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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카인드 / 뤼트허르 브레흐만
Chapter1
새로운 현실주의;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도전
쏟아지는 잠을 부여잡으며 <휴먼카인드> 첫 장을 열었다. 대외적으로는 성무선악설을 믿는다고 떠들지만 솔직히는 성악설을 쬐금 더 신뢰하는 내게 "사람들의 내심이 무척 고상하다'는 주장은 무지 신선했다. 아무래도 내가 늑대에게 밥을 너무 많이 준 것 같다. 하지만 뉴올리언스에서 일어난 재난에 대한 리베카 솔닛의 통찰은 신랄했다. “역경에 처하면 그에 대응해 협력의 물결이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당국은 당황해 2차 재난을 일으킨다” 재난을 바라보는 시각이 꽤 신박했지만 급 궁금해진다. 사람이 이타적이냐, 이기적이냐는 위치 (혹은 지위, 계급 따위)에 따라 달라지는 건가? 하는 물음이 남는다.
Chapter2
파리대왕; 진실은 소설과 정반대였다
진실은 소설과 정반대였다고? 근거가 다소 부족해 보인다. 완벽히 같은 조건이 아니므로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을까? 소년들의 표류 계기나 소년들 개개인의 개성이 다르므로. 좀더 다양한 대조군이 있어야지 않을까. 성급하게 일반화시킨 듯한 느낌이다.
Chapter3
호모 퍼피; 가장 우호적인 존재의 탄생
3장 시작하면서 저자는 아타섬에 남겨진 소년들의 이야기가 동떨어진 하나의 일화에 불과한 게 아님을 더 많이 증명해 보이겠다고 한다. 3장은 <사피엔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그리고 <이기적 유전자>의 절묘한 짜깁기다. 가장 우호적인 자가 생존한다, 우호적인 자는 지능도 뛰어나다, 학습과 모방은 교류와 협력을 이끈다. 연결된 자가 살아 남는다.
Chapter4
사격을 거부하는 병사들; 전쟁은 본능이 아니다
저자의 주장은 한마디로 ‘야만인은 고결했다’는 거다. ‘전쟁의 기원을 한없이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지만 시작이 있었다‘는 끝맺음으로 문명 사회가 전쟁의 시작이라고 곧 말할 것 같기도 하다. 인류의 본성이 본래 폭력적이었냐 아니냐를 주제로 한 인류학자들의 갑론을박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얄 것 같은데… 굳이 결론을 내려고 애쓰는 모습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학자들의 기싸움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무튼 스티븐 핑거가 무지 발리는 걸 보니 세상엔 절대진리란 없구나 새삼 깨닫는다.
Chapter5
문명의 저주; 권력자가 만들어낸 상상
‘고도화된 문명은 인류에게 득이 될 것인가, 해가 될 것인가’하는 논제는 중고등 논술에서 단골 주제이다. 마침 허버트 조지 웰스의 <타임머신>이라는 작품으로 수업을 한 적이 있어서 ’문명의 저주‘편은 그와 연계해 생각해 볼 지점들이 많았다. <타임머신>은 서기 802701년, 먼 미래를 사는 두 종족의 극단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간의 갈등으로 결국 인류는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는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럼에도 희망적인 ‘무언가’를 찾는 일이다. 두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나는 그렇게 읽었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든 악하든 중요하지 않다, 인간의 본성에서 희망적인 모습을 발견하는 도전이 있을 뿐이라던 어느 구절이 기억에 남는다. 책 초입에 ‘인간 본성에 대한 비관적 인식은 현실의 또 다른 덫이 된다’라고 적힌 구절도 인상적이다.
Chapter7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의 진실; 그곳에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Chapter8
스탠리 밀그램과 전기충격 실험; 의도된 결말
여러 실험에 동원된 사람들과 아이히만은 스스로가 선을 행한다는 믿음 때문에, 선으로 위장된 악을 따랐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람마다, 시대마다, 처해진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선’의 기준을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선과 정의는 늘 어렵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악한 본성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자극적인 실험에 열광했다.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이 그랬고, 스탠리 밀그램 실험이 그랬다. 인간 본성에 관한 센세이션한 실험을 끊임없이 설계하는 학자들이 있고, 비판 없이 대응하는 대중들이 있었다. 요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튜브는 말할 것도 없고, TV를 틀면 기획 의도가 모호한 관찰 예능들이 쏟아져 나온다. 선정적인 리얼리티 예능이 출몰하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세태가 내겐 별반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Chapter9
캐서린 제노비스의 죽음; 언론이 만든 ‘방관자 효과’
다윈주의가 처음 발표됐을 때도, ‘이기적 유전자’ 책이 나왔을 때도 사람들은 각자의 이념이나 정치적 목적으로 그 진의를 마구 곡해했다. 그 선두엔 늘 언론이 있었다. ‘기레기’란 비하 표현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님을 알면서도 대중들은 여전히 가짜 뉴스에 휘둘리고 있다. 인간의 본성이며 행동이 ‘~이론’ 혹은 ‘~효과’ 따위로 일괄적으로 묶이는 것 자체를 경계해야지 않을까.
