녁의 빛을 감추고 땅이 진동하고 비가 뚝뚝 떨어졌다. 임금은 슬퍼하여 눈물이 곤룡포(袞龍袍)를 적시고 재상들은 근심하여 진땀이 선면(蟬冕)에까지 흘렀다. 감천(甘泉)이 갑자기 말라서 물고기와 자라가 다투어 뛰고 곧은 나무가 저절로 부러져서 원숭이들이 떼지어 울었다. 춘궁(春宮)에서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놀던 동무들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돌아보고 월정(月庭)에서 소매를 마주하던 친구들은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이별을 애석해 하여 관(棺)을 쳐다보고 우는 소리는 마치 부모를 잃은 것과 같았다. 그들은 모두 말했다. "개자추(介子推)가 다리의 살을 벤 일도 염촉(염촉)의 고절(苦節)에 비할 수 없으며, 홍연(弘演)이 배를 가른 일도 어찌 그의 장열(壯烈)함에 비할 수 있으랴. 이것은 곧 대왕의 신력(信力)을 붙들어서 아도(阿道)의 본심을 성취시킨 것이니 참으로 성자(聖者)로다." 드디어 북산(北山) 서쪽 고개(곧 금강산金剛山이다. 전傳에는, 머리가 날아가서 떨어진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 장사지냈다고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에 장사지냈다. 나인(內人)들은 이를 슬퍼하여 좋은 땅을 가려서 절을 세우고 이름을 자추사(刺楸寺)라고 했다. 이로부터 집집마다 부처를 받들면 반드시 대대로 영화를 얻게 되고, 사람마다 불도(佛道)를 행하면 이내 불교의 이익을 얻게 되었다.
진흥대왕(眞興大王)이 즉위한 5년 갑자(甲子; 544)에 대흥륜사(大興輪寺)를 세웠다(<국사國史>와 향전鄕傳을 상고하면, 실은 법흥왕法興王 14년 정미丁未(527)에 처음으로 터를 닦고 22년 을묘乙卯(535)에 천경림天鏡林의 나무를 크게 베어 비로소 역사를 시작했는데 기둥과 들보에 쓸 재목은 모두 이 숲에서 넉넉히 베어 썼으며, 주춧돌과 석감石龕도 모두 갖추었다. 진흥왕眞興王 5년 갑자甲子에 이르러 절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갑자甲子라고 한 것이다. <승전僧傳>에 7년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대청(大淸) 초년(547)에 양(梁)나라 사신 심호(沈湖)가 사리(舍利)를 가져오고 천가(天嘉) 6년(565)에 진(陣)나라 사신 유사(劉思)가 중 명관(明觀)과 함께 불경(佛經)을 받들고 오니 절과 절이 별처럼 벌여 있고, 탑과 탑이 기러기처럼 줄을 지었다. 법당(法幢)을 세우고 범종(梵鐘)도 달아 용상(龍象)의 중들은 천하의 복전(福田)이 되고, 대승(大乘)·소승(小乘)의 불법은 서울의 자운(慈雲)이 되었다. 다른 지방의 보살(菩薩)이 세상에 출현하고(이것은 분황사芬皇寺의 진나陣那와 부석사浮石寺의 보개寶蓋, 그리고 낙산사落山寺의 오대五臺 등을 말한다) 서역(西域)의 이름난 중들이 이 땅에 오니 이 때문에 삼한(三韓)이 합하여 한 나라가 되고 사해(四海)를 통틀어 한 집이 되었다. 때문에 덕명(德名)은 천구(天구)의 나무에 쓰고 신적(神迹)은 성하(星河)의 물에 그림자를 비추니 어찌 세 성인(聖人)의 위덕(威德)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랴(여기서 세 성인이란 아도阿道·법흥法興·염촉염촉을 말한 것). 그 뒤에 국통(國統) 혜륭(惠隆)과 법주(法主) 효원(孝圓)·김상랑(金相郞), 대통(大統) 녹풍(鹿風), 대서성(大書省) 진노(眞怒), 파진손(波珍飡) 김의(金억) 등이 사인의 옛 무덤을 고치고 큰 비(碑)를 세웠다.
원화(元和) 12년 정유(丁酉; 817) 8월 5일은 바로 제 41대 헌덕대왕(憲德大王) 9년이니, 흥륜사(興輪寺)의 영수선사(永秀禪師; 이때 유가瑜伽의 여러 중을 모두 선사禪師라고 했다)는 이 무덤에 예불(禮佛)할 향도(香徒)들을 모아 매월 5일에는 영혼의 묘원(妙願)을 위해서 단(壇)을 쌓고 법회(法會)를 열었다.
또한 향전(鄕傳)에는 이렇게 말했다. "시골 노인들이 매양 그의 제삿날을 당하면 흥륜사(興輪寺)에 모임을 가졌다." 즉 이달 초닷새는 바로 사인(舍人)이 목숨을 버리고 불법(佛法)에 순응한 날이다. 아아! 이런 임금이 없었으면 이런 신하가 없었을 것이요, 이런 신하가 없었으면 이러한 공덕(功德)이 없었을 것이니, 마치 유비(劉備)란 물고기가 제갈량(諸葛亮)이란 물을 만난 것과 같으며, 구름과 용(龍)이 서로 감응해 모인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다.
법흥왕(法興王)은 이미 폐해진 불교를 일으켜 절을 세우고 절이 완공되자 면류관을 벗고 가사(袈裟)를 입었으며 궁중에 있는 친척들을 절의 노예로 쓰게 하여(절의 종은 지금까지도 왕손王孫이라고 한다. 그 뒤 태종왕太宗王 때에 재상 김양도金良圖가 불법佛法을 믿어 화보花寶· 연보蓮寶 두 딸을 바쳐 이 절의 종으로 하였으며, 또 역신逆臣 모척毛尺의 가족을 데려다가 절의 노예로 삼았으니 이 두 가족의 후손은 지금까지도 끊어지지 않았다) 그 절의 주지(住持)가 되어 몸소 넓게 교화를 폈다.
진흥왕은 그 아버지의 덕을 계승한 성군(聖君)으로 임금의 직책을 이어받아 임금의 자리에 처하여 위엄으로 백관(百官)을 통솔하고, 호령이 갖추어져서 이 절에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전왕(前王) 법흥왕의 성은 김씨(金氏)요, 출가한 뒤의 이름은 법운(法雲)이며 자(字)는 법공(法空)이다(<승전僧傳>과 여러 설設에 보면 왕비도 출가出家하여 이름을 법운法雲이라 했고, 진흥왕眞興王도 법운法雲이라 했으며, 진흥왕비眞興王妃도 법운法雲이라고 했다니 의심스럽고 혼동된 것이 퍽 많다).
<책부원귀(冊府元龜)>에 보면 법흥왕의 성은 모(募) 이름은 진(秦)이라 했다. 처음 공사를 시작했던 을묘(乙卯)년에 왕비도 역시 영흥사(永興寺)를 세우고 모록(毛祿)의 누이동생인 사씨(史氏)의 유풍(遺風)을 사모해서 법흥왕과 함께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이름을 묘법(妙法)이라 했으며 역시 영흥사에 살다가 여러 해 뒤에 죽었다. <국사(國史)>에는 건복(建福) 31년(614)에 영흥사의 소상(塑像)이 저절로 무너지더니 얼마 되지 않아 진흥왕비인 비구니(比丘尼)가 죽었다고 했다. 상고하건대 진흥왕은 법흥왕의 조카요, 왕비 사도부인(思刀夫人) 박씨(朴氏)는 모량리(牟梁里) 영실각간(英失角干)의 딸로서, 역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으나 영흥사를 세운 주인은 아니다. 그러면 필경 진자(眞字)를 마땅히 법자(法字)로 고친다면 이것은 법흥왕의 비(妃) 파조부인(巴조夫人)이 비구니가 되었다가 죽은 것을 가리킨 것이니, 이는 그가 절을 이룩하고 불상(佛像)을 세운 주인이기 때문이다.
법흥·진흥 두 왕이 왕위를 버리고 출가한 것을 사관(史官)이 쓰지 않은 것은 세상을 경영하는 교훈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또 대통(大通) 원년 정미(丁未)에는 양(梁)의 무제(武帝)를 위하여 웅천주(熊天州)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대통사(大通寺)라고 했다(웅천熊天은 곧 공주公州이니, 그 때는 신라에 소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미년丁未年의 일은 아닐 것으로, 중대통中大通 원년元年 기유己酉(529)에 세운 것이다. 흥륜사興輪寺를 처음 세우던 정미년丁未年에는 다른 군郡에 절을 세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성인(聖人)의 지혜는 원래 만세(萬世)를 꾀하나니,
구구한 여론(輿論)은 조금도 따질 것 없네.
법륜(法輪)이 풀려 금륜(金輪)을 쫓아 구르니,
요순 세월 바야흐로 불교로 해서 이루어지네.
이것은 원종(原宗)을 위한 것이다.
의(義)에 쫓아 생명 가볍게 하니 놀라운 일인데,
천화(天花)의 흰 젖의 이적(異蹟) 다시 다정해라.
이윽고 한 칼에 몸은 비록 죽었지만,
절마다 울리는 종소리는 서울을 뒤흔드네.
이것은 염촉(염촉)을 위한 것이다.
법왕금살(法王禁殺)
백제 제 29대 법왕(法王)의 이름은 선(宣)인데 효순(孝順)이라고도 한다. 개황(開皇) 10년 기미(己未; 599)에 즉위하였다. 이해 겨울에 조서를 내려 살생(殺生)을 금지시키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나 새매 따위를 놓아주고 또 물고기 잡는 기구를 불살라서 일체 금지시켰다. 이듬해 경신(庚申)에 30명의 도승(度僧)을 두고 당시 서울인 사차성(泗차城; 지금의 부여夫餘)에 왕흥사(王興寺)를 세우려고 겨우 터를 닦다가 죽었다. 무왕(武王)이 왕위를 계승해서 아버지가 터를 닦은 것을 아들이 일으켜 수기(數紀)를 지내서 완성하니 그 절 이름도 역시 미륵사(彌勒寺)다. 산을 등지고 물에 임했으며, 화목(花木)이 수려하여 사시(四時)의 아름다운 경치를 갖추었다. 왕은 항상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절에 들어가서 그 경치가 장엄하고 고운 것을 구경했다(<고기古記>에 실려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무왕武王은 바로 가난한 어머니가 못 속의 용龍과 관계하여 낳은 이로,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東으로서, 즉위한 뒤에 시호諡號를 무왕武王이라 했다. 이 절은 처음 왕비王妃와 함께 이룩한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너그러운 명으로 짐승 보호함은 그 은혜 천구(千丘)에 미치고,
은택(恩澤)이 돼지와 물고기에게까지 흡족하니 어짊이 온 세상에 넘치네.
성군(聖君)이 갑자기 돌아감을 말하지 말라.
상방(上方) 도솔(兜率)에는 이제 바로 꽃다운 봄이리.
보장봉로(寶藏奉老) 보덕이암(普德移庵)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에 이렇게 말했다. 고구려 밀기긴 무덕(武德)·정관(貞觀) 연간에 나라 사람들은 다투어 오두미교(五斗米敎)를 신봉했다. 당(唐)나라 고조(高祖)가 이 말을 듣고 도사(道士)를 시켜 천존상(天尊像)을 보내고, 또 도덕경(道德經)을 강술(講述)케 하여 왕이 백성들과 함께 들으니 곧 제 27대 영류왕(榮留王) 즉위 7년 갑신(甲申; 624)이었다. 이듬해에 고구려에서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불교(佛敎)와 도교(道敎)를 배울 것을 청하자 당나라 황제(皇帝; 고조高祖를 말함)는 이를 허락했다.
그 뒤에 보장왕(寶藏王)이 즉위하자(정관貞觀 16년 임인壬寅; 642) 또한 유(儒)·불(佛)·도(道)의 세 교(敎)를 모두 일으키려 했다. 이때 왕의 사랑을 받던 재상 개소문(蓋蘇文)이 왕에게 아뢰었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다같이 성하게 일어나지만 도교는 그렇지 못하오니 특별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도교를 구하도록 하십시오." 이때 보덕화상(普德和尙)이 반룡사(盤龍寺)에 있었는데 도교가 불교와 맞서서 나라의 운수가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해 여러 번 간했지만 왕은 듣지 않으므로 이에 신력(神力)으로 방장(方丈)을 날려 남쪽에 있는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全州)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 가서 살았으니 곧 영휘(英徽) 원년(元年) 경술(庚戌; 650) 6월이었다(또 본전本傳에는, 건봉乾封 2년年 정묘丁卯(667) 3월月 3일日의 일이라 했다). 그런 지 얼마 안 되어 나라가 망했다(총장總章 원년 무진戊辰(668)에 나라가 망했으니 그 사이를 따지면 경술년(庚戌年)의 19년 후가 된다). 지금의 경복사(景福寺)에 날아온 방장(方丈)이 바로 이것이라 한다(이상은 <국사國史>에 있는말 이다). 진락공(眞樂公)은 그를 위해 시(詩)를 지어 당(唐)에 남겨 두었고, 문렬공(文烈公)은 그의 전기를 저술하여 세상에 전했다.
또 당서(唐書)를 상고하면 이보다 앞서 수(隨)나라 양제(煬帝)가 요동(遼東)을 정벌할 때 비장(裨將) 양명(羊皿)이란 자가 있어서 전쟁에 불리하여 장차 죽게 되었을 때 맹세했다. "내 반드시 고구려의 총신(寵臣)이 되어 저 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다." 개씨(蓋氏)가 정권(政權)을 마음대로 하게 되자 개(蓋)로 성씨를 삼았으니 곧 양명의 응(應)함이었다.
또 <고구려고기(高句麗古記)>에 이렇게 말한다. 수(隨)나라 양제(煬帝)가 대업(大業) 8년 임신(壬申; 612)에 3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쳐들어왔으며, 10년 갑술(甲戌; 614) 10월에 고구려왕(高句麗王; 그때는 제 26대 영양왕영陽王이 즉위한 25년이다)이 표문(表文)을 올려 항복을 청할 때 한 사람이 비밀히 소노(小弩)를 품속에 감추고, 표문을 가진 사신을 따라 양제가 탄 배 안에 들어갔다. 양제(煬帝)가 표문(表文)을 들고 읽는데 소노(小弩)를 쏘아 양제의 가슴을 맞혔다. 양제가 즉시 군사를 돌리려 하여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천하의 군주(君主)가 되어 작은 나라를 친정(親征)하여 이기지 못했으니 만대(萬代)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때 우상(右相) 양명(羊皿)이 아뢴다. "신이 죽으면 고구려의 대신(大臣)이 되어 반드시 그 나라를 멸망시켜 제왕(帝王)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양제가 죽은 뒤에 그는 과연 고구려에 태어났다. 나이 15세에 총명하고 신기한 무용(武勇)이 있었다. 그때 무양왕(武陽王; <國史국사>에 영류왕(榮留王)의 이름은 건무建武, 혹은 건성建成이라고 했는데 여기에는 무양왕武陽王이라 했으니 자세치 못하다)이 그의 어질다는 말을 듣고 불러들여 신하로 삼았다. 그는 스스로 성(姓)을 개(蓋)라 하고 이름을 김(金)이라 했으며 지위가 소문(蘇文)에까지 이르니 바로 시중(侍中)의 벼슬이다(<당서唐書>에는 개소문蓋蘇文이 자칭 막이지莫離支라고 했으니 당唐나라의 중서령中書令과 같은 것이라 했다. 또 <신지비사神誌秘詞>의 서문序文을 보면 소문蘇文 대영홍大英弘이 서문序文을 쓰고 또 주注를 달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소문蘇文은 곧 직명職名으로서 문증文證이 있다. 전傳에는, 문인文人 소영홍蘇英弘이 서문序文을 썼다 했다. 어느 것이 옳은지 자세치 못하다). 개금(盖金)이 아뢰었다. "솥에는 세 발이 있고, 나라에는 세 가지 교(敎)가 있는 법입니다. 신이 보기에 이 나라 안에는 오직 유교와 불교만 있고 도교가 없으므로 나라가 위태로운 것입니다." 왕은 옳게 여겨 당나라에 아뢰어 도교를 청하니 이에 태종(太宗)이 서달(敍(叔)達) 등 도사(道士) 8명을 보내주었다(<국사國史>에는 무덕武德 8년 을유乙酉(625)에 사신을 당唐나라에 보내서 불교佛敎와 도교道敎를 청했더니 당唐나라 황제皇帝가 이를 허락했다고 했다. 이 기록으로 보면, 양혈羊血이 갑술甲戌년(614)에 죽어서 이 고구려에 태어났다면 나이 겨우 10여 세에 총재寵宰가 되고 왕을 달래어 사신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도교道敎를 청했다 하니 그 연월일年月日에 필경 한가지 잘못된 곳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두 가지를 모두 기록한다). 왕이 기뻐하여 불사(佛寺)를 도관(道館)으로 만들고 도사(道士)를 존경하여 유사(儒士) 위에 앉게 했다. 도사들은 국내의 이름난 산천을 돌아다니며 이를 진압시키는데, 옛 평양성(平壤城)의 지세(地勢)가 신월성(新月城)이라 하여 도사들이 주문(呪文)을 읽어 남하(南河)의 용(龍)에게 명령해서 만월성(滿月城)을 더 쌓아서 용언성(龍堰城)이라 했으며, 참기(讖記)를 지어 용언도(龍堰堵), 또는 천년보장도(千年寶藏堵)라고 했다. 여기에 혹 영석(靈石; 속언俗言에는 도제암都帝암이라 하고, 또 조천석朝天石이라고 하니 대개 옛날에 성제聖帝가 이 돌을 타고 상제上帝에게 올라가 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을 파서 깨뜨리기도 했다.
개금(盖金)은 또 왕에게 아뢰어 동북과 서남쪽에 긴 성을 쌓게 했다. 이때 남자들은 부역에 나가고 여자들이 농사를 지었는데, 그 역사는 16년만에 끝이 났다. 보장왕(寶藏王)때에 이르러 당나라 태종(太宗)이 친히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쳐들어왔으나 또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당나라 고종(高宗) 총장(總章) 원년 무진(戊辰; 668)에 우상(右相) 유인궤(劉仁軌), 대장군(大將軍) 이적(李勣)과 신라 김인문(金仁問) 등이 고구려를 쳐서 나라를 멸망시켜 왕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돌아가니 보장왕의 서자(庶子)가 4,000여 가구를 거느리고 신라에 항복했다(<국사國史>와 조금 다르기에 여기에 모두 싣는다). 대안(大安) 8년 신미(辛未; 1092)에 고려의 우세승통(祐世僧統)이 고대산(孤大山) 경복사(景福寺)의 비래방장(飛來方丈)에 가서 보덕성사(普德聖師)의 영정(影幀)에 예를 갖추고 시(詩)를 지었다.
열반(涅槃)의 평등한 가르침은,
우리 스승에게서 전해졌다고 하네.
애석하게도 승방(僧房)에 날아온 뒤에,
동명왕(東明王)의 옛 나라 위태로웠네.
그 발문(跋文)에는 이렇게 썼다. "고구려 보장왕이 도교에 혹해서 불교를 믿지 않기 때문에 보덕법사(普德法師)는 이에 승방(僧房)을 날려서 남쪽 이산으로 옮겨 놓았다. 그 후에 신인(神人)이 고구려 마령(馬嶺)에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의 나라가 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이런 것은 모두 <국사(國史)>와 같고, 그 나머지는 본전(本傳)과 <승전(僧傳)>에 모두 기록되어있다. 보덕법사에게는 11명의 높은 제자가 있었는데, 그중에 무상화상(無上和尙)은 제자 김취(金趣) 등과 함께 금동사(金洞寺)를 세웠고, 적멸(寂滅)·의융(義融) 두 법사는 진구사(珍丘寺)를 세웠고, 지수(智藪)는 대승사(大乘寺)를 세웠고, 일승(一乘)은 심정(心正)·대원(大原) 등과 함께 대원사(大原寺)를 세웠고, 수정(水淨)은 유마사(維摩寺)를 세웠고, 사대(四大)는 계육(契育) 등과 함께 중대사(中臺寺)를 세웠고, 개원화상(開原和尙)은 개원사(開原寺)를 세웠고, 명덕(明德)은 연구사(燕口寺)를 세웠다. 개심(開心)과 보명(普明)도 역시 전기가 있는데 모두 본전(本傳)과 같다.
찬(讚)해 말한다.
불교는 넓어서 바다와 같이 끝이 없어서,
백천(百川)의 유교(儒敎)와 도교(道敎)를 모두 받아들이네.
가소롭다. 저 여왕(麗王)은 웅덩이를 막고,
바다로 와룡(臥龍)이 옮겨가는 것 알지 못하네.
동경흥륜사(東京興輪寺) 금당십성(金堂十聖)
동쪽 벽에 앉아서 서쪽으로 향한 이상(泥像)은 아도(我道)·염촉(염촉)·혜숙(惠宿)·안함(安含)·의상(義湘)이다. 서쪽 벽에 앉아서 동쪽을 향한 이상(泥像)은 표훈(表訓)·사파(蛇巴)·원효(元曉)·혜공(惠空)·자장(慈藏)이다.
<옥룡집(玉龍集)>과 <자장전(慈藏傳)>, 그리고 여러 사람의 전기에는 모두 이렇게 말했다. "신라 월성(月城) 동쪽, 용궁(龍宮) 남쪽에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으니, 이것은 곧 전불(前佛) 때의 절터이며, 지금 황룡사(皇龍寺) 터는 곧 일곱 절의 하나이다."
<국사(國史)>를 상고하면, 진흥왕 즉위 14년 개국(開國) 3년 계유(癸酉; 553) 2월에 동쪽에 신궁(新宮)을 세웠는데 여기에서 황룡(皇(黃)龍)이 나타났으므로 왕은 이것을 의심해서, 고쳐서 황룡사(皇(黃)龍寺)라 했다. 연좌석은 불전(佛殿) 후면(後面)에 있었다. 일찍이 한 번 본 일이 있는데 돌의 높이는 5, 6척이나 되었으나 그 둘레는 겨우 서 발밖에 되지 않았으며 우뚝하게 서 있고 그 위는 편편했다. 진흥왕(眞興王)이 절을 세운 이후로 두 번이나 화재를 겪었으므로 돌이 갈라진 곳이 있다. 그래서 절의 중이 여기에 쇠를 붙여서 보호하게 한다.
여기에 찬(讚)해 말한다.
불교가 침체함이 얼마인지 기억할 수 없는데,
오직 연좌석(宴坐石)만이 그대로 남아 있네.
상전(桑田)이 변해 몇 번이나 창해(滄海)가 되었는가
아깝게도 우뚝한 채 아무 데로도 옮기지 않았네.
이윽고 몽고(蒙古)의 큰 병란 이후에 불전(佛殿)과 탑은 모두 불타 버렸다. 그래서 이 돌도 역시 흙에 파묻혀서 겨우 지면(地面)과 같이 편편해진 것이다.
<아함경(阿含經)>을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가섭불(迦葉佛)은 바로 현겁(賢劫)의 세 번째 부처다. 그는 사람의 나이로 쳐서 2만 세 때에 세상에 태어났다고 한다. 여기에 의거해서 증감법(增減法)으로 계산한다면 언제나 성겁(成劫)의 시초에는 모두 무량세(無量歲)를 누렸다. 이것이 점점 감해져서 8만 세에 이르면 그때가 바로 주겁(住劫)의 시초가 된다. 이때부터 또 100년마다 1 세씩 감하여 10 세가 되면 일감(一減)이 되고 또 증가하여 사람의 나이 8만 세가 되면 일증(一增)이 된다. 이렇게 해서 20번 감하고 20번 더하면 한 주겁(住劫)이 된다. 이 한 주겁 동안에 1,000의 부처가 세상에 나타나는데, 지금 본사(本師)인 석가불(釋迦佛)은 네 번째의 부처이다. 이 네 번째의 부처는 모두 제9감(第九減) 중에 나타난다. 석가세존(釋迦世尊)이 100세 때부터 가섭불의 2만 세까지는 이미 200만여 세나 된다. 만일 현겁(現劫) 시초의 첫째 부처였던 구류손불(拘留孫佛) 때에 이르면 또 몇 만 세(歲)가 된다. 구류손불 때로부터 위로 올라가 겁초(劫初)의 무량세(無量歲)를 누리던 때 까지는 또 얼마나 될 것인가. 석가세존으로부터 아래로 지금의 지원(至元) 18년 신사(辛巳; 1281)까지는 이미 2,230년이고 보면 구류손불로부터 가섭불 때를 지나서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또 몇만 세나 되겠는가.
본조(本朝)의 명사(名士)의 오세문(五世文)이 역대가(歷代歌)를 지었는데 여기에 의하면, 대금(大金)의 정우(貞祐) 7년 기묘(己卯; 1219)에서 거슬러 따져서 4만 9,600여 세에 이르면 바로 반고씨(盤古氏)가 천지를 개벽한 무인년(戊寅年)이 된다고 했다. 또 연희궁(延禧宮) 녹사(錄事) 김희령(金希寧)이 지은 대일역법(大一曆法)에 의하면, 천지 개벽한 상원(上元) 갑자(甲子)로부터 원풍(元豊) 갑자(甲子; 1084)에 이르기까지 193만 7,641 세라고 했다. 또 <찬고도(纂古圖)>에서는, 천지가 개벽한 때로부터 획린(獲麟; 前 477)에 이르기까지가 276만 세라고 했다. 여러 경문(經文)을 상고해 보면 또 가섭불 때부터 지금까지가 바로 이 연좌석의 나이가 된다고 하였으니, 오히려 겁초(劫初)의 천지가 때와는 어린애 나이가 될 정도다. 이들 삼가(三家)의 말들이 오히려 이 어린 돌의 나이에도 미치지 못하니 그들은 천지개벽의 설(說)에 있어서는 몹시 소홀했던 것이다.
요동성(遼東城)의 육왕탑(育王塔)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에 이렇게 실려 있다. 고구려 요동성(遼東城) 곁에 있는 탑은 고로(古老)들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러하다. 옛날 고구려 성왕(聖王)이 국경 지방을 순행하던 길에 이 성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오색 구름이 땅을 덮는 것을 보고는 그 구름 속을 찾아가 보았다. 거기엔 중 하나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다. 그 곁에는 세 겹으로 된 토탑(土塔)이 있는데 위는 솥을 덮은 것 같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이에 다시 가서 중을 찾아보았으나, 다만 거친 풀이 있을 뿐이다. 거기를 길 깊이나 되게 파보았더니 지팡이와 신이 나오고 더 파 보았더니 명(銘)이 나왔는데 명 위에 범서(梵書)가 있었다. 시신(侍臣)이 이 글을 알아보고 불탑(佛塔)이라고 말하였다. 왕이 자세한 것을 묻자 시신은 대답한다. "이것은 한(漢)나라 때 있었던 것으로, 그 이름을 포도왕(蒲圖王; 본래는 휴도왕休屠王이라 했는데 하늘에 제사지내는 금인金人이다)이라 합니다." 성왕은 이로부터 불교를 믿을 마음이 생겨서 이내 칠중(七重)의 목탑(木塔)을 세웠고, 뒤에 불법(佛法)이 비로소 전해 오자 그 시말(始末)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지금 다시 그 탑의 높이를 줄이다가 본탑(本塔)이 썩어서 무너졌다. 아육왕(阿育王)이 통일했다는 염부재주(閻浮提州)에는 곳곳에 탑을 세웠으니 이는 괴상할 것이 없다.
또한 당(唐)나라 용삭(龍朔) 연간(661-662)에 요동에 전쟁이 벌어져서 행군(行軍) 설인귀(薛仁貴)는 수양제(隋煬帝)가 토벌한 요동의 옛 땅에 이르렀다가 여기에서 산에 있는 불상(佛像)을 보았는데 모두 텅 비어 있고 몹시 쓸쓸하여 사람의 왕래가 끊어져 있었다. 고로(古老)에게 물었더니 "이 불상은 선대(先代)에 나타난 것입니다."한다. 이에 이 불상을 그대로 그려 가지고 서울로 왔다(이 사실은 모두 약함若函에 실려 있다).
서한(西漢)과 삼국(三國)의 지리지(地理地)를 상고해 보면 요동성은 압록강밖에 있으며, 한(漢)나라 유주(幽州)에 소속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때의 고구려 성왕이란 어느 임금인지 알 수가 없다. 혹 동명성제(東明聖帝)라고 하나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동명제는 전한(前漢)의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前 37)에 즉위해서 성제(成帝) 홍가(鴻嘉) 임인(任寅; 前 19)에 승하했으니, 그때라면 한나라에서도 역시 패엽(貝葉)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해외(海外)의 배신(陪臣)으로서 범서(梵書)를 알아본단 말인가. 그러나 불(佛)을 포도왕(蒲圖王)이라고 했으니 서한(西漢) 때에도 필시 서역문자(西域文字)를 아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범서라고 했을 것이다.
고전(古傳)을 상고해 보건대, 아육왕(阿育王)이 귀신의 무리에게 명하여 인구 9억 명이 사는 곳마다 탑 하나씩을 세웠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염부계(閻浮界) 안에 8만 4,000개를 세워서 큰 돌 속에 감추어 두었다고 한다. 지금 여러 곳에서 그 상서로운 징조가 한두 번 나타난 것이 아니니 대개 진신(眞身)의 사리(舍利)란 그 감응(感應)되는 것을 헤아리기가 어려운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야육왕(阿育王)의 보탑(寶塔)은 속세 곳곳에 세워져,
비에 젖고 구름에 묻히고 이끼마저 아롱졌네.
생각건데 그때의 길손들의 보는 눈은,
몇 사람이나 제신(祭神)의 무덤을 가리켰을까.
금관성(金官城)의 파사석탑(婆娑石塔)
금관(金官)에 있는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婆娑石塔)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金官國)으로 있을 때 세조(世祖) 수로왕(首露王)의 비(妃)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갑신(甲申; 48)에 서역(西域) 아유타국(阿踰타國)에서 배에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두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향하려 하는데,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받게 되어서 가지 못하고 돌아와 부왕(父王)께 아뢰자 부왕은 이 탑을 배에 싣고 가라고 했다. 그리하여 편하게 바다를 건너 남쪽 언덕에 도착하여 배를 대었다. 이때 그 배에는 붉은 돛과 붉은 깃발을 달았고 아름다운 주옥(珠玉)을 실었기 때문에 지금 그곳을 주포(主浦)라고 한다. 그리고 맨 처음에 공주가 비단 바지를 벗던 바위를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기(旗)가 처음으로 해안에 들어가던 곳을 기출변(旗出邊)이라 한다.
수로왕(首露王)이 황후(皇后)를 맞아서 같이 150여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해동(海東)에는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佛法)을 신봉(信奉)하는 일이 없었다. 대개 상교(像敎)가 전해 오지 않아서 이 지방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가락국본기(駕洛國本記)>에는 절을 세웠다는 글이 실려 있지 않다. 그러던 것이 제8대 질지왕(질知王) 2년 임진(壬辰; 452)에 이르러 그곳에 절을 세우고 왕후사(王后寺)를 세워(이것은 아도阿道와 눌지왕訥祗王의 시대에 해당된다. 법흥왕法興王 이전의 일이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복을 빌고 있다. 또 겸해서 남쪽 왜국(倭國)을 진압시켰으니, <가락국본기<駕洛國本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탑은 모진 4면이 5층으로 되었고, 그 조각(彫刻)은 매우 기묘(奇妙)하다. 돌에는 희미한 붉은 무늬가 있고 품질이 매우 좋은데, 우리 나라에서 나는 종류가 아니다. 본초(本草)에 말한, "닭의 볏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금관국을 또한 가락국이라고 하니, <가락국본기(駕洛國本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찬(讚)해 말한다.
석탑을 실은 붉은 돛대 깃발도 가벼운데,
신령께 빌어서 험한 물결 헤치고 왔네.
어찌 황옥(黃玉)만을 도와서 이 언덕에 왔으랴.
천년 동안 왜국의 노경(怒鯨)을 막고자 함일세.
고(구)려(高(句)麗)의 영탑사(靈塔寺)
<고승전(高僧傳)>에 말하기를, "중 보덕(普德)의 자(字)는 지법(智法)이니, 전 고구려 용강현(龍岡縣) 사람이다" 했으니 이것은 아래에 있는 본전(本傳)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보덕은 항상 평양성(平壤城)에 살고 있었는데 산방(山方)의 늙은 중이 와서 불경(佛經) 강의해 주기를 청하므로 굳이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가서 열반경(涅槃經) 40여 권을 강의하였다. 강의를 마치고 성 서쪽 대보산(大寶山)의 바위로 된 굴 밑에 이르러서 선관(禪觀)했다. 이때 신인(神人)이 와서 청하기를, "이곳에 사는 것이 좋겠다"하고, 석장(錫杖)을 그의 앞에 놓고 땅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 속에 8면으로 된 7층의 석탑(石塔)이 있을 것이다"하므로 땅을 파니 과연 그러했다. 이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영탑사(靈塔寺)라 하고 그곳에서 살았다.
황룡사(皇龍寺) 장육(丈六)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이 즉위한 14년 계유(癸酉; 553) 2월에 장차 용궁(龍宮) 남쪽에 대궐을 지으려 하니, 황룡(黃龍)이 그곳에 나타났으므로 이것을 고쳐서 절을 삼고 이름을 황룡사(皇龍寺)라 하고, 기축년(己丑; 569)에 이르러 담을 쌓아 17년만에 완성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바다 남쪽에 큰 배 한 척이 나타나서 하곡현(河曲縣) 사포(絲浦; 지금의 울주蔚州 곡포谷浦)에 닿았다. 이 배를 검사해 보니 공문(公文)이 있는데 쓰기를, "서축(西竺) 아육왕(阿育王)이 누른 쇠 5만 7,000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별전別傳에는 쇠가 40만 7,000근, 금金이 1,000냥이라고 했으나 잘못인 듯싶다. 혹은 3만 7,000근이라고도 한다) 장차 석가(釋迦)의 존상(尊像) 셋을 부어 만들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해서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빌기를, 부디 인연있는 국토(國土)로 가서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이루어 주기 바란다"했고, 부처 하나와 보살상(菩薩像) 둘의 모형(模型)도 함께 실려 있었다. 현(縣)의 관리가 문서를 갖추어서 보고하자 왕은 사자를 시켜 그 고을 성 동쪽의 높고 깨끗한 땅을 골라서 동축사(東竺寺)를 세우고 세 불상(佛像)을 편안히 모시게 했다. 그리고 그 금(金)과 쇠는 서울로 보내서 태건(太建) 6년 갑오(甲午; 574) 3월(<사중기寺中記>엔 계미癸未년 10월 17일이라고 했다)에 장륙존상(丈六尊像)을 부어 만들었는데 공사는 금시에 이루어졌으며, 그 무게는 3만 5,007근으로 황금(黃金) 198푼이 들었고 두 보살상(菩薩像)은 쇠 1만 2,000근과 황금 1만 136푼이 들었다. 이 장륙존상을 황룡사에 모셨더니 그 이듬해 불상에서 눈물이 발꿈치까지 흘러내려 땅이 한 자나 젖었으니, 이것은 대왕(大王)이 승하할 조짐이었다. 혹은 불상이 진평왕(眞平王) 때에 이루어졌다고 하나 이것은 그릇된 말이다.
별본(別本)에는 이렇게 말했다. 아육왕은 서축 대향화국(大香華國)에서 부처님이 세상을 떠난 후 100년 만에 태어났다. 그는 부처님께 공양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금과 쇠 몇 근씩을 모아서 세 번이나 불상을 부어 만들었지만 성광공지 못했다. 이때 왕의 태자가 아뢰기를, "그 일은 혼자의 힘으로 성공하지 못할 것을 저는 벌써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그것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웠더니, 그 배는 남염부제(南閻浮提)의 16개 큰 나라와 500 중국(中國), 10천의 소국(小國), 8만의 촌락(村落)을 두루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모두 불상을 부어 만드는 일에 성공하지 못했다. 최후로 신라국에 이르러 진흥왕이 문잉림(文仍林)에서 이것을 부어 만들어 불상을 이루니 좋은 모양이 다 이루어졌다. 아육왕은 이래서 근심이 없게 되었다.
뒤에 대덕(大德) 자장(慈藏)이 중국으로 유학하여 오대산(五臺山)에 이르렀더니 문수보살(文殊菩薩)이 현신(現身)해서 감응하여 비결(秘訣)을 주면서 그에게 부탁한다. "너희 나라의 황룡사는 바로 석가와 가섭불(迦葉佛)이 강연하던 곳으로, 연좌석(宴坐石)이 아직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의 무우왕(無憂王)이 황철(黃鐵) 몇 근을 모아서 바다에 띄웠던 것인데, 1,300여 년이 지난 뒤에야 너희 나라에 이르러서 불상이 이루어지고 그 절에 모셔졌으니, 이는 대개 위덕(威德)의 인연이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다(별기別記에 실려 있는 것과 같지 않다).
불상(佛像)이 이루어진 뒤에 동축사(東竺寺)의 삼존불(三尊佛)도 역시 황룡사로 옮겨져 안치(安置)했다. <사기(史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진평왕 5(6)년 갑진년(甲辰; 584)에 이 절의 금당이 이루어지고, 선덕왕(善德王) 때에 이 절의 첫 번째 주지(住持)는 진골(眞骨) 환희사(歡喜師)였고, 제2대 주지는 자장국통(慈藏國統), 그 다음은 국통혜훈(國統惠訓), 그 다음은 상률사(廂律師)였다." 이제 병화(兵火)가 있은 이후로 대상(大像)과 두 보살상(菩薩像)은 모두 녹아 없어졌고, 작은 석가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찬(讚)해 말한다.
속세(俗世) 어느 곳인들 참 고향이 아니랴만,
향화(香火)의 인연은 우리 나라가 으뜸일세.
이것은 아육왕(阿育王)이 착수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월성(月城) 옛터를 찾느라고 그랬던 것일세.
황룡사(皇龍寺) 구층탑(九層塔)
신라 제27대 선덕왕이 즉위 5년인 정관(貞觀) 10년 병신(丙申; 636)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중국으로 유학하여 오대산(五臺山)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의 불법을 전해주는 것을 감응해서 얻었는데(자세한 것은 본전本傳에 실려있다), 문수보살은 또 말했다. "너희 국왕은 바로 천축(天竺)의 찰리종(刹利種)의 왕으로, 이미 불기(佛記)를 받았기 때문에 따로 인연이 있어 동이공공(東夷共工)의 종족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산천(山川)이 험한 탓으로 사람의 성질이 거칠고 사나워서 간사한 말을 많이 믿는다. 그래서 때때로 혹 천신(天神)이 화를 내리기도 하지만 다문비구(多聞比丘)가 나라 안에 있기 때문에 군신(君臣)이 편안하고 만백성이 화평한 것이다." 말을 끝내더니 이내 보이지 않았다. 자장은 이것이 대성(大聖)의 변화인 줄 알고 슬피 울면서 물러갔다. 법사(法師)가 중국 대화지(太和池) 가를 지나는데 갑자기 신인(神人)이 나와서 묻는다. "어찌하여 이곳에 오셨오?" 자장이 대답한다. "보리(菩提)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인은 그에게 절하고 나서 또 묻는다. "그대의 나라에 무슨 어려운 일이 있소?" "우리 나라는 북으로 말갈(靺鞨)에 연하고 남으로는 왜국(倭國)에 이어졌으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범하는 등 이웃 나라의 횡포가 자주 있사오니 이것이 백성들의 걱정입니다." 신인이 말한다.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아 덕은 있어도 위엄이 없기 때문에 이웃 나라에서 침략을 도모하는 것이니 그대는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시오" 자장이 물었다. "고향에 돌아가면 무슨 유익한 일이 있겠습니까?" 신인이 말한다. "황룡사(皇龍寺)의 호법룡(護法龍)은 바로 나의 큰아들이오. 범왕(梵王)의 명령을 받아, 그 절에 와서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거든 절 안에 구층탑(九層塔)을 세우시오. 그러면 이웃 나라들은 항복할 것이며,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租貢)하여 왕업(王業)이 길이 편안할 것이오. 탑을 세운 뒤에는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죄인을 용서하면 외적(外賊)이 해치지 못할 것이오. 다시 나를 위해서 경기(京畿) 남쪽 언덕에 절 한 채를 지어 함께 내 복을 빌어 주면 나도 또한 그 은덕(恩德)을 보답하겠소." 말을 하고 옥(玉)을 바친 후 이내 형체를 숨기고 나타나지 않았다(<사중기寺中記>에 말하기를, 종남산終南山 원향선사圓香禪師에게서 탑 세울 까닭을 들었다고 했다).
정관(貞觀) 17년 계묘(癸卯; 643) 16일에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佛經)·불상(佛像)·가사(袈裟)·폐백(幣帛) 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탑 세울 일을 임금에게 아뢰자 선덕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 일을 의논하니 신하들은 말하기를, "백제에서 공장이를 청해 데려와야 되겠습니다."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에 가서 청해 오게 했다. 이리하여 아비지(阿非知)라고 하는 공장이가 명을 받고 와서 나무와 돌을 재고, 이간(伊干) 용춘(龍春; 혹은 용수龍樹)이 그 역사를 주관하는데 거느리고 일한 소장(小匠)들은 200 명이나 되었다.
처음에 절의 기둥을 세우던 날에 공장이는 꿈에 본국인 백제가 멸망하는 모양을 보았다. 공장이는 마음 속에 의심이 나서 일을 멈추었더니,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며 어두워지는 가운데 노승(老僧) 한 사람과 장사(壯士) 한 사람이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는 중과 장사는 모두 없어지고 보이지 않았다. 공장이는 일을 멈춘 것을 후회하고 그 탑을 완성시켰다. <찰주기(刹柱記)>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가 42척, 철반 이하는 183척이다." 자장이 오대산에서 받아 가져온 사리(舍利) 100알을 탑 기둥 속과, 통도사(通度寺) 계단(戒壇)과 또 대화사(大和寺) 탑에 나누어 모셨으니, 이것은 못에 있는 용의 청에 따른 것이다(대화사大和寺는 아곡현阿曲縣 남쪽에 있다. 지금의 울주蔚州이니 역시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세운 것이다). 탑을 세운 뒤에 천하가 형통하고 삼한(三韓)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이 아니겠는가. 그 뒤에 고려왕이 신라를 칠 계획을 하다가 말했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배가 있어 침범할 수 없다고 하니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황룡사(皇龍寺) 장륙존상(丈六尊像)과 구층탑(九層塔), 그리고 진평왕(眞平王)의 천사옥대(天賜玉帶)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고려왕은 그 침범할 계획을 그만두었다. 주(周)나라에 구정(九鼎)이 있어서 초(楚)나라 사람이 감히 주나라를 엿보지 못했다고 하니 이와 같은 따위일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귀신의 힘으로 한 듯이 제경(帝京)을 누르니,
휘황한 채색으로 처마가 움직이네.
여기에 올라 어찌 구한(九韓)의 항복만을 보랴,
건곤(乾坤)이 특별히 편안한 것 처음 깨달았네.
또 해동(海東)의 명현(名賢) 안홍(安弘)이 지은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는 이런 말이 있다. "신라 제 27대에는 여자가 임금이 되니 비록 올바른 도리는 있어도 위엄이 없어서 구한(九韓)이 침범하는 것이다. 만일 대궐 남쪽 황룡사(皇龍寺)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침범하는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제1층은 일본(日本),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제4층은 탁라(托羅), 제5층은 응유(鷹遊), 제6층은 말갈(靺鞨), 제7층은 거란(契丹), 제8층은 여진(女眞), 제9층은 예맥(穢貊)을 진압시킨다."
또 <국사(國史)> 및 <사중고기(寺中古記)>를 상고하면, "진흥왕(眞興王) 14년 계유(癸酉; 553)에 황룡사(皇龍寺)를 처음 세운 후에 선덕왕(善德王) 때인 정관(貞觀) 19년 을사(乙巳; 645)에 탑이 처음 이루어졌다. 제32대 효소왕(孝昭王)이 즉위한 7년 성력(聖歷) 원년 무술(戊戌; 698) 6월에 절이 벼락을 맞았다(<사중고기寺中古記>에는 성덕왕善德王 때라 했으나 잘못이다. 성덕왕 때에는 무술년이 없다). 제33대 성덕왕 경신(庚申; 720)에 다시 이 절을 세웠으나 제 48대 경문왕(景文王) 무자(戊子; 868) 6월에 두 번째 벼락을 맞았으며, 같은 임금 때에 세 번째로 중수(重修)하였다. 본조 (本朝) 광종(光宗)의 즉위 5(4)년 계축(癸丑; 953) 10월에는 세 번째 벼락을 맞았고, 현종(顯宗) 13년 신유(辛酉; 1021)에 네 번째 중수(重修)했다. 또 정종(靖宗) 2(元)년 을해(乙亥; 1035)에 네 번째 벼락을 맞았는데 이것을 문종(文宗) 갑진(甲辰; 1064)에 다섯 번째 중수(重修)했더니 또 헌종(憲(獻)宗) 말년 을해(乙亥; 1095)에 다섯 번째 벼락을 맞았다. 숙종(肅宗) 원년 병자(丙子; 1096)에 여섯 번째로 중수했더니, 또 고종(高宗) 16년 무술(戊戌; 1238) 겨울에 몽고(蒙古)의 병화(兵火)로 탑과 장륙존상(丈六尊像)과 절의 전우(殿宇)가 모두 재앙을 입었다" 했다.
황룡사(皇龍寺)의 종, 분황사(芬皇寺)의 약사(藥師) 봉덕사(奉德寺)의 종
신라 35대 경덕대왕(景德大王)이 천보(天寶) 13년 갑오(甲午; 754)에 황룡사(皇龍寺)의 종을 주조했는데, 길이는 1장(丈) 3촌(寸), 두께는 9촌, 무게는 49만 7,581 근이었다. 시주(施主)는 효정이왕(孝貞伊王) 삼모부인(三毛夫人)이요, 공장이는 이상택(里上宅) 하전(下典)이었다. 숙종(肅宗) 때에 새 종을 만들었는데 길이가 6척 8촌이었다.
또 이듬해 을미(乙未; 755)에 분황사(芬皇寺)의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의 동상(銅像)을 만들었는데, 무게가 30만 6,700 근이요, 공장이는 본피부(本彼部) 강고내말(强古乃未)이었다. 또 경덕왕(景德王)은 황동(黃銅) 12만 근을 내놓아 그 아버지 성덕왕(聖德王)을 위하여 큰 종 하나를 만들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죽으니, 그 아들 혜공대왕(惠恭大王) 건운(乾運)이 대력(大曆) 경술(庚戌; 770) 12월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공장이들을 모아서 기어이 완성시켜 봉덕사(奉德寺)에 안치(安置)했다. 이 봉덕사는 효성왕(孝成王)이 개원(開元) 26년 무인(戊寅; 738)에 그 아버지 성덕대왕(聖德大王)의 복을 빌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종의 명(銘)에 "성덕대왕신종지명(聖德大王神鐘之銘)"이라 했다(성덕대왕은 경덕대왕의 아버지 전광대왕 典光大王이다. 종은 본래 경덕대왕이 그 아버지를 위해서 시주한 금金이었으므로 성덕왕의 종이라고 한 것이다).
조산대부(朝散大夫) 전태자사의랑(前太子司議郎) 한림랑(翰林郞) 금필월(해)金弼월(奚)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종의 명(銘)을 지었으니 글이 너무 길어서 여기에 싣지 못한다.
영묘사(靈妙寺) 장육(丈六)
선덕왕(善德王)이 절을 짓고 소상(塑像)을 만든 내력은 모두 <양지법사전(良志法師傳)>에 실려져 있다. 경덕왕(景德王) 즉위 23년(764)에 장육존상(丈六尊像)을 금으로 다시 칠했는데, 그 비용으로 조(租)가 2만 3,700석이었다(<양지전良志傳>에는, 불상佛像을 처음 만들 때의 비용이라고 써있다. 이 두 가지 설을 모두 싣는다).
사불산(四佛山), 굴불산(掘佛山), 만불산(萬佛山)
죽령(竹嶺) 동쪽 100리쯤 되는 곳에 우뚝 솟은 높은 산이 있는데, 진평왕(眞平王) 9년(587) 갑신(甲申)에 갑자기 사면이 한 길이나 되는 큰 돌이 나타났다. 거기에는 사방여래(四方如來)의 상(像)을 새기고 모두 붉은 비단으로 싸여 있었는데 하늘에서 그 산마루에 떨어진 것이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서 그 돌을 쳐다보고 나서 드디어 그 바위 곁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대승사(大乘寺)라고 했다. 여기에 이름은 전하지 않으나 연경(蓮經)을 외는 중을 청해다가 이 절을 맡겨 공석(供石)을 깨끗이 쓸고 향화(香火)를 끊이지 않았다. 그 산을 역덕산(亦德山)이라 하고 혹은 사불산(四佛山)이라고도 한다. 그 절의 중이 죽어 장사지냈더니 무덤 위에 연꽃이 피었다.
