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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상처
「근대리아로 떠났어.」
이유미가 말하자 안인석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오사카의 뉴 오타니 호텔 안이다. 아래층 식당에서 점심을 마친 그들은 라운지로 올라와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근대리아로 떠나다니?」
그렇게 묻는 안인석의 얼굴은 뻣뻣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럼, 미정이가‥‥‥」
「그래, 김상철이 만나러 간 것이지.」
「시골에 갔다는 것은 거짓말이야. 난 여행사 사장이야. 한국에 있다면 모를까 외국으로 나간 것은 5분 안에 알아낼 수가 있어.」
「닷새 전에 도쿄를 거쳐 하바로프스크로 갔어.」
「‥‥그렇다면‥‥」
「김상철이가 근대리아에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 아니겠어.」
온몸을 굳힌 안인석이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연초의 나흘간의 휴가 동안 그녀는 내내 침울했었고 말수도 적었던 것을 떠올린 것이다. 그래서 어디 아픈 것이 아니냐고 묻기까지 했었다.
이유미가 그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듯 부드럽게 말했다.
「미정 씨하고 연락이 안 된다고 걱정하길래 그저 생각 없이 여
행자 리스트를 컴퓨터로 조회해 보았어. 그랬더니 ‥‥‥」
「‥‥‥‥」
「놀랐어.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곧장 달려가다니.」
「아, 그만, 조용히 해.」
번쩍 얼굴을 든 안인석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입 좀 닥치란 말이다.」
그러자 이유미가 쓴웃음을 짓고는 찻잔을 들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그래서 처음부터 입 닥치고 있을 작정이었는데 생각해서 말해준 것이.」
「그만두라니까!」
안인석의 목소리가 커지자 주위의 시선들이 그들에게 모아졌다. 한동안 그들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이유미는 찻잔을 든 채 오사카 성을 바라보았고 안인석은 탁자를 내려다보는 자세였다.
요즘 이유미는 주말이면 오사카로 날아왔다가 일요일 밤이나 월요일 아침에 서울로 돌아가는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안인석은 아직 그녀가 이혼한 것을 모른다. 여행사와 빌딩을 자신의 명의로 이전하고 홍만규와 이혼한 이유미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입장이 되었지만 그것을 안인석에게 말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윽고 안인석이 치켜 뜬 눈으로 이유미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미정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어?」
그의 몸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긴장되어 있었다.
「집 안에만 있는 애가, 응?」
「그걸 내가 알아.」
이맛살을 찌푸린 이유미가 얼굴을 옆쪽으로 돌렸다.
「매일 사람들이 근대리아로 수백 명씩 왕래하는 상황이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어.」
「‥‥‥‥」
「차분하게 생각해야 돼.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까.」
의자에 등을 붙인 이유미가 다시 입을 다물자 안인석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눈발은 조금 잠잠해졌지만 아직도 하늘은 어둑한 근대시. 유장석의 방 안에는 박종용과 이상훈, 그리고 김상철이 모여앉아 있었다. 어젯밤에 한숨도 자지 못한 듯 김상철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상석에 앉은 유장석이나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도 피로의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다.
「이제 이 일은 경비본부가 마무리를 짓도록, 앞으로 더 이상의 난동은 없도록 하고.」
유장석이 그들을 둘러보았다.
「대다수 중국계는 선량한 시민이야. 그리고 생필품 가게의 대부분도 삼합회의 지시에 마지못해 따른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폭리를 취한 만큼 삼합회에 상납했으니 그들도 피해자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것은 경비본부장인 박종용이다. 타운의 소요는 이제 그쳤지만 중국인 마을은 수십 군데의 가게가 불에 탔고 마을 안쪽의 색시방, 마약, 마작방은 철저히 파괴되어 마치 전쟁을 치른 듯한 참상이었다. 경비본부가 집계한 중국인 사상자는 사망이 47명, 부상이 128명인 대참사였다. 이상훈이 입을 열었다.
「어젯밤의 공격으로 삼합회는 당분간 예전의 세력으로 회복되
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 2인자인 마연중이 죽고 진대원도 부상당
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어젯밤에 제일 바쁜 사람 중의 하나가 이상훈이었다. 그는 경비대원들을 지휘하여 공격조들의 뒤를 받쳐주면서 습격당한 가게가 약탈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양면작전을 썼기 때문이다.」
「진대원이 부상당했다고?」
놀란 듯 유장석이 묻자 이상훈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같이 있다가 부상당한 부하가 자백했습니다. 수류탄 파편에 맞았다고 합니다.」
「‥‥‥」
「아직도 중국인 마을에 숨어 있을 테지만 감정을 자극시킬 염려가 있어서 가택수색은 하지 않는 게 낫다고 믿습니다.」
「당연하지, 그리고 주민들에게 이 일은 삼합회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려야 돼.」
유장석이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이것은 해외 토픽감이다. 특히 중국 정부가 알게 된다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었다.
「따라서 계획한 대로 근대리아로의 입출국을 엄격히 통제하도록. 이주민 외에 입국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금지시키고 출국은 말할 것도 없다.」
타운으로 돌아온 김상철은 나파스 클럽 앞에서 차를 세웠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었을 뿐이지만 하늘은 벌써 잿빛이었고 끈질긴 눈발은 그치려 하지 않았다. 클럽의 현관을 들어선 김상철에게 안에서 송길수가 다가왔다. 조금 허둥거리는 모습이었다.
「형님, 조금 전에 그레고리한테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그와 나란히 걸으면서 송길수가 말했다.
「아무래도 마피아가 방해를 하는 것 같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제설차를 끌고 올 운전사들이 모두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코프가 운전사를 실으려고 그레고리한테 갔습니다, 그런데 ‥‥」
그들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형님, 주코프가 여자 한 명을 싣고 왔답니다.」
「여자라니?」
소파에 앉은 김상철이 묻자 송길수가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박미정이라고, 형님의 친척이 되신다는데.」
김상철이 그를 쏘아보았다.
「박미정?」
「예, 형님, 친척 되십니까?」
「내 친척이라고?」
「예, 제가 확인을 했더니 형님의 친구인 안 누구하고 결혼한 박미정이라고 하면 아실 것이라고.」
「‥‥‥‥」
「지금 그레고리의 임시 막사에 있습니다, 형님.」
「주코프의 말로는 막무가내로 매달렸다고 합니다, 형님을 만나야 한다고, 하바로프스크에서 닷새를 기다린 모양입니다.」
「형님, 헬기를 그레고리한테 보낼까요?」
그 시간에 헬기 한 대가 만 피트 고도를 유지한 채 근대리아의 상공을 날아오고 있었다. 헬기는 러시아 공군의 주력 공격용 Ml-24하인드를 민간용으로 개조한 것으로 2200마력짜리 엔진 두 개에서 뿜어내는 강력한 힘으로 쏜살 같이 날아오는 중이었다. 조종석과 분리된 뒤쪽에는 20명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오늘 승객은 세 사람뿐이다. 벽에 방음장치까지 덧대어 있어서 진동과 속도감을 느낄 수 있었지만 소음은 적다. 갑자기 천장의 스피커에서 러시아인 조종사의 러시아어가 흘러나왔다
「앞으로 한 시간 반 후에 근대리아에 도착합니다.」
그러자 박기동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한 시간 후에 도착한다고 그러는군 」
러시아어를 제대로 못 알아들으면서 어림잡고 말하는 것이다.
