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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들어 차기 대선에 당선이 유력시되는 박근혜 의원에 대한 정체성에 의문을 표하는 글들이 참으로 끈질기게 퍼지고 있다.
그중에는 그럴듯한 내용의 글들도 있고 허무맹랑할 정도의 음해성 글들도 많이 있는듯 하다.
글을 쓰거나 옮기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나라를 걱정해서 그런다면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겠으나 혹시 반대쪽에 서서 다음 대선에 어찌해 보려는 사람들 편을 들거나 이들의 사주를 받아 하는 일이라면 참으로 우려되는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그녀에 대해 거론되는 일중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다음의 일들이다.
1. 2002년도에 대통령 특사로 김정일의 전용기로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을 만났다.
(예술공연을 관람, 6.15선언 동조발언, 상호협력 논의)
2. 김대중에게 부친인 박대통령이 탄압한 것에 대해 사과했다.
3. 햇빛정책 옹호발언을 했다.
4. 중도성향 발언을 했다.
5. 북한주민의 인권에 대해 침묵한다.
6. 천안함 사건 및 연평도 포격에 대해 침묵했다.
위에 열거한 내용중 5, 6번 사항은 순전히 음해로 판단된다.
박근혜는 지난 좌파정권 10년동안 국가보안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북한주민인권법의 제정에도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아마 그녀가 아니었으면 국가보안법은 벌써 폐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천안함과 연평도 포격시에도 분명한 입장표명을 했었다.
(‘연평도 포격’에 가장 발 빠르게 대처한 것은 박근혜 전 대표였다. 박 전 대표는 연평도 포격이 일어난 바로 다음날인 11월 24일 당내 이공계 의원들과 오찬에 앞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자위권 차원에서 대응해야 한다”면서 “도발에는 반드시 큰 댓가가가 따른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줘야 한다”고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합동분향소를 찾은 다음날인 25일에는 “안보를 튼튼히 해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고 재차 강조하기도 했다.)
국회의원의 입장으로 이정도의 발언 외에 더 이상을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단지 그녀의 발언이 대다수의 정치인들의 발언처럼 립서비스에 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럼에도 이를 물고 늘어지는 사람들은 그녀가 단독으로 총을 들고 북한에 쳐들어 가기라도 바라는 것일까?
다음에는 그녀의 정체성 논란이다.
어쩌면 그녀보다 더 험난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도 드물것이다.
23세의 어린 나이에 문세광의 총탄에 모친을 잃고 28세 때는 부친인 박대통령 마저 총탄에 잃어야 했다. 전장이 아닌 상황에서 부모를 모두 총탄에 잃는 너무나 기가막힌 상황에 처한 것이었다.
모친의 죽음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부친을 잃을 때까지 5년동안 모친을 대신하여 퍼스트 레이디로 살벌한 정치판을 헤쳐 나가야 했다.
흔히 부모의 죽음을 천붕(天崩)이라 표현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슬픔이란 말이다.
두 번씩이나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그것도 흉탄에 부모를 잃으면서 헤쳐온 기구한 삶이다.
그런 상황속에서도 부친인 박대통령이 사망했을때는 맨처음 한 소리가 “휴전선은요?” 였단다.
많지 않은 나이에 보통사람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김정일과 김대중의 적화통일 음모가 무르익던 좌파정권 시절에는 굳건히 천막당사를 지키며 우리 안보의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는 국가보안법을 끝까지 지켜냈다.
이런 사실들만 해도 충분히 박근혜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은 해소가 되고도 남는다.
그녀가 북한을 방문했던 2002년은 김대중의 임기중 마지막 해였다.
과연 김대중이 무슨 마음을 먹고 그녀를 특사로 보냈을까?
김대중은 김일성에게 요청하여 문세광으로 하여금 그녀의 모친을 죽게 한 철천지 원수이다.
김대중에게도 박근혜는 껄끄럽기 그지없는 원수의 자식이다.
이미 그때에는 김대중이 완벽하게 적화통일을 위한 준비를 마쳤을 때였다.
대한민국이 적화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 것이 어쩌면 기적같은 일이라 할 수 있다.
