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른여덟 해 된 병자를 고치심
요 5:6-13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2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요 5:6-13 / 예수께서는 그가 오래된 병자인 것을 곧 알아보시고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7) 병자가 말하였다. `물이 움직일 때에 저곳에 들어가도록 저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저는 낫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들어가려고 하는 동안에 언제나 다른 사람이 저보다 먼저 들어갑니다.' 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침구를 걷어 들고서 걸어가라!' 9) 그 순간에 그는 병이 나아서 침구를 걷어들고 걸어갔다. 이 이적이 일어났던 날은 마침 안식일이었다. 10) 그래서 유대인은 병나은 사람에게 `안식일에 침구를 들고 가다니 그건 법에 어긋나오' 하고 나무랐다. 11) 그러자 그는 `병을 고쳐 주신 분이 침구를 들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2) `도대체 그런 말 한 사람이 누구요?' 하고 그들이 따지고 나섰다. 13) 그러나 그는 자기를 고쳐 준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미 군중 속으로 사라지신 뒤였다.
예수님은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신 후 그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말씀으로 그 사람을 고쳐주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6-7)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 있는 한 병든 자를 보시고 그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셨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그 사람의 병든 지 38년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보자마자 그것을 아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지니고 계신 전지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요 2:24; 4:18). 예수님은 그 병자에게 이름이나 병의 내용 그리고 증세 등을 묻지 않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 오직 그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이심을 알지 못한 채 기회가 와도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면서 낙심했습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9)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이 즉시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일어나라’, ‘네 자리를 들라’, ‘걸어가라’며 세 가지 연속적 행동을 명령했습니다. 예수님이 명령하신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람의 관점으로 볼 때는 불가능한 것이었지만 그 명령하신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9a-13)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안식일 규범에 따라 예수님에게 고침을 받은 38년 된 병자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정죄했습니다. 이에 고침을 받은 자는 자신을 고쳐주신 이의 말을 따를 뿐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가 누구냐고 물었지만 예수님이 이미 그곳을 피하셨기 때문에 고침을 받은 자는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규범만을 중시하는 나머지 병 나은 자를 축하해 주지 아니하고 오히려 정죄하고 비난했습니다.
적용: 38년 된 병자는 주님을 앞에 두고서도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음을 호소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낙심한 적은 없었는지 서로 나누어 봅시다(참조 겔 36:37; 마 7:7).
최대의 지혜라는 것은 자신의 지혜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지혜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학문은 우리에게 많은 지식을 줍니다. 그러나 지혜를 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지식이 많지만 지혜 없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많습니다. 링컨은 “내가 오늘 이처럼 된 것은 켄터키 옛집을 떠날 적에 어머니께서 내게 들려주신 성경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고 대통령 당선된 직후 기자회견에서 말했습니다. 성경 말씀이 그를 그처럼 지혜롭게 만들었습니다. 자기에게 지혜 없음을 알고 하나님의 무궁한 지혜 앞에 순복할 줄 아는 지혜를 링컨은 가졌습니다. 레온 펠브스라는 유명한 대학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 말씀이 없는 대학 교육보다 대학 교육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택하겠다.” 왜 그렇습니까? 그 안에 참된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 설 교 >
선물보다 선물을 주신 분이 중요합니다
요 5:1-9 / 김필곤 목사
요즈음 고용불안으로 생긴 신조어들이 있습니다. ‘이태백’, ‘청백전’,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 ‘육이도’ 등과 같은 말입니다. 이태백은 20대 태반이 백수라는 말입니다. 청백전은 청년 백수 전성시대라는 말입니다. 삼팔선은 회사에 취직해서 38세를 넘기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사오정은 45세면 정년퇴직한다는 말입니다. 오륙도는 56세 직장 있으면 도둑이라는 말입니다. 육이도는 62세 일하면 오적 중 하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66세에도 책을 내고 69세에도 젊은이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강의하러 다니는 분의 강의를 들어 보았습니다. 전신애 전 미국 노동부 차관보입니다. 한국 여성 최초로 미연방 노동부 차관보를 지낸 분입니다. 당시 연봉 2억쯤 받았다고 합니다. 아시안 여성이 차관보가 된 것은 노동부 여성국 81년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답니다. 2001부터 2009년까지 8년 동안 장수한 차관보로 1950년 이래 가장 장수한 차관보라고 합니다. 이분이 66세대 “너는 99%의 가능성이다”라는 책을 내었습니다.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이화여대를 나왔는데 아버지가 반대하는 동성동본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몰래 미국행 비행기를 탔고 합니다. 인생의 가장 큰 모험이었답니다. 이로 인해 많은 대가를 치렀답니다. 아버지의 노여움이 외손자의 재롱에 의해 묻혀 버리기까지 장장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답니다. 남편의 권유로 임신 5개월의 몸이지만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교육상담과 사회정책을 전공했답니다. 애초 공부에 큰 뜻이 없었지만 남편이 마련해 준 등록금이 아까워 열심히 공부했답니다. 전통적인 한국의 어머니처럼, 두 자식의 양육에 온갖 정성을 들이다가 둘째가 여섯 살이 되어 유치원에 입학하자 이중언어교육센터의 공립학교 교사들을 훈련시킬 직원으로 취직이 되었답니다. 그 때 나이 32살이었답니다. 그러나 미 정부의 예산 삭감으로 직장이 문을 닫게 되었답니다. 실직한 것입니다. 그 때 좌절하지 않고 아시아 이민자의 권익을 대변할 필요성을 느낀 "아시아계 미국인 동맹" 을 결성하고 1982년 "아시아계 미국인 자문회의"의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답니다. 이를 계기로 1989년 일리노이 주 정부 금융규제부 장관에 임명되고, 1991년부터는 일리노이 주 노동부 장관으로, 2001년 3월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미연방 노동부 여성국 담당 차관보로 임명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분의 수면 시간은 5시간이었고 부족한 잠은 낮잠으로 보충하면서 남보다 2배 이상의 노력하여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책에서 그분은 말합니다. "우물안에서 본 하늘은 한 평에 불과하다. 거침없이 더 큰 세상으로 뛰쳐나가라." “누구든 꿈의 높이만큼 올라서고, 무엇이든 열정의 크기만큼 얻을 수 있다.!” “자신을 바닥에 처박을 수 있는 사람도, 거기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다...도전하겠다는 의지가 강할수록 기회는 우리를 저버리지 않는다. 큰 잠재력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저력이 그대 머리와 가슴 속에 있다!”라고 말합니다. 젊은이들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말합니다. “여성은 대한민국의 미래이다.”라고 말합니다. 경영학의 대가 톰 피터스는 "향후 경제 성장의 원동력은 중국도 인도도 인터넷도 아닌 여성"이라고 말하며 “준비된 자만이 세계를 품을 수 있다.” "1%의 도전정신과 열정이 100%의 인생을 만들 수 있는 만큼 큰 야망을 품고 도전을 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며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고 더 큰 꿈을 꾸며 넓은 안목으로 세계를 바라볼 것"을 말합니다. “누구에게나 99%의 가능성은 있다. 나머지 1%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도전정신과 열정, 노력이다.” “대한민국의 청년들이여! 고단한 현실로 위축되고 취직난으로 움츠러들기에는 너무 많은 가능성이 그대들을 향해 열려 있다. 세계는 넓고 그대들이 도전할 일들을 무궁무진하다.”라고 말합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너무 침체되어 있습니다. 누워있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누워있지 말고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일어난 사건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일어난 사건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해석하고 그것을 그것에 대하여 반응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일어난 사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해석이고 사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반응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 누워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누워있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요?
1.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 누워있는 수밖에 없는 방법을 일어날 수밖에 없는 방법으로 전환하여야 합니다.
그는 건강을 잃어 누워 있었습니다. 자비의 연못에 자비를 누리지 못하고 병자로 누워있었습니다.(6) 스스로 걸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7).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이동의 자유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38년입니다. 질병이란 인간을 참으로 비참하게 만듭니다. 행복하게 잘 살던 가정에 질병이 찾아오면 그 자신 뿐 아니라 그 가정이 고통을 당합니다. 그런데 한 두 해도 아니고 38년이란 세월을 질병 가운데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질병에는 감염성 질환(감염체가 몸 속에 들어와 생긴 질병-바이러스, 박테리라, 곰팡이, 기생충), 기능 장애성 질환(신체내 기관이 분비물을 너무 많이 또는 너무 적게 분비하여 일어남, 당뇨병, 고혈압), 퇴화성 질환(신체 기능의 퇴화로 일어나는 관절염, 치매 등) 등이 있습니다. 이것들 인생을 살면서 언젠가 찾아 옵니다. 그 질병이 어떤 것이든 질병에 걸리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아무도 그를 거들떠 보지 않습니다. 정신적인 소외자가 되었습니다. 그를 돌보아 줄 만한 친구도, 부모도, 형제도, 친척도 없었습니다. 본래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가 이 땅에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는 기뻐했을 것이고 그의 친척들은 그를 환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병이 들자 모두 떠났을 것입니다. 38년 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병들어 누워 있으면 아마 다 그 주변을 떠나버린 것 같습니다. 버림받는 사람입니다. 부모도 지긋지긋했을 것입니다. 그 38년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었겠습니까? 이제 그는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그를 돌보는 이 없는 외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철저히 소외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삶의 경쟁에서 실패자요 낙오자입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영적인 불구자였습니다.(12,13) 예수님을 알지 못한 사람입니다.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가 자신의 질병을 치료하고자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베데스다 연못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는 그 방법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있는 수많은 환자들이 그 방법이 전부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으로 실패한 것입니다. 그 방법으로는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무려 38년 동안 계속 반복하여 사용해 보았지만 경쟁에서 철저히 실패한 것입니다. 실패하는 방법을 쓰면 계속 반복해도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인가 안 되면 되는 방법을 강구해 보아야 합니다. 선물을 못 받으면 선물을 주시는 분을 만나면 됩니다. 값진 선물을 받고 싶으면 갚진 선물을 주시는 분을 만나면 됩니다. 꼭 베데스다 연못에만 들어가야 치료되는 것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면 되는 것입니다. 꼭 공부만 잘 해야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 못하면 다를 방법을 강구해 보는 것입니다. 그런 유머 있지 않습니까? 똑똑한 여자 예쁜 여자 못 당하고, 예쁜 여자 시집 잘 간 여자 못 당하고, 시집 잘 간 여자 자식 잘 둔 여자 못당한다고 하지 않아요. 방법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어나지 못하는 베데스다만 고집하지 말아요. 그것은 하나의 선물에 불과합니다. 선물을 주시는 주인인 예수님 만나면 질병의 문제도, 소외의 문제도, 영적인 문제도 해결받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 예수님은 소외되고 실패한 자, 버림받은 자, 아무도 환영해 주시 않는 자에게 선물을 주시기 위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모두 다 그를 버렸습니다. 부모마저 버렸습니다. 모두 다 포기했습니다. 부모 형제마저 포기했습니다. 그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무거운 짐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모두 다 그를 떠나 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찾았습니다. 모두 다 그이 이름조차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기억해 주었습니다. 모두가 다 그의 아픔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38년의 질병과 고통을 소상히 알고 계셨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우리 주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시고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셨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 큰 무리를 보신 것이 아니라 그를 보셨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고통을 보고 계십니다.
