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57
3월9일[사순 제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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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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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JCa2BrKbvO4
[꼰벤뚜알 프란치스코수도회 백승재 베네딕토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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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나약하지만, 아버지와 연결된 끈으로 인해 강건합니다!>
젊은 시절, 심각한 스트레스성 위염으로 참다 참다, 이러다 죽겠구나 싶어,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꼬박 일주일간 링거주사에만 의지한 채 단식을 했습니다. 담당 간호사님은 매정하게도 제 침대 앞쪽에 ‘절대 금식’ 이란 팻말을 달아놓았습니다. 그리고 매서운 눈초리로 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이틀간은 그런대로 견딜 만했습니다만 사흘이 지나면서 정말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매끼 식사 시간은 제게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옆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분이 병원 밥투정을 하면서 딱 한 숟가락만 뜬 식판을 물리며 ‘그냥 내어가라’ 할 때, 저도 모르게 제 입에서는 ‘저런 저런!’ 하는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배가 출출해지는 9시 뉴스 시간 때마다 통닭이다, 족발이다, 몰래 야식을 즐기는 날라리 환자들이 얼마나 얄미웠는지 모릅니다. 어찌 그리도 야속한 사람들이 다 있던지요. ‘절대 금식’이란 표시판 때문인지 한번 먹어보라 소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 생리 구조상 하루 세 끼 식사는 지극히 기본적인 것입니다. 단식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장 기본적 욕구인 식욕에 통제를 가함으로써 목표하는 특정 의미를 추구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이어트나 건강진단, 질병 치료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단식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단식은 하나의 목적성을 지닙니다. 사순시기 동안 그리스도 신자들은 작은 몸짓이지만 단식을 통해서 예수님 수난에 상징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40일간 단식해 오신 예수님께서 악마로부터 유혹받으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지니신 하느님이기도 하셨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와 똑같은 육체 조건을 지니셨던 인간이셨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고통과 배고픔을 똑같이 겪으셨던 참 인간이셨습니다.
휴가지에서 40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겠지만, 단식하면서 보내는 40일은 정말 지옥 같은 나날입니다. 허기가 져서 거의 탈진상태에 도달한 예수님 앞에 악마가 나타납니다. 갖은 감언이설과 달콤한 유혹 거리를 미끼로 내세우며 예수님을 현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유혹들을 의연히 이겨내십니다. 허탈해진 악마는 힘을 잃고 떠나갑니다.
예수님께서 악마의 유혹 앞에 끝까지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아버지께 대한 항구한 충실성과 철저한 순명, 아버지를 향한 지속적 신뢰와 끊임없는 자아 포기, 그 결과가 유혹의 극복이란 결실을 가져왔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아버지와 연결된 끈을 끝까지 놓지 않음으로 인해 우리는 강합니다. 우리는 나약하지만 아버지 현존 안에 뿌리내림으로 인해 우리는 강합니다. 세상 유혹 앞에 설 때마다 예수께서도 유혹을 받으셨음을 기억합시다. 아버지께 대한 간절한 기도를 통해 그 모든 유혹들을 물리치셨음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막 걷기 시작한 사순절이라는 광야 여정 중에 악마로부터 받는 유혹도 많겠지만, 그 여정이 든든하신 우리 주님께서 언제나 동행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3년간의 공생활이라는 큰일을 앞두고 홀로 광야로 들어가셔서 40일간의 긴 단식침묵 개인 피정을 실시하셨습니다. 피정기간동안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진정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어디 있는지 헤아리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예수님 당신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빵과 권력과 재물이라는 악마의 유혹으로부터 용감히 맞서 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피정을 보면 우리의 사순절이 어떠해야 하는지 즉시 답이 나오는군요.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무질서한 애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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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vG4iqlQp34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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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는 ‘이것’ 하나 찾는 장소이다>
사순은 주님 앞에 서기 위해 우리 안에 합당하지 않은 무언가를 제거하는 시간입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일까요? 헤라클레스 신화로 시작해보겠습니다.
헤라클레스는 올림포스의 주신 제우스와 뛰어난 미모와 지혜를 지닌 인간 여성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난 반신반인의 영웅입니다. 제우스의 정실 아내 헤라는 제우스의 여러 외도로 태어난 자식들을 매우 싫어했는데, 헤라클레스의 경우에도 특별히 더 큰 분노를 보였습니다. 제우스는 헤라클레스를 신으로 만들기 위해 헤라에게 젖을 물렸습니다. 그런데 빠는 힘이 너무 세서 억지로 떼어내야 했습니다. 그때 분출한 젖이 은하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분노한 헤라는 헤라클레스를 인간 세상으로 보내어 인간으로 살게 만들어버립니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헤라는 헤라클레스에게 광기를 불어넣어, 그가 아내 메가라와 자녀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사건은 헤라클레스 자신에게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을 안겼습니다. 그는 이에 대한 속죄를 결심하고, 델포이 신탁을 찾아가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하는지 물어보게 됩니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유명한 ‘12가지 과업(노역)’이었습니다. 이 열 두 가지 과업을 모두 완수함으로써 헤라클레스는 죄를 씻고 신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12가지 사명을 완수하는 중에 머리가 여러 개인 괴물 히드라도 쳐부숩니다. 헤라클레스는 조카인 이올라오스의 도움을 받아 히드라의 목을 자른 뒤 불로 지져 재생을 막는 전략으로 괴물을 무찔렀고, 히드라의 독을 얻어 화살에 바름으로써 강력한 무기를 확보했습니다.
12가지 노역을 마친 뒤에도 헤라클레스는 신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다양한 영웅적 모험을 이어갔습니다. 아내 데이아네이라는 켄타우로스 네소스의 계략 때문에 헤라클레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네소스는 헤라클레스에 의해 죽어가면서 히드라의 피가 사랑을 영속시키는 ‘묘약’이라고 말해줍니다. 데이아네이라가 ‘사랑의 묘약’이라고 여겨 헤라클레스의 옷에 바른 독이 그의 살갗에 닿아 끔찍한 고통을 일으켰고 회복이 불가능하게 되자, 헤라클레스는 스스로 장작더미 위에 오릅니다. 떠밀리는 죽음이 아닌 산 채로 자신을 화장시키는 능동적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헤라클레스가 불길에 몸을 던지자, 제우스는 그의 영혼을 올림포스로 데려가 오랜 고통에서 해방했습니다. 이로써 헤라클레스는 신들 사이에 올라 불멸의 존재가 되었으며, 그를 괴롭히던 헤라 또한 그를 올림포스의 정당한 신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도의 삶을 상징하기도 하고 우리가 어떻게 신이 될 수 있는지도 알려줍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함으로써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야곱이 에사우에게 다가서기 위해 자신이 평생 해 온 사명의 완수만으로 충분했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겸손’을 회복했어야 합니다. 그래서 천사와 밤새 씨름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자기 교만을 태우는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야곱은 발을 절뚝일 수밖에 없었고 에사우 앞에서 일곱 번이나 엎어져 “당신 얼굴을 보는 것이 하느님 얼굴을 뵙는 것과 같습니다.”라며 그를 경배합니다. 이에 선물 때문이 아닌 그의 겸손함을 보고 에사우는 야곱을 자신의 땅에 받아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명을 수행하기 전에 광야에서 세 유혹과 싸우기 위해 단식하며 기도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자비를 얻기 위함입니다. 자신을 불 속에 던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이 예수님을 인간성인 세속-육신-마귀를 태워버립니다. 결국 광야의 사순절은 우리가 기도-자선-단식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기 위해 겸손해지는 목적으로 행하는 인간이 신이 되는 과정입니다.