이인숙은 파카로 몸을 감싼데다 바지에 가죽 장화를 신은 산뜻한 차림이었다.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를 뒤로 묶어 올렸고 화장기 없는 얼굴은 여위었지만 깔끔했다. 털코트로 온몸을 감싼 경희는 엄마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어 있었다.
「근대타운에는 조선족이 많습니다. 북한에서도 이번에 내가 사람들을 데려 왔는데 ‥‥」
박기동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앞으로도 계속 데려올 거요.」
「저처럼 말인가요?」
이인숙이 묻자 그는 크게 머리를 저었다.
「아니오. 아주머니는 우리 사장님의 특별 손님이라니까 그러시네요.」
「………」
「아주머니의 남편 되시는 분하고 우리 사장님이 친했던 사이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하고는 달라요.」
김상철에게서 대충 들은 대로 남편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그녀는 잠자코 머리를 끄덕일 뿐 놀라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근대리아에서 새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는 말을 듣고 얼굴에 생기를 띄었다. 이인숙은 경희를 내려다보았다. 악몽에서 벗어난 지 아직 사흘도 되지 않는다.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가끔씩 두려워질 때도 있었으므로 생각에도 두서가 없다. 하지만 고급 모피옷을 입고 있는 경희를 보면 살아 있다는 실감이 난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것이 꿈이라면 깨어나지 말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헬기가 도착했을 때는 대지가 짙은 어둠이 덮인 오후 6시경이었다. 헬기의 문이 열리자 눈보라가 휘몰려 들어왔으므로 박미정은 어깨를 움츠렸다.
「이쪽으로.」
먼저 내린 사내의 안내를 받고 그녀는 앞쪽에 있는 건물로 다가갔다. 헬기의 회전날개가 일으키는 바람에 눈더미가 맹렬하게 몸에 부딪치며 지나갔다. 그들이 건물로 다가갔을 때 문 앞에 서 있던 서너 명의 사내들이 다가왔다. 불빛을 등에 지고 있었으므로 방한모와 코트로 몸을 감싼 그들은 모두 거인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순식간에 가까워졌고 박미정은 자신의 앞에 정면으로 다가온 사내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어두웠지만 김상철의 얼굴 윤곽은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가 뿜어내는 횐 입김이 코끝에까지 와 닿았을 때 박미정은 그에게 와락 몸을 부딪쳤다. 그의 몸을 깍지끼듯 안자 김상철의 손이 어깨 위에 놓여지는 것이 느껴졌다.
「가자, 집으로.」
헬기의 엔진소음이 컸지만 그가 귀에 대고 말하는 소리는 선명하게 들렸다. 그것도 분명 김상철의 목소리였으므로 박미정은 어깨에서 순식간에 힘이 빠짐을 느꼈다.
통나무집의 거실, 페치카에서는 장작불이 기세 좋게 타오르는 중이라 방 안은 훈훈했다. 짙은 어둠에 덮인 창밖에는 불빛 한 점 없다. 박미정은 스웨터에 바지의 가벼운 차림으로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다. 그녀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뜨거운 홍차로 위스키를 조금 섞은 것이다.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고 우선 쉬라는 김상철의 제의를 거절한 대신 마시는 두 번째 잔이었다. 김상철은 위스키 잔을 쥐고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의 표정은 평상시와 다르지 않았으므로 갑작스러운 여자 손님에 술렁였던 집안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과일 접시를 들고 온 황윤의 태도도 그래서인지 거북스럽지 않다. 조금 절름거리면서 그녀가 나가자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인석이는 오사카에 있다고 들었는데, 연락이나 하고 온 거야?」
그녀가 잠자코 있자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던지 그가 말을 이었다.
「꼭 이렇게 확인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럴 만한 가치도 없고, 이제는.」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서로 묻지 않는 것이 낫다는 얘기야.」
「그냥 왔어요.」
박미정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으므로 그가 주춤 말을 멈추었다.
「나도 다른 뜻은 없어요. 그냥 보려고.」
「어쩌면 당신이 누굴 시켜서 여기에 있다는 것을 전한 것이 아닌가, 생각도 했었는데 …」
「아닌 것 같네.」
「난 미정이하고는 맞는 상대가 아니었어.」
그러자 박미정이 새삼스럽게 방 안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상철 씨, 성공했네요.」
「다른 건 잊고 지낼 만도 하겠네.」
「바쁜 생활이야.」
「뻔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러고는 잠시 아랫입술을 물었던 박미정이 그를 바라보았다.
「나한테 연락 안한 이유는 듣고 싶어요.」
그녀의 시선을 받은 김상철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나한테 여자가 생겼기 때문이야.」
「그리고 아까 말한 것처럼 미정이하고는 맞는 상대가 아니었고.」
「난 당신이 죽은 걸로만 알고 있었어요.」
갑자기 목이 메인 박미정이 이를 악물었다.
「넌 나쁜 자식이야.」
「‥‥‥‥」
「나하고 인석 씨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우리는 상철 씨를 찾으려고‥‥」
「………」
「난 인석 씨한테 이 이야기를 하지도 못했어. 상철 씨한테 미안해하고 놀랄까 봐서.」
김상철이 손에 든 술잔을 한 모금에 입 안으로 삼켰다. 그 순간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박기동이 들어섰다.
의기양양한 표정이고 몸짓이다.
「사장님, 모시고 왔습니다. 지금 응접실에 계십니다만.」
소파에 얌전히 앉은 경희는 분주히 시선을 놀려 방 안의 호화로운 가구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움직이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저 엄마 곁에 붙어 앉아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6개월 동안의 시범소 생활이 여섯 살짜리 아이를 철저히 주눅들게 한 것이다. 이인숙은 손을 뻗어 경희의 조그만 손을 쥐었다. 본래의 밝고 천진한 아이로 되돌아가려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지만 그쯤은 문제가 아니다. 살아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인 것이다. 방문이 열리고 박기동과 함께 사내 하나가 들어섰으므로 이인숙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희도 재빨리 따라 일어서서 새로운 사내에게 시선을 주었다. 사내는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띠우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제가 김상철입니다.」
반갑게 말한 그가 손을 뻗어 경희의 머리를 쓸었다. 경희가 어머니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머리를 숙인 이인숙이 감사의 인사를 몇 마디 했지만 잘 들리지도 않았다. 자리를 잡고 앉자 김상철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이 집에 방이 꽤 많습니다. 부디 내 집이라 생각하시고‥‥‥」
박기동이 소파 끝 쪽에 앉아 가볍게 헛기침을 한 것은 뭐라고 대답을 하라는 표시 같았지만 이인숙은 채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경희 교육 문제도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학교도 있으니까요.」
「집 안에 일하는 사람이 대여섯 명 있고, 묵고 있는 사람도 20명이 넘습니다. 대가족이지요. 괜찮으시다면 당분간 이곳에 계시면서 그 사람들 관리를 해주셔도 좋고‥‥‥」
「시키신 일은 뭐든지 ‥‥‥」
겨우 이인숙이 말하자 박기동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러자 정색을 한 김상철이 손을 저었다.