그 병이 오랜 줄 아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양을 아노라"(요10:14)
먼저 그리스도께서 그를 보시고 그에게 이르셨다. 그가 주님을 찾기 전 먼저 주님이 그를 찾으셨다.
10명의 한센 씨 병 환자를 예수님을 고쳐 주실 때 그들을 먼저 예수님 보고 계셨습니다(눅17:11-19) 모두 다 외면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눅7:11-16)을 고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비통하겠습니까? 남편을 먼저 보내고 외아들 하나 의지하고 사는데 그 아들이 죽어 장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말씀해 주십니다.
야이로의 딸(막5:22-24)을 고치실 때도 예수님께서 먼저 찾아 가십니다.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해 주십니다.
나의 질병, 나의 고통, 나의 아픔, 나의 실패, 나의 사정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우리 주님은 아십니다. 자식도 아내도, 남편도 친구도 다 나를 떠나 버린다 할지라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계속된 실패로 좌절하며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방법대로 안되면 우리 주님 만나면 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
2.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 누워있을(실패) 수밖에 없는 생각을 일어설(성공) 수밖에 없는 생각으로 전환하여야 합니다.
대부분 누워 있는 사람을 누워 있을 수 밖에 없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패하는 사람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생각을 가지고 삽니다. 38년 동안 실패한 이 병자는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그의 말을 통해 그의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동하면 그 중에 누군가 한 명이 뛰어 들어가면 한 사람만 치료되는 신비한 연못입니다. 환자들마다 물이 움직이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걸어 다닐 수 없는 사람이라 누군가 넣어 주어야만 했습니다. 그 물에 자신을 넣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소외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를 돌보아 줄 만한 친구도, 부모도, 형제도, 친척도 없다는 것입니다. 경쟁에서 실패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환자의 생각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38년입니다. 노하우가 생겼을 듯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한 치의 진전이 없습니다. 누가 데려다 넣어줄 것을 생각하지 말고 넣어줄 사람이 없으면 혼자 평소에 조금씩 끝으로 뒹굴든지 기어가던지 끝에 대기하고 있다가 물이 동하면 풍덩 들어가야겠다고 생각을 고치면 됩니다. 아니면 아애 발을 담그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도울 사람이 없으면 내 스스로 어떻게든 해보아야 하겠다고 생각을 고치면 방법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에게 찾아가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6절을 보십시오. 그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에게 났기를 원하느냐고 물어 보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일수 있습니다. 낳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도 다 알고 있습니다. 왜 이런 질문을 던졌겠습니까? 누워 있을 수밖에 없는 그의 마음을 교정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의 생각을 교정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자포자기하고 절망한 그의 생각을 교정해주기 위해서입니다.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그의 생각을 교정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람을 보십시오. 이 말을 듣고 바로 낫기를 원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낳지 못하는 이유만 줄줄이 대고 있습니다. 안 되는 이유만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역장을 맡으면 목자를 맡으면 안되는 이유만 말합니다. 교사를 맡고, 전도를 맡고, 식당 봉사를 맡으면 안되는 이유만 말합니다. 비판만 합니다. 대안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공부 못하는 이유, 가난한 이유, 실패한 이유, 사업에 안 되는 이유만 줄줄이 댑니다. 자기 탓이 아니라 자기 생각의 잘못이 아니라 남의 탓만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 경기, 작업환경, 인재 부족, 자본 부족 등 외부적 안 되는 외부적 환경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 누가 모릅니까? 우리에게 인생의 선물을 주시기 원하는 주님은 그것을 말하기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 만물의 주인인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께서 저를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 만나면 자비의 집에서 자비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길 원하는 것입니다. 움직일 수는 없지만 귀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식전환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일어설 수 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안되면 안되게 하는 생각이 마음 깊숙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경쟁력이 없어도 일어설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존 맥스웰이 쓴 "실패를 딛고 전진하라"라는 책이 있습니다. 경영학 교수인 개리 해멀과 프라할라드가 원숭이를 대상으로 실험한 내용이 나옵니다. 중앙에 긴 막대기가 세워져 있는 방에 원숭이 네 마리를 넣어 두었습니다. 그 막대의 꼭대기에는 바나나가 매달려 있었는데, 배가 고픈 한 원숭이가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막대기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원숭이가 바나나를 잡아채려는 순간, 찬물을 억수같이 퍼부었습니다. 그 원숭이는 질겁하여 비명을 지르며 재빨리 막대기에서 내려왔고 더 이상 먹으려는 시도를 포기합니다. 모든 원숭이가 비슷한 시도를 했으나 찬물을 뒤집어쓰고는 결국 모두 포기했습니다. 새 원숭이로 교체하였습니다. 그것을 목격하지 않은 새 원숭이가 올라가려고 하자 다른 원숭이가 잡아 끌어냅니다. 네 마리 다 교체했습니다. 그런데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유도 모르고 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올라가면 찬물을 억수로 맞는다는 것입니다. 시도도 해보지 않고 실패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실패의 고속도로에서 못 빠져 나옵니다. 이것을 "정적 평가의 오류"라고 말합니다. 물고기를 유리벽이 있는 어항에 넣어 놓습니다. 가다가 유리벽 때문에 갈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유리벽을 제거해도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패의 현장에서 할 수 없다고 자포자기 하며 남 탓하고 환경 탓만 할 것이 아니라 좋은 선물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 의식을 전환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사용할 때 보십시오. 사람낚는 어부로 의식을 전화하여 사용하십니다. 바울을 사용할 때 이방인과 임금들을 위한 하나님의 그릇으로 의식을 전환하여 사용합니다. 실패한 모세 사용할 때 모세의 의식전환하여 사용하십니다. 생각이 바뀌어야 성공의 대로가 보이는 것입니다.
「실패에서 성공으로」라는 책을 쓴 프랭크 베트거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야구선수였는데 부상으로 야구선수 생활을 접어야 만했습니다. 살기 위해 보험 세일즈맨이 되었습니다. 29세 때 세일즈맨으로서는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미국 피델리티 상호 생명보험회사에서 근무하던 20년 동안 전국 5위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실패에서 성공으로 전환한 동기를 그의 책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보험을 팔려고 노력했지만 성과 없이 여러 날을 구인광고에 응모하면서 보냈다고 합니다.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혔습니다. 회사에서 그만 두려고 짐을 정리했답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사장과 세일즈맨들의 회의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답니다. 영업사원들에게 탤보트 사장은 "영업이라는 일은 결국 한 가지, 오직 한 가지로 귀결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을 만나는 일입니다. 밖에 나가서 하루에 네댓 명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정직하게 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영업에서 성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마치 태양이 갑자기 구름을 비집고 나와 쨍하고 비치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말했답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이봐, 프랭크, 너는 튼튼한 다리를 가지고 있잖아. 너도 매일 밖으로 나가서 네다섯 사람한테 자신의 이야기를 정직하게 할 수 있어.' 자신에게 말한 것입니다. 생각을 바꾼 것입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생각을 성공할 수밖에 없는 생각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 후 그는 하루에 적어도 네 사람을 만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2개월 동안의 모든 방문 결과를 완벽하게 기록해 두었답니다. 그 결과 그의 영업은 70%가 첫 번째 면담에서, 23%는 두 번째 면담에서, 그리고 7%는 세 번째 면담에서 성사된 것을 알았고 자신의 시간 50%가 그 7% 때문에 소비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발견을 토대로 그는 첫 번째 면담과 두 번째 면담에 모든 시간을 투자했고, 성공적인 세일즈맨이 되었다고 합니다.
인도의 벵골 호랑이도 사냥에 성공하는 확률은 대략 스무 번 중 한 번이라고 합니다. 자기 의심, 자기 비하할 시간이 있으면 사명감을 붙들어야 합니다. 인간의 뇌 세포는 140억 개 정도 있지만 보통 이 중의 2∼5%밖에 사용하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만약 1%이라도 충분히 뇌 세포를 사용한다면 그 효과는 대단히 크다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습니다. 쓰러지면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선물을 주시기 위해 우리의 상태를 알고 찾아오십니다. 예수님 물어 보십니다. 진정 낫기를 원하느냐? 전도에서, 성격을 고치는데서, 습관을 고치는데서, 일에 성공에서, 공부에서, 직장에서 진정 낫기를 원합니까? 진정 부자되기 원하십니까? 진정 질병에서 치유되기 원하십니까? 진정 마을 교회가, 구역이 내가 맡은 부서가 부흥되기를 원하십니까? 누워있는 생각에서 일어서는 생각으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3.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 누워있을(실패) 수밖에 없는 행동을 일어설(성공) 수밖에 없는 행동으로 전환하여야 합니다.