Chapter10
공감의 맹목성; 거리가 멀어질수록 공격은 잔인해진다
이 책도 반쯤 온 것 같다. 나치 부대원들이 보여준 잔인성,전쟁에 참여한 모든 병사들이 쏘지 못한 총과 휘두르지 못한 칼은 다정함과 배타성이라는 ‘공감’의 양가로 설명하고 있다. 둘다 뇌의 신경물질인 옥시토신과 관련이 있다는 말,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 지겹도록 들었던 말이다. 이쯤에서 나름의 정리를 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차고 넘치는 사례 속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인류의 본성은 선하거나 악하다. 다시말해 절대적이지 않다. 단지 인류는 스스로를 가축화하는 길을 선택했다. 왜? 그래야 오래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다정함’이란 본성이라기 보다는 인류의 생존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전략이 유전자에 각인되기도 했을 것이다. 단, ‘다정함’을 ‘절대 선’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저 생존에 유리한 형질일 뿐.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득한 미래엔 ‘다정함’의 전략이 무너지고 ‘폭력성’이라는 전략이 생존에 먹히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그 역시 ‘절대 악’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럼 인류가 선택한 ‘다정함’ 전략에 위배되는 수많은 폭력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학자들이나 기자들에 의해 조작돼 사건의 본질이 흐려지기도 하고, ‘다정함’이 지나쳐 배타적인 감정으로 왜곡되기도 한다. 물론 원래 사이코패스들도 있다.
Chapter11
권력이 부패하는 방식; 후천적 반사회화
Chapter12
계몽주의의 함정; 비관주의와 자기층족적 예언
친절함 혹은 다정함을 유지시키기에 적절한 방식으로 인류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를 만들어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내두르는 권력자는 늘 존재해왔고 이를 견제하기 위해 민주주의라는 완벽해 보이는 분산형 권력 시스템을 고안해 냈지만 알고보면 민주주의에도 한계는 있다. ‘선출된 귀족주의’라는 이름만 다른 권력형 시스템이라는 점,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늘 후안무치 정치인은 등장한다는 점, 권력에 납짝 엎드려 대중의 눈과 귀를 호도하는 언론이 등장했다는 점. 계몽주의도 마찬가지다. 계몽주의는 이성의 힘으로 민주주의, 법치주의, 자본주의를 탄생시켰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라는 전제를 내재하는 모순을 가졌다는 것이다. 온 인류가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완성해 낸 제도가 근본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니, 과연 인간의 본성에 대해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운영될 수 있는 제도가 있기나 한 걸까? 물론 민주주의를 이상적인 사회의 종착역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다정함을 추구하는 인류의 본성에 대체로 가깝다고만 생각했는데…. 모처럼 뒤에 나올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Chapter13
내재적 동기부여의 힘; 경제적 보상의 한계
Chapter14
놀이하는 인간; 우리 안의 무한한 회복탄력성
13, 14장에서는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 운영되는 가정건강돌보미 조직 ‘뷔르트조르흐’와 놀이 학교 ‘아고라’를 소개하고 있다. 단순한 일을 최대한 복잡하게 만들어 업무에 업무를 가중시키고, 신뢰 부재로 각종 부정에 대한 안정장치를 구축함으로써 조직은 터무니없이 비대해진다는 관료제의 맹점은 수긍할 수 있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구조화된 학교는 아이들이 노는 법을 잊게 만들고, 아이들 사이에 균열을 만든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왜 나는 두 조직이 지나치게 이상적이어서 현실에는 존재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까? 인간 본성에 대한 뿌리 깊은편견으로 내재적 동기 부여를 불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 중 어느 것도 진실이 아니다. 따라서 가능한 한 진실에 가까워지려면 확실성을 피하고 매 단계마다 스스로에게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의심하려는 의지를 가져라!” 러셀의 말을 새기는 게 먼저겠다. <휴먼카인드>는 분명 반론의 여지가 많은 책이지만, 내 생각을 의심케 하는 책인 것도 분명하다.
