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마이뉴스 2003-03-05 14:42] |
|
보수 우익은 보수우익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젊은이들을 비판해왔다. 아니, 비판해왔다기보다는 최소한의 독립적인 인격적 존재로 보지 않는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새로운 세대,젊은이들이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존재,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불완전한 존재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행동이나 사고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칼럼과 사설에서 항상 씹히는 존재가 된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물론 다른 데 있다. 젊은이들의 기성세대와 체제에 대한 비판과 도전의 예봉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포석인 셈이다.
상대적으로 기성체제에 저항적인 좌파는 좌파 성향의 매체를 통하여 젊이들의 비판적 사고와 행동에 긍정적인 무게를 두는 것이 보통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모습도 옛말이 되었다. 좌파에서 조차 요즘 젊은이들에 대한 비판이 가차없이 가해지고 때로는 난도질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기존의 좌파들의 기준에 요즘 젊은이들의 사고와 행동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판이 본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홍세화는 대학가의 좌파 주간 신문인 대학생신문 2월 18일자에 칼럼을 실었다. 제목은 <그대 이름은 '무식한 대학생'> 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대학생들을 가히 일방적으로 질타하고 있다. 기준은 무식/유식이다. 이는 지식이 있고 없음, 알고 모르고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은 유식하고 지식을 많이 알고 있음을 말한다. 또한 나는 알고 있는 데 우리는 잘 알고 있는데 너는 모른다는 논리가 날카롭게 서있다.
무엇보다 그 이전의 전제는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다니던 시절의 대학생과 요즘의 대학생들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전의 대학생은 문제가 없으며 요즘의 대학생은 문제 덩어리라는 전제가 있어야 글이 이루어진다. 이는 보수 우익, 기성세대가 단골로 써먹는 것이며 세대론이라는 허구덩어리를 만들어내는 이들이 자주 애용하는 논리이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만 전제 할 수 있는가 홍세화의 글이 가차 없이 이루어졌으므로 가차 없이 하겠다. 오버하겠다는 것이다.
홍세화는 다음과 같이 글을 시작한다.
그대는 대학에 입학했다. 한국의 수많은 무식한 대학생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지금까지 그대는 12년 동안 줄세우기 경쟁시험에서 앞부분을 차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영어 단어를 암기하고 수학 공식을 풀었으며 주입식 교육을 받아들였다. 선행학습, 야간자율학습, 보충수업 등 학습노동에 시달렸으며 사교육비로 부모님 재산을 축냈다. 그것은 시험문제 풀이 요령을 익힌 노동이었지 공부가 아니었다. 그대는 그 동안 고전 한 권 제대로 읽지 않았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했다. 그대의 대학 주위를 둘러 보라. 그 곳이 대학가인가? 12년 동안 고생한 그대를 위해 마련된 '먹고 마시고 놀자'판의 위락시설 아니던가.
이러한 대학생의 모습은 비단 오늘날의 문제는 아니다. 아니 점점 한국의 교육은 입시교육에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다. 그 정도는 원칙적인 교육의 개혁을 바라는 이들에게 턱도 없지만 60년대, 70-80년대 학교를 다니던 사람들보다 현재의 학생들이 더 나은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아직도 입시교육 수동적인 교육의 맹위는 일방적으로 학생들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성세대와 체제가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강고하게 유지하고 있기 때문임을 분명하게 해야한다.
지겹도록 학습 노동, 아니 찍기, 암기 기계화시킨 것은 학생 자신들이라기보다는 기성세대다. 부모의 재산을 축내고 싶어 축낸 것이 아니다. 고전을 읽고 싶지 않아 읽지 않은 것이 아니다. <대학에서 먹고 마시고 놀자>하고 싶어서 그런게 아니다.