사람이 실패할 때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행동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누워있는 것은 누워 있을 수밖에 없는 행동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38년 동안 그가 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저 베데스다 연못 가에 누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이 동할 때를 기다렸다 기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행동으로 어떻게 걸어다닐 수 있는 사람과 경쟁에서 이기겠습니까? 38년 동안 연못에 대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미리 기어가서 대기했다가 들어갈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계획 없는 막연한 삶을 산 것입니다. 철저한 실행력이 없는 것입니다. 피흘리는 실행력이 없는 것입니다. 38년 동안 실패한 자신의 삶을 고백하는 이 환자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8절을 보십시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실패한 이유만 말하지 말고 내 말 듣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이성에 순종하는 행동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행동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관습만 따르는 행동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행동으로 전환해 보라는 것입니다. 낳기 위해 물이 동할 때 그 때야 기어가는 행동에서 지금 당장 선물을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대로 해보라는 것입니다. 이 환자에게 이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요구입니다. 한 번도 일어나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한 번도 걷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것도 38년 동안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합니다. 일어나는 것도 불가능한데 들으라고 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걸어 가라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말씀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단 한마디 말씀으로 그를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예수님의 전능성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우리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선물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 원수도 용서하라는 말씀 붙들고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찬양대 지각하고, 교사 지각하는 것 말씀 붙들고 실행해 보십시오. 주일학교가 일어납니다. 찬양대가 일어납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성격 안 고쳐질 것 같지만 순종해 보십시오. 고쳐집니다. 질병 낳지 않을 것 같지만 순종해 보십시오. 공부 못할 것 같지만 순종해 보십시오. 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한 가지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순종하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행동으로 바꾸면 기적은 일어납니다. 9절을 보십시오.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성공의 비법”이라는 책을 쓴 위르겐 횔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우리가 어떤 생각이나 계획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나서 이를 72시간 내에 실행하지 않았을 경우 이 생각이나 계획이 실행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나중에라도 실행에 옮기는 경우는 겨우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각 실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 들으면 즉각적으로 행동을 전환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나는 가능성이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패트릭 헨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양쪽안구가 없었습니다. 척추가 휘어 앉아있을 수 있기 위해 쇠를 박아넣는 수술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로 인해 무릎 밑으로 몸을 굽힐 수도 없습니다. 키도 자라지 않았습니다. 휠체어가 없으면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특별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삶을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의사들조차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알지 못했을 정도였지만, 9개월 때 아버지가 우연히 그를 피아노 앞에 앉히면서부터 그의 인생은 바뀝니다. 아버지가 건반을 누르면 완벽하게 같은 음을 찾아냈고, 오랫동안 연주해온 사람처럼 피아노 건반을 부드럽게 눌렀던 것입니다. 모든 것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을 일어나게 할 수 있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이후 그는 지금까지 피아노와 함께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점자를 익혀 대학에 진학했고, 마칭밴드에서 사람들과 함께 트럼펫 연주를 했으며, 대학 풋볼경기 중 가장 규모가 큰 오렌지볼(Orange bowl)에서 연주한 것을 계기로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하고, 스포츠 선수가 아닌 사람으로는 최초로 2006년 ‘디즈니 세계 스포츠 정신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물론 여전히 걸을 수 없고, 눈 대신 폴리에틸렌 재질의 구슬이 내 눈자리에 들어있지만, 나는 그 보이지 않는 눈으로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진짜 중요한 것을 봅니다. 삶은 여러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믿지 않는데, 삶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고, 그렇게 믿는다면 모든 일은 좋아질 것입니다. 나를 보세요. 내가 그 완벽한 예라구요!”
그는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내게 앞을 볼 수 없다는 `선물`을 주신 이유가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내면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믿는다. 또 내게 음악에 대한 열정을 주신 이유는 내 능력을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고 믿는다. 그리고 내게 사랑 많은 가족을 주신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 아낌없이 베풀며 축복을 나누게 하기 위해서라고 믿는다. 당신이 가진 고유한 재능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면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하는 길을 찾을 수 있다. 바로 당신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나님이 마련해놓으신 그 계획을 말이다.˝(304-305)
주님 말씀 따르면 손해 본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주님 말씀대로 하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말씀따라 가면 가나안에 이르게 됩니다. 말씀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성공입니다.
자비의 집에서 누워 있습니까? 누워 있을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까?
우리는 선물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 말씀 붙들고 거침없이 더 큰 세상으로 뛰쳐나가야 합니다. 지금 누워 있으며 선물이 없다고 불평할 때가 아닙니다. 선물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면 됩니다. 예수님께 일어서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들고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 일어설 수 밖에 없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일어설 수 밖에 없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절망의 자리에 찾아오신 예수님
요 5:1-10 / 안효관 목사
순창에 ‘돌 시인’이라고 불리는 박진식 시인이 있습니다.<사진1> 왜 그분을 돌 시인이라고 부르냐 하면 그의 온 몸이 돌처럼 굳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는 7살 때부터 ‘부갑상선 기능 항진증에 의한 각피 석회화증’이란 희귀병에 걸렸습니다. 이 병에 걸리면 몸 안에서 칼슘이 너무 과다하게 분비되어 몸이 돌처럼 굳어진다고 합니다. 그런 끔찍한 병으로 인해 그는 9살 때부터는 거의 누워 지내야 했습니다. 13살 때부터는 몸에 축적된 석회가 관절에 엉켜 붙었고, 체내 욕창으로 몸은 계속 부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면 석회가 몸을 뚫고 나와 피부 곳곳이 터지면서 생살이 빨간 젤리처럼 핏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25살 때에는 극심한 통증과 함께 폐와 심장까지 석회화가 진행되어 몸의 30%가 마네킹처럼 굳어버렸습니다. 한 번은 그의 어머니가 쇠꼬챙이로 몸 안의 석회를 긁어내다가 쇠꼬챙이가 휘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는 죽음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냥 죽기에는 너무 억울했습니다. 그는 희망의 끈을 부여잡고 자기 삶을 긍정하며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그런 질병과 고통 가운데서도 그는 영어와 한문을 공부했고, 많은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시를 쓰기 시작했고, 굳어버린 양손에 볼펜을 끼워 그것으로 컴퓨터 자판을 치면서 마침내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라는 제목의 자서전적인 책과 함께 여러 권의 시집과 에세이집을 내게 되었습니다.
그의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내 마음의 신앙”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신이 있어요.
어찌나 많은지 말들도 많아요.
하나님도 한 분이신데,
예수님도 한 분이신데,
다른 하나님도 너무 많아요.
다른 예수님도 너무 많아요.
너무나 아파서
너무나 괴로워서
간절히 기도하고 싶은데
어떤 하나님에게
어떤 예수님에게
기도드려야 하는지
너무나 혼란스러워요.
차라리 기도하지 말까
고민고민하다가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때
교회 가서 들었던
예수님에게 기도드렸더니,
성령의 역사하심이 그런 것인지
어느 날부터인가
내 안에 예수님이 보여요.
예수님 안에 내가 보여요.
그는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라는 책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살기 힘들어 절망하신 분이 있다면 제 이야기를 읽고 부디 힘을 내십시오. 저는 꿈꿀 수만 있어도 행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참담한 현실에 처했어도 살아 있는 한 꿈을 버리진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울지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꿈꿀 수만 있어도 행복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여기 꿈조차 꿀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 동북쪽에는 ‘양의 문’이라는 문이 있습니다. 이 문은 흔히 사자문 또는 스데반문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사자문’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 문 위쪽 양 옆에 각각 한 쌍의 사자 조각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 문을 ‘스데반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기독교 역사상 첫 번째 순교자인 스데반이 이 문 근처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밖에도 여호사밧 계곡을 향해 있다고 해서‘여호사밧 문’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무덤 근처에 세워진 ‘성 안나 기념교회’와 가까이 있어서 ‘마리아 문’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장 일반적으로 부르는 이름은 ‘양의 문’(양문)입니다. 이 문을 ‘양의 문(양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에 사용할 양들을 데리고 출입하던 문이기 때문입니다.
이 양문을 지나 조금 가다가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베데스다 연못이 있습니다.<사진 2> ‘베데스다’라는 이름은 ‘자비의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 베데스다 연못은 굉장히 컸습니다. 이 연못은 주전 2세기 경에 만들어졌는데, 그 크기가 가로로 약 110m, 세로로 약 60-80m에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쉽게 상상한다면 축구장 크기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길이가 채 20m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그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이 연못의 원래 목적은 예루살렘 성전에 물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이 연못 가까이에 성전이 있는데, 성전에서는 매일같이 제물이 도살되었습니다. 거기에 필요한 물이 이 베데스다 연못에서 공급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연못가에는 행각이 다섯 채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지역은 태양 볕이 아주 뜨거운 곳이기 때문에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 행각을 짓곤 했는데, 이 연못가에도 5개의 행각이 있었습니다.
그 행각에는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한 맹인들, 다리를 저는 사람들, 중풍병자와 같이 혈기 마른 사람들이 득실거렸습니다. 마치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모아놓은 임시 막사와 같은 처참함 모습입니다. 그들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의사에게 진료를 받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들이거나, 의사가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여 낙심한 채 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본문 3절의 “병자들”이란 말은 ‘약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몸이 병들어 아프기도 하지만, 가진 것 없고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힘없고 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여기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여 있는 이유는 단 하나 -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재빨리 연못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그 연못에는 가끔 심하게 물이 요동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천사가 내려와서 손으로 물은 휘젓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 가장 먼저 그 연못에 들어간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는다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베데스다 연못가에 세워진 다섯 개의 행각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조차 희망을 포기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천사가 내려와 연못의 물을 휘저을 때조차도 연못에 가장 먼저 내려갈 가능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38년이란 너무 긴 세월 동안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지금은 스스로 병상에서 일어설 수조차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떼메어다가 연못에 넣어주면 모를까 자기의 힘으로 연못에 내려가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연못가에는 그와 같이 오랜 병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을 연못에 넣어주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자원봉사자가 전혀 없었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경쟁자들뿐입니다. 물이 움직이면 서로 먼저 연못에 내려가기 위해서 앞 다투어 경쟁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서로를 배려하거나 서로를 도와주려는 마음을 가질 여유가 전혀 없는 사람들뿐입니다. 그러다보니 38년이나 병으로 고생한 그는 아예 연못에 내려가는 것을 포기한 채 그냥 누워있을 뿐입니다.
그러던 어느 명절날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거리는 온통 축제분위기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모여들었습니다.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무리들 가운데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의 문에 통과하여 들어오시더니 성전을 향해 가지 않으시고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거기가 바로 베데스다 연못이었습니다.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오셨다면 당연히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실 줄 알았는데, 베데스다 연못가로 발걸음을 돌리자 제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예수님 뒤를 따라갈 뿐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이 가까워질수록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들려옵니다.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이 가득 찬 그 연못가에서 예수님의 시선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곧장 그에게로 걸어가셨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시선을 고정하시고 다가가는 그 사람 역시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아니 자신을 향해 오고 있는지조차 관심이 없습니다.
38년 된 병자 앞에 가까이 다가서신 예수님께서 다짜고짜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너무나도 당연한 질문입니다.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낫고 싶어 거기에 와 있습니다. 병이 들어 고통 가운데 있는 데 어느 누군들 낫고 싶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손가락에 작은 가시 하나만 찔렸어도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 시라도 빨리 가시를 빼려합니다. 그런데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는 질문은 너무나도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결코 당연한 질문이 아닙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물이 움직일 때 나를 연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묻는 질문에 그는 왜 그렇게 장황하게 대답했겠습니까?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고 물으시면 ‘예, 낫고 싶습니다.’ 그렇데 대답하면 되는데도 말입니다. 이 말은 ‘낫고는 싶지만 나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나는 이제 낫는다는 희망을 포기했습니다.’ 라고 대답한 말입니다.