「일을 하시라는 것이 아닙니다. 일할 사람은 얼마든지‥‥ 그저 감독만‥‥‥」
「알고 있습니다.」
이인숙이 머리를 들었다.
「어떻게든 저희 모녀에게 잘 해주시려고 하신다는 것을.」
「당연한 일이지요. 장형이 제 목숨을 구해주었습니다.」
「제가 약속을 했지요. 부인과 경희를 보살피겠다고, 이젠 경희를 위해서라도 기운을 내셔야 합니다.」
「열심히 살겠어요.」
이제 또렷해진 그녀의 목소리에 김상철은 만족한 듯 머리를 끄덕였다.
「잘 견디셨습니다.」
「저어 ‥‥」
이인숙이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할 일이 있을까요? 저는 외국어를 조금 하는데요.」
「아아, 그렇습니까? 어떤?」
「김일성 대학에서 어학을 했습니다. 영어가 전공이었지만, 노어, 중국어도 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이용하실 수 있지요. 우선 푹 쉬시고 나서 …」
김상철이 박기동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당신도 러시아어, 중국어는 모르지?」
「아아, 예.」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벌개진 박기동이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모릅니다, 사장님.」
「잘 되었다. 내가 그쪽 일을 부인께 부탁할 수도 있겠습니다. 더구나 영어를 전공하셨다니 영어는 능통하시겠고.」
박기동이 다시 조그맣게 헛기침을 했다.
다음 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내리던 눈이 딱 그치더니 참으로 오랜만에 햇살이 비추었다. 눈에 오랫동안 씻기고 있었던 것처럼 파란 하늘은 더욱 맑은데다가 햇살은 한없이 밝았다. 이한은 아침 일찍부터 저택 주위의 제설작업을 감독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대충 치웠던 눈을 땅바닥이 보이도록 치워내는 작업이다. 그가 정문 앞에 서 있는데 지프 한 대가 덜컹이며 달려오더니 멈춰 섰다. 안에 타고 있는 것은 의사인 안토노프였다.
「아니, 당신 웬일이요?」
이한이 묻자 안토노프가 눈으로 저택을 가리켰다.
「아침부터 의사가 놀러오겠어? 여자 손님이 아프다는 거야.」
「어느 여자?」
어젯밤의 여자 손님은 공교롭게도 두 팀의 세 명이다. 대답도 하지 않고 저택 안으로 차를 모는 안토노프를 따라 이한도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에서 만난 조선족 여인에게 물은 후에야 그는 박미정이 앓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저택 안의 사람들은 그녀가 김상철의 친척인 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한은 언젠가 김상철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헬기장에서 그들이 만나는 장면을 본 때문인지도 모른다. 안토노프가 진찰을 끝낸 것은 그로부터 30분쯤 후였다. 그는 기다리고 있던 김상철에게 말했다.
「감기 기운이 있고 몸이 쇠약해져 있소. 당분간 쉬어야지 잘못하면 태아에게도 영향이 옵니다.」
잠자코 있는 김상철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임신 3개월이오. 푹 쉬도록 하는 것이 제일 좋은 처방이오.」
김상철이 방으로 들어서자 침대에 누워 있던 박미정이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굴에 열기를 띄고 있었고 입술에는 물기가 없다. 침대 옆의 의자에 앉은 그가 박미정을 내려다보았다.
「무모한 일을 했어. 더구나 아이까지 있는 몸으로.」
박미정은 천장을 향한 시선을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인석이한테 전화를 하겠어, 미정이가 이곳에 있다고, 그리고 내가 초청한 것으로 말할 테니까 ‥‥.」
「하루 이틀쯤 쉬어야 한다니까 마음 놓고 ….」
김상철이 몸을 일으키자 박미정이 입을 열었다.
「오늘 떠날 테니 준비 좀 해주실래요?」
「오늘은 안 돼, 의사 말이‥‥」
「더 이상 이곳에 있기 싫어요.」
「더 이상 당신의 얼굴을 보기도, 목소리도 듣기 싫어서 그래요.」
「그렇다면 내가 나타나지 않을 테니까.」
「글쎄, 이곳이 싫다니까.」
크게 뜬 눈으로 박미정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당장, 지금이라도.」
한동안 잠자코 서 있던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림 준비를 하지.」
「부탁해요.」
그녀가 피로한 듯 눈을 감았으므로 김상철은 몸을 돌렸다.
진대원은 부상을 당한 것이 아니었다. 이한의 습격을 받았을 때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기둥에 몸이 깔렸지만 다행히도 기둥 한쪽이 벽에 걸려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그는 중국인 마을 안의 임시거처에 은신해 있었다. 그러나 조직은 엄청난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다. 우선 마연중을 비롯한 간부급 10여 명이 죽었고 3분의 1이 넘는 부하가 죽거나 부상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조직의 기반이었던 색시방과 마약방, 마작방이 모조리 파괴된 데다가 중국인 가게 30여 곳이 불태워졌다.
이것이 남북한과 마피아까지 연합한 세력의 공동작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진대원은 아연해졌다. 그로서는 남북한의 연합작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남북한 정부의 경직성을 오래도록 들어 온 진대원이다. 김상철과 이금철이 연합하려면 양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만 할 것이고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피아까지 끌어들여 이쪽을 쳤다. 더욱이 경비대까지 배후를 도왔으니 자신은 사면초가의 형세였고 그 책임은 물론 자신에게 있었다. 무리했던 것이다.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끈 진대원이 입을 열었다.
「내가 방심했다. 남북한이 연합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이금철이 북한의 조종을 받는 것처럼 근대리아 행정부나 김상철이 한국의 지휘를 받는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둘러 앉아 있던 부하중의 하나가 번쩍 허리를 세웠다.
「대형, 조직원은 둘째 치고 주민들의 불만이 큽니다. 그들은 우리 지시를 따랐다가 생계수단을 잃었습니다.」
30대 후반의 그는 사천성 출신으로 이름은 양필성이다. 삼합회 내에서의 지위는 중간계급이었지만 마약을 전담하는 부서에서 파견되어 근대리아의 마약을 총괄하는 사내였다.
「근본기반이 흔들리는 상황이오. 대형의 반성만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건방진 ‥‥‥」
진대원이 눈을 치켜떴다.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야, 양필성.」
「마약방이 폭파되었고 돈과 마약을 몽땅 털렸소. 대형의 오판이 조직을 망쳐 놓은 거요.」
보통체격에 그저 평범한 인상의 양필성이었지만 눈을 부릅뜨고 대들자 위압감이 느껴졌다.
「애초부터 남북한 양쪽을 건드려서 싸움을 붙인다는 발상도 단순했고 그것이 무위로 끝났다면 자중하고 있어야만 했소. 폭설을 기화로 생필품 가격을 폭등시키도록 한 것으로 우리는 모든 조직들의 공적이 된 것이오.」
그의 굵은 목소리가 방 안을 울리자 진대원의 얼굴빛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가 곧 하얗게 굳어졌다.