(http://blog.naver.com/volcof/130066877164 : 전.현직 국가 정보원이 드리는 시국 선언문)
아마도 김대중에게 박근혜는 적화통일의 마지막 걸림돌이었을 것이다.
만약 그때 박근혜가 뻣뻣이 고개들고 자기 목소리를 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 쥐도새도 모르게 제거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왜 하필 김대중은 야당의 일개 국회의원이었던 박근혜를 북한에 특사로 보냈을까?
두가지 의미로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첫째는 가장 껄끄러운 관계이지만 자신을 적대적으로 대하지 않아 여론상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박근혜를 북한에 보내어 김정일의 처분을 바라는 떠넘기기와 동시에 자신의 적화통일 노선에 걸림돌이 될지 여부를 김정일이 판단하게 하고자 한 것이고,
둘째는 박근혜를 북한에 보내어 북한으로 하여금 제거하고자 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박근혜는 적국에 가서 철천지 원수인 적장의 앞에 홀로서야 했다.
그때 과연 어찌했어야 할까?
주위에서 권한대로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꼬리를 빼야 했을까?
아니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부모를 따라 순국이라도 했어야 할까?
혹자는 전용기까지 보내서 귀빈대접을 했다고 말들이 많지만 김정일이 전용기를 탔었다는 말은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몇시간씩 걸리는 먼거리도 아니고 두어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많고 많은 우리의 항공기를 놔두고 적장이 전용기를 보내어 다녀왔다.
뭔가 짐작되는 일이 없는가?
비행기는 빠르고 편리하기도 하지만 참으로 위험한 교통수단 이기도 하다.
엔진이 꺼져 추락하기도 하고, 이착륙간 나무나 산에 부딪쳐 추락하기도 하고 계기고장으로 추락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사고는 어쩔 수 없는 사고로 취급되어 상호간 유감의 사과 한마디로 끝이 나곤 한다.
어찌ㅤㄷㅚㅆ든 홍문의 연을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끝내고 무사히 돌아왔다.
여성의 배포 치고는 대단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김대중의 임기가 끝난 후에도 정몽헌 회장의 죽음,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의 자살, 안상영 부산시장의 죽음등 수많은 사람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여기에 박근혜란 이름이 더해지지 말란 보장도 없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던 와중이었던 2004년 8월 12일 박근혜가 김대중을 찾아가 “아버지 시절에 여러 가지로 피해를 입고 고생하신데 대해 딸로서 사과한다”고 했으며 이 한마디로 그녀는 완전히 죽음의 대열에서 비껴갈 수 있었다.
과연 비굴한 것인가? 현명한 것인가?
옛날 한신은 젊은 시절 동네 건달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서 지나가고, 표모의 쉰밥을 얻어먹기도 하면서 뜻을 세워 결국 유방을 도와 역발산기개세라 칭하던 항우를 무찌르고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
지금의 어느 누가 한신을 비겁자라 욕하는가?
일부 속좁은 사람들이 비난하는 그날의 일들에 대한 진실은 그녀의 가슴속에만 깊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에 숨은 진실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남성들 중에는 참으로 비겁한 사람들이 많았다.
화냥년이란 말이 있다. 참으로 듣기 민망한 소리이지만 원래 뜻은 우리의 남성들이 가장 부끄러워 해야할 말이다.
병자호란의 패전으로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 후 볼모로 잡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과 함께 수많은 주전파 대신들과 젊은 여인들이 공녀로 끌려갔었다.
참으로 힘들고 치욕스런 볼모생활 후에 후일 효종이 된 봉림대군의 간청으로 오랫동안의 볼모생활을 끝내고 환향(還鄕)을 하였다.
이 여인들은 순전히 우리 남성들이 못나서 지켜주지 못하고 말로 할 수 없는 치욕을 당한 사람들이었다. 효종은 환향한 여인들(환향녀)들을 따뜻하게 대해주도록 신신당부 하였으나 이들은 끝내 고향에도 가지 못하고 뭍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고 나중엔 부정한 여인의 대명사인 화냥년이란 말로 바뀌어 불리우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유난히 열녀문이 많이 있다.
그리고 후손들은 몇 대 조상중에 열녀가 나서 조정에서 열녀문을 세워주었다며 자랑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런 열녀가 유독 왜란이나 호란등 전쟁이 끝난 후에 많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전쟁이 나면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들이다.