그에게는 어떤 희망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뿐이었습니다. 그도 비록 몸은 병이 들었지만 한 때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 병자에 대한 정보를 성경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제공해 주지 않습니다. ‘38년 동안 병들어 있었고, 지금은 모든 희망을 포기한 채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는 것 외에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행복한 때가 있었고, 희망을 품고 살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가 언제 그 병에 걸렸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 병에 걸렸었다면 그는 나이가 벌써 40 가까이 되었습니다. 10살 때 병이 들었다면 그는 50살이 되었고, 20살 청년의 때에 병에 들었다면 그는 이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처음 그가 병들었을 때 그의 부모와 가족들이 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무던히 애를 썼을 것입니다. 용하다는 의사를 찾아가 보기도 했고, 좋다고 소문난 약은 다 먹어보았을 것입니다. 의사를 찾아가고 약을 먹을 때까지는 그래도 희망이 있었습니다. 또 가족들의 사랑이 아직도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자기 주변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가 결혼한 후에 병에 걸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와 결혼한 아내나 자식들도 그의 곁을 다 떠나갔습니다. 지금은 수많은 병자들로 들끓고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와 있지만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에게 관심조차 갖지 않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외톨이었습니다.
명절이 되어 예루살렘 거리에는 축제소리로 가득차고,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찬송소리로 가득 차 있다 하더라도 그게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축제로 떠들어대는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울려 퍼지는 찬송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의 귀에 들려오는 것은 오직 하나 - 주변에 있는 다른 병자들의 신음소리뿐입니다. 아니 그것마저 이제 익숙해졌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전혀 뜻하지 않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지금까지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 가져주지 않았습니다.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만은 달랐습니다. 어떤 청년이 제자들을 이끌고 와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틈바구니에게 곧장 자신을 향해 걸어오더니 다짜고짜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고 물어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도저히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으로 들어갈 힘조차 없는 자신에게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니? 그건 불가능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왠지 일어나고 싶어졌습니다. 다리에 힘이 생겨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리에 힘을 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동안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일어섰습니다. 마치 시계를 38년 전으로 돌려놓는 것만 같았습니다. 너무 기뻤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는 너무 기뻐 자신에게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한 그 분이 누구인지 확인할 틈도 없이 춤을 추며 베데스다 연못을 빠져나갔습니다. 마치 이곳은 나 같은 사람이 머무를 곳이 아니라는 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명절에 예루살렘에 오신 이유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동안이나 신음하던 바로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고쳐주신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었다는 것 때문에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논쟁은 그저 논쟁으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뒤이어 나오는 16절 말씀에 의하면 그 일로 인해서 예수님은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8절 말씀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일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신 후에 6:1절에 의하면 곧바로 갈릴리로 되돌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 것은 많은 사람이 그런 것처럼 명절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명절을 즐기기 위해서 오셨다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시자마자 예루살렘 성전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 예루살렘 거리로 가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오직 한 사람 - 38년 된 병자를 만나시기 위해서 갈릴리에서 며칠이나 걸어서 예루살렘에 오셨고, 그 병자를 고쳐주신 후에 다시금 며칠을 걸어서 갈릴리로 되돌아 가셨습니다.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던 한 사람,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던 한 사람, 세상의 모든 희망을 포기한 채 연명된 목숨의 끈에 이끌러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살던 한 사람 - 예수님은 바로 그 사람을 찾으셨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눈은 오늘도 꼭 한 사람에게 집중하고 계십니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을 바라보시며 오늘도 베데스다 연못가로 오십니다. 그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청와대에 있는 그 누구가 아닙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최고급 자동차를 타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 한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그 무언가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내 주변에 아무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게는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게 대답하고 싶을지 모릅니다. ‘내게는 아무도 없습니다. 내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가진 무언가를 보시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인기가 좋은가를 보고 우리를 만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내 주변에 아무도 없기에 주님이 나를 찾아오십니다. 내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기에 주님께서 내 모든 것이 되어주시기 위해서 나를 찾아오십니다. 아무도 내게 관심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주님께서 내게 관심을 보이시며 나를 찾아오십니다.
예수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사람은 기적의 주인공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다가가셔서 손을 내미시고, 말을 걸어온다면 그 때야말로 기적이 일어날 시간입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수많은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8년 동안 병으로 고생하던 그 한 사람만을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찾아가셨고, 그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베데스다 연못가 5채의 행각처럼 우리 삶의 주변에는 신음소리와 고통의 울부짖는 소리가 가득합니다. 길 건너 저편에서는 명절을 즐기기 위해서 떠들며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거룩한 찬송소리가 쉴 새 없이 흘러나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서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곳 - 예수님의 시선이 머무는 바로 그곳에서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찬송소리가 들릴 가망성이 전혀 없는 곳, 38년 동안 웃음소리를 잃어버린 채 신음소리만 가득한 곳, 모든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고 절망의 자리만이 가슴 가득이 밀려와 있는 그 곳 - 바로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그 사람만이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혹 너무 힘든 일로 인해 입술에서 찬송을 잃어버리지 않으셨습니까? 너무 오랜 기간 동안 무거운 짐과 고통으로 인해 웃음소리가 사라져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깊은 신음소리가 내 심장을 터질 것 같이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내 앞에 희망은 보이지 않은 채 길고 긴 절망의 터널에 갇혀 있는 것처럼 느껴지실 때가 있으십니까?
베데스다 연못가에 찾아오신 예수님, 오직 한 사람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찾아오신 그 예수님께서 오늘은 나를 바라보시고 나를 찾아오십니다. 내 신음소리를 없애주시기 위해서, 내 깊은 절망의 사슬을 끊어내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처한 절망의 자리가 바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모시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창조하실 능력의 자리입니다. 나에게는 절망의 자리가 하나님께는 기적의 자리입니다. 내 손으로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이상 아무 것도 없어 보일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실 축복의 자리입니다.
세계적인 성악가 중에 ‘호세 카레라스(Jose Carreras)’라는 분이 있습니다. 지난 2007년에 사망한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 그리고 풀라시도 도밍고(Placido Domingo)와 함께 ‘세계 3대 테너’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그가 성악가로서의 명성이 최고조에 달하던 1987년, 그의 나이 41세 때에 백혈병으로 쓰려지고 맙니다. 그 당시만 해도 치료가 어렵던 백혈병의 진단으로, 많은 사람들은 그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때 그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극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손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생명을 연장해 주시면, 남은 평생 주를 위해 충성하겠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면서 힘든 치료의 과정을 이겨나갔습니다. 골수 이식 수술과 힘든 화학치료를 받았습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손톱과 발톱도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찬송과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셨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는 1988년 전 재산을 팔아 고향인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호세 카레라스 국제 백혈병 재단>(Jose Carreras International Leukemia Foundation)을 세웠습니다. 병마를 극복하기까지 겪었던 숱한 어려움 속에서 자신이 받았던 도움을 다른 사람에게 되돌려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는 공연 수익금의 절반을 이곳으로 보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때로는 질병도 은혜가 될 때가 있습니다. 나는 백혈병과의 싸움을 통해서 나보다 남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증거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소망을 주는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때로 내가 원치 않는 자리에 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와 같이 주위에 아무도 없고, 내 손에 아무 것도 없어 보이고, 내 편이 아무도 없는 절망과 같은 자리에 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가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때입니다. 바로 그 때가 예수님의 눈길이 우리에게 머무는 때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주님의 음성이 들릴 때 우리에게는 기적이 일어나는 때입니다.
한 번은 나폴레옹이 아끼던 애마가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자 날쌘 병사 하나가 자기 말을 타고 그 말을 쫓아가 잡아왔습니다. 말고삐를 나폴레옹에게 건네주자 나폴레옹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고맙네, 대위.” 그 말을 들은 병사는 순간 어리둥절했습니다. 자신은 대위가 아니라 일개 졸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곧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는 경례를 붙이며 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장군님.” 그는 즉시 막사로 달려가 짐을 챙겨들고 장교 숙소로 옮겨갔습니다. 그리고 낡은 사병 군복을 벗어버리고 대위의 군복을 받아 바꿔 입었습니다.
나폴레옹 장군의 말 한 마디에 그는 일개 졸병에서 대위로 바뀐 것입니다. 그는 따지지도 않았고, 사양하지도 않았습니다. 또 의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아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했다는 것뿐이고, 그는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아무리 졸병이라도 나폴레옹 장군이 대위라고 부르면 대위가 되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에게는 그런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그대로 하면 됩니다. 우리 주님께는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권능이 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1-13 / 박기완 목사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예루살렘의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곳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여기서 양문은 '양의 문'을 말하는데, 느헤미야서 2장∼3장을 보면, 예루살렘에 여러 문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벽 재건 공사의 과정에서 망대문, 분문, 어문, 샘문, 양문 등이 세워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분문'은 쓰레기와 오물들을 버리는 문이요, '샘문'은 동쪽 실로암 샘으로 내려가는 문이고, '어문'은 생선을 들여오는 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양문'은 양의 문으로... 북쪽에 있는 문인데, 이 문을 들어서면 바로 성전 뜰이 나오게 됩니다.
바로 이 양문으로 제사에 드려질 양과 염소 등의 제물이 들어왔습니다. 베데스다 못은 바로 그 양문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그 곳에... 많은 병자들이 누워있었습니다.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곳에 누워있는 이유는 그 연못에 가끔 천사들이 내려와서 연못의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물이 동할 때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병에서 나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38년이나 투병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병자를 예수님께서 만나 병이 중한 줄 아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씀으로.... 그 병자를 고쳐주시는 장면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을 상고하면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사실은.... 요한복음은 철저히 말씀 한마디 한마디... 예수님의 행동 하나 하나가 메시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분명히 오늘 말씀 속에서도 주님은 뭔가 중요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저 단순히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을 보여주시는 장면은 아닙니다. 물론 이런 일도 충분히...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권능을 보여줍니다. 불치의 병자.. 아무도 고칠 수 없는 병자를 고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메시지가 됩니다. 그러나 분명.. 오늘의 말씀은 그것이 중심이 아닙니다. 과연 무슨 말씀을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지.... 우리 모두 이 아침에.... 그 은혜를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이야기의 장소는 베데스다입니다. '베데스다' 란 뜻은....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이트'와 '은혜'라는 뜻을 가진 '헤세드'가 합쳐져서 되어진 말입니다. 그래서 베데스다는 곧 '은혜의 집'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까... 이 베데스다 못은 어느 문 곁에 있다고 했습니까?.... 2절에 보면, 양들이 제사를 위해서 죽으러 들어오는 '양문', 양의 문 곁에 이 베데스다 못이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제사로 희생될 양들이 지나는 양문 곁에... '베데스다' 은혜의 집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이것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까? 양문 곁에 베데스다가 있었다는 사실... 이것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연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되는 짐승들.... 이 짐승들이 양문으로 통과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베데스다에 앉아 무엇을 깊이 생각 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 양문을 통과하여 인간의 죄를 위해 희생되어질 짐승을 보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야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베데스다.... '은혜의 집'에 누워 있는 많은 병자들...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 그리고 38년이나 된 이 사람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은혜의 집에 누워... 속죄의 은혜를 보고 있으니.... 은혜의 사실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될텐데.... 이들은 한결같이 은혜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겨우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한 번 휘저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보다 얼른... 먼저 달려들어가서 고침을 받아야겠다" 그런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먼저 들어가면 고침을 받는다고 하니까..... "준비, 땅!..." 하는 자세로... 바짝 긴장하고 있는 자세인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내가 먼저 들어가야 된다...." 얼마나 눈치를 보고 있는지 모릅니다. 분위기가 살벌합니다. 초긴장 상태입니다.