또 경덕왕(景德王)이 백률사(栢栗寺)에 거둥해서 산 밑에 이르렀더니 땅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리므로 그곳을 파게 했더니, 큰 돌이 있는데 사면에 사방불(四方佛)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굴볼사(掘佛寺)라고 했으니 지금을 잘못 전해져서 굴석사(掘石寺)라 한다.
경덕왕(景德王)은 또 당(唐)나라 대종황제(代宗皇帝)가 불교를 숭상한다는 말을 듣고 공장이에게 명하여 오색(五色) 담요를 만들고 또 침단목(沈檀木)을 새겨서 명주와 아름다운 옥으로 꾸며서 높이 1장(丈) 남짓한 가산(假山)을 만들어 담요 위에 놓았다. 산에는 뾰족한 바위와 괴이한 돌과 동굴(洞窟)이 있어서 각 구역으로 나뉘었고, 그 각 구역 안에는 노래하고 춤추고 노는 모습과 온갖 나라들의 산천(山川)의 형상이 있다. 조금만 바람이 문 안으로 들어가면 벌과 나비가 훨훨 날고 제비와 참새가 츰을 추니, 얼핏 보아서는 참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그 속에는 만불(萬佛)을 모셔 놓았는데 큰 것은 사방 한 치가 넘고 작은 것은 8,9푼 쯤 된다. 그 머리는 혹은 큰 기장만 하고 혹은 콩 반쪽만 하다. 머리털과 백모(白毛), 눈썹과 눈이 또렷하여 모든 형상이 다 갖추어졌으니, 다만 비슷하게 비유할 수는 있어도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이 산을 만불산(萬佛山)이라고 했다.
다시 거기에 금과 옥을 새겨 유소번개(流蘇幡蓋)·암라(菴羅)·담복(담복)·화과(花果) 등 장엄한 것과, 백보(百步) 누각(樓閣)·대전(臺殿)·당사(堂사)를 만들었는데 모두가 비록 작기는 하지만 그 형용은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과 같았다. 앞에는 돌아다니는 중의 형상 1,000여 개가 있고, 아래에는 자금종(紫金鐘) 셋을 벌여 놓았는데, 모두 종각(鐘閣)이 있고 포뢰(蒲牢)가 있으며 고래 모양으로 종치는 방망이를 만들었다. 바람이 불어 종이 울면 돌아 다니는 중들이 모두 엎드려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한다. 은은하게 염불하는 소리가 나는 듯하니, 이 까닭은 그 종에 있었다. 이것을 비록 만불(萬佛)이라고는 하지만 그 실상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만불산(萬佛山)이 이루어지자 사신을 당(唐)나라에 보내서 바치니 대종(代宗)은 이것은 보고 탄식한다. "신라의 교묘한 기술은 하늘이 만든 것이지 사람의 기술이 아니다." 이에 구광선(九光扇)을 그 바위 사이에 두어 두고 이름을 불광(佛光)이라고 했다. 4월 8일에 대종은 두 거리의 승도(僧徒)들에게 명하여 내도량(內道場)에서 만불산에 예배하고, 삼장불공(三藏不空)에게 명하여 밀부(密部)의 진리(眞理)를 1,000번이나 외어서 경축(慶祝)하게 하니, 보는 사람들은 모두 그 교묘한 솜씨에 탄복했다.
찬(讚)해 말한다.
하늘은 만월(滿月)을 단장시켜 사방불(四方佛)을 마련했고,
땅은 명호(明毫)를 솟구어 하룻밤에 열렸도다.
교묘한 솜씨로 다시금 만불(萬佛)을 새겼으니,
부처님의 풍도를 삼재(三才)에 두루 퍼지게 하리.
생의사(生義寺) 석미륵(石彌勒)
선덕왕(善德王) 때에 중 생의(生義)는 항상 도중사(道中寺)에 살고 있었다. 어느날 꿈에 한 중이 그를 데리고 남산(南山)으로 올라가서 풀을 매어 표를 해 놓게 하고는 산 남쪽 골짜기에 와서 말한다.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스님은 이것을 파내다가 고개 위에 편하게 묻어 주시오." 꿈에서 깨자 그는 친구와 함께 표해 놓은 곳을 찾아 그 골짜기에 이르러 땅을 파자 거기에서 석미륵(石彌勒)이 나왔으므로 삼화령(三花嶺) 위로 옮겨 놓았다. 선덕왕 13년 갑신(甲申; 644)에 그곳에 절을 세우고 살았는데 뒤에 절 이름을 생의사(生義寺)라고 했다(지금은 잘못 전해져서 성의사性義寺라고 한다. 충담사忠談師가 해마다 3월 3일과 9월 9일이면 차를 달여서 공양한 것이 바로 이 부처다).
흥륜사(興輪寺)의 벽화(壁畵), 보현(普賢)
제54대 경명왕(景明王) 때 흥륜사의 남문과 좌우 낭무(廊무)가 불에 탔는데 이것을 수리하지 못하고 있어서, 정화(靖和)·홍계(弘繼) 두 중이 장차 시주를 받아 수리하려 했다. 정명(貞明) 7년 신사(辛巳; 921) 5월 15일에 제석신(帝釋神)이 이 절 왼쪽 경루(經樓)에 내려와 열흘 동안 머무르니 전탑(殿塔)과 풀·나무·흙·돌들이 모두 이상한 향기를 풍기고, 오색 구름이 절을 덮고 남쪽 연못의 어룡(魚龍)들도 기뻐서 뛰놀았다. 나라 사람들이 모여서 이것을 보고 전에는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경탄하여 옥과 비단과 곡식들을 시주하니 산더미처럼 쌓였다. 공장이들도 스스로 와서 하루가 안 되어 이루어졌다. 역사를 마치자 천제(天帝)가 장차 돌아가려 하니 이 두 중이 아뢴다. "천제(天帝)께서 만일 궁중으로 돌아가려 하시거든 저희에게 천제의 얼굴을 그려 정성껏 공양해서 하늘의 은혜를 갚게 하시고 또한 이로 인해서 영상(影像)을 여기에 남겨 두어서 이 세상을 길이 보호하게 하시옵소서." 천제가 말한다. "나의 힘은 저 보현보살(普賢菩薩)이 현화(玄化)를 두루 펴는 것만 못하니 이 보살의 화상을 그려서 공손히 공양하여 끊이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에 두 중은 천제의 가르침을 받들어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상(像)을 벽에 공손히 그렸는데, 지금까지도 이 화상은 남아 있다.
삼소관음(三所觀音)과 중생사(衆生寺)
신라 고전(古傳)에 이렇게 말했다. 중국 천자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아름답기 짝이 없어 이에 천자가 말하기를, "고금(古今)에 있는 그림으로도 이같이 아름다운 것은 적을 것이다" 하고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시켜서 그 실지 모양을 그리도록 했다(그 화공畵工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데 혹은 장승요張僧繇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그는 오吳나라 사람으로, 양梁나라 천감天監 연간에 무릉왕국武陵王國의 시랑직비각지화사侍郎直秘閣知화事가 되었고, 우장군右將軍과 오흥태수吳興太守를 지냈다. 그러니 여기에 말한 천자天子는 중국 梁·陣 무렵의 천자일 것이다. 그런데 전傳에 당나라 황제라 한 것은 우리 조선 사람이 중국을 가리켜 모두 당唐이라 하는 까닭에서일 것이다. 실상은 어느 시대의 제왕帝王인지 알 수 없다. 여기에는 두 가지 말을 모두 적어 둔다). 그 화공(畵工)은 천자(天子)의 명을 받들어 그림을 다 그렸으나 붓을 잘못 떨어뜨려 배꼽 밑에 붉은 점을 찍어 놓았는데, 고쳐 보려 했으나 고쳐지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붉은 점은 반드시 날 때부터 있던 것인가 보다 하고 그림이 끝나자 황제에게 바쳤더니 황제는 그 그림을 보고 나서 말한다. "모양은 실물과 독 같으나 배꼽 밑의 점은 속에 감추어진 것인데 어떻게 알고서 이것까지 그렸느냐." 황제는 크게 노해서 화공(畵工)을 옥에 가두고 장차 형벌을 주려고 하니, 승상(丞相)이 아뢰었다. "저 사람은 마음이 아주 곧사오니 원컨대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황제가 말한다. "만일 저 사람이 어질고 곧다면, 내가 어제 꿈에 본 사람의 형상을 그려서 바치게 하라. 그 그림이 꿈에 본 얼굴과 틀림없다면 용서해 줄 것이다." 그 사람이 이에 십일면관음보살(十一面觀音菩薩)의 상(像)을 그려 바치니 꿈과 맞는지라, 황제(皇帝)는 그제야 마음이 풀려 그를 용서해 주었다. 그 화공은 죄를 면하자, 박사(博士) 분절(芬節)과 약속했다. "내가 들으니 신라국(新羅國)에서는 불법(佛法)을 존경하여 신봉(信奉)한다 하니 그대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그 곳에 가서 함께 불사(佛事)를 닦아 그 나라를 널리 이익되게 하는 것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소." 이들은 드디어 함께 신라국에 이르러 이 중생사(衆生寺)의 관음보살의 상을 만들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보고 기도하여 복을 얻었으니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신라 말년 천성(天成) 연간(926∼929)에 정보(正甫) 최은함(崔殷함)이 나이 많도록 아들이 없어, 이 절 관음보살 앞에 나가서 기도를 드렸더니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다. 석 달이 되지 않았는데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이 서울을 침범해 와서 성 안이 크게 어지러웠다. 은함(殷함)은 그 아이를 안고 이 절에 와서 말하였다. "이웃 군사가 갑자기 쳐들어와서 일이 급합니다. 이 어린 자식으로 해서 누(累)가 겹친다면 식구가 모두 화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대성(大聖)께서 이 아이를 주신 것이라면, 원컨대 큰 자비(慈悲)의 힘을 내려 길러 주시어 우리 부자(父子)가 다시 만나게 해 주십시오." 슬피 세 번 울면서 세 번 아뢰고 난 후에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관음상(觀音像)의 예좌(猊座) 밑에 감추고 못잊어 하면서 떠나갔다. 반 달을 지나 적병이 물러간 뒤에 와서 아이를 찾아보니 살결은 마치 새로 목욕한 것과 같고, 모양도 매우 예쁜데 젖냄새가 아직도 입에서 났다. 아이를 안고 돌아와 기르니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혜롭기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이 사람이 곧 승로(丞魯)로서 벼슬이 정광(正匡)에 이르렀다. 승로는 낭중(郎中) 최숙(崔肅)을 낳았고, 숙은 낭중 제안(齊顔)을 낳았는데 이로부터 자손이 계속되고 끊어지지 않았다. 은함은 경순왕(敬順王)을 따라 고려에 들어와서 대성(大姓)이 되었다.
또 통화(統和) 10년(992) 3월에 사주(寺主)인 중 성태(性泰)는 보살(菩薩) 앞에 꿇어앉아 말했다. "저는 오랫동안 이 절에 살면서 정성껏 부지런히 향화(香火)를 받들어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하오나 절의 토지(土地)에서는 나는 것이 없어서 향사(香祀)를 계속할 수가 없으므로 장차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하옵기에 하직하는 터입니다." 이날 성태는 조금 졸다가 꿈을 꾸니 관음대성(觀音大聖)이 말한다. "법사(法師)는 아직 여기에 머물러 있고 멀리 떠나지 말라. 내가 시주를 해서 제사에 쓸 비용을 충분히 마련해 주겠다." 중이 기뻐하여 꿈에서 깨어 오직 그 절에 머물러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다. 그런지 13일 만에 갑자기 두 사람이 말과 소에 물건을 싣고 문 앞에 이르렀다. 절에 있던 중이 나가서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우리들은 금주(金州) 지방 사람인데 지난번에 스님 하나가 우리를 찾아와서 나는 동경(東京) 중생사(衆生寺)에 오랫동안 있었는데 공양에 쓸 비용이 어려워서 시주를 얻으려고 여기에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웃 마을에 가서 시주를 모아다가 쌀 엿 섬과 소금 넉 섬을 싣고 온 것입니다." 스님이 말했다.
"이 절에는 시주를 구하러 나간 사람이 없는데, 그대들이 필경 잘못 들은 것 같소." 그 사람들이 또 말한다. "그 스님이 우리들을 데리고 오다가 이 신견정(神見井) 가에 이르러서 말하기를, 절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따라온 것입니다." 절의 스님이 그들을 데리고 법당(法堂) 앞으로 들어가니, 그 사람들은 관음대성(觀音大聖)을 쳐다보고 절하면서 저희끼리 서로 말한다. "이 부처님이 바로 시주를 구하러 왔던 스님의 상(像)입니다." 말하면서 놀라고 감탄하기를 마지 않았다. 이로부터 여기에 바치는 쌀과 소금이 해마다 끊어지지 않았다.
또 어느날 저녁에 절 문에 화재가 나서 마을 사람들이 달려와 불을 껐다. 그런데 법당(法堂)에 올라가 보니 관음상이 없으므로 살펴보니 이미 뜰 가운데 서 있는 것이다. 누가 밖으로 내왔느냐고 물었으나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그제야 모두들 이것은 관음대성(觀音大聖)의 신령스러운 힘인 것을 알았다.
또 대정(大定) 13년 계사(癸巳; 1173) 연간에 중 점숭(占崇)이 이 절에 와서 살고 있었다. 그는 비록 글은 알지 못하지만 성질이 본래부터 순수하여 향화(香火)를 부지런히 받들었다. 어떤 중 하나가 그 절을 빼앗아 살려고 하여 친의천사(친衣天使)에게 호소했다. "이 절은 국가에서 은혜를 빌고 복을 구하는 곳이오니 마땅히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을 뽑아서 그에게 맡겨야 할 것입니다." 천사는 그 말을 옳게 여겨 그 사람을 시험하려 하여 소문(疏文)을 거꾸로 주어 보았다. 그러나 점숭은 이것을 받는 즉시로 줄줄 읽는다. 천사는 이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방 가운데로 물러앉아 다시 그에게 읽어보라고 했다. 그러나 점숭은 입을 다물고 한 마디도 읽지 못한다. 이것을 보고 천사가 말한다.
"스님은 참으로 관음대성이 보호하여 주시는 사람이로다." 이리하여 끝내 이 절을 빼앗지 않았다. 그 당시 점숭(占崇)과 같이 이 절에 살던 처사(處士) 김인부(金仁夫)가 이 이야기를 고을의 노인들에게 전해 주고 또 전기(傳記)로도 써 두었다.
백률사(栢栗寺)
계림(鷄林) 북쪽 산을 금강령(金剛嶺)이라 하고 산의 남쪽에는 백률사(栢栗寺)가 있다. 그 절에 부처의 상(像)이 하나 있는데 어느 때 만든 것인지 알 수가 없으나 영험이 자못 뚜렷했다. 혹은 말하기를, "이것은 중국의 신장(神匠)이 중생사(衆生寺)의 관음소상(觀音塑像)을 만들 때 함께 만든 것이다"하고, 또 속전(俗傳)에는 이렇게 말한다.
"이 부처님이 일찍이 도리천(도利天)에 올라갔다가 돌아와서 법당(法堂)에 들어갈 때에 밟았던 돌 위의 발자국이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이 부례랑(夫禮郞)을 구출하여 돌아올 때에 보였던 자취이다"한다.
천수(天授) 3년 임진(壬辰; 692) 9월 7일에 효소왕(孝昭王)은 대현(大玄) 살찬(薩찬)의 아들 부례랑을 국선(國仙)으로 삼았고, 주리(珠履)의 무리가 1,000명이나 되었는데 안상(安常)과는 무척 친했다. 천수(天授) 4년(장수長壽 2년) 계사(癸巳; 693) 3월에 부례랑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금란(金蘭)에 놀러 갔는데, 북명(北溟)의 경계에 이르렀다가 적적(狄賊)에게 사로잡혀 갔다. 문객(門客)들은 모두 어쩔 줄을 모르고 그대로 돌아왔으나 홀로 안상(安常)만이 그를 쫓아갔는데 이때는 3월 11일이었다. 대왕은 이 말을 듣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여 말했다. "선왕(先王)께서 신적(神笛)을 얻어 나에게 전해 주셔서 지금 현금(玄琴)과 함께 내고(內庫)에 간수해 두었는데, 무슨 일로 해서 국선이 갑자기 적에게 잡혀갔단 말인가.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현금玄琴과 신적神笛의 일은 별전別傳에 자세히 적혀 있다). 이때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天尊庫)를 덮자 왕은 또 놀라고 두려워하여 조사하게 하니, 천존고 안에 있던 현금과 신적 두 보배가 없어졌다. 왕은 말했다. "내게 어찌 복이 없어 어제는 국선을 잃고 또 이제 현금과 신적까지 잃는단 말인가." 왕은 즉시 창고를 맡은 관리 김정고(金貞高) 등 5명을 가두었고 4월에 나라 안의 사람을 모집하여 말했다. "현금(玄琴)과 신적(神笛)을 얻는 사람은 1년 조세(租稅)를 상으로 주겠다." 5월 15일에 부례랑의 부모가 백률사(栢栗寺) 불상 앞에 나가 여러 날 저녁 기도를 올리자, 갑자기 향탁(香卓) 위에 현금과 신적 두 보배가 놓여있고,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도 불상 뒤에 와 있었다. 두 부모는 매우 기뻐하여 어찌된 일인지 물으니, 부례랑이 말한다. "저는 적에게 잡혀간 뒤 적국의 대도구라(大都仇羅)의 집에서 말 치는 일을 맡아 대오라니(大烏羅尼)의 들에서(혹은 도구都仇의 집 종이 되어 대마大磨의 들에서 말을 먹였다고 했다) 말에게 풀을 뜯기고 있는데 갑자기 모양이 단정한 스님 한 분이 손에 거문고와 피리를 들고 와서 위로하기를, '고향 일을 생각하느냐?'하기에 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앞에 꿇어앉아서 '임금과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했습니다. 스님은 '그러면 나를 따라오너라'하고는 드디어 저를 데리고 바닷가까지 갔는데 거기에서 또 안상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스님은 신적을 둘로 쪼개어 우리 두 사람에게 주어서 각기 한 짝 씩을 타게 하고, 그는 현금(玄琴)을 타고 바다에 떠서 돌아오는데 잠깐 동안에 여기에 와 닿았습니다." 이 일을 자세히 왕에게 보고하자 왕은 크게 놀라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맞이하니 부례랑은 현금과 신적을 가지고 대궐 안으로 들어갔다. 왕은 50냥의 금은(金銀)으로 만든 그릇 다섯 개씩 두 벌과, 마납가사(摩衲袈裟) 다섯 벌, 대초(大초) 3,000필, 밭 1만 경(頃)을 백률사에 바쳐서 부처님의 은덕에 보답하고, 나라 안의 죄인들에게 대사령을 내리고, 관리들에게는 벼슬 3계급을 높여 주고, 백성들에게는 3년간의 조세(租稅)를 면제해 주었으며, 절의 주지(住持)를 봉성사(奉聖寺)로 옮겨 살게 했다. 부례랑을 봉하여 대각간(大角干; 신라의 재상 작명爵名)을 삼고, 아버지 대현아식(大玄阿식)은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삼고, 어머니 용보부인(龍寶夫人)은 사량부(沙梁部)의 경정궁주(鏡井宮主)를 삼았다. 안상은 대통(大統)을 삼고 창고를 맡았던 관리 다섯 사람은 모두 용서해 주고 각각 관작(官爵) 오급(五級)을 주었다.
6월 12일에 혜성(彗星)이 동쪽 하늘에 나타나더니 17일에 또 서쪽 하늘에 나타나자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이것은 현금과 신적을 벼슬에 봉하지 않아서 그러한 것입니다." 이에 신적을 책호(冊號)하여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했더니 혜성(彗星)은 이내 없어졌다. 그 뒤에도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많았지만 글이 번거로워 다 싣지 않는다. 세상에서는 안상을 준영랑(俊永郞)의 무리라고 했으나 이 일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영랑의 무리에는 오직 진재(眞材)·번완(繁完) 등만의 이름이 알려졌지만 이들도 역시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자세한 것은 별전別傳에 실려 있다).
민장사(敏藏寺)
우금리(우金里)에 사는 가난한 여자 보개(寶開)에게 장춘(長春)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바다의 장사꾼을 따라 나가더니 오래 되어도 소식이 없자 그의 어머니가 민장사(敏藏寺; 이 절은 곧 민장각간敏藏角干이 자기 집을 내놓아서 절을 만든 것이다) 관음보살 앞으로 가서 7일 동안 기도했더니 장춘이 금세 돌아왔다. 그 동안 어찌된 일이냐고 까닭을 묻자 장춘은 대답했다. "바다 가운데에서 회오리바람을 만나 배는 부서지고 동료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지만, 저는 널판쪽을 타고 오(吳)나라 바닷가에 닿았는데 오나라 사람이 저를 데려다가 들에서 농사를 짓도록 마련해 주었습니다. 어느날 이상한 스님 하나가 마치 고향에서 온 것처럼 은근히 위로하더니 저를 데리고 같이 가는데, 앞에 깊은 도랑이 가로막히자 스님은 저를 겨드랑이에 끼고 도랑을 뛰어넘었습니다. 저는 정신이 가물가물하는데 우리 시골집 말 소리와 우는 소리가 들리므로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덧 여기에 와 있었습니다." 저녁때에 오나라를 떠났는데, 이곳에 도착한 것이 겨우 오후 7, 8시였다. 이때는 바로 천보(天寶) 4년 을유(乙酉; 745) 4월 8일이었다. 경덕왕(景德王)이 이 말을 듣고 민장사에 밭을 시주하고 또 재물도 바쳤다.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
<국사(國史)>에 이렇게 말했다. "진흥왕(眞興王) 때인 태청(太淸) 3년 기사(己巳; 549)에 양(梁)나라에서 심호(沈湖)를 시켜 사리(舍利) 몇 알을 보내왔다. 선덕왕(善德王) 때인 정관(貞觀) 17년 계묘(癸卯; 643)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唐)나라에서 부처의 머리뼈와 어금니와 부처의 사리 100알과 부처가 입던 붉은 비단에 금색 점이 있는 가사(袈裟) 한 벌을 가지고 왔는데, 그 사리를 셋으로 나누어 하나는 황룡사(皇龍寺) 탑에 두고, 하나는 대화사(大和寺) 탑에 두고, 하나는 가사와 함께 통도사(通度寺) 계단(戒壇)에 두었으나, 그 나머지는 어디에 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통도사 계단에는 두 층이 있는데 위층 가운데에는 돌 뚜껑을 덮어서 마치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과 같았다.
속설(俗說)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 본조(本朝)에서 전후로 염사(廉使) 두 사람이 와서 계단에 절을 하고 공손히 돌솥을 들어 보았는데, 처음에는 긴 구렁이가 돌 함(函) 속에 있는 것을 보았고, 다음 번에는 큰 두꺼비가 돌 밑에 쪼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으므로 이로부터는 감히 이 돌을 들어 보지 못했다 한다. 요새 상장군(上將軍) 김공(金公) 이생(利生)과 유시랑(庾侍郞) 석(碩)이 고종(高宗)의 명령을 받아 강동(江東)을 지휘할 때 부절(符節)을 가지고 절에 와서 돌을 들고 절하려고 하니 절의 중은 지난 일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난처하게 여겼다. 두 사람이 군사를 시켜 돌을 들게 하니 그 속에 작은 돌 함이 있고, 함 속에는 유리통(瑠璃筒)이 들어 있고, 통 속에는 사리(舍利)가 단지 네 알뿐이었다. 이것을 서로 돌려보면서 경례했는데 통에 조금 상한 곳이 있었다. 이에 유공(庾公)이 마침 가지고 있던 수정함 하나를 시주하여 함께 간수해 두게 하고, 그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 이때는 강화도(江華島)로 서울을 옮긴 지 4년이 되던 을미년(乙未年; 1235)이었다."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사리(舍利) 100개를 세 곳에 나누어 두었더니, 이제는 오직 네 개뿐이다. 그것은 숨겨지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여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니 수효가 많고 적은 것이 괴이할 것이 없다." 또 속설(俗說)에는 이렇게 말한다. "황룡사(皇龍寺) 탑이 불타던 날에 돌솥 동쪽에 처음 큰 얼룩이 생겼는데 이것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때는 바로 요(遼)의 응력(應曆) 3년 계축(癸丑; 953)이요, 본조(本朝) 광종(光宗) 5(4)년으로, 탑이 세 번째로 불타던 때였다. 조계(曹溪)의 무의자(無衣子)가 시를 남겨 말하기를, "들으니 황룡사탑이 불타던 날, 번져서 탄 한 쪽에도 틈이 없었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지원(至元) 갑자년(甲子年; 1264) 이후로 원(元)나라 사신과 본국 황화(皇華)들이 다투어 와서 이 돌함에 절했으며 사방의 운수(雲水)들도 몰려들어 참례했는데, 돌함을 들어보기도 하고 혹은 들지 않기도 했다. 진신(眞身)의 사리 네 알 외에 변신(變身) 사리가 모래알처럼 부셔져서 돌함 밖으로 나와 있었는데 이상한 향기를 강하게 풍겨 여러 날 동안 없어지지 않는 일이 이따금 있었으니, 이것은 말세에 있는 한 지방의 기이한 일인 것이다.
당(唐)나라 대중(大中) 5년 신미(辛未; 851)에 당나라로 갔던 사신 원홍(元弘)이 당에서 가지고 온 부처의 어금니(지금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신라 문성왕文聖王 때의 일이다)와 후당(後唐) 동광(同光) 원년 계미(癸未; 923) 곧 본조(本朝) 태조(太祖) 즉위 6년에 당(唐)나라로 보냈던 사신 윤질(尹質)이 가지고 온 오백나한(五百羅漢)의 상(像)은 지금 북숭산(北崇山) 신광사(神光寺)에있다. 송(宋)나라의 선화(宣和) 원년 기묘(己卯(亥); 예종睿宗 15(4), 1119)에 입공사(入貢使) 정극영(鄭克永)·이지미(李之美) 등이 가지고 온 부처의 어금니는 지금 내전(內殿)에 모셔 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서로 전해 내려오는 말은 이러하다. 옛날 의상법사(義湘法師)가 당나라에 들어가 종남산(終南山)의 지상사(至相寺) 지엄존자(智儼尊者)에게 가 있었는데, 이웃에 선율사(宣律師)가 있어서, 항상 하늘의 공양을 받고 재를 올릴 때마다 하늘 주방(廚房)에서 먹을 것을 보내 왔다. 어느날 선율사는 의상법사를 청하여 재를 올리는데 의상이 자리를 잡고 앉은 지 오랜데도 하늘에서 보내는 음식은 때가 지나도 오지 않는다. 의상이 빈 바리때만 가지고 돌아가자 비로소 천사(天使)가 내려왔다. 선율사가 "오늘은 어찌해서 늦으셨소"하고 묻자 천사는 대답한다. "온 동네에 가득히 신병(神兵)이 막고 있어서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율사는 의상법사에게 신의 호위가 있는 것을 알고는 그의 도(道)의 힘이 자기보다 나은 것에 탄복하고는 하늘에서 보내 온 음식을 그대로 두었다가, 이튿날 또 지엄(智儼)과 의상(義湘) 두 대사를 재 올리는데 청해다가 그 사유를 자세히 말했다. 의상이 조용히 율사에게 말한다. "율사는 이미 천제(天帝)의 존경을 받고 계신데, 일찍이 듣건대 제석궁(帝釋宮)에는 부처님의 이빨 40개 중에 어금니 하나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들을 위해서 천제께 청하여 그것을 인간에게 내려보내어 복이 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율사는 이 후에 천사와 함께 그 뜻을 천제에게 전하니 천제는 7일을 기한하여 이를 보내 주니 의상은 경례를 다한 뒤에 맞이하여 대궐에 안치했다.
그 후 송(宋)나라 휘종조(徽宗朝)에 이르러 좌도(左道)를 믿으니, 이때 나라 사람들은 도참(圖讖)을 전하여 퍼뜨리기를, "금인(金人)이 이 나라를 망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황건(黃巾)의 무리들이 일관(日官)을 충동하여 위에 아뢰기를, "금인이란 불교를 말하는 것이니 장차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하였다. 이리하여 조정에서는 장차 불교를 없애고 중들을 무찔러 죽이고, 경전(經典)을 불사르고, 따로 조그만 배를 만들어 부처의 어금니를 실어 큰 바다에 띄워 인연이 있는 곳으로 흘려 보내려 했다. 이때 마침 고려 사신이 송나라에 갔다가 그 사실을 듣고는 천화용(天花茸) 50령(領)과 저포(紵布) 300필을 배를 호송(護送)하는 관원에게 뇌물로 주고 남몰래 부처의 어금니를 받고 빈 배만 흘려 보내게 했다. 사신들이 부처의 어금니를 얻어 가지고 와서 왕에게 아뢰자 예종(睿宗)은 크게 기뻐하여 십원전(十員殿) 왼쪽에 있는 소전(小殿)에 모시고 항상 소전 문을 잠그고 밖에는 향과 등불을 설치하여 왕이 친히 거둥하는 날에만 대궐 문을 열고 경례를 했다.
임진년(壬辰年; 1232)에 서울을 강화(江華)로 옮길 때 내관(內官)들은 총망한 중에 잊어버리고 이를 거두어 챙기지 못했다. 병신년(丙申年) 4월에 왕의 원당(願堂)인 신효사(神孝寺) 중 온광(蘊光)이 불아(佛牙)에 경례하기를 청하므로 왕에게 아뢰니 왕은 내신(內臣)을 시켜서 두루 궁중(宮中)을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이때 백대(栢臺) 시어사(侍御史) 최충(崔沖)이 설신(薛伸)에게 명하여 급히 여러 알자(謁者)의 방을 다니면서 물었으나 모두 어쩔 줄을 모를 뿐이었다. 내신(內臣) 김승로(金承老)가 아뢰기를, "임진년(壬辰年)에 서울을 옮길 때의 <자문일기(紫門日記)>를 조사해 보십시오"하므로 그 말을 쫓아 조사해보니 일기(日記)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입내시대부경(入內侍大府卿) 이백전(李白全)이 불아함(佛牙函)을 받다." 이백전(李白全)을 불러 물으니 대답한다. "청컨대 집에 돌아가서 다시 저의 사사 일기(日記)를 찾아보게 해 주십시오." 집에 가서 찾아보고 좌번알자(左番謁者) 김서룡(金瑞龍)이 불아함(佛牙函)을 받았다는 기록을 갖다가 바쳤다. 김서룡(金瑞龍)을 불러 물었으나 대답을 못한다. 또 김승로(金承老)가 아뢰는 대로 임진년(壬辰年)에서 지금 병신년(丙申年)까지 5년간의 어불당(御佛堂)과 경령전(景靈殿)에 수직한 자들을 잡아 가두고 심문했으나, 아무런 결말도 나지 않았다. 그런지 3일이 지난 날 밤중에 김서룡의 집 담 안으로 무엇을 던지는 소리가 나므로 불을 켜 조사해 보니 바로 불아함(佛牙函)이었다. 함은 본래 속 한 겹은 심향합(沈香合)이고 다음 겹은 순금합(純金合)이고 그 다음 바깥 겁은 백은함(白銀函)이고, 다음 바깥 겁은 유리함이고, 그 다음 겹은 나전함(螺鈿函)으로 각 함(各函)의 폭은 서로 꼭 맞게 되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만 유리함뿐이었다. 김서룡은 찾은 것이 기뻐서 대궐로 들어가 아뢰었다. 그러나 유사(有司)는 죄를 의논하여 김서룡과 어불당(御佛堂)과 경령전(景靈殿)의 수직하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 하니 진양부(晉陽府)에서 아뢰었다. "불사(佛事)로 인하여 사람을 많이 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모두 죽음을 면했다. 다시 십원전(十員殿) 안뜰에 특별히 불아전(佛牙殿)을 지어서 불아함(佛牙函)을 모시게 하고 장사(將士)들을 시켜 지키게 했다. 길일(吉日)을 가려서 신효사(神孝寺)의 상방(上房) 온광(蘊光)을 청해다가 승도(僧徒) 30명을 거느리고 궁중에 들어가 재를 올려 정성을 드리도록 했다. 그날 입직(入直)했던 승선(承宣) 최홍(崔弘)과 상장군(上將軍) 최공연(崔公衍)·이영장(李令長)과 내시(內侍)·다방(茶房) 관원들은 대궐 뜰에서 왕을 모시고 서서 차례로 불아함(佛牙函)을 머리에 이고 정성을 드렸는데 불아함 구멍 사이에 있는 사리는 그 수를 알지 못할 만큼 많았다. 진양부(晉陽府)에서는 백은(白銀) 상자에 그것을 담아 모셨다. 이때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불아(佛牙)를 잃은 후로 스스로 네 가지 의심이 생겼었소. 첫째 의심은, 천궁(天宮)의 7일 기한이 차서 하늘로 올라갔을까 하는 것이고. 둘째 의심은 국난(國亂)이 이러하니, 불아는 신물(神物)이므로 인연이 있는 무사(無事)한 나라로 옮겨 간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오. 셋째 의심은, 재물을 탐낸 소인(小人)이 그 상자를 도둑질하고 불아는 구렁에 버렸으리라는 것이오. 넷째 의심은, 도둑이 보물을 훔쳐가기는 했으나 이것을 드러낼 수가 없어서 집 속에 감추어 두었으리라는 것이었는데 이제 네 번째 의심이 맞았소"하고 이내 소리를 내어 크게 우니 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헌수(獻壽)하는데, 심지어 이마와 팔을 불에 태우는 사람도 있어서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 실록(實錄)은 당시 내전(內殿)에서 향(香)을 피우며 기도하던, 전지림사(前祗林寺) 대선사(大禪師) 각유(覺猷)에게서 얻은 것이니, 그는 자기가 친히 본 것이라면서 날더러 기록하라고 했다.
또 경오년(庚午年; 1270)에 강화(江華)에서 환도(還都)할 때의 난리는 몹시 심하여 임진년(壬辰年)보다도 더했다. 십원전(十員殿)의 감주(監主)인 선사(禪師) 심감(心鑑)은 자기의 위태로움을 잊고 불아함을 가지고 나와 도둑의 난리에서 화를 면하게 하였다. 이 사실을 대궐에 알리니 왕은 그 공을 크게 칭찬하고 이름 있는 절로 옮겨 살게 하여 지금 빙산사(빙山寺)에 살고 있다. 이것도 역시 각유(覺猷)에게서 친히 들은 것이다.
진흥왕(眞興王) 때인 천가(天嘉) 6년 을유(乙酉; 565)에 진(陳)나라에서는 유사(劉思)와 중 명관(明觀)을 시켜 불경(佛經)·논(論) 1,700여 권을 보내왔으며, 정관(貞觀) 17년(643)에는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삼장(三藏) 400여 상자를 싣고 돌아와서 통도사(通度寺)에 안치했다. 흥덕왕(興德王) 때인 태화(太和) 원년 정미(丁未; 827)에는 당(唐)에 간 학승(學僧)인 고구려 중 구덕(丘德)이 불경(佛經) 몇 상자를 가지고 오니 왕은 여러 절의 승도(僧徒)들과 함께 나가서 흥륜사(興輪寺) 앞길에 가서 맞이했다. 대중(大中) 5년(851)에는 당나라에 보낸 사신 원홍(元弘)이 불경(佛經) 몇 축(軸)을 가지고 왔고, 나말(羅末)에 보요선사(普耀禪師)가 두 번이나 오월국(吳越國)에 가서 대장경(大藏經)을 싣고 왔으니, 그는 곧 해룡왕사(海龍王寺)의 개산조(開山祖)이다.
송(宋)나라 원우(元祐) 갑술년(甲戌年; 1094)에 어떤 사람이 선사(禪師)의 진영(眞影)을 찬(讚)해 말했다.
거룩도 해라, 개조(開祖) 스님이시여! 우뚝 빼어났구나 저 참 모습이.
두 번이나 오월(吳越)에 가, 대장경(大藏經)을 가지고 오는 데 성공했네.
보요(普耀)라는 직함을 하사하시고, 네 번이나 조서(詔書)를 내리셨으니,
만일 그의 덕을 묻거든, 밝은 달 맑은 바람과 같다 하겠네.
또 대정(大定) 연간(1161∼1189)에 한남 관기(漢南管記) 팽조적(彭祖적)이 시(詩)를 지어 남겼다.
물과 구름 조용한 절에 부처님 계신데,
더구나 신룡(神龍)이 한 지경을 보호하네.
마침내 이 좋은 절 어느 누가 이어받을까,
처음 불교는 남쪽에서 전해왔네.
발문(跋文)이 있는데 이러하다.
옛날 보요선사(普耀禪師)가 처음으로 남월(南越)에서 대장경(大藏經)을 구해 가지고 돌아오는데 바닷바람이 갑자기 일더니 조각배가 물결 사이에서 뒤집힐 것 같았다. 선사는 말하기를, "이것은 신룡(神龍)이 대장경을 여기에 머물러 두려는 것이 아닐까"하고 드디어 주문(呪文)으로 정성껏 축원하여 용(龍)까지 함께 받들고 돌아오니, 바람도 자고 물결도 가라앉았다. 본국에 돌아오자 산천(山川)을 두루 구경하면서 대장경을 안치할 곳을 구하다가 이 산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상서로운 구름이 산 위에서 일어나는 곳을 보고 이에 수제자(首弟子) 홍경(弘慶)과 함께 연사(蓮社)를 세웠으니, 불교가 동방으로 전해 온 것은 실로 이때에 시작된 것이었다.
한남 관기(漢南管記) 팽조적(彭祖적)은 제(題)한다.
이 해룡왕사(海龍王寺)에는 용왕당(龍王堂)이 있는데 자못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많았다. 당시 용왕은 대장경(大藏經)을 따라와서 여기에 머물러 있었는데, 용왕당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또 천성(天成) 3년 무자(戊子; 928)에 묵화상(默和尙)이 당에 들어가 역시 대장경을 가지고 왔으며, 본조(本朝) 예종(睿宗) 때에는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조서를 받들고 중국으로 유학가서 요본(遼本) 대장경 3부(部)를 사 가지고 왔는데, 그 한 본(本)은 지금 정혜사(定惠寺)에 있다(해인사海印寺에 한 본本이 있고 허참정許參政댁에 한 본本이 있다).
대안(大安) 2년(1086) 본조(本朝) 선종(宣宗) 때에는 우세승통(祐世僧統) 의천(義天)이 송(宋)나라에 들어가서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많이 가지고 왔으며, 이 밖에도 서적에 실리지 않은 고승(高僧)과 신사(信士)들이 왕래하면서 가지고 온 것은 이루 자세히 기록할 수가 없다. 대체로 불교가 동방으로 전해 오는 데는 그 앞길이 양양(洋洋)했으니 경사스러운 일이다.
찬(讚)해 말한다.
중국과 동방은 오히려 연기로 막혔고,
녹원(鹿苑)의 학수(鶴樹)는 2,000년이네.
이 땅에 전해 오니 참으로 하례할 일이라,
동진(東震)과 서건(西乾)이 한 세상 되었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의상전(義湘傳)을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의상은 영휘(永徽) 초년(650)에 당나라에 들어가 지엄선사(智儼禪師)를 뵈었다"한다. 그러나 부석사(浮石寺) 본비(本碑)에 의하면, "의상은 무덕(武德) 8년(625)에 태어나 어려서 중이 되었다. 영휘(永徽) 원년 경술(庚戌; 650)에 원효(元曉)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려고 고구려에 갔다가 어려운 일이 있어서 그대로 돌아갔다.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 661)에 당에 들어가 지엄법사에게 배웠다. 총장(總章) 원년(668)에 지엄법사가 죽자 함형(咸亨) 2년(671)에 의상은 신라로 돌아와 장안(長安) 2년 임인(壬寅; 702)에 죽으니 나이 78세였다"했다. 그렇다면 지엄과 함께 선율사(宣律師)가 있는 곳에서 재를 올리고, 천궁(天宮)의 불아(佛牙)를 청하던 일은 신유(辛酉; 661)에서 무진(戊辰; 668)까지의 7, 8년 사이가 될 것이다. 본조(本朝) 고종(高宗)이 강화(江華)로 옮기던 임진년(壬辰年; 1232)에 천궁의 7일 기한이 다 찼다고 의심한 것은 잘못된 것이니, 도리천(도利天)의 1주야는 인간(人間) 100세에 해당되는 것이다.
또 의상이 처음 당에 갔던 신유년(辛酉年; 661)에서부터 계산하여 본조(本朝) 고종(高宗) 임진(壬辰; 1232)까지는 693년이니 경자년(更子年; 1240)에 이르러야 비로서 700년이 차며, 7일 기한도 차는 것이다. 환도(還都)하던 지원(至元) 7년 경오(庚午; 1270)까지는 730년이니, 만일 천제(天帝)의 말과 같이 7일 후에 천궁(天宮)으로 돌아갔다고 하면 심감선사(心鑑禪師)가 환도(還都)할 때 가져다 바친 것은 필시 진짜 불아(佛牙)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해 봄 환도(還都)하기 전에 왕은 대궐 안 제종(諸宗)의 이름난 중들을 모아서 불아와 사리를 빌어 구하여 비록 정성과 부지런함을 다했지만 하나도 얻지 못했으니, 필경 7일 기한이 차서 하늘로 올라간 듯 싶다. 지원(至元) 21년 갑신(甲申; 1284)에 국청사(國淸寺)의 금탑(金塔)을 보수(補修)하고 충렬왕(忠烈王)은 장목왕후(莊穆王后)와 함께 묘각사(妙覺寺)에 거둥하여 신도(信徒)의 무리들을 모아 경하(慶賀)하고 찬미(讚美)했다. 이것이 끝나자 심감(心鑑)이 바친 불아와 낙산(落山)의 수정염주(水精念珠)와 여의주(如意珠)를 군신(君臣)과 여러 신도(信徒)들이 모두 쳐다보고 경배한 뒤에 함께 금탑(金塔) 안에 안치했다.
나도 역시 이 모임에 참석해서 이른바 불아라고 하는 것을 친히 보았는데 그 길이는 세 치 가량 되고 사리는 없었다. 무극(無極)은 쓴다.
미륵선화(彌勒仙花)·미시랑(未尸郎)·진자사(眞慈師)
신라 제 24대 진흥왕(眞興王)의 성(姓)은 김씨(金氏)요 이름은 삼맥종(삼麥宗)인데, 혹 심맥종(深麥宗)이라고도 한다. 양(梁)나라 대동(大同) 6년 경신(庚申; 540)에 즉위(卽位)했다. 백부(伯父) 법흥왕(法興王)의 뜻을 사모해서 한 마음으로 부처를 받들어 널리 절을 세우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중이 되기를 허락했다. 왕은 또 천성이 풍미(風味)가 있어서 크게 신선을 숭상하여 민가(民家)의 처녀들 중에 아름다운 자를 뽑아서 원화(原花)를 삼았으니, 이것은 무리를 모아서 사람을 뽑고 그들에게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을 가르치려 함이었으며, 이것은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대요(大要)이기도 했다. 이에 남모랑(南毛娘)과 교정랑(교貞娘)의 두 원화를 뽑았고, 여기에 모여든 사람이 3,4백 명이나 되었다. 교정(교貞)이 남모(南毛)를 질투하여 술자리를 마련하여 남모에게 취하도록 먹인 후에 남몰래 북천(北川)으로 데리고 가서 큰 돌을 들고 그 속에 묻어 죽였다. 이에 그 무리들은 남모가 간 곳을 알지 못해서 슬피 울다가 헤어졌다. 그러나 그 음모를 아는 자가 있어서, 노래를 지어 거리의 어린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니, 남모의 무리들은 듣고 그 시체를 북천(北川) 속에서 찾아내고 교정랑을 죽여 버리니 이에 대왕(大王)은 영을 내려 원화의 제도를 폐지했다. 그런 지 여러 해가 되자 왕은 또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시 영을 내려 양가(良家)의 남자 중에 덕행(德行)이 있는 자를 뽑아 이름을 고쳐 화랑(花娘(郞))이라 하고, 비로서 설원랑(薛原郞)을 받들어 국선(國仙)을 삼으니, 이것이 화랑(花郞) 국선(國仙)의 시초이다. 그런 때문에 명주(溟洲)에 비(碑)를 세우고, 이로부터 사람들로 하여금 악한 것을 고쳐 착한 일을 하게 하고 웃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에게 유산하게 하니 오상(五常)·육예(六藝)와 삼사(三師)·육정(六正)이 왕의 시애에 널리 행해졌다(<국사國史>에 보면, 진지왕眞智王 대건大建 8년 경庚(병丙)신申에 처음으로 화랑花郞을 받들었다 했으나 이것은 사전史傳의 잘못일 것이다).
진지왕(眞智王) 때에 와서 흥륜사(興輪寺) 중 진자(眞慈; 혹은 정자貞慈라고 함)가 항상 이 당(堂)의 주인인 미륵상(彌勒像) 앞에 나가 발원(發願)하여 맹세해 말했다. "우리 대성(大聖)께서는 화랑(花郞)으로 화(化)하시어 이 세상에 나타나 제가 항상 수용(수容)을 가까이 뵙고 받들어 시중을 들게 해 주십시오." 그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기원하는 마음이 날로 더욱 두터워지자, 어느날 밤 꿈에 중 하나가 말했다. "내 웅천(熊天; 지금의 공주公州) 수원사(水源寺)에 가면 미륵선화(彌勒仙花)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자(眞慈)는 꿈에서 깨자 놀라고 기뻐하여 그 절을 찾아 열흘길을 가는데 발자국마다 절을 하며 그 절에 이르렀다. 문 밖에 탐스럽고 곱게 생긴 한 소년이 있다가, 예쁜 눈매와 입맵시로 맞이하여 작은 문으로 데리고 들어가 객실로 안내하니, 진자는 올라가 읍(揖)하고 말한다. "그대는 평소에 나를 모르는 터에 어찌하여 이렇듯 은근하게 대접하는가." 소년이 말한다. "나도 또한 서울 사람입니다. 스님이 먼 곳에서 오시는 것을 보고 위로했을 뿐입니다." 이윽고 소년은 문 밖으로 나가더니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진자는 속으로 우연한 일일 것이라 생각하고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절의 중들에게 지난 밤의 꿈과 자기가 여기에 온 뜻만 얘기하고 또 말했다. "잠시 저 아랫자리에서 미륵선화를 기다리고자 하는데 어떻겠소." 절에 있는 중들은 그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근실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천산(千山)이 있는데 옛부터 현인(賢人)과 철인(哲人)이 살고 있어서 명감(冥感)이 많다고 하오. 그곳으로 가 보는 것이 좋을 게요." 진자가 그 말을 쫓아 산 아래에 이르니, 산신령(山神靈)이 노인으로 변하여 나와 맞으면서 말한다. "여기에 무엇 하러 왔는가." 진자가 대답한다. "미륵선화를 보고자 합니다." 노인이 또 말한다. "저번에 수원사(水源寺) 문 밖에서 이미 미륵선화를 보았는데 다시 무엇을 보려는 것인가." 진자는 이 말을 듣고 놀라 이내 달려서 본사(本寺)로 돌아왔다. 그런 지 한 달이 넘어 진지왕(眞智王)이 이 말을 듣고는 진지를 불러서 그 까닭을 묻고 말했다. "그 소년이 스스로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니 성인(聖人)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왜 성 안을 찾아보지 않았소." 진자는 왕의 뜻을 받들어 무리들을 모아 두루 마을을 돌면서 찾으니, 단장을 갖추어 얼굴 모양이 수려한 한 소년이 영묘사(靈妙寺) 동북쪽 길가 나무 밑에서 거닐며 놀고 있었다. 진자는 그를 만나보자 놀라서 말한다. "이분이 미륵선화다." 그는 나가서 물었다. "낭(郎)의 집은 어디에 있으며 성(姓)은 누구신지 듣고 싶습니다." 낭이 대답한다. "내 이름은 미시(未尸)이고, 어렸을 때 부모를 모두 여의어 성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이에 진자는 그를 가마에 태워 가지고 들어가 왕께 뵈었다. 왕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여 받들어 국선(國仙)을 삼았다. 그는 화랑도(花郞徒) 무리들을 서로 화목하게 하고 예의(禮儀)와 풍교(風敎)가 보통사람과 달랐다. 그는 풍류(風流)를 세상에 빛내더니 7년이 되자 갑자기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진자는 몹시 슬퍼하고 그리워했다. 미시랑(未尸郎)의 자비스러운 혜택을 많이 입었고 맑은 덕화(德化)를 이어 스스로 뉘우치고 정성을 다하여 도(道)를 닦으니, 만년(晩年)에 그 역시 어디 가서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해설하는 자가 말한다. "미(未)는 미(彌)와 음(音)이 서로 같고 시(尸)는 역(力)과 글자 모양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그 가까운 것을 취해서 바꾸어 부르기도 한 것이다. 부처님이 유독 진자의 정성에 감동된 것만이 아니라 이 땅에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가끔 나타났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나라 사람들이 신선을 가리켜 미륵선화라 하고 중매하는 사람들을 미시(未尸)라고 하는 것은 모두 진자의 유풍(遺風)이다. 노방수(路傍樹)를 지금까지도 견량(見郎)[樹]이라 하고 또 우리말로 사여수(似如樹; 혹은 인여수印如樹)라고 한다.