「양필성, 이놈, 반항하는 것이냐!」
「당신은 나를 처벌할 수 없소. 나는 회주 직속의 충방 사람이야.」
「너를 처단하고 회주께 보고해도 된다.」
내분이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에는 별 탈 없이 조직이 굴러가지만 어긋날 때에는 조직도 흔들리는 것이 상례이다. 따라서 악조건에서 어떻게 조직을 운용하는냐 하는 것으로 지도자의 역량이 판가름 난다. 지금은 양필성을 장악하지 못했던 진대원의 미숙함이 드러나고 있었다.
「근대리아는 내 소관이다!」
손바닥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내려치면서 진대원이 소리쳤다.
충실한 오른팔이었던 마연중의 존재가 사무치게 아쉬웠는데 그것은 조직의 장래보다도 우선 그가 살아 있었다면 양필성 같은 중급 간부가 감히 대들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창밖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횐 눈 위에 반사되는 한낮의 햇살로 대지는 더욱 밝게 빛나고 있었다. 문에서 노크소리가 났으므로 김상철은 창에서 몸을 돌렸다. 들어서는 건 이한이다.
「형님, 준비 되었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그는 이한과 함께 방을 나왔다. 잠시 후에 그는 지프의 뒷자리에 박미정과 앉아 있었다. 차는 속력을 내 눈 덮인 평원을 끼고 달려가는 중이다. 차가 덜컹이며 흔들릴 때마다 차안의 공기가 움직이면서 그의 코에는 박미정의 체취가 스며들었다. 코에 익은 향기였다. 숨을 내려쉰 그는 반대쪽 창으로 머리를 돌렸다. 제설차에 치워진 눈더미가 작은 언덕처럼 길가에 쌓여 있었다. 박미정은 똑바로 앞쪽을 바라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도 온몸에 열이 났고 등이 땀으로 젖어 있었지만 이제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이윽고 지프는 오른쪽으로 꺾어지더니 공항 입구로 들어섰다. 게이트의 경비원에게 통과 확인을 받으려고 차가 멈춰 섰을 때 이한이 뒤쪽으로 몸을 돌렸다.
「비행기 앞으로 곧장 가겠습니다. 지금 탑승을 시작했으니까요.」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이자 지프는 속력을 내며 넓은 활주로 위를 달려 나갔다.
저택에서 공항까지 오는 한 시간 동안 그들은 한 마디의 말도 뱉지 않았다. 덩달아 내내 가슴을 졸이고 있던 이한은 앞쪽으로 비행기가 보이자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비행기는 아에로플로트의 쌍발 제트기로 승객들이 트랩을 오르고 있는 중이다. 트랩 밑에서 지프가 멈추자 이한이 먼저 내렸다. 따라내리던 박미정이 문득 머리를 돌려 차 안에 앉아 있는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김상철 씨, 그럼 안녕히. 난 당신과의 모든 감정을 이 눈밭에 두고 떠나요.」
「‥‥‥‥」
「여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뿐만 아니라 내 가정을 위해서라도.」
박미정이 몸을 돌리자 가방을 들고 옆에 서 있던 이한이 앞장섰다. 그러자 밖에 서 있던 운전사가 힐끗 김상철의 눈치를 보더니 문을 닫았다. 곧 이한으로부터 가방을 받아 쥔 그녀는 꼿꼿한 걸음으로 트랩을 올라 비행기 안으로 사라졌다.
그레고리가 수송단을 이끌고 근대시에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이다.
근대리아 건설단의 지원을 받아 밤을 낮 삼아 길을 뚫고 전진해온 것인데 꽤 멀리까지 마중나간 김상철을 보자 그는 소리치듯 말했다.
「마피아 새끼들의 방해만 없었다면 사흘은 빨리 도착할 수 있었을 거요.」
그들은 김상철의 지프에 올랐다. 트럭의 긴 대열이 이제는 속력을 내어 그들의 옆을 달려가고 있었다.
「제설차를 부숴놓은 데다, 나중에는 운전사들을 위협해서 도망치게 했단 말입니다.」
「알고 있어.」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 마피아하고의 밀월은 끝났다.」
지난번의 연합전선을 구축할 때처럼 필요한 때에는 손을 잡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더 이상 김상철을 이용할 필요성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들이 근대리아에 기반을 굳히게 된 것은 김상철의 공이었다. 김상철 입장에서도 자신의 입지를 굳히게 된 것은 마피아의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각기 기반을 굳혔고 서로 매어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이 김상철의 운송회사 설립으로 분명하게 나타난 것이다. 마피아는 근대리아 내의 황금사업인 운송업을 김상철에게 강탈당했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이번은 간접적인 방해만으로 그쳤지만 다음에는 노골적으로 나올 것이다.」
김상철이 말을 이었다.
「삼합회를 치려고 연합전선이 형성되어 있을 때라 그 정도로 그쳤을 것이야. 이제 삼합회 토벌도 끝났으니 마피아가 우리에게 부담을 느낄 이유도 없다.」
「내가 이번 전쟁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오.」
「전쟁도 아니었어. 기습토벌이었지. 진대원은 이제 주민들의 신뢰도 잃은 모양이야.」
그들이 탄 차는 수송단을 앞질러 근대시 외곽에 자리 잡은 운송회사로 달려가는 중이다.
「하지만 세력이 꺾였을 뿐이지 삼합회는 곧 재기할 것이다. 중국계 주민이 있는 이상 뿌리가 쉽게 뽑혀지지 않아.」
그레고리가 머리를 끄덕였다.
「마피아도, 북한계 조직도 마찬가지요. 러시아계, 조선족 주민들을 바탕으로 그들의 세력이 뿌리박혀 있으니까.」
「그들뿐만이 아니야. 곧 야쿠자가 일본 기업을 내세우고 들어온다. 아마 올해 안으로 한국계 일본인들이 근대리아로 대거 몰려들어 올 것인데 그자들은 대부분 야쿠자 조직원들로 보아도 될 거야.」
「이것, 근대리아가 해외 조선족들의 집결지가 되는군.」
웃음 띤 얼굴로 그레고리가 말하자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것이 근대리아를 세운 강회장의 목적이야. 조선족의 나라!
그런데 병균처럼 묻어오는 무리들이 있지. 마피아나 삼합회, 야쿠자 같은 것들 말이야.」
저녁 무렵이 되자 타운은 흥청대는 분위기가 되어갔다. 네온사인이 휘황하게 빛났고 거리는 인파로 채워져 어느 대도시의 밤거리 못지않았다. 서쪽 거리에 있는 마야 클럽에도 이미 좌석의 반 이상이 채워져 있었는데 홀 중앙의 무대에서는 러시아인 댄서가 느린 몸짓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클럽 2충에 있는 사무실 안이다.
상석에 앉은 사내는 근대리아의 마피아 책임자인 그루진스키였고 그의 앞쪽에 앉아 있는 것이 진대원이었다. 오늘의 회담은 진대원이 기습방문한 것으로, 그루진스키는 처음에는 당황했다가 이제 여유를 찾아가는 참이었다. 손님으로 클럽에 들어와서는 면담을 요청하는 바람에 그루진스키는 부하들을 서둘러 모으는 소동을 벌렸던 것이다. 며칠 전에 남북한 세력과 연합하여 그의 부하들도 중국인들을 기습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진대원은 러시아어에 유창했다. 그루진스키를 똑바로 바라보며 진대원이 입을 열었다.