저도 신학교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 단식하고 있었습니다. 단식을 하는 이유는 그것 자체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제가 6끼를 굶고 느낀 것은 ‘이틀 굶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제가 뭐 대단하다고 예수님께 무언가를 해드린다고 착각했을까요? 배불렀기 때문입니다.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나의 뜻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게 되고 자선을 통해 나는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며 단식을 통해 하느님께서 양식을 주시지 않으면 나는 아무 존재도 될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속에서 유일하게 남는 이 ‘겸손’을 찾는 일이 사순의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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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재의 수요일에 많은 분이 재의 예식에 참례하였습니다. 이마에 바른 십자 표시의 재를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백신’ 같다는 생각입니다. 이마에 표시가 돼 있기에 악의 세력이 가까이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약에 이런 비슷한 표시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집 앞에는 양의 피를 발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양의 피가 있는 집은 건너가셨습니다. 이마에 재가 있는 분들은 하느님께서 지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다른 하나는 전투에서 공을 많이 세운 사람들이 받는 ‘훈장’ 같다는 생각입니다. 이마에 재가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인정받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년에는 더 많은 분이 재의 수요일에 이마에 재를 받아서 악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마에 재를 받아서 하느님 나라에서 인정받는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자’라는 말을 주로 하는 사람과 ‘왜’라는 말을 주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번 주일에 ‘인왕산에 갈까?’라고 물으면 ‘그러자’라고 대답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가 이번에는 ‘내려와서 칼국수 먹으러 갈까?’라고 물으면 ‘그러자’라고 대답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기에 상대방이 하는 말에 ‘그러자’라고 대답합니다. 이번 주일에 ‘미술관에 갈까?’라고 물으면 ‘왜’라고 대답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저녁에 중국집 갈까?’라고 물으면 ‘왜’라고 대답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친구입니다. ‘왜?’라는 말이 필요한 때도 있습니다. 과학, 문학, 예술은 ‘왜?’라는 질문이 필요합니다. ‘그러자’라는 말이 필요한 때도 있습니다. 지금 슬픔에 겨워하는 사람에게, 지금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헤어짐의 아픔을 참고 있는 사람에게는 ‘왜?’라는 말보다는 ‘그러자’라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러자’라는 ‘공감’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고,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사순시기입니다. ‘왜?’라는 질문 대신 ‘그러자’라는 응답으로 주님의 수난에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시며 악마의 유혹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복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떠나갔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깨달음을 줍니다. 유혹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언제든 다시 찾아올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유혹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지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유혹을 극복하면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유혹은 마치 숨어 있다가 기회를 엿보는 포식자처럼, 우리가 약해질 때 다시 다가옵니다. 우리는 돈, 권력, 명예, 쾌락 같은 다양한 유혹 앞에서 계속해서 시험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악마의 세 가지 유혹을 물리치셨지만, 그 유혹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악마는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가장 힘드실 때 다시 다가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내려와 보라”는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유혹은 언제나 우리의 가장 약한 순간을 노립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첫째, 유혹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직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피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악마와 맞서서 말씀으로 대응하셨습니다. 우리도 유혹을 외면하기보다,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주님의 말씀으로 답해야 합니다. 둘째,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유혹은 우리 약점을 파고듭니다. 어떤 순간에 내가 가장 흔들리는지, 어떤 상황에서 쉽게 넘어지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느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영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유혹은 우리의 의지력이 약할 때 더 쉽게 다가옵니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 우리의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면, 악마가 다음 기회를 노려도 쉽게 넘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유혹받을 때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고 생각한다면, 그분의 길을 따라간다면 악마가 우리를 흔들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유혹은 한 번 이겼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악마는 우리가 지쳐 있을 때, 외로울 때, 방심할 때 다시 찾아옵니다. 그러나 유혹이 반복된다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순간은 우리가 더욱 강해질 기회입니다. 우리가 매 순간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를 통해 내면을 단단하게 다져 나간다면, 유혹은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 단단한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는 우리의 신앙은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사순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께 의지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 삶의 유혹을 이겨내고 주님의 충실한 자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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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십니다. 이끌려 갔다는 말은 의지 없이 움직였다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예수님께서 단순히 수동적으로 끌려가신 것만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능동적으로 맡기셨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준비하시는 마지막 단계까지 유혹을 받으셨다는 사실도 특별히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유혹에 넘어가시지 않자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며”(루카 4,13) 떠나갑니다. 이때 ‘다음 기회’로 옮긴 그리스 말 ‘카이로스’는 약속된 구체적인 순간들을 가리킵니다. 악마(사탄)들이 말한 ‘다음 기회’는 예수님께서 수난을 겪으시는 순간(22,3.53 참조)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모습에서 사순 시기를 지내는 지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유혹하였던 악마가 다시 돌아올 것임을 아시고 자주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하느님 앞에 머무셨습니다. 이러한 머무름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온전히 신뢰하시고, 유혹에 적극 맞서신 것입니다.
사순 시기 동안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유혹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느님 앞에 머무는 시간이 더욱 필요합니다. 유혹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과 함께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자주 떠올리는 사순 시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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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우리 교회 안에 파스카 축일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 날은 없다. 파스카 축일이야말로 다른 모든 축일을 거룩하게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승리와 구원의 신비를 드러내는 파스카 축일의 신비에 합당하게 참여하기 위하여 40일간을 준비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즉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충만히 참여하는 데 필요한 기간으로 사순절을 살고 있다. 오늘의 성서 대목들은 이 파스카라고 하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피곤하지만 기쁨에 차 있는 우리 여정의 의미와 방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신명 26,9)에서 수확한 첫 결실을 봉헌하면서 하느님께 감격에 찬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그들은 첫 결실을 바치면서 자신들을 구원하신 역사를 고백하고 있다(참조: 신명 26,5-9).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기 위해 오랫동안 시험과 단련을 받았다. 우리도 약속의 땅인 파스카의 영광에 참여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을 이기고 거기에 도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사순절을 지내는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파스카의 신비는 약속의 땅보다 더 의미가 깊다.