그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들은 은혜의 집에 누워있습니다. 짐승들이 양의 문에 들어가서 그 양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을 때... 죄를 사해 주시는 그 은혜의 모습을 눈으로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참된 은혜를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은혜의 집에 모인 자들뿐만 아니라..., 은혜, 은혜 말하면서 은혜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은혜가 무엇인가를 알리고 싶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5∼7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러자 이 사람은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벌써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갑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기서 그가 "주여!"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주님이신줄 알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13절에 보면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 줄 모르고 있습니다.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그랬습니다.
당시에는 존대어로 부르는 말이 바로 "주여!"입니다. 우리말로.... 나이가 비슷하면 "형씨!.." 나이가 좀 많으면 "선생님..." 그렇게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형이라고 부르니까 진짜 형이 아닙니다. 선생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진짜 선생님이 아니예요....
"주여!" 그런다고 해서 이 사람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마 이 사람은 38년동안이나 거기에 누워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고참입니다. 가장 오래된 사람.... 은혜의 문에 누워..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많이 생각했어야 할 이 사람...
그런데 슬픈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이 사람이 은혜의 집에서 은혜가 무엇인줄 알았다면 예수님께서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물으셨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예,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낫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렇게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38년된 환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무식한건지.... 자기 자존심인지 몰라도... 이 사람은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뭔가를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서...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다시 말하면,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으면 될텐데... 내가 좀 빨리 뛰어가면 될텐데..." 그런 뜻입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자기의 힘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언제나 우리 인간은 이런식입니다. 곧 죽어도... 인간의 힘을 빌리기를 원하고, 자기 능력을 사용하여 구원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인간의 헛된 자존심이요,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38년된 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이런 인간... 38년된 병자를 비롯하여 은혜를 모르면서 은혜의 집에 늘어져 있는 인간들에게... 참된 은혜가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고 싶은 메시지 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모든 신앙의 모습들이 그러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나 성경을 안다고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대제사장들도...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루에 세 번 시간을 정하여 기도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했습니다.
누가복음 5:3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자기들은 기도도 많이 하고 금식도 많이 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느냐 이겁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들은 사거리에서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대단한 신앙의 사람입니다. 대단히 경건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사야 64:6절 말씀에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그랬습니다.
"인간의 의는 다 헛된 것이다." "인간의 의는 다 더러운 것이다." "추악한 것이다!" 그런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0절을 보세요....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은 당시 유대인들이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38년된 병자가 낫게 된 날이 공교롭게도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지금 시비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조그마한 물건이라도 들고 가면, 그것은 노동을 하는 것이므로... 율법을 범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안식일날 자리를 들고 노동을 하는 것이 옳으냐?" 하는 것으로 논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그러하니.... 베데스다에 누워있는 많은 병자들이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은혜의 집..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병자가 낫고.. 하나님의 은혜로 문제가 해결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나를 앞세우면 안됩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은혜에서 철저히... 배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중요시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 나는 기도를 많이 못했는데.... 나는 금식도 못했는데... 나는 헌금도 많이 못했는데..."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행위로 말미암은 구원.... 나의 의로서... 내가 쌓는 공력으로서... 구원을 얻을려는 착각속에 빠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도 해야 합니다. 헌금도 해야 됩니다. 예배에 열심히 참여해야합니다. 그러나... 그 밑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간구하는 기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 우리가 드리는 예물의 그 아래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이 흐르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47장에 보면, 에스겔 선지자가 신령한 영계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성전 문지방 밑으로 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그 물이 흐르고 흘러 발목에까지 이르고, 나중에는 무릎까지 이르고, 나중에는 허리까지 그 물이 찼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너무 깊어서... 그 물이 헤엄을 쳐야만 되는 창일한 강물이 되었습니다.
바로... 성전 밑에서 흐르는 물.... 하나님의 은혜가 강물처럼... 창일하게 흘러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이 우리를 완전히 에워싸야 합니다. 그 은혜에 완전히 파묻혀야 합니다. 나의 의, 인간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안됩니다.
인간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공력으로 무엇을 세워서 하늘까지 닿는게 아닙니다. 인간의 그 어떤 행위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의는 다 거짓이요 불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공력을 내세우는 사람... 인간의 의를 내세우는 사람.... 예수님께서는 이런 인간을 차마 보지 못하십니다. 이런 인간은 하나님의 적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6:2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만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다는 말에 베드로는 말하기를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으려는 사단의 역사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그러셨습니다(마16:23).
지금 예수님께서는 38년된 병자를 말씀 한마디로 고쳐 주시면서.... 은혜의 집에 누워있으면서도 은혜가 도무지 뭔지를 모르고 있는 불쌍한 인생들에게... 인간의 힘으로가 아니라... 은혜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어리석게도 자꾸만 자기의 의를 보태려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너무 감사합니다. 그래도 미안해서 어찌합니까? 내가 조금이라도 그 은혜에 보답이라도 하기 위해서... 정성껏 준비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야지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의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에 보탬이 되는 인간이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제하고, 봉사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거나 보탬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철저히 은혜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준비하신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은혜를 아는 사람은... 철저히 낮아져야 합니다. 자기 자랑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어떻게 자랑할 수 있습니까?....
만약 조금이라도 자랑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은혜를 모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2:8∼9절 말씀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그랬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이라는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안식일을 지켜야만 된다고 난리치는 '종교주의자' '형식주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종교가 중요합니다. 때로는 형식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의자(主義者)'가 되면 곤란합니다.
지금 베데스다 연못에 있는 사람들을 보세요....
모두들 은혜의 집에 벌러덩 누워 있습니다. 양들이 들어가는 양문... 그 은혜의 문을 바라보며, 은혜의 집에 누워있는데도..... 은혜의 참된 의미를 모르고.... 자기가 해결할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조금만 도와주면 될텐데...." "내가 먼저 뛰어 들어가면 되는데..." 그러고 있습니다.
정말... 한심하고, 못 말리는 인간들입니다.
여기 누워 있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마른 자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먼저... 많은 병자들이 있습니다. 병자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환자가 무슨 일을 합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누군가 들어서 그 연못에 넣어줘야 되지... 자기 스스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소경은 앞을 못보는 사람이예요. 보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남보다 먼저 뛰어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또한 절뚝발이가 있습니다. 다리를 저는 사람이 어떻게 남보다 먼저 뛰어서 들어갑니까?.. 이 사람도 역시 불가능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혈기 마른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중풍병자입니다. 그러니까 사지와 몸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베데스다에 누워 있는 병자들은 한결같이.... 자기 스스로 그 못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더구나 38년된 병자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6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때에 38년된 이 병자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지금 이 사람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물에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자기 스스로 들어 갈 수 없는 사람이요, 옆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그를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누구를 돕는단 말입니까?.... 그런데도 이들의 생각은 한결같았습니다. 오직 "내가 먼저 들어가면 낫는다" 라는 데 있었습니다. 철저하게 자기의 방법.... 인간의 방법을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더 이상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사람을 더 이상 믿지 마십시오. 누가 누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모두가 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행위를 고집하는 자들이 아니라 은혜에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인간의 힘과 인간의 방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고집을 꺾고 하나님의 은혜에 무릎을 꿇줄 아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미련한 사람은 인생의 황금기를 다 보내고... 늦은 나이에 하나님께로 나옵니다.
본문의 병자는 38년이나 되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인생이요, 비참하고 불쌍한 인생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율법의 종교가 아닙니다. 윤리도 아니고 계율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요, 생명의 종교요, 은혜의 종교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주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권속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어 멸망받을 인생을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인하여 구원받게 하시고 영생의 놀라운 은혜를 힘입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놀라운 은혜가... 연약하고 죄악된 우리들을 붙들어 주시고.. 주의 은혜로 온전히 감싸주시기를 원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 제가 낫고자 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사오니...
주께서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옵소서!" 고백하는 저희들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지금까지는 사람을 의지했습니다. 나의 공로를 앞세웠습니다. 어리석고 무지한 저희를 용서해 주옵소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하나님만이 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시고,
하나님만이 나를 살릴 수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 그리고 우리의 가정들...
그리고 온 민족과 온 땅위에...
한량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순간 순간... 그리고 영원까지.. 품어 주시옵소서! 그 은혜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직 당신의 뜻만이
요 5:1-13 / 임영수 목사
예수님은 유대 명절인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오셔서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많은 병자들 가운데서 유독 38년된 병자 한 사람만 고치고 그곳을 떠나셨습니다. 그곳에는 그렇게 많은 병자들이 천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왜 한 사람만을 고치셨을까? 그것도 유대인들이 엄격하게 지키는 안식일을 그렇게 하셨을까? 하는 것이 우리가 갖게 되는 의문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의 상징으로 세워진 제도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의 일을 마치고 제 칠일에 안식하시면서 하루를 따로 떼어 놓아 육일의 삶을 되돌아 보게 하셨기 때문에 모든 유대인은 이 제도를 엄격하게 준수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그들에게 언제나 문제가 되곤 했습니다. 모세의 법에 규정된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은 그 날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수많은 해석들이 나오면서 이 계명의 본래 뜻은 희미해져 버렸습니다. 유대 랍비들은 일의 종류를 무려 서른 아홉가지의 항목으로 분류해 놓고 이중 하나라도 범하면 사형에 해당한다고 가르쳐왔습니다. 각 항목은 또 세분화되어 사람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안식일 규정에 얽매어 있게 되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추수에 대한 하나의 항목에 밀 이삭을 베어먹는 것이나 또는 머리카락을 한올 뽑는 것등 추수에 관련된 작은 일들에 관한 세분화된 규정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규정들은 모두 인간의 행동을 억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인들은 심지어 안식일에 거울을 보아서는 안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거울을 보다가 혹시 흰 머리카락이라도 보게 되면 뽑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될 것이고, 따라서 추수를 금하는 법을 어기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안식일이라는 의식은 금요일 해질 때 시작해서 토요일 해질 때까지 계속되곤 했습니다. 안식일을 위한 음식은 미리 준비해야 했습니다. 안식일에는 음식을 만드는 것은 물론 불을 피우는 것까지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릇을 씻어도 안됩니다. 바닥을 쓸어도 안됩니다. 어떤 종류의 일도 하면 안되었습니다.