「이제 내가 찾아온 목적을 말하겠소. 그루진스키 씨, 난 우리 양대 세력의 이익을 위해서 온 겁니다.」
그루진스키는 40대 중반으로 거구였다. 수염에 덮인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다음 말을 기다린다는 듯 진대원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당신들의 운송 사업을 김상철이 가로채 버려서 이제 당신들 하물까지 김상철의 운송회사가 운송해 주게 되었소. 말하자면 당신들은 다리가 잘려진 꼴이지.」
「경비대를 배후에 두고 있는 김상철의 세력은 곧 우리를 말살시키게 될 거요, 러시아 주민이나 중국계 주민은 근대리아의 서자야. 조선족을 배경으로 하는 북한계는 달래면서 남겨둘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아니야. 무슨 말인지 아시겠소?」
「그럴 듯한 말이기 는 한데 ‥‥‥」
그루진스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근대리아가 러시아 영토라는 것을 잊으신 모양이군. 조선족들은 우리 땅에서 세를 살고 있는 것이라구. 따라서 우리 러시아 주민은 서자가 아니야.」
「말장난 하려고 여기 온 게 아니야.」
이맛살을 찌푸린 진대원이 그를 쏘아보았다.
「한국세력을 누를 방법을 이야기하려고 온 거요. 물론 당신도 동의할 줄로 믿고.」
「그것이 쉽게 될까? 그리고 당신은 시급할지 모르지만 우린 아직 아니야. 이 공존관계를 깨뜨려서 득이 될 것이 별로 없단 말이야.」
「한국세력을 무너뜨린다는 것이 아니야, 다만‥‥‥」
진대원이 탁자 위로 상체를 숙였다.
「다만 세력을 반감시킬 필요가 있단 말이야. 그러면 우선 당신들의 운송 사업을 되찾게 될 길이 생길 것이고….」
「동무, 이젠 우리도 길이 생겼어.」
이금철이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띠었다. 드디어 조총련이 근대리아에 투자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며칠 후면 투자단이 근대리아를 방문한다는 연락을 받은 참이다. 그는 앞에 앉은 최태호를 바라보았다.
「평양에서 해외사업부 부장동지가 직접 투자단을 이끌고 온다. 타운 호텔 한 층을 지금 예약해 두도록. 실수가 있으면 안 돼.」
「알겠습니다, 위원장 동지.」
최태호도 밝은 표정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타운에만 갇혀있게 될 것인가 그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항에 환영단을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천 명쯤은 동원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자 이금철이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봐, 여기가 평양인 줄 알아? 부장 동지는 비공식으로 이곳에 오는 거란 말이야.」
「아아, 예.」
최태호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우리 공화국 노동자를 받은 것은 김상철이지 근대리아 행정당국이 아니야. 그들은 공식적으로는 우리 공화국과 단절된 관계에 있다는 걸 명심하라구.」
「알겠습니다, 위원장 동지.」
「삼합회 덕분에 당분간은 공존 관계가 되었지만 이 땅의 조선족은 대부분이 공화국과 연고가 있는 동포들이야. 근대리아가 무슨 수단을 쓰던 간에 이 땅은 결국 공화국의 수중에 들어올 것이다.」
「이번에 평양에서 온 동무들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최태호가 그의 말을 받았다.
「박기동이의 말을 들으면 김상철이 곧 일꾼들을 더 모집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금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상철은 철천지원수 사이였지만 지금은 그들에게 아주 유용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각 기지내의 노동자 파업이 실패로 돌아간 지금은 안팎에서 조직을 강화할 시간과 인력이 필요한 때였다. 그것을 김상철이 모두 채워주고 있는 것이다. 그의 삼합회를 꺾기 위한 연합 제의는 이금철에게 조직을 강화할 시간을 주었는데 평양에서 데려온 100여 명의 인력은 모두 훈련된 당원들이었기 때문이다.
장인규는 클럽 뒤에 2층 벽돌집을 지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따라온 서규환과 여러 명의 경호원에 둘러싸여 살고 있었으므로 김상철의 저택에 자주 오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요즘엔 이틀에 한 번 꼴로 볼가 승용차를 타고 찾아왔는데 그것은 이인숙과 친해졌기 때문이다.
김상철의 저택은 통나무로 만든 방어용 성곽 같은 구조이다.
높이가 5미터가 넘는 통나무 담장이 빙 둘러쳐진 안으로 들어서서 밋밋한 능선을 2백 미터쯤 올라가야 본채가 나온다. 전혀 엄폐물이 없는 2백 미터의 공지에서 습격자들은 저지당할 것이고 만에 하나 본채까지 온다고 해도 20여 명의 경호대가 상주하고 있어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공지를 오른 장인규가 현관 앞에 차를 세웠을 때 현관문이 열리면서 김상철이 나왔다. 코트에 방한모를 쓴 외출복 차림이었다.
「요즘은 자주 오는군.」
김상철이 웃음 띤 얼굴로 말하자 장인규도 따라 웃었다.
「언니가 생겼으니까요, 경희도 귀엽고.」
「잘 됐어. 그런데 ‥‥‥」
김상철이 그녀에게 한걸음 다가섰다.
「당신이 타운 내 사업체들을 맡아주었으면 좋겠는데, 난 근대시와 운송 사업에 전념해야 될 것 같아서.」
「날 당신 수하로 끌어들이겠다는 말인가요?」
그러자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렇게 되어가는 상황 아닌가? 그럴 바에는 확실하게 해두는 것이 낫지.」
「이 장인규가 결국 당신 수하가 되는군요.」
「날 찾아왔을 때부터 그렇게 되도록 결정된 거야.」
「참, 지난번에 찾아온 여자는 누구지요? 친척이라고 했다는 여자.」
장인규가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그 여자가 당신의 옛 애인이었다는 소문도 있던데.」
「그런 소문이 났어?」
「당신에 관한 소문은 금방 퍼져요. 당신의 모든 행동이 관심의 대상이니까.」
이한과 경호원들이 차를 세워두고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김상철이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옛 애인이었어. 지금은 내 친구의 아내가 되어 있지만.」
「그렇군요.」
장인규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당신이 피해 다니는 사이에 그렇게 된 것이겠군요.」
「그런 셈이지.」
「여자는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고, 그래서 확인하러 왔군요.」
「이제 모두 끝난 일이야.」
김상철이 발을 떼었다.
「내일 아침에 이곳으로 와. 사업체 현황과 관리문제를 상의해야 될 테니까.」
토요일 오후였다. 유리창 밖으로 오후의 비스듬한 햇살을 받은 앞동 아파트는 이미 반쯤 그늘에 묻혀 있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안인석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소파에 앉자 박미정이 앞자리에 앉았다. 그는 예고도 없이 날아와서 시치미를 떼고 옷을 벗은 다음 씻고 나왔는데 마치 아침에 출근했다가 퇴근한 것 같은 행동이었다.