복음: 루카 4,1-13: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예수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사순절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은 단순히 유혹의 내용이 아니라 이 사순절을 통하여 우리의 정신이 단련되고 또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따르게 하고 있다. 복음을 체험 중심으로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유혹은 예수님의 수난까지 계속된다. 즉 예수님의 전 생애에 걸쳐 계속되는 유혹이다. 즉 예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1-2절) 하고 있고,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13절) 그 ‘다음 기회’란 ‘수난의 때’이다. 그 악마는 유다의 배반과(루카 22,3)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폭력으로 나타난다.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이 권세를 떨칠 때다.”(루카 22,53)라고 당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둘째, 이 유혹은 예수께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포한(루카 3,22) 세례 후에 나타난다. 사탄은 아주 고도의 수법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사명을 세속적 권세와 명예와 영광에 결부시켜 세속주의적인 ‘메시아’로 만들려고 한다. 사탄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유혹을 한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3.9절)
이러한 유혹은 계속 예수님께 그분의 공생활 중에도 나타났던 것이었다. 군중들(14,15; 19,11)과 고향 사람들(4,23) 그리고 사도들(10,20)로부터도 나타났다. 십자가 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23,35) 사탄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 같다. 이 유혹은 바로 예수께 하느님의 뜻에 맞는 메시아로서보다도 인간들이 바라고 원하는 그런 메시아가 되라는 무서운 유혹이다. 즉 현세적 메시아가 되라는 유혹이다. 이것이 또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동요시키는 유혹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이 보여주신 것을 통해 원하시는 것과는 달리, 즉 하느님의 뜻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나 눈치에 자신을 맞추라는 유혹이다.
이것이 예수님께는 성공하지 못하고 우리에게는 성공하는 영원한 유혹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의 표현인 ‘말씀’에 당신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키고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께는 성공하지 못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4절)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8절)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12절) 즉 예수님은 ‘말씀’의 식별력에 따라 행동하고 판단하신다는 명확한 의지의 표명이다. 하느님만이 우리가 받들어 모셔야 하는 유일한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신앙이란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인도하시어 구원해주실 수 있는 그분께 도움을 청하며 의탁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신 것과 비교하여 그리스도의 구원행위를 말하고 있다. 그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 자신과 모든 인류를 위해 죽음의 멍에까지도 없애셨다. 이제는 그 구원에 이르기 위해 그 구원을 갈망하며 하느님께 호소하여야 한다고 한다.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13)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이 여정도 그리고 그 도착지도 모두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이 사순절은 파스카와 함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은총이다. 이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감으로써 말씀을 실현해 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께 성공하지 못한 것처럼 하느님의 뜻보다는 사람들의 호감을 사라고 더 애쓰는(갈라 1,10) 예수님께서 공생활 전체를 통해 받으셨던 유혹을 우리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나를 하느님의 뜻으로부터 멀리하고 인간적인 원의를 이루도록 끊임없이 나를 붙들고 늘어지는 유혹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나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좀 더 나 자신을 이길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순절이 되도록 사순 오늘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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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유혹이 올 때, 누구든지 기도하지 않으면 백전백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 시장하셨다. 그런데 악마가 그분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한순간에 세계의 모든 나라를 보여 주며, 그분께 말하였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루카 4,1-13)
1)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6-18)
이 말은, 예수님은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가 받는 유혹을 똑같이 받으셨고, 그래서 우리의 처지를 잘 알고 계시고, 우리를 가엾이 여기셔서 도와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에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천사들과는 달리 유혹에 잘 넘어가는 나약한 존재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악마의 유혹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합니다. 사실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죄는 유혹에 넘어갈 때부터 시작됩니다. 혹시라도 “나는 절대로 유혹을 받지 않는다.”라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백퍼센트 교만하고 어리석은 위선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신다는 말은, 유혹을 받을 때 예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도움 받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일에 관한 말씀,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라는 말씀은(마르 9,29), ‘유혹’에 대해서도 적용됩니다. 만일에 기도하지 않고 자기 힘만으로 유혹을 물리치려고 시도한다면, 그 시도는 ‘백전백패’로 끝날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루카 17,1-3)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은 ‘유혹’입니다.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는, “일어나야 한다.”가 아니라, “일어나는 것이 현실이다.”입니다. 지금 이 말씀은,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짓는 것보다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것이 더 큰 죄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이고, 남을 유혹하는 자는 매우 엄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데, 남을 유혹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은 더 중요한 일입니다. 의도적으로 유혹하는 것은 사탄과 같은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즉 유혹하려는 의도로 한 일이 아닌데도 결과적으로 유혹한 것처럼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나 자기 좋은 것을 찾지 말고 남에게 좋은 것을 찾으십시오. 누가 여러분에게 ‘이것은 제물로 바쳤던 것입니다.’ 하고 말하거든, 그것을 알린 사람과 그 양심을 생각하여 먹지 마십시오. 내가 말하는 양심은 여러분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양심입니다."(1코린 10,24.28-29ㄱ)
<여기서 ‘제물로’ 바쳤던 음식은, 우상을 숭배하는 제사의 제물로 바쳤던 음식을 뜻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 또 교회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이것은 괜찮아.”라고 말한 것 때문에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죄를 짓게 된다면, “괜찮아.”라고 말한 사람은, ‘남을 죄짓게 하는 죄’(남을 유혹한 죄)를 지은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받으신 유혹들 가운데에서 두 번째 유혹은 현대사회에서,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히 더 심각한 유혹이 됩니다.
“세속의 권세와 영광은 내가 받은 것”이라는 사탄의 말은 거짓말이지만, 그런 것을 욕심내고 집착하다가 구원의 길을 걷는 일을 소홀히 한다면, 결과적으로 사탄이 바라는 대로 사탄을 섬기는 것과 같은 ‘죄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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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결코 유혹당하지 않는다>
루카 4,1-13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 시장하셨다.
그런데 악마가 그분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한순간에 세계의 모든 나라를 보여 주며, 그분께 말하였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
<결코 유혹당하지 않는다>
밥으로
유혹하는
밥을
움켜쥔 이에게
결코
참된 밥은
유혹당하지 않는다
힘으로
유혹하는
힘을
휘두르는 이에게
결코
참된 힘은
유혹당하지 않는다
삶으로
유혹하는
삶을
사고파는 이에게
결코
참된 삶은
유혹당하지 않는다
넋으로
유혹하는
넋을
뒤헝크는 이에게
결코
참된 넋은
유혹당하지 않는다
빛으로
유혹하는
빛을
가로막은 이에게
결코
참된 빛은
유혹당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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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홍사영 바오로(청년·순례사목 담당) 신부님]
<유혹을 이기는 열쇠>
교회의 전례력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예수님의 일생이 나타납니다. 곧 예수님의 삶을 대림, 성탄, 사순, 부활, 연중 시기의 구분에 따라 알려주 는데, 오늘은 사순 시기의 첫 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이란 말은 숫자 40을 말하며 구약시대에도 하느 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40이라는 숫자와 연관된 기간 동안 특별한 준비를 하였습니다. 노아의 홍수 기간도 40일이었고,(창세 7.12 참조)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도 40년이 걸렸습니다.(탈출 16,35 참조) 모세도 밤낮으로 40일간 시나이산에서 지낸 후 십계명을 받았으며(탈출 24.18 참조) 엘리야가 하느님의 산호 렙까지 걸어갔던 기간도 40일이었습니다.(1열왕 19,8 참조)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단식 하실 때, 악마가 예수님을 유혹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먼저 악마는 빵으로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성경은, 이미 많은 시간이 흐른 뒤라, 예수님께서 시장하셨다고 표현합니다.(루카 4.2 참조) 사람이 배고프면, 모든 관심은 빵에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신명 8,3 참조)는 말씀으로 응대하십니다. 빵의 필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빵만을 위해 살지는 않습니다. 빵만을 절대화하고 물질을 만능열쇠로 여기는 유혹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세상의 권세와 영광에 대한 유혹이 이어집 니다. 악마는 '그저 자신에게 경배하면 세상의 권세와 영 광이 모두 예수님의 것이 될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예수님의 답은 늘 한결같습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신명 6,13 참조)는 성경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사실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 한 분뿐이 십니다. 다른 곳에서 오는, 또 스스로 만들어낸 권세와 영광에 의지하지 않도록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결국 악마는 성경 말씀까지도 들고나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몸을 던져도 천사들의 보호를 받을 것'(시편 91,11-12 참조)이라며, 이 성경 말씀이 과연 실제로 이루어질지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악마의 노림수를 잘 아셨기에,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신명 6,16 참조)는 말씀으로 악마의 모든 유혹을 이겨내십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유혹이나 우리가 오늘날 일상생활에서 받는 유혹의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꾸어 접근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 유혹을 식별하고 모두 물리치셨습니다. 우리 역시 말씀에 힘입어 유혹을 식별하고, 기도를 통해 그 유혹을 물리칠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사순 시기에 성경을 자주 읽고,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서울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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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변윤철 다미아노 신부님]
<희망을 품은 순례자>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기다림과 시련과 단련의 기간을 의미하면서 모세와 엘리야가 머물렀던 40일과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지내셨던 40일을 상기시켜 줍니다. 아울러 광야에서 40년이란 시간은 이스라엘 백성의 시련과 고난 그리고 약속된 땅을 가기 위해서 겪어야만 했었던 과정이기도 하였습니다.