베데스다의 치유사건은 바로 이 안식일에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치셨을 때 안식일을 규정하는 너무나 복잡한 제한 조항들을 묶여있는 유대인들은 그 사람이 들고 일어선 짐 보따리는 보았지만 하나님이 하신 생명의 역사는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율법주의는 언제나 좁은 시야를 가지게 합니다. 율법주의는 바깥에 드러난 외면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 외의 참된 것들은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이러한 닫혀진 사고와 시야 때문에 유대인들은 정해진 종교적 의식의 리듬 밖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그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리듬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이 우주에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면서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는 몇 가지 종류의 리듬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한 인간으로 형성되어가는 첫 과정에서 어머니의 뱃속에서 어머니의 심장 고동을 듣는 것입니다. 아기는 어머니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의 순환을 어머니의 허파를 통해 움직이는 공기를, 그녀의 몸을 통해 울리는 목소리의 여운을 듣습니다. 그리고 나서 출생 후에 다른 종류의 리듬을 경험합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조수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을, 하루살이의 삶의 순환에서부터 달이 차고 기우는 순환에 이르기까지 삶의 리듬들이 우리의 삶과 세상을 조절합니다.
그러나 이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리듬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인 리듬입니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심장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리듬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리듬에 따라 살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조수가 달의 움직임을 감지하듯이 아버지의 움직임을 감지 했습니다. 그 움직임들이 예수님을 움직였습니다. 그러한 사실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로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리듬에 따라 움직이며 살아가는 것과 율법의 리듬에 따라 사는 것, 자연의 리듬을 따라 사는 것에 차이점이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리듬에 따라 살아가는 삶에는 ‘풍성한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리듬을 따르는 삶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유함도 없습니다. 공허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의 리듬에 따라 사는 삶에는 인체의 조화는 있지만 영원한 생명에 대한 체험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살아가신 삶의 리듬은 율법, 자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리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시는 일에서 유대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유대 종교를 파괴하는 이단자로 보였을 따름입니다.
요한복음 4장, 5장은 예수님의 삶의 리듬을 조절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 밖에 위치한 우물에 거의 중력에 끌리듯 가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서 그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녀로 인해 그 동네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본문에 기록된 5장에서는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오셔서 온갖 병자들이 몰려있는 행각 다섯이 있는 못으로 오십니다.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그 곳에서 모든 병자를 다 고치시지 않고 오직 단 한 사람만 고치십니다.
이러한 대조적인 장면에서 우리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왜 예수님은 베네스다 못가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천사가 나타나기를 기다려왔고, 기적적인 치유를 위해 그토록 열심히 기도를 해온 그들을 고치지 않으셨는가?
본문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매우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고치기 싫으셔서, 또는 그들의 기도가 부족해서, 작정헌금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그날 그렇게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취향에 따르거나, 종교적 열광에 좌우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의 뜻은 우리에게는 언제나 신비에 가리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그 하나님의 신비에 대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바람이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전 11:5)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에서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거나,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는 반드시 많은 수의 사람이 모여들고, 세상적으로 다른 사람이 부러울 정도의 성공이 있어야 하고, 아울러 명성도 뒤따라야 합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베데스다의 사역은 실패입니다. 그에게서 성령이 떠나 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세상적인 성공, 명성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 4:34)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복종하면서 살았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를 광야로 이끄시면서 그는 광야로 갔고, 그를 사마리아의 우물이나 베데스다의 못가로 이끄시면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는 아버지께서 험한 갈보리의 수치스러운 십자가로 보내시기를 원하실 때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그리고 가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의 리듬이며 그의 양식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잘 믿으면 언제나 광야가 아닌 평안한 삶의 자리에, 그리고 언제나 만사 형통할 수 있는 행운을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세속적인 창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종교적 의식에 하나님이 오셔서 불을 붙여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의 삶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기대에 따라 움직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그분의 임의대로 움직이시는 분입니다. 지난 이 주간 동안 우리는 우리의 창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닌, ‘영혼의 창’을 통해 살아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 오셔서 말씀하시는 ‘다양한 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훈련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 창을 통해 우리의 소원을 성취해 가는 법을 배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의 리듬에 맞추어 살아가는 방식을 배웠습니다. 두 주간의 기간으로 그러한 것을 모두 터득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강요, 우리의 뮈, 우리의 왜곡됨을 어느 정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매우 다원화된 ‘영혼의 창’으로 하나님의 리듬에 맞추어 살아가는 훈련을 지속적으로 해가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삶에서 생명, 의미, 희망을 경험해 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삶에는 내 삶, 내 필요, 내 욕망, 내 계획, 내 희망, 내 꿈, 내 직업, 내 사역, 내 휴식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아의 리듬에 맞추어 살아왔습니다. 자아의 리듬에 따라 살아가는 삶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이 없는 삶은 죽은 삶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나'가 아닌 '오직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고백으로 바뀌어 갈 때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의 삶이 이루어져 갑니다.
하나님의 뜻은 먼저 우리의 폐쇄된 창을 새롭게 열어가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새롭게 열려져 가는 창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게 됩니다. 예수께서 베데스다 못가에서 삼십 팔년된 병자를 고친 사건은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영혼의 창을 통해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하나님은 안식일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안식일에도 생명을 살리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을 그들에게 보여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생명적인 일을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그들이 참여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으로서 어떤 규범이나 우리의 사고의 틀에 묶여있지 않으시고 언제나 그러한 범주를 넘어서 가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이십니다.
나 너를 포기하지 않아
요 5:1-9 / 조상호 목사
빅톨 위고가 쓴 <레미제라불>이라는 명작 소설을 아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주인공은 장발장입니다. 그는 빵 하나를 훔친 죄로 20년동안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처참한 고문도 당하고 온갖 고통을 다 겪었습니다. 그는 고통을 당하면서 서서히 사나운 죄수로 변해갔습니다. 결국 그는 감옥 안에서 "내가 감옥으로 나가기만 하면 나를 이렇게 고생을 시킨 사람들에게 복수를 해야지"라고 하며 복수의 칼을 갈았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20년형을 마치고 출옥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머니에는 빵 하나 사먹을 돈도 없었고, 의지할 곳도 없었습니다. 나흘 동안 헤매다가 어느 친절한 신부님이 자비를 베풀어주어 잠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밤중에 갈증을 해소하려고 물을 찾다가 찬장을 뒤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멋진 은잔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욕심이 생긴 장발장은 그 은잔을 훔쳐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것 가지고 빵 한 개라도 사먹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를 아는 형사 자베르가 있었습니다. 그는 전과자는 변화될 수 없다는 소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 자베르는 정의의 사람이었습니다. 정의만을 추구했습니다. 자베르 형사는 어둠 속에서 숨어 있다가 교회에서 나오는 장발장을 붙잡았습니다. 자베르 형사가 장발장을 잡고 보니 교회에서 쓰는 은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베르 형사는 장발장을 교회로 끌고 왔습니다. 낌새를 알아차린 신부님은 잘발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오셨군요. 다행입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은잔과 함께 촛대까지 주었는데 촛대는 두고 가셨더군요." 형사 자베르는 전과자 장발장이 은잔을 도둑질한 줄 알았는데, 신부님이 이렇게 말하자 더 이상 할 말을 하지 못하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장발장의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20년
동안의 감옥 생활에서도 변하지 않았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신부님의 뜨거운 사랑과 용서를 경험한 장발장은 새로운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새사람이 되어 새 출발을 합니다. 장발장은 변화되었습니다. 반면에 정의밖에 모르던 형사 자베르는 오히려 장발장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어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작가인 빅톨 위고는 이 <레미제라불>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작가는 완전히 대조적인 두가지 원리, 즉 세상의 원리와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어떠한 원리가 통용되고 있습니까? 자베르의 원리입니다. 정의의 원리입니다. 권선징악의 원리입니다. 세상에서는 죄를 지으면 벌을 내리는 '정의'의 원리에 의해 다스려집니다. 1시간 일하면 1시간 일한 만큼의 임금을 받는 경제원리에 따라 살아갑니다. 한 명이 반대하고 9명이 찬성하면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한 명의 의견은 무시하고 9명의 의견을 따릅니다. 세상에서는 철저하게 정의의 원리와 경제 원리, 그리고 다수결의 원칙에 따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다릅니다. 신부님의 원리입니다. 사랑과 은혜의 원리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용서해 주는 은혜의 원리가 통용됩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한 마리의 양을 찾겠다고 아흔 아홉 마리 양떼를 그냥 어둠 속에 놓아두고 들로 산으로 뛰어든 목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상의 원리로는 도저히 계산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아흔 아홉 마리가 소중합니까? 한 마리가 소중합니까?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 금으로 된 양이 아닌 이상, 당연히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이 훨씬 더 소중합니다. 그런데도 목자는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밤새도록 헤매다가 어렵게 잃은 양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찾은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와, 너무 즐거워 동네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벌였습니다. 한 마디로 목자는 아흔 아홉 마리보다 한 마리를 더 소중하게 여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가 이해가 되십니까? 세상의 원리로는 이 이야기를 도저히 이해하기 힘듭니다. 마태복음 20장에는 더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품꾼의 이야기입니다. 포도원의 주인은 품꾼을 모집해서 그들에게 포도원에서 일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아침 일찍 온 사람도 있고, 오전 휴식 시간에 온 사람도 있고, 점심나절에 온 사람도 있고, 오후 휴식 시간에 온 사람도 있고, 끝나기 한 시간 전에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드디어 일을 마쳤고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 온 사람이나 끝나기 한시간 전에 온 사람이나, 모든 사람들에게 차등을 두지 않고 똑같은 임금을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이야기도 역시 경제 논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계산기를 두들겨 보아도 공정성을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러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의 원리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대해서 교훈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경제 논리가 아닌 사랑의 논리, 정의의 법칙이 아닌 은혜의 법칙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주님은 은혜의 주님임을 믿습니다. 주님은 사랑의 주님임을 믿습니다. 주님은 자비의 주님임을 믿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인 우리들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러한 주님의 마음, 은혜와 자비를 베풀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은혜의 자리인 베데스다