「무슨 일 있어요?」
수건을 옆으로 던진 안인석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한테 할 얘기 없어?」
「무슨 얘기요?」
「쭈욱 기다려왔어. 당신이 먼저 이야기를 해주겠지 하고‥‥‥」
「감출 생각이었어?」
박미정이 크게 숨을 마셨다가 천천히 뱉아냈다.
「내가 근대리아에 다녀온 이야기 말인가요?」
「당신, 김상철 씨가 살아 있다는 걸 알아요?」
「그놈을 만났어?」
「알고 있었어요?」
그러자 안인석이 와락 이맛살을 찌푸렸다.
「내가 물었잖아. 그놈을 만났느냐고.」
「만났어요.」
「왜? 그놈을 아직도 못 잊어서?」
아랫입술을 깨문 박미정이 머리를 돌렸다.
「대답해, 멀쩡한 남편 놔두고 그 먼 곳까지 다녀온 이유를, 감격의 해후를 했어?」
「‥‥‥‥」
「그놈이 뭐라고 그래? 이 안인석이가 배신자라고 했겠지? 그렇지?」
「‥‥‥‥」
「내가 그놈 때문에 오사카로 밀려난 걸 이제 알 수 있겠지? 그놈은 총회장의 손녀와 곧 결혼할 귀하신 몸이 되었으니까.」
퍼뜩 머리를 든 박미정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예요?」
「나는 지금 그놈의 복수의 대상, 아니, 노리개가 되어 있다는 말이야. 내가 오사카로 밀려난 것도 그놈이 조종했다는 증거가 있어.」
안인석이 호흡을 진정하려는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었다.
「그런데 이제 너까지 그놈을 찾아가서 해후를 해? 그리고 입을 다물고 비밀을 지키고 있어?」
「나는 당신이 모르고 있을 줄 알았어요. 그래서 충격을 주지 않으려고.」
박미정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 다녀온 것, 그저 확인해 보려고 했지 다른 의미는‥‥‥」
「거짓말 말아!」
버럭 소리친 안인석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란 말이야! 너는 기대를 가지고 갔어. 그리고 그놈한테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고. 너희들 음모에 놀아날 내가 아니야!」
「당신‥‥‥」
창백해진 얼굴로 박미정이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오사카로 간 것이 그 사람의 복수라는 말, 이해가 안 돼요. 도대체 왜?」
「내가 널 빼앗아갔기 때문이지. 그놈은 그런 이야기는 안한 모양이구만. 하긴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겠지.」
「당신은 그 사람이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건 왜 물어?」
「놀라지도 않고.」
문득 말을 멈춘 그녀가 안인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근대리아에 가기 전부터 알고 있었지요?」
「그놈이 말해주지 않았단 말이야?」
버럭 소리친 안인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그놈은 내 인생, 그리고 내 가정도 부셔놓았어. 나는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거다.」
「부셔놓은 것 없어요.」
「나는 이미 부서졌어 .」
그가 차가운 눈으로 박미정을 내려다보았다.
「네가 근대리아로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나는 이제 더 이상 네 말을 믿지 않기로 했어. 그놈한테 세뇌되었을 테니까.」
「그놈은 회장의 손녀를 꼬드겨서 내가 비열한 배신자라고 말했을 거야. 내가 너와 결합한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거지.」
「그가 무슨 자격으로?」
메마른 소리로 박미정이 묻자 그가 코웃음을 쳤다.
「사랑했던 여자를 가로채 갔으니까.」
「그 사람은 나를 잊었어요. 그래서 연락을 안했던 거야.」
「잊지 않았어, 지금도.」
그녀에게로 한 걸음 다가선 안인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도 마찬가지고, 내가 너와 같이 있는 동안은 내내 그놈의 목표가 될 거야.」
박미정이 눈을 치켜떴으나 말을 잇지는 않았다. 그저 참담한 표정으로 안인석을 올려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커피숍에 들어선 강미현은 카운터 앞에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점심시간이 마악 지난 때여서 손님이 꽤 많았다. 안면이 있는 종업원이 다가왔다.
「누구 찾으세요?」
그 순간 강미현은 벽 쪽의 테이블에서 이쪽을 바라보며 일어서는 여자를 보았다 짙은색 코트 차림에 눈에 띄는 미모의 여자였다.
강미현이 다가가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미현 씨 되시나요?」
「네, 그럼 그쪽은 박미정 씨?」
「갑자기 뵙자고 해서 죄송합니다.」
「아녜요. 그렇지 않아도 한번쯤 만나고 싶었습니다.」
강미현이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회사 빌딩의 지하 커피숍이어서 옆을 지나는 몇 명이 강미현에게 아는 척을 했다. 이제 그녀가 회장의 손녀인 것을 모르는 직원은 없다. 차를 주문하고 나자 박미정이 머리를 들었다. 긴장한 모양으로 표정이 굳어져 있다.
「저, 갑자기 이런 말씀 드리면 놀라시겠지만 저는 전에 김상철 씨와 가깝던 사이였습니다.」
그러자 강미현이 밝게 웃었다.
「알고 있어요. 그리고 결혼하신 것도.」
「저는 그 사람이 실종된 줄로만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최근에야 그 사람이 근대리아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얼마 전에 그곳에 다녀왔습니다.」
강미현이 머리를 끄덕였다.
「저도 들었어요. 폭설로 꽤 고생하셨다고.」
「이제 후련해요. 그 사람과의 관계는 정리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씀드릴 것은‥‥‥」
얼굴을 더욱 굳힌 박미정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우리, 그이, 제 남편되는 사람한테 그 사람이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는 건데요. 그이는 김상철 씨가 영향력을 행사해서 오사카로 전출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자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인 강미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저하고도 관련이 있다고 믿으시겠네?」
「그런 일 없어요. 아마도 남편 되시는 분의 피해의식 때문인 것 같은데요, 제 생각이지만.」
「이제 말씀드리지만 남편 되시는 분은 김상철 씨의 생존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박미정 씨와 결혼하기 훨씬 전부터 말예요. 그런데 아마 그 사실을 박미정 씨한테 숨긴 것 같더군요. 만일 말했다가는 결혼도 안 되었을 테니까.」
몸을 굳힌 채 꼼짝하지 않고 바라보는 박미정을 향해 그녀가 말을 이었다.
「김상철 씨가 박미정 씨한테 연락을 못한 것은 살인혐의로 기소된 상태로 떠돌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내일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박미정 씨를 구속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는 이미 당신 둘이는 깊은 관계가 되어 있었고. 그는 당신들의 결혼을 알면서도 그저 멀리서 지켜만 보았어요.」
「나는 그런 김상철 씨를 존경했어요. 그리고 더욱 사랑하게 되었지요.」
「그런 김상철 씨가 이제 와서 그런 일을 하다니, 믿을 수가 있겠어요?」
다시 얼굴에 웃음을 띠운 강미현이 찻잔을 들었다.