40년은 인간의 탄생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르는 전 생애의 상징입니다. 성조들을 통해서 약속된 강복을 온전한 믿음으로 의탁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기다림과 인내의 시간이 필요했었다는 것을 40년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기다렸던 시메온과 한나도 전 생애를 기다려온 것처럼, 평생 하혈하는 여인이 길거리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분의 옷자락을 잡았던 것처럼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는 그 과정과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탄의 대화 중 돌을 빵으로 만들어보라고 하는 장면을 보면서 그 과정을 상실한 이 세상의 모순을 생각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사실 많은 사람이 이러한 유혹에 빠져 있습니다. 과정이 생략된 결과, 노력과 땀이 없는 성공, 기다림과 성실이 결여된 성과주의는 좀더 빨리 결과를 만들어내려는 이 시대의 유혹이 되어버린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과정을 보지 않고 성공과 양적 성장에만 길들여져 있습니다.
사순 시기는 매년마다 의례적으로 지내는 시간이 아니라 땅과 생명을 약속하신 하느님의 약속을 희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품었던 희망을 우리도 같이 가지고자 노력하는 시간입니다. 사순 시기는 부활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으로서 감내하고 기다려야 하는 희망의 순례 시기입니다.
광야는 우리가 살아가야 하고, 살아내야 하는 우리의 삶의 장소입니다. 그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주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살아가기를 다짐해 봅니다.
사순시기는 우리가 광야에 서 있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금 상기시켜 줍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놀랍습니다. 그분은 당신 자녀들을 영원한 벌에서 구하시기 위해 일시적으로 그들에게 고통을 주십니다. 그분은 일으켜 주시기 위해 누르시고 고쳐 주시기 위해 잘라 내시며 들어 높이시기 위해 내버리십니다.”(성 베드로 다미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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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주교 강성구 요한 사도 신부님]
<은총의 시간인 사순 시기>
사순 시기입니다. 사순 시기는 우리 신앙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참회와 희생, 극기, 회개와 기도로써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지난 재의 수요일에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또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라는 말씀과 함께 머리에 재를 받음으로써 사순 시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는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악마에게 세 번이나 유혹을 받으셨지만 모든 유혹을 극복하셨습니다.
①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도록 ‘돌을 빵으로 만들어라’ 는 유혹을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는 말씀으로,
②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 을 주겠다는 유혹을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는 말씀으로,
③ ‘하느님의 보호하심’ 을 시험해 보라는 유혹을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 는 성경 말씀으로 극복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유혹은 우리 삶에도 비슷한 형태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의식주를 해결해야하는 우리에게, 세상에서 명예를 쌓으려는 우리에게, 그리고 때로는 하느님을 시험하려는 마음이 드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찾아오는 유혹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으로 유혹에서 승리하셨지만, 다음 기회를 노리며 떠나간 악마는 때로는 기쁨과 슬픔의 모습으로, 때로는 희망과 두려움의 모습으로 위장하여 더욱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악마의 유혹에서 승리하는 사순 시기가 되기 위해서
① 기도 생활에 충실하여 영적 성장을 이룹시다.
② 성사 생활에 충실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갑시다.
③ 성경 통독과 필사, 교회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합시다.
주님의 은총과 도우심으로 ‘유혹에서 승리’ 하여 부활의 기쁨을 준비하는 은총과 희망의 사순 시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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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민호 미카엘 신부님]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지난 재의 수요일, 머리에 재를 얹으면서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사순절은 언젠가 흙으로 돌아가야 할 우리 인간의 처지를 생각하고 지나온 나날들을 반성하며 속죄하는 시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시기입니다.
우리는 매번 사순 제1주일에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았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먹고사는 문제,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보여주면서 악마를 경배하면 모든 것을 주겠다는 권력에 대한 유혹,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헛된 자만과 명예에 대한 유혹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하기위해 노력합니다.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벌려고 애쓰고,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더 높은 자리를 원합니다. 더 높은 자리는 나의 이름을 더욱더 빛내 준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돈, 권력, 명예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돈, 권력, 명예가 없다면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은 돈을 벌고자 애쓰고, 더 많은 권력을 쥐려고 노력하며, 이름을 남기길 원합니다.
우리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돈, 권력, 명예에 대한 유혹을 왜 예수님은 물리쳤을까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을 해보시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지위와 권위를 가지고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하느님 아들의 능력을 사용하도록 악마가 유도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개인의 명예를 위해 하느님 아들의 지위와 권위를 남용하도록 이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과는 무관한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하느님 아들이라는 지위, 또는 하느님을 이용하라는 악마의 유혹을 뿌리치십니다.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로써 말입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루카 4,8)
우리는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예수님처럼 악마의 유혹에 직면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돈과 권력, 명예라는 유혹을 끊임없이 직면하며 살아갑니다. 때로는 달콤한 속삭임으로, 때론 눈 한번 지그시 감으면 엄청난 것을 얻을 수 있는 상황에 마주칠 수도 있습니다.
또는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고 하느님을 이용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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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나라 명품시장 규모가 세계 7위 수준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명품을 좋아한다는 것이겠지요. 오늘날 품질과 디자인이 모두 뛰어나고 오랜 전통을 가진 것을 명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물질적인 명품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명품이 되는 것입니다. 내면의 성숙함과 외면의 유려함을 모두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변함없이 일상에서 충실한 모습을 보여 준다면 그 사람이 진짜 명품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변함없이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명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평가도 충분하지 않은, 하느님께서 인정하는 귀한 우리가 될 것입니다. 명품의 삶을 사는 사람은 고난 앞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고난이 닥쳤을 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다음의 두 가지 선택을 한다고 합니다.
첫째, 세상을 원망하거나 스스로 포기한다.