찬(讚)해 말한다.
선화(仙花) 찾아 한 걸음 걸으며 그의 모습 생각하니,
곳곳마다 심은 것은 한결같은 공로일세.
졸지에 봄은 되돌아가고 찾을 곳 없으니,
누가 알았으리, 상림(上林)의 한 때의 봄을.
남백월이성(南白月二聖), 노힐부득(努힐夫得)과 달달박박(달달朴朴)
<백월산양성성도기(白月山兩聖成道記)>에 이렇게 말하였다. "백월산(白月山)은 신라 구사군(仇史郡; 옛날의 굴자군屈自郡. 지금의 의안군義安郡)의 북쪽에 있었다. 산봉우리는 기이하고 빼어났는데 그 산줄기가 수백 리에 뻗쳐 있어 참으로 큰 진산(鎭山)이다."
옛 노인들이 서로 전해서 말한다. "옛날에 당(唐)나라 황제(皇帝)가 어느 때에 못을 하나 팠는데, 달마다 보름 전이면 달빛이 밝고, 못 가운데에 산이 하나 있고 사자(獅子)처럼 생긴 바위가 꽃 사이로 은은히 비쳐서 못 가운데에 그림자를 나타냈다. 황제는 화공(畵工)을 시켜서 그 모양을 그리게 하여 사자(使者)를 보내서 온 천하를 돌면서 찾도록 했다. 사자가 해동(海東)에 이르러 보니 그 산에 큰 사자암(獅子巖)이 있고 산의 서남쪽 이보(二步)쯤 되는 곳에 삼산(三山)이 있는데 그 이름은 화산(花山; 그 산의 몸체는 하나인데 봉우리가 셋이어서 삼산三山이라고 했다)으로서 모양이 그림과 같았다. 그러나 아직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서 신 한 짝을 사자암 꼭대기에 걸어 놓고 돌아와 아뢰었다. 그런데 신 그림자도 역시 못에 비치므로 황제는 이상히 여겨 그 산 이름을 백월산(白月山)이라고 했다(보름 전에는 백월白月의 그림자가 못에 나타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그러나 그 후로는 못 가운데에 산 그림자가 없어졌다."
이 산의 동남쪽 3,000보 쯤 되는 곳에 선천촌(仙川村)이 있고, 그 마을에는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하나는 노힐부득(努힐夫得; 혹은 등等)이니 아버지는 이름을 월장(月藏)이라 했고, 어머니는 미승(味勝)이라 했다. 또 하나는 달달박박(달달朴朴)이니 그의 아버지는 이름을 수범(修梵)이라 했고, 어머니는 범마(梵摩)라 했다(향전鄕傳에는 치산촌雉山村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두 선비의 이름은 방언方言이니 두 집에는 각각 두 선비의 마음과 행동이 등등騰騰하고 고절苦節하다는 두 가지 뜻에서 이렇게 이름지은 것이다).
이들은 모두 풍채와 골격(骨格)이 범상치 않았고, 속세를 떠난 마음이 있어 서로 좋은 친구였다. 20세가 되자 마을 동북쪽 고개 밖에 있는 법적방(法積房)에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서남쪽 치산촌(雉山村) 법종곡(法宗谷) 승도촌(僧道村)에 옛절이 있는데, 서진(栖眞)할 만하다는 말을 듣고, 함께 가서 대불전(大佛田)·소불전(小佛田)의 두 마을에 각각 살았다. 부득(夫得)은 회진암(懷眞巖)에 살았는데 혹은 이곳을 양사(壤寺; 지금 회진동懷眞洞에 옛 절터가 있으니 이것이다)라고도 했고, 박박(朴朴)은 유리광사(瑠璃光寺; 지금 이산梨山 위에 절터가 있는 것이 이것이다)에 살았다. 이들은 모두 처자(妻子)를 데리고 와서 살면서 산업(産業)을 경영하고 서로 왕래하면서 정신을 수양하고 편안히 마을을 길러 속세를 떠날 마음을 잠시도 폐하지 않았다. 그들은 몸과 세상의 무상(無常)함을 느껴 서로 말했다. "기름진 밭과 풍년 든 해는 참으로 좋은 것이지만 의식(衣食)이 마음대로 생기고 자연히 배부르고 따뜻함을 얻는 것만 못하다. 또 부녀(婦女)와 집이 참으로 좋으나, 연지화장(蓮池花藏)에서 여러 부처가 앵무새나 공작새와 함께 놀면서 서로 즐기는 것만 못하다. 더구나 불도(佛道)를 배우면 응당 부처가 되고, 참된 것을 닦으면 반드시 참된 것을 얻는 데에 있어서랴. 지금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니 마땅히 몸에 얽매어 있는 것을 벗어 버리고 무상(無上)의 도(道)를 이루어야 할 것인데, 어찌 이 풍진(風塵) 속에 파묻혀 세속 무리들과 같이 지내서야 되겠는가." 이들은 드디어 인간 세상을 떠나서 장차 깊은 골짜기에 숨으려 했다. 어느날 밤 꿈에 백호(白毫)의 빛이 서쪽에서 오더니 빛 속에서 금빛 팔이 내려와서 두 사람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꿈에서 깨어 그 얘기를 하니 두 사람의 말이 똑같으므로 이들은 모두 한참동안 감탄하다가 드디어 백월산(白月山) 무등곡(無等谷; 지금의 남수동南藪洞)으로 들어갔다.
박박사(朴朴師)는 북쪽 고개의 사자암(獅子巖)을 차지하여 판잣집 8척 방을 만들고 살았으므로 판방(板房)이라 하고, 부득사(夫得師)는 동쪽 고개의 무더기 돌 아래 물이 있는 곳을 차지하고 역시 방을 만들어 살았으므로 뇌방(磊房)이라고 했다(향전鄕傳에는, 부득夫得은 산 북쪽 유리동瑠璃洞에 살았으니 곧 지금의 판방板房이요, 박박朴朴은 산 남쪽 법정동法精洞 뇌방磊房에 살았다고 했으니 이 기록과는 서로 반대된다. 지금 와서 보면 향전鄕傳이 잘못되었다). 이들은 각각 암자에 살면서 부득(夫得)은 미륵불(彌勒佛)을 성심껏 구했고, 박박(朴朴)은 미타불(彌陀佛)을 경례하고 염송(念誦)했다.
3년이 못되어 경룡(景龍) 3년 기유(己酉; 709) 4월 8일은 성덕왕(聖德王) 즉위 8년이다. 해는 저물어가는데 나이 20이 가깝고 얼굴이 매우 아름다운 낭자(娘子)가 난초의 향기와 사향 냄새를 풍기면서 갑자기 북암(北庵; 향전鄕傳에는 남암南庵이라 했다)에 와서 자고 가기를 청하면서 글을 지어 바친다.
갈 길 더딘데 해는 떨어져 모든 산이 어둡고,
길은 막히고 성은 멀어 인가도 아득하네.
오늘은 이 암자에서 자려 하오니,
자비스러운 스님은 노하지 마오.
박박(朴朴)은 말했다. "절은 깨끗해야 하는 것이니 그대가 가까이 올 곳이 아니오. 어서 다른 데로 가고 여기에서 지체하지 마시오."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갔다(기記에는 말하기를, "나는 모든 잡념雜念이 없으니 혈낭血囊을 가지고 시험하지 말라"고 했다). 낭자(娘子)는 남암(南庵; 향전鄕傳에는 북암北庵)으로 돌아가서 또 전과 같이 청하니 부득(夫得)은 말했다. "그대는 이 밤중에 어디서 왔는가." 낭자가 대답한다. "맑기가 태허(太虛)와 같은데 어찌 오고 가는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어진 선배의 바라는 뜻이 깊고 덕행(德行)이 높고 굳다는 말을 듣고 장차 도와서 보리(菩提)를 이루고자 해서일 뿐입니다." 그리고는 게(偈) 하나를 주었다.
해 저문 깊은 산길에,
가도 가도 인가는 보이지 않네.
대나무와 소나무 그늘은 그윽하기만 하고,
시내와 골짜기에 물소리 더욱 새로워라.
길 잃어 잘 곳 찾는 게 아니요,
존사(尊師)를 인도하려 함일세.
원컨대 내 청 들어만 주시고,
길손이 누구인지 묻지 마오.
부득사(夫得師)는 이 말을 듣고 몹시 놀라면서 말했다. "이곳은 여자와 함께 있을 곳이 아니나, 중생(衆生)을 따르는 것도 역시 보살행(菩薩行)의 하나일 것이오. 더구나 깊은 산골짜기에 날이 어두웠으니 어찌 소홀히 대접할 수 있겠소." 이에 그를 맞아 읍(揖)하고 암자 안에 있게 했다. 밤이 되자 부득은 마음을 맑게 하고 지조를 닦아 희미한 등불이 비치는 벽 밑에서 고요히 염불했다. 밤이 새려 할 때 낭자는 부득을 불러 말했다. "내가 불행히 마침 산고(産故)가 있으니 원컨대 스님께서는 짚 자리를 준비해 주십시오." 부득이 불쌍히 여겨 거절하지 못하고 은은히 촛불을 비치니 낭자는 이미 해산을 끝내고 또 다시 목욕하기를 청한다. 부득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마음속에 얽혔으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그보다 더해서 마지못하여 또 목욕통을 준비해서 낭자를 통 안에 앉히고 물을 데워 목욕을 시키니 이미 통 속 물에서 향기가 강하게 풍기면서 금액(金液)으로 변한다. 부득이 크게 놀라자 낭자가 말했다. "우리 스승께서도 이 물에 목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득이 마지못하여 그 말에 좇았더니 갑자기 정신이 상쾌해지는 것을 깨닫고 살결이 금빛으로 되고, 그 옆을 보니 졸지에 연대(蓮帶) 하나가 생겼다. 낭자가 부득에게 앉기를 권하고 말한다. "나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인데 여기 와서 대사를 도와 대보리(大菩提)를 이루도록 한 것이오."
말을 마치더니 이내 보이지 않았다. 한편 박박(朴朴)이 생각하기를, "부득이 오늘 밤에 반드시 계(戒)를 더럽혔을 것이니 비웃어 주리라"하고 가서 보니 부득은 연화대(蓮花臺)에 앉아 미륵존상(彌勒尊像)이 되어 광명(光明)을 내뿜는데 그 몸은 금빛으로 변해 있었다. 박박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말한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습니까." 부득이 그 까닭을 자세히 말해 주니 박박은 탄식해 말한다. "나는 마음 속에 가린 것이 있어서, 다행히 부처님을 만났으나 도리어 대우하지 못했으니, 큰 덕(德)이 있고 지극히 어진 그대가 나보다 먼저 이루었소. 부디 옛날의 교분(交分)을 잊지 마시고 일을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부득이 말한다. "통 속에 금액이 남았으니 목욕함이 좋겠습니다." 박박이 목욕을 하여 부득과 같이 무량수(無量壽)를 이루니 두 부처가 서로 엄연히 대해 있었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다투어 와서 우러러보고 감탄하기를, "참으로 드문 일이로다."했다. 두 부처는 그들에게 불법(佛法)의 요지(要旨)를 설명하고 나서, 온몸으로 구름을 타고 가 버렸다.
천보(天寶) 14년 을미(乙未; 755)에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즉위(<고기古記>엔 천감天監 24년 을미乙未에 법흥왕法興王이 즉위했다고 했으나 그 선후가 뒤바뀐 것이 어찌 이렇게 심할까)하여 이 말을 듣고 정유(丁酉; 757)년에 사자(使者)를 보내서 큰 절을 세우고 이름을 백월산 남사(白月山 南寺)라 했다. 광덕(光德) 2년(<고기古記>에는 대력大曆 원년이라고 했으나 역시 잘못된 것이다) 갑진(甲辰; 764) 7월 15일에 절이 완성되자, 다시 미륵존상(彌勒尊像)을 만들어 금당(金堂)에 모시고 액자(額字)를 '현신성도미륵지전(現身成道彌勒之殿)'이라 했다. 또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을 만들어 강당(講堂)에 모셨는데, 남은 금액(金液)이 모자라 몸에 전부 바르지 못했기 때문에 아미타불상에는 역시 얼룩진 흔적이 있다. 그 액자는 '현신성도무량수전(現身成道無量壽殿)'이라 했다.
논평해 말한다. "낭(娘)은 참으로 부녀의 몸으로서 섭화(攝化)했다 할 만하다. <화엄경(華嚴經)>에 마야부인(摩耶夫人) 선지식(善知識)이 십일지(十一地)에 살면서 부처를 낳아 해탈문(解脫門)을 여환(如幻)한 것과 같다. 이제 낭자의 순산한 뜻이 여기에 있으며, 그가 준 글은 슬프고도 간곡하고 사랑스러워서 천선(天仙)의 지취(志趣)가 있다. 아, 낭자가 만일 중생을 따라서 다라니(陀羅尼)를 해득할 줄 몰랐더라면 과연 이같이 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 글 끝귀에는 마땅히, '맑은 바람이 한자리함을 꾸짖지 마오'했어야 할 것이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대개 세속의 말과 같이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푸른빛 떨어지는 바위 앞에 문 두드리는 소리,
어떤 사람이 해 저문데 구름 속 길을 찾는가.
남암(南庵)이 가까운데 그리로 갈 것이지,
푸른 이끼 밟고서 내 뜰을 더럽히지 마오.
위는 북암(北庵)을 찬(讚)한 글이다.
골짜기에 해 저문데 어디로 가리,
남창(南窓)에 자리 있으니 머물다 가오.
밤 깊어 백팔 염주(念珠) 세고 있으니,
이 소리 시끄러워 길손의 잠 깰까 두려워라.
위는 남암(南庵)을 찬(讚)한 글이다.
10리(里) 솔 그림자에 한 길을 헤매다가,
밤 초제(招提)로 중을 찾아 시험했네.
세 통에 목욕 끝나니 날도 장차 새는데,
두 아이 낳아 던져 두고 서쪽으로 갔네.
위는 성랑(聖娘)을 찬(讚)한 것이다.
분황사 천수대비(芬皇寺千手大悲) 맹아득안(盲兒得眼)
경덕왕(景德王) 때에 한기리(漢岐里)에 사는 희명(希明)이라는 여자의 아이가, 난 지 5년 만에 갑자기 눈이 멀었다. 어느날 어머니는 이 아이를 안고 분황사(芬皇寺) 좌전(左殿) 북쪽 벽에 그린 천수관음(千手觀音) 앞에 나가서 아이를 시켜 노래를 지어 빌게 했더니 멀었던 눈이 드디어 떠졌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무릎을 세우고 두 손바닥 모아,
천수관음(千手觀音) 앞에 비옵나이다.
1,000손과 1,000눈 하나를 내어 하나를 덜기를,
둘 다 없는 이몸이오니 하나만이라도 주시옵소서.
아아! 나에게 주시오면, 그 자비(慈悲) 얼마나 클 것인가.
찬(讚)해 말한다.
죽마(竹馬)·총생(총笙)의 벗 거리에서 놀더니,
하루아침에 두 눈 먼 사람 되었네.
대사(大士)가 자비로운 눈을 돌리지 않았다면,
몇 사춘(社春)이나 버들꽃 못 보고 지냈을까.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 관음(觀音)·정취(正趣), 조신(調信)
옛날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처음 당(唐)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진신(眞身)이 이 해변 어느 굴 안에 산다는 말을 듣고, 이곳을 낙산(洛山)이라고 이름했으니, 대개 서역(西域)에 보타락가산(寶陀洛伽山)이 있는 때문이다. 이것을 소백화(小白華)라고도 했는데 백의대사(白衣大士)의 진신(眞身)이 머물러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것을 빌어다가 이름지은 것이다.
여기에서 의상이 재계(齋戒)한 후 7일 만에 좌구(座具)를 새벽 물 위에 띄웠더니 용천팔부(龍天八部)의 시종(侍從)들이 굴 속으로 안내해 들어가므로 공중을 향해 참례(參禮)하니 수정(水精)으로 만든 염주 한 꾸러미를 내준다. 의상이 받아 가지고 물러나오니, 동해의 용이 또한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알을 바치므로 의상이 받들고 나와서 다시 7일 동안 재계(齋戒)하고 나서 비로소 관음(觀音)의 참 모습을 보았다. 관음이 말한다. "좌상(座上)의 산마루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佛殿)을 짓는 것이 마땅하다." 법사(法師)가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나왔다. 여기에 금당(金堂)을 짓고 관음상(觀音像)을 만들어 모시니, 그 둥근 얼굴과 고운 바탕이 마치 천연적으로 생긴 것 같았다. 대나무가 도로 없어지므로 그제야 비로소 관음의 진신(眞身)이 살고 있는 곳임을 알았다. 이 때문에 그 절 이름을 낙산사(洛山寺)라 하고, 법사는 자기가 받은 두 구슬을 성전(聖殿)에 봉안(奉安)하고 그곳을 떠났다.
그 후에 원효법사(元曉法師)가 뒤를 이어 와서 여기에 예(禮)를 올리려 하였다. 처음에 남쪽 교외(郊外)에 이르자 논 가운데에서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법사(法師)가 희롱삼아 그 벼를 달라고 청하니, 여인은 벼가 잘 영글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또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니 한 여인이 월수백(月水帛)을 빨고 있다. 법사(法師)가 물을 달라고 청하자 여인은 그 더러운 물을 떠서 바친다. 법사(法師)는 그 물을 엎질러 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이때 들 가운데 있는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그를 불러 말한다. "제호(醍호)스님은 쉬십시오." 그리고는 갑자기 숨고 보이지 않는데 그 소나무 밑에는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법사(法師)가 절에 이르자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의 자리 밑에 또 전에 보던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으므로 그제야 전에 만난 성녀(聖女)가 관음의 진신(眞身)임을 알았다.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 했다. 법사는 성굴(聖窟)로 들어가서 다시 관음의 진용(眞容)을 보려고 했으나 풍랑(風浪)이 크게 일어나 들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떠났다.
그 뒤에 굴산조사(굴山祖師) 범일(梵日)이 태화(太和) 연간(827∼835)에 당나라에 들어가 명주(明州) 개국사(開國寺)에 이르니 한 중이 왼쪽 귀가 없어진 채 여러 중들의 끝자리에 앉아 있다가 조사에게 말한다. "나도 또한 한 고향 사람으로, 내 집은 명주(溟州)의 경계인 익령현(翼嶺縣) 덕기방(德耆坊)에 있습니다. 조사께서 다음날 본국(本國)에 돌아가시거든 모름지기 내 집을 지어주셔야 합니다." 이윽고 조사(祖師)는 총석(叢席)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염관(鹽官)에게서 법을 얻고(이 일은 모두 본전本傳에 자세히 있다) 회창(會昌) 7년 정묘(丁卯; 847)에 본국으로 돌아오자 먼저 굴산사(굴山寺)를 세우고 불교를 전했다.
대중(大中) 12년 무인(戊寅; 858) 2월 보름 밤 꿈에, 전에 보았던 중이 창문 밑에 와서 말한다. "옛날에 명주(明州) 개국사(開國寺)에서 조사와 함께 약속을 하여 이미 승낙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렇게 늦는 것입니까." 조사는 놀라 꿈에서 깨자 사람 수십 명을 데리고 익령(翼嶺) 경계에 가서 그가 사는 곳을 찾았다. 한 여인이 낙산(洛山) 아래 마을에 살고 있으므로 그 이름을 물으니 덕기(德耆)라고 한다. 그 여인에게 아들 하나가 있는데 나이 겨우 8세로 항상 마을 남쪽 돌다리 가에 나가 놀았다. 그는 어머니께 말한다. "나와 같이 노는 아이들 중에 금빛이 나는 아이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이 사실을 조사에게 말했다. 조사는 놀라고 기뻐하여 그 아이와 함께 놀았다는 다리 밑에 가서 찾아보니 물 속에 돌부처 하나가 있는데 꺼내 보니 한쪽 귀가 없어진 것이 전에 보았던 중과 같았다. 이것은 곧 정취보살(正趣菩薩)의 불상(佛像)이었다. 이에 간자(簡子)를 만들어 절을 지을 곳을 점쳤더니 낙산(洛山) 위가 제일 좋다고 하므로 여기에 불전(佛殿) 3간을 지어 그 불상을 모셨다(고본古本에는 범일梵日의 일이 앞에 있고, 의상義湘과 원효元曉의 일은 뒤에 있다. 그러나 상고해 보건대, 의상義湘과 원효元曉 두 법사法師의 일은 당唐나라 고종高宗 때에 있었고, 범일梵日의 일은 회창會昌 후에 있었다. 그러니 연대年代가 서로 120여 년이나 차이가 난다. 그런 때문에 지금은 앞뒤를 바꾸어서 책을 꾸몄다. 혹은 범일梵日이 의상義湘의 문인門人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말이다).
그 뒤 100여 년이 지나 들에 불이 나서 이 산까지 번져 왔으나 오직 관음(觀音)·정취(正趣) 두 성인(聖人)을 모신 불전만은 그 화재를 면했고, 그 나머지는 모두 타 버렸다. 몽고(蒙古)의 병란이 있은 이후인 계축(癸丑)·갑인(甲寅) 연간(1253∼54)에 두 성인의 참 얼굴과 두 보주(寶珠)를 양주성(襄州城)으로 옮겼다. 몽고 군사가 몹시 급하게 공격하여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하므로 주지선사(住持禪師) 아행(阿行; 옛 이름은 희현希玄)이 은으로 만든 합(盒)에 두 구슬을 넣어 가지고 도망하려 하자 이것을 절에 있는 종 걸승(乞升)이 빼앗아 땅속에 깊이 묻고 맹세했다. "내가 만일 병란(兵亂)에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면 두 구슬은 끝내 인간 세상에 나타나지 못해서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요, 내가 만일 죽지 않는다면 마땅히 이 두 보물을 받들어 나라에 바칠 것이다." 갑인(甲寅; 1254)년 10월 22일에 이 성이 함락되어 아행은 죽음을 면치 못했으나 걸승은 죽음을 면했다. 그는 적의 군사가 물러가자 이것을 파내어 명주도(溟州道) 감창사(監倉使)에게 바쳤다. 이때 낭중(郎中) 이녹수(李祿綏)가 감창사(監倉使)였는데, 이것을 받아 감창고(監倉庫) 안에 간직해두고 교대할 때마다 서로 전해서 이어받았다.
무오(戊午; 1258)년 11월에 이르러 본업(本業)의 늙은 중, 기림사(祇林寺) 주지 대선사(大禪師) 각유(覺猷)가 임금께 아뢰었다. "낙산사의 두 보주(寶珠)는 국가의 신보(神寶)이온데 양주성(襄州城)이 함락될 때 절의 종 걸승이 성 안에 묻었다가 적병이 물러간 뒤에 파내서 감창사에게 바쳐서 명주영(溟州營)의 창고 안에 간직하여 왔습니다. 지금 명주성(溟州城)도 지킬 수가 없사온즉 마땅히 어부(御府)로 옮겨 모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임금은 이를 허락하고 야별초(夜別抄) 10명을 내어 걸승을 데리고 명주성에서 두 보주를 갖다가 내부(內府)에 안치해 두었다. 그때 사자로 간 10명에게는 각각 은 1근과 쌀 5석(石)씩을 주었다.
옛날 서라벌이 서울이었을 때 세규사(世逵寺; 지금의 興敎寺)의 장원(莊園)이 명주 날리군(捺李郡; <지리지地理志>를 상고해 보면, 명주溟州에는 날리군捺李郡이 없고 오직 날성군捺城郡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본래 날생군捺生郡이니 지금의 영월寧越이다. 또 우수주牛首州 영현領縣에 날령군捺靈郡이 있는데 본래는 날이군捺已郡이요 지금의 강주剛州이다. 우수주牛首州는 지금의 춘주春州이니 여기에 말한 날리군捺李郡은 어느 곳인지 알 수가 없다)에 있었는데, 본사(本寺)에서 중 조신(調信)을 보내서 장원(莊園)을 맡아 관리하게 했다. 조신이 장원에 와서 [태]수([太]守) 김흔공(金昕公)의 딸을 좋아해서 아주 반하게 되었다. 여러 번 낙산사 관음보살(觀音菩薩) 앞에 가서 남몰래 그 여인과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로부터 몇 해 동안에 그 여인에게는 이미 배필이 생겼다. 그는 또 불당 앞에 가서, 관음보살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생각하는 마음에 지쳐서 잠깐 잠이 들었다. 꿈 속에 갑자기 김씨(金氏) 낭자(娘子)가 기쁜 낯빛을 하고 문으로 들어와 활짝 웃으면서 말한다. "저는 일찍부터 스님을 잠깐 뵙고 알게 되어 마음 속으로 사랑해서 잠시도 잊지 못했으나 부모의 명령에 못 이겨 억지로 딴 사람에게로 시집갔다가 이제 부부가 되기를 원해서 왔습니다." 이에 조신은 매우 기뻐하여 그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녀와 40여 년간 같이 살면서 자녀 다섯을 두었다. 집은 다만 네 벽뿐이고, 좋지 못한 음식마저도 계속할 수가 없어서 마침내 꼴이 말이 아니어서 식구들을 이끌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얻어먹고 지냈다. 이렇게 10년 동안 초야(草野)로 두루 다니니 옷은 여러 조각으로 찢어져 몸도 가릴 수가 없었다. 마침 명주 해현령(蟹縣嶺)을 지나는데 15세 되는 큰아이가 갑자기 굶어죽자 통곡하면서 길가에 묻었다. 남은 네 식구를 데리고 그들 내외는 우곡현(羽曲縣; 지금의 羽縣)에 이르러 길가에 모옥(茅屋)을 짓고 살았다. 이제 내외는 늙고 병들었다. 게다가 굶주려서 일어나지도 못하니, 10세 된 계집아이가 밥을 빌어다 먹는데, 다니다가 마을 개에게 물렸다. 아픈 것을 부르짖으면서 앞에 와서 누웠으니 부모도 목이 메어 눈물을 흘렸다. 부인이 눈물을 씻더니 갑자기 말한다. "내가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나이도 젊었으며 입은 옷도 깨끗했었습니다. 한 가지 맛있는 음식도 그대와 나누어 먹었고, 옷 한 가지도 그대와 나누어 입어, 집을 나온 지 50년 동안에 정이 맺어져 친밀해졌고 사랑도 굳어졌으니 가위 두터운 인연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는 쇠약한 병이 날로 더해지고 굶주림과 추위도 날로 더해오는데 남의 집 곁방살이에 하찮은 음식조차도 빌어서 얻을 수가 없게 되어, 수많은 문전(門前)에 걸식하는 부끄러움이 산과도 같이 무겁습니다. 아이들이 추워하고 배고파해도 미처 돌봐 주지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부부간의 애정을 즐길 수가 있겠습니까. 붉은 얼굴과 예쁜 웃음도 풀 위의 이슬이요, 지초(芝草)와 난초 같은 약속도 바람에 나부끼는 버들가지입니다. 이제 그대는 내가 있어서 더 누(累)가 되고 나는 그대 때문에 더 근심이 됩니다. 가만히 옛날 기쁘던 일을 생각해 보니, 그것이 바로 근심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대와 내가 어찌해서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뭇 새가 다 함께 굶어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짝잃은 난새[난조鸞鳥]가 거울을 향하여 짝을 부르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추우면 버리고 더우면 친하는 것은 인정(人情)에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나아가고 그치는 것은 인력(人力)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운수가 있는 것입니다. 원컨대 이 말을 따라 헤어지기로 합시다." 조신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각각 아이 둘씩 데리고 장차 떠나려 하는데 여인이 말한다. "나는 고향으로 갈 테니 그대는 남쪽으로 가십시오."
이리하여 서로 작별하고 길을 떠나려 하다가 꿈에서 깨었다. 타다 남은 등잔불이 깜박거리고 밤도 이제 새려고 한다. 아침이 되었다. 수염과 머리털은 모두 희어졌고 망연(망然)히 세상 일에 뜻이 없다. 괴롭게 살아가는 것도 이미 싫어졌고 마치 한평생의 고생을 다 겪고 난 것과 같아 재물을 탐하는 마음도 얼음 녹듯이 깨끗이 없어졌다. 아예 관음보살의 상(像)을 대하기가 부끄러워지고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을 참을 길이 없다. 그는 돌아와서 꿈에 해현(蟹峴)에 묻은 아이를 파 보니 그것은 바로 석미륵(石彌勒)이다. 물로 씻어서 근처에 있는 절에 모시고 서울로 돌아가 장원(莊園)을 맡은 책임을 내놓고 사재(私財)를 내서 정토사(淨土寺)를 세워 부지런히 착한 일을 했다. 그 후에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 알 수가 없다.
논평해 말한다. "이 전기(傳記)를 읽고 나서 책을 덮고 지나간 일을 생각해 보니, 어찌 조신사(調信師)의 꿈만이 그렇겠느냐. 지금 모두가 속세의 즐거운 것만 알아 기뻐하기도 하고 서두르기도 하지만 이것은 다만 깨닫지 못한 때문이다."
이에 사(詞)를 지어 경계한다.
잠시 쾌활한 일 마음에 맞아 한가롭더니, 근심 속에 남모르게 젊은 얼굴 늙어졌네.
모름지기 황량(黃粱)이 다 익기를 기다리지 말고, 인생이 한 꿈과 같음을 깨달을 것을.
몸 닦는 것 잘못됨은 먼저 성의에 달린 것, 홀아비는 미인 꿈꾸고 도둑은 재물 꿈꾸네.
어찌 가을날 하룻밤 꿈만으로, 때때로 눈을 감아 청량(淸凉)의 세상에 이르리.
어산불영(魚山佛影)
<고기(古記)>에 이렇게 말했다. "만어산(萬魚山)은 옛날의 자성산(慈成山), 또는 아야사산(阿耶斯山; 이것은 마땅히 마야사摩耶斯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어魚를 말한 것이다)이니, 그 곁에 가라국(呵라國)이 있었다. 옛날 하늘에서 알이 바닷가로 내려와서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이가 바로 수로왕(首露王)이다. 이때 국경 안에 옥지(玉池)가 있었고 못 속에는 독룡(毒龍)이 살고 있었다. 만어산(萬魚山)에 나찰녀(羅刹女) 다섯이 있어서 독룡과 왕래하면서 사귀었다. 그런 때문에 때때로 번개가 치고 비가 내려 4년 동안 오곡(五穀)이 익지 못했다. 왕은 주문(呪文)을 외어 이것을 금하려 했으나 금하지 못하고 머리를 숙이고 부처를 청하여 설법(說法)한 뒤에 나찰녀(羅刹女)는 오계(五戒)를 받아 그 후로는 재앙이 없어졌다. 때문에 동해의 물고기와 용(龍)이 마침내 화(化)하여 골짜기 속에 가득 찬 돌이 되어서 각각 쇠북과 경쇠의 소리가 났다."(이상은 <고기古記>에 있다).
또 상고해 보면, 대정(大定) 12년 경자(庚子; 1180)는 곧 고려 명종(明宗) 11년인데 이때 비로소 만어사(萬魚寺)를 세웠다. 동량(棟梁) 보림(寶林)이 임금에게 글을 올렸는데 그 글에 말했다. "이 산 속의 기이한 자취가 북천축(北天竺) 가라국(訶羅國) 부처의 영상(影像)과 서로 같은 것이 세 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산 가까운 곳이 양주(梁州) 경계의 옥지(玉池)인데 여기에도 역시 독룡(毒龍)이 살고 있다는 것이요, 둘째는 때때로 강가에서 구름 기운이 일어나서 산마루에까지 이르는데, 그 구름 속에서 음악소리가 나는 것이요, 셋째는 부처 영상(影像)의 서북쪽에 반석(盤石)이 있어 항상 물이 괴어 없어지지 않는데, 이것은 부처가 가사(袈裟)를 빨던 곳이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이상은 모두 보림(寶林)의 말인데, 지금 친히 와서 모두 참례(參禮)하고 보니 또한 분명히 공경하고 믿을 만한 일이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골짜기 속의 돌이 전체의 3분의 2는 모두 금과 옥의 소리를 내는 것이 그 하나요, 멀리서 보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보이지 않아서 혹은 보이기도 하고 혹은 보이지 않기도 하는 것이 그 하나이다. 북천축(北天竺)의 글은 뒤에 갖추어 기록되어 있다.
가자함(可字函)의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 제7권에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이 야건가라국(耶乾訶羅國) 고선산(古仙山), 담복화림(담복花林) 독룡(毒龍)의 옆이요 청련화천(靑蓮花泉)의 북쪽인, 나찰혈(羅刹穴) 가운데에 있는 아나사산(阿那斯山) 남쪽에 이르렀다. 이때 그 구멍에는 나찰(羅刹) 다섯이 있어 이것이 여룡(女龍)으로 화하여 독룡과 교접하는데, 독룡은 다시 우박을 내리고 나찰(羅刹)은 난폭한 행동을 하니 기근(飢饉)과 역질(疫疾)이 4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왕은 놀라고 두려워하여 신기(神祇)에게 빌고 제사지냈으나 아무런 도움도 없었다. 그때 총명하고 지혜가 많은 범지(梵志)가 대왕께 아뢰었다. '가비라국(伽毗羅國) 정반왕(淨飯王)의 왕자(王子)가 지금 도(道)를 이루어 호(號)를 석가문(釋迦文)이라고 합니다.' 완은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하여 부처를 향해서 예를 올리고 말한다. '어찌해서 오늘날 불교가 이미 일어났다 하는데 이 나라에는 오지 않으십니까.' 그때 석가여래는 여러 비구(比丘)에게 영을 내려서 여섯 가지 신통력(神通力)을 얻은 자를 따르게 하고 나건가라왕(那乾訶羅王)의 불파부제(弗婆浮提)가 청하는 것을 받아 주기로 했다. 그때 세존(世尊)의 이마에서 광명(光明)이 나와서 1만이나 되는 여러 대화불(大化佛)을 만들어 그 나라로 갔다. 이때 용왕(龍王)과 나찰녀(羅刹女)는 온몸뚱이를 땅에 던져 부처에게 계(戒)를 받기를 청했다. 이에 부처는 곧 그들을 위하여 삼귀(三歸) 오계(五戒)를 설법(說法)하니 용왕은 이 설법을 다 듣고 나자 꿇어앉자 합장(合掌)하고 세존이 항상 여기에 머물러 있기를 청하여 '부처님께서 만일 이곳에 계시지 않으면 저에게 악한 마음이 생겨서 아누보리(阿누菩提)가 될 수 없습니다.' 이때 범천왕(梵天王)이 다시 와서 부처에게 예(禮)하고 청한다. '파가파(婆伽婆)께서는 앞으로 올 세상의 모든 중생(衆生)들을 위할 것이요, 이 작은 한 용(龍)만을 위하지 마시옵소서.' 이에 백천(百千)의 범왕(梵王)들도 모두 이러한 청을 했다.
이때 용왕이 칠보대(七寶臺)를 내어 여래(如來)에게 바치니 부처는 용왕에게 말한다. '이 대(臺)는 나에게 필요치 않으니 너는 지금 다만 나찰(羅刹)이 있는 석굴(石窟)을 가져다가 나에게 시주(施主)하도록 하라.' 용왕은 이 말을 듣고 기뻐했다 한다. 이때 여래가 용왕을 위로했다. '내가 네 청을 받아들여 네 굴 속에 앉아서 1,500년을 지내겠다.' 말을 마치고 부처가 몸을 솟구쳐 굴 속으로 들어가니 이내 그 돌은 밝은 거울과 같아져서, 사람들이 그 얼굴 모습을 볼 수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모든 용들이 다 나타났다. 부처는 돌 속에 있으면서 빛을 밖으로 나타내니 모든 용들은 합장하고 기뻐하면서 그곳을 떠나지 않고서도 항상 부처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이때 세존(世尊)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석벽(石壁) 속에 앉아 있었는데, 중생들이 볼 때에 멀리서 바라보면 나타나 있다가도 가까이서 보면 나타나지 않았다. 제천(諸天)이 부처의 영상(影像)에 공양하면 부처의 영상도 역시 설법(說法)했다."
또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이 바위 위를 발로 밟으니 문득 금옥(金玉)의 소리가 났다."
<고승전(高僧傳)>에는 또 이렇게 말했다. "혜원(惠遠)이 들으니 천축국(天竺國)에 부처님의 영상이 있는데 그것은 옛날 용을 위해서 남겨 놓은 부처님의 영상으로, 북천축(北天竺) 월지국(月支國) 나갈가성(那竭呵城)의 남쪽 고선인(古仙人)의 석실(石室) 속에 있었다 한다."
또 법현(法現)의 <서역전(西域傳)>에는 이렇게 말했다. "나갈국(那竭國)의 국경에 가면 나갈성(那竭城) 남쪽으로 반 유순(由旬)이 되는 곳에 석실(石室)이 있으니, 그곳은 박산(博山)의 서남쪽이며 그 속에 부처가 영상을 남겼다. 여기서 10여 보(步)를 가서 보면 부처의 진형(眞形)처럼 광명이 환하게 나타나지만 멀어질수록 점점 희미하게 보였다. 여러 나라 왕들이 화공(畵工)을 보내서 이것을 그리려 했지만 비슷하게도 그릴 수가 없었다. 나라 사람들에게 전해 오는 말로는 현겁(賢劫)의 천불(千佛)이 모두 마땅히 여기에 영상(影像)을 남길 것이니, 그 영상의 서쪽 100보쯤 되는 곳에, 부처가 이 세상에 있을 때 머리를 깎고 손톱을 깎던 곳이 있다고 한다."
성자함(星字函)의 <서역기(西域記)> 제2권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여래(如來)가 세상에 있을 때에 이 용이 소 치는 사람이 되어 왕에게 소의 젖을 올렸는데, 올리다가 잘못하여 꾸지람을 받자 속으로 분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어 돈을 주고 꽃을 사서 부처님에게 공양했다. 그리고 솔도파(솔堵婆)에게 수기(授記)하기를, '부디 악룡(惡龍)이 되어 나라를 깨뜨리고 왕을 해치게 해 주시오'하고는 석벽(石壁)에 가서 몸을 던져 죽자, 드디어 이 굴 속의 대룡왕(大龍王)이 되어 악한 마음을 일으켰다. 여래(如來)가 이것을 보고 몸을 변하여 신통력(神通力)을 가지고 여기에 오니 용은 부처를 보자 독한 마음이 드디어 그쳐져서 불살계(不殺戒)를 받고 청하기를, '부처님께서 항상 이 굴에 계시면서 저의 공양을 받아 주십시오'했다. 이에 부처가 말했다. '나는 장차 적멸(寂滅)할 것이다. 그러나 너를 위해서 내 영상을 남겨 둘 것이니 네가 만일 독하고 분한 마음이 생기거든 항상 내 영상을 바라보면 독한 마음이 없어질 것이다.' 부처는 정신을 가다듬어 홀로 석실(石室)로 들어갔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이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나타나지 않았다. 또 돌 위를 발로 차서 칠보(七寶)로 삼았다 한다." 이상은 모두 경문(經文)이니 대략 이와 같다.
해동(海東) 사람들은 이 산을 이름하여 아나사(阿那斯)라고 했으나 마땅히 마나사(摩那斯)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나사를 번역하면 어(魚)가 되니, 대개 저 북천(北天)에서 있었던 일을 취해다가 산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
대산(臺山) 오만진신(五萬眞身)
산중에 있는 고전(古傳)을 상고해 보면 이렇게 말했다. "이 산을 진성(眞聖), 즉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살던 곳이라고 이름지은 것은 자장법사(慈藏法師)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 법사가 중국 오대산(五臺山)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보고자 하여 신라 선덕왕(善德王) 대인 정관(貞觀) 10년 병신(丙申; 636, <당승전唐僧傳>에서는 12년이라고 했지만 여기에서는 <삼국본사三國本史>에 따른다)에 당(唐)나라로 들어갔다. 처음에 중국 태화지(太和池) 가의 돌부처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있는 곳에 이르러 공손히 7일 동안 기도했더니, 꿈에 갑자기 부처가 네 구(句)의 게(偈)를 주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서도 그 네 구의 글은 기억할 수가 있으나 모두가 범어(梵語)여서 그 뜻을 전혀 풀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중 하나가 붉은 비단에 금색(金色) 점이 있는 가사(袈裟) 한 벌과 부처의 바리때 하나와 부처의 머리뼈 한 조각을 가지고 법사(法師)의 곁으로 와서는, 어찌해서 수심에 싸여 있는가 하고 물으니 이에 법사는 대답한다. "꿈에 네 구의 게(偈)를 받았으나 범어로 되어 있어서 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중은 그 글을 번역하여 말했다. "가라파좌낭(呵라婆佐낭)이란 일체의 법을 깨달았다는 말이요, 달예치구야(達예치구야)란 본래의 성품은 가진 바 없다는 말이요, 낭가희가낭(낭伽희伽낭)이란 이와 같이 법성(法性)을 해석(解釋)한다는 말이요, 달예노사나(達예盧舍那)란 노사나불(盧舍那佛)을 곧 본다는 말입니다." 말을 마치자 자기가 가졌던 가사 등 물건을 법사에게 주면서 부탁했다. "이것은 본사(本師) 석가세존(釋迦世尊)이 쓰시던 도구(道具)이니 그대가 잘 보호해 가지십시오." 그는 또 말했다. "그대의 본국의 동북방 명주(溟州) 경계에 오대산(五臺山)이 있는데 1만의 문수보살이 항상 그곳에 머물러 있으니 그대는 가서 뵙도록 하시오."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법사(法師)는 두루 보살(菩薩)의 유적(遺跡)을 찾아 보고 본국으로 돌아오려 하는데 태화지(太和池)의 용이 현신(現身)해서 재를 청하고 7일 동안 공양하고 나서 법사(法師)에게 말한다. "전일에 게(偈)를 전하던 늙은 중이 바로 진짜 문수보살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또 절을 짓고 탑을 세울 것을 간곡하게 부탁한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은 별전(別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법사는 정관(貞觀) 17년(643)에 이 강원도 오대산(五臺山)에 가서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보려 했으나 3일 동안이나 날이 어둡고 그늘져서 보지 못하고 돌아갔다가 다시 원령사(元寧寺)에 살면서 비로소 문수보살을 뵈었다고 하였다. 뒤에 칡덩굴이 서려 있는 곳으로 갔는데, 지금의 정암사(淨岩寺)가 바로 이곳이다(이것도 역시 별전別傳에 실려 있다).
그 후 두타(頭陀) 신의(信義)는 범일대사(梵日大師)의 제자로서 이 산을 찾아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쉬던 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 신의가 죽은 후에는 암자도 역시 오랫 동안 헐어져 있었는데, 수다사(水多寺)의 장로(長老) 유연(有緣)이 새로 암자를 짓고 살았으니 지금의 월정사(月精寺)가 바로 이것이다.
자장법사가 신라로 돌아왔을 때 정신대왕(淨神大王)의 태자(太子) 보천(寶川)·효명(孝明) 두 형제(<국사國史>를 살펴보면 신라에는 정신淨神·보천寶川·효명孝明의 세 부자父子에 대한 명문明文이 없다. 그러나 이 기록의 하문下文에, 신룡神龍 원년에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고 했으니 신룡神龍 원년은 곧 성덕왕聖德王 즉위 4년 을사乙巳다. 왕王가의 이름은 흥광興光이요, 본명本名은 융기隆基이니 신문왕神文王의 둘째아들이다. 성덕聖德의 형 효조孝照는 이름이 이공理恭이니 혹은 홍천洪川이라고 했다. 이는 또 신문왕神文王의 아들이다. 신문왕神文王의 이름은 정명政明이요, 자는 일조日照니 정신淨神은 아마 정명政明 신문神文이 잘못 전해진 것인 듯싶다. 효명孝明은 효조孝照, 혹은 소昭의 잘못 전해진 것인 듯하다. 이 기록에 효명孝明이 즉위한 것만 말하고 신룡神龍 연간에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고 하는 것은 또한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룡神龍 연간에 절을 세운 이는 바로 성덕聖德이다)가 하서부(河西府; 지금의 명주溟州에 또한 하서군河西郡이 있으니 이것이다. 또는 하곡현河曲縣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울주蔚州라 하나 잘못이다)에 와서 세헌각간(世獻角干)의 집에서 하룻밤을 쉬었다. 이튿날 큰 고개를 지나 각각 무리 1,000명을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에 닿아 여러 날 유람하는데, 갑자기 어느날 밤에 두 형제가 속세(俗世)를 벗어날 뜻을 남몰래 약속하여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도망하여 오대산(五臺山; <고기古記>에는, 태화太和 원년元年 무신戊申 8월 초에 왕王이 산속에 숨었다고 했으나 아마 이것은 잘못인 듯싶다. 상고해 보건대, 효조孝照를 효소孝昭라고도 했다. 천수天授 3년 임진壬辰에 즉위했는데 이때 나이 16세였고, 장안長安 2년 임인壬寅에 죽었으니 나이 26세였고, 성덕왕聖德王이 이 해에 즉위했으니 나이 22세였다. 만일 태화太和 원년이 무신戊申이라면 효조孝照가 즉위한 갑진甲辰년보다 이미 45년이나 지났으니 즉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때다. 이것으로 이 글이 잘못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이것을 취하지 않는다)에 들어가니 그를 시중들던 사람들은 갈 바를 알지 못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두 태자(太子)가 산 속에 이르자 푸른 연꽃이 갑자기 땅 위에 피므로 형 태자(太子)가 여기에 암자를 짓고 머물러 살았으니 이곳을 보천암(寶川庵)이라 했다. 여기에서 동북쪽으로 600여 보(步)를 가니 북쪽 대(臺)의 남쪽 기슭에 역시 푸른 연꽃이 핀 곳이 있으므로 아우 태자(太子) 효명(孝明)이 또 암자를 짓고 살면서 각각 부지런히 업(業)을 닦았다.
어느날 형제가 함께 다섯 봉우리에 예(禮)를 하러 올라가니 동쪽 대(臺) 만월산(滿月山)에는 1만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진신(眞身)이 나타나 있고, 남쪽 대(臺) 기린산(麒麟山)에는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나타나 있고, 서쪽 대(臺) 장령산(長嶺山)에는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를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나타나 있고, 북쪽 대(臺) 상왕산(象王山)에는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백의 대아라한(大阿羅漢)이 나타나 있고, 중앙의 대(臺) 풍로산(風盧山)은 또 지령산(地靈山)이라고도 하는데,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문수보살이 나타나 있다. 그들은 이와 같은 5만 보살의 진신에게 일일이 예를 했다. 날마다 이른 아침에는 문수보살이 지금의 상원(上院)인 진여원(眞如院)에 이르러 서른 여섯 가지의 모양으로 변하여 나타났다. 혹은 부처의 얼굴 모양이 되고 어떤 때는 보주(寶珠) 모양이 되고, 또 혹은 부처의 눈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부처의 손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보탑(寶塔)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만불두(萬佛頭)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만등(萬燈)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교(金橋)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고(金鼓)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종(金鐘)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신통(神通)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루(金樓)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륜(金輪)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강저(金剛杵)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옹(金甕)의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비녀 모양으로도 된다. 또 혹은 오색 광명(五色 光明)의 모양으로, 혹은 오색 원광(圓光)의 모양으로, 혹은 길상초(吉祥草) 모양으로, 혹은 푸른 연꽃 모양으로도 되었다. 또 혹은 금전(金田)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은전(銀田)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부처의 밭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뇌전(雷電) 모양으로도 되었다. 혹은 여래(如來)가 솟아나오는 모양으로, 혹은 지신(地神)이 솟아나오는 모양으로, 혹은 금봉(金鳳)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오(金烏)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말이 사자(獅子)를 낳는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닭이 봉(鳳)을 낳는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청룡(靑龍)의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백상(白象)의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유저(遊猪) 모양으로도 변하고, 혹은 청사(靑蛇) 모양으로도 변해 보였다. 두 태자(太子)는 항상 골짜기 속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 공양하고, 밤이 되면 각각 자기 암자에서 도(道)를 닦았다.