그리고 이런 피해자는 이들을 지켜주지 못한 못난 남자들 때문에 발생한다.
적의 총칼 앞에 남자들이 아무소리 못하고 바라보는 면전에서 여인들이 치욕을 당하고, 때로는 가족을 살리려는 일념으로 적 앞에서 스스로 옷을 벗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비굴하게 살아남은 남자들은 나중에 소문이 두려워 스스로 자결할 것을 강요하거나 쥐도새도 모르게 살해한 후 열녀문으로 그녀들의 한을 대치하였다.
5천여년간 우리는 수많은 외침에 시달리며 끈질기게 살아 남았다.
어쩌면 구슬프게 울려퍼지는 아리랑의 멜로디는 수천년간 슬프디 슬픈 여인들의 한이 쌓이고 맺힌 가락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모진 여인의 한을 달래며, 때로는 배고픈 설움을 달래며 슬프디 슬픈 아리랑 가락은 맥을 이어왔다.
그리고.... 5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아리랑 가락이 환희의 가락으로 바뀌는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민주화를 외치는 세력들과 철없는 아이들은 또다시 환희의 아리랑을 슬픈 멜로디로 만들어 가고 있다.
[독재타도], [민주화],[빵만으론 살수 없다.]....
하지만 빵이 없는 설움을 맛보았는가?
왜군이 토해낸 토사물을 주어먹던 임진왜란의 기록, 굶주림을 못이겨 이웃집과 서로 아이를 바꿔서 잡아먹었던 비극의 역사는 남의 얘기가 아니고 우리의 역사이고 지금도 휴전선 이북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현실이다.
참으로 황당한 일은 철없는 것들이 독재자 운운하는 일이다.
이런 말을 접할 때마다 [나는 할머니가 우리 아빠 낳는걸 봤다.]는 소리를 듣는것 보다 더욱 황당하다.
그 시대를 평가할 자격은 그때 그시절 결혼을 하여 돈을 벌고 아이를 키워봤던 60대 이상의 평범한 민초들만이 가지고 있다.
그런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것들이 무슨 자격으로 독재 운운한단 말인가?
이나라의 사람들 치고 박대통령의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는가?
심지어 죄를 진 죄수들 조차 그시절 보다는 더 나은 환경 속에서 수감생활을 하지 않는가?
박정희 대통령의 공이 아니었으면 어디 감히 김영삼이 클린턴과 나란히 앉아 웃을 수 있었고, 김대중이 일본 수상과 나란히 앉아 월드컵 관람을 할 수 있었겠는가?
어찌 감히 이명박이 G20정상회담에서 고개 빳빳이 세울 수 있었겠는가?
1960년대만 해도 심지어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조차 별볼이 없는 나라라고 우리 대통령을 괄시하고 잘 만나주지도 않던 나라였다.
지금 우리 국민이 세계 어느 나라에 가더라도 괄시받고 무시당하는 일이 있던가?
민주화된 나라 국민이라서?
천만에, 바로 우리의 경제력이 우리 국민을 세계 각국에서 대우받게 만들었고 그 공은 바로 박대통령에게 있다.
은혜를 입고도 이를 알지 못하고 배신하는 행위야 말로 에미를 잡아먹고 태어난다는 살모사 새끼보다 못한 짓이다.
그런데도 우리 주변엔 살모사 새끼보다 못한 인간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목에 칼을 맞고도 “대전은요?” 하며 살려놓은 집단에서 이해관계에 팔려 배신을 밥먹듯 하는 정치꾼들,
초근목피의 기아를 해결해준 공로도 잊고 그때 태어나지도 않은자들이 독재자 운운하는 파렴치한들....
어찌 이루 다 거론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박정희 대통령의 후광을 빌려 그녀를 바라보자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처했던 당시의 상황에 입각하여 사실을 냉정히 판단하고 그녀의 언행과 정책을 바로 평가하여 과연 무엇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길인지 바로보자는 것이다.
제발 또다시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돌을 던지고, 단도를 던져주던 환향녀의 부끄러운 전철을 이어가지는 말자는 것이다.
출처: 논객 "새벽달"http://cafe.daum.net/ncoms/G80l/98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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