둘째, 잠잠히 때를 기다리고 실력을 쌓아 나간다.
여러분은 고난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십니까? 당연히 두 번째 선택에 손을 들어야 명품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실제로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은 두 번째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의 선택을 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맹자는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 스스로를 버리는 사람은 하늘도 도울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큰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당신을 바라보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직접 그 고통과 시련을 겪으셨고, 이 모두를 이기시고 부활의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님을 모범을 보고 또 그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리시어 광야로 가십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십니다. 오늘 복음은 악마의 세 가지 유혹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유혹은 사십 일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시장한 상태에서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악마를 경배하면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는 유혹이었습니다. 마지막 유혹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유혹입니다. 우리가 겪는 유혹과 다르지 않습니다. 첫 번째 유혹은 물질적인 유혹이고, 둘째는 세상 지위에 대한 유혹이고, 마지막은 하느님 존재에 대한 유혹, 즉 기적의 유혹입니다.
이를 성경 말씀으로 모두 이겨내십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겪으시는 유혹을 계속 받습니다. 과연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 말씀으로 이겨내고 있습니까?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는 사람만이 진짜 명품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귀하게 여기시고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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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의말씀(2025.3.9.사순1주일.)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루카.4,1)
창조주의 입김으로 사람이 되고 창조주의 영으로 우리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되는 삶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어떠한 고통도 주님께서 인도하신 광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광야는 우리가 입은 내면의 상처이기도 합니다. 그 상처는 우리의 잘못도 아니고 사람들이나 세상의 잘못도 아닌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비참하고 쓰라리고 공허하며 견디기 힘든 유혹을 느끼는 우리의 상처를 바라보고 기도를 통하여 치유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는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때로는 뼈 속까지 시리도록 아픈 상처를 만나는 광야지만, 그 고통의 광야를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걸어갑니다. 홀로 광야를 걸어가면 유혹에 쉽게 넘어지지만, 주님과 함께 걸어가면 유혹을 넘어섭니다.
홀로 바라보는 상처는 너무 아파 악의 온상이 되지만, 주님과 함께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상처는 사람과 세상을 위한 사랑의 온상이 됩니다.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사는 우리는 누군가 그 상처를 건드릴까 두려워합니다. 보호받지 못하여 홀로 겪었던 상처이기에 그 고통을 다시 겪는 것이 두렵습니다. 감당하기 힘들었던 상처입은 연약한 자신을 또 다시 만나는 것이 두렵습니다.
성령의 인도로 가신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받고 이겨내신 예수님과 함께 우리는 광야로 갑니다. 홀로 아닌 성령의 인도로 갑니다. 홀로 아닌 주님과 함께 갑니다. 광야에서 때로 우리가 혼자라고 느끼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셨음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는 어느 곳이든 성령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가 입은 상처때문에 겪는 고통 안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아파하십니다.
상처와 고통의 광야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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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세 가지에 관해서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이 세 가지 유혹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섬겨라.’라는 것입니다. 빵으로 자신의 배를 불리고 부와 권력, 그리고 하느님의 능력을 내 이익을 위해 사용하라는 내용입니다. 모두 하느님 보다 나를 섬기도록 하는데 그 유혹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유혹은 주님의 공생활 곳곳에서도 드러납니다. 빵의 기적으로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있고 난 뒤 사람들은 주님을 왕으로 만들려 합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닌데 그들은 빵을 만들어 주는 주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습니다.
주님이 빌라도 앞에 섰을 때 빌라도가 말합니다. ‘나에게는 너를 살려줄 권한이 있다. 그러니 나에게 살려달라고 말하여라.’라고 말입니다. 악마에게 절을 하라는 유혹과 빌라도 앞에서 살려달라고 말하는 것이 무엇이 다릅니까?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이스라엘 백성은 말합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내려와서 너 신이나 살려 보아라.’라고 말입니다. 이 유혹과 ‘절벽에서 떨어져 보아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천사들이 너를 떠받칠 것이다.’라고 하는 유혹이 무엇이 다릅니까?
우리의 삶은 어떨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은 바로 ‘하느님보다 너 자신을 사랑해라.’라는 유혹입니다.
조심하십시오. 늘 깨어 기도하십시오. 빵을 주시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그저 살아계신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건강과 재물을 주시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그저 무엇이든 베풀어 주심에 감사하십시오. 하느님의 힘을 내 이익을 위해 사용하려 하지 마십시오. 악마가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이 시간 주님께 기도합시다. 나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우리가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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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눈이 멀면….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예쁘다.
위 말의 뜻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사랑에 눈이 멀면 냉정한 판단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끔 사랑은 맹목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맹목적으로 내 자녀는 잘못 없다고 말하는 부모의 모습을 만나면 안타깝습니다. 그런 맹목적인 사랑이 자녀를 망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 없습니다. 너무 늦었기 때문입니다.
잘못은 냉정하게 짚어주고, 그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난 뒤에 따뜻함으로 감싸준다면…. 이런 냉정한 눈과 따뜻한 마음은 자녀들을 한층 성장시킬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냉정한 눈과 따뜻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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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4,1~2)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 시기는 분명 은혜로운 때이며, 사순 시기의 모든 날은 구원의 날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의 시기와 날이 가까이 다가온 만큼, 악마의 유혹의 시간 또한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악마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깨어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악마의 유혹은 늘 달콤한 말로 지금이 아니라 내일이라고, 가볍고 별거 아니라는 말로 우리를 달래고 흔들어 놓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내 내일을 맞는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고, 죄책감은 그때부터 우리를 붙잡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부서뜨립니다. 사실 잘못된 방향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 내게 말을 걸어오는 악마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기 때문에 시작하는 순간이고 지점입니다.