본문 말씀의 배경은 예루살렘의 양 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입니다. 예루살렘성에는 성 주위로 여러 개의 문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북쪽에 양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드릴 양과 염소들과 같은 여러 가지 제물들을 이 문을 통해 들여왔기 때문에 이 문 이름을 양의 문, 혹은 양문(The Sheep Gate)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양문 바로 옆에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 혹은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베트'가 '집'이라는 뜻이고, '헤세드'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베트'와 '헤세드'가 합쳐져서 '베데스다', '은혜의 집'이라는 뜻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자비의 집이라는 뜻의 베데스다 연못에는 한 가지 전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 연못이 갑자기 소용돌이 쳐서 물이 솟아오를 때 그 못에 제일 먼저 들어간 사람은 병이 낫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병자들이 이 연못 주위로 몰려왔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연못 주위에 있는 지붕이 씌워진 행각 안에는 각종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즐비하게 누워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고칠 수 없고, 또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버림받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고 베데스다 연못으로 왔던 것입니다. 그들은 물이 소용돌이치기만 하면 제일 먼저 들어가서 자신의 질병을 고치겠다는 마음으로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언제 물이 동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북섬의 로토루아에 가보신 분들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로토루아 근교에 있는 Wakareware라고 하는 곳에 가면 땅속의 온천물이 조그마한 구멍을 통해 분수처럼 하늘높이 솟아오르곤 합니다. 확실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제 기억으로는 그 온천물이 높이 솟구칠 때는 20미터 이상 높이 솟아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항상 물이 높게 솟아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그곳에 세 번 갔었는데, 첫 번째 가보았을 때는 5~6미터 정도로 나즈막한 높이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두 번째 갔었을 때, 20미터 이상 하늘 높이 물줄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물이 뿜어져 오르는 장면이 정말 멋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갔었을 때는 물이 하나도 솟아오르지 않고 수증기만 겨우 나오고 있었습니다. 어렵사리 한국에서 관광오신 손님을 모시고 갔었지만, 물이 하늘 높이 솟아오르기를 계속 기다릴 시간이 없어, 온천물이 뿜어져 오르는 멋진 장면을 보여드리지도 못하고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바로 베데스다 연못이 바로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병자들은 연못의 물이 언제 솟아오를지도 모른 채, 주위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이곳이 마지막 희망의 장소였을 것입니다. "나도 고침을 받으리라. 나도 고침을 받으리라. 나도 병 나아 사람 행세 좀 하리라." 아마 그들은 어디에 가서도 자신들의 병을 고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이곳에 실려왔을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가족들이 환자를 돌보았을 것입니다. 먹을 것도 가져다주고 갈아입을 옷가지도 가져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가족들은 환자를 서서히 내팽개쳤을 것입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가족들도 그들을 더 이상 돌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질병으로 인하여 가진 재산 다 날려버리고 알거지가 된 채, 버려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물이 솟아오르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물이 솟아오를 때, 가장 먼저 물 속에 뛰어들어, 자신의 병을 고치리라는 마음을 먹고 무작정 기다렸습니다.
절망이 자리인 베데스다
그런데 이 은혜의 집인 베데스다 연못은 큰 모순과 절망이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이름만 '은혜의 집'이요 '자비의 집'이었을 뿐, 그곳에는 절망만 가득 찬 곳이었습니다. 한번 상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물이 동할 때 제일 먼저 들어간 사람은 병이 났습니다. 그런데 물이 동할 때, 제일 먼저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입니까? 잘 걷지 못하는 절뚝발이입니까? 손발이 말라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입니까? 아마도 이러한 사람들보다 더 건강한 사람들이 제일 먼저 연못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중병에 걸린 사람일수록, 연못에 빨리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무좀 걸린 사람들이나, 감기 걸려 코를 훌쩍거리는 사람이나, 밥 잘못 먹고 배탈이 난 사람이나, 팔씨름 하다가 팔목 삐끗한 사람 같은, 간단한 질병이 있는 사람들이 더 먼저 들어갔을 것입니다. 또 나이 많아 거동이 불편한 연세드신 분들보다 힘이 팔팔한 젊은 사람이 먼저 연못에 뛰어 들어갔을 것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그곳은 경로 우대나, 노약자 우대 등과 같은 말이 통용되지 않는 곳이었을 것입니다. 정말 치료받아야 할 사람보다는 들어가도 그만, 들어가지 않아도 그만인 사람이 먼저 들어가는 곳이 바로 베데스다 연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데스다 연못은 한편으로 은혜의 자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절망의 자리였습니다.
1) 찾아오시는 주님
어느 날 예수님께서 그곳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즐비하게 누워있는 병자들 중에 38년 동안 질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 한 사람 앞에 섰습니다. 그는 무슨 병인지는 모르지만, 무려 38년 동안 계속해서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몸에서 악취가 나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말이 그렇지 38년 동안 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것이 상상이 되십니까? 10살 때 병들었다면 현재 몇 살입니까? 48세입니다. 그가 또 20세에 병들었다면 그가 현재 몇 살입니까? 58세입니다. 목숨도 길지, 그는 죽지도 않았습니다. 38년 동안 죽지 않았다는 것 또한 기적입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병들었다가 죽은 사람도 수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는 죽어서 실려 가는 환자들을 보고 수도 없이 절망했을 것입니다. "나도 저 사람처럼 언젠가는 죽겠지. 또 하나 죽어가는구나. 오늘은 두 사람이나 죽었네" 또 그는 갑자기 동하는 물 속에 가장 먼저 뛰어들어 병 고침 받고 건강을 되찾아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나도 저 사람처럼, 나도 저 사람처럼 병 나아 집에 돌아가 보았으면, 나도 병 고침 받아 저 사람처럼 뛰어가 보았으면..." 그는 38년 동안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베데스다 연못이 일년에 한 번 동했는지, 아니면 한 달에 한번 동했는지, 아니면 하루에 한번 동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는 38년 동안 수십, 수백번 이상 다른 사람이 고침을 받고 살아가는 것을 보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제 친구 중에 유모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의 직업은 날마다 빈둥빈둥 노는 백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친구를 '미스터리 사나이'라고 부릅니다. 도저히 그 친구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도 처음에 그 친구 소식을 듣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친구는 키가 182Cm로 과거 학교 다닐 때, 높이뛰기 선수출신이어서 그런지 다리가 길쭉길쭉하여 날렵하게 생겼습니다. 그리고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습니다. 또 당구가 400입니다. 당구장에 가면 그 친구는 대접받습니다. 내기 당구를 쳐도 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백수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할 것 없으면 군밤 장사라도 할 수 있고, 그것도 못하겠으면 잘 치는 당구 실력으로 당구장 주인이라도 하면 좋겠는데, 그것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혹의 나이라고 하는 40살이 넘은 녀석이 날마다 백수노릇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그런 줄 아십니까? 그 친구는 대학을 졸업하고 일반회사 입사시험을 몇 차례 보았지만, 번번이 떨어졌습니다. 공무원 시험도 보았지만, 마찬가지로 계속 떨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험 노이로제에 걸렸습니다. 또 결혼하기 위해 선을 몇 차례 보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결혼이 성사되지 않는 것입니다. 30세가 넘어서도 결혼할 상대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35살이 넘어서도 그를 구해줄 여자가 나타나지 아니했습니다. 가뜩이나 함께 노총각으로 늙어가던 한 친구가 지난 2년 전에 결혼을 하자 이 친구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니, 너마저. 이제 나만 남았구나. 나만 노총각이야.' 그는 계속해서 입사 시험에 낙방하고, 배우자 구하는 일에 실패를 하다 보니 의욕상실증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실패 노이로제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지금도 희망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채, 절망 가운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가 바로 이러한 상태였습니다. 처음에는 "나도 제일 먼저 물 속에 뛰어들리라. 나도 고침을 받으리라"고 마음을 굳게 먹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1년, 5년, 10년, 20년, 30년이 지나면서 그러한 기대가 서서히 무너져 버리게 되었습니다. 언제 낫는다는 보장도 없고, 완전히 치료받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는 기대도 없었습니다. 그는 38년 동안 절망 속에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망도 없고 꿈이 없고 아무 기대도 가지지 못한 이 사람에게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병을 고쳐 달라고 애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지만, 주님이 먼저 다가가셨습니다. 6절에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는데, '보시고'와 '아시고'라는 두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가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고통 당하고 있는지 보시고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우리가 한 것이라고 하나도 없는데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 은혜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형편을 미리 아시고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결정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먼저 부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교회로 부르셔서 복음을 듣게 하셨고,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요15:16)에 보면 분명하게 구원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주님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즉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셔서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오늘 교회에 나오신 것은 여러분들의 발로 나오셨다 할지라도, 여러분들의 자동차를 타고 오셨다 할지라도 주님이 부르셨기에 나오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은혜로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오게 된 줄로 믿습니다.
2) 소망을 주시는 주님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찾아오셔서 한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런데 여러분, 병자에게 '낫기를 원하느냐'고 질문하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이 질문을 언뜻 보면, 예수님께서 분위기 파악을 잘 못하셔서 하신 질문처럼 들립니다. 아마 어느 분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니요? 보면 모릅니까? 왜 쓸데없는 질문을 하시나요? 지금 이곳에, 살고 싶은 놈들만 있지, '낫고자 하느냐'라니요? 이게 말이나 됩니까? 주님, 살고 싶다 마다요.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할 수 없었습니다. 물이 동할 때, 아무도 나를 가장 먼저 저 물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38년 동안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동안 개나 돼지 같이 마지못해 살고 있는 이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질문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소망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던 이 사람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꿈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던 이 사람에게 꿈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좌절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소망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월트 디즈니라고 하는 젊은이는 가난한 만화가였습니다. 집도 없이 예배당에서 지내며 기도하다가, 지하실에 내려가 만화를 그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하실에 어찌나 쥐가 많은지 밤이면 잠을 잘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쥐를 저주하던 어느 날 그는 꿈을 꾸었습니다. 자신이 쥐들과 친구가 되어 즐겁게 노는 꿈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쥐를 소재로 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 미키 마우스를 그리기 시작했고, 돈 한 푼 없는 무일푼 상태에서 오렌지 카운티의 벌판에 꿈의 동산을 세우기로 작정하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는 주님이 주신 꿈 하나로 디즈니랜드를 세웠습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소망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좌절의 늪에서 고민하는 사람을 일으켜 세워 소망의 불꽃을 붙여 주기 원하십니다.