「나는 그이를 믿어요, 누구보다도.」
「아니, 아직 못 만나셨습니까? 부인 만난다고 삼십 분쯤 전에 나갔는데.」
직원이 의아한 듯 물었다. 공항의 공중전화 박스 안이다. 박미정은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저, 어디로 가셨는지 혹시 아세요?」
「뉴 오타니 호텔 아십니까? 부인께서 그곳에 묵고 계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죠?」
「아아, 네.」
「언제 한번 뵙게 해달라고 했는데 안형이 계속 미룬단 말입니다.」
직원과의 통화를 마친 박미정은 박스를 나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사카에 온 것은 안인석을 만나 확실한 이야기를 들어야겠다는 생각이었으나 비행기 안에서부터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는 그냥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마음을 굳게 먹고 회사로 전화를 하자 그는 아내를 만나러 갔다는 것이다.
그녀가 뉴 오타니 호텔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쯤 후인 저녁 7시경이었다. 로비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는데다가 안인석이 아직까지 이곳에 있으리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로비 안쪽의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의 하숙집 전화번호는 알고 있었으니 만날 수는 있을 것이었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이곳에 방을 잡아 묵을 작정이었다.
한동안 그러고 있던 박미정은 문득 머리를 들었다. 부인이 이곳에 묵고 있지 않느냐는 직원의 말이 아까부터 자꾸 귓속을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 선 박미정은 프런트로 다가갔다. 접수구의 직원은 웃음 띤 얼굴의 남자였다.
「무얼 도와드릴까요.」
그는 대뜸 영어로 이렇게 물었는데 그것은 호텔맨 직감으로 국적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한국인 투숙객 명단을 알고 싶어서요.」
박미정의 유창한 일본어에 사내의 얼굴이 더욱 환해졌다. 이제 그도 일본어를 쓴다.
「그건 곤란한데요, 손님. 한국인 투숙객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이름을 말씀해 주시면 도와드릴 수 있겠습니다만‥‥‥」
박미정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사내가 데스크에 몸을 바짝 기댔다.
「남잡니까?」
「안인석.」
박미정이 불러주는 영어 스펠링대로 컴퓨터를 두드리고 난 사내가 머리를 저었다.
「유감인데요, 없습니다.」
「한국인 여자는요?」
사내가 컴퓨터를 재빠르게 두드리고 나서 말했다.
「여자 투숙객은 모두 여섯 명 이군요.」
「이름을 불러 주시겠어요? 미안합니다.」
「천만에요. 하경숙, 조미선, 김영희, 이유미, 고순자, 박경미. 이제 됐습니까?」
「이유미라고 하셨나요?」
「네, 927호실 손님입니다.」
이유미와 안인석이 방에 들어선 것은 밤 12시가 다 되었을 때였다. 시내의 클럽에서 위스키 한 병을 나눠 마신 그들은 적당히 취기가 올라 있었다.
코트를 벗어 소파 위에 던져놓은 이유미가 이제는 발을 흔들어 구두를 벗어 던졌다. 눈가가 약간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은 요염했다.
「그래, 이제 어떡하려고 그래?」
소파에 털썩 앉은 그녀가 다리를 꼬며 물었다. 검정색 망사 스타킹 사이로 발가락의 선이 뚜렷이 드러나 있다.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던 안인석이 몸을 돌렸다
「어떡하다니?」
「이혼할 거야?」
안인석은 캔의 뚜껑을 뜯어내고는 벌컥이며 마셨다. 그러는 그를 바라보던 이유미의 얼굴에 천천히 웃음기가 번졌다.
「미안해, 그런 식으로 말해서.」
안인석은 넥타이의 매듭을 풀어 내리면서 그녀의 앞자리에 앉았다.
「우선 아이 문제가 걸려. 아직 아이를 가질 여유가 없어.」
「그럼 아이 지우라고 할 거야?」
「정나미가 떨어졌을 테니 제가 알아서 했으면 좋겠는데.」
이유미가 머리를 돌리고는 코웃음을 쳤다.
「자기 입으로는 말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말이군.」
「아직도 박미정이한테 미련이 있어?」
그러자 안인석이 술기운으로 붉어진 얼굴을 들었다.
「이봐, 솔직히 미정이가 무슨 죄가 있어? 모두 다 내 잘못이지. 나하고 김상철이의 악연 사이로 미정이가 끼어든 죄밖에 없단 말이다.」
「행복하겠어, 그 여자는. 두 남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으니.」
「내가 잘못한 거야. 그리고 책임은 너한테도 있어. 너는 이래라 저래라 할 자격이 없단 말이야.」
「짜증 나.」
단추를 푼 이유미가 재킷을 벗어던지자 브래지어 차림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자기의 우유부단한 성격, 그 책임전가의 버릇. 정말 싫어.」
「곧 결정하겠어.」
자리에서 일어선 안인석이 냉장고 위에 놓인 샘플 위스키의 마개를 뜯더니, 병 채로 들여 마셨다.
「김상철이는 내가 미정이를 내놓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내 가정이 파탄이 나야 속이 시원할 테니까. 그래, 가라고 해.」
몸을 돌린 안인석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넌 어떻게 할 거야?」
「어떡하다니?」
「이대로 살 거냔 말이다. 밥 먹듯이 외박을 하면서 이런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아? 네 남편은 바지저고리야?」
이유미가 피식 웃었다
「내 걱정은 마. 내가 알아서 하니까.」
그때 탁자 위의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그들은 말을 멈추었다.
벽시계는 1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웬 놈의 전화.」
짜증난 얼굴로 안인석이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한국말이다. 그러나 저쪽에서 응답이 없었으므로 안인석은 금방 일본말로 바꾸었다.
「모시 모시.」
그러자 전화가 끊겼다.
김상철이 강미현의 전화를 받은 것은 오후 3시경으로 그가 운송회사의 사무실에 앉아 있을 때였다.
「운송회사가 잘 된다면서요?」
맑은 목소리로 강미현이 말했다.
「바쁜데 전화한 것 아녜요?」
「아니, 괜찮아.」
김상철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운송회사는 이미 차량 대수가 210대 가량이 되었고 근대에서 지원받은 정비요원과 행정직원들을 포함하면 사원수만 해도 700명이 넘는다. 근대의 수송부를 제외하면 근대리아 내에서 유일하게 운송 독점권을 가진 회사였으므로 벌써부터 하물량이 폭주했고 하바로프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에 지사도 설치되어 있었다.
「별일 없지요?」
그녀가 묻자 김상철은 잠시 앞쪽을 바라보았다.
「지난번 폭설이 내릴 때 박미정 씨가 다녀갔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모양인데, 잘 돌아갔는지 모르겠어.」
「‥‥‥‥」
「내 말 듣고 있어?」
「들어요.」
「그 여자한테 상처를 주었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했나요?」
「나한테 찾아왔더군요. 안인석 씨가 오사카로 간 것은 당신이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냐고.」
「그래서 말해주었어요, 사실을.」
김상철이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사실을 말이야?」
그의 목청이 높았던 때문인지 저쪽은 잠시 말을 멈추었지만, 강미현은 계속했다.