『 그런데 악마가 우리를 유혹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주일 학교에서 돌아온 호기심이 많은 한 소년이 작은 목공소를 하고 계시는 할아버지를 찾아 달려 들어와서는 숨을 돌릴 겨를도 없이 말했다. “할아버지, 오늘 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배웠어요. 악마가 우리를 유혹해서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고 죄를 짓게 만든 데요.” “그래 아주 중요한 것을 배웠구나.” 할아버지가 하던 일을 멈추고 어린 손자를 보고 흐뭇해 하셨다. “애야, 그런데 악마가 우리를 어떻게 유혹하는지는 알고 있니?” 손자에게 질문을 한 할아버지는 이내 구석에서 굵은 장작 하나를 갖고 오셨다. 그리고 성냥을 그어 장작에 불을 붙이려고 몇 번을 시도하셨다. 그러나 그 장작에는 불이 붙지 않았다. “자 보아라. 이렇게 굵은 나무에는 아무리 성냥으로 불을 붙이려 해도 안 되지 않니? 그런데 이제 보렴.” 할아버지는 바닥에서 대팻밥을 긁어모아 거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 위에 작은 나무토막을 놓아 더 크게 불을 일으킨 후 그 굵은 장작을 얹었다. 그러자 비로소 그 굵은 장작도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를 지켜본 손자에게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대팻밥은 금방 불이 붙으니까 먼저 대팻밥에 불을 붙이고 그 불에 작은 나무를 얹어 가면서 불길을 더 크게 만드는 거야. 그러면 결국 굵은 나무도 타들어 가지 않니? 바로 이와 같이 악마는 우리를 별것 아닌 작은 일부터 서서히, 그리고 은밀히 유혹해 온단다.” 그렇다! 조금씩 은밀하게 미혹하여 결국 그리스도와 멀어지게 하려는 악마의 무리를 경계하고,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살아야 합니다.> (‘성자들의 118가지 이야기’ 중에서)
예수님은 참으로 힘들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참 힘들었습니다. 의식주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떠돌아다니시면서 예수님은 근근이 사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구름 같은 군중을 몰고 다니시기도 한 화려한 삶을 사신 분이기도 했습니다. 얼굴만이라도 보고파,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고파 수많은 사람이 주변에 모여들었지만 늘 고독한 분이기도 했습니다. 주님이시라며 환대받았던 분이었지만 아무도 뒷수습해 줄 겨를 없이 순식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언제인데, 세월이 흘러도 한참이 흘러 까마득히 옛날 일인데도, 아직도 그분을 잊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있으니 기억하는 것이 사랑이며, 사랑은 죽어서도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잠시 피었다 이내 지는 벚꽃처럼, 예수님의 생애도 순간에 피었다 저버렸지만, 그렇게 삶을 마치신 예수님을 잊지 못하고 기억하는 이유는 오늘 우리의 모습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돌 더러 빵이 되게 해달라고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무리에 끼어 산 것이 죄스러워서입니다. 모든 권세와 영광을 손에 쥐고 싶어 달리는 경주에 뛰어든 것이 부끄러워서입니다. 남보다 더 우월한 능력자가 되고 싶은 그 교만함이 못내 부끄러워서입니다. 권력을 탐하는 사람, 부를 탐하는 사람, 남보다 더 우월한 능력자가 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삶은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어리석은 삶, 바보처럼 사셨던 그분의 모습을 닮아가겠다고 다짐한 수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사순 시기는 더더욱 회개와 정화의 시기여야 합니다. 입술로는 회개와 정화를 노래하면서도 몸으로는 빵을 구하고 권세와 영광을 얻겠다며 발버둥을 친다면 예수님을 유혹한 악마가 되는 것이며 이집트의 노예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유혹받으셨다, 는 이 사실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안이 됩니다. 예수님을 유혹한 악마라면 당연히 우리도 유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으로 태어난 어떤 존재도 유혹에 제외된 사람은 없습니다. ‘나만 왜 유혹에 시달리는가?’ ‘나는 왜 여태껏 이 유혹을 받아야 하는가?’ 이런 느낌이 들면 오늘의 복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악마를 물리치셨던 예수님을 떠올려야 합니다. 유혹은 죄가 아닙니다. 윤리적인 그 무엇도 아닙니다. 유혹은 그저 ‘유혹일’ 뿐입니다. 성서가 유혹이라고 말할 때는 인간이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행동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루22,40) 예수님은 또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22,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사는 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자녀의 삶이고 그런 삶이 바로 유혹에 빠지지 않은 거룩한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악마가 예수님에게 권하는 것은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라는 것입니다. 이 유혹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4,9)이라는 악마의 말에 잘 드러납니다. 악마는 이제,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살아가는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께 충실한가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혹받은 장소는 ‘광야’입니다. 허나 광야는 단지 지형적인 차원이 아니라 지금은 우리네 삶의 치열한 장소입니다. 성경에서 광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시험한 장소인 동시에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믿음을 시험하셨던 장소입니다. 이런 점에서 광야는 악마의 유혹을 받는 장소이지만, 다른 한편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해야 살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광야에서 오늘 악마가 예수님께 던진 첫 번째 유혹은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이 첫 번째 유혹은 결국 편안하고 안락한 ‘의식주’에 대한 유혹입니다. 화려한 명품 옷에 대한 유혹, 맛있고 희귀하며 이름난 음식에 대한 유혹, 남들보다 넓고 안락하며 쾌적한 집을 소유하고 싶은 유혹입니다. 사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의식주에 대한 유혹을 모두 뿌리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단호한 대답은 그것들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며,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차피 채워질 수 없는 유혹이라면, ‘삶에서 정말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것을 찾아라.’하고 말씀하십니다. “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4,4)
악마의 두 번째 유혹은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보여 주며 자신에게 경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4,5~7참조)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자신이 모든 삶의 자리에서나 관계에서 중심이 되고픈 유혹을 받습니다. 가정, 직장, 교회에서 남들이 자신만을 우러러 보고 인정해 주기를 원합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자신이 남보다 더 많은 권세와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유혹에 늘 노출되어 삽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4,8)
악마의 세 번째 유혹은 예수님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이 유혹은 하느님을 시험해 보려는 종교적인 구원 놀이의 유혹입니다. 엉터리 진리, 기복적인 신앙, 값싼 은총, 진정한 자기 투신이 아닌 안락과 일신의 안일을 위한 신앙의 유혹입니다. 또한 이 유혹은 주님의 뜻이 아닌 자기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신앙 놀이, 한마디로 제멋대로 살고자 하는 유혹입니다. 자주 우리는 주님과 거래하듯이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4,12)
우리는 세례성사로 시작된 신앙의 여정에서 하느님보다는 재물과 권력에 의지하려는 유혹, 자기 명예와 권세를 얻기 위해 하느님까지도 이용하려는 유혹에 시달리게 됩니다. 하지만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듯이, 충실한 신앙인 역시 두 주인을 섬기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느님만이 우리의 주인이시고, 바로 그분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일편단심으로 하느님께 굳은 신뢰를 갖고 그분 말씀에 의지할 때, 교묘하고 끈질긴 유혹의 목소리를 떨쳐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주님께 의탁하고 기도하며 살아갈 때, 인생 순례의 여정에서 겪는 수많은 유혹을 능히 이길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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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사순 첫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두 개의 ‘신앙고백’과 함께 ‘참된 신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선택받은 백성의 신앙고백이요, <제2독서>는 그리스도 신자들의 신앙고백입니다. 곧 전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햇곡식을 봉헌하면서 주님께서 자신들을 이집트 땅에서 해방시키고 좋은 땅을 주셨다는 신앙고백이요, 후자는 우리의 구원이 율법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은총을 통해 구원이 온다는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의 유혹받으신 장면을 통하여, 앞의 두 독서에서 고백하고 있는 ‘신앙’의 핵심을 보여주십니다. 곧 오로지 아버지께만 신뢰와 의탁을 두는 신앙의 행위를 통해서, 믿는 이들이 어떠한 처지에서도 구원의 길을 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줍니다. 곧 유혹을 이기신 인간 예수님의 모습은 모든 인간이 닮아야 할 가장 모범적이고 완전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사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되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겠다고 약속한 곳이요, 오롯이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요, 사랑을 속삭이는 장소이기도 합니다(호세 2,16-18). 또 불모의 황폐한 사막이요 유혹받은 장소이기도 하지만, 야곱을 아껴주신 곳이요(신명 32,10), 이스라엘 백성을 보살펴주고 인도하신 곳이요(신명 2,7;8,15;느헤 9,18-19), 시험의 장소이기도 하지만(신명 8,2),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요(1열왕 19,4), 사랑을 알게 하시는 장소이기도 합니다(예레 2,2-3). 또한, 광야는 현실적으로 우리 삶을 뒤흔드는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지금의 이 세상이요, 우리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마침내 허기지셨던 예수님은 쇄약해지셨고,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상태에 처했습니다. 가장 허약한 순간을 노려 악마의 끈질긴 유혹은 시작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피하시지 않으시고 정면으로 돌파하십니다. 아니, 역설적으로 말하면, 오히려 유혹은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라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곧 물질적 유혹, 빵에 대한 유혹, 필요와 효용성, 소유와 능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루카 4,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육신을 살리는 물질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말씀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시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요.”라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곡 영적, 신앙적 유혹, 권력에 대한 유혹, 지배와 권위, 존경에 대한 유혹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루카 4,8)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우상을 믿고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한 이로서 그분만을 섬기고 믿으라는 말씀, 곧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하느님께 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성전 꼭대기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곧 정신적 유혹, 영예에 대한 유혹, 과시와 인기, 교만과 허영, 영웅주의에 대한 유혹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루카 4,12)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허영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하느님께 두고 그분의 뜻 이루어지기를 바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유혹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대체, 악마는 무엇을 노리고 다가왔던 것일까?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놓으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루어야 할 사명을 방해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위하여 온전히 헌신하셨습니다.