왜 그들에게 한을 쌓이게 하는가가 중요하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시대 젊은이들에게 과거의 사람들보다 희망이, 꿈이 더 있다고 아니, 비슷하게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없다. 네명중 1명은 백수고 평생을 돈 모아도 자기 몸누울 공간 마련하기 힘들다. 당연히 좌파라면 젊은이들이 처한 사회경제적인 하부구조를 먼저 보아야 한다. 책임을 대학생에게 묻는 쉴새 없는 질타, 홍세화는 이런 일방적인 규정을 계속한다.
그대가 입학한 대학과 학과는 그대가 선택한 게 아니다. 그대가 선택 당한 것이다. 줄세우기 경쟁에서 어느 지점에 있는가를 알게 해주는 그대의 성적을 보고 대학과 학과가 그대를 선택한 것이다. '적성' 따라 학과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성적' 따라, 그리고 제비 따라 강남 가듯 시류 따라 대학과 학과를 선택한 그대는 지금까지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은 고전을 앞으로도 읽을 의사가 별로 없다.
영어영문학과,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한 학생은 영어, 중국어를 배워야 취직을 잘 할 수 있어 입학했을 뿐, 세익스피어, 밀턴을 읽거나 두보, 이백과 벗하기 위해 입학한 게 아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어학원에 다니는 편이 좋겠는데, 이러한 점은 다른 학과 입학생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인문학의 위기'가 왜 중요한 물음인지 알지 못하는 그대는 인간에 대한 물음 한 번 던져보지 않은 채, 철학과, 사회학과, 역사학과, 정치학과, 경제학과를 선택했고, 사회와 경제에 대해 무식한 그대가 시류에 영합하여 경영학과, 행정학과를 선택했고 의대, 약대를 선택했다.
성적에 따라, 암기형 입시를 치루어 대학에 억지로 가는 것 또한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홍세화가 중고등학교 다니던 때와 비교한다면 오히려 지금의 세대들이 다양한 학과에 진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뿐만아니라 고전을 읽는 학생들은 근래 어쩌면 과거보다 많아졌다. 그만큼 예전의 획일적인 교육보다는 많은 면에서 여러 부분을 열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도권 교육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 전교조 교사들과 같은 이들의 피나는 노력때문이다. 이들의 행동은 긍정적인 효과를 내고 있다.
홍세화의 눈으로만 보자면 교육이 한없이 후퇴하고 학생들도 한없이 퇴행한 것으로만 보인다. 그러나 고민의 대상이 오로지 고전밖에 없었던 기성세대의 눈에는 성이 차지 않으리라. 젊은이들의 고민과 삶은 고전에만 있지 않다. 다양한 문화적인 코드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러한 코드에 따라 관심분야가 넓어졌다. 전공을 두 세개 하는 것은 기본이 되어가고 있다. 매체의 다양성으로 그들의 관심분야는 상상을 초월한다. 이는 대학생이 가졌던 과거의 관심분야에서 다양하게 이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70-80년대 거대담론만 기대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것이다.
아니, 여기에서 한 가지 물어보자. 기성세대가 고전에 매진해서 유식하다면, 고전에 그렇게 매진했던, 유식한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에게 만들어 물려 주려는 나라는 어떤가.
독재 권력의 잔재, 세계최고의 부정부패, 망국적인 지역주의, 족벌기업과 언론, 천박한 자본주의, 지긋지긋한 학벌주의 아니었나. 이 속에서 젊은이들이 고통을 받고 있지 않나. 이러한 문제들을 만들고 이어주는 기성세대의 처지에서 다음과 같이만 이야기할 수 있나.
한국 현대사에 대한 그대의 무식은 특기할 만한데, 왜 우리에게 현대사가 중요한지 모를 만큼 철저히 무식하다. 그대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민족지'를 참칭하는 동안 진정한 민족지였던 <민족일보>가 어떻게 압살되었는지 모르고, 보도연맹과 보도지침이 어떻게 다른지 모른다. 그대는 민족적 정체성이나 사회경제적 정체성에 대해 그 어떤 문제의식도 갖고 있지 않을 만큼 무식하다.