이때 정신왕(淨神王)의 아우가 왕과 왕위(王位)를 다투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이를 폐하고, 네 사람의 장군을 보내서 산에 와서 이들 두 태자(太子)를 맞아오게 했다. 이들은 먼저 효명(孝明)의 암자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부르니 오색 구름이 7일 동안 그곳을 덮어 나라 사람들이 그 구름을 찾아 모두 모여 노부(鹵簿)를 벌여놓고 두 태자를 맞아가려 했다. 그러나 보천(寶川)은 울면서 이를 사양하므로 효명을 받들고 돌아가서 왕위에 오르게 했는데, 이가 나라를 여러 해 다스렸다(기記에는 말하기를, 왕위王位에 있은 지 20여 년이라 했다. 이는 대개 죽을 때의 나이가 26세라 한 것을 잘못 전한 것이다. 그가 왕위王位에 있었던 것은 다만 10여 년뿐이었다. 또 신문왕神文王의 아우가 왕위王位를 다투었다고 하였는데, <국사國史>에는 그런 글이 없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신룡(神龍) 원년(이것은 당唐나라 중종中宗의 복위復位한 해로서 신라 성덕왕聖德王 즉위 4년이다) 을사(乙巳) 3월 초나흘에 비로소 진여원(眞如院)을 고쳐 세웠는데 이때 성덕왕(聖德王)은 친히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산에 와서 전당(殿堂)을 세우고, 또 흙으로 문수보살의 소상(塑像)을 만들어서 당(堂)에 모셨다. 그리고 이름있는 중 영변(靈卞) 등 5명으로 하여금 <화엄경(華嚴經)>을 오래 돌려 가면서 읽게 하고 이어 화엄사(華嚴社)를 조직해 오랫동안의 공비(供費)로, 해마다 봄과 가을이면 이 산에서 가까운 주현(州縣)으로부터 창조(倉租) 100석(石)과 정유(淨油) 한 섬을 바치는 것을 정해 놓은 규칙으로 삼았으며, 진여원에서 서쪽으로 6,000보(步)쯤 되는 의니점(矣尼岾) 고이현(古伊峴) 밖에 이르기까지의 시지(柴地) 15결(結)과 밤나무밭 6결(結), 좌위(坐位) 2결(結)을 내어서 장사(莊舍)를 세웠다.
보천(寶川)은 항상 그 영동(靈洞)의 물을 길어다가 마시더니 만년(晩年)에는 육신(肉身)이 공중을 날아 유사강(流沙江) 밖 울진국(蔚珍國) 장천굴(掌天窟)에 이르러 쉬었으므로 여기에서 수구다라니경(隨求陀羅尼經)을 외는 것으로 밤낮의 과업(課業)으로 삼았다. 어느날 장천굴(掌天窟)의 굴신(窟神)이 현신(現身)하여 그에게 말했다. "내가 이 굴의 신이 된 지가 이미 2,000년이나 되었지만 오늘에야 비로소 수구다라니경의 진리(眞理)를 들었습니다." 말을 마치자 신(神)은 보살계(菩薩戒)를 받기를 청했다. 그가 계(戒)를 받고 나자 그 이튿날 굴도 또한 형체가 없어져 버렸다. 보천(寶川)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그곳에 20일 동안이나 머물고 있다가 오대산 신성굴(五臺山神聖窟)로 돌아갔다. 여기에서 또 50년 동안 참 마음을 닦았더니 도리천(도利天)의 신(神)이 삼시(三時)로 설법(說法)을 듣고, 정거천(淨居天)의 무리들은 차를 달여 올렸으며, 40명의 성인(聖人)은 10척 높이 하늘을 날면서 항상 그를 호위해 주고 그가 가졌던 지팡이는 하루에 세 번씩 소리를 내면서 방을 세 바퀴씩 돌아다니므로 이것을 쇠북과 경쇠로 삼아 수시로 수업(修業)했다. 문수보살이 혹 보천(寶川)의 이마에 물을 붓고 성도기별(成道記별)을 주기도 했다.
보천이 죽던 날, 후일에 산 속에서 행할 국가를 이롭게 할 일을 기록해 두었는데 거기에 이렇게 말했다. "이 산은 곧 백두산(白頭山)의 큰 산맥으로, 각 대(臺)는 진신이 항상 있는 곳이다. 푸른빛 방위인 동대(東臺) 북각(北角) 아래의 북대(北臺)의 남쪽 기슭 끝에는 마땅히 관음방(觀音房)을 두어서 원상(圓像)의 관음보살과 푸른 바탕에 그린 1만 관음보살상을 모시도록 하라. 그리고 복전승(福田僧) 5명은 낮에는 8권의 <금경(金經)>과 <인왕반야(仁王般若)>·천수주(千手呪)를 읽고, 밤엔 <관음경(觀音經)> 예참(禮懺)을 염송(念誦)하고, 그곳을 원통사(圓通社)라 하라. 붉은빛 방위인 남대(南臺) 남쪽 면에는 지장방(地藏房)을 두어 원상(圓像) 지장보살과 붉은 바탕에 그린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우두머리로 한 1만 지장보살을 모시라. 복전승 5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지장경(地藏經)>과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읽고, 밤엔 <점찰경(占察經)> 예참(禮懺)을 염송하고 이곳을 금강사(金剛社)라 일컬어라. 흰 빛 바위인 서대(西臺) 남쪽 면엔 미타방(彌陀房)을 두어 원상(圓像) 무량수불(無量壽佛)과 흰 바탕에 그린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를 우두머리로 한 1만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모시게 하라. 여기에는 복전승(福田僧) 5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8권의 <법화(法華)>를 읽고, 밤엔 아미타불(阿彌陀佛) 예참을 염송하고 수정사(水精社)라 일컬어라. 검은 빛 방위인 북대(北臺) 남쪽 면에는 나한당(羅漢堂)을 두어 원상(圓像) 석가불(釋迦佛)과 검은 바탕에 그린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오백나한(五百羅漢)을 모시라. 복전승 5명은 낮엔 <불보은경(佛報恩經)>과 <열반경(涅槃經)>을 읽게 하고 밤엔 <열반경(涅槃經)> 예참(禮懺)을 염송(念誦)케 하고 백련사(白蓮社)라 일컬어라. 누른 빛 방위인 중대(中臺)의 진여원(眞如院)에는 가운데에는 이상(泥像)으로 된 문수보살 부동상(不動像)을 모시고 뒷벽에는 누른 바탕에 그린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우두머리로 한 삼십륙 문수보살을 모시라. 복전승 5명은 낮에는 <화엄경>과 육백반야경(六百般若經)을 읽고, 밤에는 문수보살 예참을 염송하고 이곳을 화엄사(華嚴社)라 일컬어라. 보천암(寶川庵)을 고쳐 세워 화장사(華藏寺)라 하고 원상(圓像) 비로자나삼존(毗盧遮那三尊)과 대장경(大藏經)을 모시라. 복전승 5명은 낮에는 문장경(門藏經)을 읽고 밤에는 화엄신중(華嚴神衆)을 염송할 것이며, 매년 100일 동안 화엄회(華嚴會)를 베풀고 이곳을 법륜사(法輪社)라 일컬어라. 이 화장사(華藏寺)를 오대사(五臺社)의 본사(本寺)로 하여 굳게 지키도록 하라. 여기에는 정행 복전(淨行 福田)에게 명하여 길이 향화(香火)를 계속하게 하라. 그렇게 하면 국왕(國王)은 오래 사시고 백성은 편안할 것이며, 문무(文武)가 모두 화평하고 백곡이 풍성할 것이다. 또 하원(下院)에 문수갑사(文殊岬寺)를 배치하여 사(社)의 도회(都會)로 삼게 하라. 여기에는 복전승(福田僧) 7명으로 하여금 밤낮으로 화엄신중(華嚴神衆)의 예참(禮懺)을 행하고 위의 37명이 재(齋)에 쓰는 비용과 의복의 비용을 하서부(河西府) 도내(道內) 8주(州)의 조세(租稅)로써 공양하는 네 가지 물건의 자금에 충당할 것이다. 이렇게 대대(代代)의 임금이 잊지 않고 받들어 행한다면 다행한 일이겠다."
명주(溟州; 옛날의 해서부河西府) 오대산 보질도 태자전기(五臺山 寶叱徒 太子傳記)
신라의 정신태자(淨神太子) 보질도(寶叱徒)는 그 아우 효명태자(孝明太子)와 함께 하서부(河西府)의 세헌각간(世獻角干)의 집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큰 고개를 넘어 각각 1,000명을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에 가서 여러 날 놀다가 태화(太和) 원년 8월 5일에 형제가 함께 오대산(五臺山)으로 들어가 숨었다. 이때 그 무리 중의 시위하는 자들은 두 태자를 찾지 못하고 모두 서울로 돌아갔다. 형 되는 태자는 오대산 중대(中臺) 남쪽 밑에 있는 진여원(眞如院) 터 아래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터에 풀로 암자를 지어 살고, 아우 태자 효명(孝明)은 북대(北臺)의 남쪽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곳에 역시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다. 형제 두 사람은 부처님에게 예배하고 염불하며 행실을 닦으면서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대(臺)에 나가서 공손하게 예배했다. 푸른 빛 방위인 동쪽 대(臺)의 만월형(滿月形)으로 된 산에는 관음보살의 진신(眞身) 1만이 항상 있고, 붉은 빛 방위인 남쪽 대(臺)의 기린산(麒麟山)에는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우두머리로 한 1만 지장보살(地藏菩薩)이 항상 있고, 흰 빛 방위인 서쪽 대(臺)의 장령산(長嶺山)에는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를 우두머리로 한 1만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항상 있고, 검은 빛 방위인 북쪽 대(臺)의 상왕산(相王山)에는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00 대아라한(大阿羅漢)이 항상 있고, 누른 빛 방위인 중앙 대(臺)의 풍로산(風盧山)은 또 지로산(地爐山)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는 비로자나(毗盧遮那)를 우두머리로 한 1만 문수보살(文殊菩薩)이 항상 있다. 또 진여원(眞如院)에는 문수보살이 매일 이른 아침이면 삼십륙형(三十六形; 대산오만진신전臺山五萬眞身傳에 나온다)으로 화하여 나타났다. 두 태자는 함께 예배하고, 날마다 이른 아침이면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서 1만 진신(眞身)의 문수보살에 공양했다.
이때 정신태자(淨神太子)의 아우 부군(副君)이 신라에 있어 왕위(王位)를 다투다가 죽음을 당하니 나라 사람들이 장군 네 명을 보내서 오대산(五臺山)에 이르러 효명태자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바로 이때 오색 구름이 오대산에서부터 신라에까지 뻗쳐 7일 동안이나 밤낮으로 빛을 발했다. 나라 사람들은 그 빛을 찾아 오대산에 이르러 두 태자를 모시고 본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보질도태자(寶叱徒太子)는 울면서 돌아가지 않으려 하니 효명태자를 모시고 돌아가 왕위(王位)에 오르게 했다. 그가 왕위에 있은 지 20여 년인 신룡(神龍) 원년(705) 3월 8일에 진여원을 처음 세웠다 한다.
보질도태자는 항상 골짜기에 신령스러운 물을 마시더니 육신(肉身)이 공중을 떠서 유사강(流沙江)에 이르러 울진대국(蔚珍大國)의 장천굴(掌天窟)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다시 오대산 신성굴(神聖窟)로 돌아와 50년 동안이나 도를 닦았다고 한다. 오대산은 바로 백두산(白頭山)의 큰 줄기로서 각 대(臺)에는 진신이 항상 있다고 한다.
대산월정사(臺山月精寺) 오류성중(五類聖衆)
절 안에 전해 오는 고기(古記)를 상고하여 보면 이렇게 말했다. 자장법사(慈藏法師)는 오대산(五臺山)에 처음 이르러 진신(眞身)을 보려고 산기슭에 모옥(茅屋)을 짓고 살았으나, 7일 동안이나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묘범산(妙梵山)으로 가서 정암사(淨巖寺)를 세웠다. 그 뒤에 신효거사(信孝居士)라는 이가 있었는데 혹은 유동보살(幼童菩薩)의 화신(化身)이라고도 했는데 그의 집은 공주(公州)에 있고 효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봉양했다. 어머니는 고기가 아니면 먹지 않으므로 거사는 고기를 구하려고 산과 들을 돌아다니다가 길에서 학(鶴) 다섯 마리를 보고 활로 쏘나, 학 한 마리가 날개의 깃 한 조각을 떨어뜨리고 갔다. 거사는 그것을 집어 그것으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았더니 사람이 모두 짐승으로 보였다. 이에 고기는 얻지 못하고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서 어머니께 바쳤다.
그 후에 그는 중이 되어 자기 집을 내놓아서 절을 만들었는데 지금의 효가원(孝家院)이다. 거사는 경주(慶州) 경계로부터 하솔(河率)에 이르러 깃으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니 사람들이 모두 사람의 모양으로 보이므로 그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길에서 늙은 부인을 보고, 살 만한 곳을 물었더니 그 부인이 말했다. "서쪽 고개를 넘으면 북쪽으로 향한 골짜기가 있는데 거기가 살 만합니다."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거사는 이것이 관음보살(觀音菩薩)의 가르침인 것을 알고, 곧 성오평(省烏坪)을 지나서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처음 모옥(茅屋)을 지은 곳으로 들어가 살았다. 이윽고 중 다섯 명이 오더니 말한다. "그대가 가지고 온 가사(袈裟) 한 폭은 지금 어디 있는가." 거사가 영문을 몰라하자 중이 또 말한다. "그대가 집어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본 그 학의 깃이 바로 가사이다." 거사가 그 깃을 내주자, 중은 그 깃을 가사의 뚫어진 폭 속에 갖다 대니 서로 꼭 맞았는데, 그것은 깃이 아니고 베였다. 거사는 다섯 중과 작별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들이 다섯 성중(聖衆)의 화신(化身)임을 알았다.
이 월정사(月精寺)는 처음에 자장법사가 모옥을 지었으며, 그 다음에는 신효거사(信孝居士)가 와서 살았고, 그 다음에는 범일(梵日)의 제자인 신의두타(信義頭陀)가 와서 암자를 세우고 살았으며 뒤에 또 수다사(水多寺) 장로(長老) 유연(有緣)이 와서 살았다. 이로부터 점점 큰 절을 이루었다. 절의 다섯 성중(聖衆)과 9층으로 된 석탑(石塔)은 모두 성자(聖者)의 자취이다.
상지자(相地者)가 말했다. "나라 안의 명산(名山) 중에서도 이곳이 가장 좋은 곳이니 불법(佛法)이 길이 번창할 곳이다."
남월산(南月山; 또는 감산사甘山寺라고도 한다)
이 절은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0리 가량 되는 곳에 있다. 금당주미륵존상화광(金堂主彌勒尊像火光) 후기(後記)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개원(開元) 7년 을미(乙未; 719) 2월 15일에 중아찬(重阿飡) 전망성(全忘誠)이 그의 죽은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과 죽은 어머니 관초리(觀肖里) 부인을 위해서 공손하게 감산사(甘山寺)와 석미륵(石彌勒) 하나를 만들고, 겸하여 개원(愷元) 이찬(伊飡)과 아우 간성(懇誠) 소사(小舍)·현도사(玄度師), 누이 고파리(古巴里), 전처(前妻) 고로리(古老里), 후처(後妻) 아호리(阿好里)와, 또 서형(庶兄) 급막(及漠) 일길찬(一吉찬), 일당(一幢) 살찬(薩찬), 총민(聰敏) 대사(大舍)와 누이동생 수힐매(首힐買) 등을 위하여 이러한 착한 일을 했다. 어머니 관초리 부인이 고인(故人)이 되자 동해유우 변산야(東海攸友 邊散也)라 했다."(고인성지古人成之 이하는 글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옛 글 그대로 적어둘 뿐이다. 이 아래도 마찬가지다)
미타불화광(彌陀佛火光) 후기(後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중아찬(重阿飡) 김지전(金侍全)은 일찍이 상의(尙衣)로서 임금을 모시고 또 집사시랑(執事侍郞)으로 있다가 67세에 벼슬을 도로 바치고 집에서 한가로이 지냈다. 이때 국주(國主) 대왕(大王)과 이찬(伊飡) 개원(愷元), 죽은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 죽은 어머니, 죽은 동생, 소사(小舍) 양성(梁誠), 사문(沙門) 현도(玄度), 죽은 아내 고로리(古老里), 죽은 누이동생 고파리(古巴里), 또 아내 아호리(阿好里) 등을 위해서 감산(甘山)의 장전(莊田)을 내놓아 절을 세웠다. 또 석미타(石彌陀) 하나를 만들어 죽은 아버지 인장 일길간을 위하여 모셨는데, 그가 고인이 되자 동해유우 변산야(東海攸友 邊散也)라 했다."(제계帝系를 상고해 보면, 김개원金愷元은 태종太宗 김춘추金春秋의 여섯째 아들 개원각간愷元角干이며, 문희文熙가 낳은 이다. 성지전誠志全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의 아들이다. 동해유우東海攸友는 필시 법민왕法敏王을 동해東海에 장사지낸 것을 말한 것인 듯싶다)
천룡사(天龍寺)
동도(東都)의 남산(南山) 남쪽에 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아 있는데 세속(世俗)에서는 고위산(高位山)이라 한다. 산 남쪽에 절이 있는데 속칭(俗稱) 고사(高寺), 또는 천룡사(天龍寺)라고 한다.
<토론삼한집(討論三韓集)>에는 이렇게 말했다. "계림(鷄林)에는 두 줄기의 객수(客水)와 한 줄기의 역수(逆水)가 있는데 그 역수와 객수의 두 근원이 천재(天災)를 진압하지 못하면 천룡사(天龍寺)가 뒤집혀 무너지는 재앙이 생긴다."
속전(俗傳)에는 이렇게 말한다. "역수는 이 고을 남쪽 마등오촌(馬等烏村)의 남쪽을 흐르는 내가 이것이다. 또 이 물의 근원이 천룡사에서 시작되는데, 중국에서 온 사자(使者) 악붕귀(樂鵬龜)가 와서 보고 말하기를, '이 절을 파괴하면 이내 나라가 망할 것이다.'"
또 서로 전하는 말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 단월(檀越)에게 딸 둘이 있어서 이름을 천녀(天女)·용녀(龍女)라 하였는데, 부모가 두 딸을 위해서 절을 세우고 딸들의 이름의 첫 글자를 따서 천룡사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곳은 경지(境地)가 이상하고 불도(佛道)를 돕는 곳이었는데 신라 말년에 파괴되어 이미 오래되었다. 중생사(衆生寺)의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젖을 먹여 키운 최은함(崔殷함)의 아들 승로(承魯)가 숙(肅)을 낳고 숙(肅)이 시중(侍中) 제안(齊顔)을 낳았는데, 제안(齊顔)이 이 절을 중수(重修)하여 없어졌던 절을 일으켰다. 이에 석가만일도량(釋迦萬日道場)을 설치하고, 조정의 명을 받았으며, 다시 신서(信書)와 원문(願文)까지 절에 남겨 두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자 절을 지키는 신(神)이 되어 자못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을 많이 나타냈다.
그 신서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단월인 내사시랑 동내사문 하평장사주국(內史侍郞 同內史門 下平章事柱國) 최제안(崔齊顔)은 쓰노라. 경주(慶州) 고위산(高位山)의 천룡사가 파괴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이에 제자 최제안은 특별히 성수(聖壽)가 무강하시고 국가가 편안하고 태평하기를 원해서 전당(殿堂)·낭각(廊閣)과 방사(房舍)·주고(廚庫)를 모두 갖추어 이룩하고, 또 석조불(石造佛)과 이소불상(泥塑佛像) 몇 개를 만들어 석가만일도량을 열었다. 이미 국가를 위해서 수리하여 세웠으니 조정에서 절의 주지(住持)를 정해 보내는 것이 옳은 일이다. 하지만 이 주지를 교대할 때에는 도량(道場)의 중들이 안심하고 지낼 수가 없다. 희사(喜捨)한 토지를 가지고 사원(寺院)을 충족하게 하는 것을 보면, 팔공산(八公山)의 지장사(地藏寺)와 같은 절은 희사한 토지가 200결(結)이었고, 비슬산(毗瑟山)에 있는 도선사(道仙寺)는 20결이었고, 서경(西京) 사면에 있는 산사(山寺)들도 각기 20결씩이었으며, 이들은 모두 유직(有職)·무직(無職)을 물론하고 모름지기 계(戒)를 갖추고 재주가 높은 이를 뽑아서 절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여러 차례를 계속하여 주지로 삼아 분향(焚香)하고 도 닦는 것을 상례(常例)로 삼았다. 제자 제안(齊顔)은 이 풍습을 듣고 기뻐하여 우리 천룡사에서도 역시 절의 많은 중들 가운데서 재주와 덕이 함께 뛰어난 고승(高僧)으로 동량(棟樑)이 될 만한 사람을 뽑아서 주지로 삼아 길이 분향(焚香) 수도(修道)하게 하고자 한다. 이에 갖추어 글로 기록하여 강사(剛司)에게 맡겨 두는 것이니 이때부터 비로소 주지를 두게 되었다. 유수관(留守官)은 공문(公文)을 받아 도량의 여러 중들에게 보여 모두를 각각 알도록 할 것이다. 중희(重熙) 9년 6월 일에 관직(官職)을 갖추어 위와 같이 서명(署名)한다."
서울 동북쪽 20리 쯤 되는 암곡촌(暗谷村) 북쪽에 무장사(무藏寺)가 있으니, 이것은 신라 제38대 원성대왕(元聖大王)의 아버지 대아간(大阿干) 효양(孝讓), 즉 추봉(追封)된 명덕대왕(明德大王)의 숙부 파진찬(波珍飡)을 추모(追慕)해서 세운 것이다. 그윽한 골짜기가 몹시 험준해서 마치 깎아세운 듯하다. 그곳은 깊고 어두워 저절로 허백(虛白)이 생길 것이니, 이야말로 마음을 쉬고 도(道)를 즐길 만한 신령스러운 곳이었다. 절의 위쪽에 아미타(阿彌陀)의 고전(古殿)이 있다. 곧 소성대왕(昭成大王; 혹은 昭聖大王)의 비(妃) 계화왕후(桂花王后)가, 대왕(大王)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왕후는 근심에 차서 황황하여 어찌할 줄 모르고 지극히 슬퍼하여 피눈물을 흘리고 괴로워했다. 이에 그는 밝고 아름다운 일을 돕고 명복을 빌 것을 생각했다. 이때 서방(西方)에 아미타(阿彌陀)라는 대성(大聖)이 있어 지성으로 그를 믿으면 잘 구원하여 맞아 준다는 말을 듣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찌 나를 속이겠느냐."하고는 이에 육의(六衣)의 화려한 옷을 희사하고 구부(九府)에 저장해 두었던 재물을 다 내어 이름난 공인(工人)들을 불러서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 하나를 만들게 하고, 아울러 신중(神衆)도 만들어 모셨다.
이보다 앞서 이 절에는 늙은 중 하나가 있었는데 어느 날 꿈에, 진인(眞人)이 석탑(石塔) 동남쪽 언덕 위에 앉아서 서쪽을 향하여 대중을 위해서 설법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이곳은 반드시 불법이 머무를 곳이다."라고 생각하고 마음속에 숨겨 두고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곳은 원래 바위가 험하고 시냇물이 급하게 흐르므로 공인(工人)들은 돌아다보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좋지 못한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터를 닦을 때에는 평탄한 곳을 얻어서 집을 세울 만하여 확실히 신령스러운 터와 같으니 보는 이들은 깜짝 놀라 좋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근고(近古)에 와서 미타전(彌陀殿)은 허물어지고 절만 홀로 남아 있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태종(太宗)이 삼국(三國)을 통일한 뒤에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 속에 감추어 두었기 때문에 무장사(무藏寺)라고 한다"고 한다.
백엄사(伯嚴寺) 석탑사리(石塔舍利)
개운(開運) 3년 병오(丙午; 946) 10월 29일 강주계(康州界) 임도대감주첩(任道大監柱貼)에 이렇게 말했다. "선종(禪宗)의 백엄사(伯嚴寺)는 초팔현(草八縣; 지금의 초계草溪)에 있고, 절의 중 간유상좌(侃遊上座)는 나이 39세라 했고, 절을 처음 세운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고전(古傳)에는 이렇게 말했다. 전대(前代)인 신라 때에 북택청(北宅廳) 터를 희사해서 이 절을 세웠는데, 중간에 오래 폐지되었다가 지난 병인년(丙寅年; 1026)에 사목곡(沙木谷) 양부(陽孚) 스님이 고쳐 짓고 그 주지가 되었다가 정축년(丁丑年; 1037)에 죽었다. 을유년(乙酉年; 1045)에 희양산(曦陽山)의 긍양(兢讓) 스님이 와서 10년 동안 살다가 을미년(乙未年; 1055)에 다시 희양으로 돌아갔다. 그때 신탁(神卓) 스님이 남원(南原) 백암수(白암藪)에서 이 절에 와서 전에 있던 법대로 주지(住持)가 되었다. 또 함옹(咸雍) 원년(1065) 11월에 와서 이 절의 주지인 득오미정대사(得奧微定大師) 석수립(釋秀立)이 절의 상규(常規) 10조(條)를 정했다. 또한 새로 5층 석탑을 세우고 진신(眞身) 불사리(佛舍利) 42알을 가져다 모셨다. 또 사재(私財)로 계를 모아서, '해마다 여기에 공양할 일, 특히 이 절의 법을 지키던 경승(敬僧)이었던 엄흔(嚴欣)·백흔(伯欣)의 두 명신(明神)과 근악(近嶽) 등 3위(位) 앞에 계를 모아 공양할 일(세속에 전하기는 엄흔嚴欣·백흔伯欣 두 사람이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었기 때문에 절 이름을 백엄사伯嚴寺라 했으며, 이에 호법신護法神을 삼았다고 했다), 금당(金堂) 앞의 나무주발에 매달 초하룻날 공양미(供養米)를 갈아놓을 일' 등을 정했다. 이하 조목은 기록하지 않았다.
영취사(靈鷲寺)
절의 고기(古記)에 이렇게 말했다. "신라 진골(眞骨) 제31대왕 신문왕(神文王) 때인 영순(永淳) 2년(683; 본문本文에는 원년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에 재상 충원공(忠元公)이 장산국(장山國; 곧 동래현東萊縣이니 또한 내산국萊山國이라고도 한다) 온천에서 목욕하고 성으로 돌아올 때 굴정역(屈井驛) 동지야(桐旨野)에 이르러서 쉬었다. 여기에서 문득 보니 한 사람이 매를 놓아서 꿩을 쫓게 하자 꿩은 날아서 금악(金嶽)을 지나 어디로 갔는지 종적이 없다. 방울소리를 듣고 찾아 굴정현(屈井縣) 관청 북쪽 우물가에 이르니 매는 나무 위에 앉아 있고 꿩은 우물 속에 있는데 물이 마치 핏빛 같았다. 여기에서 꿩은 두 날개를 벌려 새끼 두 마리를 안고 있고, 매도 역시 그것을 측은하게 여겨서인지 감히 꿩을 잡지 않고 있다. 공(公)이 이것을 보고 측은히 여기고 감동하여 그 땅을 점쳐 보니 가히 절을 세울 만하다고 한다.
서울로 돌아와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어 그 현청(縣廳)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곳에 절을 세워 이름을 영취사(靈鷲寺)라고 했다."
유덕사(有德寺)
신라 대부각간(大夫角干) 최유덕(崔有德)이 자기 사삿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고 이름을 유덕사(有德寺)라고 했다. 그의 먼 자손 삼한공신(三韓功臣) 최언위(崔彦휘)가 유덕(有德)의 진영(眞影)을 여기에 걸어 모시고 또 비도 세웠다고 한다.
오대산문수사(五臺山文殊寺) 석탑기(石塔記)
뜰 가에 있는 석탑(石塔)은 대개 신라 사람이 세운 것이다. 만든 제도가 비록 순박하여 교묘하지는 못하지만 자못 영험이 있어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그 중에서 한 가지 사실을 여러 옛 노인에게서 들었는데 이러하다. "옛날에 연곡현(連谷縣) 사람이 배를 타고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탑 하나가 배를 따라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 그림자를 보자 물속 고기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난다. 이 때문에 어부(漁夫)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해서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여 그림자를 따라서 찾아가니 이 탑이었다. 이에 도끼를 들어 그 탑을 쳐부수고 갔는데, 지금 이 탑의 네 귀퉁이가 모두 떨어진 것은 이 까닭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놀라서 탄식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그 탑의 위치가 조금 동쪽으로 당겨져서 중앙에 있지 않은 것을 괴상히 여겨서 현판 하나를 쳐다보니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비구(比丘) 처현(處玄)이 일찍이 이 절에 있으면서 탑을 뜰 가운데로 옮겼더니 그 후 30여 년 동안 잠잠히 아무 영험도 없었다. 일자(日者)가 터를 구하려고 여기에 와서 탄식하기를 '이 뜰 가운데는 탑을 세울 곳이 아닌데 어찌해서 동쪽으로 옮기지 않는가'했다. 이에 여러 중들이 깨닫고 다시 옛 자리로 옮겼으니 지금 서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나는 괴이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부처의 위신(威神)이 그 자취를 나타내어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이 이같이 빠른 것을 보고서 어찌 불자(佛子)가 된 사람으로서 잠자코 말하지 않을 수 있으랴. 정풍(正豊) 원년 병자(丙子; 1156) 10월 일에 백운자(白雲子)는 쓰노라.
<당속고승전(唐續高僧傳)> 제13권에 실려 있는 말이다. 신라 황륭사(皇隆寺)의 중 원광(圓光)의 속성(俗姓)은 박씨(朴氏)이다. 본래 삼한(三韓), 즉 변한(卞韓)·진한(辰韓)·마한(馬韓)에 살았으니, 원광은 곧 진한 사람이다. 대대로 해동(海東)에 살아 조상의 풍습(風習)이 멀리 계승되었다. 그는 도량(道量)이 넓고 컸으며, 글을 즐겨 읽어 현유(玄儒)를 두루 공부하고 자사(子史)도 연구하여 글 잘한다는 이름을 삼한(三韓)에 떨쳤다. 그러나 넓고 풍부한 지식은 오히려 중국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여 드디어 친척과 벗들을 작별하고 중국으로 가기로 작정하고, 나이 25세에 배를 타고 금릉(金陵)으로 가니, 당시는 진(陳)나라 때로서 문명(文明)의 나라라는 이름이 있었다. 거기에서 전에 의심나던 일을 묻고 도(道)를 들어서 뜻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그는 장엄(莊嚴) 민공(旻公)의 제자의 강의를 들었다. 그는 본래 세상의 모든 전적(典籍)을 읽었기 때문에 이치를 연구하는 데는 신(神)이라고 했는데 불교(佛敎)의 뜻을 듣고 보니 지금까지 읽고 있던 것은 마치 썩은 지푸라기와 같았다. 명교(名敎)를 헛되이 찾은 것이 생애(生涯)에 있어 실로 두려운 일이었다. 이에 진(陳)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도법(道法)에 돌아갈 것을 청하니 칙령(勅令)을 내려 이를 허락했다. 이리하여 처음으로 중이 되어 이내 계(戒)를 갖추어 받고 두루 강의하는 곳을 찾아서 좋은 도리를 다 배웠으며, 미묘(微妙)한 말을 터득하여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성실(成實)>의 열반(涅槃)을 얻어 마음 속에 간직해 두고 삼장(三藏)과 석론(釋論)을 두루 연구해 찾았다. 끝으로 또 오(吳)나라 호구산(虎丘山)에 올라가 염정(念定)을 서로 따르고, 각관(覺觀)을 잊지 않으니 중의 무리들이 구름처럼 임천(林泉)에 모여들었다. 또 <사함(四含)>을 종합해 읽어 그 공효(功效)가 팔정(八定)에 흐르니 명선(明善)을 쉽게 익혔고 통직(筒直)에 어그러진 것이 없었다.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던 마음과 몹시도 맞았기 때문에 드디어 이곳에서 일생을 마치려는 생각이 있었다. 이에 밖의 인사(人事)를 아주 끊고 성인(聖人)의 자취를 두루 유람하며 생각을 청소(靑소)에 두고 길이 속세(俗世)를 하직했다.
이때 한 신사(信士)가 있어 산 밑에 살고 있더니, 원광(圓光)에게 나와서 강의해 주기를 청했지만 이를 굳이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끝내 맞아가려 하므로 드디어 그 뜻을 따라 처음에는 <성실론(成實論)>을 말하고 끝에는 <반야경(般若經)>을 강의했는데, 모두 해석이 뛰어나고 통철하며 가문(嘉問)을 전해 옮겨서 아름다운 말과 뜻으로 엮어 나가니, 듣는 자가 매우 기뻐하여 모든 것이 마음에 흡족했다.
이로부터 예전의 법에 따라 남을 인도하고 교화(敎化)하는 것을 임무로 삼으니, 매양 법륜(法輪)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문득 세상 사람들을 불법(佛法)으로 기울어지게 했다. 이는 비록 다른 나라에서의 통전(通傳)이지만 도에 젖어서 싫어하고 꺼리는 것이 없기 때문에, 명망(名望)이 널리 흘러서 영표(嶺表)에까지 전파되니, 가시밭을 헤치고 바랑을 지고 오는 자가 마치 고기 비늘처럼 잇달았다. 이때는 마침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천하를 다스릴 때여서 그 위엄이 남쪽 나라에까지 미쳤다.
진(陳)나라의 운수가 다해서 수(隋)나라 군사가 양도(揚都)에까지 들어가니 원광은 드디어 난병(亂兵)에게 잡혀서 장차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수의 대장(大將)이 절과 탑이 불타는 것을 바라보고 달려가 구하려 하였으니 불타는 모습은 전혀 없고 다만 원광이 탑 앞에 결박되어 장차 죽음을 당하려 하고 있다. 대장은 그 이상한 것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즉시 결박을 풀어 놓아 보냈으니, 그 위태로운 때를 당해서 영험을 나타냄이 이와 같았다.
원광은 학문이 오월(吳越)을 통달했기 때문에 문득 중국 북쪽 지방인 주(周)와 진(秦)의 문화를 보고자 하여 개황(開皇) 9년(589)에 수나라 서울에 유학(遊學)했다. 마침 불법의 초회(初會)를 당해서 섭론(攝論)이 비로소 일어나니 문언(文言)을 받들어 간직하여 미서(微緖)를 떨치고 또 혜해(慧解)를 달려 이름을 중국 서울에까지 드날렸다. 공업(功業)이 이미 이루어지자 신라로 돌아가서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본국(本國)인 신라에서는 멀리 이 소식을 듣고 수나라 임금에게 아뢰어 돌려보내 달라고 자주 청했다. 수나라 임금은 칙명을 내려 그를 후하게 대접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원광이 여러 해 만에 돌아오니 노소(老少)가 서로 기뻐하고 신라의 왕 김씨(金氏)는 그를 만나보고는 공경하면서 성인(聖人)처럼 우러렀다.
원광은 성질이 한가롭고 다정박애(多情博愛)하였으며, 말할 때는 항상 웃음을 머금고 노여운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전표(전表)나 계서(啓書) 등 왕래하는 국명(國命)이 모두 그의 머리 속에서 나왔다. 온 나라가 받들어 나라 다스리는 방법을 모두 그에게 맡기고 도(道)로 교화(敎化)하는 일을 물으니, 처지는 비록 금의환향(錦衣還鄕)한 것과는 달랐지만 실지로는 중국의 모든 것을 보고 온 것 같아서 기회를 보아 교훈을 펴서 지금까지도 그 모범(模範)을 보였다. 나아가 이미 높아지자 수레를 타고 대궐에 출입했으며, 의복(衣服)과 약(藥)과 음식은 모두 왕이 손수 마련하여 좌우의 다른 사람이 돕는 것을 허락지 않고 왕이 혼자서 복을 받으려 했으니, 그 감복하고 공경한 모습이 대개 이와 같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왕은 친히 그의 손을 잡고 위문하면서 법을 남겨 백성을 구제할 일을 물으니, 그는 상서로운 것을 말하여 그 공덕(功德)이 바다 구석에까지 미쳤다.
신라 건복(建福) 58년(640)에 그는 몸이 조금 불편한 것을 느끼더니 7일을 지나 간곡한 계(誡)를 남기고는 그가 있던 황륭사(皇隆寺) 안에 단정히 앉아서 세상을 마치니, 나이는 99세요, 때는 당(唐)나라 정관(貞觀) 4년이었다(마땅히 14년이라야 옳을 것이다). 임종(臨終)할 때 동북쪽 공중에서 음악소리가 들리고 이상한 향기가 절 안에 가득 차니 모든 중들과 속인(俗人)들은 슬퍼하면서도 한편 경사로 여기면서 그의 영감(靈感)임을 알았다. 드디어 교외(郊外)에 장사지내는데 국가에서 우의(羽儀)와 장구(葬具)를 내려 임금의 장례와 같이 했다.
그 뒤에 속인이 사태(死胎)를 낳은 일이 있었는데, 지방 속담에 말하기를, "복 있는 사람의 무덤에 묻으면 후손(後孫)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므로 남몰래 원광의 무덤 옆에 묻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벼락이 사태를 쳐서 무덤 밖으로 내던졌다.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평소에 그를 존경하지 않던 자도 모두 우러러 숭배하게 되었다.
그의 제자 원안(圓安)은 정신이 지혜롭고 바탕이 총명하며, 천성이 두루 유람하는 것을 좋아하여 그윽한 곳에서 도(道)를 구하면서 스승을 우러러 사모했다. 그는 드디어 북쪽으로 구도(九都)에 가고, 동쪽으로 불내(不耐)를 보고, 또 서쪽으로 북쪽 중국인 연(燕)과 위(魏)에 가고, 뒤에는 장안(長安)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리하여 각 지방의 풍속에 자세히 통하고 여려 가지 경륜(經綸)을 구해서 중요한 줄거리를 널리 익히고 자세한 뜻도 밝게 알았다. 그는 늦게 심학(心學)에 돌아갔는데 세속 사람보다 자취가 높았다. 처음 장안의 절에 있을 때 도(道)가 높다는 소문이 나자 특진(特進) 소우(蕭瑀)가 임금에게 청하여 남전(藍田) 땅에 지은 진량사(津梁寺)에 살게 하고 사사(四事)의 공급이 온종일 변함이 없었다.
원안이 일찍이 원광의 일을 기록했는데 이렇게 말했다. "본국(本國)의 임금이 병이 나서 의원이 치료해도 차도가 없으므로 원광을 청해 궁중에 들여 별성(別省)에 모셔 있게 하면서 매일 밤 두 시간씩 깊은 법을 말하여 참회의 계(戒)를 받으니 왕이 크게 신봉했다. 어느 날 초저녁에 왕이 원광의 머리를 보니 금빛이 찬란하고 일륜(日輪)의 상(像)이 그의 몸을 따라다니니 왕후(王后)와 궁녀(宮女)들도 모두 이것을 보았다. 이로부터 거듭 승심(勝心)을 내어 원광을 병실(病室)에 머물러 있게 했더니 오래지 않아 병이 나았다. 원광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에 정법(正法)을 널리 펴고 해마다 두 번씩 강론하여 후학(後學)을 양성하고 보시(布施)로 받은 재물은 모두 절 짓는 데 쓰게 하니, 남은 것은 다만 가사(袈裟)와 바리때뿐이었다."
또 동경(東京)의 안일호장(安逸戶長) 정효(貞孝)의 집에 있는 고본(古本) <수이전(殊異傳)>에 원광법사전(圓光法師傳)이 실려 있는데 이렇게 말했다. 법사의 속성은 설씨(薛氏)로 왕경(王京) 사람이다. 처음에 중이 되어 불법(佛法)을 배웠는데 나이 30세에 한가히 지내면서도 도를 닦으려고 생각하여 삼기산(三岐山)에 홀로 살기를 4년, 이때 중 하나가 와서 멀지 않은 곳에 따로 절을 짓고 2년 동안 살았다. 그는 사람됨이 강하고 용맹스러우며 주술(呪術)을 배우기도 좋아했다. 법사가 밤에 홀로 앉아서 불경을 외는데 갑자기 신(神)이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말했다. "그대의 수행(修行)은 참 장하기도 하오. 대체로 수행하는 자가 아무리 많아도 법대로 하는 이는 드무오. 지금 이웃에 있는 중을 보니 주술을 빨리 익히려 하지만 얻는 것이 없을 것이며, 시끄러운 소리가 오히려 남의 정념(情念)을 괴롭히기만 하오. 그가 살고 있는 곳은 내가 다니는 길을 방해하여 매양 지나다닐 때마다 미운 생각이 날 지경이오. 그러니 법사는 나를 위해서 그 사람에게 말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가도록 하오. 만일 오랫동안 거기에 머무른다면 내가 갑자기 죄를 저지를지도 모르오."
이튿날 법사가 가서 말했다. "내가 어젯밤 신의 말을 들으니 스님은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재앙이 있을 것이오." 그러나 그 중은 대답한다. "수행이 지극한 사람도 마귀(魔鬼)의 현혹을 받습니까. 법사는 어찌 호귀(狐鬼)의 말을 근심하시오." 그날 밤에 신이 또 와서 말했다. "전에 내가 한 말에 대해서 중이 무어라 대답합디까." 법사는 신이 노여워할까 두려워서 대답했다. "아직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말을 한다면 어찌 감히 듣지 않겠습니까." 신은 말한다. "내가 이미 다 들었는데 법사는 어찌해서 말을 보태서 하시오. 그대는 잠자코 내가 하는 것만 보오." 말을 마치고 가더니 밤중에 벼락과 같은 소리가 났다. 이튿날 가서 보니 산이 무너져서 중이 있던 절을 묻어 버렸다. 신이 또 와서 말한다. "법사가 보기에 어떠하오." 법사가 대답했다. "보고서 몹시 놀라고 두려웠습니다." 신이 또 말한다. "내 나이가 거의 3,000세가 되고 신술(神術)도 가장 훌륭하니 이런 일이야 조그만 일인데 무슨 놀랄 것이 있겠소. 나는 장래의 일도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온 천하의 일도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소. 이제 생각하니 법사가 오직 이곳에만 있으면 비록 자기 몸을 이롭게 하는 행동은 있을지 모르나 남을 이롭게 하는 공로는 없을 것이오. 지금 높은 이름을 드날리지 않는다면 미래에 승과(勝果)를 얻지 못할 것이오. 그러니 어찌 해서 불법을 중국에서 취하여 이 나라의 모든 혼미(昏迷)한 무리를 지도하지 않으시오." 법사가 대답했다. "중국에 가서 도를 배우는 것은 본래 나의 소원이지만 바다와 육지가 멀리 막혀 있기 때문에 스스로 가지 못할 뿐입니다." 이에 신은 중국 가는 데 필요한 일을 자세히 일러 주었다. 법사는 그 말에 의해서 중국에 갔으며, 11년을 머무르면서 삼장(三藏)에 널리 통달하고 유교(儒敎)의 학술(學術)까지도 겸해서 배웠다.
진평왕(眞平王) 22년 경신(庚申; 600, <삼국사三國史>에는 다음해인 신유년辛酉年에 왔다고 했다)에 법사는 중국에 왔던 조빙사(朝聘使)를 따라서 본국에 돌아왔다. 법사는 신에게 감사를 드리고자 하여 전에 살던 삼기산의 절에 갔다. 밤중에 신이 역시 와서 법사의 이름을 부르고 말했다. "바다와 육지의 먼 길을 어떻게 왕복하였소." "신의 큰 은혜를 입어 편안히 다녀왔습니다." "내 또한 그대에게 계(戒)를 드리겠소." 말하고는 이에 생생상제(生生相濟)의 약속을 맺었다. 법사가 또 청했다. "신의 참 얼굴을 볼 수가 있습니까." "법사가 만일 내 모양을 보고자 하거든 내일 아침에 동쪽 하늘 가를 바라보시오." 법사가 이튿날 아침에 하늘을 바라보니 큰 팔뚝이 구름을 뚫고 하늘 가에 닿아 있었다. 그날 밤에 신이 또 와서 말한다. "법사는 내 팔뚝을 보았소." "보았는데 매우 기이하고 이상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속칭(俗稱) 비장산(臂長山)이라고 했다. 신이 말했다. "비록 이 몸이 있다 하더라도 무상(無常)의 해(害)는 면할 수 없을 것이니, 나는 앞으로 얼마 가지 않아서 그 고개에 사신(捨身)할 것이니 법사는 거기에 와서 영원히 가 버리는 내 영혼을 보내 주오." 법사가 약속한 날을 기다려서 가 보니, 늙은 여우 한 마리가 있는데, 검기가 옻칠한 것과 같고 숨조차 쉬지 못하고 헐떡거리기만 하다가 마침내 죽었다.
법사가 처음 중국에서 돌아왔을 때 신라에서는 임금과 신하들이 그를 존경하여 스승으로 삼으니 법사는 항상 대승경전(大乘經典)을 강의했다. 이때 고구려와 백제가 항상 변방을 침범하니 왕은 몹시 이를 걱정하여 수(隋)나라(마땅히 당唐나라라고 해야 할 것이다)에 군사를 청하고자 법사를 청하여 걸병표(乞兵表)를 짓게 했다. 수나라 황제가 그 글을 보더니 30만 군사를 내어 친히 고구려를 쳤다. 이로부터 법사가 유술(儒術)까지도 두루 통달한 것을 세상 사람은 알았다. 나이 84세에 세상을 떠나니 명활성(明活城) 서쪽에 장사지냈다.
또 <삼국사(三國史)> 열전(列傳)에 이런 기록이 있다. 어진 선비 귀산(貴山)이란 자는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마을의 추항(추項)과 친구가 되어 두 사람은 서로 말했다. "우리들이 사군자(士君子)들과 함께 사귀려면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여 처신하지 않는다면, 필경 욕 당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어진 사람을 찾아가서 도를 묻지 않겠는가." 이때 원광법사가 수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가슬갑(嘉瑟岬; 혹은 가서加西, 또는 가서嘉栖라고 하는데, 모두 방언方言이다. 갑岬은 속언俗言으로 고시古尸(곳)이라고 한다. 때문에 이것을 고시사古尸寺(곳절)라고 하니 갑사岬寺라는 것과 같다. 지금 운문사雲門寺 동쪽 9,000보步쯤 되는 곳에 가서현加西峴이 있는데, 혹은 가슬현嘉瑟峴이라고 하며, 고개의 북쪽 골짜기에 절터가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에 잠시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은 그에게 나아가 아뢰었다. "저희들 시속 선비는 어리석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한 말씀을 주시어 평생의 경계가 되게 해 주십시오." 원광이 말했다. "불교에는 보살계(菩薩戒)가 있으니, 1은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는 일이요, 2는 부모를 효도로 섬기는 일이요, 3은 벗을 신의(信義)로 사귀는 일이요, 4는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서지 않는 일이요, 5는 산 물건을 죽이는 데 가려서 한다는 일이다. 너희들은 이 일을 실행하여 소홀히 하지 말라." 귀산 등이 말했다. "다른 일은 모두 알아듣겠습니다마는, 말씀하신 바 '산 물건을 죽이는 데 가려서 한다'는 것은 아직 터득할 수가 없습니다." 원광이 말했다. "6재일(齋日)과 봄·여름에는 죽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은 시기를 가리는 것이다. 말·소·개 등 가축을 죽이지 않고 고기가 한 점도 되지 못하는 세물(細物)을 죽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은 물건을 가리는 것이다. 또한 죽일 수 있는 것도 또한 쓸 만큼만 하고 많이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속의 좋은 경계인 것이다." 귀산 등이 말했다. "지금부터 이 말을 받들어 실천하여 감히 어기지 않겠습니다." 그 후에 두 사람은 전쟁에 나가서 모두 국가에 큰 공을 세웠다.
또 건복(建福) 30년 계유(癸酉; 613, 즉 진평왕眞平王 즉위 35년) 가을에 수나라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오자 황룡사(黃龍寺)에 백좌도량(百座道場)을 열고 여러 고승(高僧)들을 청해다가 불경을 강의하니 원광이 제일 윗자리에 있었다.
논평해 말했다. "원종(原宗)이 불법을 일으킨 후로 진량(津梁)이 비로소 설치되었으나 당오(堂奧)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때문에 마땅히 귀계멸참(歸戒滅懺)의 법으로 어리석고 어두운 중생들을 깨우쳐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 때문에 원광은 살던 가서갑(嘉西岬)에 점찰보(占察寶)를 두어 이것을 상규(常規)로 삼았다. 이때 시주(施主)하던 여승(女僧) 하나가 점찰보에 밭을 바쳤는데, 지금 동평군(東平郡)의 밭 100결(結)이 바로 이것이며, 옛날의 문서가 아직도 있다.
원광은 천성이 허정(虛靜)한 것을 좋아하여, 말할 때는 언제나 웃음을 머금었고 얼굴에 노여워하는 빛이 없었다. 나이가 이미 많아지자 수레를 타고 대궐에 출입했는데, 그 당시 덕의(德義)가 있는 여러 어진 선비들도 그의 위에 뛰어날 사람이 없었으며, 그의 풍부한 문장은 한 나라를 기울였다. 나이 80여 세로 정관(貞觀) 연간에 세상을 떠나니 부도(浮圖)가 삼기산(三岐山) 금곡사(金谷寺; 지금의 안강安康 서남쪽 골짜기 즉 명활성明活城 서쪽에 있다)에 있다.