이토록, 광야에서의 유혹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삶을 제시해줍니다. 곧 이 사건은 우리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신비로 이끌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술이나 기적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지 않으시고, ‘말씀’을 통해서 믿음으로 유혹을 이기시고, 사랑으로 사명의 길을 가셨으며, 아버지의 뜻에 희망을 두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도 예수님의 이 헌신에 힘입어, 결코 그 누구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자 누구입니까? 환란입니까? 궁핍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 모든 일에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에 힘입어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도 주권도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 35-3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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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루카 4,4)
주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살게 하소서.
나의 필요보다 타인의 필요를 먼저 헤아리고
소유하기보다 소유당할 줄을 알게 하소서.
무엇이 유익한가보다 그것이 사랑인가를 보게 하시고
능력을 가지기보다 가진 능력을 사랑으로 쓸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으로부터 떼어 놓는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있게 하시고
당신의 사랑에 힘입어 말씀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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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 전쟁>
-영적 승리의 삶-
오늘은 사순 제1주일, 루카복음은 광야에서 악마에게 40일 동안 유혹을 받으신 예수님에 관한 내용을 다룹니다.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선포하기전 하느님과 함께 40일을 지내면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던 모세를, 이제벨의 보복을 피해 하느님의 산 호렙을 향해 40일 동안 도주하던 엘리야를 연상케 하는 예수님입니다. 이 두분은 예수님의 변모사건시 함께 대화를 나눴던 분들이기도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 영적전쟁에 승리했던 하느님의 전사들입니다. 오늘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전사로서 광야에서 유혹하는 악마와의 치열한 싸움에서 영적승리의 삶을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에 앞서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역순으로 소개하며, 마지막 대목은 ‘케난은 에노스의 아들, 에노스는 셋의 아들, 셋은 아담의 아들, 아담은 하느님의 아들이다’(루카3,38)로 끝납니다.
아담이 누굽니까? 창세기 3장에서 보다시피 악마의 유혹에 빠졌던 하와의 남편으로 하와와 함께 영적전쟁에서 악마에게 패했던 사람입니다. 이제 새 아담인 예수님이 광야에서 악마와의 영적전쟁을 치르게 된 것입니다. 아담이후 예수님이 출현하기 까지 기다린 하느님의 인내가 놀랍습니다. 오늘 광야에서 악마와의 대결은 예수님은 물론 우리의 전삶을 요약하며 영적승리의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살아있는 누구도 인생광야여정중 악마와의 유혹을 피할 수 없으며 살아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악마와의 영적전쟁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라 칭하곤 합니다. 예전 수도승들 역시 악마와의 싸움을 위해, 또 주님을 만나러 광야에 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굳이 광야에 갈 필요가 없으니 바로 세상 한복판의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가 악마와의 싸움이 펼쳐지는 광야의 전장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주 강조하던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광야 인생 여정중 성인이 되느냐, 괴물이 되느냐, 폐인이 되느냐 셋 중 하나’라고 말입니다. 오늘날 주변에서 실감나게 체험하는 진실이기도 합니다. 이성을 잃고 미쳐가는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광신도狂信徒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가 작금의 현실입니다. 독일의 문호이자 시성이라 칭하는 괴테는 생애 말년의 대화에서 말합니다.
“시대가 쇠퇴할 때의 모든 경향은 주관적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모든 일이 새로운 시대를 위해 성숙해 갈 때는 모든 경향이 객관적이다.”
바로 오늘날 모든 경향이 주관적으로 흐르는 혼란한 시대를 접할 때 공감하는 사실입니다. 이성과 상식, 공정과 정의, 진리와 평화가 날로 쇠퇴해가는, 내전 상태를 방불케 하는 두렵고 불안하고 혼란한 세상입니다. 바로 이런 광야의 현실에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영적승리의 삶을 위한 참 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오늘 옛 현자의 지혜도 영적전쟁중인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에게 좋은 참고가 됩니다.
“모두가 각자의 전장에서 힘들게 싸우고 있으니 비록 타인에게서 지옥을 마주할 지라도 그에게 친절을 베풀라.”<다산>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관대하면 원망받는 일이 없다.”<논어>
정말 영적 신사다운, 주님의 전사다운 넉넉하고 품위있는 모습입니다. 어떻게 하면 광야 인생 여정중 영적 전쟁에서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겠는지 셋을 소개합니다.
첫째, 혼자가 아닌 함께 악마와의 전투입니다.
바로 성령과 함께 악마와의 영적전쟁입니다. 또 오늘 광야에서 영적승리를 거두신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는 늘 함께하는 수호천사와 수호성인이 있고 교회공동체 안에는 무수한 영적 전우들이 있고 날로 두터워지는 영적 전우애戰友愛가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 공동체 안에 몸담고 있는 동안 절대로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할 것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광야에서의 악마와의 치열한 전투에 성령께서 시종일관 함께 했음을 봅니다. 복음 초반부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유혹을 받으셨지만 유혹에 빠지지는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평생 영적전쟁중 역시 악마의 유혹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악에서 구해달라는 주님의 기도가 절실할 수 뿐이 없습니다.
둘째, 주님 안에 자주 머물러 기도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성령에 이어 악마와의 싸움에 참 좋은 무기가 끊임없이 한결같이 바치는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입니다. 성령과 함께 하셨던 주님도 늘 기도하셨습니다.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예수님의 외딴곳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광야여정중 우리 역시 주님 안에 고요히 머물러 휴식과 충전을 위한 외딴곳의 기도처는 필수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런 고독은 현대인들에게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라 갈파했습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기도와 함께 고백입니다. 성서의 언어는 사실 언어이기보다는 거의 대부분 고백 언어입니다. 믿음의 고백, 희망의 고백, 사랑의 고백, 찬미의 고백, 감사의 고백등 끝이 없습니다. 끊임없는 고백과 기도와 더불어 주님과의 관계도 날로 깊어져 내적힘도 샘솟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1독서 신명기의 다음 고백을 통해 40년 광야 체험을 기억하여 내면화하고 현재화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실히 견고히 지켰습니다.