무식하게 만든 것은 본인들이 아니지 않은가. 새로운 세대는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다. 기성세대의 연장이다. 기성세대 중에는 위에 인용한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홍세화의 논리대로라면 기성세대는 이러한 부분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알고 있다는 것 아닌가. 불행하게도 기성세대 조차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게 태반이다. 이는 결국 '젊은이들만 모르고'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90년대 이후, 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한국 사회는 급격한 혼란을 겪게 되고 이는 좌파뿐만 아니라 대학가의 분위기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변화의 가운데 이데올로기에서 문화로 주목의 대상이 바뀌게 된다. 그래서 문화연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실제로 다양한 문화적인 코드들이 존재하게 된다. 과거에는 거대 담론으로 하나의 준거점으로 묶여졌다. 이에비해 대학문화가 다양한 지형, 무수한 소수의 그룹으로 나뉘어 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와 같은 큰 덩어리는 보이지 않음으로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홍세화는 그 파편화 일부분만을 지적한다. 다음이다.
그대는 무식하지만 대중문화의 혜택을 듬뿍 받아 스스로 무식하다고 믿지 않는다. 20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읽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무식하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지금은 대중문화가 토해내는 수많은 '정보'와 진실된 '앎'이 혼동돼 아무도 스스로 무식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물며 대학생인데!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에 익숙한 그대는 '물질적 가치'를 '인간적 가치'로 이미 치환했다. 물질만 획득할 수 있으면 그만이지, 자신의 무지에 대해 성찰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대중 문화의 가장 치명적인 부분, 가장 비판받는 부분은 자본주의 소비문화의 총아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전적인 문화연구의 시각에 속한다. 신좌파의 연구는 그러한 소비 문화 속에서 사람이 능동적으로 어떻게 주체적 능동적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가를 세밀하게 보는데 집중하고 있다. 대중문화가 문화를 돈에 종속시켜 사람을 수동화, 상품화시키는 것은 기본 전제이다. 이를 넘어 지금은 다양한 반 자본 코드들이 다양하게 미시적으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황석영은 지난 해 귄터그라스 초청 토론회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들은 반미의 기수로 나를 지목했다. 또 한가지 예가 있다. 나는 구시대 작가이다. 내가 감옥에서 나왔을 때 사람들은 황석영의 시대는 갔다고 했다. 그런데 <오래된 정원>이나 <손님>이 수십만부 팔렸는데 그 구매자의 대부분이 젊은이들인 것으로 알고 있다. 통일운동, 반미운동 등등 많은 부분이 마찬가지이다. 나의 소설에 그들에게 맞는 코드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무엇인가 맞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내 소설을 읽을 것이다. 서로 코드를 끊임없이 맞추는 노력이 필요하다.그래야 진보운동이 다시 생명력을 가진다"
대학생이 얼마나 무식한 지를 이야기하며 행동의 변화를 촉구하는 홍세화의 논지보다는 황석영의 논지가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젊은이들은 새롭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고 그들이 별종은 아니다. 이전 시간의 경험적 총체이다. 그러한 기준이 기본의 진보의 도식에 맞지 않는다거나 지식체계에서 어긋난다고 하여 무식하다고 비난하여 규정할 수는 없다. 항상 변화는 표면이 아니라 저류를 통해 형성되고 그것이 결정적일 때 분출한다. 중요한 것은 그 저류의 코드가 무엇이냐를 끊임없이 모색하는 것이고 이는 보완, 촉매 역할에서 중요한 지식인들에게는 더욱 해당하는 것이다.
지금은 과거와 같은 도식으로는 구분과 구별이 되지 않은 다양한 코드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언제나 끊임없이 코드를 맞추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진보는 이루어진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결론은 모든 것을 대학생, 아니 젊은이들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보수우익, 기성세대 논리와 다를게 없다.