당전(唐傳)에서는 황륭사(皇隆寺)에서 입적(入寂)하였다고 했는데 그 장소를 자세히 알 수가 없으나, 이것은 황룡사(黃龍寺)의 잘못인 듯 싶으니, 마치 분황사(芬皇寺)를 왕분사(王芬寺)라고 한 예와 같다. 위와 같이 당전과 향전(香奠)의 두 전기(傳記)에 있는 글에 따르면, 그의 성은 박(朴)과 설(薛)로 되었고, 출가(出家)한 것도 동쪽과 서쪽으로 되어 있어 마치 두 사람 같으니, 감히 자세하고 명확하게 결정지을 수가 없다. 그래서 여기에는 두 전기를 모두 적어 둔다. 그러나 그 두 전기에 모두 작갑(鵲岬)·이목(璃目)과 운문(雲門)의 사실이 없는데, 향인(鄕人) 김척명(金陟明)이 항간(巷間)의 말을 가지고 잘못 글을 윤색해서 <원광법사전(圓光法師傳)>을 지어 함부로 운문사(雲門寺)의 개조(開祖)인 보양(寶壤) 스님의 사적과 뒤섞어서 하나의 전기를 만들어 놓았다. 뒤에 <해동승전(海東僧傳)>을 편찬한 자도 잘못된 것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기록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많이 현혹되었다. 그래서 이것을 분별하고자 한 자(字)도 가감(加減)하지 않고 두 전기의 글을 자세히 적어 두는 것이다.
진(陳)·수(隋) 때에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바다를 건너가서 도를 배운 자는 드물었으며, 혹시 있다고 해도 그 이름을 크게 떨치지는 못했다. 원광 뒤로 계속해서 중국으로 배우러 간 사람이 끊이지 않았으니 원광이 길을 열었다 하겠다.
찬(讚)해 말한다.
바다 건너 한(漢)나라 땅을 처음으로 밟고,
몇 사람이나 오가면서 밝은 덕을 배웠던가.
옛날의 자취는 오직 푸른 산만이 남았지만,
금곡(金谷)과 가서(嘉西)의 일은 들을 수 있네.
보양이목(寶壤梨木)
중 보양전(寶壤傳)에는 그의 향리(鄕里)와 씨족(氏族)은 실려 있지 않으나 삼가 청도군청(淸道郡廳)의 문적(文籍)을 상고해 보면 이렇게 씌어 있다. "천복(天福) 8년 계유(癸酉; 943. 태조太祖 즉위 제26년) 정월 일의 청도군 계리(界里) 심사(審使) 순영(順英) 대내말수문(大乃末水文) 등의 주첩(柱貼) 문공(文公)을 보면, 운문산선원(雲門山禪院) 장생(長生)은 남쪽은 아니점(阿尼岾)이요, 동쪽은 가서현(嘉西峴)이라고 했다. 절의 삼강(三剛)의 전주인(典主人)은 보양화상(寶壤和尙)이요, 원주(院主)는 현회장로(玄會長老), 정좌(貞座)는 현량상좌(玄兩上座), 직세(直歲)는 신원선사(信元禪師; 위 공문公文은 청도군淸道郡의 도전장부都田帳簿에 의한 것)다."했다.
또 개운(開運) 3년 병진(丙辰(午); 946)의 운문산선원(雲門山禪院) 장생표탑(長生標塔)에 관계되는 공문(公文) 한 통에 보면, "장생(長生)이 11개이니 아니점·가서현·무현(畝峴)·서북매현(西北買峴; 혹은 면지촌面知村)·북저족문(北猪足門) 등이다."했다.
또 경인년(庚寅年)의 진양부첩(晉陽府貼)에는, "오도안찰사(五道按察使)가 각 도의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사원(寺院)이 처음 세워진 연월(年月)과 그 모양을 자세히 조사해서 장부를 만들 때, 차사원(差使員) 동경장서기(東京掌書記) 이선(李선)이 자세히 조사하여 적었다."고 했다.
정풍(正豊) 6년 신사(辛巳; 1161, 이것은 대금大金의 연호이니 본조本朝 의종毅宗 즉위 16년임) 9월의 군중고적비보기(郡中古籍裨補記)에 따르면 이렇다. 청도군 전부호장(前副戶長) 어모부위(禦侮副尉) 이칙정(李則禎)의 집에 있는 옛 사람들의 소식 및 우리말로 전해 오는 기록에는, 치사(致仕)한 상호장(上戶長) 김양신(金亮辛), 치사한 호장 민육(旻育), 호장 동정(同正) 윤응(尹應), 전기인(前其人) 진기(珍奇) 등과 당시 상호장 용성(用成) 등의 말이 적혀 있다. 그 때 태수(太守) 이사로(李思老)와 호장 김양신은 나이 89세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나이 70세 이상이었다. 다만 용성만이 나이 60세 이상(운운云云이라 쓴 것은 이 다음부터는 쓰지 않는다)이었다. 신라 시대 이래로 이 청도군의 절과 작갑사(鵲岬寺)와 그밖의 크고 작은 사원(寺院)인 대작갑(大鵲岬)·소작갑(小鵲岬)·소보갑(所寶岬)·천문갑(天門岬)·가서갑(嘉西岬) 등 다섯 갑사(岬寺)가 모두 후삼한(後三韓)의 난리에 없어져서 다섯 갑사(岬寺)의 기둥을 대작갑사(大鵲岬寺)에 모아 두었다.
조사(祖師) 지식(知識; 윗글에는 보양寶壤이라 했다)이 중국에서 불법을 전해 받아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서해 가운데에 이르니, 용이 그를 용궁으로 맞아들여 불경을 외게 하더니 금빛 비단의 가사(袈裟) 한 벌을 주고, 겸하여 아들 이목(璃目)을 그에게 주면서 조사를 모시고 가게 했다. 이때 용왕은 부탁한다. "지금 삼국(三國)이 시끄러워서 아직은 불법에 귀의(歸依)하는 군주(君主)가 없지만, 만일 내 아들과 함께 본국(本國)으로 돌아가서 작갑(鵲岬)에 절을 짓고 살면 능히 적병을 피할 수 있을 것이오. 또한 몇 해가 안 되어서 반드시 불법을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서 삼국을 평정할 것이오." 말을 마치자 서로 작별하고 돌아와서 이 골짜기에 이르니 갑자기 늙은 중이 스스로 원광(圓光)이라 하면서 도장이 든 궤를 안고 나와서 조사에게 주더니 이내 없어졌다(상고하건대 원광圓光은 진陳의 말년에 중국에 들어갔다가 수隋의 개황開皇 연간에 본국으로 돌아온 사람이다. 또 가서갑嘉西岬에 살다가 황륭사皇隆寺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햇수를 계산하면 청태淸泰 초년까지는 무려 300년이나 된다. 이제 여러 갑사岬寺가 모두 없어진 것을 슬퍼하고 보양寶壤이 와서 장차 절이 이룩될 것을 보고 기뻐하여 여기에 왔을 것이다).
이에 보양법사(寶壤法師)는 장차 허물어진 절을 일으키려 하여 북쪽 고개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뜰에 5층의 누런 탑이 있었다. 그러나 내려가서 찾아보면 아무런 자취도 없으므로 다시 올라가서 바라보니 까치가 땅을 쪼고 있다. 법사는 해룡(海龍)이 작갑(鵲岬)이라는 말이 생각나서 그 곳을 찾아가서 파보니 과연 예전 벽돌이 수없이 있었다. 이것을 모아 쌓아 올려 탑을 이루니 남은 벽돌이 하나도 없으므로 이곳이 전대(前代)의 절터임을 알았다. 여기에 절을 세우고 살면서 절 이름을 작갑사(鵲岬寺)라고 했다. 그런 지 얼마 안 되어 고려 태조(太祖)가 삼국을 통일하고 보양법사가 이곳에 절을 짓고 산다는 말을 듣고 다섯 갑(岬)의 밭 500결(結)을 합해서 이 절에 바쳤다. 또 청태(淸泰) 4년 정유(丁酉; 937)에는 절 이름을 운문선사(雲門禪寺)라 내리고, 가사(袈裟)의 신령스러운 음덕(蔭德)을 받들게 했다. 이때 이목(璃目)은 항상 절 곁에 있는 작은 못에 살면서 법화(法化)를 음으로 돕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에 몹시 가물어서 밭에 채소가 모두 타고 마르므로 보양(寶壤)이 이목을 시켜 비를 내리게 하니 온 고을이 흡족하였다. 이에 천제(天帝)가 그를 죽이려 하자 이목이 보양에게 위급함을 고하니 법사가 침상 밑에 숨겨 주었다. 이윽고 천사(天使)가 뜰에 와서 이목을 내놓으라고 청하자 법사는 뜰앞의 배나무[梨木]를 가리키니 천사는 거기에 벼락을 치고 하늘로 올라갔다. 배나무가 부러졌으므로 용이 쓰다듬으니 곧 되살아났다. 그 나무는 근년에 와서 땅에 쓰러졌는데 어떤 사람이 망치를 만들어서 선법당(善法堂)과 식당(食堂)에 안치(安置)하였다. 그 망치 자루에는 명(銘)이 있다.
처음 법사가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먼저 추화군(推火郡) 봉성사(奉聖寺)에 머물렀는데, 이때 마침 고려 태조가 동쪽을 정벌해서 청도(淸道)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산적들이 견성(犬城; 산봉우리가 물을 굽어보고 뾰족하게 섰는데 지금 민간民間에서 이것을 미워하여 이름을 견성犬城이라고 고쳤다 한다)에 모여서 교만을 부리고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가 산 밑에 이르러 법사에게 산적들을 쉽게 물리칠 방법을 물으니 법사는 대답했다. "대체로 개란 짐승은 밤만을 맡았고 낮은 맡지 않았으며, 앞만 지키고 그 뒤는 잊고 있습니다. 하오니 마땅히 대낮에 그 북쪽으로 쳐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태조가 그 말을 좇으니 적은 과연 패해서 항복했다. 태조는 법사의 그 신통한 꾀를 가상히 여겨 매년 가까운 고을의 조(租) 50석을 주어 향화(香火)를 받들게 했다. 이에 이 절에 이성(二聖)의 진용(眞容)을 모시고 절 이름을 봉성사(奉聖寺)라고 했다. 뒤에 법사는 진용을 작갑사(鵲岬寺)로 옮겨서 크게 절을 세우고 세상을 마쳤다.
법사의 행장은 고전(古傳)에는 실려 있지 않고 다만 민간에서 이렇게 말한다. "석굴사(石굴寺)의 비허사(備虛師; 혹은 비허毗虛)와 형제가 되어 봉성(奉聖)·석굴(石굴)·운문(雲門) 등 세 절이 연접된 산봉우리에 늘어서 있었기 때문에 서로 왕래했다."
후세 사람들이 <신라이전(新羅異傳)>을 고쳐 지으면서 작갑사의 탑과 이목(璃目)의 사실을 원광(圓光)의 전기 속에 잘못 기록해 넣었다. 또 견성(犬城)의 사실을 비허사(備虛師)의 전기에 넣은 것도 이미 잘못인 데다가 더구나 또 <해동승전(海東僧傳)>을 지은 자도 여기에 따라서 글을 윤색하고 보양(寶壤)의 전기가 없어 뒷사람들이 의심내고 잘못 알게 했으니 그 얼마나 무망(誣妄)한 짓인가.
양지사석(良志使錫)
중 양지(良志)는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신라 선덕왕(宣德王) 때에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석장(錫杖) 끝에 포대(布帶) 하나를 걸어 두기만 하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 시주(施主)의 집에 가서 흔들리면서 소리를 낸다. 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齋)에 쓸 비용을 여기에 넣는데, 포대가 차면 날아서 돌아온다. 때문에 그가 있던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했다.
양지의 신기하고 이상하여 남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는 또 한편으로 여러 가지 기예(技藝)에도 통달해서 신묘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또 필찰(筆札)에도 능하여 영묘사(靈廟寺)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天王像), 또 전탑(殿塔)의 기와와 천왕사(天王寺) 탑(塔)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은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靈廟寺)와 법림사(法林寺)의 현판을 썼고, 또 일찍이 벽돌을 새겨서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三千佛)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셔 두고 공경했다. 그가 영묘사(靈廟寺)의 장육상(丈六像)을 만들 때에는 입정(入定)해서 정수(正受)의 태도로 주물러서 만드니, 온 성 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해 주었다. 그때 부른 풍요(風謠)는 이러하다.
왔도다. 왔도다. 인생은 서러워라.
서러워라 우리들은, 공덕(功德) 닦으러 왔네.
지금까지도 시골 사람들이 방아를 찧을 때나 다른 일을 할 때에는 모두 이 노래를 부르는데 그것은 대개 이때 시작된 것이다. 장육상(丈六像)을 처음 만들 때에 든 비용은 곡식 2만 3,700석이었다(혹은 이 비용이 금빛을 칠할 때 든 것이라고도 한다).
논평해 말한다. "양지 스님은 가위 재주가 온전하고 덕이 충만(充滿)했다. 그는 여러 방면의 대가(大家)로서 하찮은 재주만 드러내고 자기 실력은 숨긴 것이라 할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재(齋)가 파하여 법당 앞에 석장(錫杖)은 한가한데,
향로에 손질하고 혼자서 단향(檀香) 피우네.
남은 불경 다 읽자 더 할 일 없으니
소상(塑像) 만들어 합장하고 쳐다보네.
귀축제사(歸竺諸師)
광함(廣函)의 <구법고승전(求法高僧傳)>에 이렇게 말했다. 중 아리나(阿離那; 나那는 혹은 야耶) 발마(跋摩; 마摩는 혹은 낭郞)는 신라 사람이다. 처음에 정교(正敎)를 구하려고 일찍이 중국에 들어갔는데, 성인(聖人)의 자취를 두루 찾아볼 마음이 더했다. 이에 정관(貞觀) 연간(627-649)에 당(唐)나라 서울인 장안(長安)을 떠나 오천(五天)에 갔다. 나란타사(那蘭타寺)에 머물러 율장(律藏)과 논장(論藏)을 많이 읽고 패협(貝莢)에 베껴 썼다. 고국(故國)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홀연히 그 절에서 세상을 떠나니, 그의 나이 70여 세였다.
그의 뒤를 이어 혜업(惠業)·현태(玄泰)·구본(求本)·현각(玄恪)·혜륜(惠輪)·현유(玄遊)와 그 밖에 또 이름을 알지 못하는 두 법사가 있었는데, 모두 자기 자신을 잊고 불법(佛法)을 따라 관화(觀化)를 보기 위해서 중천축(中天竺)에 갔었다. 그러나 혹은 중도에서 일찍 죽고 혹은 살아남아서 그곳 절에 있는 이도 있으나 마침내는 다시 계귀(계貴)와 당나라에 돌아오지 못하고 그 중에 오직 현태 스님만이 당나라에 돌아왔으나 이도 역시 어디서 죽었는지 알 수 없다.
천축국(天竺國) 사람들이 해동(海東)을 불러 "구구타예설라(矩矩타예說羅)"라 하는데, 이 구구타란 닭[계]를 말함이요, 예설라는 귀(貴)를 말한 것이다. 그곳에서 이렇게 서로 전해 말했다. "그 나라에서는 계신(계神)을 받들어 존경하는 때문에 그 깃을 꽂아서 장식한다."
찬(讚)해 말한다.
천축(天竺)의 머나먼 길 만첩 산인데,
가련타, 힘써 올라가는 유사(遊士)들이여.
몇 번이나 저 달은 외로운 배를 보냈는가,
한 사람도 구름따라 돌아오는 것 보지 못했네.
이혜동진(二惠同塵)
중 혜숙(惠宿)이 화랑(花郞)인 호세랑(好世郞)의 무리 중에서 자취를 감추자 호세랑은 이미 황권(黃卷)에서 이름을 지워 버리니 혜숙은 적선촌(赤善村; 지금 안강현安康縣에 적곡촌赤谷村이 있다)에 숨어서 산 지가 20여 년이나 되었다. 그때 국선(國仙) 구참공(瞿참公)이 일찍이 적선촌 들에 가서 하루 동안 사냥을 하자 혜숙이 길가에 나가서 말고삐를 잡고 청했다. "용승(庸僧)도 또한 따라가기를 원하옵는데 어떻겠습니까." 공이 허락하자, 그는 이리저리 뛰고 달려서 옷을 벗어부치고 서로 앞을 다투니 공이 보고 기뻐했다. 앉아 쉬면서 피로를 풀고 고기를 굽고 삶아서 서로 먹기를 권하는데 혜숙도 같이 먹으면서 조금도 미워하는 빛이 없더니, 이윽고 공의 앞에 나가서 말했다. "지금 맛있고 싱싱한 고기가 여기 있으니 좀더 드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공이 좋다고 말하니, 혜숙이 사람을 물리치고 자기 다리 살을 베어서 소반에 올려 놓아 바치니 옷에 붉은 피가 줄줄 흘렀다. 공이 깜짝 놀라 말했다.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느냐." 혜숙이 말했다. "처음에 제가 생각하기에 공은 어진 사람이어서 능히 자기 몸을 미루어 물건에까지 미치리라 하여 따라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공이 좋아하는 것을 살펴보니, 오직 죽이는 것만을 몹시 즐겨해서 짐승을 죽여 자기 몸만 봉양할 뿐이니 어찌 어진 사람이나 군자가 할 일이겠습니까. 이는 우리의 무리가 아닙니다." 말하고 드디어 옷을 뿌리치고 가버렸다. 공이 크게 부끄러워하여 혜숙이 먹던 것을 보니 소반 위의 고기가 하나도 없어지지 않았다. 공이 몹시 이상히 여겨 돌아와 조정에 아뢰니 진평왕(眞平王)이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그를 맞아오게 하니 혜숙이 여자의 침상에 누워서 자는 것을 보고 중사(中使)는 이것을 더럽게 여겨 그대로 돌아갔다. 그런데 7, 8리쯤 가다가 도중에서 혜숙을 만났다. 사자는 그가 어디서 오느냐고 물으니 혜숙이 대답한다. "성 안에 있는 시주(施主)집에 가서, 칠일재(七日齋)를 마치고 오는 길이오." 중사가 그 말을 왕에게 아뢰니 또 사람을 보내어서 그 시주집을 조사해 보니 그 일이 과연 사실이었다. 얼마 안 되어 혜숙이 갑자기 죽자 마을 사람들이 이현(耳峴; 혹은 형현형峴이라고도 함) 동쪽에 장사지냈는데, 그때 마을 사람으로서 이현 서쪽에서 오는 이가 있었다. 그는 도중에서 혜숙을 만나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곳에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다른 지방으로 유람하러 간다"하여 서로 인사하고 헤어졌는데, 반 리(半里)쯤 가다가 구름을 타고 가 버렸다. 그 사람이 고개 동쪽에 이르러 장사지내던 사람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 그 까닭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무덤을 헤쳐 보니 다만 짚신 한 짝이 있을 뿐이었다. 지금 안강현(安康縣) 북쪽에 혜숙사(惠宿寺)라는 절이 있으니 곧 그가 살던 곳이라 하며, 또한 부도(浮圖)도 있다.
중 혜공(惠空)은 천진공(天眞公)의 집에서 품팔이하던 노파의 아들로, 어릴 때의 이름은 우조(憂助; 이것은 대개 방언方言이다)였다. 공이 일찍이 종기를 앓아서 거의 죽게 되니 문병(問病)하는 사람이 거리를 메웠다. 이때 우조의 나이 7세였는데 그 어머니에게 말했다. "집에 무슨 일이 있기에 이렇게 손님이 많습니까." 그 어머니가 말했다. "가공(家公)이 나쁜 병이 있어서 장차 죽게 되었는데 너는 어찌해서 알지 못하느냐." 우조는 말했다. "제가 그 병을 고치겠습니다." 어머니가 그 말을 이상히 여겨 공에게 알리니 공은 그를 불러오게 했다. 그는 침상 밑에 앉아서 말 한 마디도 않았는데 얼마 안 되어 공의 종기가 터지게 되었다. 공은 우연한 일이라 하여 별로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
그가 자라자 공을 위해서 매를 길렀으니 이것이 공의 마음에 아주 들었다. 처음에 공의 아우로서 벼슬을 얻어 지방으로 부임하는 이가 있었는데 공이 골라 준 좋은 매를 얻어 가지고 임지(任地)로 갔다. 어느날 밤 공이 갑자기 그 매 생각이 나서 다음 날 새벽이면 우조를 보내어 그 매를 가져오게 하리라 했다. 우조는 미리 이것을 알고 금시에 그 매를 가져다가 새벽녘에 공에게 바쳤다. 공이 크게 놀라 깨닫고는 그제야 전일에 종기를 고치던 일이 모두 측량하기 어려운 일임을 알고 말했다. "나는 지극한 성인(聖人)이 내 집에 와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미친 말과 예의에 벗어난 짓으로 욕을 보였으니 그 죄를 어찌 씻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부터는 부디 도사(導師)가 되어 나를 인도해 주십시오." 공은 말을 마치자 내려가서 절을 했다.
우조는 신령스럽고 이상한 것이 이미 나타났기 때문에 드디어 중이 되어 이름을 바꾸어 혜공(惠空)이라 했다. 그는 항상 조그만 절에 살면서 매양 미친 듯이 크게 술에 취해서 삼태기를 지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니 부궤화상(負궤和尙)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가 있는 절을 부개사(夫蓋寺)라고 했는데, 이 말은 우리말로 삼태기이다. 매양 절의 우물 속에 들어가면 몇 달씩 나오지 않으므로 스님의 이름을 따서 우물 이름을 지었다. 또 우물 속에서 나올 때면 푸른 옷을 입은 신동(神童)이 먼저 솟아나왔기 때문에 절의 중들은 이것으로 조짐을 삼았으며, 우물에서 나와서 옷은 젖지 않았다. 만년에는 항사사(恒沙寺; 지금의 영일현迎日縣 오어사吾魚寺다. 세상에서는 항하사恒河沙처럼 많은 사람이 출세出世했기 때문에 항사동恒沙洞이라 한다고 했다)에 가 있었다. 이때 원효(元曉)가 여러 가지 불경(佛經)의 소(疏)를 찬술(撰述)하고 있었는데, 언제나 혜공 스님에게 가서 묻고 혹은 서로 희롱도 했다. 어느날 혜공과 원효가 시내를 따라 가면서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먹다가 돌 위에서 대변을 보았다. 혜공이 그를 가리키면서 희롱의 말을 했다. "그대가 눈 똥은 내가 잡은 물고기일 게요."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절을 오어사(吾魚寺)라 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원효대사의 말이라 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세상에서는 그 시내를 잘못 불러 모의천(芼矣川)이라고 한다.
구참공(瞿참公)이 어느날 산에 놀러 갔다가 혜공이 산길에 죽어 쓰러져서, 그 시체가 부어 터지고 살이 썩어 구더기가 난 것을 보고 오랫동안 슬피 탄식하고는 말고삐를 돌려 성으로 들어오니 혜공은 술에 몹시 취해서 시장 안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있는 것을 보았다. 또 어느날은 풀로 새끼를 꼬아 가지고 영묘사(靈廟寺)에 들어가서 금당(金堂)과 좌우에 있는 경루(經樓)와 남문(南門)의 낭무(廊무)를 묶어 놓고 강사(剛司)에게 말했다. "이 새끼를 3일 후에 풀도록 하라." 강사가 이상히 여겨 그 말에 좇으니, 과연 3일 만에 선덕왕(宣德王)이 행차하여 절에 왔는데, 지귀(志鬼)의 심화(心火)가 나와서 그 탑을 불태웠지만 오직 새끼로 맨 곳만은 화재를 면할 수 있었다. 또 신인(神印)의 조사(祖師) 명랑(明朗)이 새로 금강사(金剛寺)를 세우고 낙성회를 열었는데, 고승(高僧)들이 다 모였으나 오직 혜공만은 오지 않았다. 이에 명랑이 향을 피우고 정성껏 기도했더니 조금 후에 공이 왔다. 이때 큰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도 공의 옷은 젖지 않았고 발에 진흙도 묻지 않았다. 혜공이 명랑에게 말했다. "그대가 은근히 초청하기에 왔소이다." 이와 같이 그에게는 신령스러운 자취가 자못 많았다. 죽을 때는 공중(空中)에 떠서 세상을 마쳤는데 사리(舍利)는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는 일찍이 <조론(肇論)>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옛날에 지은 글이다."하였으니 이것으로써 혜공(惠空)이 승조(僧肇)의 후신(後身)임을 알겠다.
찬(讚)해 말한다.
풀밭에서 사냥하고 침상 위에 누웠으며,
술집에서 미친 노래, 우물 속에서 잠을 잤네.
척리(隻履)와 부공(浮空)은 어디로 갔는가,
한 쌍의 보배로운 화중련(火中蓮)일세.
자장정률(慈藏定律)
대덕(大德) 자장(慈藏)은 김씨(金氏)이니 본래 진한(辰韓)의 진골(眞骨) 소판(蘇判; 삼급三級의 벼슬 이름) 무림(茂林)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맑은 요직을 지냈으나 뒤를 계승할 아들이 없으므로 삼보(三寶)에 마음을 돌려 천부관음(千部觀音)에게 아들 하나 낳기를 바라고 이렇게 빌었다. "만일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이를 내놓아서 법해(法海)의 진량(津梁)으로 삼겠습니다." 갑자기 그 어머니의 꿈에 별 하나가 떨어져서 품 안으로 들어오더니 이내 태기가 있어서 아이 하나를 낳았는데 석존(釋尊)과 같은 날이므로 이름을 선종랑(善宗郞)이라 했다. 그는 정신과 뜻이 맑고 슬기로웠으며 문사(文思)가 날로 풍부하고 속세의 취미에 물들지 않았다. 일찍이 두 부모를 여의고 속세의 시끄러움을 싫어해서 처자를 버리고, 자기의 전원(田園)을 내어 원녕사(元寧寺)를 삼았다. 혼자서 그윽하고 험한 곳에 거처하면서 이리나 범도 피하지 않았다. 고골관(枯骨觀)을 닦는데 조금 피곤한 일이 있으면 작은 집을 지어서 가시덤불로 둘러막고, 그 속에 발가벗고 앉아서 조금만 움직이면 가시에 찔리도록 했으며, 머리는 들보에 매달아 어두운 정신이 없어지게 했다.
때마침 조정에 재상 자리가 비어 있어서 자장이 문벌(門閥) 때문에 물망(物望)에 올라 여러 번 불렀지만 나가지 않으니 왕이 칙명(勅命)을 내렸다. "만일 나오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 자장이 듣고 말했다. "내가 차라리 하루 동안 계율(戒律)을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100년 동안 계율을 어기고 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 말을 들은 왕은 그가 중이 되는 것을 허락했다. 자장이 바위 사이에 깊이 숨어서 사니 양식 한 알 돌봐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이상한 새가 과일을 물어다 바쳐서 이것을 손으로 받아 먹었더니 이윽고 꿈에 천인(天人)이 와서 오계(五戒)를 주었다. 이에 자장이 비로소 골짜기에서 나오니 향읍(鄕邑)의 남녀가 다투어 와서 계(戒)를 받았다.
자장은 변방 나라에 태어난 것을 스스로 탄식하고 중국으로 가서 대화(大化)를 구했다. 인평(仁平) 3년 병신(丙申; 636, 곧 정관貞觀 10년임)에 왕명(王命)을 받아 제자 실(實) 등 중 10여 명과 더불어 서쪽 당(唐)나라로 들어가서 청량산(淸凉山)에 가서 성인(聖人)을 뵈었다. 이 산에는 만수대성(曼殊大聖)의 소상(塑像)이 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이 서로 전해 말했다. "제석천(帝釋天)이 공인(工人)을 데리고 와서 조각해 만든 것이다." 자장은 소상 앞에서 기도하고 명상(冥想)하니, 꿈에 소상이 그의 이마를 만지면서 범어(梵語)로 된 게(偈)를 주었는데 깨어 생각하니 알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 이상한 중이 오더니 이것을 해석하여 주고(이 이야기는 이미 황룡사皇龍寺 탑편塔篇에 나와 있다) 또 말하기를, "비록 만 가지 가르침을 배운다 해도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하고는 가사(袈裟)와 사리(舍利) 등을 주고 사라졌다(자장은 처음에 이것을 숨기고 말하지 않았으므로 <당승전唐僧傳>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자장은 자기가 이미 성별(聖별)을 받은 것을 알고 북대(北臺)에서 내려와 태화지(太和池)에 이르러 당나라 서울에 들어가니 태종(太宗)이 칙사(勅使)를 보내어 그를 위무(慰撫)하고 승광별원(勝光別院)에 거처하도록 했다. 태종의 은총과 내린 물건이 매우 많았으나 자장은 그 번거로움을 꺼려서 표문(表文)을 올리고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 동쪽 절벽에 들어가서 바위에 나무를 걸쳐 방을 만들고 3년 동안을 살면서 사람과 신들이 계를 받아 영험이 날로 많았는데, 말이 번거로워서 여기에는 싣지 않는다. 이윽고 다시 서울로 들어오자 또 칙사를 보내 위무(慰撫)하고 비단 200필을 내려서 의복의 비용으로 쓰게 했다.
정관(貞觀) 17년 계유(癸酉; 643)에 신라 선덕왕(宣德王)이 표문을 올려 자장을 돌려보내 주기를 청하니 태종은 이를 허락하고 그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비단 1령(領)과 잡채(雜綵) 500필을 하사했으며, 또 동궁(東宮)도 비단 200필을 내려 주고 그 밖에 예물로 준 물건도 많았다. 자장은 본국에 아직 불경(佛經)과 불상(佛像)이 구비되지 못했으므로 대장경(大藏經) 1부(部)와 여러 가지 번당(幡幢)·화개(花蓋) 등 복리(福利)가 될 만한 것을 청해서 모두 싣고 돌아왔다. 그가 본국에 돌아오자 온 나라가 그를 환영하고 왕은 그를 분황사(芬皇寺; <당전唐傳>에서는 왕분사王芬寺라고 했다)에 있게 하니, 물건과 시위(侍衛)는 조밀하고도 넉넉했다. 어느 해 여름에 왕이 궁중으로 청하여 <대승론(大乘論)>을 강(講)하게 하고 또 황룡사(黃龍寺)에서 보살계본(菩薩戒本)을 7일 밤낮 동안 강연하게 하니, 하늘에서는 단비가 내리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강당을 덮었다. 이것을 보고 사중(四衆)이 모두 그의 신기함을 탄복했다. 이에 조정에서 의론하기를, "불교가 우리 동방에 번져서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 주지(住持)를 수봉(修奉)하는 규범(規範)이 없으니 이것을 통괄해서 다스리지 않고는 바로잡을 수가 없다."하고 왕이 자장을 대국통(大國統)으로 삼아 중들의 모든 규범을 승통(僧統)에게 위임하여 주장하도록 했다(상고해 보건대, 북제北齊의 천보天寶 연간에는 전국全國에 10통統을 두었는데,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마땅히 직위職位를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하여 이에 선문제宣文帝는 법상법사法上法師로 대통大統을 삼고 나머지는 통통通統을 삼았다. 또 양梁·진陳의 시대에는 국통國統·주통州統·국도國都·주도州都·승도僧都·승정僧正·도유내都維乃 등 이름이 있었으니 모두 소현조昭玄曺에 소속되었다. 소현조昭玄曺는 승니僧尼를 거느리는 관명官名이다. 당唐나라 초기에는 또 10대덕大德의 성盛함이 있었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11년 경오庚午에 안장법사安藏法師로 대서성大書省을 삼으니 이것은 한 사람뿐이고, 또 소서성小書省 두 사람이 있었다. 그 이듬해 신미辛未에는 고구려의 혜량법사惠亮法師를 국통國統으로 삼았으니 사주寺主라고도 한다. 보량법사寶良法師 한 사람을 대도유나大都維那로 삼고 주통州統 9인人과 도통都統 18인人을 두었다. 자장慈藏 때에 와서 다시 대국통大國統 한 사람을 두었으니 이것은 상직常職이 아니다. 이것은 또한 부예랑夫禮郞이 대각간大角干이 되고, 김유신金庾信이 태대각간太大角干이 된 것과 같다. 후에 원성대왕元聖大王 원년에 이르러 또 승관僧官을 두고 정법전政法典이라 하여 대사大舍 1인人과 사史 2인人을 사司로 삼아서 중들 중에서 재행才行이 있는 이를 뽑아서 그 일을 맡겼으며, 유고有故한 때에는 바꾸어서 연한年限은 정定하지 않았다. 때문에 지금 자의紫衣의 무리들은 역시 율종律宗과 다른 것이다. 향전鄕傳에 보면, 자장慈藏이 당唐나라에 갔더니 태종太宗이 식건전式乾殿에 맞아들여 <화엄경華嚴經>의 강의를 청하매, 하늘이 단 이슬을 내려 비로소 그를 국사國師로 삼았다고 했으나 이것은 잘못이다. 당전唐傳이나 <국사國史>에 모두 그런 글은 없다).
자장이 이와 같은 좋은 기회를 만나 용감히 나가서 불교를 널리 퍼뜨렸다. 그는 승니(僧尼)의 5부(部)에 각각 구학(舊學)을 더 증가시키고 15일마다 계율을 설명하였으며 겨울과 봄에는 시험해서 지범(持犯)을 알게 하고 관원을 두어서 이를 유지해 나가게 했다. 또 순사(巡使)를 보내어 서울 밖에 있는 절들을 조사하여 중들의 과실을 징계하고 불경과 불상을 엄중하게 신칙함을 일정한 법으로 삼으니, 한 시대에 불법을 보호하는 것이 이때에 가장 성했다. 이것은 공자(孔子)가 위(衛)나라에서 노(魯)나라로 돌아와 음악을 바로잡자 아(雅)와 송(頌)이 각각 그 마땅함을 얻었던 일과 같다. 이때를 당하여 나라 안 사람으로서 계(戒)를 받고 불법을 받든 이가 열 집에 여덟, 아홉은 되었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기를 청하는 이가 세월이 갈수록 더욱 많아지니 이에 통도사(通度寺)를 새로 세우고 계단(戒壇)을 쌓아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제도(濟度)했다. 또 자기가 난 집을 원녕사(元寧寺)로 고치고 낙성회(落成會)를 열어 잡화(雜花) 1만 게(偈)를 강의하니 오이녀(五二女)가 감동하여 현신(現身)해서 강의를 들었다. 문인(門人)들에게 그들의 수대로 나무를 심어 이상스러운 일들을 표하게 하고 그 나무를 지식수(知識樹)라고 이름지었다.
그는 일찍이 우리 나라의 복장(服章)이 제하(諸夏)와 같지 않다 하여 조정에 건의하니 조정에서는 허락하였다. 이에 진덕왕(眞德王) 3년 기유(己酉; 649)에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衣冠)을 입게 하고, 이듬해인 경술(庚戌)에 또 정삭(正朔)을 받들어 비로소 영휘(永徽)의 연호를 썼다. 이 뒤부터는 중국에 조근(朝覲)할 때마다 상번(上蕃)에 있었으니 자장의 공이었다.
만년(晩年)에는 서울을 하직하고 강릉군(江陵郡; 지금의 명주溟州)에 수다사(水多寺)를 세우고 거기에 살았더니 북대(北臺)에서 본 것과 같은 형상을 한 이상한 중이 다시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내일 대송정(大松汀)에서 그대를 만날 것이다." 자장이 놀라 일어나서 일찍 송정(松汀)에 가니 과연 문수보살(文殊菩薩)이 감응(感應)하여 와 있었다. 그에게 법요(法要)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태백산(太伯山) 갈반지(葛蟠地)에서 다시 만나자."하고 드디어 자취를 숨기고 나타나지 않았다. 자장이 태백산(太伯山)에 가서 찾다가 큰 구렁이가 나무 밑에 서리고 있는 것을 보고 시자(侍者)에게 말했다. "이곳이 바로 이른바 갈반지이다." 이에 석남원(石南院; 지금의 정암사淨岩寺)을 세우고 대성(大聖)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늙은 거사(居士) 하나가 남루한 도포를 입고 칡으로 만든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메고 와서 시자에게 말했다. "자장을 보려고 왔다." 문인(門人)이 말했다. "내가 건추(巾추)를 받든 이래 우리 스승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보지 못했다.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미친 말을 하는 게냐." 거사가 말한다. "너는 너의 스승에게 아뢰기만 하면 된다." 시자가 들어가서 고하자 자장도 깨닫지 못하고 말했다. "필연 미친 사람이겠지." 문인이 나가서 그를 꾸짖어 쫓으니, 거사가 다시 말했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느냐." 말을 마치자 삼태기를 거꾸로 들고 터니 강아지가 변해서 사자보좌(獅子寶座)가 되고 그 위에 올라앉아서 빛을 내고는 가버렸다. 자장이 이 말을 듣고 그제야 위의(威儀)를 갖추고 빛을 찾아 재빨리 남쪽 고개에 올라갔으나 이미 아득해서 따라가지 못하고 드디어 몸을 던져 죽으니, 화장하여 유골(遺骨)을 석혈(石穴) 속에 모셨다.
대체로 자장이 세운 절과 탑이 10여 곳인데, 세울 때마다 반드시 이상스러운 상서(祥瑞)가 있었기 때문에 그를 받드는 포색(浦塞)들이 거리를 메울 만큼 많아서 며칠이 안 되어 완성했다. 자장이 쓰던 도구(道具)·옷감·버선과 태화지(太和池)의 용이 바친 목압침(木鴨枕)과 석존(釋尊)의 유의(由衣)들은 모두 통도사(通度寺)에 있다. 또 헌양현(헌陽縣; 지금의 언양彦陽)에 압유사(鴨遊寺)가 있는데, 침압(枕鴨)이 일찍이 이곳에서 이상한 일을 나타냈으므로 이름한 것이다.
또 원승(圓勝)이란 중이 있는데, 자장보다 먼저 중국에 유학갔다가 함께 고향에 돌아와서 자장을 도와 율부(律部)를 넓게 폈다고 한다.
찬(讚)해 말한다.
일찍이 청량산에 가서 꿈 깨고 돌아오니,
칠편삼취(七篇三聚)가 한꺼번에 열렸네.
치소(緇素)의 옷을 부끄럽게 여기어,
우리 나라 의관을 중국과 같이 만들었네.
원효불기(元曉不羈)
성사(聖師) 원효(元曉)의 속성(俗姓)은 설씨(薛氏)이다. 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하는데 지금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다. 아버지는 담날내말(談捺乃末)이다. 원효는 처음에 압량군(押梁郡)의 남쪽(지금의 장산군章山郡) 불지촌(佛地村) 북쪽 율곡(栗谷)의 사라수(裟羅樹)밑에서 태어났다. 그 마을의 이름은 불지(佛地)인데 혹은 발지촌(發智村; 속언俗言에 불등을촌弗等乙村이라 한다)이라고도 한다. 사라수란 것을 속언에 이렇게 말한다. "스님의 집이 본래 이 골짜기 서남쪽에 있었다. 그 어머니가 태기가 있어 이미 만삭인데, 마침 이 골짜기에 있는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갑자기 해산하였으므로 몹시 급한 때문에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속에서 지냈기 때문에 이 나무를 사라수라 했다." 그 나무의 열매가 또한 이상하여 지금도 사라율(裟羅栗)이라 한다. 예로부터 전하기를, 옛적에 절을 주관하는 자가 절의 종 한 사람에게 하루 저녁 끼니로 밤 두 알씩을 주었다. 종이 적다고 관청에 호소하자 관리는 괴상히 여겨 그 밤을 가져다가 조사해 보았더니 한 알이 바리 하나에 가득 차므로 도리어 한 알씩만 주라고 판결했다. 이런 이유로 율곡(栗谷)이라고 했다.
스님은 이미 중이 되자 그 집을 희사(喜捨)해서 절로 삼고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고 했다. 또 사라수 곁에 절을 세우고 사라사(裟羅寺)라고 했다. 스님의 행장(行狀)에는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나 이것은 조부가 살던 곳을 따른 것이고, <당승전(唐僧傳)>에는 본래 하상주(下湘州) 사람이라고 했다. 상고해 보건대, 인덕(麟德) 2년 사이에 문무왕(文武王)이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땅을 나누어 삽량주(삽良州)를 두었는데 하주는 곧 지금의 창령군(昌寧郡)이요, 압량군(押梁郡)은 본래 하주의 속현(屬縣)이다. 상주는 지금의 상주(尙州)이니 상주(湘州)라고도 한다. 불지촌은 지금 자인현(慈仁縣)에 속해 있으니, 바로 압량군에서 나뉜 곳이다. 스님의 아명(兒名)은 서당(誓幢)이요, 또 한 가지 이름은 신당(新幢; 당幢은 우리말로 모毛라고 한다)이다.
처음에 어머니 꿈에 유성(流星)이 품 속으로 들어오더니 이내 태기가 있었으며, 장차 해산하려 할 때는 오색 구름이 땅을 덮었으니, 진평왕(眞平王) 39년 대업(大業) 13년 정축(丁丑; 617)이었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남보다 뛰어나서 스승을 따라 배울 것이 없었다. 그의 유방(遊方)의 시말(始末)과 불교를 널리 편 큰 업적들은 <당승전(唐僧傳)>과 그의 행장에 자세히 실려있으므로 여기에는 모두 싣지 않고 오직 향전(鄕傳)에 있는 한두 가지 이상한 일만을 기록한다.
스님이 일찍이 어느날 풍전(風顚)을 하여 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렀다.
그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리겠는가.
나는 하늘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
사람들이 아무도 그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太宗)이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 "이 스님은 필경 귀부인(貴婦人)을 얻어서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賢人)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이때 요석궁(瑤石宮; 지금의 학원學院이 이것이다)에 과부 공주(公主)가 있었는데 왕이 궁리(宮吏)에게 명하여 원효(元曉)를 찾아 데려가라 했다. 궁리가 명령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니, 그는 이미 남산(南山)에서 내려와 문천교(蚊川橋; 사천沙川이니 사천沙川을 속담에는 모천牟川, 또는 문천蚊川이라 한다. 또 다리 이름을 유교楡橋라 한다)를 지나다가 만났다. 이때 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셨다. 궁리가 원효를 궁에 데리고 가서 옷을 말리고 그곳에 쉬게 했다. 공주는 과연 태기가 있더니 설총(薛聰)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지혜롭고 민첩하여 경서(經書)와 역사에 널리 통달하니 신라 10현(賢) 중의 한 사람이다. 방언(方言)으로 중국과 외이(外夷)의 각 지방 풍속과 물건 이름 등에도 통달하여 육경(六經)과 문학(文學)을 훈해(訓解)했으니, 지금도 우리 나라에서 명경(明經)을 업(業)으로 하는 사람이 이를 전수(傳受)해서 끊이지 않는다.
원효는 이미 계(戒)를 잃어 총(聰)을 낳은 후로는 속인(俗人)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이름했다. 그는 우연히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상했다. 원효는 그 모양을 따라서 도구(道具)를 만들어 <화엄경(華嚴經)> 속에 말한, "일체의 무애인(無애人)은 한결같이 죽고 사는 것을 벗어난다"는 문구를 따서 이름을 무애(無애)라 하고 계속하여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어느날 이 도구를 가지고 수많은 마을에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교화(敎化)시키고 읊다가 돌아오니, 이 때문에 상추분유(桑樞분유) 확후(확候)의 무리들로 하여금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타佛)을 부르게 하였으니 원효(元曉)의 교화야말로 참으로 컸다 할 것이다. 그가 탄생한 마을 이름을 불지촌(佛地村)이라 하고, 절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 하였으며 스스로 원효라 한 것은 모두 불교를 처음 빛나게 했다는 뜻이다. 원효도 역시 방언이니, 당시 사람들은 모두 향언(鄕言)의 새벽이라고 했다.
그는 일찍이 분황사(芬皇寺)에 살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지었는데, 제4권 십회향품(十廻向品)에 이르러 마침내 붓을 그쳤다. 또 일찍이 송사(訟事)로 인해서 몸을 백송(百松)으로 나눴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이를 위계(位階)의 초지(初地)라고 말했다. 또한 바다 용의 권유로 해서 노상에서 조서(詔書)를 받아 <삼매경소(三昧經疏)>를 지었는데,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았으므로 각승(角乘)이라 했다. 이것은 또한 본시이각(本始二覺)이 숨어 있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대안법사(大安法師)가 이것을 헤치고 와서 종이를 붙였는데 이것은 또한 지음(知音)하여 서로 창화(唱和)한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총이 그 유해(遺骸)를 부수어 소상(塑像)으로 진용(眞容)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하고 사모하여 종천(終天)의 뜻을 표했다. 설총이 그때 곁에서 예배하자 소상이 갑자기 돌아다보았는데, 지금까지도 돌아다본 그대로 있다. 원효가 일찍이 살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이 살던 집 터가 있다고 한다.
찬(讚)해 말한다.
각승(角乘)은 처음으로 <삼매경(三昧境)>의 축(軸)을 열었고,
무호(舞壺)는 마침내 1만 거리 바람에 걸었네.
달 밝은 요석궁(瑤石宮)에 봄 잠 깊더니,
문 닫힌 분황사(芬皇寺)엔 돌아다보는 소상(塑像)만 비었네.
의상전교(義湘傳敎)
법사(法師) 의상(義湘)의 아버지는 한신(韓信)이요, 성(姓)은 김씨(金氏)이다. 나이 29세에 서울 황복사(皇福寺)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얼마 안 되어 중국으로 가서 부처의 교화(敎化)를 보려 하여 드디어 원효(元曉)와 함께 요동(遼東) 변방으로 갔는데, 여기에서 변방의 순라군(巡邏軍)이 간첩(間諜)으로 잡아 가둔 지 수십일 만에 겨우 풀려 돌아왔다(이 사실은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의상본전義湘本傳>과 원효대사元曉大師의 행장行狀에 있다). 영휘(永徽) 초년에 마침 당나라 사신이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자가 있으므로 그 배를 타고 중국에 들어갔다. 처음 양주(揚州)에 머물렀는데 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이 의상을 청해다가 관청에 머무르게 하고 대접하는 것이 매우 성대했다. 그후 얼마 안 되어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 가서 지엄(智儼)을 뵈었는데 지엄은 그 전날 밤 꿈에, 큰 나무 하나가 해동(海東)에서 났는데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서 중국에까지 와서 덮였고, 가지 위에는 봉황새의 집이 있는데, 올라가서 보니 마니보주(摩尼寶珠) 하나가 있어 그 광명(光明)이 먼 곳에까지 비쳤다. 꿈에서 깨자 놀랍고 이상스러워서 집을 깨끗이 소제하고 기다리는데 의상이 오므로 지엄은 특별한 예로 그를 맞아 조용히 말했다. "내가 꾼 어젯밤 꿈은 그대가 내게 올 징조였구려." 이에 입실(入室)할 것을 허락하니 의상은 <화엄경(華嚴經)>의 깊은 뜻을 세밀한 곳까지 해석했다. 지엄은 영질(영質)을 만난 것을 기뻐하여 새로운 이치를 터득해 내니 이야말로 깊이 숨은 것을 찾아내서 남천(藍천)이 그 본색(本色)을 잃은 것이라 하겠다. 이때 이미 본국의 승상(丞相) 김흠순(金欽純; 혹은 인문仁問)·양도(良圖) 등이 당나라에 갇혀 있었는데 고종(高宗)이 장차 크게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 하자 흠순 등은 몰래 의상을 권하여 먼저 돌아가게 하여, 함형(咸亨) 원년 경오(庚午; 670)에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 일을 본국 조정에 알리자 신인종(神印宗)의 고승(高僧) 명랑(明朗)에게 명하여 밀단(密壇)을 가설(假說)하고 비법(秘法)으로 기도해서 국난(國難)을 면할 수 있었다.
의봉(儀鳳) 원년(676)에 의상은 태백산(太伯山)에 돌아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浮石寺)를 세우고 대승(大乘)을 폈더니 영험이 많이 나타났다. 종남문인(終南門人) 현수(賢首)가 <수현소(搜玄疏)>를 지어서 부본(副本)을 의상에게 보내고, 아울러 은근한 뜻이 담긴 편지를 올렸다.