3) 일으켜 걷게 하시는 주님
주님은 고난 당하는 사람 곁에 와서 단순히 말로서 위로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실제로 우리의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고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십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주님의 이 명령을 한번 가만히 보시기 바랍니다. 무슨 명령을 하십니까? 대단히 어이없는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지금 일어날 수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사람입니까? 이 사람은 38년 동안 질병으로 인해 움짝달짝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명령에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어머어마한 권세가 들어 있었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받은 이 병자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순종밖에는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38년 동안 질병으로 고생하던 사람이 저주와 고통의 자리를 들고 걸었습니다. 여러분, 순종하면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주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살아갈 때,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이 아침에, 버려진 38년 된 병자에게 찾아오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말씀하신 주님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세상으로부터 포기되었던 병자를 찾아오신 주님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그 어떠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부모는, 형제들은, 부인과 남편은 포기한다 할지라도, 주님은 그 어떠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은혜 베푸시기 원하십니다. 여러분! 십자가상의 버림받은 우편강도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가, 가운데 달려있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저들의 죄를 저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기도하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는 용서의 주님, 사랑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말합니다. "주님, 당신의 나라 임하실 때, 나 같은 놈 기억하여 주십시오" 그 때 주님은 절망을 선언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너는 끝났다. 너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이라면 몰라도, 너는 이미 못 박혔잖니? 너는 다시 인생을 살수 없다"라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오냐, 오늘 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할렐루야! 만약 우편 강도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신 주님이라면, 세상의 어느 누구에게라도 기회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어느 누구라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소망을 주시기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 사람이 사기꾼이든, 강도이든, 살인자이든 주님은 어느 누구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소망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좌절하며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걷게 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1-9 / 박조준 목사
예루살렘 성 양문 곁에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라는 이름은 '행랑의 집' 혹은 '감람의 집'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자비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통했습니다. 이 연못가에는 행랑 다섯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지방은 더운 곳이기 때문에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 행랑을 짓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까 그 행랑 안에 많은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관절염으로 다리를 저는 사람, 혈압으로 쓰러져 팔 다리가 말라가고 있는 사람, 여러 가지 환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연못은 물이 동했습니다. 오늘도 화산지대인 일본이나 아이슬란드에서는 자연 온천물의 호수가 있는데, 가끔 그 물이 동해서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도 가끔 동하는데, 그 물이 동할 때 제일 먼저 뛰어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든지 그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병이 낫는다고 하면 많은 환자들이 병이 나으려는 마음에서 모여드는 법입니다. 글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병 고침을 받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병이 낫는다고 하니까 낫고자 하는 마음에서 여러 가지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이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여들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이 환자들이 우글거리는 베데스다 연못가를 거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너무 너무 비참한 환자 하나를 보셨습니다. 너무 오랜 기간 병에 시달려서 자기의 몸조차도 움직일 수 없는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환자 중에서 예수님의 눈에 뛰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여 있는 환자들은 대개 병원이란 데는 다 찾아다녀 보았지만 고침을 받지 못한 난치병 환자들이었습니다. 병원에서도 못 고치던 병을, 베데스다 연못에서 물이 동할 때 빨리 뛰어들어 고침 받았다고 하니 나도 그렇게나 해 볼까 하는 막연한 희망 속에 찾아온 환자들이었습니다. 이 비참한 광경은 어쩌면 그 당시 유대인의 정신 상태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는 영적인 맹인이요,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지 못하는, 말하자면 영적인 절뚝발이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선민으로서 그와 같은 고귀한 특권과 신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특권과 신분에 합당하게 살지 못한, 말하자면 혈기 마른 사람과도 같았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생존경쟁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찾아온 환자들은 가끔 연못의 물이 동하는 그때 얼른 들어가면 고침을 받는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데스다 연못가 행랑에는 수많은 환자들이 연못의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물이 동할 때 누가 먼저 들어가나 하는 것 때문에 눈에 불을 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신 이 환자는 사실 이 축에도 끼일 수 없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이 환자는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병이 생긴 지 38년이나 된, 그러니까 그의 일생을 병 속에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살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죽어가고 있다고 말해야 옳을 정도로 비참한 환자였습니다.
그의 눈에서 희망의 빛이 사라진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자기 몸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된 지도 한두 해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그저 '이러다가 언젠가는 가겠지' 하며,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죽을 수가 없어 그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이 환자는 너무 너무 괴로워서 굶어 죽기라도 할 생각으로 며칠씩 식음을 끊어보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밥을 먹지 않으니까 배는 고픈데 정신이 맑아지고 음식 냄새만 나면 너무 자극이 커서 도무지 더 참을 수 없어 음식을 되찾아 먹기도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환자에게 깊은 동정심을 느낍니다. 38년은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그가 처음 병이 들었을 때, 그의 친구들이 꽃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 병 문안을 하고 위로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죽었다면 그를 위해서 고별예배에 참석하고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만일 그의 병이 회복되었다면 친구들이 모여서 축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 병으로 죽지도 않고, 그렇다고 건강이 회복되지도 않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병 문안 오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었습니다. 그의 방에는 이제 꽃도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달이 바뀌고 해가 지나는 동안에 이 불쌍한 환자는 이웃들에게서 거의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그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38년이나 병석에서 고생하는 동안에 그는 혼자가 되었습니다. 연못가에 누워 물이 동하기를 눈이 빠지도록 기다립니다. 그런데 물이 동하면 매번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는 바람에 차례를 빼앗겼습니다. 아마 차례로 줄을 지어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누구나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우선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말 반복되는 실망은 이 환자에게 있어서 참기 어려웠습니다.
연못가에 있던 다른 환자들은 가족이나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불쌍한 환자는 그 곁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불쌍했습니다. 그래도 이 환자는 아주 포기하지 아니하고 '언젠가는 기회가 오겠지' 하는 기대 속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계속 노력했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를 거니시다가 이 불쌍한 환자를 보셨습니다. 지난 주일 생각한 혈우병으로 12년 동안 고생하던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용기를 내어 군중들의 틈을 뚫고 들어가 예수님의 옷을 잡았습니다.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섰습니다.
그런데 오늘 생각하고 있는 이 38년 된 환자에게는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나 지금이나 친구가 없는 사람에게 친구가 되셨습니다. 슬픈 사람에게는 위로자가 되셨습니다. 소망 없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되셨습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부활이 되시고 생명이 되셨습니다.
여기 절망적인 환자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38년 된 환자를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것은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환자 자신이 자기가 얼마나 어려운 병이 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동할 때 먼저 들어가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고 계속 기다리고 있는 환자에게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아무 쓸데없는 미신이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그 불쌍한 환자를 도와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병으로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벌써 오래된 환자인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말씀 한마디로 38년 동안 절망의 심연에서 헤매던 이 환자에게 일루의 소망이 생겼습니다.
"주여, 물이 동할 때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갑니다."
이 환자의 대답에서 그의 형편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아마 이 환자는 베데스다 연못물이 동할 때 그것을 보고 자기가 물 속에 뛰어들어가려고 안간힘을 써서 움직여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벌써 다른 사람이 물 속으로 들어가곤 해서 번번이 실패하고 낙심하고 주저앉기를 38년간이나 했습니다.
이 환자는 이제 거의 체념하고 포기 상태에 놓여 있을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환자를 찾아오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이 절망 상태에 있는 환자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희망을 가져 보았습니다. 이 환자는 혼자 이렇게 생각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이 분이 이 연못의 물이 동할 때 나를 들어 물에 넣어주시려는가 보다.' 그래서 이 환자는 자기의 가련한 상태를 그대로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 우리의 사정을 그대로 아뢰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조금도 숨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형편을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 환자가 생각했던 것처럼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동할 때 환자를 물에 넣어줄 정도의 분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 구걸하는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며 보통 기도하러 성전에 가는 사람들에게 하듯 돈 몇 푼을 구걸하려는 마음에서 손을 벌렸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그 거지에게 "우리를 보라"고 했습니다. 이 거지는 '이 분들이 나한테 얼마나 주시려나?' 하는 기대 속에서 쳐다보았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면서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베드로의 손에 붙들린 이 앉은뱅이, 평생 한번도 걸어본 경험이 없는 이 사람이 발과 발목에 힘을 얻어 뛰어서 걸으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할렐루야!
이 앉은뱅이는 사실은 돈 몇 푼을 바랐습니다. 그런데 결국 돈이 문제가 아니라 평생 앉은뱅이로 지내던 사람이 온전히 성한 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절망적인 환자에게 말씀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얼른 생각할 때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 38년 된 환자에게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너무 당연한 질문 아닙니까? 물으나마나 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38년 동안 병에 시달리면서 희망이라고는 이미 사라지고 남은 것이라고는 거의 절망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환자에게 희망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비록 그 어느 누구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치료될 수 있다는 것을 믿지는 못해도, 그는 낫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힘입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 은혜에 대한 간절한 갈망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간절히 원하면 하나님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 자신이 그것을 간절히 원해야 합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던 이 환자는 진정으로 간절히 그의 병이 낫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조건은 그에게 결코 좋지 못했습니다. 그는 적당한 시간에, 그러니까 물이 동할 때 연못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좋은 조건이 생기기를 기다리며 삶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좋은 조건이 주어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룰 때가 가장 적절한 기회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하나 하나를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가 정말 변화하기를 원하느냐?"
만일에 우리가 지금의 이 상태에서 족하게 생각하면 우리 심령에 변화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변화하려면 변화해야겠다는 간절한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38년 된 이 환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마음 중심의 간절한 소원을 그대로 주님께 아뢰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처참한 상태를 그대로 말했습니다. 누구나 간절한 소원이 있으면 은혜를 받습니다.
맹인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앞으로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알고 주님에게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계속 계속 소리쳤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꾸짖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소리쳤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이 간절한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바디매오는 입었던 겉옷을 벗어던지고 주님께 달려갔습니다. 주님이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때 맹인 바디매오는 주저하지 아니하고 요청했습니다.
"주님, 보기를 원합니다."
이 말은 주님의 능력을 믿는 고백일 뿐만 아니라 바디매오의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12년 동안 혈우병으로 앓고 있던 이름 모를 여인은 병이 낫고자 하는 것이 그 여인의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병이 낫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써 보았지만 아무런 효험이 없이 고생만 하고 물질만 낭비하고 절망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는 않았었습니다. 그 여인은 갈릴리에 병을 고치는 분이 계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여인은 "내가 그분의 옷에 손만 대어도 구원을 얻을 터인데" 하는 간절한 소원과 확신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