「모두 다. 나는 내 남자가 그런 누명을 쓰고 있는 것은 참을 수 없었어요.」
「‥‥‥‥」
「어차피 상처는 받게 되어 있어요. 당신이 어떻게 말하든‥‥하지만 그쪽은 받아들일 자세가 아니더군요. 특히 안인석이란 사람은.」
「‥‥‥‥」
「이제 모두 말해주었으니 그들 일은 그들이 알아서 하겠죠. 우리가 책임질 일은 아니니까.」
「그 여자는 피해자야.」
김상철이 겨우 이렇게 말하자 강미현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피해자는 당신이에요, 멍청이 같으니.」
「당신이 벌판을 헤매는 동안 그들은 행복에 겨워 당신을 잊었어요. 그리고 또 욕심을 부려 그 여자는 두 남자를 모두 가질 셈인가?」
「그만해.」
「갑자기 화가 나서 ‥‥ 그만할게요.」
강미현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시간 내서 만나러 갈게요. 몸조심해요.」
수화기를 내려놓은 김상철은 한동안 벽을 바라보고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문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박기동이 들어섰다. 그는 요즘 근대리아에 와 있는 무역상 중에서 제일 잘 나가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그가 타운 호텔에 얼굴을 보이면 그와 면담을 하려고 무역상들이 줄을 서곤 했다. 허리를 숙여 절을 한 박기동이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사장님, 여섯시에 타운 호텔에서 약속이 있으십니다.」
「알고 있어.」
「5층의 연회실을 빌려 놓았고 식사준비도 시켜 두었습니다.」
무역상과의 상담은 박기둥이 주선을 하는 것이다. 그는 재치가 뛰어났고 경험도 풍부했지만 김상철은 그가 아직도 나쁜 버릇을 고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나파스 클럽의 송길수한테 준비를 하라고 해. 그러면 알아.」
다시 한 번 절을 한 박기동이 소리 없이 방을 나갔다.
타운 호텔에서 김상철과 만나기로 한 사람은 러시아인 주류 도매상 세메노프였다. 그는 김상철과 꽤 오랫동안 거래를 해온 거상으로 구 소련연방 시절에는 내무성 관리였다는 인물이었다.
백발에 풍성한 턱수염이 머리와 같은 색으로 센 육중한 체격의 세메노프에게 산타의 옷을 입히면 위엄 있는 산타클로스로 보일 것이다.
그런 그가 두 명의 경호원을 뒤에 달고 아래층의 커피숍에 들어서자 주위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저녁 6시 5분 전이어서 커피숍에 손님이 모일 시간이었다. 빈자리를 찾아 앉은 세메노프가 팔을 들어 올려 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을 때 슈바 차림의 러시아인 하나가 그에게로 다가갔다.
「세메노프 선생, 저는 김상철 사장이 보낸 사람입니다. 모시러 왔습니다.」
그가 정중히 말하자 세메노프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니,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어디로?」
「밖에 차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선생.」
세메노프가 잠시 망설이듯 옆 좌석에 앉은 경호원들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림 갑시다.」
호텔 앞에는 두 대의 검정색 볼가가 주차되어 있었다. 세메노프와 경호원들이 차에 오르자 볼가는 어두워진 거리를 달려 나갔다.
나파스 클럽의 뒤채에는 타운의 여러 사업체를 관리하는 본부 사무실이 있다. 클럽 뒷문으로 나와 뜰을 사이에 두고 통나무와 벽돌을 섞어 만든 2층집인데 지금도 그렇지만 초창기의 무법시대에 만든 집이다. 마치 인디언의 습격을 막으려는 서부 개척자들의 통나무집처럼 총안이 군데군데 만들어져 있고 벽도 두껍다.
저녁 7시가 되자 주위는 짙은 어둠에 덮였다. 앞쪽의 클럽에서 흘러나온 소음이 뒤채까지 희미하게 전해져 오고 있었다. 검정색 볼가 두 대가 현관 앞에 나란히 세워진 뒤채는 환하게 불을 밝혔으나 깊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지붕 위의 벽돌로 만든 굴뚝 옆이다. 모피 깔개를 지붕 위에 펴놓고 아래쪽의 뜰을 내려다보던 곽동기가 옆의 동료에게 머리를 돌렸다.
「몇 시냐?」
「일곱 시 십 분.」
명령이 있어야 내려갈 것이므로 시간을 물어보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었지만 그냥 해본 말이다.
그는 손에 쥔 기관총을 조심스럽게 지붕턱 위에 걸쳐놓았다.
뒤채는 철통같이 경비되고 있었다. 지붕 위에 올라가 있는 인원만도 8명이었고 사무실과 앞쪽 클럽의 빈방에서 대기하고 있는 인원이 30명이 넘는다.
「빌어먹을, 무지 춥구만.」
곽동기가 다시 중얼거렸다. 이런 식의 경비를 한두 번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은 지휘하는 송길수가 긴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조금 색다른 상황인 모양이었다. 입맛을 다신 곽동기가 무심코 머리를 들었을 때 그는 옆쪽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그쪽 가게의 네온사인이 떨어져 나갔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다. 그가 입을 쩍 벌렸을 때 불빛은 순식간에 다가왔다.
「아앗!」
그 순간 빛살은 일직선으로 날아와 자신이 엎드린 바로 아래쪽 2층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밤하늘을 울리는 폭음과 함께 곽동기는 허공으로 솟아오르며 의식을 잃었다.
폭음은 세 번이 들린 다음 잠잠해졌으나 방 안의 사내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만큼 폭음이 컸기 때문이다.
「어디야?」
누군가가 소리치듯 물었으나 대답하는 사람은 없다 그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사내들이 다투어 전화기를 집으려다 결국 이한이 수화기를 귀에 댔다.
「여보세요.」
「여기는 나파스요.」
누구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상대방은 악을 쓰듯 소리치고 있었다.
「뒤채에 로켓탄을 맞았습니다. 뒤채가 박살이 났어요!」
「안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어?」
놀란 이한의 목소리도 덩달아 높아졌다. 사내가 숨을 몰아쉬며 더듬거렸다.
「모, 모릅니다. 아마‥‥‥」
수화기를 내던진 이한은 복도를 달려 응접실로 들어섰다. 세메노프와 마주앉아 있던 김상철이 이한을 바라보았다.
「형님, 나파스가‥‥‥」
「뒤채 말이냐?」
「예, 로켓탄을 맞았습니다.」
튕기는 듯한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한 세메노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들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안에 누가 있었어?」
「송길수가‥‥‥」
그때 탁자 위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김상철이 턱으로 받으라는 시늉을 했다. 이한이 전화를 받았다. 김상철이 머리를 돌려 세메노프를 바라보았다.
「세메노프 씨. 이제 내가 당신을 두 번이나 옮겨 다니게 한 이유를 알겠소?」
김상철의 말에 세메노프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세메노프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리 없었던 것이다.
「나파스가 로켓포 공격을 받았소. 물론 놈들의 목표는 나였소.」
「누굽니까?」
세메노프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김상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이한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형님, 장 누님의 전화입니다.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답니다. 나파스에서는 지금 사상자 수습을 하고 있답니다.」
이한도 누구의 공격인지는 모른다. 김상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김상철의 굳게 쥔 두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대가 머문자리 클릭☆─━??
첫댓글 삼합회인가?
누가 감히 김상철의 콧 털을 뽑아?
전쟁은 끝이 없네요
즐감합니다 오늘은 그만읽어야제
즐감하고 갑니다.
즐
즐감
잘 읽고갑니다~~
치고박고..
잘~보고 갑니다~~~^^
즐감중임다
즐감요
즐독요