서경(西京) 숭복사(崇福寺) 중 법장(法藏)은 해동(海東) 신라 화엄법사(華嚴法師)의 시자(侍者)에게 글을 올립니다. 한번 작별한 지 20여 년이 되니 사모하는 정성이 어찌 마음 속에서 떠나겠습니까. 게다가 연기와 구름이 1만 리나 되고 바다와 육지가 1,000겹이나 쌓였으니 이 몸이 다시 뵙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며, 회포와 그리움을 어찌 다 말하오리까. 전생(前生)에 인연을 같이 했고, 금세(今世)에 학업을 함께 닦았기 때문에 이 과보(果報)를 얻어서 함께 대경(大經)에 목욕하고, 선사(先師)의 특별한 은혜로 깊은 경전(經典)의 가르침을 입게 된 것입니다. 우러러 듣건대, 상인(上人)께서는 고향에 돌아가신 후로 <화엄경(華嚴經)>을 강연해서 법계(法界)의 무애(無애)한 연기(緣起)를 드날려, 겹겹의 제망(帝網)으로 불국(佛國)을 새롭게 하여 중생(衆生)에게 이익을 주심이 크고 넓다 하오니 기쁜 마음이 더해집니다. 이것으로써 여래(如來)가 돌아가신 후에 불교를 빛내고 법륜(法輪)을 다시 굴려 불법(佛法)을 오래 머물게 한 분은 오직 법사(法師)뿐임을 알겠습니다. 법장(法藏)은 앞으로 나가는 것이 하나도 이루는 것이 없고 주선하는 일이 더욱 적사오니, 우러러 이 경전(經典)을 생각하니 선사(先師)께 부끄러울 뿐입니다. 오직 분수에 따라 받은 바를 잠시도 놓칠 수 없으니 이 업(業)에 의지하여 내세(來世)의 인연을 맺기를 원할 뿐입니다. 다만 스님의 장소(章疏)는, 뜻은 풍부하지만 글이 간결하여 후세(後世)사람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스님의 깊은 말씀과 미묘한 뜻을 기록하여 <의기(義記)>를 이루었습니다. 요새 이것을 승전법사(勝詮法師)가 베껴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 그 지방에 전할 것입니다. 하오니 상인(上人)께서는 그 잘잘못을 자세히 검토하셔서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마땅히 내세(來世)에서는 사신수신(捨身受身)하여 함께 노사나불(盧舍那佛)의 이와 같은 끝이 없는 묘법(妙法)을 듣고, 이와 같은 무량(無量)한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원행(願行)을 수행(修行)한다면 나의 남은 악업(惡業)은 하루아침에 떨어질 것입니다. 바라건대 상인(上人)께서는 옛날의 일을 잊지 마시고 제취(諸趣) 중에서 정도(正道)로써 가르쳐 주시옵소서. 인편(人便)이 있으면 때때로 안부를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갖추지 못합니다.(이 글은 <대문류大文類>에 실려 있음)
의상은 이에 영(令)을 내려 열 곳 절에서 불교를 전하니 태백산의 부석사, 원주(原州)의 비마라사(毗摩羅寺), 가야산(伽倻山)의 해인사(海印寺), 비슬산(毗瑟山)의 옥천사(玉泉寺), 금정산(金井山)의 범어사(梵魚寺), 남악(南嶽)의 화엄사(華嚴寺) 등이 이것이다. 또 <법계도서인(法界圖書印)>과 <약소(略疏)>를 지어서 일승(一乘)의 요점을 모두 기록하여 천 년의 본보기가 되게 하였으니 이를 여러 사람이 다투어 소중히 지녔다. 이 밖에는 저술한 것이 없었으니 온 솥의 고기맛을 알려면 한 점의 살코기로도 족한 것이다.
<법계도(法界圖)>는 총장(總章) 원년 무진(戊辰; 668)에 완성되었으며, 이 해에 지엄(智儼)도 세상을 떠났으니 이것은 마치 공자(孔子)가 '기린을 잡았다'는 구절에서 붓을 끊은 것과 같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의상은 금산보개(金山寶蓋)의 화신(化身)이라 하는데 그의 제자에는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勳)·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 10명의 고승들이 영수(領首)가 되었는데, 그들은 모두 아성(亞聖)들이며 각각 전기(傳記)가 있다.
오진은 일찍이 하가산(下柯山) 골암사(골암寺)에 살면서 밤마다 팔을 뻗쳐서 부석사 석등(石燈)에 불을 켰다. 지통은 <추동기(錐洞記)>를 지었는데, 그는 대개 친히 의상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묘한 말이 많다. 표훈은 일찍이 불국사(佛國寺)에 살았으며 항상 천궁(天宮)을 왕래했다. 의상이 황복사(皇福寺)에 있을 때 여러 무리들과 함께 탑을 돌았는데, 항상 허공을 밟고 올라가 층계는 밟지 않았으므로 그 탑에는 사리를 설치하지 않았다. 그 무리들도 층계에서 3척이나 떠나 허공을 밟고 돌았기 때문에 의상은 그 무리들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보면 반드시 괴이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가르치지 못한다." 이 나머지는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본전(本傳)과 같다.
찬(讚)해 말한다.
덤불을 헤치고 바다를 건너 연기와 티끌 무릅쓰니,
지상사(至相寺) 문이 열려 귀한 손님 접대했네.
화엄(華嚴)을 캐다가 고국(故國)에 심었으니,
종남산(終南山)과 태백산(太伯山)이 함께 봄 맞았네.
사복불언(蛇福不言)
서울 만선북리(萬善北里)에 있는 과부가 남편도 없이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12세가 되어도 말을 못하고 일어나지 못하므로 사동(蛇童; 아래에는 사복蛇卜이라도고 하고, 또 사파蛇巴·사복蛇伏이라고 썼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사동蛇童을 말한다)이라고 불렀다. 어느날 그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그때 원효(元曉)가 고선사(高仙寺)에 있었다. 원효는 그를 보고 맞아 예를 했으나 사복(蛇福)은 답례도 하지 않고 말한다. "그대와 내가 엣날에 경(經)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이제 죽었으니 나와 함께 장사지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원효는 "좋다"하고 함께 사복의 집으로 갔다. 여기에서 사복은 원효에게 포살(布薩)시켜 계(戒)를 주게 하니, 원효는 그 시체 앞에서 빌었다. "세상에 나지 말 것이니, 그 죽는 것이 괴로우니라. 죽지 말 것이니 세상에 나는 것이 괴로우니라." 사복은 그 말이 너무 번거롭다고 하니 원효는 고쳐서 말했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모두 괴로우니라." 이에 두 사람은 상여를 메고 활리산(活里山) 동쪽 기슭으로 갔다. 원효가 말한다. "지혜 있는 범을 지혜의 숲 속에 장사지내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사복은 이에 게(偈)를 지어 말했다.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사라수(裟羅樹) 사이에서 열반(涅槃)하셨네.
지금 또한 그같은 이가 있어,
연화장(蓮花藏) 세계로 들어가려 하네.
말을 마치고 띠풀의 줄기를 뽑으니, 그 밑에 명랑하고 청허(淸虛)한 세계가 있는데, 칠보(七寶)로 장식한 난간에 누각이 장엄하여 인간의 세계는 아닌 것 같다. 사복이 시체를 업고 속에 들어가니 갑자기 그 땅이 합쳐 버린다. 이것을 보고 원효는 그대로 돌아왔다.
후세 사람들이 그를 위해서 금강산(金剛山) 동남쪽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도량사(道場寺)라 하여, 해마다 3월 14일이면 점찰회(占察會)를 여는 것을 상례(常例)로 삼았다. 사복이 세상에 영험을 나타낸 것은 오직 이것 뿐이다. 그런데 민간에서는 황당한 얘기를 덧붙였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찬(讚)해 말한다.
잠자코 자는 용이 어찌 등한하리.
세상 떠나면서 읊은 한 곡조 간단도 해라.
고통스런 생사가 본래 고통이 아니어니,
연화장 세계 넓기도 해라.
진표전간(眞表傳簡)
중 진표(眞表)는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목全州牧) 만경현(萬頃縣; 혹은 두내산현豆乃山縣, 또는 나산현那山縣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만경萬頃, 옛 이름은 두내산현豆乃山縣이다. <관녕전貫寧傳>에 중 [표表]의 향리鄕里로서 금산현金山縣 사람이라 한 것은 절 이름과 현縣 이름을 혼동한 것이다) 사람이다. 아버지는 진내말(眞乃末)이요, 어머니는 길보랑(吉寶娘)이며, 성(姓)은 정(井)씨이다. 나이 12세 때 금산사(金山寺)의 숭제법사(崇濟法師) 강석(講席)에 가서 중이 되어 배우기를 청했다. 그 스승이 일찍이 말했다. "나는 일찍이 당나라에 들어가 선도삼장(善道三藏)에게 배운 후에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현신(現身)에게서 오계(五戒)를 받았다." 진표는 물었다. "부지런히 수행(修行)하면 얼마나 되어 계(戒)를 얻게 됩니까." 숭제(崇濟)가 말했다. "정성만 지극하다면 1년을 넘지 않을 것이다."
진표는 스승의 말을 듣고 명산(名山)을 두루 다니다가 선계산(仙溪山) 불사의암(不思議庵)에 머물면서 삼업(三業)을 닦아 망신참법(亡身懺法)으로 계(戒)를 얻었다. 그는 처음에 7일 밤을 기약하고 오륜(五輪)을 돌에 두들겨서, 무릎과 팔뚝이 모두 부서지고 바위 언덕에까지 피가 쏟아졌다. 그래도 아무런 부처의 감응이 없으므로 몸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다시 7일을 더 기약하여 14일이 되자 마침내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뵙고 정계(淨戒)를 받았으니 이때는 바로 개원(開元) 28년 경진(庚辰; 740) 3월 15일 진시(辰時)요, 진표의 나이 23세였다.
그러나 그의 뜻이 자씨(慈氏)에게 있었으므로 감히 중지하지 않고 영산사(靈山寺; 혹은 변산邊山, 또는 능가산楞伽山이라 한다)로 옮겨가서 또 처음과 같이 부지런하고 용감하게 수행(修行)했다. 과연 미륵보살(彌勒菩薩)이 감응해 나타나 <점찰경(占察經)> 2권(이 經은 진陳·수隋 시절에 외국에서 번역된 것이니 지금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 다만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이 경經을 진표眞表에게 주었을 뿐이다)과 증과(證果)의 간자(簡子) 189개를 주면서 일렀다. "이 가운데서 제8간자는 새로 얻은 묘계(妙戒)를 비유한 것이요, 제9간자는 구족(具足)의 계(戒)를 얻은 것에 비유한 것이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 뼈이며, 나머지는 모두 침향(沈香)과 단향(檀香)나무로 만든 것으로, 이것은 모두 번뇌(煩惱)에 비유한 것이다. 너는 이것으로써 세상에 법을 전하여 남을 구제하는 뗏목을 삼으라." 진표는 미륵보살의 기별(記별)을 받자 금산사(金山寺)에 가서 살면서 해마다 단석(壇席)을 열어 법시(法施)를 널리 베풀었는데, 그 단석의 정결하고 엄한 것이 이 말세(末世)에는 보지 못하던 일이었다. 풍교(風敎)의 법화(法化)가 두루 미치자 여러 곳을 다니다가 아슬라주(阿瑟羅州)에 이르니 섬 사이의 물고기와 자라들이 다리를 놓고 물 속으로 맞아들이므로 진표가 불법(佛法)을 강의하니 물고기와 자라들이 계(戒)를 받았다. 그때 바로 천보(天寶) 11년 임진(壬辰; 752) 2월 15일이었다. 어떤 책에는 원화(元和) 6년(811)이라 했지만 잘못이니 원화(元和)는 헌덕왕(憲德王) 때이다(이것은 성덕왕聖德王 대로부터 거의 70년쯤 된다). 경덕왕(景德王)이 이 말을 듣고 그를 궁중(宮中)으로 맞아들여 보살계(菩薩戒)를 받고 곡식 7만 7,000석을 내렸다. 초정(椒庭)과 열악(列岳)들도 모두 계품(戒品)을 받고, 비단 500필과 황금 50냥을 주었다. 그는 이것을 모두 받아서 여러 절에 나누어 주어 널리 불사(佛事)를 일으켰다. 그의 사리(舍利)는 지금의 발연사(鉢淵寺)에 있으니, 곧 바다의 물고기들을 위해서 계(戒)를 주던 땅이다.
그의 제자 중에서 불법을 얻은 영수(領袖)로는 영심(永深)·보종(寶宗)·신방(信芳)·체진(體珍)·진해(珍海)·진선(眞善)·석충(釋忠) 등이 있는데, 모두 산문(山門)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영심은 진표가 간자를 전했으므로 속리산(俗離山)에 살았는데 이가 진표의 법통(法統)을 계승한 제자다. 그 단(壇)을 만드는 법은 점찰(占察) 육륜(六輪)과는 조금 다르지만 수행(修行)하는 법은 산 속에 전하는 본규(本規)와 같았다.
<당승전(唐僧傳)>을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개황(開皇) 13년(593)에 광주(廣州)에 참법(懺法)을 행하는 중이 있었다. 그는 가죽으로 점자(岾子) 두 장을 만들어 선(善)과 악(惡) 두 글자를 써서 사람에게 던지게 하여 선자(善字)를 얻은 자를 길(吉)하다고 했다. 또 그는 스스로 박참법(撲懺法)을 행해서 지은 죄를 없애게 한다고 하니 남녀가 한데 어울려서 함부러 받아들여 비밀히 행해서 청주(靑州)에까지 퍼졌다. 동행(同行) 관사(官司)가 이것을 조사해 보고 요망스러운 일이라 하니 이에 그들은 말했다. "이 탑참법(搭懺法)은 <점찰경(占察經)>에 의한 것이고, 박참법은 여러 경(經) 속의 내용에 따른 것으로, 온몸을 땅에 던져 마치 큰 산이 무너지는 것과 같이 한다." 이때 사실을 위해 아뢰자 황제(皇帝)는 내사시랑(內史侍郞) 이원찬(李元撰)을 시켜서 대흥사(大興寺)로 가서 여러 대덕(大德)들에게 물으니, 대사문(大沙門) 법경(法經)과 언종(彦琮)등이 대답했다. "<점찰경>은 두 권이 있는데, 책 머리에 보리등(菩提燈)이 외국에서 번역한 글이라고 하였으니 근대(近代)에 나온 것 같습니다. 또한 사본(寫本)으로 전하는 것이 있는데, 여러 기록을 검사해 보아도 아무데도 바른 이름과 번역한 사람과 시일(時日)이나 장소가 모두 없습니다. 탑참법(搭懺法)은 여러 가지 경(經)과는 다르기 때문에 여기에 의해서 시행할 수는 없습니다." 이리하여 칙령(勅令)을 내려 이것을 금지시켰다.
이제 이것을 시험삼아 의론한다. 청주거사(靑州居士) 등의 탑참(搭懺)의 일은 마치 큰 선비가 시서발총(詩書發塚)하는 것과 같아 '범을 그리다가 이루지 못하고 개를 그렸다'고 할 수 있으니, 불타(佛陀)가 미리 방비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만일 <점찰경(占察經)>을 번역한 사람이나 그 시일(時日)과 장소가 없다고 해서 의심스럽다고 한다면 이것도 또한 삼[麻]을 취하기 위해 금(金)을 버리는 격(格)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문(經文)을 자세히 읽어 보면 실단(悉壇)이 깊고 조밀하여 더러운 것과 흠이 있는 것을 깨끗이 씻어 주고 게으른 사람을 충격시키는 것이 이 경전(經典)만한 것이 없다. 때문에 그 이름은 대승참(大乘懺)이라고 했다. 또 육근(六根)이 모인 가운데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개원(開元)·정원(貞元) 연간에 나온 두 <석교록(釋敎錄)> 속에는 정장(正藏)으로 편입되어 있으니, 비록 성종(性宗)은 아니지만 그 상교(相敎)의 대승(大乘)으로는 자못 넉넉한 셈이다. 어찌 탑참(搭懺)이나 박참(撲懺)의 두 참(懺)과 함께 말할 수 있으랴.
<사리불문경(舍利佛問經)>에 의하면 부처가 장자(長者)의 아들 빈야다라(빈若多羅)에게 말했다. "네가 7일 7야 동안에 너의 전죄(前罪)를 뉘우쳐서 모두 씻게 하라." 다라(多羅)가 이 가르침을 받들어 밤낮으로 정성껏 행하니, 제5일 저녁에 이르자 그 방 안에 여러 가지 물건이 비오듯이 내려 수건·복두(복頭)·총채·칼·송곳·도끼와 같은 물건들이 그의 눈앞에 떨어졌다. 다라(多羅)가 기뻐하여 부처에게 물었더니 부처는 대답한다. "이것은 네가 물욕(物慾)을 벗어날 징조이니, 이것은 모두 베고 터는 물건이다." 이 말에 의하면 <점찰경>에서 윤(輪)을 던져 상(相)을 얻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이것으로 진표공(眞表公)이 참회를 일츠켜서 간자(簡子)를 얻고 불법을 듣고 부처를 본 것이 허망된 일이 아님을 알 수가 있었다. 하물며 이 경(經)을 거짓되고 망령된 것이라고 한다면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어찌해서 진표스님에게 친히 전수(傳授)했겠는가. 또 이 경을 만일 금한다면 <사리불문경(舍利佛問經)>도 또한 금할 것인가. 언종(彦琮)의 무리야말로 금을 훔칠 때 사람을 못 보았으니, 글을 읽는 자들은 이것을 자세히 알아야 할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요계(요季)에 현신(現身)해서 용롱(용聾)을 깨우치니,
영악(靈嶽)과 선계(仙溪)에서 감응(感應)해 통했네.
정성 다해 탑참(搭懺) 전했다고 말하지 말라.
동해에 다리를 놓아 준 어룡(魚龍)도 감화되었네.
관동풍악(關東楓岳) 발연수석기(鉢淵藪石記; 이 기록은 사주寺主 영잠瑩岑이 지은 것으로 승안承安 4년 기미己未(1199)에 돌을 세웠다)
진표율사(眞表律師)는 전주(全州) 벽골군(碧骨郡) 도나산촌(都那山村) 대정리(大井里) 사람이다. 나이 12세에 중이 될 뜻을 가지니 아버지가 허락하므로 율사(律師)는 금산수(金山藪) 순제법사(順濟法師)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순제(順濟)가 <사미계법(沙彌戒法)>과 <전교공양차제비법(傳敎供養次第秘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2권을 주면서 말했다. "너는 이 계법(戒法)을 가지고 미륵(彌勒)·지장(地藏) 두 보살(菩薩) 앞으로 가서 간절히 법을 구하고 참회(懺悔)해서 친히 계법(戒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하도록 하라." 율사(律師)는 가르침을 받들고 작별하여 물러나와 두루 명산(名山)을 유람하니 나이 이미 27세가 되었다. 상원(上元) 원년 경자(庚子; 760)에 쌀 20말을 쪄서 말려 양식을 만들어 보안현(保安縣)에 가서 변산(邊山)에 있는 불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갔다. 쌀 5홉으로 하루의 양식을 삼았는데, 그 가운데서 한 홉을 덜어서 쥐를 길렀다. 율사는 미륵상(彌勒像) 앞에서 부지런히 계법(戒法)을 구했으나 3년이 되어도 수기(授記)를 얻지 못했다. 이에 발분(發憤)하여 바위 아래에 몸을 던지니, 갑자기 청의동자(靑衣童子)가 손으로 받들어 돌 위에 올려 놓았다. 율사는 다시 지원(志願)을 내어 21일을 기약하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수도(修道)하여 돌로 몸을 두드리면서 참회하니, 3일 만에 손과 팔뚝이 부러져 땅에 떨어진다. 7일이 되던 날 밤에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손에 금장(金杖)을 흔들면서 와서 그를 도와 주니 손과 팔뚝이 전과 같이 되었다. 보살이 그에게 가사(袈裟)와 바리때를 주니 율사는 그 영응(靈應)에 감동하여 더욱더 정진(精進)했다. 21일이 다 차니 곧 천안(天眼)을 얻어 도솔천중(兜率天衆)들이 오는 모양을 볼 수 있었다. 이에 자장보살과 미륵보살의 앞에 나타나니 미륵보살이 율사의 이마를 만지면서 말했다. "잘하는도다. 대장부여! 이와 같이 계(戒)를 구하여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간절히 구해서 참회하는도다." 지장이 <계본(戒本)>을 주고, 미륵(彌勒)이 또 목간자(木簡子) 두 개를 주었는데, 하나에는 아홉째 간자, 또 하나에는 여덟째 간자라고 씌어 있었다. 미륵보살이 율사에게 말한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 뼈이니, 이것은 곧 시(始)와 본(本)의 두 각(覺)을 이르는 것이다. 또 아홉번째 간자는 법(法)이고, 여덟 번째 간자는 신훈성불종자(新熏成佛種子)이니, 이것으로써 마땅히 과보(果報)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현세(現世)의 육신(肉身)을 버리고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아 이후에 도솔천(兜率天)에 가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을 마치고 두 보살은 곧 숨었다. 이 때가 임인(壬寅; 762)년 4월 27일이었다.
율사가 교법(敎法)을 받고 금산사(金山寺)를 세우고자 하여 산에서 내려와 대연진(大淵津)에 이르니, 갑자기 용왕(龍王)이 나와서 옥가사(玉袈裟)를 바치고 팔만권속(八萬眷屬)을 거느리고 그를 호위하여 금산수(金山藪)로 가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며칠 안에 절이 완성되었다. 또 미륵보살이 감동하여 도솔천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와 율사에게 계법(戒法)을 주니 이에 율사는 시주(施主)를 권하여 미륵장육상(彌勒丈六像)을 만들고, 또 미륵보살이 내려와서 계법을 주는 모양을 금당(金堂) 남쪽 벽에 그렸다. 상(像)은 갑진(甲辰; 764)년 6월 9일에 완성하여 병오(丙午; 766)년 5월 1일에 금당에 모셨으니, 이 해가 대력(大曆) 원년이었다.
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으로 가는 도중에 우차(牛車)를 탄 사람을 만났는데 그 소들이 율사의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우니 수레에 탄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와 물었다. "무슨 까닭으로 이 소들이 스님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 그리고 스님은 어디서 오시는 분입니까." 율사가 말한다. "나는 금산수(金山藪)의 중 진표(眞表)요. 나는 일찍이 변산(邊山)의 불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가 미륵·지장의 두 보살 앞에서 친히 계법(戒法)과 진생(眞생)을 받았기 때문에 절을 지어 길이 수도(修道)할 곳을 찾아 오는 것입니다. 이 소들은 겉은 어리석은 듯하지만 속은 현명합니다. 내가 계법받는 것을 알고, 불법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무릎을 꿇고 우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이 말을 다 듣고 나더니 말한다. "짐승도 오히려 이러한 신심(信心)이 있는데 하물며 나는 사람으로서 어찌 무심하겠습니까." 그는 즉시 손으로 낫[렴]을 쥐고 스스로 자기 머리털을 잘라 버렸다. 율사는 자비한 마음으로 다시 그의 머리를 깎아 주고 계를 주었다. 이들은 속리산 골짜기 속에 이르러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을 보고 표를 해 두었다. 그들은 명주(溟州) 해변으로 돌아와 천천히 가는데, 물고기와 자라 등속이 바다에서 나와 율사의 앞에 오더니 몸을 맞대어 육지처럼 만들어 주므로 율사는 그것을 밟고 바다에 들어가서 계법을 외워 주고 다시 나가 고성군(高城郡)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가서 비로소 발연수(鉢淵藪)를 세우고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었다. 여기에서 7년 동안 살았는데, 명주(溟州) 지방에 흉년이 들어서 사람들이 모두 굶주렸다. 율사가 이들을 위해서 계법을 설(說)하니 사람마다 받들어 지켜서 삼보(三寶)에 공경을 다하여, 갑자기 고성(高城) 바닷가에 무수한 물고기들이 저절로 죽어서 나왔다. 사람들이 이것을 팔아 먹을 것을 장만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율사는 발연수(鉢淵藪)에서 나와 다시 불사의방(不思議房)에 이르렀는데 그 후에는 고향으로 가서 그 아버지를 뵙기도 하고 혹은 진문대덕(眞門大德)의 방에 가서 살기도 했다. 이때 속리산의 고승 영심(永深)이 대덕(大德)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과 함께 율사가 있는 곳에 와서 청했다. "우리들은 천릿길을 멀다 하지 않고 와서 계법을 구하오니 법문(法門)을 주시기 바랍니다." 율사가 잠자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니 세 사람은 복숭아나무 위에 올라가 거꾸로 땅에 떨어지면서 맹렬히 참회했다. 이에 율사가 교(敎)를 전하여 관정(灌頂)하고 드디어 가사와 바리때와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秘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2권과 간자(簡子) 189개를 주었다. 다시 미륵진생(彌勒眞생) 아홉째 간자와 여덟째 간자를 주면서 경계했다. "아홉번째 간자는 법이요, 여덟째 간자는 신훈성불종자(新熏成佛種子)다. 내가 이미 너희들에게 주었으니 가지고 속리산으로 돌아가라. 그 산에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이 있으니, 거기에 정사(精舍)를 세우고 이 교법에 의해서 널리 인간계(人間界)와 천상계(天上界)의 중생들을 건지고, 후세에까지 전하도록 하라." 영심 등이 가르침을 받들고 바로 속리산에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세우고 길상사(吉祥寺)라고 했다. 영심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점찰법회를 열었다. 율사는 그 아버지와 함께 다시 발연사에 가서 함께 도업(道業)을 닦아 효도를 다했다.
율사가 세상을 떠날 때 절의 동쪽 큰 바위 위에 올라가서 죽으니 제자들이 그 시체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공양하다가 뼈가 흩어져 떨어지자 흙으로 덮어 묻어서 무덤을 만들었다. 그 무덤에 푸른 소나무가 바로 나더니 세월이 오래 되자 말라죽었다. 다시 나무 하나가 났는데 뿌리는 하나이더니 지금은 나무가 쌍으로 서 있다.
대개 그를 공경하는 자가 있어 소나무 밑에서 뼈를 찾는데, 혹은 얻기도 하고 혹은 얻지 못하기도 했다. 나는 율사의 뼈가 아주 없어질까 두려워하여 정사(丁巳; 1197)년 9월에 특히 소나무 밑에 가서 뼈를 주워 통에 담았는데 3홉 가량이나 되었다. 이에 큰 바위 위에 있는 쌍으로 난 나무 밑에 돌을 세워 뼈를 모셨다.
이 기록에 실린 진표의 사적은 발연석기(鉢淵石記)와는 서로 다른다. 때문에 영잠(瑩岑)이 기록한 것만 추려서 싣는 것이다. 후세의 어진 이들은 마땅히 상고할 것이다. 무극(無極)은 쓴다.
승전촉루(勝詮촉루)
중 승전(勝詮)은 그 내력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일찍이 배를 타고 중국에 가서 현수국사(賢首國師)의 강석(講席)에 나가 현언(玄言)을 받아 정미한 것을 연구하여 생각을 쌓고, 보는 것이 슬기롭고 뛰어나 깊은 것과 숨은 것을 찾아 그 묘함이 심오(深奧)함을 다하였다. 이에 그는 인연 있는 곳으로 가고자 하여 고국(故國)으로 돌아올 마음을 가졌다.
처음에 현수(賢首)는 의상(義湘)과 함께 배워 지엄화상(智儼和尙)의 사랑스런 가르침을 받았다. 현수는 스승의 말에 대하여 글뜻과 과목(科目)을 연술(演述)하여, 승전법사(勝詮法師)가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기회로 이 글을 보내니 의상도 역시 글을 보냈다 한다. 그 별폭(別幅)에는 이렇게 말했다. "<탐현기(探玄記)> 20권 중에서 두 권은 아직 완성되지 못했고, <교분기(敎分記)> 3권, <현의장등잡의(玄義章等雜義)> 1권, <화엄범어(華嚴梵語)> 1권, <기신소(起信疎)> 2권, <십이문소(十二門疎)> 1권, <법계무차별론소(法界無差別論疏)> 1권을 모두 옮겨 베꼈으니 승전법사 편에 보내드립니다. 저번에 신라의 중 효충(孝忠)이 금 9푼을 갖다 주면서 상인(上人)이 보낸 것이라고 하오니, 비록 편지는 받지 못했지만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인도의 군지조관(軍持조灌) 한 개를 보내어 적은 정성을 표하오니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아룁니다." 승전법사가 돌아오자 이 현수의 글을 의상에게 전했다. 의상은 법장(法藏)의 이 글을 보니 마치 지엄(智儼)의 가르침을 친히 듣는 것과 같았다. 수십 일 동안 탐색(探索)하고 연구하여 제자들에게 주어 이 글을 널리 연술(演述)시켰으니, 이 말은 의상의 전기에 실려 있다.
상고해 보면 이렇다. 이 원만하고 융통(融通)하는 가르침이 청구(靑丘)에 널리 퍼진 것은 실로 승전법사의 공이다. 그 후에 중 범수(梵修)가 멀리 당나라에 가서 새로 번역한 <후분화엄경(後分華嚴經)>·<관사의소(觀師義疏)>를 구해 가지고 돌아와 연술했다고 하니, 이때는 정원(貞元) 기묘(己卯; 799)년이었다. 이도 역시 불법을 구해다가 널리 드날린 사람이라 하겠다.
승전은 상주(尙州) 영내(領內)의 개령군(開寧郡) 경계에 절을 새로 짓고 돌들로 관속(官屬)으로 삼아 <화엄경(華嚴經)>을 개강(開講)했다. 그 뒤에 신라 중 가귀(可歸)가 자못 총명하고 도리를 알아서 전등(傳燈)을 계속하여 이에 <심원장(心源章)>을 편찬하였으니, 그 대략에 보면 이러하다. 승전법사는 돌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불경을 논의(論議)하고 강연했다고 하니, 그곳은 지금의 갈항사(葛項寺)이다. 그 돌 80여 개는 지금까지 강사(綱司)가 전하고 있는데 자못 신령스럽고 이상한 것이 있다.
그 밖의 사적들은 모두 비문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대각국사실록(大覺國師實錄)> 속에 있는 것과 같다.
심지계조(心地繼祖)
중 심지(心地)는 진한(辰韓) 제41대 헌덕대왕(憲德大王) 김씨(金氏)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깊고 천성이 맑고 지혜가 있었다. 학문에 뜻을 두는 나이서 불도(佛道)에 부지런했다. 중악(中岳; 지금의 공산公山)에 가서 살고 있는데 마침 속리산(俗離山)의 심공(深公)이 진표율사(眞表律師)의 불골간자(佛骨簡子)를 전해 받아서 과정법회(果訂法會)를 연다는 말을 듣고, 뜻을 결정하여 찾아갔으나 이미 날짜가 지났기 때문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이에 땅에 앉아서 마당을 치면서 신도(信徒)들을 따라 예배하고 참회했다. 7일이 지나자 큰 눈이 내렸으나 심지(心地)가 서 있는 사방 10척 가량은 눈이 내리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그 신기하고 이상함을 보고 당(堂)에 들어오기를 허락했으나 심지는 사양하여 거짓 병을 칭탁하고 방 안에 물러앉아 당을 향해 조용히 예배했다. 그의 팔꿈치와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려 마치 진표공(眞表公)이 선계산(仙溪山)에서 피를 흘리던 일과 같았는데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매일 와서 위문했다. 법회가 끝나고 산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옷깃 사이에 간자(簡子) 두 개가 끼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가지고 돌아가서 심공(深公)에게 아뢰니 영심(永深)이 말하기를, "간자는 함 속에 들어 있는데 그럴 리가 있는가."하고 조사해 보니 함은 봉해 둔 대로 있는데 열고 보니 간자는 없었다. 심공이 매우 이상히 여겨 다시 간자를 겹겹이 싸서 간직해 두었다. 심지가 또 길을 가는데 간자가 먼저와 같았다. 다시 돌아와서 아뢰니 심공이 말하기를, "부처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는 받들어 행하도록 하라"하고 간자를 그에게 주었다. 심지가 머리에 이고 중악으로 돌아오니 중악의 신이 선자(仙子) 둘을 데리고 산꼭대기에서 심지를 맞아 그를 인도하여 바위 위에 앉히고는 바위 밑으로 돌아가 엎드려서 공손히 정계(正戒)를 받았다. 이때 심지가 말했다. "이제 땅을 가려서 부처님과 간자를 모시려 하는데, 이것은 우리들만이 정할 일이 못되니 그대들 셋과 함께 높은 곳에 올라가서 간지를 던져 자리를 점치도록 하자." 이에 신들과 함께 산마루로 올라가서 서쪽을 향하여 간자를 던지니, 간자는 바람에 날아간다. 이때 신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막혔던 바위 멀리 물러가니 숫돌처럼 평평하고,
낙엽이 날아 흩어지니 앞길이 훤해지네.
불골(佛骨) 간자(簡子)를 찾아 얻어서,
깨끗한 곳 찾아 정성드리려네.
노래를 마치자 간자를 숲속 샘에서 찾아 곧 그 자리에 당(堂)을 짓고 간자를 모셨으니, 지금 동화사(桐華寺) 첨당(籤堂) 북쪽에 있는 작은 우물이 이것이다.
본조(本朝) 예종(睿宗)이 일찍이 부처의 간자를 맞아 대궐 안에서 예배했는데, 갑자기 아홉 번째 간자 하나를 잃어 아간(牙簡)으로 대신하여 본사(本寺)에 돌려보냈더니, 지금은 이것이 점점 변해서 같은 빛이 되어 새것과 옛것을 분별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 바탕은 상아도 옥도 아니다.
<점찰경(占察經)> 상권(上卷)을 상고해 보면 189개 간자(簡子)의 이름이 있는데 이러하다. 1은 상승(上乘)을 구해서 불퇴위(不退位)를 얻은 것이요, 2는 구하는 과(果)가 마땅한 증(證)을 나타내는 것이요, 제3과 제4는 중승(中乘)과 하승(下乘)을 구해서 불퇴위(不退位)를 얻은 것이요, 5는 신통력(神通力)을 구해서 성취함이요, 6은 사범(四梵)을 구해서 성취함이요, 7은 세선(世禪)을 닦아 성취함이요, 8은 받고 싶은 묘계(妙戒)를 얻음이요, 9는 일찍이 받은 구계(具戒)를 얻음이요(이 글을 가지고 고정考訂한다면, 미륵보살彌勒菩薩이 말한, '새로 얻은 계戒'는 금세今世에 처음 얻는 계戒를 말하는 것이요, '옛날 얻은 계戒'는 과거세過去世에 일찍이 받았다가 금세今世에 또 더 받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수생본유修生本有의 신구新舊를 말한 것이 아님을 알겠다), 10은 하승(下乘)을 구하며 아직 신심(信心)에 살지 않는 것이요, 다음은 중승(中乘)을 구하여 아직 신심에 살지 않음이다. 이와 같이 해서 제172까지는 모두 과거세(過去世)나 현세(現世) 사이에 혹 착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고, 혹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한 일들이다. 제173은 몸을 버려 이미 지옥에 들어감이요(이상은 모두 미래未來에의 과果이다), 제174는 죽은 후에 축생(畜生)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귀(餓鬼)·수라(修羅)·인(人)·인왕(人王)·천(天)·천왕(天王)에까지 미치고, 불법(佛法)을 들음, 출가(出家), 성승(聖僧)을 만남,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남, 정토(淨土)에 태어남, 부처를 찾아뵘, 하승(下乘)에 머무름, 중승에 머무름, 상승에 머무름, 해탈(解脫)을 얻음의 제189 등이 이것이다(위에서는 하승下乘에 머무름에서부터 상승上乘에서 불퇴전不退轉함을 얻음까지 말했고, 이제 상승上乘에서 해탈解脫을 얻음 등을 말함은 이것으로 분별된다). 이들은 모두 삼세(三世)의 선악과보(善惡果報)의 차별의 모습이다.
이것으로 점을 쳐 보면, 마음이 행하려고 한 일과 간자가 서로 맞으면 감응(感應)하고 그렇지 못하면 지극한 마음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이것을 허류(虛謬)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8과 9의 두 간자는 오직 189개 가운데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송전(宋傳)>에서는 다만 108 첨자(籤子)라고만 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필경 저 백팔번뇌(百八煩惱)의 명칭으로 알고 말한 것 같다. 그리고 또 경문(經文)을 상고해 보지도 않은 것 같다.
또 상고해 보면, 본조(本朝)의 문사(文士)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 2권에 신라 말년의 고승(高僧) 석충(釋沖)이 고려 태조(太祖)에게 진표율사(眞表律師)의 가사 한 벌과 계간자(戒簡子) 189개를 바쳤다고 써 있다. 이것이 지금 동화사(桐華寺)에 전해 오는 간자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알 수 없다.
찬(讚)해 말한다.
금규(金閨) 속에서 자랐건만 일찍 속박을 벗어났고,
부지런함과 총명함 하늘이 주었네.
뜰에 가득 쌓인 눈 속에서 간자를 뽑아,
동화산(桐華山) 높은 봉우리에 갖다 놓았네.
현유가(賢瑜가), 해화엄(海華嚴)
유가종(瑜伽宗)의 조사(祖師) 고승(高僧) 대현(大賢)은 남산(南山) 용장사(茸長寺)에 살았다. 그 절에는 미륵보살(彌勒菩薩)의 돌로 만든 장육상(丈六像)이 있었다. 대현이 항상 이 장육상을 돌면 장육상도 역시 대현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 대현은 슬기롭고 분명하고 정밀하고 민첩해서 판단하고 분별하는 것이 명백했다. 대개 법상종(法相宗)의 전량(銓量)은 그 뜻과 이치가 그윽하고 깊어서 해석하기가 매우 어렵다. 때문에 중국의 명사 백거이(白居易)도 일찍이 이것을 연구하다가 다 알지 못하고 말했다. "유식(唯識)은 뜻이 그윽하여 알기 어렵고, 인명(因明)은 분석해도 열리지 않는다." 그러니 학자들이 배우기 어려운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대현은 홀로 그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잠시 동안에 그윽하고 깊은 뜻을 터득하여 회회유인(恢恢游刃)하였다. 이리하여 동국(東國)의 후진(後進)들은 모두 그 가르침에 따랐고, 중국의 학사(學士)들도 간혹 이것을 얻어 안목(眼目)으로 삼았다.
경덕왕(景德王) 천보(天寶) 12년 계사(癸巳; 753) 여름에 가뭄이 심하니 대현을 대궐로 불러들여 <금광경(金光經)>을 강(講)하여 단비를 빌게 했다. 어느날 재를 올리는데 바라를 열어 놓고 한참 있었으나 공양하는 자가 정수(淨水)를 늦게 올리므로 감리(監吏)가 꾸짖었다. 이에 공양하는 자가 말했다. "대궐 안 우물이 말랐기 때문에 먼 곳에서 떠오느라고 늦었습니다." 대현은 그 말을 듣고 말했다. "왜 진작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가." 낮에 강론할 때 대현은 향로를 받들고 잠자코 있으니 잠깐 사이에 우물물이 솟아나와서 그 높이가 일곱 길이나 되어 찰당(刹幢)의 높이와 가지런하게 되니, 궁중(宮中)이 모두 놀라서 그 우물을 금광정(金光井)이라 했다. 대현은 일찍이 스스로 청구사문(靑丘沙門)이라 일컬었다.
찬(讚)해 말한다.
남산(南山)의 불상(佛像)을 도니 불상도 따라 얼굴 돌려,
청구(靑丘)의 불교가 다시 중천(中天)에 떠올랐네.
궁중 우물을 솟구치게 한 것이,
향로 한 줄기 연기에서 시작될 줄 누가 알리.
그 이듬해 갑오(甲午; 754)년 여름에 왕은 또 고승 법해(法海)를 황룡사(黃龍寺)로 청해 <화엄경(華嚴經)>을 강론하게 하고, 친히 가서 향을 피우고 조용히 말했다. "지난해 여름에 대현법사(大賢法師)는 <금광경(金光經)>을 강론하여 우물물을 일곱 길이나 솟아나오게 했소. 그대의 법도(法道)는 어떠하오." 법해가 말한다. "그것은 특히 조그만 일이어서 족히 칭찬할 것이 못됩니다. 이제 창해(滄海)를 기울여서 동악(東岳)을 잠기게 하고, 서울을 물에 떠내려가게 하는 것도 또한 어렵지 않습니다." 왕은 믿지 않고 농담으로만 여겼다. 오시(午時)에 강론하는데 향로를 안고 고요히 있노라니 잠깐 사이에 궁중에서 갑자기 우는 소리가 나고, 궁리(宮吏)가 달려와서 보고한다. "동쪽 연못이 이미 넘쳐서 내전(內殿) 50여 칸이 떠내려갔습니다." 왕이 멍하니 어쩔 줄을 몰라하니 법해가 웃으면서 말한다. "동해가 기울고자 수맥(水脈)을 먼저 불린 것뿐입니다." 왕은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 절을 했다. 이튿날 감은사(感恩寺)에서 아뢰었다. "어제 오시(午時)에 바닷물이 넘쳐흘러서 불전(佛殿)의 뜰 앞까지 밀려 왔다가 저녁때에 물러갔습니다." 이 일로 해서 왕은 더욱 법해를 믿고 공경했다.
선덕왕(善德王) 덕만(德慢)이 병이 들어 오랫동안 낫지 않자, 흥륜사(興輪寺)의 승려 법척(法척)이 임금의 부름을 받아 병을 치료했으나 오래 되어도 효력이 없었다. 이때 밀본법사(密本法師)의 덕행(德行)이 나라 안에 소문이 퍼져서 좌우 신하들이 바꾸기를 청했다. 왕은 그를 궁중으로 불러들이니 밀본은 신장(宸仗) 밖에서 약사경(藥師經)을 읽었다. 경을 다 읽고 나자 가졌던 육환장(六環杖)이 침실 안으로 날아 들어가더니 늙은 여우 한 마리와 중 법척(法척)을 찔러서 뜰 아래에 거꾸로 내던지니 왕의 병은 이내 나았다. 이때 밀본의 이마 위에 오색의 신비스러운 빛이 비쳐 보는 사람이 모두 놀랐다.
또 승상(丞相) 김양도(金良圖)가 어렸을 때 갑자기 입이 붙고 몸이 굳어져서 말도 못하고 수족도 놀리지 못했다. 항상 보면, 큰 귀신 하나가 작은 귀신을 데리고 와서 집 안에 있는 음식을 모조리 맛보는 것이었다. 혹 무당이 와서 제사를 지내면 귀신들의 무리가 서로 다투어가며 욕했다. 양도가 귀신들에게 물러가라고 명하고 싶었지만 입이 붙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이름은 전하지 않는 법류사(法流寺)의 중을 청해다가 불경을 외게 했더니, 큰 귀신이 작은 귀신에게 명하여 쇠망치로 승려의 머리를 때려 땅에 넘어뜨리니 피를 토하고 죽었다. 며칠 후에 사자(使者)를 보내서 밀본을 맞아오도록 하니 사자가 돌아와서 말한다. "밀본법사가 우리 청을 받아들여 장차 오신다고 했습니다." 여러 귀신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얼굴빛이 변하니 작은 귀신이 말한다. "법사가 오면 이롭지 못할 것이니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큰 귀신은 거만을 부리고 태연스럽게 말한다. "무슨 해로운 일이 있겠느냐." 이윽고 사방에서 대력신(大力神)이 온 몸에 쇠갑옷과 긴 창으로 무장하고 나타나더니 모든 귀신들을 잡아 묶어 가지고 갔다. 다음에 무수한 천신(天神)들이 둘러서서 기다렸다. 조금 있더니 밀본이 도착하여, 경문(經文)을 펴기도 전에 양도의 병은 나아서 말도 하고 몸도 움직였다. 그리하여 지나간 사실을 자세히 말했다. 양도는 이 일로 해서 불교를 독실히 믿어 한평생 게을리하지 않았다. 흥륜사(興輪寺) 오당(吳堂)의 주불(主佛)인 미타존상(彌타尊像)과 좌우 보살(菩薩)을 소상(塑像)으로 만들고, 또 그 당(堂)에 금으로 벽화를 그렸다.
밀본은 일찍이 금곡사(金谷寺)에서 살았었다. 또 김유신(金庾信)은 일찍이 늙은 거사(居士) 한 사람과 교분(交分)이 두터웠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 때 유신공(庾信公)의 친척인 수천(秀天)이 오랫동안 나쁜 병에 걸렸으므로 공이 거사를 보내서 진찰해 보도록 했다. 때마침 수천의 친구 인혜사(因惠師)라는 이가 중악(中岳)에서 찾아왔다가 거사를 보더니 업신여겨 말했다. "그대의 형상과 태도를 보니 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인데 어찌 남의 병을 고치겠는가." 이에 거사는 말했다.
"나는 김공(金公)의 명을 받고 마지못해서 왔을 뿐이오." 이에 인혜(因惠)가 말했다.
"그대는 내 신통력을 좀 보라" 하더니 향로를 받들어 향을 피우고는 주문을 외니, 이윽고 오색 구름이 이미 위를 두르고 천화(天花)가 흩어져 떨어졌다. 거사가 말한다. "스님의 신통력은 불가사의합니다. 저에게도 역시 변변치 못한 기술이 있어서 시험해 보고 싶으니, 청컨대 스님께서는 잠깐 동안 제 앞에 서 계십시오." 인혜는 하라는 대로 했다. 거사가 손가락을 한번 튀기자 인혜는 공중으로 거꾸로 올라가는데 그 높이가 한 길이나 된다. 한참 만에야 서서히 거꾸로 내려와 머리가 땅에 박힌 채 말뚝과 같이 우뚝 섰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밀고 잡아당겨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거사가 그곳에서 나가 버리니, 인혜는 거꾸로 박힌 채 밤을 새웠다. 이틑날 수천이 사람을 시켜 이 사실을 김공(金公)에게 알리니, 김공은 거사에게 가서 인혜를 풀어주게 했다. 그 뒤로 인혜는 다시는 재주를 부리는 체하지 않았다.
찬(讚)해 말한다.
붉은빛 자줏빛이 분분해 몇 번이나 주색(朱色)을 어지럽히니,
슬프다, 어목(漁目)도 어리석은 사람 속였네.
거사가 손가락 가볍게 튀기지 않았더면,
건상(巾箱)속에 무부(무부)를 얼마나 담았을까.
혜통황룡(惠通降龍)
중 혜통(惠通)은 그 씨족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백의(白衣)로 있을 때 그의 집은 남산 서쪽 기슭인 은천동(銀川洞) 어귀(지금의 남간사南澗寺 동리東里)에 있었다. 어느날 집 동쪽 시내에서 놀다가 수달[獺] 한 마리를 잡아 죽이고 그 뼈를 동산 안에 버렸다. 그런데 이튿날 새벽에 그 뼈가 없어졌으므로 핏자국을 따라 찾아가니 뼈는 전에 살던 굴로 되돌아가서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쭈그리고 있다. 혜통이 바라보고 한참이나 놀라고 이상히 여겨 감탄하고 망설이다가, 마침내 속세를 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혜통으로 바꿨다.
당나라에 가서 무외삼장(無畏三藏)을 뵙고 배우기를 청하니 삼장이, "우이(우夷)의 사람이 어떻게 법기(法器)가 될 수 있겠는가" 하고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러나 혜통은 쉽게 물러가지 않고 3년 동안이나 부지런히 섬겼다. 그래도 무외(無畏)가 허락하지 않자 혜통은 이에 분하고 애가 타서 뜰에 서서 불동이를 머리에 이고 있었다. 조금 후에 정수리가 터지는데 소리가 천둥과 같았다. 삼장(三藏)이 이 소리를 듣고 와서 보더니 물동이를 치우고 손가락으로 터진 곳을 만지면서 신주(神呪)를 외니 상처는 이내 아물어서 전과 같이 되었다. 그러나 흉터가 생겨 왕자(王字) 무늬와 같으므로 왕화상(王和尙)이라고 하여 그의 인품을 깊이 인정하여 인결(印訣)을 전했다.
이때 당나라 황실에서는 공주가 병이 있어 고종(高宗)은 삼장에게 치료해 달라고 청하자 삼장은 자기 대신 혜통을 천거했다. 혜통이 가르침을 받고 딴 곳에 거처하면서 횐 콩 한 말을 은그릇 속에 넣고 주문을 외니, 그 콩이 변해서 횐 갑옷을 입은 신병(新兵)이 되어 병마(病魔)들을 쫓았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에 다시 검은 콩 한 말을 금그릇에 넣고 주문을 외니, 콩이 변해서 검은 갑옷 입은 신병(新兵)이 되었다. 두 빛의 신병이 함께 병마를 쫓으니 갑자기 교룡(蛟龍)이 나와 달아나고 공주의 병이 나았다. 용은 혜통이 자기를 쫓은 것을 원망하여 신라 문잉림(文仍林)에 와서 인명을 몹시 해쳤다 당시 정공(鄭恭)이 당에 사신으로 갔다가 혜통에게 말했다. "스님이 쫓아낸 독룡(毒龍)이 본국에 와서 해(害)가 심하니 빨리 가서 없애 주십시오." 혜통은 이에 정공과 함께 인덕(麟德) 2년 을축(乙丑; 665)에 본국에 돌아와 용을 쫓아 버렸다. 용은 또 정공을 원망하여 이번에는 버드나무로 변해서 정씨의 문밖에 우뚝 섰다. 정공은 알지 못하고 다만 그 무성한 것만 좋아하여 무척 사랑했다. 신문왕(神文王)이 죽고 효소왕(孝昭王)이 즉위하여 산릉(山陵)을 닦고 장사지내는 길을 만드는데, 정씨 집 버드나무가 길을 가로막고 있어 유사(有司)가 베어 버리려 하자 정공이 노해서 말했다. "차라리 내 머리를 벨지언정 이 나무는 베지 못한다." 유사가 이 말을 왕에게 아뢰니 왕은 몹시 노해서 법관(法官)에게 명령했다. "정공이 왕화상의 신술(神術)만 믿고 장차 불손(不遜)한 일을 도모하려 하여 왕명을 업신여기고 거역하여, 차라리 제 머리를 베라고 하니 마땅히 제가 좋아하는 대로 할 것이다." 이리하여 그를 베어 죽이고 그 집을 흙으로 묻어 버리고 나서 조정에서 의론했다. "왕화상이 정공과 매우 친하여 반드시 연루(連累)된 혐의가 있을 것이니 마땅히 먼저 없애야 할 것입니다." 이에 갑옷 입은 병사를 시켜 그를 잡게 했다.