Chapter15
이것이 민주주의다; 민주주의의 일곱 가지 재앙을 넘어
기대가 너무 컸나. 제일 기대한 장이 15장이었는데, 김이 새고 말았다. 일단 정치적 개념인 민주주의와 공유라는 경제적 개념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또 공유지와 공동체를 운영하는 이상적인 원리로 참여와 토론을 거론할 때는 그럼 그렇지… 하는 심정이랄까. 공유지와 히피 공동체, 알래스카 영구 기금 등이 자본주의의 ‘보완적‘ 개념은 되겠지만 ’대안적‘이라고 보기에는 회의적이다. 그야말로 소규모 공동체에 적용 가능한 ‘일상적 공산주의’, 딱 거기까지!
Chapter16
테러리스트와 차 한잔; 가장 저렴하고 현실적인 방법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할렌, 바스퇴위 감옥’은 꼭 기억해 두고 싶다. ‘촉법소년의 나이를 낮추자’는 안건으로 토론을 하면 의외로 많은 아이들이 ‘찬성’에 손을 든다. 범죄는 이유를 불문하고 엄단하는 게 이치라고 생각하는 친구들에게 오슬로 감옥 이야기는 어떻게 들릴까. 더 많은 사람을 더 열악한 감옥에 가두는 미국, 거기에 전 세계 교도소 인구의 1/4 이 갇혀 있다는 사실도 덧붙여야겠다.
‘질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 우리도 한때는 도로의 주인이 ’차‘였던 시절이 있었다. 육교가 즐비하고, 무단횡단 하는 사람을 치욕스럽게 단속하던 웃지 못할 일도 많았다. 시대가 변하고 도로의 질서가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잡히면서 육교가 사라지고 횡단보도는 늘어났다. 이제는 ‘보행자 우선‘ 도로 질서 유지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는다. 인식이 바뀌면 제도도 바뀌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의 선한 본성에 기댄 인식 변화, 이것을 말하고 싶은 거겠지.
Chapter17
혐오와 불평등, 편견을 넘어; 접촉의 위력
Chapter18
참호에서 나온 병사들; 희망의 전염성
영국의 경우, 지역사회가 문화적으로 다양하지 않은 곳일수록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비중이 높다는 사실과 네덜란드에서 백인 거주자 밀집 지역의 포퓰리즘 정당 지지 비율이 높다는 점은 유의미하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외부 문화와의 교류가 적고, 농업 중심 산업에 종사하는 중부 레드넥일수록 트럼프의 지지율이 높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에 타문화에 관대한 ‘척’, 오픈마인드인 ‘척’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나는 배운 사람이니까, 나는 책을 많이 봤으니까, 나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이해하고 있으니까 얼마든지 그런 ‘척’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동네에 이슬람 사원이 건립되고, 옆 동네에 예멘 난민의 정착촌이 들어올 예정이며, 이주노동자들의 커뮤니티가 터를 잡는다고 하면… 가슴으로도 환대할 수 있을까. 부끄럽지만 자신이 없다. 더 많은 교류의 경험과 접촉의 기회가 가슴도 움직이게 할까? 음… 인종 차별과 보복 테러로 하루가 멀다하고 총격이 벌어지는 미국, 거기가 인종의 용광로라고 하지 않았던가?
에필로그; 삶에서 지켜야 할 열 가지 규칙
“결국 대부분의 사람이 예의바르고 친절하다고 우리가 믿는다면 … 학교, 교도소, 사업과 민주주의를 조직하는 방법을 완전히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결론은 이거다.
다소 이상적이고, 현실성이 없어 보이는 정책이나 슬로건의 기저엔 ‘인류에 대한 희망적인 기대’가 깔려 있다. 북유럽 어딘가에는 수감자들이 출퇴근할 수 있는 교도소가 있고, 주말 혹은 주중에만 수감이 되는 감옥이 있다. 수감의 목적을 교정에 두면 이렇게 유연한 형벌 제도가 생길 수 있다. 범죄자의 격리가 수감의 목적일 때 감옥의 담장은 높아지고, 형벌은 비인간적인 수단이 되는 것이다. 북유럽의 다양하고 실험적인 복지 정책 또한 인류의 선한 본성에 기댄 미래의 청사진일 것이다.
우리는 새롭게 생기고 사라지는 법과 제도를 따질 때 그 개념과 논리를 따지기에 앞서 ‘목적’을 보아야 한다. ‘법(혹은 제도)은 이래야 한다’가 아니라 ’법 (혹은 제도)은 이렇게 만들어졌다‘를 따져 물을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휴먼카인드> 가 결국 말하고 싶은 것이 이게 아닌가 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12명의 성난 사람들> 이라는 영화 한 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숙의의 지난한 과정이 다수결을 이기고, 편견을 넘어 진실에 가까이 간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이다. 이 역시도 ’인간에 대한 희망을 전제로 한 집단 지성의 힘은 세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다는 점에서 <휴먼카인드>와 닮은 꼴이라고 생각했다. 기회가 되면 한 번 꼭 보길 강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