“저희 조상은 떠돌아 다니는 아람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강한 손과 뻗은 팔로, 큰 공포와 표징과 기적으로 저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그리고 저희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기쁨과 감사, 믿음과 구원의 고백의 대가이자 달인입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셋째, 평생 날마다 말씀공부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악마와의 평생 영적전투에 성령과 기도에 이어 말씀이 참 좋은 무기가 됩니다. 말씀에 정통할 때 악마와 대화도 하지 않고 단박 그 간계를 간파하여 말씀으로 무찔러 버립니다. 말씀으로 무장되지 않고 악마와 대화하다 보면 악마의 유혹에 빠지기 십중팔구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악마를 말씀으로 물리치는 장면이 참으로 통쾌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본능적 욕구인 식욕에의 승리입니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권력욕, 명예욕에 대한 승리입니다.
마지막 악마의 세 번째 유혹이, 시험이 참 간교합니다. 성서를 예로 들어 유혹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천사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주리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소?”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헛된 욕망, 허욕虛慾에의 승리입니다.
매 순간마다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도 참 조마조마했을 것입니다. 유혹하는 악마와의 영적전투에서 말씀에 의한 예수님의 통쾌한 3:0의 영적승리입니다. 참으로 아담의 실패를, 사십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를, 영적패배를 일거에 만회한 예수님의 쾌거에 하느님께서도 참으로 흡족해 하시며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갑니다. 예수님은 물론 우리와 악마와의 영적 전투는 인류가 존속하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악마의 유혹을 없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악마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악마의 유혹이, 시험이 없으면 영적성장도 없습니다. 그러니 악마의 유혹을, 악마와의 영적전투를 영적성장, 영적승리의 계기로 삼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또 성령과 기도, 말씀의 무기로, 우리 모두 불퇴전不退轉의 주님의 전사가 되어 백전백승百戰百勝의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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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이끌리고, 유혹받고, 구원받는>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점은 이스라엘 백성과 주님께서 이끌리어 광야로 간다는 것이고 거기서 시련과 유혹을 받는다는 것이며 그리고 마침내 구원을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여기 동사들의 공통점은 피동적입니다.
이끌리다.
유혹받다.
구원받다.
인도자가 있어서 이끌리고 유혹자가 있어서 유혹받고, 구원자가 있어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도자와 유혹자와 구원자가 실은 다 같은 분이십니다. 유혹자는 인도자와 구원자와 다른 분일 것 같은데 같은 분 하느님이십니다.
제가 여기서 실은 다 같은 분이라고 얘기했는데 마귀가 유혹자이지만 실은 성령께서 유혹받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유혹받으시는 데 있어서 성령과 악력은 협력자였습니다.
성령께서 악령의 유혹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구하실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데 이것은 이런 우리 믿음을 완전히 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믿음과 다른 성숙한 믿음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유혹에서 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구하신다고, 더 정확히 말하면 악이 아니라 죄의 악에서 구하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유혹이 일단은 악 곧, 나쁜 것이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일단은 악이라는 것은 이단이나 삼단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일단 곧 믿음 성숙의 일 단계는 유혹이고 시련을 받는 것입니다.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것은 유혹과 시련을 거쳐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주님의 유혹 얘기는 근동 지방 성년식 과정과 같습니다. 근동에서 성년식을 할 때가 되면 아이를 광야로 내몰고 그것을 이겨내는 과정을 거쳐야만 어른이 되고 성년식을 거행하잖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흔들리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제가 형제들을 양성할 때도 마구 흔드는 짓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마구 흔들어댔으니 그때의 저는 양성자에게 아주아주 나쁜 놈이었지요.
그런데 실은 나쁜 놈 악마가 아니었고 양성자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소를 흔들 때 양성자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꽉 붙잡고, 흔들수록 더 꽉 붙잡지요. 그렇게 꽉 붙잡도록 저는 흔들어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흔들어서 떨어지는 사람은 성소에 대한 열망과 의지가 부족하고 성소를 이어갈 힘도 끈기도 부족한 표시이니 일찌감치 포기하게 한 것입니다.
지금도 성소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그냥 잘해줍니다. 그러다가 입회를 표명하면 성소자 관리에 들어가고, 수도자가 될 만한지 시험하고 흔들어대는데 지금의 저는 마음이 약해져서 옛날만큼 마구 흔들어대지 못하고 살살 흔듭니다.
그래서 저를 반성합니다. 마음이 약해진 것이 아니라 사랑이 약해진 것이 아닌지. 더 모질게 흔들어대고 그러면서 시련을 같이 견뎌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일단은 시련을 주지만 그것이 단련의 이 단계로 넘어가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이 단련의 이 단계를 거쳐 승리의 삼 단계로 가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또 다른 반성도 합니다. 나는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인지. 성령에 이끌리어 유혹받는 사람인지. 성령과 함께 악령과 싸워 승리하여 구원받는 사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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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루카4,1ㄴ-2ㄱ)
<말씀의 힘!>
오늘 복음(루카4,1-13)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악마에게 세 번에 걸쳐 유혹을 받으셨는데, 이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십니다.
악마의 첫 번째 유혹은, '빵에 대한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 동안 단식하여 극도로 시장하셨음에도,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8,3)는 말씀으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악마의 두 번째 유혹은,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보여주면서, 나를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는 '권세와 권력과 영광에 대한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 너희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신명6,13)는 말씀으로 악마의 요구를 물리치십니다.
악마의 세 번째 유혹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보라'는 '예수님을 시험하는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신명6,16)는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119,105)
"당신은 저의 피난처, 저의 방패 저는 당신 말씀에 희망을 둡니다."(시편119,114)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히브5,12)
하느님의 자녀들은 성경 말씀을 가까이하고, 읽고 쓰고 묵상합니다. 예수님처럼 악마의 유혹을 말씀의 힘으로 물리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1베드5,8)
'믿음과 기도와 말씀 안에서' 깨어있도록 합시다!
/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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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루카 4, 2)
사순(四旬)시기는
특별히
삶의 본질을
우리 삶에서
만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유혹이 있고
또한 광야가
있습니다.
유혹이 있기에
기도가 있고
광야가 있기에
하느님을 찾는
우리의
성장이 있습니다.
유혹을 통해
우리의
믿음은
더욱 깊어집니다.
하느님을
더욱
신뢰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우리의
교만을 내려놓고
말씀의 양식을
받아 먹습니다.
하느님의 자리를
결코 침범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사는
우리들
여정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광야에서
유혹을
체험하십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을
내맡기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우리의 사명을
뜨겁게 만나는
광야입니다.
물질에 대한
권력에 대한
명예에 대한
유혹이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진정 살아있음이
인간의 욕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음을 깨닫는
사순입니다.
말씀의 관계이며
섬김의 관계이며
내어맡김의
관계입니다.
유혹을 받는
삶의
광야에서도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더욱 깊어지는
사람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
악마에 대처하는
지혜와 사명을
만납니다.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여정을
막을 수 없듯이
말씀이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행복한
사순의 여정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덧없는 것을
물리치는
사순
제1주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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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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