혜통이 왕망사(王望寺)에 있다가 갑옷 입은 병사가 오는 것을 보고 지붕에 올라가서 사기 병과 붉은 먹을 찍은 붓을 가지고 그들에게 소리쳤다. "내가 하는 것을 보라"하고 병의 목에다 한 획을 그으면서 말한다." 너희들은 모두 너희들의 목을 보라." 목을 보니 모두 붉은 획이 그어져 있으므로 서로 보면서 놀랐다. 혜통은 또 소리친다. "내가 만일 이 병의 목을 자르면 너희들의 목도 잘려질 것이다. 어찌 하려느냐." 병사들이 달려와서 붉은 획이 그어진 자기네 목을 왕에게 보이니 왕이 말하기를, "화상의 신통력을 어찌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겠느냐" 하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왕녀(王女)가 갑자기 병이 나자 왕은 혜통을 불러서 치료하게 했더니 병이 나았으므로 왕은 크게 기뻐했다. 혜통은 이것을 보고 말했다. "정공은 독룡의 해를 입어서 죄없이 국가의 형벌을 받았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마음 속으로 후회했다. 이에 정공의 처자에게는 죄를 면하게 하고 혜통을 국사(國師)로 삼았다. 용은 이미 정공에게 원수를 갚자 기장산(機張山)에 가서 웅신(熊神)이 되어 해독을 끼치는 것이 더욱 심하여 백성들이 몹시 괴로워했다. 혜통은 산속에 이르러 용을 달래어 불살계(不殺戒)를 주니 그제야 웅신의 해독이 그쳤다.
처음에 신문왕이 등창이 나서 혜통에게 치료해 주기를 청하므로 혜통이 와서 주문을 외니, 그 자리에서 병이 나았다. 이에 혜통이 말했다. "폐하께서 전생에 재상의 몸으로 장인(臧人) 신충(信忠)이란 사람을 잘못 판결하여 종으로 삼으셨으므로 신충이 원한을 품고 윤회환생(輪廻還生)할 때마다 보복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등창도 역시 신충의 탈이오니 마땅히 신충을 위해서 절을 세워 그 명복을 빌어서 원한을 풀게 하십시오." 왕이 옳다고 생각하여 절을 세워 이름을 신충봉성사(信忠奉聖寺)라고 했다. 절이 다 이루어지자 공중에서 노래하는 소리가 났다. "왕이 절을 지어 주셨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나 하늘에 태어났으니, 원한은 이미 풀렸습니다."(어떤 책에는 이 사실이 진표眞表의 전기傳記에 실려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또 노래부른 곳에 절원당(折怨堂)을 지었는데 그 당(堂)과 절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보다 앞서 밀본 법사(密本法師)의 뒤에 고승(高僧) 명랑(明郞)이 있었다. 용궁(龍宮)에 들어가서 신인(神人; 범서梵書엔 문두루文豆蔞라고 했는데, 여기에는 신인神人이라고 했다)을 얻어 신유림(神遊林; 지금의 천왕사天王寺)를 처음 세우고, 여러 번 이웃 나라가 침입해 온 것을 기도로 물리쳤다. 이에 화상은 무외삼장(無畏三藏)의 골자(骨子)를 전하고, 속세를 두루 다니면서 사람을 구제하고 만물을 감화(感化)시켰다, 또 숙명(宿明)의 밝은 지혜로 절을 세워 원망을 풀게 하니 밀교(密敎)의 풍도가 이에 크게 떨쳤다. 천마산(天磨山) 총지암(總持암)과 무악(毋岳)의 주석원(呪錫院) 등은 모두 그 지류(支流)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혜통의 세속 이름은 존승각간(尊勝角干)이라고 하는데 각간은 곧 신라의 재상과 같은 높은 벼슬이니, 혜통이 벼슬을 지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또 어떤 사람은 시랑(豺狼)을 쏘아 잡았다고 하지만 모두 자세히 알 수 없다.
찬(讚)해 말한다.
산도(山桃)와 계행(溪杏)이 울타리에 비쳤는데,
한 지경 봄이 깊어 두 언덕 꽃이 피었네.
혜통이 수달을 한가로이 잡은 때문에,
마귀(魔鬼)와 외도(外道)를 모두 서울에서 멀리했네.
명랑신인(明朗神印)
〈금광사(金光寺) 본기(本記)〉를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법사 명랑(明朗)이 신라에 태어나서 당나라도 건너가 도를 배우고 돌아오는데 바다의 용의 청에 의해, 용궁(龍宮)에 들어가 비법(秘法)을 전하고, 황금 1,000냥(혹은 1,000근 이라고도 함)을 보시(布施)받아 가지고 땅 밑을 잠행(潛行)하여 자기 집 우물 밑에서 솟아나왔다. 이에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고 용왕(龍王)이 보시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佛像)을 장식하니 유난히 광채가 났다. 그런 때문에 절 이름을 금광사(金光寺)라고 했다."(〈승전僧傳〉에는 금우사金羽寺라고 했지만 잘못이다)
법사의 이름은 명랑이요, 자는 국육(國育)이며, 신라 사간(沙干) 재량(才良)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남간부인(南澗夫人)으로서 혹 법승랑(法乘娘)이라고도 하는데, 소판(蘇判) 무림(戊林)의 딸 김씨(金氏)로서 즉 자장(慈藏)의 누이 동생이다. 재량(才良)에게 세 아들이 있는데, 맏이는 국교대덕(國敎大德)이요, 다음은 의안대덕(義安大德)이며, 법사는 막내다. 처음에 그 어머니가 꿈에 푸른빛이 나는 구슬을 입에 삼기고 태기가 있었다.
신라 선덕왕(善德王) 원년(632)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정관(貞觀) 9년 을미(乙未; 635)에 돌아왔다. 총장(總章) 원년 무신(戊辰; 668)에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대병을 거느리고 신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남은 군사를 백제(百濟)에 머물러 두고 장차 신라를 쳐서 멸망시키려 했다. 신라 사람들이 이것을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막았다. 당나라 고종(高宗)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설방(薛邦)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장차 신라를 치려 했다. 문무왕(文武王)이 이것을 듣고 두려워하여 법사를 청해다가 비법을 써서 빌어서 이를 물리치게 했다(이 사실은 문무왕전文武王傳속에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신인종(神印宗)의 시조가 되었다.
우리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울 때 또한 해적이 와서 침범하니, 이에 안혜(安惠)ㆍ낭융(朗融)의 후예인 광학(廣學)ㆍ대연(大緣) 등 두 고승(高僧)을 청해다가 법을 만들어 해적을 물리쳐 진압했으니, 모두 명랑의 계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법사를 합하여 위로 용수(龍樹)에 이르기까지를 구조(九祖)로 삼았다. (본사기本寺記에는 삼사三師가 율조律祖가 되었다고 했으나 자세히 알 수 없다) 또 태조가 글들을 위해 현성사(現聖寺)를 세워 한 종파(宗派)의 근본을 삼았다.
또 신라 서울 동남쪽 20여 리 되는 곳에 원원사(遠原寺)가 있으니 세상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이 절은 안혜 등 네 대덕(大德)이 김유신(金庾信)ㆍ김의원(金義元)ㆍ김술종(金述宗) 등과 함께 발원하여 세운 것이며, 네 대덕의 유골이 모두 절의 동쪽 봉우리에 묻혔으므로 사령산(四靈山) 조사암(祖師岩)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네 고승은 모두 신라 때의 유명한 중이라 하겠다.
돌백사(돌白寺) 주첩주각(柱貼注脚)에 씌어 있는 것을 상고하여 보면 이러하다. 경주(慶州) 호장(戶長) 거천(巨川)의 어머니는 하지녀(河之女)이고, 이 하지녀의 어머니는 명주녀(明珠女)이다. 명주녀의 어머니인 적리녀(積利女)의 아들은 광학대덕(廣學大德)과 대연삼중(大緣三重; 예전의 이름은 선회善會)이다. 이들 형제 두 사람이 모두 신인종(神印宗)에 귀의했다. 장흥(長興) 2년 신묘(辛卯; 931)에 태조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서 임금의 행차를 따라다니며 분향하고 수도(修道)하니, 그 수고로움을 상 주어 두 사람의 부모의 기일보(忌日寶)로 전답 몇 결(結)을 돌백사에 주었다 한다. 이렇게 보면 광학ㆍ대연 두 사람은 성조(聖祖)를 따라 서울로 들어왔으며 안사(安師) 등은 김유신 등과 함께 원원사를 세운 사람이라 하겠다. 광학 등 두 사람의 뼈가 또 여기에 와서 안치(安置)되었을 뿐이고, 네 고승이 모두 원원사를 세웠다는 것은 아니며, 또 성조(聖祖)를 따라온 것도 아니다. 이것은 좀더 자세히 알아야 할 것이다.
진평왕(眞平王) 때 지혜(智惠)라는 비구니(比丘尼)가 있어 어진 행실이 많았다. 안흥사(安興寺)에 살았는데 새로 불전(佛殿)을 수리하려 했지만 힘이 모자랐다. 어느날 꿈에 모양이 아름답고 구슬로 머리를 장식한 한 선녀가 와서 그를 위로해 말했다. "나는 바로 선도산(仙桃山) 신모(神母)인데 네게 불전을 수리하려 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여 금 10근을 주어 돕고자 한다. 내가 있는 자리 밑에서 금을 꺼내서 주존(主尊) 삼상(三像)을 장식하고 벽 위에는 오삼불(五三佛) 육류성중(六類聖衆) 및 모든 천신(天神)과 오악(五岳)의 신군(神君; 신라 때의 오악五岳은 東의 토함산吐含山, 南의 지리산智異山, 西의 계룡산鷄龍山, 北의 태백산太伯山, 중앙中央의 부악父岳, 또는 공산公山이다)을 그리고, 해마다 봄과 가을의 10일에 남녀 신도들을 많이 모아 널리 모든 함령(含靈)을 위해서 점찰법회(占擦法會)를 베푸는 것으로써 일정한 규정을 삼도록 하라(본조本朝 굴암지屈弗池의 용이 황제皇帝의 꿈에 나타나 영취산靈鷲山에 낙사도장樂師道場을 영구히 열어 바닷길이 편안할 것을 청한 일이 있는데 그 일도 역시 이와 같다).
지혜가 놀라 꿈에서 깨어 무리들을 데리고 신사(神祀) 자리 밑에 가서, 황금 160냥을 파내어 불전 수리하는 일을 완성했으니, 이는 모두 신모(神母)가 시키는 대로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사적은 남아 있지만 법사(法事)는 폐지되었다. 신모는 본래 중국 제실(帝室)의 딸이며, 이름은 사소(娑蘇)였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術法)을 배워 해동(海東)에 와서 머물러 오랫동안 돌아 가지 않았다. 이에 부황(父皇)이 소리개 발에 매달아 그에게 보낸 편지에 말했다. "소리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지으라." 사소는 편지를 보고 소리개를 놓아 보내니, 이 선도산(仙桃山)으로 날아와서 멈추므로 드디어 거기에 살아 지선(地仙)이 되었다. 때문에 산 이름은 서연산(西鳶山)이라고 했다. 신모는 오랫동안 이 산에서 살면서 나라를 진호(鎭護)하니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매우 많았다. 때문에 나라가 세워진 뒤로 항상 삼사(三祀)의 하나로 삼았고, 그 차례도 여러 망(望)의 위에 있었다.
제 54대 경명왕(景明王)이 매사냥을 좋아하여 일찍이 여기에 올라가서 매를 놓았다가 잃어버렸다. 이 일로 해서 신모에게 기도했다. "만일 매를 찾게 된다면 마땅히 성모(聖母)께 작(爵)을 봉해 드리겠습니다." 이윽고 매가 날아와서 책상 위에 앉으므로 성모를 대왕(大王)에 봉작(封爵)하였다. 그가 처음 신한(辰韓)에 와서 성자(聖子)를 낳아 동국(東國)의 처음 임금이 되었으니 필경 혁거세(赫居世)와 알영(閼英)의 두 성군(聖君)을 낳았을 것이다. 때문에 계룡(鷄龍)ㆍ계림(鷄林)ㆍ백마(白馬) 등으로 일컬으니 이는 닭이 서쪽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성모는 일찍이 제천(諸天)의 선녀에게 비단을 짜게 해서 붉은빛으로 물들여 조복(朝服)을 만들어 남편에게 주었으니, 나라 사람들은 이 때문에 비로소 신비스러운 영험을 알게 되었다.
또 <국사(國史)>에 보면, 사신(史臣)이 말했다. "김부식(金富軾)이 정화(政和) 연간에 일찍이 사신으로 송나라에 들어가 우신관(佑神館)에 나갔더니 한 당(堂)에 여선(女仙)의 상(像)이 모셔져 있었다. 관반학사(館伴學士) 왕보(王보)가 말하기를, '이것은 귀국의 신인데 공은 알고 있습니까' 했다. 그리고 이어 말하기를, '옛날에 어떤 중국 제실(帝室)의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辰韓)으로 가서 아들을 낳았더니 그가 해동의 시조가 되었고, 또 그 여인은 지선(地仙)이 되어 길이 선도산(仙桃山)에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여인의 상입니다.' 했다."
또 송나라 사신 왕양(王襄)이 우리 조정에 와서 동신성모(東神聖母)를 제사지낼 때에 그 제문에, "어진 사람을 낳아 비로소 나라를 세웠다."는 글귀가 있었다. 성모가 이제 황금을 주어 부처를 받들게 하고, 중생을 위해서 향화법회(香火法會)를 열어 진량(津梁)을 만들었으니 어찌 다만 오래 사는 술법(術法)만 배워서 저 아득한 속에만 사로잡힐 것이랴.
찬(讚)해 말한다.
서연산(西鳶山)에 와서 몇십 년이나 지냈는가.
천제(天帝)의 여인 불러 예상(霓裳)을 짰었네.
길이 사는 법도 이상한 일 없지 않았는데,
금선(金仙) 뵙고 옥황(玉皇)이 되었네.
욱면비 염불 서승(郁面婢 念佛 西昇)
경덕왕(景德王) 때 강주(康州; 지금의 진주晉州, 또는 강주康州라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지금의 순안順安이다)의 남자 신도 수십 명이 뜻을 서방(西方)에 구해서 고을의 경계에 미타사(彌陀寺)를 세우고 만일을 기약하여 계(契)를 만들었다. 이때 아간(阿干) 귀진(貴珍)의 집에 계집종 하나가 있었는데 이름을 욱면(郁面)이라 했다. 그 주인을 따라 절에 가서 마당에 서서 중을 따라 염불(念佛)했다. 그 주인은 그녀가 그 직분에 맞지 않는 짓을 하는 것을 미워하여 매양 곡식 두 섬을 주어 하룻밤 동안에 다 찧으라 했더니, 계집종은 초저녁에 다 찧어 놓고 절에 가서 염불하여(속담에 말하기를, "내 일이 바빠서 주인 집 방아 바삐 찧는다" 한 것은 대개 여기에서 나온 말인 듯싶다)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녀는 뜰 좌우에 길다란 말뚝을 세워 두 손바닥을 뚫어 노끈으로 꿰어 말뚝 위에 메고는 합장(合掌) 하면서 좌우로 흔들어 자기를 격려했다. 그 때 하늘에서 부르는데, "욱면랑(郁面娘)은 당(堂)에 들어가 염불하라" 하였다. 절의 중들이 듣고 계집종을 권해서 당에 들어가 전처럼 정진(精進)하게 했다. 얼마 안 되어 하늘의 음악소리가 서쪽에서 들려 오더니 욱면은 몸을 솟구쳐 집 대들보를 뚫고 올라가 서쪽으로 교외(郊外)에 가더니 해골(骸骨)을 버리고 부처의 몸으로 변하여 연화대(蓮化臺)에 앉으서 큰 광명을 발사하면서 서서히 가버리니, 음악소리는 한참 동안 하늘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 당(堂)에는 지금도 구멍이 뚫어진 곳이 있다고 한다(이상은 향전鄕傳에 있는 말이다).
<승전(僧傳)>을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중 팔진(八珍)은 관음보살(觀音菩薩)의 현신(現身)으로서 무리들을 모으니 1,000명이나 되었는데,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노력을 다했고, 한 패는 정성껏 도를 닦았다. 그 노력하는 무리들 중에 일을 맡아 보던 이가 계(戒)를 얻지 못해서 축생도(畜生道)에 떨어져서 부석사(浮石寺)의 소가 되었다. 그 소가 어느날 불경을 등에 싣고 가다가 불경의 힘을 입어 아간(阿干) 귀진(貴珍)의 집 계집종으로 태어나서 이름을 욱면(郁面)이라고 했다. 욱면이 일이 있어 하가산(下柯山)에 갔다가 꿈에 감응해서 드디어 불도를 닦을 마음이 생겼다. 아간의 집은 혜숙법사(惠宿法師)가 세운 미타사(彌陀寺)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아간이 항상 그 절에 가서 염불하는데 욱면도 따라 뜰에서 염불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기를 9년, 을미년(乙未年) 정월 21일에 부처에게 예배하다가 집의 대들보를 뚫고 올라가 소백산(小伯山)에 이르러 신 한 짝을 떨어뜨려 그곳에 보리사(菩提寺)를 짓고 산 밑에 이르러 그 육신(肉身)을 버렸으므로 그곳에 제2 보리사를 짓고 그 전당(殿堂)에 방(榜)을 써붙여, '욱면(욱面) 등천지전(登天之殿)'이라 했다. 집 마루에 뚫린 구멍이 열 아름이나 되었는데 아무리 폭우(暴雨)나 세찬 눈이 내려도 집 안은 젖지 않았다. 그 뒤에 호사자(好事者)들이 금탑(金塔) 하나를 만들어 그 구멍에 맞추어서 승진(承塵) 위에 모셔 그 이상한 사적을 기록했으니, 지금도 그 방(榜)과 탑(塔)이 아직 남아 있다. 욱면(욱面)이 간 뒤에 귀진도 또한 그 집이 신이(神異)한 사람이 의탁해 살던 곳이라 해서,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어 법왕사(法王寺)라 하고 토지를 바쳤는데 오랜 뒤에 절은 없어지고 빈 터만 남았다.
대사(大師) 회경(懷鏡)이 승선(承宣) 유석(劉碩), 소경(小卿) 이원장(李元長)과 함께 발원(發願)하여 절을 중건(重建)했는데, 회경이 친히 토목 일을 맡았다. 재목을 처음 운반할 때, 노부(老父)가 삼으로 삼은 신과 칡으로 삼은 신을 각각 한 켤레씩 주었다. 또 옛 신사(神社)에 가서 불교의 이치를 개유(開諭)하였으므로 신사 옆 재목을 베어다가 5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 또 노비들을 더 주니 매우 융성하여 동남 지방에 있어서의 이름있는 절이 되었다. 사람들은 회경을 귀진의 후신(後身)이라 했다.
의론해 말한다. 고을 안의 고전(古傳)을 살펴보면, 욱면은 바로 경덕왕 때의 일이다. 징(徵; 필경 진珍인 듯싶다. 아래도 역시 같다)의 본전(本傳)에 의하면 이는 원화(元和) 3년 무자(戊子; 808) 애장왕(哀莊王) 때의 일이라 했다. 경덕왕 이후에 혜공왕(惠恭王)ㆍ선덕왕(宣德王)ㆍ원성왕(元聖王)ㆍ소성왕(昭聖王)ㆍ애장왕(哀莊王) 등 5대까지는 도합 60여 년이나 된다. 귀징(貴徵; 珍)이 먼저이고 욱면이 뒤이기 때문에 그 선후가 향전(鄕傳)과 어긋난다. 여기에는 이 두 가지를 다 실어서 의심이 없게 한다.
찬(讚)해 말한다.
서쪽 이웃 옛 절에 불등(佛燈)이 밝았는데,
방아 찧고 절에 오니 이경(二更)이네.
한 마디 염불마다 부처가 되려하여,
손바닥 뚫어 노끈 꿰니 그 몸도 잊었네.
광덕(廣德)과 엄장(嚴莊)
문무왕(文武王) 때에 중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사이가 좋아 밤낮으로 약속했다. "먼저 안양(安養)으로 돌아가는 자는 모름지기 서로 알리도록 하지." 광덕은 분황(芬皇) 서리(西里; 혹은 황룡사皇龍寺에 서거방西去方이 있다고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에 숨어 살면서 신 삼은 것으로 업을 삼아, 처자를 데리고 살았다. 엄장은 남악(南岳)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나무를 베어 불태우고 농사를 지었다.
어느날 해 그림자가 붉은빛을 띠고 소나무 그늘이 고요히 저물었는데, 창밖에서 소리가 났다. "나는 이미 서쪽으로 가니 그대는 잘 살다가 속히 나를 따라오라." 엄장이 문을 밀치고 나가 보니 구름 밖에 천악(天樂) 소리가 들리고 밝은 빛이 땅에 드리웠다. 이튿날 광덕이 사는 곳을 찾아갔더니 광덕은 과연 죽어 있다. 이에 그의 아내와 함께 유해를 거두어 호리(蒿里)를 마치고 부인에게 말했다. "남편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어떻겠소." 광덕의 아내도 좋다고 하고 드디어 그 집에 머물렀다. 밤에 자는데 관계하려 하자 부인은 이를 거절한다. "스님께서 서방정토(西方淨土)를 구하는 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엄장이 놀라고 괴이히 여겨 물었다. "광덕도 이미 그러했거니 내 또한 어찌 안 되겠는가." 부인은 말했다. "남편은 나와 함께 십여 년을 같이 살았지만 일찍이 하룻밤도 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거늘, 더구나 어찌 몸을 더럽히겠습니까. 다만 밤마다 단정히 앉아서 한결같은 목소리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불렀습니다. 또 혹은 십륙관(十六觀)을 만들어 미혹(迷惑)을 깨치고 달관(達觀)하여 밝은 달이 창에 비치면 때때로 그 빛에 올라 가부좌(跏趺坐)하였습니다. 정성을 기울임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서방정토(西方淨土)로 가지 않으려고 한들 어디로 가겠습니까. 대체로 천릿길을 가는 사람은 그 첫걸음부터 알 수가 있는 것이니, 지금 스님의 하는 일은 동방으로 가는 것이지 서방으로 간다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엄장은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 물러나 그 길로 원효법사(元曉法師)의 처소로 가서 진요(津要)를 간곡하게 구했다. 원효는 삽관법(삽觀法)을 만들어 그를 지도했다. 엄장은 이에 몸을 깨끗이 하고 잘못을 뉘우쳐 스스로 꾸짖고, 한 마음으로 도를 닦으니 역시 서방정토로 가게되었다. 삽관법은 원효법사의 본전(本傳)과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속에 있다.
그 부인은 바로 분황사의 계집종이니, 대개 관음보살 십구응신(十九應身)의 하나였다. 광덕에게는 일찍이 노래가 있었다.
달아, 서방까지 가시나이까,
무량수불(無量壽佛) 앞에 말씀(우리말로 보언報言을 말함) 아뢰소서.
다짐 깊은 부처님께 두손모아,
원왕생(願往生) 그리워하는 사람 있다고 아뢰소서.
아아, 이 몸 남겨 두고 사십팔원(四十八願)이 이루어질까.
경흥우성(憬興遇聖)
신문왕(神文王) 때의 고승(高僧) 경흥(景興)의 성은 수씨(水氏)로서 웅천주(熊川州) 사람이다. 18세에 중이 되어 삼장(三藏)에 통달하니 명망(名望)이 한 시대에 높았다. 개요(開耀) 원년(681), 문무왕(文武王)이 장차 세상을 떠나려 할 때 신문왕에게 부탁했다. "경흥법사는 국사가 될 만하니 내 명을 잊지 말라." 신문왕이 즉위하여 국로(國老)로 책봉하고 삼낭사(三郎寺)에 살게 했는데 갑자기 병이 들어 한 달이나 되었다. 이때 여승 하나가 와서 그에게 문안하고 <화엄경(華嚴經)> 속의 '착한 벗이 병을 고쳐 준다'는 말을 얘기하고 말했다. "지금 스님의 병은 근심으로 해서 생긴 것이니, 기쁘게 웃으면 나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열한 가지 모습을 지어 저마다 각각 우스운 춤을 추게 하니, 그 모습은 뾰족하기도 하고 깍은 듯도 하여 그 변하는 형용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어 모두들 우스워서 턱이 빠질 지경이었다. 이에 법사의 병은 자기도 모르게 씻은 듯이 나았다. 여승은 드디어 문을 나가 남항사(南巷寺; 이 절은 삼랑사三郎寺 남쪽에 있다)에 들어가서 숨었고, 그가 가졌던 지팡이는 새로 꾸민 불화(佛畵) 십일면원통상(十一面圓通像) 앞에 있었다.
경흥이 어느날 대궐에 들어가려 하자 시종하는 이들이 동문(東門) 밖에서 먼저 채비를 차리니 말과 안장은 매우 화려하고 신과 갓도 제대로 갖추었으므로 길 가던 사람들은 길을 비켰다. 그 때 거사(居士; 혹은 사문沙門이라고도 했다) 한 사람이 모습은 몹시 엉성한데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등에는 광주리를 지고 와서 하마대(下馬臺) 위에서 쉬고 있는데, 광주리 속을 보니 마른 물고기가 있었다. 시종하는 이가 그를 꾸짖었다. "너는 중의 옷을 입고 어찌 깨끗하지 못한 물건을 지고 있느냐." 중이 말했다. "산 고기(馬)를 두 다리 사이에 끼고 있는 것보다 삼시(三市)의 마른 고기를 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 나쁘단 말인가." 말을 마치자 일어나 가 버렸다. 경흥은 문을 나오다가 그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그를 쫓게 하니 남산(南山) 문수사(文殊寺) 문밖에 이르러 광주리를 버리고 숨었는데 짚었던 지팡이는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 앞에 있고, 마른 고기는 바로 소나무 껍질이었다. 사자가 와서 고하자 경흥은 이를 듣고 탄식했다.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와서 내가 말타고 다니는 것은 경계한 것이구나." 그 뒤로 경흥은 몸이 마치도록 말을 타지 않았다.
경흥이 뿌린 덕의 향기와 남긴 맛은 중 현본(玄本)이 엮은 삼랑사 비문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일찍이 보현장경(普賢章經)을 보니 미륵보살이 말했다. "나는 내세에는 염부제(閻浮提)에 나서 먼저 석가의 말법(末法) 제자들을 먼저 제도(濟度)할 것이다. 그런데 다만 말탄 비구승(比丘僧)만은 제외시켜서 그들에게는 부처를 보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경계하지 않겠는가.
찬(讚)해 말한다.
옛 어진 이가 모범은 보인 것은 뜻한 바 많았는데,
어찌하여 자손들은 절차(切磋) 하지 않는가.
마른 고기 등에 진 건 오히려 옳은 일이나,
다음날 용화(龍華) 저버릴 일 어찌 견딜까.
진신수공(眞身受供)
장수(長壽) 원년 임진(壬辰; 692)에 효소왕(孝昭王)이 즉위하여 처음으로 망덕사(望德寺)를 세워 당나라 제실(帝室)의 복을 받들려 했다. 그 후 경덕왕(景德王) 14년(755)에 망덕사 탑이 흔들리더니 이 해에 안사(安史)의 난(亂)이 일어났다. 신라 사람들은 말했다. "당나라 제실을 위하여 이 절을 세웠으니 마땅히 그 영험이 있을 것이다."
8년 정유(丁酉)에 낙성회(落成會)를 열고 효소왕이 친히 가서 공양하는데, 한 비구(比丘)가 몹시 허술한 모양을 하고 몸을 움츠리고 뜰에 서서 청했다. "빈도(頻度)도 또한 이 재(齋)에 참석하기를 바랍니다." 왕은 이를 허락하여 말석(末席)에 참여하게 했다. 재가 끝나자 왕은 그를 희롱하여 말했다. "그대는 어디 사는가." 비구승이 대답한다. "비파암(琵琶암)에 있습니다." 왕이 말했다.
"이제 가거든 다른 사람들에게 국왕이 친히 불공하는 재에 참석했다고 말하지 말라." 중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폐하께서도 역시 다른 사람에게 진신(眞身) 석가(釋迦)를 공양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말을 마치자 몸을 솟구쳐 하늘로 올라가 남쪽을 향하여 갔다. 왕이 놀랍고 부끄러워 동쪽 언덕에 달려 올라가서 그가 간 곳을 향해 멀리 절하고 사람을 시켜 찾게 하니 남산(南山) 삼성곡(參星谷), 혹은 대적천원(大적川源)이라고 하는 돌 위에 이르러 지팡이와 바리때를 놓고 숨어 버렸다. 사자가 와서 복명(復命)하자 왕은 드디어 석가사(釋迦寺)를 비파암 밑에 세우고, 또 그 자취가 없어진 곳에 불무사(佛無寺)를 세워 지팡이와 바리때를 두 곳에 나누어 두었다. 두 절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으나 지팡이와 바리때는 없어졌다.
<지론(智論)> 제4에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계빈(계賓) 삼장법사(三藏法師)가 아란야법(阿蘭若法)을 행하여 일왕사(一王寺)에 이르니 절에서는 큰 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문지기는 그의 옷이 추솔한 것을 보고 문을 막고 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여러 번 들어가려 했건만 옷이 추하다 해서 번번이 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문득 방편(方便)을 써서 좋은 옷을 빌어 입고 가니 문지기가 보고 들어가게 하고 막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그 자리에 나아가, 여러 가지 좋은 음식을 얻어 옷에게 먼저 주니 여러 사람들이 물었다. "어찌해서 그렇게 하는가." 그는 대답했다.
"내가 여러 번 왔으나 매번 들어올 수가 없었는데 이번에 옷 때문에 이 자리에 오게 되어 여러 가지 음식을 얻었으니 마땅히 이 옷에게 음식을 주어야 할 것이다." 아마 이것도 같은 사례인가 한다.
찬(讚)해 말한다.
향을 사르고 부처님을 가려 새 그림을 보았고,
음식 만들어 중을 대접하고 옛 친구 불렀네.
이제부터 비파암 위의 달은,
때때로 구름에 가려 못에 더디게 비치리.
월명사(月明師) 도솔가(兜率歌)
경덕왕(景德王) 19년 경자(庚子; 790) 4월 초하루에 해가 둘이 나란히 나타나서 열흘 동안 없어지지 않으니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인연 있는 중을 청하여 산화공덕(散花功德)을 지으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조원전(朝元殿)에 단을 정결히 모으고 임금이 청양루(靑陽樓)에 거둥하여 인연 있는 중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월명사(月明師)가 긴 밭두둑 길을 가고 있었다. 왕이 사람을 보내서 그를 불러 단을 열고 기도하는 글을 짓게 하니 월명사가 아뢴다. "저는 다만 국선(國仙)의 무리에 속해 있기 때문에 겨우 향가(鄕歌)만 알 뿐이고 성범(聲梵)에는 서투릅니다." 왕이 말했다. "이미 인연이 있는 중으로 뽑혔으니 향가라도 좋소." 이에 월명이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바쳤는데 가사는 이러하다.
오늘 여기 산화가(散花歌)를 불러, 뿌린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의 명령을 부림이니, 미륵좌주(彌勒座主)를 모시게 하라.
이것을 풀이하면 이렇다.
용루(龍樓)에서 오늘 산화가(散花歌)를 불러, 청운(靑雲)에 한 송이 꽃을 뿌려 보내네,
은근하고 정중한 곧은 마음이 시키는 것이어니, 멀리 도솔대선(兜率大僊)을 맞으라.
지금 민간에서는 이것은 산화가(散花歌)라고 하지만 잘못이다. 마땅히 도솔가(兜率歌)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산화가(散花歌)는 따로 있는데 그 글이 많아서 실을 수 없다. 그런 후에 이내 해의 변괴가 사라졌다. 왕이 이것을 가상히 여겨 품다(品茶) 한 봉과 수정염주(水晶念珠) 108개를 하사했다. 이때 갑자기 동자(童子) 하나가 나타났는데 모양이 곱고 깨끗했다. 그는 공손히 다(茶)와 염주(念珠)를 받들고 대궐 서쪽 작은 문으로 나갔다. 월명(月明)은 이것을 내궁(內宮)의 사자(使者)로 알고, 왕은 스님의 종자(從子)로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 알고 보니 모두 틀린 추측이었다. 왕은 몹시 이상히 여겨 사람은 시켜 쫓게 하니, 동자는 내원(內院) 탑속으로 숨고 다와 염주는 남쪽의 벽화(壁畵) 미륵상(彌勒像) 앞에 있었다. 월명의 지극한 덕과 지극한 정성이 미륵보살을 소가(昭假) 시킴이 이와 같은 것을 알고 조정이나 민간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왕은 더욱 공경하여 다시 비단 100필을 주어 큰 정성을 표시했다.
월명은 또 일찍이 죽은 누이동생을 위해서 재를 올렸는데 향가를 지어 제사지냈었다. 이때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더니 지전(紙錢)을 불어서 서쪽으로 날려 없어지게 했다. 향가는 이러하다.
죽고 사는 길이, 여기 있으니 두려워지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 다하고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과 같이,
한 가지에 나서 가는 곳은 모르는구나.
아, 미타찰(彌타刹)에서 너를 만나볼 나는,
도를 닦아 기다리련다.
월명은 항상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있으면서 피리를 잘 불었다. 어느날 달밤에 피리를 불면서 문 앞 큰길을 지나가니 달이 그를 위해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 이 때문에 그곳을 월명리(月明里)라고 했다. 월명사(月明師)도 또한 이 일 때문에 이름을 나타냈다.
월명사는 곧 능준대사(能俊大師)의 제자인데 신라 사람들도 향가를 숭상한 자가 많았으니 이것은 대개 시(詩)ㆍ송(頌) 같은 것이다. 때문에 이따금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찬(讚)해 말한다.
바람은 종이돈 날려 죽은 누이동생의 노자를 삼게 하고,
피리는 밝은 달을 일깨워 항아(姮娥)가 그 자리에 멈추었네.
도솔천(兜率天)이 하늘처럼 멀다고 말하지 말라,
만덕화(萬德花) 그 한 곡조로 즐겨 맞았네.
선율환생(善律還生)
망덕사(望德寺) 중 선율(善律)은 시주받은 돈으로 <육백반야경(六百般若經)>을 이루고자 했다. 공사가 아직 끝나기 전에 갑자기 음부(陰府)의 사자에게 쫓겨서 명부(冥府)에 이르니 명사(冥司)가 물었다. "너는 인간 세계에 있을 때에 무슨 일을 했느냐." 선율이 말한다. "저는 만년에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을 만들려 하다가 공사를 마치지 못하고 왔습니다." 명사는 "너희 수록(壽록)에 의하면 네 수는 이미 끝났지만 가장 좋은 소원을 마치지 못했다니 다시 인간 세상에 돌아가서 보전(寶典)을 끝내어 이루도록 하라." 하고 놓아 보냈다. 돌아오는 도중에 여자 하나가 울면서 그의 앞에 와 절을 하며 말했다. "나도 역시 남염주(南閻州)의 신라 사람이온데 부모가 금강사(金剛寺)의 논 1무(畝)를 몰래 빼앗은 일에 연루되어 명부(冥府)에 잡혀 와서 오랫동안 몹시 괴로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법사께서 고향으로 돌아가시거든 이 일을 우리 부모에게 알려서 속히 그 논을 돌려 주도록 해 주십시오. 또 제가 세상에 있을 때에 참기름을 상 밑에 묻어 두었고, 곱게 짠 베도 이불 틈에 감추어 둔 것이 있습니다. 법사께서 부디 그 기름을 가져다가 불등(佛燈)에 불을 켜고, 그 베는 팔아 경폭(經幅)으로 써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황천에서도 또한 은혜를 입어 제 고뇌(苦惱)를 벗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선율이 말했다. "그대의 집은 어디 있는가." "사량부(沙梁部) 구원사(久遠寺) 서남쪽 마을입니다." 선율이 이 말을 듣고 곧 떠나서 도로 살아났다.
그 때는 선율이 죽은 지 이미 열흘이 되어 남산 동쪽 기슭에 장사 지냈으므로 무덤 속에서 사흘 동안이나 외치니, 지나가던 목동(牧童)이 이 소리를 듣고 절에 가서 알렸다. 절의 중이 와서 무덤을 파고 그를 꺼내니 선율은 그 동안의 일을 자세히 말하고, 또 그 여자의 집을 찾아갔는데 여자는 죽은 지가 15년이나 되었으나 참기름과 베는 완연히 그 자리에 있었다. 선율이 여자가 말한 대로 명복을 빌어 주니 여자의 영혼이 찾아와서 말한다. "법사의 은혜를 입어 저는 이미 고뇌를 벗어났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놀라고 감동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리하여 <반야경(般若經)>을 서로 도와서 완성시켰다. 그 책은 지금 동도(東都) 승사서고(僧史書庫) 안에 있는데 매년 봄과 가을에는 그것을 펴서 전독(轉讀)하여 재앙을 물리쳤다.
찬(讚)해 말한다.
부럽도다. 우리 스님 좋은 인연 따라,
영혼이 돌아와서 옛 고향에서 노니시네.
부모님이 나의 안부(安否) 물으시거든,
나 위해서 빨리 그 논을 돌려 주라 하시오.
김현감호(金現感虎)
신라 풍속에 해마다 2월이 되면 초파일(初八日)에서 15일까지 서울의 남녀가 다투어 흥륜사(興輪寺)의 전탑(殿塔)을 도는 복회(福會)를 행했다.
원성왕(元聖王) 때에 김현(金現)이라는 낭군(郞君)이 있어서 밤이 깊도록 혼자서 탑을 돌기를 쉬지 않았다. 그때 한 처녀가 염불을 하면서 따라 돌다가 서로 마음이 맞아 눈을 주더니 돌기를 마치자 으슥한 곳으로 이끌고 가서 정을 통하였다. 처녀가 돌아가려 하자 김현이 따라가니 처녀는 사양하고 거절했지만 김현은 억지로 따라갔다. 길을 가다가 서산(西山) 기슭에 이르러 한 초가집으로 들어가니 늙은 할머니가 처녀에게 물었다. "함께 온 자는 누구냐." 처녀가 사실대로 말하자 늙은 할머니는 말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없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이미 저지른 일이어서 나무랄 수도 없으니 은밀한 곳에 숨겨 두거라. 네 형제들이 나쁜 짓을 할까 두렵다." 하고 김현을 이끌어 구석진 곳에 숨겼다. 조금 뒤에 세 마리 범이 으르렁 거리며 들어와 사람의 말로 말했다. "집에서 비린내가 나니 요깃거리가 어찌 다행하지 않으랴." 늙은 할머니와 처녀가 꾸짖었다.
"너희 코가 잘못이다. 무슨 미친 소리냐." 이때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너희들이 즐겨 생명을 해치는 것이 너무 많으니, 마땅히 한 놈을 죽여 악을 징계하겠노라." 세 짐승은 이 소리를 듣자 모두 근심하는 기색이었다. 처녀가 "세 분 오빠께서 만약 멀리 피해 가서 스스로 징계하신다면 내가 그 벌을 대신 받겠습니다." 하고 말하니, 모두 기뻐하여 고개를 숙이고 꼬리를 치며 달아나 버렸다. 처녀가 들어와 김현에게 말했다. "처음에 저는 낭군이 우리 집에 오시는 것이 부끄러워 짐짓 사양하고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숨김없이 감히 진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저와 낭군은 비록 종족은 다르지만 하루저녁의 즐거움을 얻어 중한 부부의 의를 맺었습니다. 세 오빠의 악함은 하늘이 이미 미워하시니 한 집안의 재앙을 제가 당하려 하오나, 보통 사람의 손에 죽는 것이 어찌 낭군의 칼날에 죽어서 은덕을 갚는 것만 하겠습니까. 제가 내일 시가(市街)에 들어가 몹시 사람들을 해치면 나라 사람들은 저를 어찌 할 수 없어서, 임금께서 반드시 높은 벼슬로써 사람을 모집하여 저를 잡게 할 것입니다. 그 때 낭군은 겁내지 말고 저를 쫓아 성 북 쪽의 숲속까지 오시면 제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김현은 말했다. "사람이 사람과 사귐은 인륜의 도리지만 다른 유(類)와 사귐은 대개 떳떳한 일이 아니오. 그러나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진실로 하늘이 준 다행인데 어찌 차마 배필의 죽음을 팔아 한 세상의 벼슬을 바라겠소." 처녀가 말했다. "낭군은 그 같은 말을 하지 마십시오. 이제 제가 일찍 죽는 것은 대개 하늘의 명령이며, 또한 저의 소원이요 낭군의 경사이며, 우리 일족의 복이요 나라 사람들의 기쁨입니다. 한 번 죽어 다섯 가지 이로움을 얻을 수 있는 터에 어찌 그것을 마다하겠습니까. 다만 저를 위하여 절을 짓고 불경(佛經)을 강론하여 좋은 과보(果報)를 얻는데 도움이 되게 해 주신다면 낭군의 은혜, 이보다 더 큼이 없겠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서로 울면서 작별했다. 다음날 과연 사나운 범이 성안에 들어와서 사람들을 몹시 해치니 감히 당해 낼 수 없었다. 원성왕(元聖王)이 듣고 영을 내려, "범을 잡는 사람에게 2급의 벼슬을 주겠다."고 하였다. 김현이 대궐에 나아가 아뢰었다. "소신이 잡겠습니다." 왕은 먼저 벼슬을 주고 격려하였다. 김현이 칼을 쥐고 숲속으로 들어가니 범은 변하여 낭자(娘子)가 되어 반갑게 웃으면서, "어젯밤에 낭군과 마음속 깊이 정을 맺던 일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내 발톱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흥륜사의 간장을 바르고 그 절의 나발(螺鉢) 소리를 들으면 나을 것입니다."하고는, 이어 김현이 찬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 고꾸라졌다. 김현이 숲속에서 나와서, "범은 쉽게 잡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연유는 숨기고, 다만 범에게 입은 상처를 그 범이 시킨 대로 치료하니 모두 나았다. 지금도 민가에서는 범에게 입은 상처에는 역시 그 방법을 쓴다.
김현은 벼슬에 오르자, 서천(西川) 가에 절을 지어 호원사(虎願寺)라 하고 항상 범망경(梵網經)을 강론하여 범의 저승길을 인도하고 또한 범이 제 몸을 죽여 자기를 성공하게 해 준 은혜에 보답했다. 김현은 죽을 때에 지나간 일의 기이함에 깊이 감동하여 이에 붓으로 적어 전하였으므로 세상에서 비로소 듣고 알게 되었으며, 그래서 이름은 논호림(論虎林)이라 했는데 지금까지도 그렇게 일컬어 온다.
정원(貞元) 9년에 신도징(申屠澄)이 야인(野人)으로서 한주(漢州) 십방현위(十방縣尉)에 임명되어 진부현(眞符縣)의 동쪽 10리 가량 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눈보라와 심한 추위를 만나 말이 앞으로 나가지 못하므로 길 옆의 초가집으로 들어가니 그 안에 불이 피워 있어 매우 따뜻했다. 등불 밑에 나가 보니 늙은 부모와 처녀가 화롯가에 둘러앉았는데, 그 처녀의 나이는 바야흐로 14, 5세쯤 되어 보였다. 비롯 머리는 헝클어지고 때묻은 옷을 입었으나 눈처럼 흰 살결과 꽃같은 얼굴이며 동작이 아름다웠다. 그 부모는 신도징이 온 것을 보고 급히 일어나서 말했다. "손님은 심한 한설(寒雪)을 만났으니 앞으로 오셔서 불을 쬐시오." 신도징이 한참 앉아 있으니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눈보라는 그치지 않았다. 신도징은 "서쪽으로 현(縣)에 가려면 길이 아직 머니 여기서 좀 재워 주십시오" 하고 청했다. 부모는 말했다. "누추한 집안이라도 관계치 않으신다면 감히 명을 받겠습니다." 신도징이 마침내 말안장을 풀고 침구를 폈다. 그 처녀는 손님이 묵는 것을 보자 얼굴을 닦고 곱게 단장을 하고는 장막 사이에서 나오는데 그 한아(閑雅)한 태도는 처음 볼 때보다 훨씬 나았다. 신도징이 말했다. "소낭자(小娘子)는 총명하고 슬기로움이 남보다 뛰어났습니다. 아직 미혼이면 감히 혼인하기를 청하니 어떠하오." 그 아버지는 말했다. "기약치 않는 귀한 손님께서 거두어 주신다면 어찌 연분이 아니겠습니까." 신도징은 마침내 사위의 예를 행하고 타고 온 말에 여자를 태워 가지고 길을 나섰다. 임지(任地)에 이르러 보니 봉록(俸祿)이 매우 적었으나 아내는 힘써 집안 살림을 돌보았으므로 모두 마음에 즐거운 일 뿐이었다. 그 후 임기가 끝나 돌아가려 할 때는 이미 1남1녀를 두었는데 또한 총명하고 슬기로워 그는 아내를 더욱 공경하고 사랑했다.
일찍이 아내에게 주는 시를 지었는데 이러했다.
한 번 벼슬하니 매복(梅福)이 부끄럽고,
3년이 지나니 맹광(孟光)이 부끄럽구나.
이 정을 어디다 비길까,
냇물 위에 원앙새 떠 있구나.
그의 아내는 종일 이 시를 읊어 속으로 화답하는 것 같았으나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신도징이 벼슬을 그만두고 가족을 데리고 본가로 돌아가려 하자, 아내는 문득 슬퍼하면서 말했다. "요전에 주신 시 한 편에 화답한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읊었다.
금슬(琴瑟)의 정이 비록 중하나,
산림(山林)에 뜻이 스스로 깊도다.
시절이 변할까 항상 걱정하며,
백년해로 저버릴까 허물하도다.
드디어 함께 그 여자의 집에 갔더니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아내는 사모하는 마음이 지나쳐 종일토록 울었다. 문득 벽 모퉁이에 한 장의 호피(虎皮)가 있는 것을 보고 아내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 물건이 아직도 여기에 있는 것을 몰랐구나." 마침내 그것을 뒤집어쓰니 곧 변하여 범이 되었는데, 어흥거리며 할퀴다가 문을 박차고 나갔다. 신도징이 놀라서 피했다가 두 아이를 데리고 간 길을 찾아 산림을 바라보며 며칠을 크게 울었으나 끝내 간 곳을 알지 못했다.
아! 신도징(申屠澄)과 김현(金現) 두 사람이 짐승과 접했을 때 그것이 변하여 사람의 아내가 된 것은 똑같다. 그러나 신도징의 범은 사람을 배반하는 시를 주고 으르렁거리고 할퀴면서 달아난 것이 김현의 범과 다르다. 김현의 범은 부득이 사람을 상하게 했지만 좋은 약방문을 가르쳐 줌으로써 사람들을 구했다. 짐승도 어질기가 그와 같은데, 지금 사람으로서도 짐승만 못한 자가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이 사적의 처음과 끝을 자세히 살펴보면 절을 돌 때 사람을 감동시켰고, 하늘에서 외쳐 악을 징계하려 하자 스스로 이를 대신했으며, 신효한 약방문을 전함으로써 사람을 구하고 절을 지어 불계(佛戒)를 강론하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다만 짐승의 본성이 어질기 때문만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대개 부처가 사물에 감응함이 여러 방면이었던 까닭에 김현공(金現公)이 능히 탑을 돌기에 정성을 다한 것에 감응하여 명익(冥益)을 갚고자 했을 뿐이다. 그 때에 복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찬(讚)해 말한다.
산가(山家)의 세 오라비 죄악이 많아,
고운 입에 한 번 승낙 어떻게 할까.
의리의 중함 몇 가지니 죽음은 가벼운데,
숲속에서 맡긴 몸 낙화(落花)처럼 져 갔도다.