"그대의 이름은 무식한 대학생. 그대가 무지의 폐쇄회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좋은 선배를 만나고 좋은 동아리를 선택하려 하는가, 그리고 대학가에서 그대가 찾기 어려운 책방을 열심히 찾아내려 노력하는가에 달려 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지금 대학생과 젊은이들에게 신자유주의가 사정없이 몰아치고 있는 가운데 자본주의에 가장 비판적이라는 좌파 기성 세대가 젊은 세대들에게 보여준 타당한 준거틀이 있는지 의문이다.
유럽이 어떠니 맑스가 어떠니 하며 다른 나라. 책 속의 이야기만 하면서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한국의 자본주의에 대해서 분석할 수 있고 문제의식을 가지고 대응할 수 있는 논리를 구성했다고 생각하는가. 결국 그것도 새로 태어나는 이들이 책을 보며 해야 할 일이라고만 할 것인가. 유식한 이로써, 있어야 질타할 자격이 있지 않나.
고전을 중요시 하고 인문학을 하며, 그렇게 유식하다는 이들이 태어날 때부터 한국 자본주의의 상품화의 한 가운데 있게 되는 새로운 이들에게 과연 무엇을 보여주었는가. 태어날 때부터 선택의 틈도 없이 인간성, 생명성을 상실하는 사회에 나뒹구는 새로운 이들에게 무식하다고만 할 때인가!
문제는 코드 맞추기이다. 이것도 무식이다. 유식/무식의 이분법은 더 무식하다. 오버한 점, 읽는 분들에게 죄송스럽다.
첫댓글 어찌됐든 저찌됐든 일단 입시구조를 바꾸자;
입시구조를 바꿀께 아니라 제발 한가지로 꾸준히 했으면,.,.
나 진짜 슬프지만 우리나라 입시제도는 평생가도 안바뀔듯...울나라 정치상황도 경제상황도...아 희망없이 살아가는 내 자신이 밉지만 희망을 갖기 힘들게 만들어지는 우리나라의 총체적인 모든 제도들이 원망스럽다
글쓴이가 누군지 나와있지 않은데..기성세대에 비해 책도 적게 읽고 인터넷보고서 그게 '진실'이라고 믿는 수많은 젊은이들은 현실이지 않나요. 기존 좌파가 맑스를 읽고 어떤 해답을 내놓은건 아니지만 그들은 그들의 젊음을 치열하게 보냈다고 생각하는데요..요즘 대학생들이 무식하다는건 단순한 지식의 유무를 뜻하는게 아니라 어떠한 의식을 가지고 있냐, 정체성을 가지고 있냐 아니냐 이런 말 같네요.
2222222222222222222222222222
이런 나라를 만든건 기성세대가 만들었다는 걸 알면서 모른척 하는걸까 아님 진짜 모르는걸까 그것도 아님 부정하는건가?
하고 싶었던 변명을 업그레이드시켜 해 줘서 고맙긴 하지만, 그래도 홍세화씨의 말에 더 공감이 가는 건 내가 지금 외국어공부나 취업준비 대신 하고 싶은 공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못하는 데 대한 아쉬움때문인 것 같3
음? 앞글은.. 문제의식 없이 수동적인 대학생을 비판한 글인데.. 이 글은 뭔가 붕 뜬 느낌.. ;
유럽이 어떠니 맑스가 어떠니 하며 다른 나라. 책 속의 이야기만 하면서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한국의 자본주의에 대해서 분석할 수 있고 문제의식을 가지고 대응할 수 있는 논리를 구성했다고 생각하는가. 결국 그것도 새로 태어나는 이들이 책을 보며 해야 할 일이라고만 할 것인가. 유식한 이로써, 있어야 질타할 자격이 있지 않나. ←이건 학계와 교육계의 근본적인 문제점이죠. 앎의 의지를 앞 세대보다 상실하고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질타할 수 있는 자격은 학계의 병폐를 개선할 책임이 없는 사람 아니라도 주어지지 않나요-_- 이 글엔 글쓴이 이름도 없어.
제가 보기에는 둘 다 똑같은 것 같구만..뭘 지들끼리 저리 결국 같은 얘기만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