융천사(融天寺) 혜성가(慧星歌) 진평왕대(眞平王代)
제5 거열랑(居烈郞), 제6 설처랑(實處郞; 혹은 돌처랑突處郞이라고도 씀), 제7 보동랑(寶同郞) 등 세 화랑의 무리가 풍악(風岳)에 놀러 가려고 하는데 혜성(慧星)이 심대성(心大星)을 범하였다. 낭도(郎徒)들은 이를 의아스럽게 생각하고 그 여행을 중지하려고 했다. 이때에 융천사(融天寺)가 노래를 지어 부르자 별의 괴변은 즉시 사라지고 일본(日本) 군사가 제 나라로 돌아가니 도리어 경사가 되었다. 임금이 기뻐하여 낭도(郎徒)들을 보내어 풍악에서 놀게 했으니, 노래는 이렇다.
옛날 동해(東海)가에 건달파(乾達婆)가 놀던 성을 버리고,
'왜군(倭軍)이 왔다'고 봉화를 든 변방이 있어라.
세 화랑은 산 구경 오심을 듣고 달도 부지런히 등불을 켜는데,
길 쓰는 별을 바라보고 '혜성(慧星)이여' 하고 말한 사람 있구나.
아아, 달은 저 아래로 떠갔거니, 보아라, 무슨 혜성(慧星)이 있으랴.
정수사(正秀師) 구빙녀(九氷女)
제 40대 애장왕(哀莊王) 때, 중 정수(正秀)는 황룡사(皇龍寺)에 머물러 있었다. 겨울날 눈은 많이 쌓이고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삼랑사(三郞寺)에서 돌아오다가 천엄사(天嚴寺) 문밖을 지나게 되었다. 그 때 한 여자 거지가 아이를 낳고 누워서 얼어 죽게 되었는데, 스님이 보고 불쌍히 여겨 그를 안아 주었더니 한참 후에 깨어났다. 이에 옷을 벗어 덮어 주고 벌거벗은 채 본사(本寺)에 달려와서 거적 풀로 몸을 덮고 밤을 세웠다. 한밤중에 하늘에서 궁정 뜰로 외치는 소리가 났다. "황룡사(皇龍寺)의 중 정수(正秀)를 마땅히 임금의 스승에 봉할지니라." 급히 사람을 시켜 조사하게 하니, 그 사실이 모두 왕에게 알려졌다. 왕은 위의를 갖추고 그를 대궐 안으로 맞아들여 국사(國師)를 삼았다.
삽량주(삽良州) 아곡현(阿曲縣)의 영취산(靈鷲山; 삽량삽良은 지금의 양주梁州. 아곡阿曲의 곡曲은 서西로도 쓰며 혹은 구불球佛 또는 굴불屈佛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울주蔚州에 굴불역屈佛驛을 두었으나 지금도 그 이름이 남아있다)에 이상한 중이 있었다. 암자에 살기 수십 년이 되었어도 고을에서 모두 그를 알지 못하였고, 스님도 또한 성명을 말하지 않았다. 항상 <법화경(法華經)>을 강론하여 신통력이 있었다.
용삭(龍朔) 초년에 지통(智通)이란 중이 있었는데, 그는 본래 이량공(伊亮公)의 집 종이었다. 일곱 살에 출가했는데, 그 때 까마귀가 와서 울면서 말했다. "영취산(靈鷲山)에 가서 낭지(朗智)의 제자가 되어라." 지통이 그 말을 듣고 이 산을 찾아가서 골짜기 안 나무 밑에서 쉬는데 문득 이상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보현보살(普賢菩薩)인데 너에게 계품(戒品)을 주려고 왔다."하고는 계를 베풀고 사라졌다. 이때 지통은 정신이 활달해지고 지증(智證)이 문득 두루 통해졌다. 그는 다시 길을 가다가 한 중을 만났다. 그가 낭지 스님은 어디 계시냐고 물으니 중이 말했다. "어째서 낭지(郎智)를 묻느냐." 지통이 신기한 까마귀의 일을 자세히 말하자 중은 빙그레 웃으면서 "내가 바로 낭지다. 지금 집 앞에 또한 까마귀가 와서 알리기를, 거룩한 아이가 장차 스님에게로 올 것이니 마땅히 나가서 영접하라 하므로 와서 맞이하는 것이다."하고 손을 잡고 감탄하여 말했다. "신령스런 까마귀가 너를 깨우쳐 내게 오게 하고, 내게 알려서 너를 맞게 하니 이 무슨 상서로운 일인가. 아마 산신령의 은밀한 도움인 듯하다. 전하는 말에, 산의 주인인 변제천녀(辯才天女)라고 한다." 지통이 이 말을 듣고 울면서 감사하고 스님에게 귀의했다. 이윽고 계를 주려 하니 지통이 말했다. "저는 동구 나무 밑에서 이미 보현보살에게 정계(正戒)를 받았습니다." 낭지는 감탄해서 말했다. "잘했구나. 네가 이미 친히 보살의 만분지계(滿分之戒)를 받았으니 내 너에게 아득히 미치지 못하는구나." 말을 마치고 도리어 지통에게 예했다. 이로 인해서 그 나무를 이름하여 보현수(普賢樹)라 했다. 지통이 "법사께서 여기에 거주하신 지가 오래된 듯합니다."하고 말하자 낭지는, "법흥왕(法興王) 정미년(丁未年; 572)에 처음으로 여기에 와서 살았는데 지금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지통이 이 산에 온 것이 문무왕(文武王) 즉위 원년(661)이니, 계산해 보면 135년이 된다.
지통은 후에 의상(義湘)의 처소에 가서 고명하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아 불교의 교화에 이바지하였다. 이가 곧 <추동기(錐洞記)>의 작자(作者)이다.
원효(元曉)가 반고사(磻高寺)에 있을 때에는 항상 낭지(郎智)에게 가서 뵈니 그는 원효에게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저술하게 했다. 원효가 짓기를 마친 후에 은사(隱士) 문선(文善)을 시켜 책을 받들어 보내면서 그 편미(篇尾)에 게구(偈句)를 적었으니, 이러하다.
서쪽 골에 중의 머리 조아려, 동쪽 봉우리 상덕(上德) 고암(高巖) 앞에 예하노라(반고사磻高寺는 영취산靈鷲山의 서북西北쪽에 있으므로 서쪽 골짜기의 중은 바로 자신을 일컫는 것이다).
가는 티끌 불어 보내 영취산(靈鷲山)에 보태고, 잔 물방울 날려 용연(龍淵)에 던지도다.
산 동쪽에 대화강(大和江)이 있는데 이는 곧 중국 대화지(大和池)의 용의 복을 빌기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용연(龍淵)이라 한 것이다. 지통과 원효는 모두 큰 성인(聖人) 이었다. 두 성인이 스승으로 섬겼으니 낭지 스님의 도(道)가 고매함을 알 수 있다.
스님은 일찍이 구름을 타고 중국 청량산(淸凉山)으로 가서 신도들과 함께 강의를 듣고 조금 후에 돌아오곤 했다. 그곳 중들은 그를 이웃에 사는 사람이라고 여겼으나 사는 곳을 알지 못했다.
어느날 여러 중들에게 명령했다. "항상 이 절에 사는 자를 제외하고 다른 절에서 온 중은 각기 사는 곳의 이름난 꽃과 기이한 식물을 가져다가 도량(道場)에 바쳐라." 낭지는 그 이튿날 산중의 기이한 나무 한 가지를 꺽어 가지고 돌아와 바쳤다. 그 곳의 중이 그것을 보고 말했다. "이 나무는 범명(梵名)으로 달리가라 하고 여기서는 혁(赫)이라 한다. 오직 서천축(西天竺)과 해동(海東)의 두 영취산(靈鷲山)에만 있는데 이 두 산은 모두 제 10 법운지(法雲地)로서 보살(菩薩)이 사는 곳이니, 이 사람은 반드시 성자(聖者)일 것이다." 마침내 행색을 살펴 그제야 해동 영취산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스님을 다시 보게 되었고 이름이 안팎에 드러났다. 나라 사람들이 그 암자를 혁목암(赫木庵)이라 불렀는데 지금 혁목사(赫木寺)의 북쭉 산등성이에 옛 절터가 있으니 그 절이 있던 자리이다.
<영취사기(靈鷲寺記)>에 "낭지가 일찍이 말하기를, '이 암자자리는 가섭불(迦葉佛) 때의 절터로서 땅을 파서 등항(燈缸) 두 개를 얻었다'고 하였다. 원성왕(元聖王) 때에는 고승(高僧) 연회(緣會)가 이 산속에 와서 살면서 낭지 스님의 전기(傳記)를 지었다. 이것이 세상에 유행했다."고 기록 되어 있다.
<화엄경(華嚴經)>을 살펴보면 제10 법운지(法雲池)라 했다. 지금 스님이 구름을 탄 것은 대개 부처가 삼지(三指)로 꼽고, 원효가 100몸으로 분신되는 따위인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생각하니 산속에서 수도(修道)한지 100년 동안에,
고매한 이름 일찍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산새의 한가로운 지저귐 막을 길 없어,
구름 타고 오가는 것 속절없이 누설되었네.
연회도명(緣會逃名), 문수점(文殊岾)
고승(高僧) 연회(緣會)는 일찍이 영취산(靈鷲山)에 숨어 살면서 언제나 <연경(蓮經)>을 읽어 보현보살(普賢菩薩)의 관행법(觀行法)을 닦았다. 정원의 연못에는 언제나 연꽃 두 세 떨기가 있어 사시에 시들지 않았다(지금의 영취사靈鷲寺 용장전龍藏殿이 바로 연회緣會의 옛 거처임).
국왕 원성왕(元聖王)이 그 상서롭고 기이함을 듣고 그를 불러 국사(國師)를 삼으려 하니 스님이 그 소식을 듣자 암자를 버리고 도망했다. 서쪽 고개 바위 사이를 넘는데 한 노인이 밭을 갈고 있다가 스님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므로 스님이 말했다. "내 들으니 나라에서 잘못 듣고 나를 벼슬로써 얽매려 하므로 피해 가는 것입니다." 노인은 듣고 말했다. "여기에서도 가히 팔 수가 있을 텐데 어째서 수고로이 멀리 팔려고 하십니까. 스님이야말로 이름 팔기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하겠습니다." 연회(緣會)는 그가 자기를 업신여기는 것이라 생각하고, 듣지 않고 마침내 몇 리쯤을 더 갔다. 시냇가에서 한 노파를 만났는데, 스님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므로 연회는 먼저처럼 대답하니, 노파가 말했다. "앞에서 사람을 만났습니까." 연회가 말했다. "한 노인이 있는데 나를 업신여김이 심하기에 불쾌해서 또 오는 것입니다." 노파는 말했다.
"그분이 문수보살이신데, 그분 말을 듣지 않았으니 어찌 하겠습니까." 연회(緣會)는 이 말을 듣자 곧 놀라고 송구스러워 급히 노인에게 되돌아가 머리를 숙여 사과했다. "성인의 말씀을 감히 듣지 않겠습니까. 이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하온데 그 시냇가의 노파는 어떤 사람입니까." 노인이 말했다. "그는 변재천녀(辯才天女)이니라." 말을 마치자 마침내 사라져 버렸다. 연회(緣會)가 이에 암자로 돌아오자, 조금 후에 왕의 사자가 명을 받들고 와서 부르니 연회는 진작 받아야 될 것임을 알고 임금의 명을 받아 대궐로 가니 왕은 그를 국사(國師)로 봉했다.(<승전(僧傳)>에는 헌안왕(憲安王)이 이조왕사(二朝王師)로 삼아 희(熙)라 호(號)하고 감통(感通) 4년에 죽었다고 했으니 원성왕(元聖王)의 연대(年代)와 서로 다르다.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스님이 노인에게 감명받은 곳을 이름하여 문수점(文殊岾)이라 하고, 여인을 만나본 곳을 아니점(阿尼岾)이라 했다.
찬(讚)해 말한다.
도시에선 어진 이가 오래 숨지 못하는 것,
주머니 속 송곳 끝을 감추기가 어렵네.
뜰 아래 연꽃으로 세상에 나갔지,
운산(雲山)이 깊지 않은 탓은 아닐세.
혜현구정(惠現求靜)
중 혜현(惠現)은 백제 사람이다. 어려서 중이 되어 애써 '뚯을 모아 <법화경(法華經)>을 외는 것으로 업을 삼았으며 부처께 기도하여 복을 청해서 영험한 감응이 실로 많았다. 삼론(三論)을 배우고 도를 닦아서 신명(神明)에 통하였다.
처음에 북부 수덕사(修德寺)에 살았는데 신도가 있으면 불경을 강론하고 없으면 불경을 외었으므로 사방의 먼 곳에서도 그 풍격을 흠모하여 문밖에 신이 가득했다. 차츰 번거로운 것이 싫어서 마침내 강남(江南) 달라산(達拏山)에 가서 살았는데 산이 매우 험준해서 내왕이 힘들고 드물었다.
혜현(惠現)은 고요히 앉아 생각을 잊고 산속에서 인생을 마치니 동학(同學)들이 그 시체를 운반하여 석실(石室) 속에 모셔 두었더니 범이 그 유해를 다 먹어 버리고 다만 해골과 혀만 남겨 두었다. 추위와 더위가 세 번 돌아와도 혀는 오히려 붉고 연하였다. 그 후 변해서 자줏빛이 나고 단단하기가 돌과 같았다. 중이나 속인들이 공경하여 이를 석탑(石塔)에 간직했다. 이때 나이 58세였으니 즉 정관(貞觀) 초년이었다. 혜현(惠現)은 중국으로 가서 배운 일이 없고 고요히 물러나 일생을 마쳤으나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지고 전기(傳記)가 씌어져 당나라에서도 그 명성이 높았다.
또 고구려의 중 파약(波若)은 중국 천태산(天太山)에 들어가 지자(智者)의 교관(敎觀)을 받았는데 신이(神異)한 사람으로 산중에 알려졌다가 죽었다. <당승전(唐僧傳)>에도 또한 실려 있는데 자못 영험한 가르침이 많다.
찬(讚)해 말한다.
주미(주尾)로 설법(說法)함도 한바탕 수고를 느껴,
지난날 불경 외던 소리 구름 속에 숨었어라.
세간(世間)의 청사(靑史)에 길이 이름을 남겨,
사후(死後)엔 연꽃처럼 혀가 꽃다웠네.
신충괘관(信忠掛冠)
효성왕(曉成王)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어진 선비 신충(信忠)과 더불어 궁정(宮庭)의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면서 일찍이 말하기를 "훗날 만약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가 될 것이다."라고 하니 신충이 일어나서 절했다. 몇 달 뒤에 효성왕이 왕위에 올라 공신(功臣)들에게 상을 주면서 신충을 잊고 차례에 넣지 않았다. 신충이 원망하여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였더니 나무가 갑자기 말라 버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했더니 노래를 얻어다 바쳤다. 왕은 크게 놀라서 말했다. "정무(政務)가 복잡하고 바빠 각궁(角弓)을 거의 잊을 뻔했구나." 이에 신충을 불러 벼슬을 주니 잣나무가 그제야 다시 살아났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뜰의 잣나무가 가을에 시들지 않았는데 너를 어찌 잊으랴' 하시던 우러러 뵙던 얼굴 계시온데,
달 그림자가 옛 못의 가는 물결 원망하듯이,
얼굴사 바라보니, 누리도 싫은지고.
후구(後句)는 없어졌다. 이로써 신충에 대한 총애는 양조(兩朝)에 두터웠었다.
경덕왕(景德王; 왕은 곧 효성왕曉成王의 아우임) 22년 계묘(癸卯)에 신충은 두 친구와 서로 약속하고 벼슬을 버리고 남악(南岳)에 들어갔다. 두 번을 불렀으나 나오지 아니하고 머리 깍고 중이 되었다. 그는 왕을 위하여 단속사(斷俗寺)를 세우고 거기에 살았는데, 평생을 구학(丘壑)에서 마치면서 대왕의 복을 빌기를 원했으므로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임금의 진영(眞影)을 모셔두었는데 금당 뒷벽에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남쪽에 속휴(俗休)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와전되어 소화리(小花里)라고 한다(<삼화상전三和尙傳>을 살펴보면 신충봉성사信忠奉聖寺가 있는데 이것과 서로 혼동된다. 따져보면 신문왕神文王 때는 경덕왕景德王과 100여 년이나 되는데, 하물며 신문왕神文王과 신충信忠이 숙세宿世의 인연이 있다는 사실은 이 신충信忠이 아님이 분명하다. 자세히 살펴야 할 일이다).
또 별기(別記)에는 이러하다. 경덕왕 때에 직장(直長) 이준(李俊; <고승전高僧傳>에는 이순李純이라고 하였다)이 일찍이 소원을 빌었더니 나이 50이 되면 중이 되어 절을 세우게 되리라 했다. 천보(天寶) 7년 무자(戊子)에 50세가 되자 조연소사(槽淵小寺)를 고쳐지어 큰 절을 만들고 단속사(斷俗寺)라 하고, 자신도 삭발하고 법명(法名)을 공굉장로(孔宏長老)라 했다. 이준은 절에 거주한 지 20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는 앞의 <삼국사(三國史)>에 실린 것과 같지 않으나 두 가지 설(說)을 다 실어 의심나는 점을 덜고자 한다.
찬(讚)해 말한다.
공명(功名)은 다하지 못했는데 귀밑 털이 먼저 세고,
임금의 총애 비록 많으나 한평생이 바쁘도다.
언덕 저 편 산이 자주 꿈 속에 드니,
가서 향화(香火)를 피워 왕의 복을 비오리.
포산이성(包山二聖)
신라 때에 관기(觀機)와 도성(道成) 두 성사(聖師)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함께 포산(包山; 나라 사람들이 소슬산所瑟山이라 함은 범음梵音이니 이는 포包를 이름이다)에 숨어 살았는데, 관기는 남쪽 고개에 암자를 지었고, 도성은 북쪽 굴에 살았다. 서로 10여 리쯤 떨어졌으나, 구름을 헤치고 달을 노래하며 항상 서로 왕래했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고자 하면 산 속의 수목이 모두 남쪽을 향해서 굽혀 서로 영접하는 것 같으므로 관기는 이것을 보고 도성(道成)에게로 갔다. 또 관기가 도성을 맞이하고자 하면 역시 이와 반대로 나무가 모두 북쪽으로 구부러지므로 도성도 관기에게로 가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기를 여러 해를 지났다. 도성은 그가 살고 있는 뒷산 높은 바위 위에 늘 좌선(坐禪)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바위 사이로 몸을 빼쳐 나와서는 온몸을 허공에 날리면서 떠나갔는데,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혹 수창군(壽昌郡; 지금의 수성군壽城郡)에 가서 죽었다는 말도 있다. 관기도 또한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지금 두 성사(聖師)의 이름으로써 그 터를 명명(命名)했는데 모두 유지(遺址)가 있다. 도성암(道成암)은 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는데, 후인들이 그 굴 아래에 절을 지었다.
태평흥국(太平興國) 7년 임오(壬午)에 중 성범이 처음으로 이 절에 와서 살았다. 만일미타도랑(萬日彌陀道場)을 열어 50여 년을 부지런히 힘썼는데 여러 번 특이한 상서(祥瑞)가 있었다. 이때 현풍(玄風)의 신도 20여 명이 해마다 결사(結社)하여 향나무를 주워 절에 바쳤는데, 언제나 산에 들어가 향나무를 채취해서 쪼개어 씻어서 발[箔] 위에 펼쳐 두면 그 향나무가 밤에 촛불처럼 빛을 발하였다. 이로부터 고을 사람이 그 향나무에게 보시(布施)하고 빛을 얻은 해라 하여 하례하였다. 이는 두 성사의 영감(靈感)이요 혹은 산신(山神)의 도움이었다. 산신의 이름은 정성천왕(靜聖天王)으로 일찍이 가섭불(迦葉佛) 때에 부처님의 부탁을 받았으니 그 본서(本誓)에 말하기를, 산중에서 1,000명의 출세(出世)를 기다려 남은 과보(果報)를 받겠다고 했다.
지금 산중에 9성(聖)의 유사(遺事)를 기록한 것이 있는데 자세하지는 않으나 9성(聖)은 관기(觀機)ㆍ도성(道成)ㆍ반사(반師)ㆍ첩사(첩師)ㆍ도의(道義; 백암사栢岩寺 터가 있음)ㆍ자양(子陽)ㆍ성범(成梵)ㆍ금물녀(今勿女)ㆍ백우사(白牛師) 들이다.
찬(讚)해 말한다.
서로 지나가다 달빛을 밟고 운천(雲泉)을 희롱하던,
두 노인의 풍류(風流) 몇 백 년이 지났는고.
연하(烟霞) 가득한 구령엔 고목(古木)만이 남았는데,
어긋버긋 찬 그림자 서로 맞는 모양일레.
반(반)은 음이 반(般)인데 우리말로는 피나무라 하고, 첩(첩)은 음이 첩(牒)인데 우리말로는 갈나무(떡갈나무)라 한다.
이 두 성사(聖師)는 오랫동안 산골에 숨어 지내면서 인간 세상과 사귀지 않고 모두 나뭇잎을 엮어 옷으로 입고 추위와 더위를 겪었으며 습기를 막고 하체를 가릴 뿐이었다. 그래서 반사(반師)ㆍ첩사(첩師)로 호를 삼았던 것인데, 일찍이 들으니 풍악(風岳)에도 이런 이름이 있었다고 한다. 이로써 옛 은자(隱者)들의 운치가 이와 같은 것이 많았음을 알겠으나 다만 답습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내가 일찍이 포산(包山)에 살 때에 두 스님이 남긴 미덕(美德)을 쓴 것이 있기에 이제 여기 아울러 기록한다.
자모(紫茅)와 황정(黃精)으로 배를 채웠고, 입은 옷은 나뭇잎, 누에 치고 베짠 것 아닐세.
찬바람 쏴 쏴 불고 돌은 험한데, 해 저문 숲속으로 나무 해 돌아오네.
밤 깊고 달 밝은데 그 아래 앉았으면, 반신(半身)은 시원히 바람따라 나는 듯.
떨어진 포단(蒲團)에 가로 누워 잠이 들면 꿈 속에도 속세에는 가지 않노라.
운유(雲遊)는 가 버리고 두 암자만 묵었는데, 산사슴만 뛰놀뿐 인적은 드물도다.
영재우적(永才遇賊)
중 영재(永才)는 성품이 익살스럽고 재물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향가(鄕歌)를 잘했다. 만년에 장차 남악(南岳)에 은거하려고 대현령(大峴嶺)에 이르렀을 때 도둑 60여 명을 만났다. 도둑들이 그를 해치려 했으나 영재는 칼날 앞에 섰어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화기롭게 대하였다. 도둑들이 이상히 여겨 그 이름을 물으니 영재라고 대답했다. 도둑들이 평소에 그 이름을 들었으므로 이에 노래를 짓게 했다. 그 가사는 이러하다.
제 마음에 형상(形相)을 모르려 하던 날,
멀리 ??[원문에 없는 글자] 지나치고 이제는 숨어서 가고 있네,
오직 그릇된 파계주(破戒主)를 두려워할 짓에 다시 또 돌아가리.
이 칼날이 지나고 나면 좋을 날이 오리니,
아아, 오직 요만한 선(善)은 새 집이 되지 않으리.
도둑들은 그 노래에 감동되어 비단 2필을 그에게 주니 영재는 웃으면서 사양하여 말했다. "재물이 지옥에 가는 근본임을 알고 장차 궁벽한 산중으로 피해 가서 일생을 보내려 하는데 어찌 감히 이것을 받겠는가." 이에 땅에 던지니 도둑들은 다시 그 말에 감동되어 가졌던 칼과 창을 버리고 머리를 깍고 영재의 제자가 되어 함께 지리산(智異山)에 숨어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영재의 나이 거의 90살이었으니 원성대왕(元聖大王)의 시대이다.
찬(讚)해 말한다.
지팡이 짚고 산으로 돌아가니 뜻이 한결 깊은데,
비단의 구슬인들 어찌 마음 다스리랴.
녹림(綠林)의 군자(君子)들아 그런 것 주지 말라.
지옥은 다름아닌 재물이 근원이네.
물계자(勿稽子).
제 10대 내해왕(柰解王)이 즉위한 지 17년(임진壬辰)에 보라국(保羅國)ㆍ고자국(古自國; 지금의 고성固城)ㆍ사물국(史勿國; 지금의 사주泗州) 등 여덟 나라가 합세해서 변경을 침범해 왔다. 왕은 태자 나음(내音)과 장군 일벌(一伐)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게 하니 여덟 나라가 모두 항복했는데 이때 물계자(勿稽子)의 군공(軍功)이 제일이었다. 그러나 태자에게 미움을 받아 그 상을 받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물계자에게, "이번 싸움의 공은 오직 당신뿐인데, 상은 당신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태자가 그대를 미워함을 그대는 원망하는가"하고 묻자, 물계자는 대답하기를, "나라의 임금이 위에 계신데 인신(人臣)인 태자를 어찌 원망하겠소"하니 그 사람이 "그렇다면 이 일을 왕에게 아뢰는 것이 옳지 않겠소"하니, 그는 말하기를, "공을 자랑하고 이름을 다투며 자기를 나타내고 남을 가리는 것은 지사(志士)의 할 바가 아니오. 힘써 때를 기다릴 뿐이오"하였다.
20년 을미(乙未)에 골포국(骨浦國; 지금의 합포合浦) 등 세 나라 왕이 각기 군사를 이끌고 와서 갈화(竭火; 굴불屈弗인 듯하니 지금의 울주蔚州)를 침범하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려 이를 막으니 세 나라가 모두 패했다. 물계자가 죽인 적병이 수십 급이었으나 사람들은 그의 공을 말하지 않았다. 물계자는 그 아내에게 말했다. "내 들으니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환란을 당해서는 몸을 잊어버리며, 절의(節義)를 지켜 사생(死生)을 돌보지 않는 것을 충이라 하였소. 보라(保羅; 발나發羅인 듯 하니 지금의 나주羅州)와 갈화(竭火)의 싸움은 진실로 나라의 환란이었고 임금의 위태로움이었소. 그러나 나는 일찍이 자기 몸을 잊고 목숨을 바치는 용맹이 없었으니 이것은 불충(不忠)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오. 이미 불충으로써 임금을 섬겨 그 누(累)가 아버님께 미쳤으니 어찌 효라 할 수 있겠소." 이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문고를 메고서 사체산(師체山; 미양未洋)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대나무의 곧은 성벽(性癖)을 슬퍼하고 그것에 비유하여 노래를 짓고,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비겨서 거문고를 타고 곡조를 짓고 하였다. 그 곳에 숨어 살면서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영여사(迎如師)
실제사(實際寺)의 중 영여(迎如)는 그 족속과 성씨가 자세치 못하나 덕(德)과 행실(行實)이 모두 높았다. 경덕왕(景德王)이 그를 맞아 공양을 드리려고 사자를 보내서 부르니, 영여는 대궐 안에 들어가 재를 마치고는 돌아가려 했다. 왕은 사자를 시켜 그를 절에까지 모시고 가도록 했다. 그는 절 문에 들어서자 즉시 숨어 버려 있는 곳을 알 수가 없었다. 사자가 와서 아뢰니 왕은 이상히 생각하고 그를 국사(國師)에 추봉(追封)했다. 그 뒤로 또한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는데 지금도 그 절을 국사방(國師房)이라고 부른다.
포천산(布川山) 5비구(五比丘) 경덕왕대(景德王代)
삽량주(삽良州)의 동북쪽 20리 가량 되는 곳에 포천산(布川山)이 있는데 석굴(石窟)이 기이하고 빼어나 마치 사람이 깍아 만든 것 같았다. 성명이 자세치 않은 다섯 비구(比丘)가 있었는데 여기에 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외면서 서방정토(西方淨土)를 구하기 몇십 년에 홀연히 성중(聖衆)이 서쪽으로부터 와서 그들을 맞이했다. 이에 다섯 비구가 각기 연화대에 앉아 하늘로 날아 올라가다가 통도사(通度寺) 문밖에 이르러 머물러 있는데 하늘의 음악이 간간이 들려 왔다. 절의 중이 나와 보니 다섯 비구는 무상고공(無常苦空)의 이치를 설명하고 유해를 벗어 버리더니 큰 광명을 내비치면서 서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들이 유해를 버린 곳에 절의 중이 정자(亭子)를 짓고 이름을 치루(置樓)라 했으니, 지금도 남아있다.
염불사(念佛師)
남산(南山) 동쪽 산기슭에 피리촌(避里村)이 있고, 그 마을에 절이 있는데 피리사(避里寺)라 했다. 그 절에 이상한 중이 있었는데 성명은 말하지 않았다. 항상 아미타불을 외어 그 소리가 성(城) 안에까지 들려서 360방(坊) 17만호(萬戶)에서 그 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소리는 높고 낮음이 없이 낭랑하기 한결같았다. 이로써 그를 이상히 여겨 공경치 않는 이가 없었고, 모두 그를 염불사(念佛師)라 불렀다. 그가 죽은 뒤에 소상(塑像)을 만들어 민장사(敏藏寺) 안에 모시고 그가 본래 살던 피리사를 염불사로 이름을 고쳤다.
이 절 옆에 또 절이 있는데 이름을 양피사(讓避寺)라 했으니 마을 이름을 따서 얻은 이름이다.
법사(法師) 진정(眞定)은 신라 사람이다. 속인(俗人)으로 있을 때 군대에 예속되어 있었는데 집이 가난해서 장가를 들지 못했다. 군대 복역의 여가에는 품을 팔아 곡식을 얻어서 홀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집안의 재산이라고는 오지 다리 부러진 솥 하나뿐이었다. 어느날 중이 문간에 와서 절을 지을 쇠붙이를 구하므로 어머니가 솥을 시주했는데 이윽고 진정이 밖에서 돌아오자 어머니는 그 사실을 말하고 또한 아들의 생각이 어떤가를 살피니, 진정이 기쁜 안색을 나타내며 말했다.
"불사(佛事)에 시주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비록 솥이 없더라도 무엇이 걱정이 되겠습니까." 이에 와분(瓦盆)을 솥으로 삼아 음식을 익혀 어머니를 봉양했다.
일찍이 군대에 있을 때 사람들이 의상법사(義湘法師)가 태백산맥에서 설법(說法)을 하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말을 듣고 금시에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 어머니께 고했다. "효도를 마친 뒤에는 의상법사에게 가서 머리 깍고 도를 배우겠습니다." 어머니는 말했다. "불법(佛法)은 만나기 어렵고, 인생(人生)은 너무나 빠른 것이니, 효도를 마친 후라면 또한 늦지 않겠느냐. 그러니 어찌 내 죽기 전에 네가 불도(佛道)를 아는 것만 하겠느냐. 주저하지 말고 빨리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진정은, "어머님 만년에 오직 제가 옆에 있을 뿐이온데 어찌 버리고 출가할 수 있겠습니까"했다. 어머니는 "아! 나를 위해서 출가를 하지 못한다면 나를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비록 생전에 삼뢰칠정(三牢七鼎)으로 나를 봉양하더라도 어찌 가히 효도가 되겠느냐. 나는 의식(衣食)을 남의 문간에서 얻더라도 또한 가히 천수(天壽)를 누릴 것이니 꼭 내게 효도를 하고자 하면 네 말을 말라"고 하였다. 진정은 오랫동안 깊이 생각하는데 어머니가 즉시 일어나서 쌀자루를 모두 털어 보니 쌀 일곱 되가 있었다. 그날 이 쌀로 밥을 짓고서 어머니는 말했다. "네가 밥을 지어 먹으면서 가자면 더딜까 두려우니 마땅히 내 눈앞에서 그 한 되 밥을 먹고 엿 되 밥은 싸 가지고 빨리 떠나거라." 진정은 흐느껴 울면서 굳이 사양하며 말했다. "어머님을 버리고 출가함이 그 또한 자식된 자로 차마 하기 어려운 일이거늘, 하물며 며칠 동안의 미음거리까지 모두 싸 가지고 떠난다면 천지가 저를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세 번 사양했으나 어머니는 세 번 권했다. 진정은 그 뜻을 어기기 어려워서 길을 떠나 밤낮으로 3일 만에 태백산에 이르러 의상에게 의탁하여 머리 깍고 제자가 되어 이름을 진정이라 했다. 3년 후 어머니의 부고가 오자 진정(眞定)은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선정(禪定)에 들어가 7일 만에 나왔다.
설명하는 이는 말하기를 "추모와 슬픔이 지극하여 거의 견딜 수 없었으므로 정수(定水)로써 슬픔을 씻은 것이다"했다. 혹은 "선정(禪定)으로써 어머니께서 사시는 곳을 관찰하였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이것은 실리(實理)와 같이 해서 명복을 빈 것이다"하였다.
선정(禪定)을 하고 나온 뒤에 그 일을 의상(義湘)에게 고하니 의상은 문도(門徒)를 거느리고 소백산 추동(錐洞)에 가서 초가를 짓고 제자의 무리 3천 명을 모아 약 90일 동안 화엄대전(華嚴大典)을 강론했다. 강론하는 데 따라 문인(門人) 지통(智通)이 그 요지를 뽑아 책 두 권을 만들고 이름을 <추동기(錐洞記)>라 하여 세상에 널리 폈다. 강론을 다 마치고 나니 그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나는 이미 하늘에 환생하였다."
대성(大城) 효2세부모(孝二世父母) 신문왕대(神文王代)
모량리(牟梁里; 혹은 정운촌淨雲村이라고도 쓴다)의 가난한 여인 경조(慶祖)에게 아이가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정수리가 평평하여 성(城)과 같았으므로 이름을 대성(大城)이라 했다. 집이 군색하여 살아갈 수가 없어 부자 복안(福安)의 집에 가서 품팔이를 하고, 그 집에서 약간의 밭을 얻어 의식의 자료로 삼았다. 이때 개사(開士) 점개(漸開)가 육륜회(六輪會)를 흥륜사(興輪寺)에서 배풀고자하여 복안의 집에 가서 보시(布施)할 것을 권하니, 복안은 베 50필을 보시하므로 점개는 주문(呪文)을 읽어 축원했다. "단월(檀越)이 보시(布施)하기를 좋아하니 천신(天神)이 항상 지켜 주실 것이며, 한 가지를 보시하면 1만 배를 얻게 되는 것이니 안락하고 수명 장수하게 될 것입니다." 대성이 듣고 뛰어 들어가 그 어미에게 말했다. "제가 문간에 온 스님이 외는 소리를 들었는데 한 가지를 보시하면 1만 배를 얻는다고 합니다. 생각건대 저는 숙선(宿善)이 없어 지금 와서 곤궁한 것이니 이제 또 보시하지 않는다면 내세(來世)에는 더욱 구차할 것입니다. 제가 고용살이로 얻은 밭을 법회(法會)에 보시해서 뒷날의 응보(應報)를 도모하면 어떻겠습니까." 어머니도 좋다고 하므로, 이에 밭을 점개에게 보시했다.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대성은 세상을 떠났는데 이날 밤 국상(國相)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하늘의 외침이 있었다. "모량리 대성이란 아이가 지금 네 집에 태어날 것이다." 집 사람들이 매우 놀라 사람을 시켜 모량리를 조사하게 하니, 대성(大城)이 과연 죽었는데 그날 하늘에서 외치던 때와 같았다. 김문량의 아내는 임신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왼손을 꼭 쥐고 있다가 7일 만에야 폈는데 대성(大城) 두 자를 새긴 금간자(金簡子)가 있었으므로 다시 이름을 대성이라 하고, 그 어미를 집에 모셔 와서 함께 봉양했다.
이미 장성하자 사냥하기를 좋아하더니 어느날 토함산(吐含山)에 올라가 곰 한 마리를 잡고 산 밑 마을에서 잤다. 꿈에 곰이 변해서 귀신이 되어 시비를 걸며 말했다. "네 어찌하여 나를 죽였느냐. 내가 환생하여 너를 잡아먹겠다." 대성이 두려워서 용서해 달라고 청하니 귀신은, "네가 나를 위하여 절을 세워 주겠느냐"하고 말했다. 대성은 그러마고 약속했는데 꿈을 깨자 땀이 흘러 자리를 적셨다.
그 후로는 들에서 사냥하는 것을 금하고 곰을 잡은 자리에 곰을 위해서 장수사(長壽寺)를 세웠다. 그로 인해 마음에 감동되는 바 있어 자비의 원(願)이 더욱 더해 갔다. 이에 이승의 양친을 위해 불국사(佛國寺)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를 세우고, 신림(神琳)ㆍ표훈(表訓) 두 성사(聖師)를 청하여 각각 살게 했다. 아름답고 큰 불상을 설치하여 부모의 양육한 수고를 갚았으니 한몸으로 전세와 현세의 두 부모에게 효도한 것은 옛적에도 또한 드문 일이었다. 그러니 착한 보시의 영험을 가히 믿지 않겠는가.
장차 석불(石佛)을 조각하고자 하여 큰 돌 하나를 다듬어 감개(龕蓋)를 만드는데 돌이 갑자기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 대성이 분하게 여기다가 어렴풋이 졸았는데 밤중에 천신(天神)이 내려와 다 만들어 놓고 돌아갔으므로 대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남쪽 고개로 급히 달려가 향나무를 태워 천신을 공양했다. 그래서 그 곳의 이름을 향령(香嶺)이라고 했다. 불국사의 운제(雲梯)와 석탑은 돌과 나무에 조각한 기공(技工)이 동도(東都)의 여러 절 가운데서도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
옛 향전(鄕傳)에 실려 있는 것은 이상과 같다. 그러나 절 안의 기록에는 이렇다. "경덕왕(景德王) 때에 대상(大相) 대성(大城)이 천보(天寶) 10년 신묘(辛卯)에 불국사를 짓기 시작했다. 혜공왕(惠恭王) 때를 거쳐 대력(大歷) 9년 갑인(甲寅) 12월 2일에 대성이 죽자, 나라에서 이를 완성시켰다. 처음에 유가교(瑜跏敎)의 고승(高僧) 항마(降魔)를 청해다가 이 절에 거주하게 했고 이를 계승해서 지금에 이르렀다." 이렇게 고전(古傳)과 같지 않으니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찬(讚)해 말한다.
모량(牟梁)에 봄이 지니 삼무(三畝)의 밭을 보시하고,
향령(香嶺)에 가을이 오니 만금(萬金)을 거두었다.
어머니는 백 년 사이 가난과 부귀(富貴)를 겪었는데,
귀정(槐庭)은 한 꿈 사이에 이세(二世)를 오갔구나.
향득사지(向得舍知) 할고공친(割股供親) 경덕왕대(景德王代)
웅천주(熊川州)에 향득(向得)이란 사지(舍知)가 있었다. 흉년이 들어 그 아버지가 거의 굶어 죽게 되자 항득은 다리의 살을 베어 봉양했다. 고을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자세히 상주(上奏)하자 경덕왕(景德王)은 곡식 500석을 상으로 하사했다.
손순매아(孫順埋兒) 흥덕왕대(興德王代)
손순(孫順; 고본古本에는 손순孫舜이라고 했다)은 모량리(牟梁里) 사림이니 아버지는 학산(鶴山)이다. 아버지가 죽자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아 양식을 얻어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어머니의 이름은 운오(運烏)였다. 손순에게는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항상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손순은 민망히 여겨 그 아내에게 말했다. "아이는 다시 얻을 수가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구하기 어렵소. 그런데 아이가 어머님의 음식을 빼앗아 먹어서 어머님은 굶주림이 심하시니 이 아이를 땅에 묻어서 어머님 배를 부르게 해드려야 겠소." 이에 아이를 업고 취산(醉山; 이산은 모량리牟梁里 서북쪽에 있다) 북쪽 들에 가서 땅을 파다가 이상한 석종(石鐘)을 얻었다. 부부는 놀라고 괴이히 여겨 잠깐 나무 위에 걸어 놓고 시험삼아 두드렸더니 그 소리가 은은해서 들을 만하다.
아내가 말했다. "이상한 물건을 얻은 것은 필경 이 아이의 복인 듯싶습니다. 그러니 이 아이를 묻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남편도 이 말을 옳게 여겨 아이와 석종(石鐘)을 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종을 들보에 매달고 두드렸더니 그 소리가 대궐까지 들렸다.
흥덕왕(興德王)이 이 소리를 듣고 좌우를 보고 말했다. "서쪽 들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맑고도 멀리 들리는 것이 보통 종소리가 아니니 빨리 가서 조사해 보라." 왕의 사자(使者)가 그 집에 가서 조사해 보고 그 사실을 자세히 아뢰니 왕은 말했다. "옛날 곽거(郭巨)가 아들을 땅에 묻자 하늘에서 금솥을 내렸더니, 이번에는 손순이 그 아이를 묻자 땅 속에서 석종이 솟아나왔으니 전세(前世)의 효도와 후세의 효도를 천지가 함께 보시는 것이로구나." 이에 집 한 채를 내리고 해마다 벼 50석을 주어 순후한 효성을 숭상했다. 이에 손순은 예전에 살던 집을 희사해서 절로 삼아 홍효사(弘孝寺)라 하고 석종을 모셔 두었다.
진성왕(眞聖王) 때에 후백제의 횡포한 도둑이 그 마을에 쳐들어와서 종은 없어지고 절만 남아 있다. 그 종은 얻은 땅을 완호평(完乎坪)이라 했는데 지금은 잘못 전하여 지량평(枝良坪)이라고 한다.
빈녀양모(貧女養母)
효종랑(孝宗郞)이 남산(南山) 포석정(포石亭; 혹은 삼화술三花述이라고도 했다)에서 놀고자 하자 문객(門客)들이 모두 급히 달려왔으나, 오직 두 사람만이 뒤늦게 오므로 효종랑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들이 대답했다. "분황사(芬皇寺) 동쪽 마을에 여인이 있는데 나이는 20세 안팎이었습니다. 그는 눈이 먼 어머니를 껴안고 서로 통곡하므로 같은 마을 사람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말하기를 '이 여자는 집이 가난해서 빌어다가 어머니를 봉양한 지가 이제 여러 해가 되었는데 마침 흉년이 들어 걸식해다가 살리기도 어렵게 되어 이에 남의 집에 가서 품을 팔아 곡식 30석을 얻어서 주인집에 맡겨 놓고 일을 해왔습니다. 날이 저물면 쌀을 가지고 집에 와서 밥을 지어 먹고 어머니와 같이 잠을 자고, 새벽이면 주인 집에 가서 일을 했습니다. 이렇게 한 지 며칠이 되었는데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전일에 강비(糠粃)를 먹을 때는 마음이 편하더니 요새 쌀밥을 먹으니 창자를 찌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안치 못하니 어찌된 일이냐고 했습니다. 그 여인이 사실대로 말했더니 어머니는 통곡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여인은 자기가 다만 어머니의 구복(口腹)의 봉양만을 하고 색난(色難)을 하지 못함을 탄식하여 서로 껴안고 울고 있는 것이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구경하느라고 이렇게 늦었습니다." 효종랑은 이 말을 듣고 측은해하여 곡식 100석을 보냈다. 낭의 부모도 또한 옷 한 벌을 보냈으며, 수많은 낭(郎)의 무리들도 곡식 1,000석을 거두어 보내주었다.
이 일이 왕에게 알려지자 그 때 진성왕(眞聖王)은 곡식 500석과 집 한 채를 내려 주고 또 군사들을 보내서 그 집을 호위해서 도둑을 막도록 했다. 또 그 마을을 표창해서 효양리(孝養里)라 했다. 그 뒤에 그 집을 희사해서 절을 삼고 양존사(兩尊寺)라 했다.
우리 동방 삼국(三國)의 본사(本史)나 유사(遺事) 두 책이 딴 곳에서는 간행된 것이 없고 오직 본부(本府)에만 있었다. 세월이 오래 되매 완결(완缺)되어 한 줄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이 겨우 4, 5 자밖에 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건대, 선비가 이 세상에 나서 여러 역사책을 두루 보고 천하의 치란(治亂)과 흥망(興亡), 그리고 모든 이상한 사적에 대해서 오히려 그 견식을 넓히려 하는 것인데, 하물며 이 나라에 살면서 그 나라의 일을 알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이에 이 책을 다시 간행하려 하여 완본(完本)을 널리 구하기를 몇 해가 되어도 이를 얻지 못했다. 그것은 일찍이 이 책이 세상에 드물게 유포되어 사람들이 쉽게 얻어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지금 이것을 고쳐 간행하지 않는다면 장차 실전(失傳)되어 동방의 지나간 역사를 후학(後學)들이 마침내 들어 알 수가 없게 될 것이니 실로 탄식할 일이다. 다행히 사문(斯文) 성주목사(星州牧使) 권공(權公) 주(輳)가, 내가 이 책을 구한다는 말을 듣고, 완본(完本)을 구해 얻어서 나에게 보냈다. 나는 이것을 기쁘게 받아 감사(監司) 안상국(安相國) 당(당)과 도사(都事) 박후전(朴候佺)에게 이 소식을 자세히 알렸더니 이들은 모두 좋다고 했다. 이에 이것을 여러 고을에 나누어 간행시켜서 본부(本府)에 갖다가 간직해 두게 했다.
아아! 물건이란 오래 되면 반드시 폐해지고 폐해지면 반드시 일어나게 마련이다. 이렇게 일어났다가 폐해지고 폐해졌다가는 다시 일어나게 되는 것이 바로 이치의 떳떳한 바이다. 이치의 떳떳함으로 일어날 때가 있는 것을 알고 그 전하는 것을 영구하게 해서 또한 후세의 배우는 자들에게 배움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 이 글에 틀린 글자가 있을 수 있음을 미리 밝힌다. 이 글을 아스키 문서와 웹 문서로 바꾸면서 깨진 글자들이 있을 수도 있음을 밝혀둔다. 영문자를 기본으로 하여 만들어진 슬기틀에서 우리 글이 깨지는 일은 이 글뿐만 아니라 앞으로 진행될 직지프로젝트의 우리 문학 전산화 작업에서 흔하게 발생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
***** 이 문서는 2000년 5월 현재 한자에서 현대문으로 번역하신 이민수 교수님이 가지고 계신 지적재산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직지프로젝트는 이 문서를 계기로 하여 여러 사람이 동시에 우리 문학의 전산화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하였으며, 그 양(量)이나 역사적, 문학적 가치로 보아 여러 사람들이 자유롭게 사용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직지'의 정신을 실천하는 일이겠기에 이 문서를 직지프로젝트에 게시한다. *****
******* 처음에는 '고전 전래 동화'를 전산화하려고 했는데 대부분의 출전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라서 삼국유사의 전산화를 겁 없이 시작했습니다. 삼국유사를 전산화하면서는 다른 작품보다 느낌이 더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우리말과 글에 대한 사랑입니다. 옛사람들은 한자로 감정과 사상을 표현하는 것이 당연했겠지만, 그 글을 오늘말로 바꾸는 일에서도 한자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보고는 크게 반성했습니다. 그 반성을 기본으로 이 글에서는 한자어를 우리말보다 작게 나타냈습니다. 그것이 저희가 할 수 있는 가장 조그마한 우리말 사랑입니다.
더 바람이 있다면 이 글이 밑거름이 되어 더욱 더 우리말다운 제 2, 제 3의 삼국유사가 나왔으면 합니다. 정보는 길을 잃지 않습니다. 낮은 곳에서 열려있는 정보일수록 그 가야할 방향을 잘 아는 법입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직지프로젝트'의 뜻을 이해하시는 몇 분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끝내서 너무 기쁩니다. 직지프로젝트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낮은 곳에서 열려있는 정보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
직지프로젝트는 세계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든 우리 조상들의 슬기를 되살려 우리글의 전산화, 정보화, 세계화를 위한 디딤돌이 되고자 하는 정보화운동이다. 한 달에 한 권 우리 문학을 전산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전산화하는 대상은, 첫 번 째가 '우리 고전', 두 번 째가 '전래 동화 및 아동 문학'(어린이가 보는 글을 먼저 바른 말로), 그리고 세 번 째가 여러 사람들이 많이 읽어서 '우리 시대의 고전'으로 인정받은 글이다.
지적 저작권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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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재산권은 인류가 지닌 가장 근본적인 자산이며, 인간을 동물과 분류하는 특징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그 재산은 모든 인류가 공유해야 하며, 또한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자산이다. '직지'는 지금부터 50년이 지나고, 100년이 지나 더 이상 오늘 찍은 책의 지적 재산권을 주장할 수 없고, 더 이상 그 책이 출판되지 않을 때에도 우리 자손들이 자신들의 생활의 일부가 되어 버린 인터넷에서 조상들의 아름다운 글들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직지'는 인터넷과 통신을 통해 이 문서가 널리 퍼져 개인적으로 쓰는 것을 찬성한다. 그러나 상업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에는 그 사용자에게 법적 책임이 있음을 밝힌다. 인쇄한 글에 대한 지적 재산권은 글쓴이와 출판사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서를 그 뿌리로 하여 만들어진 문서는 그 뿌리가 '직지'에 있음을 밝혀야 한다. 또한 이 글을 퍼뜨릴 때에는 '직지'에서 쓴 이 글을 포함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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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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